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선조의 꽁무니 빼기
『소화시평』 권하 25번은 임진왜란의 참상을 담고 있다. 일본은 각 막부 중심으로 뿔뿔이 나누어져 있었다. 그들은 각각의 막부에 소속된 사무라이들이란 군사집단을 가지고 있었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화로 물꼬를 트기보다 사무라이란 힘을 통해서 무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것이야말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비견할 만한 일본의 전국시대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렇게 사분오열로 나누어진, 그래서 모든 걸 칼과 힘으로만 제압하려 하는 야만이 판치던 상황을 단번에 뒤집어엎어 통일하게 만든 사람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다.
그는 월등한 힘과 정략으로 일본 내의 통일을 이룩하긴 했지만 통일이 되면서 졸지에 애물단지가 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해결해줘야만 했었다. 만약 그게 되지 않으면 어렵게 이룩한 통일이 각지에서 일어난 사무라이들의 반란으로 무너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낸 논리가 ‘조선을 쳐야 한다[征韓論]’는 거였고, 그걸 드러낼 순 없으니 ‘자신들의 원수인 명나라를 치러 가야 하니, 너희들은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라는 거였다. 이런 명분뿐인 말은 바로 『맹자』라는 책에서 이미 쓰여졌던 말[假道於虞以伐虢]로 이미 허울뿐인 거짓말이란 게 명확하게 그 책에서도 서술되어 있는데, 일본도 그런 정황을 알고 가져다 쓴 것이다. 조선에서도 일본의 ‘길을 빌려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번에 거절했고, 일본은 거절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라이들과 조총을 앞세워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게 바로 임진왜란(1592년)의 시작이다.
일본 내의 사정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까지야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조선의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대응은 너무도 유약하고 황당했다. 제대로 방비하려 애쓰기보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연전연승하며 상륙하고 있단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종묘와 사직을 가장 중요한 국가 기반으로 여긴다. 이것들이 무너지면 조선이란 나라의 근간이 사라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나라를 지키십시오’라는 말을 “종묘사직을 지키십시오.”라는 말로 바꿔서 하곤 했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일이 벌어지면 습관적으로 종묘사직을 버리고 내빼려고만 한다. 그건 고려 때 무신정권이 들어섰음에도 몽골이 쳐들어오자 지배자들이 강화도로 내뺀 과거에서 여실이 드러나니, 선조 또한 여기서 자유롭질 못했다. 그러니 유생들이 상소문을 올려 반대를 했음에도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은 불에 타고 만다. 그냥 생각하면 일본이 불을 질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선조의 이런 식의 무책임한 대응에 화가 난 민심이 들불처럼 일어나 불을 질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만큼 권력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어이없는 전례를 남긴 것이고, 이건 마치 권력자들의 ‘위기상황대피모델’처럼 인식되어 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 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대한민국이 성립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땐 이승만이 “우리 군이 승리하고 있으니 각자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남긴 채 부산으로 내빼는 무능하고 황당한 역사를 반복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비참한 현실은 이안눌이 지은 「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라는 한시에 그 당시를 경험했던 늙은 관리의 말을 통해 재구성되어 있고 그 이전 1555년 을묘왜변의 참상에 대해선 백광훈의 「달량행(達梁行)」이란 한시에 매우 처참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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