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사심(邪心)과 박통(博通)
1. 교심(驕心)과 주책(籌策) / 태음인의 태양 기운
직관과 감각의 차이
그냥 ‘사심(邪心)’ ‘태행(怠行)’ ‘박통(博通)’ ‘독행(獨行)’ 하니까 좀 딱딱해 보이지만, 각 체질별로 이야기하게 되면 그렇게 딱딱한 이야기는 아니다. 계속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순서로 다루었으니, 이번에도 그 순서대로 하자. 즉 태양 기운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그러니까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태음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태양인을 설명할 때, ‘태양인의 귀가 천시(天時)에 밝아 사람들이 서로 사기 치는 것을 잘 듣는 것이 태양인의 애성(哀性)의 근본이다’라고 했다. 또 ‘태양인은 직관이 강하다’는 말과, ‘양인(陽人)은 부정적 요소를 줄이는 것에, 음인은 긍정적 요소를 늘리는 것에 각각 더 관심을 둔다’는 말도 했다. 이 말들을 함께 생각해보면, 결국 태양인의 직관은 천시(天時)에 맞지 않는 부정적인 내용에 대한 직관적인 파악이다.
따라서 태양인의 직관이 가장 강한 영역은 틀린 점의 배제다. 물론 틀린 점을 다 배제하고 나면 옳은 것만 남을 것이다. 그래서 직관을 ‘옳은 것을 찾아내는 직관’으로 국한시켜도, 역시 태양인이 다른 체질보다 강하다. 하지만 배제하고 남은 것을 추리는 방식으로 건지는 것은 아무래도 좀 앙상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것을 쳐나가는 중에 살려야 할 것들도 딸려서 버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인의 직관으로 찾아낸 옳은 것이란 핵심 몇 마디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몇 마디가 보편의 토대가 될 만하기에 가치는 있다. 부분에 치우쳐 틀린 것들은 다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반면 태음인의 세상에 대한 기본 접근 자세는, 주변에서 부딪히는 구체적 사례를 중심으로 긍정적인 면을 하나씩 추려 모으는 방식이다. 태음인이 직관에 약해지기 쉬운 이유가 이와 관련된다. 주관/객관을 설명할 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정답이 있는 문제의 경우 ‘정답은 하나지만 옳지 않은 답은 무수히 많다’라고, 즉 잘못된 답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직관으로 느끼기가 쉽지만 정답을 직관으로 바로 찍어내는 것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맞는 것을 쌓아가는 방식은 직관으로는 접근하기가 어렵다.
태음인이 태양인을 볼 때 접근 방법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겉만 보면, 몇 마디 안 되는 앙상한 논리에 쓸데없이 힘을 주어가며 말하는 모습만 눈에 보인다. 그런데 그 말이 그럴듯하고 화려해 보인다. ‘좋아, 까짓것 누군 못해!’라며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몇 가지 구체적 경험을 개념화시키고 화려한 말로 포장한다. 그래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서 대단한 명제처럼 내뱉는다. 이것이 바로 태음인의 사심(邪心)인 교심(驕心)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한 마디로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태양인은 다른 체질보다 훨씬 드물다고 한다. 그러니 태양인을 흉내 내다 잘못될 일은 상당히 드물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겠는데, 그렇지가 않다. 태양인은 드물어도 태양인이 남긴 말들은 도처에 흔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설명하는 기본 명제로 쓸 만하고, 게다가 멋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도 말은 남게 된다. 차라리 사람을 직접 접하고 느끼면 그래도 낫다. 그런 말들이 나오는 과정을 옆에서 보고 느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느낌조차 없이 태양인이 남긴 말만 접하고,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이해 못한 채 ‘나도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라고 나서는 바로 그 순간 교심(驕心)의 함정이 발밑에서 입을 쩍 벌리게 된다.
벼리와 빙산
일단 바른 길은 무엇인가를 먼저 검토해보고, 바른 길과 그른 길의 차이를 다시 비교해보자. 태음적인 장점을 고수하는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어떤가 보도록 하자.
자신을 믿는 태음인은,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일단 접수하고 쌓아둔다. ‘이것이 천시(天時)가 아닐까?’라는 정도에 놓아두고, 천시(天時)인지 아닌지 결론은 유보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구체적인 사실에 부딪힐 때 그것이 자기가 듣고 기억해 두었던 내용과 관련된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 그걸 다시 꺼내어서 비교해본다. 그렇게 비교하다 보면, ‘아하, 그때 그 부분이 내가 접한 사실의 이런 측면을 이야기한 것이었구나’라고 정리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 사실들의 개념적 측면, 다른 사실과의 연관성 등이 하나씩 눈에 뜨이다 보면, 그런 것들이 모여 결국은 천시(天時)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지독하게 멀고 험한 길이다. 하지만 이런 느린 걸음으로 천시(天時)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다면 ‘절세(絶世)’라는 수식어를 붙여줄 만한 수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태음인이 그렇게 천시(天時)에 도달한 것을 ‘절세의 주책(籌策)’이라 표현한다.
천시(天時)를 읽는 태양인의 직관은 벼리에 비교할 만하다. 벼리라는 것은 그 줄 하나만 잡고 끌어당기면 그물 전체를 끌어당길 수 있는 부분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이다. 정확한 핵심, 요지를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벼리를 파악하면 한 부분으로 다 잡아챌 수 있다. 하지만 그물을 아예 엉뚱한 곳에 던졌을 때는 막상 건져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물은 무엇을 잡기 위한 도구일 뿐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반면 태음인의 주책(籌策)이라는 것은 그 안이 꽉 차 있는 것이다. 빙산이 물위로 나와 있는 부분은 비록 적으나 물 밑에 거대한 얼음덩이가 숨어 있듯이, 주책(籌策)의 수준에 도달한 태음인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태산 같다. 수많은 사례를 검토해서 하나의 특수성을 찾아내고, 수많은 특수성을 비교해서 비로소 찾아낸 원리이다. 따라서 겉으로는 비록 한 마디일지언정 그 원리가 여기에는 어떻게 적용되고 저기에는 어떻게 적용되고 등등, 참으로 넓고 깊게 이어진다. 그래서 가히 ‘절세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것이다.
주책(籌策)
뭐 용어야 개념을 정확히 알면 되는 것이지 글자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만, 주책(籌策)이라는 글자 자체를 좀 설명해야겠다. 주책(籌策)이란 단어가 좀 낯선 단어라서. 여기에 나온 주책(籌策)은 우리가 흔히 ‘주책이 있다’ ‘주책이 없다’라고 할 때 쓰는 주책과는 다른 단어이다. 그 주책은 순 우리말이라는 주장도 있고, 한자어 ‘주착(主着)’에서 나온 말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그 주책은 ‘일정한 생각이나 줏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오는 주책(籌策)은 ‘이리저리 따진 끝에 생각한 꾀’라는 뜻이다.
책(策)이라는 글자는 별로 어려운 글자가 아니니 설명할 것이 없고, 주(籌)는 계산한다, 따진다는 뜻이다. 우리말에 ‘헤아린다’는 말이 있다. 단순히 세어본다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이치에 맞는지 짚어본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 말과 아주 비슷하다. 센다는 뜻도 되고, 따져본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이 주(籌) 자가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닌데, 그 중 그나마 많이 쓰이는 것이 ‘주비위(籌備委)’라는 단어다. 정당이나 사회단체 같은 것을 만들 때 미리 모여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이다. 어려운 한자 단어 잘 모르는 신입 기자들이 종종 ‘준비위’라고 썼다가 곤욕을 치르게 만드는 바로 그 단어다. ‘준비’라고 써도 될 것을 굳이 ‘주비’라고 쓰는 것은 ‘우리는 잘 헤아려보고, 곰곰이 생각해가면서 준비한다’는 일종의 자화자찬이 좀 들어간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어쨌든 주책(籌策)이라는 것은 태음적으로 일일이 따져보고 구체성을 하나하나 모아가는 방식으로 쓸 만한 꾀에 도달한 것을 의미하다. 글자 자체에 태음적인 접근방법이 들어 있다.
‘절세의’라는 수식어가 붙으니까 주책(籌策)이란 것이 너무 대단하고 웬만해서는 도달하기 힘든 수준으로 보이기 쉬운데, 뭐 겁먹을 필요는 없다. 주책(籌策)이란 각각의 영역에 다 있는 것이다. 우주의 원리나, 국가의 원리, 사회의 원리같이 큰 부분에만 주책(籌策)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요리의 원리, 운전의 원리, 구두 닦는 원리, 사상심학같이 어려운 주제를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도록 풀어쓰는 원리【이 책을 쓰면서 어떻게 좀 도달해보려고 무지하게 애를 쓰고 있는 부분이다】 등등, 아무리 작은 일에도 주책(籌策)이라 부를 수 있는 경지가 있다. 물론 아무리 작은 영역에서도 주책(籌策)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만만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계속해서 하는 작은 영역의 일이라면 뭐 지독하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산골에서 평생 벌만 치신 분에게서 벌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속에 세상 사는 진리가 다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평생 구두만 수선하신 분에게서 구두를 통해 세상을 읽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이 다 주책(籌策)이다. 다만 내가 주책(籌策)에 도달했던 한 영역에서의 경험을 다른 부분에도 적용하려고 노력하면 더 넓은 영역에 도달하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대부분의 일에서 태양인만큼이나 천시(天時)에 밝아지게 되는 것이다.
교심(驕心)
그럼 주책(籌策)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교심(驕心)이란 무엇인가? 결국 교심(驕心)이란 주책(籌策)의 경지에 이를 만큼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것을 섣불리 결론내리는 것이다. 태음인의 약점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결론을 유보하면서 내용을 충실하게 하는 태음인의 장점을 저버리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냥 생긴 대로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약한 영역에는 영 젬병이 되겠지만, 적어도 쉽게 사심(邪心)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냥 전형적인 태음인, 전형적인 태양인,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체질에 관한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을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태음인이라도 자신의 영역을 꾸준히 노력하며 살 때, 느리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주책(籌策)의 영역에 도달하는 부분이 생겨난다. 부분적이고 작은 영역이긴 하지만, 그 영역 내의 모든 것을 막힘 없이 이야기할 수 있고, 그 영역에서 얻어지는 진리를 한 마디로 요체를 집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
반면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우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훨씬 더 일찍 주책(籌策)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더 크고 중요한 영역에서 주책(籌策)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그만큼 위험하다. 잘 못 가면 교심(驕心)에 빠져들어 영 엉뚱한 길로 갈 위험도 그만큼 큰 것이다.
자기 긍정감의 중요성
그 차이가 갈라지는 지점을 좀더 자세히 검토해보자. 일단 기본은, 자기 체질의 장점을 지켜나가면 박통(博通)에 도달하는 것이고, 이를 버리고, 다른 체질을 흉내 내면 사심(邪心)으로 빠진다는 것이다. 모든 체질에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왜 남을 흉내 내게 되는가? 한 마디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못 믿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 부족, 자기 긍정심의 부족, 이런 것 때문이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보는 교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벼락부자가 된 사람, 벼락출세를 한 사람이 많다. 즉 자기의 사회적 위치는 갑자기 올라가버렸는데 자기 긍정심은 과거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이 차이를 빨리 메우려는 마음이 교심(驕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반면에 벼락출세를 하고 벼락부자가 돼도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출세 이전에 이미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던 사람이다. 출세를 하든 부자가 되든, 과거 자신의 모습을 굳이 감추거나 바꾸려 하지 않는다. 요란을 떨며 자신을 바꿀 필요가 없다 보니 교심(驕心)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옛날 우리 할머니들의 교육방식에 대해서 언젠가 한 번은 말하고 싶었는데, 마침 이 문제와 관련되어 말하면 적절할 듯하다. 옛날 할머니들은 “아이구, 우리 강아지”라며 손자, 손녀를 무조건 감싼다. 그러면 요즘 젊은 부모들은 자식 버릇 나빠진다고 질색한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자기 긍정성이 길러진다.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잠재의식이 생겨난다.
만일 할머니가 손자, 손녀가 할 일까지 대신 해주고, 손자, 손녀의 잘못된 주장을 떠맡아서 대신 남과 싸워주는 수준까지 되면 그때는 분명히 아이의 버릇만 나쁘게 하는 부작용이 더 커질 것이다. 의존성을 높이고, 그릇된 생각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철저히 감싸주되, 집 밖에서의 일은 너 스스로 잘할 수 있다고 격려를 통해 해결하는 수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경우에 집안에서 감싸주는 것은 부정적인 효과보다는 긍정적인 효과가 훨씬 더 크다.
아이들도 부모라면 대신해서 뭘 해주길 바라지만, 할머니라면 늙고, 힘도 없고, 늘 새롭게 바뀌는 세상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많아서 무언가를 대신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힘들고 지쳤을 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감싸주는 그런 모습을 바라는 것이다. 꼭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이모든 삼촌이든 누군가 그런 든든한 빽을 하나 가지고 자란 아이는 확실히 정서적 안정감이 뛰어나다. 아이는 강제로 무얼 시켜서 키우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라도록 보살펴서 키우는 것이며, 스스로 자라는 가장 큰 바탕은 ‘자기 긍정감’ 이다.
아이의 교심(驕心)
다시 태음인의 경우로 돌아가자.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태음인은 판단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그런 태음인 아이에게 속도를 강요하는 것은 곧 아이를 교심(驕心)에 빠져들게 만드는 짓이다. 태음인은 폭을 확보한 뒤에 깊이를 가진다. 폭과 깊이가 확보되면 비로소 핵심을 찾아낼 줄 알게 된다. 그 뒤에 비로소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얻어지는 속도를 강요하면 어떻게 될까? 아직 자신의 장점을 키워 약점을 메울 수준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 약한 부분을 자꾸 요구받으니까, 남을 흉내 내는 방식으로 도망가게 된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이 교심(驕心)이 강해지면 잡다한 지식을 줄줄 나열하는 모습, 문제의 답을 외워서 발표하는 모습 등으로 나타난다. 폭에서 바로 속도로 건너뛰는 방식이다. 어른들이 요구하는 속도를 그런 식으로 맞춰주는 것이다.
게다가 한심한 어른들이 그런 것을 똑똑하다고 칭찬해준다. 교심(驕心)을 더 부추기는 짓이다.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그것이 바로 지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혜로 바뀌지 않은 지식은 세상을 사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꿰어지지 않은 구슬은 서 말이 아니라 세 가마라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어른들이 보기에 너무나 뻔한 것도 ‘이것이 답’이라고 선뜻 답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맞지 않는 듯한 경우에 대해 일일이 의문을 가지고 확인하려 드는 것이 태음인 아이의 바른 모습이다. 태음인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숙제인 것이다. 속도를 강요해서 그 과정을 단축시키고, 어른들이 주장하는 보편을 그냥 받아들이게 만들 때, 아이는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버릇이 생겨난다. 잡다한 지식을 쌓아 양으로 승부하려 하며, 그런 지식들을 하나로 꿰려는 노력[一以貫之]은 점점 줄어든다. 그 다음 단계가 되면 자신의 특수한 경험을 쉽게 보편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아이가 꾸물대는 모습을 영 못 봐주겠을 때는 어찌 할까? 그럼 일단 속으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을 열 번쯤 되뇌기 바란다. 그런 다음에 아이에게 행동의 결과를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것이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네가 해라’라고, 이왕이면 ‘이렇게 저렇게 될 것’이라는 말보다는 ‘부모의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될 것이라고 예측된다’는 식으로 말하면 더욱 좋다. 어떻게든 아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게 유도하라는 것이다.
어른의 교심(驕心)
어른의 교심(驕心)도 나타나는 모습은 아이의 교심(驕心)과 같다. 다만 좀 세련되게 나타날 뿐이다. 성급한 일반화, 성급한 개념화 등등, 특수한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이나 특수한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을 함부로 일반적인 경우에 적용시키려 한다. 교심(驕心)이 강한 사람은 보통 아는 것은 많다. 그런데 그 중에도 꼭 이상한, 자질구레한 것들을 들고 와서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사용한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이런 것까지는 잘 모르지?’ 하듯이 목에 힘을 준다.
그럴 때 딱 적절한 말이 있다. “그래, 니 × 굵다.” 좀 심한 표현이 되려나? 그럼, 조금 점잖은 표현으로 바꿔보자. “아는 것 많으니,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 정도면 어떨까? 뭐 바꿔도 마찬가진 것 같다. 많이 들어가면, 그만큼 많이 나와야 하니까.
여기서 주의할 것은, 태음인이라고 해서 교심(驕心)에 치우친 사람, 주책(籌策)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그냥 전형적인 태음인으로 살며 양(陽)적인 영역은 아예 회피하는 사람으로 딱 갈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 부분에서는 주책(籌策)을 보여주는 사람이 다른 부분에서는 교심(驕心)을 보여주기도 하고, 전체적으로는 교심(驕心)을 잘 극복하고 있는 사람도 환경 변화에 따른 압박이 너무 크면 교심(驕心)을 드러내기도 하다.
앞에서 YS 시계 이야기를 했다. 노무현(盧武鉉, 1946~2009) 후보가 자신의 눈에 비친 김영삼 전대통령의 특수한 모습을 기준으로 하면서, 대중이 느끼는 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무시했기에 큰 곤경을 치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소탈하다는 평을 듣는다. 태음인이 교심(驕心)을 어느 정도 극복했느냐에 대해서 가장 일반적인 판단기준으로 사용할 만한 것이 바로 소탈함이다. 그런데 그토록 소탈한 노무현 대통령도 교심(驕心)의 함정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교심(驕心)이란 조금만 방심하면 고개를 드는,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만일 노무현 후보가(후보 시절 이야기니 호칭을 거기에다 맞추자) 교심(驕心)이 더 강했더라면 더 큰 낭패를 치를 수도 있었다. 자신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고, 지나치게 고개를 숙인 일을 부득부득 옳은 일이라고 주장했으면 점점 사태를 악화시켰을 테니까. 사실 그 일이 옳았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노무현 후보로는 한 보따리쯤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판단근거가 없이 쉽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보따리는 끝내 풀지 않았다. ‘내가 잘못 판단했다’라고 너무 빨리, 너무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그나마 수습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후보 경선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교심(驕心)이 잠깐 빤짝했다가 그럭저럭 극복된 것이다.
교심(驕心)과 주책(籌策)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는 의미로 몇 마디만 덧붙이자. 교심(驕心)의 극복에는 다양한 경험이 으뜸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태음인은 다른 체질보다 호기심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집안 분위기나 부모의 생활 모습, 아이의 지능 정도에 따라 좀 다르기는 하지만, 태음인 아이들은 다른 체질보다 확실히 9시뉴스나 신문을 보기 시작하는 시기가 빠르다. 간접 경험이라도 많이 쌓으려는 노력인 것이다. 웬만하면 허락하는 것이 좋다.
아이 학원 보낼 돈으로 국토순례라도 보내서 고생도 좀 시키고, 봉사활동이나 사회참여 활동에 꾸준히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이에게는 가장 좋은 투자다. 이런 부분은 체질을 불문하고 좋은 교육이지만, 매사에 경험론적 접근을 중시하는 태음인 아이에게는 특히 중요한 일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태음인은 인간 교류의 폭을 넓혀야 교심(驕心)에 빠질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계층, 다양한 직업군,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을 사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이의 교심(驕心)은 위의 방법으로 극복되는데, 어른의 교심(驕心)은 어느 정도 굳어지면 고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자신이 진짜 존경할 만한 태음인, 즉 자신과 비슷한 성향에서 출발해서 교심(驕心)을 극복한, 그래서 과묵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태산 같아진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교심(驕心)이 많이 완화되는 모습이 관찰된다.
2. 긍심(矜心)과 경륜(經綸) / 소음인의 소양 기운
절대적 긍정과 상대적 긍정
다음은 소음인 차례다. 소양인을 어설프게 흉내 내면 사심(邪心)에 빠지고, 소음 기운을 잘 키워서 소양의 영역에 도달하면 박통(博通)에 도달한다. 소음인의 사심(邪心)을 긍심(矜心)이라 부르고, 소음인의 박통(博通)을 경륜(經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긍심(矜心)이라는 용어가 좀 고약하다. 바로 앞에서, 사람이 다른 체질을 어설프게 흉내 내어 그릇된 길로 가는 경우를 막고, 자신의 장점을 꿋꿋이 살려나가 바른 길로 가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자기 긍정감’이라고 했는데, 동무(東武)는 ‘긍정’이라고 할 때의 ‘긍(矜)’ 자를 딱 따와서 긍심(矜心)이 사심(邪心)이라고 말하니 좀 난처하다.
긍정이라는 것에는 대체로 두 가지가 있다. 절대적 긍정과 상대적 긍정이다. 즉 ‘나는 소중하다’는 것이 절대적 긍정이다.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실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지구상에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도 나는 역시 소중한 존재이며, 인간이 수없이 많아도 소중한 존재다. 그런 것이 절대적 긍정이고, 앞에서 강조한 자기 긍정감이다. 반면 ‘나도 소중하다’라든지, ‘나는 더 옳다’라는 식으로 남이나 세상이 기준이 되면 이것은 자신을 억압하는 굴레가 된다. 아마 동무(東武)가 말한 긍심(矜心)이란 이 부분이 아닌가 싶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용어를 바꿔주실 수 없냐고 건의라도 하고 싶은데, 이미 돌아가신 어른이 한 말이니 어쩔 수가 없다. 그냥 그 정도로 구분해서 쓰기로 하자.
절대적 긍심(矜心)이니, 상대적 긍심(矜心)이니 하는 식으로 용어 가지고 따지면 머리만 복잡하니까, 긍심(矜心)이 드러나는 상황을 보면서 긍심(矜心)을 이해하도록 하자.
논리의 성급한 일반화
보통 소양인이 목소리가 크다. 성량이 풍부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소양인이 주장하는 바는 여러 사람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쪽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소양인은 다른 사람의 감성에 대한 느낌이 빠르다. 그래서 대중이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바를 느끼고, 받아들이고, 이를 주장한다. 즉 자기 주장에 대해 반박받을 여지를 이미 줄여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목소리가 클 수 있다.
그런데 소양인이 대중 정서를 파악하는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음인이 소양인의 겉모습만 보면 어떻게 보일까? ‘목소리가 커야 통하는 구나’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고는 저도 같이 목소리를 키운다. 이게 긍심(矜心)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물론 아무것에나 목소리를 키우지는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부분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키울 뿐이다. 하지만 그 옳다는 것이 한 영역 내에서만 옳은 것을 다른 영역에 무리하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긍심(矜心)은 하나의 논리가 적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 적용되는 것이다. 교심(驕心)이 경험의 일반화라면, 긍심(矜心)은 논리의 일반화다. 영역이 달라지면 기본 가정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것은, 기본 가정에 대해서 모두 동의하고 있을 때에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영역이 달라져서 가장 중시해야 하는 기본이 달라졌을 때는 논리의 바른 전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 적절한 지점을 보편, 합의점, 가정 등의 여러 가지 용어로 부른다. 하지만 뜻은 다 마찬가지다. 관련자 대부분이 동의한 것을 기초로 하여 출발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소음인이 생각하기에, 분명히 자신의 논리가 맞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안 받아들인다. 그런데 기본 가정을 검토할 생각은 못하고, 논리만 다시 점검해본다. 물론 논리 자체야 틀린 부분이 없다. 그러면 ‘아, 목소리를 더 높여야 되나보다’라고 어설프게 소양인을 흉내 낸다.
보통 소양인의 말투가 공격적인 경우가 많다. 양인(陽人)은 부정적인 것의 축소 쪽에, 음인(陰人)은 긍정적인 것의 확대 쪽에 각각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에 대해서 가장 공격적인 사람은 긍심(矜心)이 강한 소음인이다. 소양인의 공격은 강하기는 해도 화끈하고 뒤끝이 깨끗한데, 긍심(矜心)이 강한 소음인의 공격은 아주 집요해서 정말 짜증나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이 긍심(矜心)이 강한 소음인을 대하게 되면 결국은 지쳐서 ‘그래, 네 말 맞다’고 그냥 인정해준다. 하지만 다시는 그 사람을 접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면 ‘기본 수양이 안 되어 있는 놈’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놈’이라며 인신공격을 하는 수가 있다. 그러면 소음인은 ‘논리에서 지니까 치사하게 인신공격이나 한다’고 또 받아친다. 아니다. 사람들이 논리에서 졌다고 다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왜 자신만 인신공격을 받는가에 대해서 겸허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소음인과 토론
이번에는 긍심(矜心)을 잘 극복하고 경륜(經綸)의 경지에 도달한 소음인의 모습을 만나보자. 보통 소음인이 작은 집단 내의 토론은 잘한다. 사회를 맡겨도 곧잘 한다. 주장이 논지를 벗어나면 적절히 제지하고, 중간 중간에 이제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한 번씩 정리도 해주고, 토론 전체를 적절히 리드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본 가정들을 공유하지 않고 있는 집단에서의 논쟁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적대적인 집단끼리의 싸움이라도 되면 제대로 갈피를 못 잡는 경우가 많다. 언제 논리에서 감정으로 튀고 있는가를 알아채고 제지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눈치가 부족한 것이다.
뭐 이 정도로 적대적인 경우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양한 정파가 모인 집단에서의 토론은 어려워한다. 서로의 기본 가정이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소음인은 각각의 기본 가정을 이해하고, 그 중에서 토론의 기본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을 추려야 한다. 그 단계를 넘어서기 전에는 끊임없이 헷갈릴 뿐이다. 순발력이나 눈치로 다른 토론자들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아주 능숙하게 토론을 하는 소음인들이 가끔 있다.
우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없다. 즉 토론이란 바른 결론을 찾아내기 위한 과정이라는 원칙에 철저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의견 없이 백지에서 바른 길을 찾아내기는 어려우니까, 각자가 의견을 내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입장이다. 즉 각자의 의견이란 각자 미리 생각하고 조사해서 전체에게 제시하는 가설이나 자료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자기 의견이 관철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없다. 원칙을 중시한다는 것은 소음인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 장점을 버리지 않고 확고히 잡고 있기에 약점이 보완되는 것이다. 즉 토론의 목적은 바른 결론을 얻는 것이지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는 ‘토론의 원칙’을 끝내 고수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기본 가정은 각 정파의 이익이나 감정을 대변한다. 대부분의 토론에서 그런 부분들은 논의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기정사실화하려고 밀어붙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감추어진 부분을 토론의 대상으로 끌어올리려면 사회자 또는 토론자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무엇이 옳은가를 따지려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주면, 그때 비로소 대부분의 토론자들이 기본 가정 자체가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도하는 토론의 결론은 소양인이 처음에 빨리 파악한 대중의 정서보다 훨씬 더 대중에게 다가간다. 소양인은 현재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한 파악이 빠르다. 따라서 공통된 기준을 잘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대중 정서가 지지하는 부분뿐이다. 그것에서 출발했을 때 앞으로 도달할 부분은 알 수 없다. 이는 논리적 추론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경륜(經綸)에 도달한 소음인이 주도하는 토론에서는 현재 동의하는 바에 덧붙여 그 부분의 문제점이 함께 찾아진다. 더불어 결론을 대중에게 제시하고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함께 찾아진다.
제갈량의 경륜(經綸)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세상 이치를 공부하는 일을 늘 그런 식으로 꾸준히 한다면 어떤 경지에 도달하게 될까?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보통 소음인으로 많이 본다. 진짜 제갈량이야 어떤 사람인지 알 방법이 없지만,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제갈량은 여러 가지로 소음인의 모습을 많이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음인이 사람의 감정에 아주 귀신이다. 소음인이 주로 감성 영역에 가장 약하다는데, 제갈량은 아예 심리학 도사다. 이러저러한 상황이 되면 이 사람이 이리 갈 것이고, 거기서 또 복병을 만나면 이리저리 할 것이고 하는 식으로 여러 수를 내다보고서 장수들을 미리 배치시키는데, 그 예측이 줄줄이 사탕으로 다 들어맞는다. 바로 그런 것이 소음인의 경륜(經綸)이다. 이른바 절세의 경륜(經綸)이다.
소양인은 사람의 감성을 빨리 파악한다. 소음인은 그런 판단이 느리니까, 대신에 사람의 감성이 움직이는 원리를 파악하려고 한다. 힘이 좋은 사람이 흙일을 하면서 삽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능숙한 삽질을 자랑할 때, 힘도 약하고 삽질도 서툰 사람은 고생고생해서 포크레인을 설계하고 만들어낸다. 소음인이 경륜(經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이와 같다. 물론 ‘나는 흙일은 못해’라고 아예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굴착기를 가지고 와서 흙 파는 데 쓰겠다고 우겨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냥 전형적인 소음인으로만 사는 사람, 긍심(矜心)에 빠져드는 사람을 각각 그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의견의 고집
주제에선 좀 벗어나지만 말이 나온 김에 의견을 고집하는 문제를 좀 더 이야기해보자.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에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그 주장의 관철이 분명히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경우다. 하지만 또 다른 경우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토론이나, 학술적인 토론에서도 절대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 자세는 자신의 주장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면 자신이 그만큼 가난해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그 결과인 주장들이 자신을 키우고 바람직한 방법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면, 사상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되면 사람이 사상을 섬기는 꼴이 된다. 자신이 내놓은 의견이 자신의 주인이 되고, 막상 자신은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의견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아무런 미련 없이 포기하는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자세가 바로 경륜(經綸)으로 나아가는 토대인 것이다. 사실 말이나 방귀나 따지고 보면 사람 몸에서 기체가 나오며 내는 소리이기는 매한가지다. 하나는 위로 나오고, 하나는 아래로 나오는 차이일 뿐이다. 물론 자기 주장이 맞을 때는 좀 다르다. 사람들과 같이 공유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렸다고 깨달았을 때는 바로 미련을 던져야 한다. 날아간 방귀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틀린 의견은 방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위에서 의견의 소유 운운한 것은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 쓴 『소유냐 삶이냐』라는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당신의 젊은 날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필자는 『소유냐 삶이냐』를 꼽는다. 아직 안 읽어본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경륜(經綸)과 긍심(矜心)이 갈라지는 지점
이야기가 약간 두서없이 된 듯하니 간단히 정리를 해보자. 소음인의 장점은 함부로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논리에 엄밀할 뿐만 아니라, 그 논리가 적용되는 한계를 쉽게 넘지도 않는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조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영역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까지는 다른 영역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영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듣기만 하든지, “난 잘 몰라”라고 해버린다. 소음인이 새로운 영역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본래 관심을 두었던 영역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어진 뒤의 일이다. 따라서 그 이해의 정도가 주변의 다른 영역에도 어느 정도 적용 가능한 수준인 경우가 많다.
태음인은 폭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개념화, 일반화가 가능해진다. 소음인은 깊이를 가져야 비로소 영역의 확대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깊이를 추구하는 방식을 열심히 쫓다 보면 자연스레 적용 가능한 영역도 넓어진다. 그 넓이가 세회(世會)의 대부분의 영역에 적용 가능한 논리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을 경륜(經綸)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가히 ‘절세의 경륜(經綸)’이라 부를 만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긍심(矜心)은? 깊이가 부족한 상태에서 영역을 마구 뛰어넘는 것이다.
소음인과 경쟁
그럼 소음인이 긍심(矜心)을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태음인 아이에게 속도를 강요하지 말아야 하듯이, 소음인 아이에게는 경쟁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경쟁이란 보편적 기준을 놓고 달성하는 정도를 다투는 것이다. 일반화된 것을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이는 아이는 경쟁을 즐기며, 경쟁에서 불안감을 별로 안 느낀다. 하지만 자신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소음인들에게 대중 교육에서의 경쟁은 아무래도 힘겹다.
소음인에게 경쟁을 강요하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숫기가 부족하고 위축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긍심(矜心)을 띠는 형태이다. 유명인들 중에 긍심(矜心)을 강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몇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천재 소리 듣는 형제들과 계속 비교 대상이 되면서 자란 경우가 종종 눈에 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학창시절에는, 초등학교 때 반에서 중간쯤이나 하다가 중학교 가면서 반에서 한 5등쯤 하고, 고등학교 가면서 전교 1,2등을 다투더니 결국은 명문대에 진학하는 친구들이 가끔 있었다. 그런 아이들 중에는 소음인의 비율이 일반적인 인구비례보다 확실히 높게 나타난다. 물론 집에서 아이가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도록 잘 배려하며 키운 경우다. 또는 정반대로 부모가 너무 바빠서 아예 ‘네가 알아서 하라’고 놔둔 경우도 있다. 두 가지 경우의 공통점은, 아이가 자기 방식으로 공부했다는 것이다.
자기 방식으로 해서 성공한 아이들이 소음인 중에 많은 이유가 뭘까? 그것은 소음인이 새로운 개념을 배우기를 어려워하지만, 배우면 가장 확실하게 배우기 때문이다.
수학 문제 중에 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 ‘a^b를 (a+b)/2라고 정의하였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문제들, 이런 문제들을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소음인이다. ‘[a]를, a를 넘지 않는 최대의 정수라고 정의하자.’ 이런 건 좀 쉽다. 두 문제의 차이가 무엇일까? 뒤의 경우는 새로운 기호가 필요해서 도입한 것이다. 그냥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만으로는 식으로 표시할 수 없는 경우라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경우는 그냥 사칙연산만으로 충분한데도 새로운 기호를 도입한 것이다. 왜 새로운 기호를 도입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아이는 묻다. “왜 그렇게 정의하는데요?”
많은 선생님이 그런 경우에 야단을 치거나 짜증을 낸다【요즘은 모르겠는데 70년대에는 그런 경향이 좀 있었다】. “그건 그냥 그렇게 정의한 거야. 그렇게 약속을 한 거라고, 거기에 ‘왜’가 왜 들어가니?” 그럼 아이가 다시 묻는다. “항상 그런 건가요?” 선생님은 이제 진짜 짜증이 났다. “그냥 이 문제에서 그렇다고 치고 풀라는 거야.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수업 방해하려고 묻는 거냐?” 아이는 선생님이 왜 화가 났는지 의문만 하나 더 늘었다. 새로운 기호를 하나 도입한다는 것이 소음인 아이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기존의 기호로 충분한데 새로운 기호를 도입한다는 것은 무언가 그럴 만한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찾아지지 않는다. 아이는 고민에 빠진다.
그런데 그 고민을 충분히 하도록 허용하면 그런 문제를 아주 잘 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게 보기보다 대단한 것이다. 아이가 혼자 힘으로 ‘기호는 도구일 뿐 본질은 아니다’라는 철학적인 내용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소음인이면서도 새로운 기호의 정의와 관련된 문제를 능숙하게 푸는 아이들과 이야기해보면 그런 철학적 개념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이 확인된다.
우리나라 수학은 너무 일찍 기호를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흔히 기호와 본질을 헷갈리게 만든다. 그런데 아이가 혼자서 그 헷갈림을 뚫고 나왔다는 것이다. 상당한 수준의 철학적 훈련 과정을 거쳤다는 뜻이다. 그런 훈련을 통해 과정을 하나하나 뚫고 나온 아이는 언젠가는 다른 아이들을 젖히고 앞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슬프게도 대부분의 부모나 선생님이 아이가 그런 식으로 성장하는 것을 차분히 기다려주지 못한다.
당신의 아이가 소음인이라고 생각되면 너무 많은 양을 시키려 하지 말기 바란다. 너무 여러 가지를 시키려 하지도 말고, 그보다는 하는 일에 충분히 집중하고, 잘 안 되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하는 일에 신경을 쓰시기 바란다.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은 절대로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시스템을 구축해서 대처하는 방식은 처음에는 대충하는 방식보다 느리다. 그러나 언젠가는 빠르게 된다. 기다려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고개를 드는 긍심(矜心)
긍심(矜心)도 교심(驕心)과 마찬가지로, 잘 극복된 사람도 조금만 방심하면 고개를 든다. 특히 긍심(矜心)은 원치 않는 과도한 경쟁 상황에 몰렸을 때 나타나기 쉽다. 때론 경쟁 상황에서, 혹은 경쟁의 후유증으로 나타난다.
정치인 중에서 소음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김근태(金槿泰, 1947~2011) 의원이다. 김근태 의원 이야기를 좀 해보자. 원래 재야라는 곳이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개성이 강한 사람들을 모아놓았을 때 가장 힘든 것이 화합이다. 그래서인지 재야의 거물 소리를 듣는 사람들 중에 ‘누구만 끼면 판 깨진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좀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모인 상황에서도 김근태 의원이 끼면 ‘김근태가 끼었으니 판은 안 깨지고 굴러가겠구먼’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들은 이야기라서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소음인이 조직의 화합을 잘 이끈다는 것은 긍심(矜心)이 상당히 극복되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그런 김근태 의원에게서 긍심(矜心)을 관찰한 일이 있었다.
작년 대선에서 김근태 의원은 노무현(盧武鉉, 1946~2009)과 정몽준 간의 후보 단일화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 주장이 옳았느냐 틀렸느냐, 설사 옳았다 하더라도 김근태가 그런 역할을 맡는 것이 옳았느냐 등등을 놓고 말들이 많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서 평가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후보 단일화 과정까지는 할 이야기가 없고, 필자가 김근태 의원의 긍심(矜心)을 본 것은 막상 후보 단일화가 이뤄진, 그것도 김근태 의원이 바랐던 대로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된 뒤의 일이다.
우연히 김근태 의원의 찬조연설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날 선거 유세에 나온 모든 연설자가 ‘국민후보 노무현’이라는 표현을 쓰는데도 유독 김근태 의원만은 ‘단일후보 노무현’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었다.
대선 막판의 민주당선거본부 생각은 대충 이랬던 것 같다. 후보 단일화는 끝났다. 대중은 좀 냉정한 면이 있다. 예선 탈락자에 대한 관심은 생각보다 일찍 식어버린다. 정몽준 의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대선 막바지에 상당히 식어버린 상황이었다【물론 마지막에 이상한 사건으로 한 번 크게 흔들기는 했지만】. 따라서 ‘단일후보’라는 표현을 써도 정몽준 지지자의 표를 노무현에게로 결집시키는 효과가 보기보다 크지 않다고 판단한 듯하다. ‘단일후보’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노무현을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예선을 통과해 올라온 사람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래서 결국 국민들이 최종 경쟁자로 선택한 사람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편이 선거 전략상 유리하다는 판단 하에, ‘국민후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밀고 나간 게 아닌가 싶다.
상황을 보면 민주당선거본부의 생각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 설사 민주당선거본부 생각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선거 과정에서 슬로건은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거용 홍보라는 것이 이미지 창조 작업이라서, 반복 광고의 효과를 중시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유독 김근태 의원 한 명만 다른 구호를 사용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김근태(金槿泰, 1947~2011) 의원의 마음에는 단일화의 필요성과 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의식적인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근태 의원 정도의 정치인이 그런 아쉬움을 의식의 수준에서 느꼈다면 오히려 조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에서 그런 아쉬움이 작용했기에 ‘단일후보’라는 표현에 집착하게 된 듯하다. 즉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적합했던 논리를 이미 단일화가 이뤄진 변화된 상황에 다시 적용한 것이다. 단일화 국면과 단일화 이후 국면은 다른 상황, 다른 영역이다. 적용할 논리의 기준이 다른 것이다. 그 영역을 무리하게 뛰어넘어 적용하는 것, 이런 것이 긍심(矜心)이다.
물론 김근태 의원에게서 긍심(矜心)이 보였다 하더라도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노무현(盧武鉉, 1946~2009)에 대한 열성 지지층이나 소장파 의원들과의 관계가 잘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김근태 의원은 나름대로 선거에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긍심(矜心)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지만 긍심(矜心)에 휘둘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만일 긍심(矜心)에 휘둘렸다면 선거에 도움을 주는 전제 조건으로 자신의 후보 단일화 주장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긍심(矜心)이란 이렇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도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굳이 김근태 의원을 예로 들어보았다. 교심(驕心) 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사심(邪心)이 마찬가지다. 극복했다고 생각해도 언제 또 고개를 들지 모르는 것이다. 김근태 의원의 경우 여러 가지로 긍심(矜心)이 고개를 들 만한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상황, 정치적 위상이 급격히 추락할 수 있는 상황 등등. 그런 상황에서도 사심(邪心)이 고개를 들지 않게 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평소에 사심(邪心)이 어느 정도 극복된 사람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교 쪽의 용어를 쓰자면 돈오(頓悟)가 되었어도 점수(修)가 필요한 이유라고나 할까?
안성기 씨에게서 느끼는 편안함
긍심(矜心)과 경륜(經綸)의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마지막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소음인이 대화하는 자세가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예를 하나 들고 마무리하자. 예로 들고 싶은 사람은 영화배우 안성기 씨다. 특히 토크쇼에 나온 안성기 씨의 모습을 잘 보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소음인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다.
안성기 씨의 특징이 편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소음인은 긴장이 지나치면 말수가 줄어든다. 오히려 그럴 때 긍심(矜心)이 강해지는 수가 많다. 그러다가 입을 열면 이상한 고집을 피우면서 한 발도 안 물러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안성기 씨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다. 안성기 씨의 말은 달변이 아닌데도 듣기에 정말 편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 자신이 느낀 것, 때로는 자신이 실수한 이야기 등을 감추려 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으면서 아주 편하게 이야기한다. 폭소가 터져 나오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듣다보면 자연스레 미소가 떠오르게 만든다.
좀더 유심히 들어보면, 남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만을 이야기한다는 특징이 보인다. 내가 이렇게 느꼈다, 내가 이런 경험을 했다까지만 이야기하지, 이것이 옳다, 그르다, 따라라, 말아라가 없다. 쓸데없이 힘을 주어 강조하는 법도 없다(아마 전생에 도를 무척 닦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를 볼 때도 팬이었지만 토크쇼에 나온 모습을 한두 번 보면서 “‘국민배우’라는 말을 듣는 것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3. 벌심(伐心)과 행검(行檢) / 태양인의 태음 기운
벌(伐)이 사심(邪心)이 되는 과정
이제 태양인의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태양인의 사심(邪心)은 벌심(伐心)이라고 한다. 벌(伐)이라는 글자는 ‘벌목(伐木)’ 처럼 부드럽게 사용되기도 하고, ‘토벌(討伐)’과 같이 좀 살벌(殺伐)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어쨌든 쳐내고, 잘라내고, 배척하고, 그런 것이다. 앞의 경우와 같이, 벌심(伐心)이란 태양인이 태음인을 잘못 이해하고 어설프게 흥내 내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걸 왜 벌이라 부르느냐가 요점이다.
벌은 사실 전쟁을 칭하는 용어 중의 하나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이라크 전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용어다. 전쟁이란 명분도 비슷하고 세력도 비슷한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을 일컫는 말이다. 미국의 행위는 '침략이 가장 적절한 용어다. 어쨌든 전쟁을 칭하는 한자가 많아서 적절한 단어를 찾아 쓰는 것이 어렵다. 그 이야기도 참 재미있는 데, 다 설명하기는 한자 실력도 부족하고 이야기도 너무 길어질 것 같다. 벌만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자.
벌이란 명분이 옳은 쪽이 명분이 틀린 쪽을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란 세력을 칠 때 주로 쓰는 글자다. 특히 주도 세력이 반란 세력보다 명분도 앞서고, 도덕성에서도 앞섰을 때 벌이란 용어를 쓴다. 그렇다고 역사 속에서 정벌이라는 용어로 표현된 모든 것이 공격 측의 명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공격 측에서 그렇게 주장한 것이 그냥 역사 기록으로 남은 것도 많기 때문이다. 역사란 늘 강자에게 관대하게 기술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어쨌든 벌이란 옳은 쪽에서 틀린 쪽을 공격하는 것을 일컫는 단어인데, 이를 왜 사심(邪心)이라 부르느냐 하는 점이 벌심(伐心)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다른 체질의 사심(邪心)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태음인의 교심(驕心)이란 것이, 없는 것을 꾸며서 우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확실하게 경험한 것을 토대로 주장하는 것인데, 충분한 경험이 쌓이지 않은 것을 함부로 일반화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소음인의 긍심(矜心)도 역시 틀린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맞는 내용을 주장하는 것인데, 그 논리가 적용될 범위를 넘어서서 다른 영역에 무리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것이다.
벌심(伐心)도 마찬가지다. 옳은 것을 내세워 그릇된 것을 공격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한 것까지는 맞다. 그러나 그 정도가 정당한 한계를 넘어서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잘못된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공격한다면, 결국 그 명분을 퍼뜨리고 조장하는 지도부를 무너뜨리면 끝나는 일이다. 단순 가담자들마저 혹독하게 다룬다면 이제는 오히려 공격하는 쪽이 명분을 잃게 된다. 단순 가담자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모범과 인내가 필요하다. 공포나 처벌로 될 일이 아니다. 벌심(伐心)이 사심(邪心)이 되는 이유는 모두를 싸잡아 쳐내려는 방식 때문이다.
새마을운동
예를 들어보자. 60년대의 우리나라에는 유교문화가 나라의 발전을 막는 요소로 작용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유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유교 중에서도 주자학, 성리학 일변도의 흐름이 수백 년을 쌓이며 곪았던 것이다. 또 주자학 자체에도 긍정적인 요소가 많지만, 주장의 본질은 외면하고 형식만 중시하는 식이 되어버려서 더 문제였다. 결국 공맹의 뜻은 사라지고 이상한 형식주의만 남은 그런 풍토가 우리나라 농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마을운동은 분명히 긍정적인 요소를 안고 시작된다. 유교적 전통만을 중시하면서 과거의 방식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풍토를 바꿔보자는 의식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이상하게 가버린다. 의식개혁을 유도하는 옳은 방식은 대충 이렇다. 새로운 공동체 구성을 위한 쉽고도 핵심이 되는 사업 한두 개로 지역민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 결과가 좋으면 지역민들의 정서가 바뀌게 된다. 그렇게 해서 지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생겨나면, 그에 따라 각각의 지역에 맞는 사업들을 찾아내고 시행하는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물론 그런 방식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 시간은 무리하게 단축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단축하려 하면 할수록 무리가 커진다. 모든 지역사업은 지역민들이 주체가 되어야 무리가 없다. 그러려면 지역민들이 그 사업을 이해하고 거기에 정서적으로 동조하게 되기까지 일정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은 속도전을 치르듯이 시행되었다. 게다가 관의 주도로 작은 일들에 일일이 간섭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각각의 마을 사정을 고려하는 일도 없이 전국적으로 통일된 방식으로 밀어붙였다. 무조건 초가지붕을 없애고 슬레이트 지붕을 까는 일부터 했다. 무조건 길부터 넓히고 본다. 장승, 당산나무 등은 타파해야 할 미신이라는 이유로 뽑히고 베어진다.
의견을 모으고 조정하는 과정이 전혀 없이 진행된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는 관(官)과 친하면 혜택을 입고, 관과 소원하면 피해를 입는 방식이 되어버린다. 그런 속에서 농촌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큰 뿌리였던 공동체의식, 한 마을이 모두 가족처럼 지내던 인정 같은 것들은 상당 부분 파괴되고 만다. 서구적 시민의식을 기르는 훈련도 되지 못하면서 우리 전통적인 도덕관도 무시해버리니, 정신적 토대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벌심(伐心)의 원인도 다른 사심(邪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체질의 사람들이 능한 부분을 왜 그런지 이유도 모르는 채 흉내 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태음인은 늘 구체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겉보기와는 달리 자잘한 재주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구체적으로 일을 잘 해결해나가곤 한다. 태음인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마음의 근본이 긍정적인 것을 늘려서 해결하려는 쪽을 향하기 때문이다.
태양인의 마음은 부정적인 것을 줄여서 해결하려는 쪽에 있다. 그런데 태양인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태양인을 비난한다. “너는 늘 비판만 하지 대안이 없지 않느냐? 뭐 구체적으로 이루는 일이 없지 않느냐?” 이런 비난을 들으면, “좋아, 나도 하면 훨씬 잘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구체적인 일에 손을 댄다. 그런데 그 방식이 부정적인 것을 쳐내는 식이라는 것이다. 벌심(伐心)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긍정적인 부분들이 뭉텅이로 잘려나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같이 묻어서 부정적인 부분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만을 기뻐하고 있을 뿐이다.
인(仁)과 행검(行檢)
태양인이 태양인의 본성을 지키면서 구체적인 일에 접근하는 방식은 어떠한가를 검토해보고서 다시 비교해보도록 하자. 태양인이 자신의 장점을 확대해서 태음적인 영역에 이르는 것, 즉 태양인의 박통(博通)을 행검(行檢)이라고 한다. 행동을 단속한다는 뜻이다. 그 검의 뿌리는 어진 마음, 바로잡아주려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앞에서 태양인을 설명할 때, 환경운동에 관한 예를 든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사람에게 유리해지는 환경운동을 생각할 때 동물의 관점에 서고, 다른 사람들이 동물의 관점까지 받아들일 때, 식물이나 미생물의 관점까지 생각하는 것이 태양인의 애성(哀性)이라고 했다. 이것은 약점이며 동시에 강점이다. 태양인이 당여(黨與)나 거처(居處)에 능하지 못한 것은, 좁은 부분에 집중해야 할 때도 그 테두리 밖의 것들에 신경을 써 범위를 지나치게 넓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태양인의 근본이 고루 보살피려는 인(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애노(哀怒)의 성정(性情)을 이야기할 때 소양인과 태양인의 공격성의 차이를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태양인이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쉬운 면이 있다는 말을 했었다. 소양인의 공격은 의(義)를 바탕으로 한다. 반면 태양인의 공격은 인(仁)을 바탕으로 한다. 틀린 점만을 공격하려 하지, 그 사람 자체를 공격하거나 죽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우는 화용도에서 끝내 조조를 죽이지 못한다. 조조가 관우에게 베푼 개인적인 후의 때문에 못 죽였다는 것은 관우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견해다. 관우는 그 시대가 조조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제후라는 사람들이 동탁이나 여포 부류의 인간들인데, 거기에 비하면 조조는 훨씬 민중의 삶을 개선시켜줄 사람이다. 또 중국의 통일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이라는 점도 고민의 원인이 된다. 일단 갈라져 싸우는 것보다는 통일된 나라가 전쟁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조의 결점을 중시해서 죽일 것인가, 가능성을 보고 살릴 것인가? 벌심(伐心)을 발동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조조를 죽인다면 조조를 따르는 저 초라한 병사들도 다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조조의 목을 베어오지 못하면 자신의 목을 대신 내놓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온 관우가 화용도(華容道)에 서서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그 고민의 실체가 느껴지는가? 이 정도만 하고 관우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관우가 조조를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관우를 화용도로 보낸 제갈량 이야기까지 함께 묶어서 나중에 기회를 잡아보자.
결국 태양인이 인(仁)에서 출발하는 애성(哀性)이라는 본성을 잃지 않으면, 쉽게 벌심(伐心)으로 빠지지 않다. 항상 강조하는 일이지만, 자신의 본성을 잃지 않으면 쉽게 사심(邪心)에 빠지지 않는 법이다. 벌심(伐心)이라는 함정을 잘 피하면,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정확히 지적만 해주는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행동을 일일이 통제하고, 지시하고, 틀렸다고 잘라내는 방식이 구체화 단계에서는 적합한 방식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행검(行檢)이란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만 해주어서 일이 스스로 굴러갈 수 있게 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음인의 희성(喜性)에서 출발하는 자율성 중시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태음인은 판단을 최대한 유보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맞는지 틀리는지도 같이 일할 사람들이 같이 따져나가고, 같이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태양인의 행검(行檢)은 천시(天時)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다. 방향의 제시가 보다 명확하고, 점검을 해주는 지점이 확실할 수 있다.
태음인이 거처(居處)를 통해 혼자 이루는 것은 작다. 소음인이 당여(黨與)를 통해 이루는 것은 조금 더 크지만 역시 부족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천시(天時)의 흐름이 바뀔 때, 그리고 지금 사람들이 그 바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태음인이나 소음인의 방식으로 바른 방향의 이해를 얻기엔 시간이 너무 걸린다. 그럴 때 태양인의 행검(行檢)이 필요하다.
천시(天時)와 사람들의 일반적인 이해가 다를 때, 자신이 느낀 천시(天時)를 구체적으로 다 보여주기는 어렵다. 그럴 때 무리하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다 실현하려 하면 벌심(伐心)의 유혹에 빠져든다. 그러나 태양인의 장점을 발휘해서 지엽적인 것을 쳐내고, 또 쳐내고 마지막 남은 가장 핵심에 해당되는 것만을 보여준다면 비록 구체성에서 약한 태양인이라도 충분히 보여줄 만하다. 틀린 상대방을 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중에서 지엽적인 것을 쳐내고 쳐내어 핵심만을 남기는 것이다.
남겨서 보여주는 것이 비록 적을지라도,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되고, 핵심에 해당되는 것이기에 이어져 넓힐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진다. 비로소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모여든다. 사람들이 모이면 일을 나눈다. 각각 나누어진 일이 원칙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면, 이를 찾아내어 바로잡아준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할 만한 토대가 생기고, 그 토대를 바탕으로 키워나가면 누구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이 이뤄지는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예
박정희 전대통령이 했던 일들 중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포항제철의 건설은 비교적 행검(行檢)이 작동한 결과라 부를 만하다. 물론 그 두 가지 일에도 부분적으로는 벌심(伐心)이 작용하여 무리를 낳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인 요소가 더 많았다 하겠다. 하지만 새마을사업이나 재벌 위주의 경제 운용 같은 경우에는 벌심(伐心)에 의한 무리가 훨씬 더 많았다. 유신 선포, 노동운동 및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같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벌심(伐心)이다. 그 중 벌심(伐心)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장발단속, 치마 길이 단속 같은 것들이다. 물론 사안 자체나 국민들에게 피해를 준 정도로는 위에서 언급된 것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일이지만, 개인생활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관여했다는 면에서 보면 이 두 가지가 오히려 벌심(伐心)의 극치라 할 만하다.
그러고 보니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아무 설명 없이 그냥 태양인으로 치고 이야기하는 꼴이 되었는데, 박 전대통령의 체질에 대해서는 사상의학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논란이 좀 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서 자료나 사진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박 전대통령이 살아 있었을 때는 아직 사상의학이 한의계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기 전이라서, 생전에 사상의학적 관점으로 박 전대통령을 관찰했던 사람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여러 행태를 보면 태양인이 리드하는 정권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장점과 단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태양인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개인 이력에서도 태양인의 단점이 두드러지는 부분이 있다. 철저한 황국신민에서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주의자로, 다시 극우 민족주의자로 별 거리낌 없이 변신했던 일들이 그런 단점과 관련되는데, 이러한 부분은 체질에 따른 기본 성정(性情)을 언급할 때 이야기되지 않았던 부분이라 설명을 뒤로 돌리고자 한다. 사심(邪心), 태행(怠行)까지 다 설명하고 난 뒤에, 그런 사심(邪心)과 태행(怠行)이 합쳐지고 심해졌을 때 나타나는 각 체질별로 가장 타락한 모습을 언급하면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보여주었던 단점들을 보면 태양인을 바로 키우는 방법을 역으로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박 전대통령의 경우, 가난한 농가에서 많은 형제들 중 한 명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 즉 마음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 같은 것에 쏠려 있는데, 현실은 그 마음의 핵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구체적인 일에 계속 매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되짚어보면, 태양인의 경우 당장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하는 데 도움이 되고 스스로도 중요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모든 아이가 그런 복 받은 환경에서 태어날 수만은 없다. 결국 아이의 생활에서 구체적인 일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연구하고, 생각에 몰두하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다만 얼마라도 배려해주어야 한다. 또 그런 일에 시간 쓰는 것을 나무라지 말고 자존심을 살려주어야 하며, 특히 자신의 의견을 낼 때 아이의 의견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 태양인 아이가 벌심(伐心)에 빠지지 않고 행검(行檢)에 도달할 수 있는 토대일 것이다.
일반인들이 잘 아는 사람 중에 태양인이라고 확실히 내세울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박정희 전대통령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어쨌든 그 정권이 벌심(伐心)의 폐해나 행검(行檢)이라 부를 만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박 전대통령 개인의 체질에 대해서는 앞에서 예로 들었던 다른 사람들의 경우처럼 자신 있게 주장하기는 좀 꺼려지는 부분이 있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으로 남겨두려 한다.
태양인의 파벌 만들기
태양인의 벌심(伐心)을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하나 더 있다. 원래 태양인은 파벌 만드는 일을 잘 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교우(交遇)에는 강하고 당여(黨與)나 거처(居處)에는 약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교우(交遇)에 능하다는 것은 낯선 사람끼리 만나도 의견을 나누고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굳이 파벌을 만들 필요가 없다.
하지만 태양인이라도 때로는 혼자서 하기 힘든 큰일을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길을 찾는 일이 아니라 구체적 성과물을 내는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사람을 모을 수밖에 없다. 사람을 모으는 데는 태음인의 희성(喜性)이나 소음인의 희정(喜情)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동의가 된 일을 추진할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도 해보지 못했던 일,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일의 경우에는 역시 행검(行檢)에 도달한 태양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태양인이 행검(行檢)으로 만들어내는 조직은 ‘열린’ 조직이다. 근본적으로 태양인은 닫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열린 상태를 유지하면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것이 태양인의 본성에 맞는 일이다. 그 속에서 참여자들이 큰 줄기에서 벗어나는 검이 보이면 그때그때 지적해주면서 끌어가는 것이 행검(行檢)으로 일구는 조직이다. 따라서 이런 조직은 절대로 파벌화될 수가 없다.
그런데 반대로 가장 배타적인 파벌을 만드는 것도 태양인이라는 점이 재미있는 일이다.
재벌(財閥), 군벌(軍閥), 파벌(派閥)이라고 할 때의 ‘벌(閥)’이라는 글자를 잘 보면 벌(伐)이 있다. 벌심(伐心)이 문(門) 안으로 들어간 것이 벌(閥)이다. 태양인이 어설프게 태음인을 흉내 내는 것이 벌심(伐心)이라고 했다. 당여(黨與)를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이 바로 벌(閥)을 구축하는 것이다.
당은 좋은 뜻을 넓히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당은 우당(友黨)도 있을 수 있고, 당끼리의 협조도 있을 수 있다. 벌은 공격성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군벌이 둘이 있으면 전쟁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재벌이 둘이 있으면 서로 죽이려 들게 마련이다. 음인(陰人)들이 장점을 늘리는 방식으로 조직을 건설하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공격하고 쳐내는 접근을 기준으로 하면서 닫힌 조직을 만들면 그 조직은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 공격성을 문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외부에 대한 배척이 두드러지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태양인의 벌심(伐心)이 떴을 때 하는 짓이다.
앞에서도 정당과 패거리의 차이를 말한 적이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 정당은 차라리 ‘정벌(政閥)’이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 불러주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있는 정당들을 만든 사람들이 다 벌심(伐心)이 뜬 태양인인 것도 아닌데 어쩌다 그런 꼴이 되었는지…….
어쨌든 가장 패거리 정치를 싫어하는 태양인이 벌심(伐心)이 떠서 패거리를 만들면 오히려 가장 배타적인 패거리를 만든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모든 체질의 모든 면이 다 그렇다.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이 된다. 자신의 약한 영역에 바르게 접근하면 그 부분에서 절세의 박통(博通)이 나오고 대인의 독행(獨行)이 나오는데, 어설프게 접근하면 오히려 자신이 절대 안 저지르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평소에 그런 잘못을 잘 저지르는 체질의 사람보다 훨씬 더 크게 저지른다는 것이다.
계속 체질론은 운명론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체질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노력할 방향을 안다는 것이다.
퇴로 차단의 문제
박정희 전대통령 이야기가 나오고 정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주로 스케일이 큰 부분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데, 사실 벌심(伐心)이 문제가 되는 것이나 행검(行檢)이 돋보이는 것은 당여(黨與)나 거처(居處)와 같이 작은 모임이나 가정에서 더 두드러진다. 교심(驕心)/주책(籌策), 긍심(矜心)/경륜(經綸)의 경우와는 반대다. 자신이 약한 영역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의 문제니까, 태양인의 경우 당연히 당여(黨與)와 거처(居處)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된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의 문제는 천기(天機) 이해의 문제다. 따라서 인륜(人倫)이나 지방(地方)의 문제와 관련이 가장 깊다. 다만 현실로 드러나는 모습을 위주로 설명해야 이해가 쉬우니까, 당여(黨與) 및 거처(居處)와 관련지으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양인(陽人)이 부정적인 면을 줄이는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적인 영역은, 다른 말로 열린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즉 누군가가 공격을 받더라도 너무 강하다 싶을 때 도망갈 곳이 있다는 것이다. 양인(陽人)의 공격은 공적인 부분을 선점하려는 공격이지 퇴로를 차단해서 섬멸하려는 방식의 공격이 아니다. 사적인 영역이라도 그런 감각이 유지되면 크게 문제는 안 된다. 태양인은 상대를 공격할 때 상대의 기세가 꺾인 듯하면 바로 측은함을 느낀다. 소양인이 아이를 야단칠 때는 아이가 울며 자기 방에 들어가면 쫓아가서 계속 야단치는 법은 없다.
그런데 사심(邪心)이 뜨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태양인이 벌심(伐心)이 뜨거나, 소양인이 과심(誇心)이 뜨면 ‘이 참에 뿌리를 뽑겠다, 이 참에 확실히 버릇을 고치겠다’고 달려든다. 아이가 잘못했다고 말할 때까지 몰아붙인다.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심한 경우에는 아이가 노예처럼 고분고분하기를 요구한다. 아이가 성격이 왜곡되지 않고 견뎌낼 재간이 없다.
사회 문제도 마찬가지다. 양인(陽人)의 권력자가 사심(邪心)이 뜨면 퇴로를 봉쇄하고 몰아붙인다. 민중이 견딜 재간이 없다. 타인에 대한 공격은, 우선 상대에게 퇴로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없으면 퇴로를 열어주고 나서 할 일이다.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항상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열린 공간 지향이라는 양인(陽人)의 본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닫힌 공간에서는 공격성이 과도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특히 태양인의 벌심(伐心)은 주의해야 한다. 지도자로서 민중을 대하는 태도로는 가장 위험한 사심(邪心)이 벌심(伐心)이다. 일단 사심(邪心) 중에서 그 드러나는 모습이 가장 잔인할 수 있다는 점이 위험하다. 두 번째로, 심지어는 열린 공간조차 닫힌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고, 사소한 일까지 간섭한다. 음인이 닫힌 공간에서 행할 때는 별로 문제되지 않을 일을, 열린 공간으로 유지되어야 할 영역에서 어설프게 흉내를 내면 심각한 피해가 생겨난다.
그렇다고 해서 음인(陰人)이 늘 가정 문제를 잘 풀어나간다는 것은 아니다. 태음인은 아이의 잘못이 구체적인 옳은 행동으로 바뀌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음인은 아이의 바른 행동이 완전히 몸에 배어서 항상 안정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음인(陰人)이 아이를 훈육하는 방법은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강도와 속도를 넘어가지 않기에 문제가 안 된다. 끈질기게 천천히 한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의 장점은, 아이의 특수성이 발견되거나 혹은 아이가 옳고 부모가 잘못 생각한 면이 발견될 때, 이를 바로바로 아이의 훈육에 반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음인 부모가 교심(驕心)이 강해지거나, 소음인 부모가 긍심(矜心)이 강해지면, 그저 끈질기고 집요하게 아이를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모습만 나타나게 된다. 부모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것을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면을 키우려는 희락(喜樂)의 성정(性情)이 가지는 장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양인(陽人)의 부모가 사심(邪心)이 떴을 때 아이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방식과는 또 다르게 서서히 아이의 피를 말리는 그런 부작용이 생겨난다. 사심(邪心)이 뜬 음인(陰人)의 부모 밑에 자라는 아이는 늘 우울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부모가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장점을 잃지 않아야 한다. 함부로 타인의 훈육 방법을 흉내 내어 자신의 장점을 잃어버리면 최악의 경우를 낳게 된다.
태양인의 가정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 태양인이 그냥 생긴 대로 살자고 나서면 아무래도 가정을 등한시하기가 쉽다. 늘 바깥일에 먼저 신경을 쓰고, 집에 동료들을 떼거지로 몰고 오기도 하고, 그래도 어느 정도는 보아 넘겨질 수 있는 것이, 가족들이 보기에 원칙이 뚜렷하고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일종의 존경심이나 신뢰감이라고 나 할까, 뭐 그런 것을 토대로 어느 정도는 버터갈 수 있다. 하지만 한도를 넘지 않으려면 어떤 원칙이나 절제가 필요할 것이다. 이 부분을 이야기해보자.
가정을 아주 잘 꾸려가는 태양인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가정 내에서의 원칙이 적다는 점이다. 가족의 구성원이 각각 지켜야 할 원칙으로 정해놓은 것이 별로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원칙은 누구나 정확히 지킨다. 부모라고 예외가 없고, 아이라고 예외가 없다. 결국 태양인이 벌심(伐心)이 심해지면 작은 집단이나 가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남발하는 모습이 될 듯하다. 반면 행검(行檢)이라는 것은 적은 원칙, 꼭 필요한 원칙만으로 줄여서 이를 확실히 지키는 모습이라 하겠다. 이런 부분은 소양인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소양인 이야기를 할 때 조금 더 자세히 하도록 하자.
태음인이나 소음인은 원칙이 좀 많아져도 별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태음인은 ‘아이는 9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와야 한다’는 식의 규칙은 잘 만들지 않는다. ‘9시 이전에 집에 못 들어오게 될 것이라 예상될 때는 미리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정하는 것이다. 물론 예상치 못하게 늦게 들어갈 일이 생겼을 때는, 그때라도 전화로 연락을 해서 동의를 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할지, 아니면 미리 동의를 못 구했을 때는 무조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할지, 태음인끼리도 좀 차이가 나겠지만, 어쨌든 지키기 쉬운 쪽으로 원칙을 정하는 것에 신경을 쓰니까, 많아져도 지킬 만하다.
소음인은 아무리 사소한 원칙이라도 원칙을 정하는 일에 가족을 다 참여시키고, 아이의 의견도 반영하고, 아이에게 납득시키고 나서 원칙으로 정한다.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니 문제가 덜 된다. 그런데 역시 마찬가지로 교심(驕心)이나 긍심(矜心)이 강해지면 그런 기준이 다 깨져버린다. 부모의 독선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는 부부끼리도 일방의 독재가 시작된다.
음인(陰人)은 원칙을 정하는 방식에서 타고난 장점을 살리는 쪽으로 신경을 쓰면 된다. 이를 잃으면 늘 문제가 된다. 양인(陽人)은 그런 식을 흉내 내기는 어렵다. 따라서 원칙의 개수를 줄이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태양인이라면 가장 핵심이 되는 것만을 원칙으로 정할 수 있다. 무엇이 핵심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소양인이라면 모두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파악하니까, 그 중에서 원칙으로 삼을 만한 것을 고르면 된다. 잘 고르면 그 중에서만 골라도 그럭저럭 소양인인 본인이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가정이 운영되게 골라낼 수 있다.
4. 과심(誇心)과 도량(度量) / 소양인의 소음 기운
근거의 문제
소양인의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소양인의 사심(邪心)은 과심(誇心)이라고 한다. 자랑하고 과장하는 마음이다. 이 과심(誇心)을 극복했을 때 나오는 박통(博通)은 도량(度量)이라고 한다. 이른바 ‘도량이 넓다’라고 할 때의 그 도량(度量)이다.
과심(誇心)은 소양인이 소음인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이다. 일단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먼저 보자. 과심(誇心)이 뜬 소양인은 자기 말의 근거를 대는 일에 아주 민감해진다. 원래 소양인의 본성은 근거에 크게 관심이 없다. 어떤 주장이나 사실을 들었을 때,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기준에 안 맞으면 바로 배척하고,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어 그럴듯하다 싶으면 바로 받아들인다. 일단 받아들이면 그때는 그것이 자기 생각이고 자기 주장이지, 누구에게 어디서 들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소양인이 평소에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각각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느끼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논리 전개가 좀 어색하더라도 결론이 만족스러우면, 대부분 관대하게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잘 느끼는 사람은 논리의 엄밀성을 훈련할 필요가 줄어들게 된다. 설사 잘못된 부분이 있어 공격을 받더라도, 순발력을 발휘해서 기분 나빠지거나 어색해지는 일 없이 쉽게 타협안을 찾아낸다.
그런데 소양인이 생각하는 일반론이 부정되는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라는 생각에 별로 검토해보지도 않고 자신 있게 주장했는데, 그것이 완강하게 거부당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한 번, 두 번 당하게 되면 결국 소음인의 논리성을 배우려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어설프게 흉내 내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소음인이 논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보지 못하니까, 근거를 대는 것으로 논리성의 결핍을 보완하려 드는 것이다.
소음인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자기화하는 과정은 아주 복잡하다. 자신의 기존 논리체계와 부딪힘이 없는가를 하나하나 검토해보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 비로소 자기화한다. 따라서 일단 자기화되어 자신의 논리로 주장할 때는, 혼자 생각해낸 것이나 남에게 들어서 정리한 것이나 별 차이가 없을 정도가 된다.
논리 전개에 끌어들이는 근거 역시 일일이 검토해서 확실한 것만을 취한 것이다. 소음인의 논리가 적절한 근거로 보완될 때는 훨씬 힘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양인의 경우는, 논리만이 아니라 근거조차도 일반화에 의존한 것이다. 자신의 일반론이 부정되는 상황에서, 별 생각 없이 그냥 일반화되어 있다고 여겨버린 근거가 설득력을 가질 리 없다.
과심(誇心)이 실생활에서 드러나는 모습
‘별 생각 없이 그냥 일반화되어 있다고 여겨버린 근거’라는 말이 어려운가? 실제 나타나는 모습은 간단하다. 정도 이상으로 숫자를 들이대는 일, 권위자의 말이라고 우기는 일,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주장이라고 머릿수로 밀어붙이려 하는 일 등등, 이런 것이 다 과심(誇心)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예를 들면, 남대문시장에서 선물을 사가지고 미도파 포장 센터에서 미도파 포장지로 포장해서 선물하는 것. 비교적 경증에 속하는 경우이기는 하지만, 이런 정도도 엄밀히 따지면 다 과심(誇心)이다. ‘미도파는 남대문보다 좋다’ ‘비싼 선물은 싼 선물보다 성의가 들어간 것이다’라는 식의 일반론을 지나치게 따르는 것이 과심(誇心)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숫자 선호의 형태로 나타나는 과심(誇心)의 경우를 보자. 예전에 이런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아기에게 가장 적합한 분유의 온도는 32.4도’ 숫자는 기억이 안 나서 대충 쓴 것이지만, 하여튼 그런 내용의 광고였다. 선전하고자 하는 상품은 전자레인지. 소수점 아랫자리까지 정확한 온도를 맞춰줄 수 있는 제품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소양인은 세회(世會)를 보며 사무(事務)에 능하다고 했다.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 중에서는 소양인이 비교적 사회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가치실현이나 경제적인 이유를 떠나서라도 집안에만 앉아 있는 자체를 못 견뎌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다. 소양인 엄마가 직업을 가지게 되어 육아에 쏟는 시간이 모자라게 되면, 이를 다른 방법으로라도 어떻게든 보상해주려 한다. 그런 상황 역시 과심(誇心)이 발동하기 쉬운 상황이다.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데 중요한 것은 지나친 관심이 아니다. 바른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같이 있을 때 늘 애정(愛情)으로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 컸을 때의 정답이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는 엄마와 아이가 스킨십을 느끼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엄마도 그걸 느끼니까 늘 조금은 불안해하고, 육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신 없어 한다. 모든 사심(邪心)은 자기 긍정감이 부족할 때 발동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과심(誇心) 역시 마찬가지다.
위의 광고는 그 과심(誇心)을 자극한다. 소수점 아래까지 온도를 맞춰주면 좋은 전자레인지이고, 이왕이면 우리 아이를 위한 것은 좋은 전자레인지를 쓰라는 것이다. 소음 기운의 발동은 각각의 영역에 따라 적절한 기준을 설정하는 일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가정용 전자레인지에서 소수점 아랫자리란 과도한 기준이다.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주장인 것이다. 그래도 정확한 온도를 맞춰주는 것이 더 좋다는 건, 숫자에 대한 맹신을 자극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이가 잘 받아먹는 온도가 아이에게 가장 적합한 분유의 온도다. 그건 일단 아이에 따라 다 다르다. 같은 아이라도 몸 상태 따라, 즉 열이 있을 때, 속이 찰 때, 기운이 넘칠 때, 기운이 없을 때 등에 따라 잘 받아먹는 온도가 다 다르다. 아이가 먹는 정도를 보고, 아이의 노는 상태나 변의 상태를 보고 적당히 온도를 올리거나 내리는 것이 정답이지, 32.4도는 무슨 얼어죽을 32.4도인가? 그런 광고는 논리적인 소음인에게는 먹히지 않다. 소양인이라도 자신감 있는 소양인에게는 안 먹힌다. 아이마다 다 다른 법이라고 생각하는 태음인에게는 물론 안 먹힌다. 단지 과심(誇心)이 뜬 소양인을 노리는 광고인데, 별로 성공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과심(誇心)이 강해지는 상황
태양인의 경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소양인의 과심(誇心) 역시 가정이나 작은 집단에서 더 드러나기 쉽다. 특히 위아래가 있는 집단에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소양인은 윗사람의 의견이 옳을 경우가 더 많다는 일반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를 일으키기가 쉽다는 것이다. 공적인 일은 결국 윗사람, 경험이 많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이 최종 책임을 지고 결정해야 되는 경우가 많다. 고민도 윗사람이 더 하고, 자료도 윗 사람이 더 챙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적인 문제는 다르다. 공적 논리를 사적 영역에 들이대는 것이 양인(陽人)의 사심(邪心)이 드러나는 일반적인 경우다.
소양인은 아이의 불만이나 아랫사람의 항변을 반항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무시당하고 모욕당했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런 태도가 정당한 비판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디다 대고 말대꾸니?”라는 말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 소양인의 과심(誇心)이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
물론 꼭 좁은 영역에서만 과심(誇心)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과심(誇心)이 드러나기 쉬운 상황의 공통점은, 다수결이 안 통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대중의 감성을 파악하는 능력이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때 과심(誇心)의 유혹이 커진다. 순수한 논리로 접근해서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데, 그게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로 가정이라는 것이 이른바 일반적인 논리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곳이라는 점에서 소양인이 자기 주장을 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소양인의 과심(誇心)이 뜨기 쉬운 환경 중 하나가 논문 쓰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로 일관해야 한다는 상황이 과심(誇心)을 자극하기 쉽다. 소양인이 쓴 논문에는 참고문헌이 너무 많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인용할 때는, 그 주장이 그 사람만의 독창적인 주장이거나, 그 사람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이 논문의 논리 전개에서 중요할 때만 근거를 정확히 밝히면 된다. 그런데 소양인이 쓴 논문의 경우, 비슷한 주장을 한 사람이 여럿 있으면 각각의 이름을 다 밝히고 출전을 다 밝히는 식으로, 참고 문헌이나 주석이 상당히 많아진다. 그것 역시 과심(誇心)의 표현이다.
소음인의 논문은 참고자료를 주렁주렁 매다는 경우가 드물다. 인용도 꼭 필요한 만큼만 효율적으로 한다. 태음인은 게을러서 일일이 출전을 안 밝히는 경우가 많다. 또 태음인은 다른 사람의 주장을 듣고 그때 그때 정리하거나 필요할 때 필요한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한참을 쌓아둔다. 막상 인용할 때쯤에는 여러 주장이 자기 머릿속에서 적당히 서로 섞여서, 어떤 주장을 누구에게서 인용했다고 딱 부러지게 내놓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태음인 중에서도 치심(侈心)이 강한 사람은 참고자료 목록을 길게 늘어놓는 경우가 있다【치심(侈心)이란 지금 설명하고 있는 박통(博通) / 사심(邪心)과는 관계가 없고, 나중에 설명할 독행(獨行) / 태행(怠行)과 관련해서 설명할 단어인데, 우쭐하고 내세우고 싶어하는 마음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소양인과의 차이는, 소양인의 참고자료 목록이 권위 있는 자료, 남들이 중요시하는 자료를 많이 담고 있다면, 태음인의 참고자료 목록에는 이상한 자료, 어디 구석에서 찾아온 자료가 많다는 점이다. 즉 소양인의 참고자료 나열하기는 ‘내 의견이 이만큼 정확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태음인의 참고자료 나열하기는 ‘나 이만큼 연구 많이 했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태음인의 치심(侈心)은 좀 치사한 구석이 있다.
과심(誇心)이 떴을 때의 말하기
논문 쓰기에서 나타나는 과심(誇心) 이야기는 연구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이고, 과심(誇心)이라고는 해도 절제된 형태로 나타나는 가벼운 과심(誇心)일 뿐이다. 일반생활에서 자주 나타나는 과심(誇心)의 형태를 찾아보자. 보통 생활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과심(誇心)은 역시 강한 단어 사용하기다. 좀더 부드러운 단어로 말할 수도 있는데 굳이 가장 강한 단어를 골라 쓰는 것이다. 특히 소양인이 “절대 안 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와 같이 ‘절대’라는 단어를 쓰는 빈도가 높아지면, ‘이거 내가 과심(誇心)이 심해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절대’라는 단어는 더 이상의 논리 전개를 차단하는 단어다. 자신의 논리가 의심받는다고 느낄 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단어가 ‘절대’라는 것이다.
과심(誇心)이 강하게 떴을 때의 어법을 보고 싶으면 작년 민주당 국민경선 때의 후보 연설을 구해서 보면 될 것이다. 모 후보가 다른 후보를 색깔론으로 공격하며 국군통수권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공격했던 연설이, 과심(誇心)에 강하게 지배받고 있는 소양인 어투의 가장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겉보기에는 자신이 보편 쪽에 서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내심은 통할지 안 통할지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말투가 점점 강경해진다. 단어도 단어지만 한 마디 한 마디를 힘주어 말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자, 과심(誇心)을 정리해보자. 앞에서 과심(誇心)을 이렇게 설명했다. ‘과심(誇心)이란 일반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지만 논리적으로 옳은지가 검토되지 않아서 보편적 기준으로 사용하기엔 부족한 것을 보편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뭐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누가 가장 먼저 느낄까? 주장하는 소양인 본인이다. 나는 보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주장했는데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어딘가 마땅찮다. 감성이 예민한 소양인이 가장 먼저 안다.
여기서 태도가 갈라진다. 어설프게 소음인 흉내를 내면 억지로 근거를 끌어대기 시작한다. 말이 강경해지고, 자극적인 단어들을 쓰기 시작한다. 권위에 호소하고, 세를 불려 상대를 압도하려 든다. 그렇게 과심(誇心)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성 능력을 믿으면, 그런 함정에 안 빠진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러면 안 되겠구나, 사람들이 원하는 쪽에 맞춰주어야 하겠구나. 이렇게 되면 과심(誇心)이 절제된다.
사실 국민경선에서 색깔론을 들고 나온 사람이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정동영 의원도 제주경선 때 색깔론을 은근히 비쳤다. 그러나 반응을 보고 바로 철회해버렸다. 그러곤 경선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색깔론을 언급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느낌을 믿은 것이다. 또 경선이 끝까지 계속 되기를 국민들이 원한다는 것을 느끼고, 그 느낌에 따라 경선 지킴이라는 모습으로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결국은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게 된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사심(邪心)은 각 체질에 따른 약점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버리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새 판 펼치기
과심(誇心)은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으니, 다음은 과심(誇心)이 극복되었을 때 나타나는 도량(度量)을 보기로 하자. 이 역시 ‘절세의 도량(度量)’이라고 부를 만한 대단한 배포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사람들 간의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아, 왜들 그래”하면서 어깨 한 번 툭 쳐줄 수 있는 모습, “자, 자, 우리 술이나 한잔 하러 갑시다”라며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모습, 그런 게 바로 도량(度量)이다. 사실 이 정도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꽤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정도를 ‘절세의 도량(度量)’이라고 부르는가? 보통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기 힘든 살벌한 상황, 폭발 직전의 상황에서도, 도량(度量)의 경지에 도달한 소양인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절세의 도량(度量)’이다.
갈등은 논리로 어느 정도 해결된다. 제3자가 차분하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말로 설득하면 어느 정도는 가라앉힐 수 있다. 잘 흥분하지 않는 소음인이 갈등 해결을 해내는 것이 그런 이유다. 동무(東武)가 ‘소음인은 아무리 어리석어도 사람을 어루만질 줄 안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나 소음인의 논리만으로는 안 되는, 소양인의 ‘절세의 도량(度量)’이 필요한 단계가 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보통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이익의 충돌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의 충돌이다. 그런데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을 기준으로 하는 설명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충돌이 커지고 격해지는 이유는 감정의 충돌이다. 개인 대 개인의 충돌은 말할 것도 없고, 거대한 집단끼리의 충돌이나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충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에는 사소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충돌했다는 것이 창피하니까, 겉으로는 이익의 충돌이나 도덕관의 충돌인 것처럼 강조한다. 갈등이 시작되는 요인은 그게 맞겠지만, 갈등이 커지는 것은 서로 감정적 대응을 하며 마음이 상하기 때문이다.
일정 한도를 넘는 싸움은 감정싸움이다. 한 측면은 자존심 싸움이고, 또다른 측면은 불신감의 충돌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논리가 통하기 쉽지 않다. 논리가 아닌 도량(度量)이 앞에 나서야 되는 상황인 것이다.
또 하나, 의견 충돌은 기본적인 기준에서 차이가 날 때 복잡해진다. 기준이 명확할 때는 누가 옳고 그른지가 쉽게 가려지니까,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드물다. 즉 서로 다른 보편을 가지고 있을 때가 어렵다는 것이다. 소음인은 하나의 보편을 기준으로 정확한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데 장점을 가진다고 했다. 작은 갈등은 소음인만큼 명확하게 해결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두 집단이 보편이라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르면, 소음인은 슬슬 헷갈린다. 더군다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서로간의 자존심 싸움이 되고 불신감이 심한 상태에서는, 논리를 가지고 각각의 서로 다른 보편을 합쳐서 새로운 보편을 만드는 작업은 기대하기 어렵다.
논리는 그 다음이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을 찾는 게 급해진다. 이건 정오(正誤)의 문제가 아니다. 호오(好惡)의 감각으로 찾아내야 한다. 누가 잘할까? 소양인이 잘한다.
자, 다시 정리해보자. 소양인이, 자신이 보편이라고 생각했던 주장이 안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처했다. 어설프게 소음인을 흉내 내어 비논리적인 근거를 대고, 강경한 단어를 쓰고, 권위에 호소하기 시작하면 과심(誇心)의 함정에 빠진다. 하지만 자신의 장점을 믿고 자신의 방식으로 노력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새로운 기준이 찾아진다.
결국 소양인의 도량(度量)이라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적절한 때에 리셋(reset) 단추를 누를 줄 아는 것’이다. 자기가 고집하던 것, 자기가 보편이라고 믿었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마음까지만 되면 그 뒤는 쉽다. 자연히 소양인 특유의 순발력이 살아나고, 예민한 감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새로운 기준을 찾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도량(度量)이다.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과감히 리셋 단추를 누를 줄 아는 경지를 우리말로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새 판 펼치기’라고 하면 어떨까?
‘좋다/싫다’와 ‘옳다/그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위에서 말했던 정오(正誤)와 호오(好惡)의 관점을 조금 더 생각해보자. 소음인은 ‘옳다/그르다’에 민감하다. 즉 무엇이 옳은지를 알았다면, 설령 자신의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까지 힘겨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자체를 모르면 굉장히 답답해한다. 반면에 ‘좋다/싫다’라는 관점에는 비교적 둔감하다. 소음인의 특징 중 하나가, 자기 주변의 일이 딱딱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야 마음에 안정감을 갖는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이 안 되면 불안해한다. 그런데 각자가 ‘좋다/싫다’라는 관점을 쫓아간다면, 이건 아귀가 맞기도 곤란하고, 예측도 어려워진다. ‘옳다/그르다’라는 관점이 사람들이 공유하고 따르기에 훨씬 편한 관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소양인은 ‘좋다/싫다’가 명확하다. 싫은 일은 잘 못한다. 하지만 그런 접근이 세상을 불안하게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쪽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맞추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소음인이 자기 좋아하는 쪽을 쫓아갔을 때 무리가 생기는 것은, 소음인의 ‘좋다/싫다’가 시야를 좁힌 상태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소양인의 시야는 깊이는 없지만 넓이가 있다. 그래서 ‘좋다/싫다’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소음인의 경륜(經綸)이란 ‘옳다/그르다’라는 관점을 넓은 세상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키운 모습이다. 반면 소양인의 도량(度量)이란 ‘좋다/나쁘다’라는 관점이 좁은 영역에도 적용 가능하도록 다듬어진 모습이다.
우리가 보통 받아들이는 것과 좀 차이가 난다고 느낄 것이다. 보통 좁은 영역은 ‘좋다/싫다’로 처리해도 되지만, 넓은 영역에서는 ‘옳다/그르다’로 처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좁은 영역은 기준이 명확하니까 ‘옳다/그르다’로 따지기가 쉽고, 그렇게 따져야 한다. 이를 ‘좋다/싫다’로 따지면, 서로의 성향이 다를 때나 갈등 당사자 간의 권력관계가 불평등할 때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넓은 영역에서의 갈등은 갈등 집단 간의 기준 자체에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기준의 조절이 가장 중요하기에 오히려 ‘좋다/싫다’가 중요해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기준을 세우고, 그 작업이 끝나야 ‘옳다/그르다’를 따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수구 집단의 문제는 ‘개혁성향 = 빨갱이 = 불평불만분자 = 비애국자’라는, 일반 국민의 정서와 다른 기준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수구 언론의 경우 기준을 정확히 적용하지 못하고 수시로 흔들리는 논리의 부정확성이 자주 지적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대중의 정서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도량(度量)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집안이나 친구 사이, 작은 집단의 동료 사이에서 보통은 소음인이 내세우는 ‘옳다/그르다’라는 관점이 갈등 조절에 유용하다. 그런 모습이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 도량(度量)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준 자체가 틀리거나 심각한 감정 대립으로 치달은 상황에서는, 기존의 기준을 다 무시하고 빨리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소음인은 기준이 없어지면 불안해하고 당황한다. 자신의 기준 자체를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는 절대 도량을 보일 수 없다.
소양인은 자신의 기준을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대해 절세의 도량(度量)을 보일 수 있다. 자신의 순발력, 사람의 감성을 읽고 감성을 맞춰주려는 본성을 잃지 않을 경우이다. 반면 자신감이 부족해서 기준의 취소를 겁내기 시작하면 소음인 흉내를 내며 과심(誇心)이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다.
소양인 아이의 교육
계속해오던 대로 교육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자. 소양인 아이가 과심(誇心)이 자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다. 아이의 자신감을 키워주면서 아이가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으로 가르쳐서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아이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아빠는 그거 싫어” “엄마는 그런 행동 불쾌해” “네가 그런 행동 하는 것을 보니 엄마, 아빠가 몹시 슬프구나”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기본이다. 아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것이 아빠나 엄마에게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거 틀렸어, 그거 나빠”라는 말보다 아이가 훨씬 쉽게 받아들인다. 감성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걸 옳지 못하다고 하면 아이는 자기 주장을 지키려고 무리하게 논리를 끌어댄다. 과심(誇心)이 자라는 토대가 된다. 부모의 감정을 아이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좁은 영역이 될수록 ‘좋다/싫다’의 대립이 클 수 있고 적절한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가 스스로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그 깨달음이 과심(誇心)을 피하고 도량(度量)으로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소양인 아이에게는 ‘틀렸다’ ‘나쁘다’라는 말을 최대한 줄여주어야 한다.
5.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에 관한 몇 가지
태음인, 태양인의 관점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에 관한 이야기는 대충 정리가 되었는데, 소음인의 ‘옳다/그르다’, 소양인의 ‘좋다/싫다’라는 관점을 이야기한 김에 다른 체질 이야기도 같이 다뤄보자. 태음인의 관점은 일차적으로는 ‘성(成)/패(政)’에 많이 치우쳐져 있다. ‘된다/안 된다’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성/패’를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사람도 꽤 된다. 너무 ‘된다/안 된다’ 만을 따지면 좀 속물같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차적으로 ‘맞다/틀리다’를 내세우는 사람이 많아진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 상당히 강조했기 때문에 ‘맞다/틀리다’와 ‘옳다/그르다’가 같은 이야기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맞다/틀리다’는 서로 어울리느냐, 어울릴 수 없느냐의 문제다. 영어로 하자면 ‘fit/unfit’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맞다/틀리다’가 ‘옳다/그르다’와 같이 ‘right/wrong’의 개념으로 쓰이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전체주의적 사고의 영향이다. 주자학 하나만이 옳은 것으로 받아 들여졌던 세월에 이어, 천황이 절대 기준인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겪고, 이어서 바로 군사독재에 시달려온 흔적이 우리의 말글살이에 남아 있다. 매사에 기준이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그 기준과 틀리면 그른 것이고, 그 기준과 맞으면 옳은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른 것은 버려야 한다. 틀린 것은 맞춰야 한다. 틀린 것을 버린다면 어느 쪽을 버려야 할까? 틀린 것은 서로 틀린 것이다. 한쪽만 틀린 경우는 없다. 버린다면 둘 다 버려야 하는가? 또 틀린 것은 조금 돌려서 맞춰보면 맞을 수도 있다. 개똥도 약에 쓰일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런 식으로 서로 맞춰나가는 것이 태음인의 관심사다. 인륜(人倫)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니다. ‘맞춰나가 보자꾸나.’ 그게 인륜(人倫)이다.
태음인은 망가진 물건이나 낡은 물건을 웬만해서는 잘 안 버린다. 어딘가 쓸데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뚜렷한 적에 대해서도 화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여지를 조금은 남겨놓고 싶어한다. 확실한 태음인인 것 같은데도 물건도 과감하게 잘 버리고 사람 관계 정리도 화끈하고 깨끗한 사람이 있어서 체질을 잘못 본 것이 아닐까 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가끔 있기는 한데, 좀 드문 경우다.
태양인은 ‘좋다/나쁘다’라는 관점에 민감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소양인과 같이 ‘좋다’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한자로 하자면 태양인은 ‘선(善)/악(惡)’이라는 관점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악이 개인윤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집단 전체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라는 관점이 강하다. 태양인의 출발은 인(仁)이기 때문이다. 두루 유리하게 만드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또 이 ‘좋다/나쁘다’를 개별적인 ‘행동’이나 개별적인 ‘생각’에 적용한다. 즉 그런 행동이나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적용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나 벌심(伐心)이 강해지면 달라진다. 태양인이 사람을 ‘착한 분/나쁜 놈’으로 갈라보는 경향이 생겼다면 그건 벌심(伐心)이 강해졌다는 증거다.
사심(邪心)과 태행(怠行)의 비교
사심(邪心)에 대해 이해해둘 것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마무리하자.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이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된 문제다. 즉 성(性)과 관련해서 천기(天機)에 있어 자신이 약한 영역을 이해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심(邪心)에 빠졌다거나, 박통(博通)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은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사고방식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이를 설명할 때는 아무래도 그런 사고방식에 의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방식만을 설명해도 자기 체질에 대한 설명은 잘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즉 교심(驕心)이니, 주책(籌策)이니 하는 내용을 세상에 대한 인식 방식에 관한 것으로 국한해서 설명해도 태음인은 잘 알아듣는다. 또 소음인에게 긍심(矜心), 경륜(經綸)을 이야기하면 잘 알아듣는다. 그러나 다른 체질에게 그런 식으로 설명해서는 알 듯 모를 듯하다는 반응만 나올 뿐이다. 그런 사고방식에 의해 나타나는 행동을 직접 예로 들어줘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한계 때문에 사심(邪心), 박통(博通)의 문제도 행동을 중심으로 설명을 했지만, 초점은 마음 자세에 있는 것이다.
반면 뒤에서 설명할 태행(怠行)과 독행(獨行)의 문제는 전적으로 행동의 문제다. 즉 인사(人事)를 할 때 약한 부분의 문제다. 물론 그런 행동이 어떠한 마음일 때 강해지는가의 문제가 있으니, 어느 정도는 마음의 문제도 같이 다뤄지기는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겉으로 드러나는 다른 체질의 행동을 어설프게 흉내 내느냐, 아니면 자신의 장점을 키워서 그런 행동이 가능한 경지에 가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사심(邪心), 박통(博通)이 마음 쓰는 방식의 문제인 것과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 독행(獨行)은 꾸준한 행동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결국 사심(邪心)이 강한 사람도 주변의 강한 제재를 받는 상황에서는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세상을 비뚤게 볼 뿐,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심(邪心)이 강한 사람이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자신의 사심(邪心)을 행동으로 표출하게 되면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기본 방식이 틀려 있으니까 오히려 큰 문제를 일으킨다. 뒤에서 설명할 태행(怠行)은 행동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이라 다른 사람에게 바로 피해를 주게 되지만 그 피해가 많은 사람에게 넓고 강하게 작용하는 정도는 오히려 덜한 경우가 많다.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서 지속적이지 않고 일시적, 충동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사심(邪心)으로서의 공주병과 도사병
사심(邪心), 박통(博通)이 정리된 기념으로 가벼운 이야기를 하나 하도록 하자.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아주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사심(邪心)의 형태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보이기도 하면서 상당히 강한 사심(邪心)에 해당되는 것이라, 이해하기도 쉬운 예가 될 것이다.
긍심(矜心), 과심(誇心)은 강한데 사회성이 부족하면 보통 공주병의 형태로 나타난다【여기서 공주병은 공주병/왕자병을 통칭하는 말이다. 여성을 비하해서 공주병을 대표로 잡은 것이 아니라, 공주병이라는 말이 왕자병이란 말보다 먼저 나왔기에 대표 용어로 삼았다】.
그런데 그게 또 긍심(矜心)형과 과심(誇心)형의 차이가 있다. 소음인의 긍심(矜心)에 토대를 둔 공주병은 ‘나 잘났어’ 형의 공주병이다. 남들에게 돋보이려 하고, 잘 보이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어른이 보기에는 무지무지한 모범생인데 아이들 사이에는 왕따당하는 아이 중에 이런 경우가 많다. 본인은 자기가 왜 왕따당하는지 모른다. 자신은 늘 잘하고 있으니까. 더 잘하려고 하고, 더 왕따당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본인은 다른 아이들이 그냥 시샘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소양인의 과심(誇心)에서 나온 공주병은 ‘너 틀렸어’ 형이다. 요즘 유행하는 ‘나가 있어’니 ‘천한 것들’이니 하는 말들이 과심(誇心)형 공주병의 증세다. 이런 유형의 공주병은 기세가 강하면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특정 아이를 왕따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본인이 기세가 약하면 역시 거꾸로 왕따당하게 된다.
결국 공주병이란, 긍심(矜心)형이든 과심(誇心)형이든 대중을 너무 의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만 그 나오는 형태는 조금씩 다르다. 긍심(矜心)형이 범생이 타입 공주병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좀 높고, 과심(誇心)형은 날나리 타입 공주병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높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서, 때론 반대가 되기도 하고 때론 범생이 타입과 날나리 타입이 뒤섞인 유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태양인의 벌심(伐心)이나 태음인의 교심(驕心)은 도사병(道士病)의 형태로 나타난다. 도사병이란 말은 필자가 만든 말인데, 공주병이 대중을 너무 의식하는 것이라면 도사병은 세상의 기준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예는 앞에서 들었던 바 있는, 일주일씩 머리 안 감고 삼사일씩 이빨 안 닦는 형태.
무협지라든지 기 수련이라든지 UFO에 대한 탐닉 같은 것도 다 그런 형태다. 다만 아무리 그런 것에 열중하더라도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면 그것은 도사병이 아니다. 건전한 호기심이고, 자기 발전의지의 표출일 수 있다. 또 일상적인 생활이 깨지거나 그런 탐닉 자체가 생활의 주요 부분이 된 경우라도, 진짜로 탐구심이 깊어져서 된 것이라면 도사병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사병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런 탐닉의 결과로 대인관계가 깨지면 도사병이다. 대인관계의 붕괴는 그 탐닉이 진정한 탐구가 아니라 현실 도피성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도사병도 사심(邪心)이 강해서 생기는 것이니까, 태양인의 벌심(伐心)형과 태음인의 교심형(驕心型)이 있다. 벌심형(伐心型)은 ‘천박한 무리, 혼탁한 무리와 놀고 싶지 않다’는 형태가 되어 남을 탓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교심형(驕心型)은 ‘무식한 무리와 놀고 싶지 않다’는 형태로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물론 사심(邪心)이 강해진다는 것이 겉보기에 태양, 태음 기운이 같이 강해지는 것이라, 이 두 가지가 뒤섞여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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