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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열하일기의 길을 가다(2003년 봄) - 잡초는 범람한다!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열하일기의 길을 가다(2003년 봄) - 잡초는 범람한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1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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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범람한다!

 

 

2003414일 오후, 여행의 첫 기착지 심양에 도착했다. 애초엔 배를 타고 단동으로 갈 작정이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심양이 출발지가 되었던 것이다. 일행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셋, 연암이 장복이와 창대를 동반했듯, 나 또한 YJ, 두 명의 후배와 함께 했다. 연암이 유머의 천재라면, 장복이와 창대는 연암조차 얼어붙게 할 정도의 덤앤더머였다. 그럼 우리 팀은? ‘갈갈이 패밀리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Y, 중국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통하고, 여성들만 보면 일단 말을 걸고본다. J, 중국어는 물론 모국어인 한국어도 약간 더듬거린다. 여성들 앞에선 더더욱 얼어붙는다. 공항에는 밤열차를 타고 달려온 L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 연구실(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선 그를 인민의 입혹은 통역기계라고 부른다. 단지 입만 산 게 아니라, 중국의 흐름을 예리하게 파악하는 에다 폭넓은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까지 두루 갖춘 탁월한 중국통이다.

 

세계적인 오염도시답게 심양의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스모그려니 하고 공항을 나서는데, 차고 거센 황토바람이 몸을 덮쳐온다. 어린 시절, 태풍 사라호가 한반도를 덮쳤을 때, 강원도 시골 산자락 밑에서 엄마품에 얼굴을 묻었던 기억이 흑백필름처럼 휙 스쳐지나간다. 아뿔사! 우리는 4월 황사가 용트림을 하는 계절에 그 진원지에 들어선 것이다. 겁대가리 없이.

 

영웅들의 싸움터라고 했던 연암의 말 때문일까. 나는 바람의 회오리 속에서 전사들의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그들이 이 땅에 도래했을 때도 이런 흙먼지가 천지에 요동쳤으리라.

 

17세기 초 만주벌판에 누르하치라는 위대한 추장이 출현했다. 잡초처럼 떠돌던 와호장룡들이 그의 카리스마 앞에서 하나로 결집된다. 후금(後金;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후예라는 의미)에서 ()’으로 이어지는 건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 유목민의 국가라니? 형용모순! 하기야 그건 국가라기보다 일종의 전쟁기계였다. 요양, 무순, 심양 등지에는 수천 명의 청군이 십만 이상의 명나라 정예부대를 순식간에 박살 낸 전쟁서사가 수두룩하다.

 

그래서인지 심양고궁은 궁이라기보다 차라리 야전부대의 막사처럼 보인다. 베이징의 자금성이 황제라는 초월적 기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나아가는 배치를 갖추고 있다면, 이곳은 넓은 뜰에 팔기군의 전각들이 사방에 포진하면서 한결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낱 오랑캐들이 어떻게 중화제국의 거대한 뿌리를 단숨에 전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연암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탄식하게 했던 물음이다. 고궁을 거닐며 L과 나는 연암의 물음을 슬쩍 비튼다.

 

이라크전이 끝나면, 세계는 바야흐로 미국자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겠지?”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고 한다면, 저항 또한 본격화되겠죠. 반전시위가 그랬듯이, 앞으로 저항의 전지구화는 점차 가속화될 거예요.”

맞아. 제국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탈영토화하는 운동들의 다양한 네트워크가 필요해, 국가, 민족, 자본의 경계를 넘는 강렬하고 유연한 제국에 맞서기 위해 또 다른 제국을 구축하는 투쟁방식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봐.”

노마디즘의 정치를 꿈꾸는 건가요?”

물론, 실제로 능동적인 접속과 변이가 가능한 꼬뮤니티들이 다양하게 구성되는 조짐들이 보여. 그것들은 조직적 중심이나 위계가 아니라, 오직 네트워크와 활동성, 다시 말해 강렬도(intensity)만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아주 새로운 실험이 될거야.”

 

공허하다고? 맞다. 하지만, 인간만사 허망하지 않은 것이 있다던가. 제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그것일 터. 모든 고정된 것을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는, 저주로서의 무상성! 그 무상함에 기꺼이 몸을 던질 수만 있다면, 노마디즘은 제국에 대한 치명적 전략이 될 수 있으리라. 누르하치의 전쟁기계들이 그러했듯이.

 

고궁을 나서며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이런 노래를 흥얼거린다. “꽃은 아름답고, 양배추는 유용하며, 양귀비는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잡초는 범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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