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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3장 - 소크라테스와 예수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3장 - 소크라테스와 예수

건방진방랑자 2023. 3. 18.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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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와 예수

너 자신을 알라

 

 

예수와 그리스도는 별개의 관념이다. 그러나 초기기독교의 역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당대의 민중들에게 설득시켜 간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과정에는 반드시 부활이라는 신화가 개입된다. 그 신화는 기독교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죄의 대속(代贖)이라는 의미를 반드시 지녀야 했다. 이런 초기 그리스도 운동의 대표적인 리더가 바울이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는 동시대에 이미 그러한 그리스도운동과는 전혀 종류가 다른, 순결한 예수운동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다.

 

 

3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천국)가 하늘에 있도다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2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3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4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5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1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2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3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

4When you know yourselves, then you will be known, and you will understand that you are children of the living father. 5But if you do not know yourselves, then you dwell in poverty, and it is you who are that poverty.”

 

 

한자문명권의 대표적인 고전 중의 하나인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첫 장을 펼치면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미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그리고 또 말한다: “무욕(無欲)하면 묘()의 세계를 보고, 유욕(有欲)하면 교(: 형체화되는 가장자리)의 세계를 본다[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그런데 그 다음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 둘은 실상 같은 것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현()하다 한다[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이것은 과연 무슨 이야기일까?

 

유명과 무명은 분명 명(: 이름, 분별)이 있음과 없음으로 구별되는 세계며, 유욕과 무욕은 분명 욕(: 욕심, 집착)이 있음과 없음으로 구별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 양자를 완전히 분리해서 대립적으로 보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을 대립적으로 보는 우리의 인식세계가 더 큰 죄악을 낳는다는 것이다. 결국 무명과 유명이 동일한 하나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늘과 땅, 천국과 속세, 하나님과 인간, 빛과 어둠, 결국 이것이 하나가 아닐까? 도마복음은 놀랍게도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이 이러한 같음[]의 세계, 그래서 현묘한 현()의 세계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설파한다. 무욕(無欲)의 세계는 빛이다. 유욕(有欲)의 세계는 어둠이다. 그러나 빛과 어둠은 결국 다 우리 몸의 세계라는 것이다. 같음의 현묘한 세계를 전관(全觀)하라! 놀라웁게도 이것이 살아있는 예수가 하는 말이다.

 

빛과 어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사라지면 곧 어둠이니라(도마복음 제24), 나라는 존재가 온전한 무분별상태에 있으면 곧 빛으로 가득차고, 나라는 존재가 분별되고 분열되면 곧 어둠으로 가득차리라(도마복음 제61).

 

여기 요한복음의 로고스기독론적 2원론은 찾아볼 길이 없다. 천국에 대해서도 우리는 현묘한 전관의 시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동시에 네 밖에 있다. 무욕(無欲)의 천국을 네 안에 이루었다면 동시에 너는 유욕(有欲)의 천국을 네 밖에 이루어야 한다. 예수의 천국운동은 주체의 변혁과 동시에 사회의 변혁이었다. 내면의 개벽인 동시에 인간관계의 개벽이었다.

 

그 전관(全觀)의 오메가 포인트는 무엇인가?: “너 자신을 알라!너 자신을 알 때만이 너는 천국을 네 안에, 네 밖에 성취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친숙한 언어를 접하게 된다. ‘너 자신을 알라!(gnōthi seauton)’,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좌우명이자, 델피 아폴로신전의 현관의 기둥에 새겨져 있는 희랍어 명문(銘文)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의 명문을 인간의 자기탐구로 심화시켰다. 그것은 결국 무지의 자각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모든 문답의 변증법이 도달하고자 했던 구극적 목표가 바로 이 무지의 자각이었다. 보리수 아래서 명상하던 싯달타의 연기적 사유의 궁극도 무지의 자각이었고, ‘무명(無明), avidyā의 발견이었다.

 

예수는 물론 헬레니즘의 보편주의적 문화권에서 살면서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예수에게 발견되는 견유학파적 측면은 본시 소크라테스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놀라운 자제력과 극기력의 소유자였다.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맨발로 다녔으며 항상 홑겹의 낡은 누더기만 걸치고 살았다. 더위, 추위, 굶주림, 목마름에 무관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군복무 생활(펠레폰네소스 전쟁 종군)이 그의 친구의 입을 통해 향연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는데, 그는 행군할 때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맨발로 걸으면서도 군화를 신은 병정들보다 훨씬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어갔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그가 자기들을 깔보는 것이 아닌가 오해하고 그를 쏘아보곤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인내심과 집중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동구 밖 느티나무에서 사색에 잠기면 몇날 며칠을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강직증성 황홀경(cataleptic trances)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 그는 평소 술은 마시지 않았으나, 마시면 주량이 누구보다 많았고, 아무도 그가 취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여자의 유혹에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올페우스교의 완벽한 성자였던 것이다.

 

인간 예수의 모습과 인간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많은 부분이 겹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예수가 그리스도로 신화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당대의 헬라화된 모든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는 거의 완벽한 그리스도 모델을 제공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지만 헬라인들에게는 부엌의 콩기름을 뒤집어쓰는 것처럼만 생각되는, 전혀 그 함의가 와닿지 않는 생소한 말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천국운동은 전혀 그리스도라는 이미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도마복음에도 예수는 살아있을 뿐이며 죽을 필요가 없다.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왜 죽는가?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란 누구인가? 최초의 크리스챤 회중이다. 이 회중은 예수의 사후에 형성된 후대의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이들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 자체가 하나의 구속사건(saving event)’이 될 때만이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대속의 희생은 이스라엘전통에는 없는 것이었다. 대속의 인간희생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번제에 쓰려했던 이삭을 야훼가 구출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랍전통은 고귀한 죽음(noble death)을 찬양했다. 폴리스는 모든 문화와 교육이 전사(warrior)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으며, 전사는 폴리스를 위하여, 그 법과 인민을 위하여 고귀한 영웅적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의 철학적 신념 때문에 자기를 우롱하고 저주하는 폴리스를 위하여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레코ㆍ로만시대에 있어서 도덕적 고귀함의 가장 전범이 되는 모형이었다. 예수의 죽음에 소크라테스의 이미지가 겹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는 부활이라는 장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활의 관념은 당시 이성적 사유를 신봉하는 헬라인들의 감성에는 영 뜰뜨름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들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만 했던 복음서작가들은 그 부활의 신화적 논리를 당시의 묵시론적 성향을 보였던 유대교의 지혜문학전통에서 빌려왔던 것이다(Burton L. Mack, The Lost Gospel 216~7).

 

그러나 지금 우리의 도마복음은 이러한 그리스도 신화, 즉 후대의 케리그마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국은 오로지 자아의 발견(Discovery of the Self)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제노비아는 시리아 500파운드권 지폐에 새겨져 있고 시리아의 주체성의 상징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기번은 제노비아를 이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키지만 순결과 용기에 있어서는 클레오파트라를 한참 뛰어넘는다. 검은 피부에 이빨은 백진주 같았고 검은 눈은 정열의 불꽃이 유순한 매력과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녀의 남성다운 오성은 끊임없는 학구열로 세련된 것이다.” 외교에 있어서는 주체적 자신감만이 우리에게 이득을 불러온다.

 

 

인용

목차

본문

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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