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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 1장 사건 스케치, 서학과 명청문집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 1장 사건 스케치, 서학과 명청문집

건방진방랑자 2021. 7. 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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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92년 대체 무슨 일이?

 

 

1장 사건 스케치

 

 

서학과 명청문집

 

 

17921019일 정조는 동지정사(冬至正使) 박종악과 대사성(大司成) 김방행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중국 서적 금지령을 강화하는 정책을 공표하기 위해서다. 패관잡기(稗官雜記)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까지 모두 수입금지 조처가 내려진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서곡이 울린 것이다.

 

패관잡기란 시중에 떠도는 까끄라기 같은 글이란 뜻으로, 소설, 소품, 기타 잡다한 에세이류가 거기에 해당된다.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식하는 글들에 해당되는데, 당시에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럼 패관잡기는 그렇다치고, 경전과 역사서는 무슨 죄가 있다고? 그건 사대부들이 일생 연마해야 할 지식의 보고(寶庫) 아닌가? 그 명분이 참 희한하다. 중국판은 종이가 얇고 글씨가 작아 누워서 보기에 편하기 때문이라는 것, 성인의 말씀과 역사에 대한 기념비적 기록들을 감히 누워서 보다니! 말하자면 이 경우에 내용이 아니라, ‘북 스타일이 문제가 된 것이다. 두 케이스를 종합하면 정조의 문장관이 한눈에 집약된다. ‘클래식에 속하는 책을 엄숙한 자세로 읽으라, 그러다 보면 저절로 그런 스타일의 글이 써질 것이라는 것. 독서와 문체란 이렇듯 신체의 규율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정조만이 아니라, 중세적 지식체계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전제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 정조가 꽤나 과격하게 보이는 정책을 공표한 이유는 그러한 배치에 균열이 일어났다는 걸 뜻하는 셈인가?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정조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명청(明淸) 이래의 문장은 험괴(險怪)하고 첨산(尖酸)함이 많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명청인의 문집 보기를 좋아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재미가 있는데도 내가 그 재미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홍재전서161, 일득록1, 문학1

明淸以來, 文章多險怪尖酸, 予不欲觀. 今人好看明淸人文集, 不知何所味也. 豈亦有味, 而予不能味之耶?

 

 

1784년의 기록이다. 이 단순한 언급에는 절대 단순하지 않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명청의 문집은 험괴하고 첨산하다. 근데 그런 문집들이 유행하고 있다. 왜 그런 걸 재미있게 읽는 걸까? 이건 사실 단순한 지시형 의문문이 아니다. ‘지존의 위치에 있는 이가 재미있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그 안에 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명령어. 하지만 혹 내가 재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일말의 의구심을 남겨둔 건 아직 공권력 차원의 검열까지는 유보하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이후 정조와 명청문집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는데, 여기에 다소 엉뚱해 보이는 사건이 개입하면서 균형이 깨지게 된다. 1785년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이벽 등 남인의 자제들이 중인(中人)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토론하고 의식을 거행하다가 형조의 금리(禁吏)에게 적발된 사건이 일어난다. 이름하여 추조(형조) 적발 사건’, 서학이 학문이 아니라, 명백히 신앙으로 수용되었음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정조는 이 사건을 축소하여 덮어주는 대신 중국 서적을 수입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중국으로부터 서적이 유입되면서 사교가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주교에 대한 화풀이를 엉뚱하게 명청문집에다 하다니. 사고는 남인(南人)이 쳤는데 불똥은 노론(老論) 문장가들에게 튄 셈이다.

 

사실 명청문집의 유행과 서학의 유포는 정조시대의 두 가지 뇌관이었다. 전자가 주로 연암그룹 및 노론 경화사족과 관련된 반면, 후자는 다산이 속한 남인 경화사족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정조는 일관되게 후자를 비호하는 한편, 전자에 대해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민반응을 보였다.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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