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시작과 끝
종말은 끝에 있지 않고 시작에 있나니라
❝개인의 종말은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이 시간의 종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흔히 종말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체의 죽음이 아닌 세상의 종말 같은 것인데, 인간세상이 종말된다고 또 시간이 종료되는 것도 아니다. 종말은 반드시 또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적 예수는 종말론과는 거리가 먼 사상가였다. 종말론을 운운한다면 예수의 종말은 시간을 역행하는 종말이었다.❞
제18장
1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2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3시작에 서 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
1The followers said to Jesus, “Tell us how our end will be.” 2Jesus said, “Have you discovered the beginning, then, so that you are seeking the end? You see, where the beginning is the end will be. 3Blessed is the one who stands at the beginning: That one will know the end and will not taste death.”
도마복음서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포괄적 함의를 지니는 말씀자료라 할 것이다. 따르는 자들(the followers), 혹은 제자들(the disciples)의 질문에 예수가 매우 근원적인 사고의 반전을 꾀하는 방식으로 대답하고 있다. 제자들의 질문은 ‘우리의 종말(our end)’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종말’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텍스트의 분석에 앞서 도마복음의 전체적 성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종말’을 이야기하면 곧 그것을 초대교회의 종말론(eschatology)과 연결시킬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모습에는 종말론적 윤색이 없다. 예수는 결코 종말론적 사상가가 아니었다. 예수는 오히려 종말론을 부정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도마복음은 종말론과 무관하다. 도마복음의 비종말론적 성격을 두고, 도마복음의 연대를 내려잡는 사람들은, 초대교회 종말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식으로 주해를 가한다. 그러나 도마복음의 로기온자료는 대부분이 초대교회 이전의 오리지날한 예수운동의 성격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당하다. 그 정당성은 텍스트 그 자체가 말해주고 있다.
이 장과 관련된 공관복음서 자료는 마가 13:3~4, 마태 24:3, 누가 21:7에 나오고 있다. 이 중 가장 오리지날한 자료인 마가를 인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從容)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 13:3~4).
도마복음의 ‘따르는 자들’은 여기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로 구체화되었다. 도마복음의 따르는 자들은 구체적 지칭성을 지니지 않는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기 위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다(Th.1), 그리고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한다’는 구체적 상황성이 맥락적으로 전제되어 있지 않다. 이미 마가는 도마복음의 추상적 주제들을 예수 생애의 드라마적 장면 속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우리의 종말’이 ‘어느 때에 이런 일’로 변형되고 있다.
‘이런 일’이란 이미 그 앞에서 이루어진 예루살렘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마 13:1~2)을 지칭하고 있다. 도마의 추상적 질문이 철저히 종말론적 맥락 속에서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성전 멸망에 대한 예수의 예언은 당연히 실제적 역사상황 속에서 일어난 예언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은 티투스의 4개 군단이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시킨 사건(AD 70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서 작가들은 이와 같이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태들을 놓고 마치 사전에 이루어진 예언의 성취인 것처럼 드라마타이즈시키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문학적 상상력은 구약의 다양한 기술 속에 내재하는 오랜 전통이다. 그리고 예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현실에 대한 도덕적 징계에 있는 것이다. 점쟁이 스타일의 예측에 있지 아니 한 것이다. 그런데 마태의 기술은 한 발짝 더 나갔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사건과 예수의 재림은 인과적으로 필연적 관계가 없다. 여기 ‘임하심’이라는 말로서 선택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라는 말은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나타내는 전문용어이다. 마가는 예루살렘 성전 멸망이라는 사건만을 이야기했는데, 마태는 거기에 ‘주의 임하심’(재림)과 ‘세상끝’(종말)이라는 두 사태를 첨가시켜 놓았다. 초대교회의 문제의식을 더욱 명료하게 노출시킨 것이다. 마가의 숨겨진 의도를 마태는 항상 명백하게 드러내는 성향이 있다. 그 뒤로 ‘공관복음서의 계시록’이라고 말하는 종말에 대한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마가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하리라”라고 표현한 것을, 마태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라고 하여 그 표현을 기독론적 맥락에서 구체화시키고 있다.
▲ 이집트 사막의 거대한 피라미드나 돌 건축도 레바논의 백향목 없이는 불가능했다. 비계, 운반 굴림목, 지붕, 문, 창틀 곳곳에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동쪽 지하에 모인 태양의 배, 쿠푸의 영혼이 하늘로 가기 위해 타는 43.5m 길이의 이 배도 물론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거대한 태양의 배도 종말과 시작이 끊임없는 순환임을 말해주고 있다. 융이 말하는 아키타입의 한 표현일까?
여기 도마복음을 살펴보면 그 본래적 맥락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는’ 외재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종말’이라는 실존적 사태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르는 자들이 예수에게 묻고 있는 ‘우리의 종말(our end)’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종말’은 따르는 자들의 개체적 사태이며, 그것은 개체의 죽음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죽음은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일어날 것인가?
공자의 사랑하는 제자 안회(顔回)가 죽었다. 아마도 안회의 장례를 치르고 난 직후였을 것이다. 자로가 공자에게 불쑥 묻는다. “죽음에 관하여 감히 여쭙고자 하옵니다[敢問死]?” 이에 공자는 무어라 대답했던가?: “아직 삶도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
전통적으로 이러한 공자의 대답은 기독교의 사상과는 아주 대조적인 현실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종말을 캐는 도반들의 물음에 관한 예수의 답변은 공자의 대답방식과 크게 차이가 없다. 공자는 죽음에 대한 물음을 삶에 대한 물음으로, 그 관심을 근원적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종말에 대한 물음을 근원적으로 시원·시작에 대한 물음으로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들이 나에게 너희들의 종말에 관해 묻는가? 그렇다면 너희들이 이미 너희들의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시작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공자가 죽음을 삶으로 이동시켰다면 예수 또한 종말을 시작으로 이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반들의 사고의 근원적 혁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과연 예수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 감람산(The Mount of Olives) 전경(위). 아래 사진은 감람산 중턱 겟세마네 동산에 세워진 아름다운 주 울음 교회(Church of Dominus Flevit)의 모습, 감람산은 예루살렘과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동편에 있는 동산으로 베다니와 여리고 방면으로 쭈욱 뻗쳐있다. 감람산은 해발 850m, 여리고는 해수면 보다 250m 낮다. 감람산이라는 명칭은 구약에는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삼하 15:30, 슥 14:4). 그러나 신약에는 예수가 예루살렘 부근에 있을 때는 기도나 휴식할 때 항상 찾는 곳으로 등장한다(마 24:3, 26:30, 눅 21:37. 요 8:1),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도 감람산 방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마 21:9). 본 장의 종말론적 언급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페르시아적 사유와 초기기독교
나 예수는 종말론의 종말을 선포하노라, 시작에 서라
❝예수운동에서 초기기독교로의 전환에는 기독론과 종말론이라는 두 개의 트랜스포메이션의 틀이 있다. 기독론, 즉 메시아사상은 유대교 자체의 전통에 속하지만, 종말론이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 속에서 시대의 요청에 따라 강조되어간 이방전통이다. 종말론이 성행하면서 기독론조차도 원래의 정치적 맥락을 상실하고 재림사상으로 변모되어갔다. 역사적 예수는 이런 틀 속에서 포착되지 않는 동방적 사유를 과시하고 있다.❞
제18장
1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2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3시작에 서 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
1The followers said to Jesus, “Tell us how our end will be.” 2Jesus said, “Have you discovered the beginning, then, so that you are seeking the end? You see, where the beginning is the end will be. 3Blessed is the one who stands at the beginning: That one will know the end and will not taste death.”
도마복음서의 발견과 큐복음서의 재발견은 초대교회에 대한 전통적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0세기의 신학사조는 아무리 과격한 사조라 할지라도 최소한 1세기의 초대교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그 오리지날리티를 인정하고, 그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출발이라고 암암리 전제하여 왔다. 그것이 어떠한 모습을 지니던간에 숙명적으로 그것은 기독교의 원점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이러한 가설에 새로운 차원들을 도입하게 만들었다. 원점을 거슬러 또 새로운 원점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불트만만 해도 ‘원점 너머 또 원점’을 설정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예수’에 관해 본질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예수에 관해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료는 4복음서였으며, 이 4복음서는 이미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의 소산일 뿐이며, 케리그마는 이미 종말론의 전제가 없이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단정지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초대교회(the Earliest Church)는 이미 종말론적 회중(the Eschatological Congregation)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세상 끝의 무리’라고 규정짓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본래적 성격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는, 현재의 보수적 교권의 압력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독교(Christianity)’라 할 때에는 이미 기독론(Christology)의 전제가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운동(Jesus Movement)’은 기독교 이전의 사태이며, 기독교의 전제들에 물들지 않은 어떠한 원초적 성격의 사회운동이었다. 예수운동에서 기독교로의 전환에는 불과 3·40년의 시간의 개입이 있을 뿐이지만 크게 두 가지 왜곡된 설정이 있다. 그 하나가 기독론이고, 또 하나가 종말론이다. ‘왜곡’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린다면, 예루살렘멸망 이후의 절박한 시대적 요구와 복음서 작가들의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정당한 트랜스포메이션이라고 말해도 좋다. 기독론이란 역사적 예수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아들, 즉 독생자이며 이 세상을 침략자들의 억압에서 구원할 구세주라고 하는 신념을 표방하는 메시아사상(Messianism)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아는 매우 구체적인 정치사적 함의를 지니는 사건이며 다윗 왕가의 혈통에서 나올 때만 그 정통성이 확보된다. 이 메시아시상은 명백히 유대인 사제의 전통에 속하는 것이다.
▲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던 페르세폴리스의 부조 아후라 마즈다상, 상반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손에는 원반을 쥐고 있으며, 허리 아래 양옆으로 날개가 펼쳐져 있다. 날개는 사유의 순결과 말과 행동을 상징한다(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말의 三正道).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섬기며 페르시아 종교를 개창한 조로아스터는 공자와 동시대이며, 바로 니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이다. 베들레헴의 마구간 아기 예수를 방문한 동방박사 3인도 조로아스터교의 3마기(magi)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은 유대인의 시상이 아니다. 마태 24:3에 나오는 ‘세상 끝’이라는 표현도, 구약성서에서 “아하리트 야밈(aḥarit yamim, end of days)’이라고 표현되는 것인데, ‘아하리트’(끝)는 적당히 먼 미래의 시점을 나타내는 것이며 우주적 종말이나, 시간의 종료를 나타내는 말은 아니다. 중동세계의 종말론이란 거개가 모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에 근원하고 있다. 빛의 세력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어둠의 세력인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간의 우주적 대결로서 설정된 코스믹 드라마에서, 어둠의 세력의 종국적 멸망을 의미하는 시점을 종말로서 인지하는 사유는 구약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생소한 것이다. 예언자들을 통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심판은 오히려 현재적인 것이며 현세적인 것이다. BC 587/586년의 솔로몬성전의 멸망과 바빌론 유치는 현세적 정치지도자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절망감과 더불어, 그 반사적인 희망을 종말론적으로 표현하게 만들었다. 페르시아문명의 사상이 유대인들의 사유 속으로 깊게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하스몬왕조(the Hasmonian kings)의 문란한 통치에 대한 실망감, 로마제국의 지배, 그리고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 종말론의 분위기는 가중되어만 갔다. 예수시대에 이미 기존해 있었던 쿰란공동체의 극심한 종말론적 성향을 고찰할 줄 안다면, 초대교회가 이러한 종말론적 분위기를 계승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종말론이란 근원적으로 허구적인 망상이다. 우리나라의 졸렬한 종말론자들이 신봉하는 요한계시록도 결국 종말을 말하지 않는다. 천년왕국을 말하고 사탄의 패망을 말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말할 뿐이다. 순수한 종말이란 희망을 거부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천박한 종말론자들이 생각하는 종말이란 기껏해야 ‘지구의 재앙’ 같은 것인데, 지구가 설령 거대한 혜성과의 충돌로 파멸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은하수의 한 먼지가 사라지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는다. 시간의 종말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라는 개체의 종말이 억울하다고 ‘지구’의 재앙을 희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종말’이란 전우주가 다시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들어가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시간의 종료를 의미할 수는 없다. ‘종말(end)’이란 시간의 종료가 아니라, 나의 삶의 완성(consummation)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어적 표현에서도 끝(end)이라는 뜻은 항상 목적(end)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나의 죽음은 나의 삶의 완성이며, 나의 존재가치의 목적이 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어떻게 잘 죽느냐 하는 것이 나의 삶의 보람일 수 있는 것이다.
제17장 주해에서 인용한, 노자가 ‘홀황’을 말하는 대목에서 ‘복귀어무물(復歸於無物)’이라는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물(物)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인데, ‘다시’라는 말은 끊임없는 회귀(回歸)를 의미하며, ‘무물(無物)’이란 분별된 사물의 세계가 아닌 그 이전의 원초적 무차별의 혼융(混融)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코스모스(Cosmos) 이전의 카오스(Chaos)적인 일체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재미있게도, 역사적 예수의 사상에는 이러한 카오스적 세계에 대한 예찬이 있다. 남·여의 문제도 그는 남·여로 분화되기 이전의 ‘동체의 아담(andropgynous Adam)’을 예찬한다(Th.22, 114).
종말을 묻는 제자의 질문에, 종말은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있다고 설파하는 예수의 역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제 독자들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후대에 형성!! 서구적 사유의 틀 속에서 단순하게 해석될 수 있는 그런 직선적 시간론의 사상가가 아니다. 예수의 당대에 이미 천박한 종말론이 성행하고 있었을 것이니, 예수는 그러한 종말론의 종말을 선포하는 역설적 사상가였다.
‘시작에 선다’는 말에서 ‘선다’의 중요성은 이미 제16장에서 해설되었고,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라는 구절은 제1장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 필자가 지금 들여다 보고 있는 안티옥 산중턱의 석굴이 바로 초대교인들의 주거지인 동시에 교회였고 수행 동굴이었고 무덤이었다. 이 동굴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바로 안티옥 전경이다. 도시 뒤로 뿌옇게 보이는 산이 타우루스(Taurus) 산맥의 줄기이고 도시 한복판으로 오론테스(Oronts) 강이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티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티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유래된 곳인데, 이곳에서 비로소 비유대인인 헬라인에게도 그리스도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안티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국제도시였기 때문에 유대인의 독주가 허용될 수 있었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원래 외부인들이 예수 신앙인들을 비하시키는 명칭이었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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