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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 책을 시작하며 & 프롤로그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 책을 시작하며 & 프롤로그

건방진방랑자 2022. 3. 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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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시작하며

 

 

()라는 글자는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 앞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글자의 뜻이 옳다면, 유학은 일종의 종교적 예식을 배우는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공자(孔子)라는 유학자가 등장하면서 유학(儒學)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바뀝니다. 초월적인 신에게 향했던 공경이 이제 인간에게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공자가 동아시아 최초의 인문학자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공자를 통해 유학은 마침내 종교라는 외양을 벗고 인문학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유학(儒學)은 보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 또는 봉건적인 남성중심주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언제부터 생겼던 것일까요? 나는 그것을 서양 문명의 도래에서부터 찾고자 합니다. 압도적인 서양 문명의 힘에 떠밀려 동아시아의 정신은 무조건 낡은 것, 따라서 폐기 처분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지요. 이로써 공자가 개창하고 맹자가 체계화하기 시작한 유학사상은 동아시아 문명을 열등하게 만든 원흉으로 지목되고 맙니다. 공자 이래 동아시아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지배했던 것은 바로 유학 사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유학 사상은 과연 철저하게 부정되어야 할 낡은 관념일까요? 나는 여러분에게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급하게 대답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과거의 유학자들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공자 이래 2500여 년 동안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에 깊이 연루된 유학 사상을 단번에 쓸어버리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어찌 보면 유학 사상은 오류로 가득 찬 허위적인 담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내리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유학 사상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우리는 성인(聖人)이 되려고 열망했던 수많은 유학자들의 속내를 이해하고 있을까?”

 

불행히도 유학(儒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의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평가하거나 비판하기에 앞서 그것을 먼저 정확히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나는 유학자들을 우리 강의실로 초청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고뇌를 간접적으로나마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서양 문명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무척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외국어를 구사하는 낯선 이방인들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이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내와 애정을 가져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나는 13인의 유학자들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유학의 역사를 장식한 탁월한 인물들이 많지요. 그러나 나는 유학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유학 사상을 살리려고 고군분투했던 인물들로 선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학을 비판하면서도 다시 유학의 품으로 돌아오는 험난한 여정을 겪은 인물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우선 그들의 말을 경청해주십시오. 13인 유학자들의 속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애정이 필요할 테니까요.

 

끝으로 이런 강의의 기회를 제공해준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계절출판사의 강맑실 사장, 정보배 인문팀장, 조건형 씨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분들의 호의와 애정이 없었다면, 유학자들에 관한 이 강의를 시작하는 것이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도 뜻하는 좋은 일들이 자주 찾아오길 기원합니다.

 

200711

백민정

 

 

 

 

프롤로그

 

 

1. 창시자가 아닌 인간으로

 

 

공자(孔子)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하긴 중·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도 수차례 등장하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겠지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을 보니, 공자라는 인물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자는 몇몇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단지 이름만 알려진 2500여 년 전의 중국 사상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그는 예수, 부처와 함께 세계 3대 성인으로까지 추앙받는 인물이긴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세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가르침을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가 사랑(love)’을 말했다면, 부처는 자비 (karuṇā)’를 이야기했고, 공자는 ()’을 강조했다는 것이지요. ‘사랑이든 자비이든 아니면 이든, 이것들은 모두 타인에 대한 동정이나 아낌없는 애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한때 성경(聖經)을 번역할 때 예수를 인자(仁者)로 번역했던 것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부처와 동등한 성인으로 공자를 묶는 순간, 공자라는 인물이 종교의 후광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와 부처가 각각 기독교불교의 창시자인 것처럼, 똑같이 공자도 유교(儒敎)라는 종교의 창시자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종교를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있는 초월적 가치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나 부처와 마찬가지로 공자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어떤 초월적 진리를 설파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공자라는 인물을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직면한 삶의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평범한 인간이었지요. 그러나 공자의 위대함은 그가 당면했던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공자의 위대함은 종교적인 데 있다기보다 철학적인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어 논어(論語)에 전해옵니다. 이 책의 선진(先進)편을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등장합니다. 어느 날, 제자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귀신과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삶도 아직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그렇습니다. 만약 공자가 유교라는 종교의 창시자였다면, 그리고 종교가 삶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인 가치를 다루는 것이라면, 그는 실패한 종교 지도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 어떤 확실한 언질도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점이 인간 공자가 가진 장점이 아니었을까요? 그가 유교라는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유학(儒學)'이라는 철학 사상의 창시자라는 점이 부각될 수 있었으니까요.

 

공자는 []’을 알려고 했으며,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사상가이자 철학자였습니다. “삶도 아직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그의 반문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방법 하나를 제안합니다. 그런데 공자의 유학 사상은 종교와는 달리 항상 검증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공자가 제안했던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의 가르침이 유학이 아니라 유교라는 종교였다면, 우리에게는 그것을 검증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을 테니까요. 이 경우, 모든 종교가 흔히 그렇듯이 공자의 가르침도 맹목적으로 신봉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거부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 화려하게 되살아난 공자

 

 

20021130일은 공자(孔子)와 관련해 상징적인 날로 기억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날, 중국 명문대학의 하나인 중국인민대학에서 중국 인민대학 <공자연구원>의 창립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기념식에는 중국공산당의 주요 인물들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한국, 일본 등에서 수많은 유력 인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공자연구원>이 창립된 이날, 중국공산당의 이론지라고 할 수 있는 광명일보(光明日報)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유가 사상은 2000여 년 동안 발전하면서 중화민족의 정신을 배양했고, 민족 주체 정신을 창조하는 중임을 담당했으며, 그 자체의 생명과 지혜로 중화민족의 영원한 독립과 발전을 수호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보면서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기억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2002년 화려하게 부활한 공자는 1970년대까지 중국공산당에 의해 마치 죽은 개와 같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의 선전 문구는 그 당시 공자가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역설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공가점(孔家店)은 봉건주의, 자본주의의 상징이며, 4대 구악(舊惡)의 대표이고,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는 세력의 지주이며, 모택동 사상의 절대적 권위를 수립하는 데 큰 장애이다. 반드시 공가점을 타도해야 한다. 반드시 공가점을 타도해야 한다.

 

 

이 구절에서 공가점이란 말이 어렵지요? 그것은 공자의 상점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공자의 학설을 이야기하고 전파하던 곳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문화대혁명을 수행했던 홍위병들, 즉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추종했던 젊은이들은 북경에서부터 공자상이 모셔져 있던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까지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자상을 심하게 훼손합니다. 공자상의 눈을 파내고, 그의 복부를 뚫어버렸습니다. 이어서 홍위병들은 공자상의 가슴에 천하의 몹쓸 놈[頭號大混蛋]’이라는 종이를 붙이고 격렬한 가두행진을 벌입니다. 마침내 행진이 끝난 뒤 공자상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제 알겠지요? 20021130일은 산산이 부서졌던 공자상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화려하게 복귀하는 날이었음을 말입니다. 이날 <공자연구원>은 창립 목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우수한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공자 사상의 정수를 널리 알리고, 국민의 인문적 소질을 함양하며,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공자가 중국에서 이처럼 화려하게 되살아난 것일까요? 우리의 의문을 해결해줄 실마리는 앞에서 살펴본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의 선전 문구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공자의 사상이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 홍위병들의 평가를 한번 더 살펴볼까요? 잘 알다시피 중국은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사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어떻게 동거할 수 있는 지는 하나의 의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를 중시하는 공산주의와 자본가를 중시하는 자본주의가 중국에서는 분명 나란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분기점 가운데 공자 사상의 정수를 널리 알리려는 <공자연구원>이 위풍당당하게 그 막을 연 것입니다.

 

논어(論語)의 첫 번째 편인 학이(學而)를 보면 예의 쓰임은 조화를 귀하게 여긴다[禮之用, 和爲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절의 중요한 목적은 조화를 지향한다는 의미입니다. 어쩌면 현대 중국은 공자의 유학(儒學) 사상에서 강조했던 조화[]’의 정신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갈수록 깊어져만 가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무력으로 해결하기보다 조화를 지향하는 정신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조화란 대다수 중국 인민과 새롭게 등장한 자본가들, 또는 인민과 공산당 지도부 사이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결국 중국 내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충돌하는 것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논리와 명분을 공자에게서 찾아내려는 것입니다.

 

과연 공자의 복권이라는 현상이 단순히 이 정도로 그치는 문제일까요? <공자연구원>의 창립 목표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중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성격을 우선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연구원>의 선언문은 여기에서 더 나아갑니다. 그들은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를 건설한다는 원대한 구상을 펼쳐보였습니다. 현재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잠재력으로 보았을 때, 앞으로 머지않아 중국이 세계의 패권국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점은 누구든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만약 중국이 언젠가 그와 같은 국제적 힘을 갖게 된다면, 그들이 선양하는 공자의 유학(儒學) 사상 또한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그 서막이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3. 13명의 유학자들로 살펴본 가능성과 한계

 

 

이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중국의 입장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호응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007년 공영방송인 KBS에서 아시아 문명기획 인사이트 아시아라는 기치로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 제목은 유교, 2500년의 여행이었지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을 시청했을 것입니다. 방송뿐만 아니라 그 기획은 곧바로 책으로도 출간되어 나왔습니다. 유교, 아시아의 힘(예담, 2007)이라는 책입니다. 물론 KBS 측에서 방영한 <유교, 2500년의 여행>은 최근에 일고 있는 한류 분위기에 편승하여 단순히 상업적 이윤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심각한 정치적 의도나 은밀한 목적을 위해서 마련한 프로그램은 아닐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방송과 책에서는 중국, 한국, 일본 심지어 서양 학자들까지 동원하여 유교를 21세기의 비전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사상으로 선전했습니다. 이러한 관점과 평가는 2002<공자연구원>이 제안했던 것을 거의 그대로 반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2000년도 더 지난 공자의 사상이 중국이나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인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방송과 책에서 설파한 것처럼 유학(儒學)은 서양 문명으로 망각된 전통적 삶의 지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솔직히 고백해야만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유학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야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판단의 대상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어떻게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유학을 그저 낡은 골동품인 양 방치하고 내버려두었습니다. 그것을 음미해볼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실 조선시대를 풍미한 유학에 대해 오늘날의 우리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전통 유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뜻입니다. 급작스런 서구화를 거치면서 유학을 너무나 낡은 것으로, 심지어 동아시아 세계를 서양에 비해 뒤처지게 만든 주범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학(儒學)을 미래의 가치로 긍정하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낡은 사유로 비판하는 우리는 먼저 유학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긍정이나 부정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위험한 일이 되겠지요.

 

이 책의 의도는 유학 사상의 정수를 알리려는 것입니다. 2500년 전 공자에게서 시작된 유학 사상은 불변의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상사적으로 살펴보면 유학은 새로운 정치적인 환경이나 이질적인 사상의 도전에 맞서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다시 말해, 공자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역사는 계속 발전한 변화의 역사였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유학 사상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유학자들의 사유를 점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2500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유학자들의 사유를 일일이 점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 책에서 중국, 한국, 일본, 즉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유학자 13인만을 선택하여 다루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여기에서 다루는 13인의 유학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중국에서 활동했던 유학자 공자, 맹자, 순자, 장재, 정호, 정이, 주희, 왕수인, 한국에서 활동했던 유학자 이황, 이이, 정약용,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유학자 이토 진사이오규 소라이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13인의 유학자들을 선택한 이유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유학 사상이 그 가능성을 어떻게 실현했는지를 이들이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자를 제외한 12인의 유학자들은 모두 공자의 사유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면서 자신들의 고유한 사유를 전개합니다. 그들은 한편으론 공자에 의존하면서도 각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공자의 정신을 구현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공자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유학자들이 펼쳤던 사유의 향연을 살펴보려 합니다.

 

개성 있게 전개되었던 동아시아 13인 유학자들의 사유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독자들은 아마도 유학(儒學) 사상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나름대로 입장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각 유학자들의 지엽적인 사유에 대해서는 가급적 배제할 예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유학자들과 구별되는 그들만의 고유한 사유를 정확히 짚어내는 일일 테니까요. 여기에서 다룬 13인의 유학자들의 전모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각 장 말미에 더 읽을 것들이라는 항목을 마련하여 참고가 되도록 했습니다. , 그럼 13인의 유학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펼치는지 살펴보도록 할까요?

 

 

 

 

인용

지도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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