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다른 접근 방식
[살림]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라는 표현으로 남녀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다양한 경로의 존재를 강조하고자 함이다. 사회적인 문제, 정치경제적인 문제에서도 들 만한 예가 많지만, 그런 부분들은 음양이니 체질이니 하는 부분들이 어느 정도 이야기된 뒤에 하기로 하자. 너무 복잡한 문제를 다루려면 주제에서 벗어나는 여러 논란이 뒤따르게 된다. 비교적 논란이 적을 만한 것으로, 교육 문제 쪽에서 예를 들도록 하자.
여자가 남자보다 수학과 과학에 약하다고 한다. 여러 통계자료들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남자아이에게는 수학과 과학을 중시하는 교육을 하고 여자아이에게는 그런 교육을 하지 않아서 빚어진 결과라고 말한다. 특히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의 차이가 은연중에 아이의 심리에 영향을 미쳐서 그런 결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남녀 아이를 같이 키워본 부부, 특히 여권운동에 눈을 떠서 남녀 차별의식을 없애려고 신경을 쓰면서 키워본 부부들도 상당수가 이렇게 말한다. “선천적인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같이 교육하려 해도 받아들이는 것이 틀려서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라고. 사실은 이렇다. 차이는 있다. 서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열의 차이는 아니다. 문제는 현재의 수학과 과학 교육이 남자에게 유리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너무 일찍 기호를 배운다. 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 심지어는 3,4세의 아이가 공책 한쪽 가득히 적혀 있는 더하기 빼기를 연습한다. ‘2+3=?’이라는 문제를 보면 아이는 자신 있게 5라고 적는다. 그럼 그 아이는 ‘2+3=5’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일까? ‘3+5=8’임을 증명하라는 문제가 일본의 유명한 수학과 대학원 입학 시험에 나온 적이 있다. 기호의 사용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아이가 아는 것은 “오리처럼 생긴 기호와 귀처럼 생긴 기호 사이에 십자가 모양이 있을 때, 그 뒤에 작대기를 하나 긋고 그 밑에 낚싯바늘을 그리면 엄마에게 야단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수학은 양(量)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 시작된다. 양에 관한 감각이 충분히 길러졌을 때, 이의 효율적인 표현을 위해 기호가 도입된다. 양적인 문제 자체를 다루는 능력은 여성이 남성보다 강하다. 그러나 기호화 능력은 남성이 강하다. 기호화는 근본적으로 풍부한 소통을 희생시키더라도 효율적인 소통을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소통 능력은 감정의 소통이 기본이고, 풍부한 소통을 지향한다. 남자의 소통 능력은 떼를 지어 들소나 곰을 잡으러 나간 상태에서 길러진 것이다. 상황 정보에 대한 빠르고 정확한 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기호에는 감정이 없고 전달하고자 하는 사실만이 있다. 남성적인 소통방식이다.
교육방식을 잘 연구해보면, 수학을 양(量)의 문제 중심으로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 기본은 양을 다루는 것이지, 기호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감각이 길러졌을 때 비로소 기호를 도입하는 것이 원칙이다. “네가 느끼는 그 감각을 이런 기호로 표시한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방식은 아이가 채 느낌을 가지기도 전에 기호를 먼저 들이댄다. 기호화 능력이 강한 아이는 그런대로 받아들이지만, 기호화 능력이 약한 아이는 수학에 두려움을 느끼고 싫증을 내게 된다.
이런 잘못된 교육방식이 여자가 수학에 약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기호가 배제된 수학, 말로 설명하는 수학을 개발하고 기호의 도입을 늦춰주면, 여성 중에 남성보다 뛰어난 수학자가 나올 수 있다. 양적인 감각이 탁월한 여성이 남성이 시도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한 감각을 느끼고 이의 기호화를 시도할 때, 남성이 접근 못했던 수학의 새로운 영역이 열릴 것이다. 과학 역시 마찬가지다. 생활과 관련된 과학을 추구하고 단일 원리로 묶어가는 시기를 늦추어서, 여성에게 적합한 교육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 “수학은 이래야 한다, 과학은 이래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하다.
마찬가지로 정치는, 경제는 운운하는 대부분의 주장이 {죽임}의 문화, 음(陰)을 배제한 양(陽) 일변도의 문화임을 인정해야 한다. 기존에 익숙한 방식만이 절대라는 관념을 깨야 한다. 기존의 관념과 다른 접근 방식을 대할 때, 두 가지 방식의 우열을 매기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각각의 다른 방식이 각각 달리 적용될 영역이 있는 것이다. 이 “영역이 달리 있다”는 표현이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영역은 서로 배제되는 참여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해결책으로 가는 통로가 다양하고, 같은 공간으로 모일 수 있는 입구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 다양한 통로들을 우열이라는 단일 잣대에 대고 줄 세우기하지 말라”는 것이 사상심학(四象心學)을 대하기 전에 미리 준비되어야 할 마음 자세이다.
남녀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때가 되었는데, 음/양에 대해서 좀 아는 분들이 의아해할 부분이 있어서 조금 덧붙여야 될 것 같다. 보통은 양에 삶을, 음에 죽음을 배당한다. 계절로 보아도 봄과 여름이 양이고, 가을과 겨울이 음이다. 『주역』의 괘를 해석할 때도 양은 일이 풀려나가는 것을, 음은 일이 막히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반대로 배당했다. 음/여자 쪽에 {살림}의 문화를 배당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이 글에서는 ‘삶’의 문화, ‘죽음’의 문화라고 하지 않고, ‘살림’의 문화, ‘죽임’의 문화라고 했다. 즉 자신의 ‘삶’을 강조하면 상대를 죽이게 되고, 다른 것을 살리려면 자신이 적당히 죽을 수 있어야 되는 법이다. 그래서 ‘양’ 일변도의 문화가 결국 ‘죽임’의 문화가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위의 내용은 “그러니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갈라서 서로 다른 교재로 가르쳐야 한다”와는 좀 차이가 있다. 여자 중에도 기호화 능력이 뛰어난 아이는 남자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경우도 많다. 위의 내용은 평균적인 경우를 기준으로 한 이야기일 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장기적으로 교육방법을 다양화하고, 상담선생님이 아이에게 적합한 반을 배분하는 방식이 가장 좋다고 본다. 고학년에서는 아이가 직접 선택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가능한 것은 학교 교육의 부족한 점을 부모가 보충하는 방식인데, 이건 시중의 사교육 교재가 학교 교육 못지않게 엉터리가 많고, 그렇다고 부모가 직접 교재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라, 부모가 상당한 식견이 있기 전에는 별 도움이 못 된다. 일단 다양한 교육방법이 제공될 때까지는 현재의 공교육 교재를 좀 더 균형 잡힌 쪽으로 바꾸는 편이 최선이 아닐는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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