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이옥과 문체반정의 결과
정조의 이런 공세적 조처에 대해 반발이 없을 리가 없다.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의 상소가 올려졌다. 소론 출신인 그는 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남인의 서학까지 문제의 전면에 내세웠다. 즉, 그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과 이가환(李家煥)을 겨냥하면서, 남인들의 학문 또한 대부분 이단사설이고 문장 역시 패사소품을 숭상할 뿐이라고 역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뜻밖에도(혹시나 했더니 이번에도 역시!) 정조는 이가환이 ‘초아의 신세’로 불쌍하게 자라서 그런 거라고 감싸주면서 이동직의 상소를 기각했다. 서학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계속 패사소품에 묶어놓음으로써 노론 벌열층을 길들이고, 그에 기반하여 남인과 노론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조의 정치적 포석이었던 것이다.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등 소품의 명인들도 당연히 이 그물망에 걸려들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서얼’이다. 다시 말해 권부(權府)의 수뇌들이 아닌 것이다.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는 정도로 그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정조시대의 첨예한 쟁점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는 ‘프리즘’이라 할 만하다.
이 사건의 가장 큰 희생양은 뭐니뭐니해도 이옥(李鈺)이다(이옥에 대해서는 채운,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를 참조할 것), 이옥은 사대부에 속하긴 하나, 당파도 정확히 분류되지 않을 정도로 가문이 미미했다. 당연히 과거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비빌 언덕이 없는 처지였다. 벌을 받은 이후에도 거듭 ‘트라이’를 해보았지만, 계속 문체가 불온하다고 찍힌다. 성적은 우수하나 ‘불량끼’가 농후하다는 것이다. 기어이 충군(充軍), 즉 군복무에 처해지는 벌을 받아 유배를 당하기도 하는 등 수난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제 버릇 남 못 줘서’ 영영 과거에 입문하지 못한다.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인해 그야말로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는 반성문을 쓰거나 문체적 전향(?)을 표명한 덕분에, 대부분 영달(榮達)의 코스를 밟는다. 정조가 ’개전(改悛)의 정‘이 뚜렷한 인물들에게는 확실하게 뒤를 밀어주는 노회함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변절자들이 한술 더 뜬다고 문체반정 때 요주의 대상이었던 인물들이 이후에는 소품이나 소설에 대해 맹공을 퍼붓는 장면이 속출하기도 한다. 씁쓸하기 짝이 없다.
이렇듯 문체반정이 피 튀기는 정쟁은 아니었으나, 그 파장은 가혹했다. 정조시대 이후 새로운 문체적 실험이 완전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지성사적 측면에선 ‘암흑기’라 해도 좋을 정도로 황랑하기 그지없다. 피를 흘리지도, 경제적 제재를 가하지도 않았건만 지식인들은 자기검열을 통해 스스로를 길들여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 연암은 이 사건의 어디쯤에 있었던가? 그는 당시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지도 않았고, 이후에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도 핵심배후로 지목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 미스터리에 접근하기 전에 체크해야 할 사항 두서너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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