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천기가 가득 담긴 한시를 맛보다
한 시간 정도 만에 16세기 조선 문단의 시풍(詩風) 변화를 훑어봤다. 이게 바로 우리가 전문가에게 강의를 들어야 할 이유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주제의 내용을 알기 위해선 여러 자료를 뒤적이며 몇 달을 끙끙 앓을 정도로 공부해야지만 겨우 윤곽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을 두 시간 정도의 강의만으로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16세기 시단에선 당풍이 유행하며 천부적인 자질을 지녀야만 시를 지을 수 있다는 논리가 전개되었고 이런 논의에 반감을 지닌 사람들은 ‘문장은 전한 시대의 것을 따르고, 시는 성당 시대의 것을 따른다[文必秦漢, 詩必盛唐]’이란 구호를 외치며 성당(盛唐)의 시만을 읽고 본받으려 노력하면 충분히 좋은 시를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천적 자질과 후천적 노력의 한판 싸움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던 그때, 전혀 새로운 시작(詩作) 운동이 일어난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모범이 되는 시들이 있으니 따라 짓기에 혈안이 되어 시가 개성을 잃고 획일화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창협 형제를 위시한 백악시단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생기발랄한 천기(天機)를 문학에 담으려 노력했고 이런 흐름은 도도하게 이어져 정약용이 ‘나는 조선 사람으로, 달게 조선의 시를 짓겠노라[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라는 조선시 선언을 하는 데까지 흘러갔다.
▲ 이제 우린 조선 항시의 정수를 맛볼 차례다.
한시의 매력, 그리고 한시의 맛
이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시단의 흐름을 꿰뚫었고 어느 정도 전달이 되자, 형술쌤도 맘이 놓이나 보다. ‘이제부턴 본격적인 한시의 맛을 선사하겠어’라는 심정으로 쫘르륵 천기가 가득 담긴 한시를 보여주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김창흡의 「까치내에 다리 없어[鵲川無梁]」라는 시는 민중이 핍박받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했고, 이병연의 「우계(강릉)에서[羽溪]」라는 시는 민중의 대화를 그대로 시로 씀으로 민중이 들려주는 고초를 구색을 갖춰 그럴 듯하게 표현한 게 아닌 있는 그대로 적나라함을 보여줬다. 예전부터 사회를 고발하는 시들은 많았지만 대부분 장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이땐 오언절구의 간명한 양식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병연의 「일찍 출발하려다[早發]」는 하룻밤 신세를 진 손님이 주인 몰래 일찍 출발하려 부산을 떨다 결국 주인이 일어나는 바람에 걸렸고 아침밥까지 먹은 후에야 출발하면서 ‘결국 이렇게 아침까지 먹고 갈 것이었으면 부산을 떨지나 말 것을, 괜히 부산을 떠는 바람에 여러 사람 번거롭게 했구먼.’이라 마지막 구에서 말하는 장면을 통해 시인의 멋쩍은 심정이 그대로 느껴졌고, 신정하의 「두월정 옛터에서 새롭게 개업한 주막의 벽에 쓰며[題斗月亭舊墟新開酒家壁]」라는 시는 강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대로 묘사해내어 밑에서 자신의 힘으로 힘껏 살아가는 백성들의 저력을 보여줬으며, 권섭의 「아이들이 ‘驚’ 운으로 바둑을 읊었기에 늙은 나도 또한 제목을 장난삼아 네 가지 잡기에 대해 쓰다[兒輩用驚韻咏碁, 老夫亦戱題仍題雜技四詩]」라는 시는 영화 『타짜』를 시로 묘사한 듯한 쾌감을 느끼게 했고, 김창흡의 「십구일에[十九日]」이라는 시는 자연을 관조하며 생의 이치를 핍진하게 묘사하여 ‘저런 게 바로 관조한다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으며, 김시보의 「달밤에 거문고를 연주하며[月夜琴韻]」이라는 시는 홀로 누대에서 거문고를 연주했지만, 달과 시냇물이 합주를 하여 최고의 앙상블이 되었다는 감상을 얘기함으로 절로 이백의 「술 하나 달 하나 그림자 하나[月下獨酌]」라는 시가 떠올라 미소가 지어지더라. 이런 시들은 마치 너무도 평범한 일상을 스케치하듯 묘사하고 있어서 ‘도대체 이런 시를 왜 지은 거지?’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물론 이런 생각에는 ‘시란 대단한 내용이나 깊은 철학을 담겨 있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이 깊게 개입되어 있고 그건 천기(天機)를 담으려 하는 이들의 창작론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생각이다.
그 중에 김창업이 지은 「배추[菘]」나 「시금치[菠薐]」란 시는 앞에서 말한 고정관념을 일거에 날려 버린다. 일상을 적는 정도를 넘어 아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읊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시를 통해 한시는 근엄해야 하고 철리(哲理)를 담아야 한다는 관념은 완전히 사라졌고 한시의 주제가 광범위하게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소재까지도 무한대로 확장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 권섭의 시를 읽으며 키득키득 웃음이 났는데 그건 영화 [타짜]가 생각 나서였디.
한시가 이토록 맛있다니
형술쌤은 강의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좀 더 한시의 맛을 보여주고 싶으신지 망설이신다. 그래도 지금껏 보여준 한시만으로도 그런 감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한시가 얼마나 맛있는지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소화시평 스터디를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강의를 통해 한시가 어떻게 변해왔고 그게 우리에겐 어떤 식으로 느껴지는지 제대로 알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여러 한시를 통해 그 당시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핍진하게 현실의 사물들을 담아내며 따스한 시선으로 민중을 보고 그들의 얘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강의를 듣는 내내 긴장은 눈 녹듯 사라졌고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더라. 그건 분명히 희망이었고 사랑이었고 그리움이었고 행복이었다. 한시를 보며 행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은 그 어느 때에도 비길 수 없는 행복의 순간인 것만은 확실히 알게 된 채 강의실 문을 나섰다.
인용
'연재 > 배움과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형술 한시 특강 - 목차(18.11.14) (0) | 2021.12.19 |
---|---|
김형술 한시 특강 - 5. 천기를 문학에 담으려던 사람들 (0) | 2021.12.19 |
김형술 한시 특강 - 4. 복고파가 문단을 휩쓸다 (2) | 2021.12.19 |
김형술 한시 특강 - 3. 훅하고 들어가 좌중을 압도한 16세기 한시 이야기 (0) | 2021.12.19 |
김형술 한시 특강 - 2. 건빵이 한시특강을 듣는 이유 (0) | 2021.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