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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 제14장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 제14장

건방진방랑자 2022. 2. 28.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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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기도와 구제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모든 지고한 종교적 경지는 상식적 가치의 전도를 요구한다. 자선사업에 헌신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가난한 자에게 주는 돈 한 푼이 그 가난을 영속시키는 데만 공헌한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14

1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금식(禁食)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自招)하리라. 2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定罪)되리라. 3그리고 너희가 구제(救濟)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害惡)을 끼치리라. 4너희가 어느 땅에 가든지, 한 시골동네를 거닐게 될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면, 그들이 대접하는 음식을 그대로 먹으라,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病者)를 고쳐주어라. 5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

1Jesus said to them, “If you fast, you will bring sin upon yourselves; 2and if you pray, you will be condemned; 3and if you give alms, you will do harm to your sprits. 4When you go into any land and walk about in the countryside, when people take you in, eat what they serve you and heal the sick among them. 5For what goes into your mouth will not defile you; rather, it is what comes out of your mouth that will defile you.”

 

 

12·13장은 도마공동체에 대한 아폴로제틱한 성격이 개재되어 있어 역사적 예수의 말씀의 전승으로부터 상당히 빗나간 것이라는 문헌비평의 화살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제14장은 큐복음서, 그리고 마태ㆍ 마가와 자료를 공유하는 것으로 매우 오리지닐한 로기온자료로서 평가되는 것이다. AD 50년 이전에 성립한 역사적 예수의 말씀전승으로서 추정된다. 공관복음서와 비교해볼 적에도, 도마자료는 공관복음서에 선행하는 자료임이 확실하며 그 역방향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마태, 마가, 누가 자료로부터 도마 14장 자료가 짜깁기된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운동(Jesus Movement)의 생생한 초기모습을 전하는 오리지날한 자료라고 패터슨(Patterson)은 평가한다(The Gospel of Thomas and Jesus 128~33).

 

처음부터 대뜸 한다면이라는 ‘if’절의 예수 말씀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당황할 수 있으나, 6의 질문이 선행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61절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의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오리이까? 구제는 해야 하오리이까? 음식 금기는 무엇을 지켜야 하오리이까?”

 

 

여기 제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4가지다. 1) 금식(Fasting) 2) 기도(Prayer) 3) 구제(Alms) 4) 음식금기(Diet).

 

이 문제는 마태복음(6:1~18)에도 매우 체계적으로, 도마의 주제와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갈 기술되어 있다. 마태복음 6: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말한 예수 말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금식, 기도, 자선사업, 음식가림 등의 모든 제식적 행위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외식적 행위(hypocritic act)라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위선(hypocrisy)을 증오한다. ‘ 인 양체함을 저주한다. 체하다 보면 그것이 선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거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위선은 거짓이다. 모든 종교적 제식은 위선으로 흐르는 경향성이 있다. 제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기독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시대에는 기독교가 없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종교행위 내지 풍습에 관한 질문이었다. 도마복음 속의 예수는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 매우 공격적이며 역설적이며 신랄하다.

 

6장에서 이미 예수는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핵심을 찌르는 대답을 했다: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예수는 제자들의 내면의 심리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단식, 기도, 구제, 음식가림이 모두 귀찮고 괴롭고 힘든 것이다. 왜 그토록 귀찮고 괴롭고 힘든 일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러한 제식적 행위의 궁극적 소이연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얻기 위함(Reward from your father who is in heaven)’이다(6:1). 인간에게 상을 얻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하느님께 상을 얻는 것은 이러한 제식적 행위를 통할 필요가 없다.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제자들이란 제1장과 2장에서 언급한 대로,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이며,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않는, 끊임없이 구하는 자들이다.

 

이 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는 말한다: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자선 (구제)하지 말라!

 

그러나 예수는 하지말라는 메시지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본 장 제1절의 조건절(if) 절 앞에는 금식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생략되어 있다. ‘금식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하리라!’ 금식을 하지 말라는 권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을 함으로써 죄를 자초한다고 하는, 무서운 결과를 예고한다. 금식하면 배고프다. 배고프면 먹을 것만 생각한다. 라마단도 좋지만 라마단으로 인해 더 먹고 더 살이 찐다는 것이 문제다. 배고픈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듦으로써 오히려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금욕자에게 강간의 위험성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공자는 단지 이것만을 요구한다. ‘평소 많이 먹지 말라[不多食].’ ‘육식의 기운이 곡기를 이기지 않도록 하라[不使勝食氣].’(향당).

 

소식(少食)은 금식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더 지속적인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권고는 매우 상식적이다. 어느 것이 더 하느님께 칭찬받을 행위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지브란은 1883년 브샤레에서 태어났는데 1908년부터 파리의 미술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s)에서 3년 동안 미술공부를 했다. 이 시기에 유명한 조각가 로댕을 만났고, 로댕은 지브란의 위대한 미래를 예언했다. 지브란의 그림은 그의 시 못지않게 유명하다. 이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바로 이 여인들의 헤매고 있는 초원과 뒷산 배경이 브샤레의 영험스러운 산하이다. 무한한 해석의 여운을 남기는 신비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우리들 영혼의 자화상일 것이다. 레바논 브샤레 지브란박물관 제공,

 

 

기도하지 말라.’ 예수는 이러한 권고에서 그치지 않는다.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되리라!’ 남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큰 회당이나 거리 어귀에 서서 중언부언하는 행위(6:5~7)가 이미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며, 과연 내가 기도를 바르게 했는가 하는 의식의 계기들은 정죄(condemnation)를 불러일으킨다. 기도는 내면의 소리일 뿐이며, 겉으로 언표해야 할 짓거리가 도무지 아닌 것이다. 당시 유대인의 기도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제식화된 성격의 것이었다(기도 자세도 다양하다). 예수는 외친다. 기도하지 말라! 기도는 너를 죄인으로 만들 뿐이다. 너에게 죄의식만을 불러일으킨다.

 

구제하지 말라!’ 예수는 이러한 권고에서 그치지 않는다. ‘구제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을 끼치리라!’ 불교는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를 말한다. 보시는 오직 아상(我相)을 버린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내가 보시를 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는 한 그것은 참다운 보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종교라는 이름하에 많은 자선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더 시급한 일은 자선사업이 이루어질 필요가 없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모든 종교인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있는 자만 더 돈 잘 벌게 사회체제를 왜곡시키면서 있는 자의 자선사업을 찬양키만 하는 제도는 분명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이 아니다. 자선을 행하는 자가 자선이라는 의식에 매달려 사는 것은 결국 그 영혼에게 해악을 끼친다. 불순한 계기들로 인해 오히려 그 영혼의 순결이 오염될 수도 있다. 이것은 나 도올의 말이 아니요, 역사적 예수의 살아있는 목소리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론파 수도승들은 도마기독교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들은 비교적 금기가 없다. 음식 금기가 일체 없으며 금욕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다. 따라서 결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매우 성스럽고, 고독하게 은둔하며, 자족적인 자경농의 생활을 하고 있다. 언덕 위에 마론파 교회가 있는 브샤레마을이 보인다. 그 능선을 타고 툭 떨어지는 첩첩 산중의 계곡이 영험스러운 카디샤계곡이다.

 

 

밥[食]과 말[言]

더러운 것은 똥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다

 

 

도마복음 제14장은 금식ㆍ기도ㆍ구제ㆍ음식금기, 4가지 종교적 행위에 대한 역사적 예수의 가장 오리지날한 담론이다. 이 담론에서 마태 마가ㆍ누가의 관련된 담론이 어떻게 변형되어 갔나를 우리는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14

1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금식(禁食)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自招)하리라. 2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定罪)되리라. 3그리고 너희가 구제(救濟)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害惡)을 끼치리라. 4너희가 어느 땅에 가든지, 한 시골동네를 거닐게 될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면, 그들이 대접하는 음식을 그대로 먹으라,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病者)를 고쳐주어라. 5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

1Jesus said to them, “If you fast, you will bring sin upon yourselves; 2and if you pray, you will be condemned; 3and if you give alms, you will do harm to your sprits. 4When you go into any land and walk about in the countryside, when people take you in, eat what they serve you and heal the sick among them. 5For what goes into your mouth will not defile you; rather, it is what comes out of your mouth that will defile you.”

 

 

당시의 종교적 행위에 대한 예수의 신랄한 메시지는 1) 금식 2) 기도 3) 구제, 3주제에 한정된 것이었다.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도마복음이 기독교라는 제도적 틀로 규정할 수 있기 이전의 비제도권의 사회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Jesus Movement)의 제양상을 반영하고 있다면, 예수는 자기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종교적 행위를 통하여 선업(善業)을 쌓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좌절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선업의 축적이 하늘나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나라의 임재는 점진적 축적이 아닌 세속적 가치의 단절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업의 축적은 필연코 위선을 불러일으킨다. 하늘나라의 임재는 메타노이아, 그러니까 생각의 전환, 의식의 혁명이다.

 

6에서 제기된 제자들의 질문은 상기의 금식, 기도, 구제 3주제 이외로 한 질문이 더 있었다. “음식금기는 무엇을 지켜야 하오리이까?”

 

유대인들이 지금까지도 코셔(kosher)라는 형태로 지키고 까다로운 제식적 음식금기(Diet)의 질문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4절부터는 제4주제인 음식금기에 관한 예수의 말씀이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4절부터 갑자기 예수운동의 초기전파상황을 전하는 방랑하는 카리스마들(itinerants)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3절과 제4절 사이에는 문맥의 흐름상 어떤 깊은 단절이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도마복음 연구자들이 이 장은 세 개의 단절된 파편이 합성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1~3 금식ㆍ기도 구제에 관한 예수 말씀
II 4 예수운동의 사역자 파송 때의 당부 말씀
5 입으로 들어가는 것, 입에서 나오는 것에 관한 예수 말씀

 

사실 이 세 개의 파편은 모두 공관복음서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II는 마태ㆍ누가에 공통된 큐복음서에 속하는 자료이다(Q30. 도올 김용옥 역주, 큐복음서153).

 

마태 6:1~18
II Q30, 마태 10:8~12. 누가 10:5~9
마태 15:11~20. 마가 7:15~23

 

예수운동이란 예수의 천국운동을 전파하는 도반들(12제자에 한정되지 않는 숙련된 동조자들)의 운동이다. 이 도반들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예수천국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방랑하며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한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지니지 말라. 여행을 위하여 지갑이나, 배낭이나, 샌달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여벌의 속옷이나, 지팡이도 가져오지 말라.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Q29). 지팡이나 신발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철저한 무소유를 예수는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여기 도마복음 14:4어느 땅에 가든지라는 말에서 나라를 의미한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분봉된 나라들로 쪼개져 있었고, 독립국 형태의 폴리스들이 각기 영역(region, land)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수운동의 참가자들은 이 광범한 팔레스타인 영역들을 끊임없이 무소유의 에토스를 지니고 유랑했다.

 

그런데 예수운동이 잘 먹히는 곳은 대도회지가 아니라, 조그만 시골동네들이었다. 그래서 여기 4절은 한 시골동네를 거닐게 될 때에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활동영역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언급이다.

 

 

카디샤계곡의 절벽에 있는 한 수도원, 칸누빈 성모 수도원(Our Lady of Qannoubin Monastery)에 도착하여 내가 종을 치고 있다. 안티옥의 주행승(柱行僧) 성 시므온의 친구인 칸누빈의 테오도시우스에 의하여 5세기경 설립된 석굴수도원이다. 이 석굴수도원 내부 석벽에는 아름다운 프레스코 성화들이 많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고 은둔자들의 초막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너무도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것은 성(Holiness) 그 자체였다.

 

 

3절과 4절 사이의 단절은 사상적으로도 모순을 일으킨다. 3절에서는 구제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4절부터 나타나는 유랑하는 전도자들(The wandering missionaries)은 결국 동네사람들의 구제나 자선에 의존하여 밥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쉽게 해결된다. 예수운동가들은 결코 구제나 자선에 의존하여 밥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병자를 고쳐준다.’ 나족의(裸足醫)처럼 의료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도마복음의 소박한 한 구절이 마태에서는 다음과 같이 과장되어 나타닌다. ‘병든 자를 고치미,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기저 받았으니 기지 주어라’(10:8).

 

자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그 동네에 유익한 것을 던져주고 공동식사를 통하여 천국의 임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크로쌍은 말한다: “이러한 개방된 공동식사(open commensality)야말로 남과 여,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이방인과 유대인의 모든 차별과 위계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혁명적 행위였다. 이런 공동식사야말로 어떤 문명사회에서든지 그 제식적 율법을 위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예수운동의 도전이 있었다” (The Historical Jesus 263).

 

따라서 이러한 공동식사에 제공되는 음식에는 일체 금기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다. 코셔 따위의 까다로운 제식적 음식가림이야말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되게 만드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번문욕례(繁文縟禮)요 허례허식(虛禮虛飾)이다. 역사적 예수에게 있어서 율법이야말로 천국의 반대개념이었다. 율법은 차별이요 저주요 의혹이요 질투이다. 천국은 하나됨이요 생명이요 도움이요 사랑이다. 그래서 말한다: “시골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면, 그들이 대접하는 음식을 그대로 먹으라.”

 

여기 영접은 결코 구제나 자선이 아니다. 즉 예수운동가들은 그러한 구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영접하지 않는다면 떠날 뿐이다. 굶어야 한다. 영접하면 주어지는 음식을 가림 없이 먹는다. 이것은 원시불교의 초기 승단의 계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걸식을 하되 주는 대로만 받는다. 주는 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다. 7가호 이상을 돌지 말라 등등.

 

영접 받는 대로 가림 없이 먹는다. 왜냐?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

 

이 구절도 마가ㆍ마태와 비교해보면 도마의 구절이 훨씬 오리지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마에서는 더럽히다(to defile)의 목적이 제자들 자신이 되어 있다. 그런데 마가ㆍ마태에서는 타인이 되어있다. 의미의 강렬함이 희석되고 목회자 자신의 반성을 타인의 문제로 외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먹은 것은 항문으로 다 빠져나가고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라는 구질구질한 해설을 첨가하고 있다. 이미 심신이원론적인 헬레니즘의 철학적 논설이 복음서기자들에 의하여 가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그것이 예수 자신의 말인 것처럼. 결국 도마 14장은 네 가지 종교적 행위에 관하여 연속성을 지니는 가장 오리지날한 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여기 성직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곳이 바로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의 현장이며 동방박사인이 경배한 곳이다. 예수가 태어난 말구유간에는 14개의 빛살이 달린 다윗의 큰 별이 장식되어 있다(p.303), 원래 1717년에 프랑스 기독교인들이 선사한 것인데 도난당해 1853년에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별에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다(Hic De Virgine Maria Jesus Christus Natus Est)’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예수탄생교회(Basilica of the Nativity)는 최초의 성지순례자라고 할 수 있는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엄마, 헬레나(Helena Augusta)AD 326년에 세웠다. 그 전에 이곳은 아도니스의 신점으로 쓰여지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고색창연한 코린트 양식의 기동(12X4) 교회는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대제에 의하여 AD 530년에 건설된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이다. 요셉도 마리아도 나사렛에서 살던 사람이다. 요셉이 만삭의 부인을 데리고 최적 조사를 받기 위해 베들레헴에 갔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역사적으로 아구스도 호적조사의 사실도 없었다(2:1), 호적조사는 식민지 착취를 위한 것이므로 현주소에서 이루어지며 원적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현대신학은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은 다윗의 정통혈통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설화로 간주한다. 다윗이야말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예수는 베들레헴과는 무관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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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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