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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구국의 쿠데타?(랴오둥 정벌, 위화도 회군)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구국의 쿠데타?(랴오둥 정벌, 위화도 회군)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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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국의 쿠데타?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와 친원파가 장악하고 있는 고려, 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두 나라의 관계는 결국 영토 분쟁으로 번진다. 갑자기 웬 영토 문제일까? 사실 여기에는 가깝게는 100, 멀게는 고려의 개국 초기부터 수백 년간에 달하는 역사가 관련되어 있다. 우선 명나라는 원나라를 정복한 만큼 원나라의 옛 영토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건 정당한 주장이니까 고려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원나라의 그 옛 영토 중에 고려의 영토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동녕부(東寧府)에 속했던 땅이 쟁점 지역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몽골 지배가 시작된 이래 함경도와 평안도는 원나라의 두 지배기관에 속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전까지 고려의 영토였던 것을 원나라가 강탈한 결과다. 그랬기에 공민왕(恭愍王)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를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고려의 생각일 뿐이고 명나라에서 보면 또 달라진다. 어쨌거나 원나라 시절에 한반도 북부는 원나라의 영토였고 명나라는 원나라를 대체한 왕조이므로 그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게다가 문제가 이렇게 복잡해진 이유는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 그 지역은 고려의 영토라고도 할 수 없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한반도 북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확실히 영토화하지 못했으며, 중기에는 윤관(尹瓘)이 개척한 9성을 여진에게 반환할 정도로 그 지역에 대한 소유 의식이 약했다. 급기야 몽골 지배기에는 아예 그 지역을 포기해 버렸다가까이 보면 원나라가 이 지역을 영토화한 탓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만, 조금 더 멀리 보면 고려 초기에 여러 차례 정벌과 영토 확장이 시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확고히 영토화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 멀리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이 영토적으로 미완성인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7세기 이후 신라의 영토가 대동강 이남으로 제한되면서 한반도 북부는 늘소유권이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라 중심으로만 생각한다면 신라가 건국된 이래 고려 말까지 한반도 왕조는 1400년 동안 꾸준히 영토 확장에 성공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신라가 탄생할 무렵 지금의 경상북도에 국한되어 있던 영토가 고려 말에는 압록강 유역에까지 이르렀으니까. 결국 역사의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왕건의 유시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과정이다(이 문제는 오늘날 독도 소유권 분쟁과 닮은 데가 있다. 식민지 시대를 겪지 않았다면 그런 영토 문제가 생겨났을까?).

 

그러나 고려 정부도 못난 조상만 탓할 자격은 없다. 몽골이 물러가고 난 뒤에도 친원파가 득세하는 사태가 없었더라면 명나라도 굳이 그 문제를 꼬투리로 삼진 않았을 테니까. 고려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명나라는 드디어 그 영토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킨다(물론 땅 자체에 대한 욕심보다 고려 정부를 제압하겠다는 의도다), 1387년에 철령(강원도 북부의 고개) 이북 땅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해온 것이다. 쉽게 말하면 원나라가 관할하던 한반도 북부를 명나라에 반환하라는 것인데, 노환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이인임(李仁任)에 뒤이어 고려의 권좌에 있던 최영은 당연히 결사 반대다. 우리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교훈을 남긴 그였으나 역시 영토 문제는 황금과 달랐을까? 아니, 그보다는 아마 수구적인 친원 성향을 지닌 데다 홍건적이라면 이를 갈던 그였기에 명나라의 고압적인 요구에 반발했을 것이다. 명나라는 바로 홍건적 두목인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나라가 아닌가? 이후 명나라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통일 왕조가 되지만 당시에는 신흥국에 불과했으니까 최영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최영이 볼 때 근본도 없는 홍건적 두목이 세운 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낸 것만 해도 용납할 수 없는데 더군다나 고려에 압력까지 가하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다(실제로 주원장은 중국 역대 제국의 건국자들 가운데 가장 한미한 신분의 인물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도 최소한 하급 무장 정도는 되었으니까). 그가 내세운 대응책은 놀랍게도 한반도 북부를 확실히 영토화하는 것을 넘어 내친 김에 아예 랴오둥까지 정벌하자는, 과감하기 짝이 없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인 그 자신이 직접 원정에 나설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는 적임자로 다름아닌 이성계를 낙점한다. 최영 자신은 최고 사령관인 8도도통사를 맡아 우왕과 함께 서경에 머물면서 원정을 총지휘하기로 하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조민수(曺敏修, ?~1390)를 좌군도통사로 임명한 것이다.

 

 

신이 된 장군 왜구 토벌로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이성계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탓으로 최영은 후대에까지 숱한 설화와 무속 신앙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림은 무속에서 신으로 추앙하는 최영장군신의 모습이다. 최영이 높은 인기를 누린 것은 아마 이성계의 쿠데타가 민간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터이다.

 

 

졸지에 해결사로 나서게 된 이성계는 고민한다. 마음으로야 그도 자신의 고향인 화령(영흥)이 있는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에게 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랴오둥을 정벌하라는 최영의 강경책은 지나치다 못해 황당할 정도다. 그래서 그는 그 전략이 무모하다는 점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약소국이 상대국을 치는 격이고, 그 틈을 타서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으며, 농번기에다 장마철인 여름에 군대를 움직이면 농사를 망칠 뿐 아니라 전염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게 그의 논지다. 그러나 최영의 의지는 단호했다(아마 최영은 무리한 랴오둥 정벌을 계기로 라이벌 이성계를 제거할 의도를 품었을 테고 이성계 역시 그 점을 알았기에 반박했을 것이다). 일단 상관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북진 길에 올랐으나 이성계의 심경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13885월 압록강 하류의 작은 섬 위화도에 이른 이성계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이라고 허풍을 쳤지만 실은 전 병력을 합쳐도 5만에 불과한 데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도 이미 도망병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때마침 큰 비가 내리고 있으니 더 이상 진군하기도 어려운 처지다. 그런데도 서경에 있는 최영과 우왕은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독촉과 채근만 거듭할 뿐이다. 그를 사지에 몰아넣으려는 최영의 속셈은 불을 보듯 뻔하다. 과연 최영은 랴오둥 정벌에 뜻이 있는 걸까, 아니면 정적의 제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걸까?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결정한다. 이것이 조선 건국의 발단이 된 위화도 회군이다. 물론 당시까지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구국의 결단이겠으나 최영이 보기에는 당연히 반란이다. 랴오둥 정벌군이 말머리를 돌렸다는 소식을 들은 최영은 급히 개경으로 내려가서 방어 태세를 갖춘다. 사기가 떨어져 진군할 수 없다던 이성계의 보고는 아마 거짓이었던 모양이다. 갈 때는 느렸어도 돌아오는 속도는 무척 빨랐으니까. 순식간에 개경에 도착한 반란군은 최영의 수비군을 손쉽게 무찌르고 개경을 장악한다. 반란군이 정부군으로 바뀌자 이성계가 맨먼저 한 일은 최영을 유배시킨 것이었다최영은 자신의 고향인 고봉(지금의 고양)에 유배되었다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합포로 옮겨져 목숨은 건지는 듯했으나 곧 개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비록 시대착오적이고 수구적인 대세관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청렴하고 올곧은 삶을 살았기에 그는 오늘날 이성계보다 인기있는 위인이 되었다(이성계도 조선을 세운 뒤 1396년에 그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넋을 기렸다). 지금도 매년 단오날에는 부산의 사당에서 최영 장군제가 열리며, 무속인들은 그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기도 한다. 고양에 있는 그의 묘는 풀이 자라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린다는데, 그 이유는 청렴함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품은 한 때문일까?.

 

다음 수순으로 그는 우왕을 폐위시켰는데, 후사에 관해서는 조민수와 의견이 엇갈렸다. 이성계는 다른 왕족 중에서 발탁하려 했으나 조민수와 이색(李穡)은 우왕의 아들을 주장한 것이다. 어차피 왕권이 유명무실해진 마당에 왕위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일까? 결국 후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창왕(昌王, 재위 1388~89)이다.

 

 

역사를 결정한 섬 위화도는 압록강 하구의 작은 섬인데, 현재 북한의 영토다. 강을 마저 건너면 랴오둥이고 말머리를 돌려 강을 되건너면 조선이었으니 이성계가 고민하기에는 적절한 장소다. 섬의 면적으로 보면 아마 이성계와 조민수는 전군을 강 뒤편에 둔 채 수뇌부만 이 섬으로 와서 대책을 숙의했을 것이다. 위 지도에 붉게 표시된 부분이 위화도이고, 아래 사진은 오늘날 위화도의 모습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

수구와 진보

구국의 쿠데타?

개혁이냐, 건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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