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 글자를 찾아서②
한 글자를 지워 언어감각을 키우다
송나라 때 어느 원벽(院壁)에 두보(杜甫)의 「곡강대우(曲江對雨)」 시가 적혀 있었는데, “숲속 꽃잎 비 맞아 연지가 젖었구나[林花着雨臙脂濕].”라 한 구절의 마지막 ‘습(濕)’자가 떨어져 나갔다.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과 진관(秦觀)과 불인(佛印) 등이 제각기 ‘윤(潤)’과 ‘노(老)’, ‘눈(嫩)’과 ‘락(落)’으로 채웠으나, 원시의 ‘습(濕)’이 주는 선명하고 촉촉한 느낌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한 듯 보인다.
또 소동파(蘇東坡)가 일찍이 「병학(病鶴)」시를 지었는데 “석 자 되는 긴 다리에 마른 몸을 얹었네[三尺長脛閣瘦軀]”란 구절이 있었다. 하루는 소동파(蘇東坡)가 ‘각(閣)’자를 가리고서 임덕장(任德章) 등에게 적당한 글자로 채워 넣게 하였으나 끝내 알맞은 글자를 찾지 못하였다. 소동파(蘇東坡)가 천천히 그 원고를 꺼내 보여주는데 ‘각(閣)’자가 써 있었다. ‘각(閣)’이란 ‘놓아두다’는 뜻인데, 이 글자가 놓이고 보니 가뜩이나 위태로워 보이는 긴 다리에 병들어 수척한 몸뚱이를 얹어 놓고 힘에 겨워하는 병든 학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나온다.
청대(淸代) 매증량(梅曾亮)의 문집을 보면 시미(詩謎) 또는 시보(詩寶)ㆍ시조(詩條)라고도 불리는 유희에 대해 말한 대목이 있다. 시미(詩謎)란 위에서 본 예처럼 옛 시인의 시집에서 한 구절을 따다가 그 가운데 안자(眼字)가 되는 한 글자를 지워버리고, 원래 있던 글자 외에 그럴듯한 네 글자를 늘어놓아 제 글자를 찾아 맞추는 놀이를 말한다. 말하자면 오지선다형이다. 시미(詩謎) 유희는 뒷날 시를 배우는 한 방편으로 널리 성행하였는데, 위 네 예화 같은 것이 바로 이 놀이의 연원이 된 것이다. 현대시에서도 이런 놀이가 가능할까.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언어의 감각을 키우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한 글자의 고심과 모자 고르기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놀이는 행해졌던 듯하다. 심의(沈義)의 「대관재기몽(大觀齋記夢)」에 나오는 다음 삽화가 그 예증이다. 이 작품은 전에도 소개한 바 있는데, 심의(沈義)가 잠깐 꿈속 문장(文章) 왕국(王國)에 들어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현세에서의 갈등을 마음껏 해소하고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이 가운데 한 삽화로, 몽중(夢中) 문장왕국(文章王國)의 천자 최치원(崔致遠)이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보내네[風敲夜子送潮沙].”라 한 구절을 놓고 ‘송(送)’자가 마음에 안 든다 하여 신하들에게 고치게 하니, 진화(陳澕)는 ‘과(過)’자를, 정지상(鄭知常)은 ‘집(集)’자를, 주인공인 심의(沈義)는 ‘낙(落)’자를 각각 올렸는데, 천자는 ‘낙(落)’에 낙점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필자가 최치원(崔致遠)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뒤져 보니 위 구절은 「석상왜송(石上矮松)」이란 시의 제 4구로 본래부터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떨구었도다[風敲夜子落潮沙].”라 한 구절이 멀쩡하게 실려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시미(詩謎) 놀이의 한 가지임을 알았다.
이 경우 여러 사람이 내놓은 글자들을 차례로 원시에 대입시켜 보면 의경(意境)의 미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그 사이 언어의 질량을 저울질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상승의 경계에 진입한 자일 터이다.
風敲夜子送潮沙 | (최치원)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보내네. |
風敲夜子過潮沙 | (진화)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을 지나네. |
風敲夜子集潮沙 | (정지상)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을 모으네. |
風敲夜子落潮沙 | (심의) 바람은 어둠을 두드려 밀물 드는 모래톱에 떨어뜨리네. |
명(明)의 사진(謝榛)은 시인이 알맞은 한 글자의 선택을 위해 심혈을 쏟는 것을 모자 고르기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급히 모자를 사려고 시장에 들어가 여러 개를 꺼내 놓고 하나하나 써보면 반드시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자 고르는 법을 쓸 수만 있다면 시안(詩眼)은 공교롭지 않음이 없다.
인용
1. 한 글자를 찾아서①
2. 한 글자를 찾아서②
4. 뼈대와 힘줄②
5. 한 글자의 스승①
11. 시안(詩眼)과 티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