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시작하며
유(儒)라는 글자는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 앞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글자의 뜻이 옳다면, 유학은 일종의 종교적 예식을 배우는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공자(孔子)라는 유학자가 등장하면서 유학(儒學)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바뀝니다. 초월적인 신에게 향했던 공경이 이제 인간에게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공자가 동아시아 최초의 인문학자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공자를 통해 유학은 마침내 종교라는 외양을 벗고 인문학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유학(儒學)은 보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 또는 봉건적인 남성중심주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언제부터 생겼던 것일까요? 나는 그것을 서양 문명의 도래에서부터 찾고자 합니다. 압도적인 서양 문명의 힘에 떠밀려 동아시아의 정신은 무조건 낡은 것, 따라서 폐기 처분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지요. 이로써 공자가 개창하고 맹자가 체계화하기 시작한 유학사상은 동아시아 문명을 열등하게 만든 원흉으로 지목되고 맙니다. 공자 이래 동아시아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지배했던 것은 바로 유학 사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유학 사상은 과연 철저하게 부정되어야 할 낡은 관념일까요? 나는 여러분에게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급하게 대답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과거의 유학자들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공자 이래 2500여 년 동안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에 깊이 연루된 유학 사상을 단번에 쓸어버리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어찌 보면 유학 사상은 오류로 가득 찬 허위적인 담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내리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유학 사상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우리는 성인(聖人)이 되려고 열망했던 수많은 유학자들의 속내를 이해하고 있을까?”
불행히도 유학(儒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의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평가하거나 비판하기에 앞서 그것을 먼저 정확히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나는 유학자들을 우리 강의실로 초청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고뇌를 간접적으로나마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서양 문명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무척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외국어를 구사하는 낯선 이방인들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이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내와 애정을 가져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나는 13인의 유학자들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유학의 역사를 장식한 탁월한 인물들이 많지요. 그러나 나는 유학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유학 사상을 살리려고 고군분투했던 인물들로 선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학을 비판하면서도 다시 유학의 품으로 돌아오는 험난한 여정을 겪은 인물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우선 그들의 말을 경청해주십시오. 13인 유학자들의 속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애정이 필요할 테니까요.
끝으로 이런 강의의 기회를 제공해준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계절출판사의 강맑실 사장, 정보배 인문팀장, 조건형 씨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분들의 호의와 애정이 없었다면, 유학자들에 관한 이 강의를 시작하는 것이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도 뜻하는 좋은 일들이 자주 찾아오길 기원합니다.
2007년 11월
백민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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