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몸이란 타자와 소통하기
이제 본격적으로 보드 타기에 도전해야 한다. 스키를 타는 아이들은 초급코스로 갔고 보드를 타는 아이들(기태, 현세, 나)은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해야 했기에 연습코스로 왔다. 아주 완만한 언덕을 보드를 들고 올라간다. 보드슈즈를 보드에 묶고 푸는 방법도, 보드에서 일어서는 방법도 하나도 모르는 생초보 둘을 이끌고 기태가 앞장서서 간다.
▲ 식당에서 바라보이는 스키장의 모습. 저긴 급경사여서 그런지 탈 수 있는 곳은 아니더라.
육체는 타자이기에 지배하려 하기보다 이해하려 해야 한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몸이야말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연물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연물을 대할 때 지성이 비로소 발동되는 것이죠”라는 우치다쌤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까진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만을 ‘타자’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치다쌤은 그런 논의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자신의 육체도 완벽한 타자라는 발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지배하려 해선 안 되고(애초에 지배가 불가능하다. 고로 육체와 정신을 나눠 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정신승리라는 말은 거짓이다), 이해하고 소통하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2011년에 스키장에 처음 왔을 때 스키복을 입고 스키부츠를 신고 강습을 받으러 나왔다. 스키부츠와 스키를 결합하니, 한 겨울에 미끄러운 얼음판에 선 것처럼 순식간에 내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미끄러져 놀랐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미끄러웠고, 그에 따라 조절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사님은 앞으로 나오라고 손짓하는데 내 몸은 맘처럼 움직이지 않고 급기야 넘어지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정자세로 서있는데, 나만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질 때의 그 우스꽝스러움이란 미처 말로 할 수 창피함이었다.
다른 하나는 2012년에 청평에서 웨이크보드를 탈 때였다. 물 위를 달리려면 당연히 하체에 무게를 싣고 파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은 채 달려야 한다. 그런데 ‘잘 탈 수 있다’고 마음만 앞서다보니, 중심을 잡기도 전에 몸부터 일으켰고 결국 꼬꾸라지고 말았다. 결국 여러 번 시도했지만 물 위를 제대로 달려보지도 못하고 끝났다. 그 상황도 쪽팔렸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부두 가까이에 내려준 뒤부터였다. 당연히 그 분들은 근처에 내려주면 헤엄쳐서 갈 것이라 생각해서 내려준 것인데, 난 아무리 손과 발을 움직여도 몸이 나가질 않았다. 그 때문에 30분가량 그곳에 가만히 있어야 했고, 그 분들도 보기에 딱하던지 결국 보트를 타고 나를 데리러 왔다.
몸은 현실이고, 머리는 이상이며, 몸은 타자이고 머리는 자아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와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몸부터 이해하며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난 우치다쌤이 던져준 말처럼, 오늘 하루 내 몸의 타자성을 잘 받아들이며 보드를 탈 수 있을까? 그게 몹시나 궁금하다.
▲ 2012년도에 웨이크 보드를 타려 연습할 때의 모습. 결국 넘어져서 제대로 타질 못했다. 몸이 말을 안 들어요.
타자성, 무계획성에 몸을 던지다
아마 ‘몸은 내 맘대로 안 돼!’라는 생각만 했다면, 보드를 타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타자를 받아들이려는 적극성을 표현한 말이라기보다, ‘난 몸치!’라는 폐쇄성을 담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타자는 내 의지를 벗어난 존재이기에 이해하려 노력하던지, 아예 포기하고 신경을 끄던지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 그동안 나는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 포기하며 살아왔다. 아마 그런 방식이 그 순간엔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살수록 관계는 좁아져 갔고, 나의 인식도 얇아져 갔다. 타자성을 부인한다는 것은 내 틀만을 고집하며 살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게 한 때는 안정감을 주는 방법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턴 스스로를 답답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한계를 넘고자 국토종단을 떠나게 되었고, 그게 하나의 계기가 되어 새로운 도전을 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 카자흐스탄에서 발표회에 췄던 카자흐스탄 전통춤. 몸치가 뭔지 보여주는 영상이지만, 그래서 창피하지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타자성, 무계획성에 몸을 던진 경험들
최근에 했던 경험 중 두 가지가 타자성에 몸을 내맡긴 경험이었다.
하나는 2013년에 두 달 동안 수영을 배웠던 일이다. 물이 무섭진 않았지만, 헤엄친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몰랐다. 그러니 청평에서 물가에 내려줬을 때 헤엄을 치지 못해 부두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물에서 노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을 뿐, 배울 생각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수의 권유로 수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물에 뜬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물에 뜨려면 부력을 믿고 몸을 그대로 던질 수 있어야 하는데, 자의식이나 걱정, 두려움이 뒤따르며 긴장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힘으로만 앞으로 나가려 하니 몸은 자연스레 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두 달 수영을 해본 경험을 토대로 수영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두 가지만은 확실히 배울 수 있었다. 내 몸이지만 내 맘대로 안 된다는 사실과, 연습하는 시간이 늘수록 물과 소통하는 법을 알게 된다는 사실 말이다. 모르고 안 해봤기 때문에 두려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일 뿐, 어떤 흐름을 몸으로 익히면 그 흐름에 따라 힘을 빼게 된다.
둘째는 작년에 지민이가 가져온 유고보드를 타본 일이다. 한빛청소년마을축제 때 민석이가 보드를 타는 것을 보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엔 중심을 잡고 서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이젠 중심을 잡고 설 수 있게 되었고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힘이나 강제력이 아닌, 유고보드란 흐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율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란 만화에서 나우시카가 뫼베를 타고 창공을 자유롭게 노닐 듯, 유고보드 또한 몸에 익숙해지면 평지를 맘껏 활개 치며 다닐 수 있다.
이 두 가지 경험은 그나마 몸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소통하려 노력했던 사례라 할 수 있다. 몸을 통제하려 하던 모습, 거부하려 하던 모습에서, 이해하려 소통하려 하는 모습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 작년 10월 20일의 풍경. 효정이가 가져온 보드를 기태가 타고 있다. 보드를 타려면 몸의 힘을 빼야 한다.
인용
1. 겨울방학에 받은 첫 번째 과제, 날 멸망시킬 태풍
7. 몸이란 타자와 소통하기
10. 치열한 토론의 순간, 우린 이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12. 두 번째 보드 도전기
13. 민석이의 도전
14. 현세의 도전
16. 여행이 끝나갈 땐 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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