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동
동가(東柯)
중국 진주(秦州)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는 골짜기 이름인데, 두보(杜甫)가 약초를 캐며 노년을 보내고 싶다면서[採藥吾將老] 읊은 ‘동가는 기막히게 좋은 골짜기[東柯好崖谷]’라는 시가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7 「진주잡시(秦州雜詩)」
동가(董賈)
한(漢)의 동중서(董仲舒)와 가의(賈誼).
동가구(東家丘)
동쪽 집의 공구(孔丘)라는 뜻으로, 즉 노 나라 사람으로서 공자(孔子)의 서쪽 이웃에 살던 한 어리석은 자가 공자가 성인인 줄을 모르고 “저 동쪽 집의 공구를 내가 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本姓解ㆍ『전습록(傳習錄)』
동가미오(董家郿塢)
간사한 자가 재물을 쌓아 두고서 노년을 즐기는 장소를 말한다. 동가는 한 나라의 동탁(董卓)을 가리킨다. 동탁이 초평(初平) 3년에 미(郿)에다가 오(塢)를 쌓고는 만세오(萬歲塢)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높이가 7장으로 장안성(長安城)과 같았으며, 그 안에 많은 재물을 쌓아 두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72 「동탁전(「동탁전(董卓傳)」)」
동가부서가귀(東家富西家貴)
제(齊) 나라의 한 여자가 자기에게 청혼을 해온 동쪽 집은 부자이면서 추남이고, 서쪽 집은 가난하면서 미남이었으므로,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자겠다[東家食兮西家宿].”고 한 데서 온 말로, 사람이 이끗을 대단히 탐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① 동쪽에 가서 먹고 서쪽에 가서 잔다는 뜻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며 이 집 저 집에서 얻어먹고 지낸다는 뜻이다.
② 옛날 중국의 한 여인이 재물이 많고 음식이 훌륭한 동쪽 집에서 먹고, 아름다운 사내가 있는 서쪽 집에서 잠자기를 원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로 먹을 곳, 잘 곳이 없어 떠도는 사람 또는 그런 짓을 말한다.
동가홍상(同價紅裳)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란 말로 같은 값이면 좋은 물건을 가진다는 뜻이다.
동가회(動葭灰)
후기(候氣)의 법에 의하면, 삼중의 밀실(密室)을 만들고 그 안에 명주(緹)를 펴고서 그 위에 십이율관(十二律管)을 각각 방법대로 안치한 다음, 그 율관에 갈대의 재를 채우고 다시 그 위에 명주로 덮어놓으면, 동지(冬至)이 될 경우, 율(律)이 황종관(黃鐘管)에 맞아서 황종관에 들어있는 갈대 재가 날아 움직이게 되는 것 등을 이른 말이다.
동각(東閣)
동합(東閤)과 같음. 동방(東方)에 있는 소문(小門)인데, 한(漢) 나라 공손홍(公孫弘)이 재상이 된 뒤에 객관(客館)을 세워 동합을 열고 어진이를 영접하여 함께 국사를 의논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재상이 빈객을 초치하여 대접하는 곳을 말한다.
동각관매(東閣官梅)
남조(南朝) 양(梁) 나라 하손(何遜)이 심취했던 양주(揚州) 고을 관아의 매화꽃. 하손이 일찍이 양주에 머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사랑하였는데, 뒤에 이를 못 잊어 다시 양주를 자청해서 부임한 뒤 종일토록 나무 밑을 서성이며 시를 읊었던 고사가 있다.
동각관매(東閣觀梅)
추운 겨울에 매화를 감상하면서 시흥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남조 양(南朝梁)의 하손(何遜)이 양주(揚州) 고을의 매화를 잊지 못한 나머지 다시 자청해서 그곳으로 부임한 뒤 마침 만개한 매화꽃을 보며 하루 종일 그 곁을 떠나지 못했던 고사가 전하는데, 이를 인용하여 지은 두보(杜甫)의 “동각의 관매에 일어나는 시흥이여, 양주 고을 하손도 어쩌면 이와 같았으리.[東閣觀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라는 유명한 구절이 전해 온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9 和裵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寄
동각로(東閣老)
한(漢) 나라 공손홍(公孫弘)이 승상이 되어, 동각을 지어 어진 선비를 맞아들인 고사.
동각서곤(東閣西崑)
동각은 학사원(學士院)의 별칭이고, 서곤(西崑)은 서방의 곤륜군옥산(崑崙群玉山)으로 고대 제왕의 장서각(藏書閣)이 있던 곳이다.
동각심매흥도시(東閣尋梅興到時)
고을 관아에 핀 매화에 시흥(詩興)이 절로 우러날 것이라는 말이다. 남조(南朝) 양(梁)의 하손(何遜)이 양주(揚州) 고을의 매화에 심취하여 하루 종일 그 옆을 떠나지 못한 채 시를 읊던 고사가 있는데,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화배적등촉주동정송객봉조매상억견기(和裵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寄)’에 “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라는 구절이 있다.
동각흥(東閣興)
양(梁) 나라 하손(何遜)이 동각(東閣)을 개방하고 문인(門人)을 초빙하여 매화를 감상했던 고사를 말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9 和裵迪登蜀州東亭 送客逢早梅 相憶見寄詩
동강(東江)
개성과 풍덕군(豐德郡)에 있는 강 이름이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호로, 송사(宋史)를 부연하여 지은 속강목(續綱目)이 유명하다.
동강(東岡)
동쪽의 산 언덕. 세상을 마다하고 은둔하는 곳의 뜻으로 쓰이다. 『후한서(後漢書)』 주섭전(周燮傳)에, “선세(先世)이후로 국가에 대한 공로와 임금의 은총으로 대를 이어왔는데, 어찌하여 그대 혼자 동강(東岡)의 언덕만을 지키려고 하는가.” 하였다.
동강(桐江)
옛날 광무제(光武帝)의 벗인 엄광(嚴光)이 동강(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질하며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卷83 逸民列傳 「엄광전(嚴光傳)」
동강구진(東江舊鎭)
명(明)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설치했던 가도(椵島)의 진영을 말한다.
동강도(董江都)
강도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그는 처음에 강도의 상(相)이 되었는데 공손홍(公孫弘)의 미움을 받아 교서왕(膠西王)의 상(相)으로 좌천됨. 무제(武帝)에게 상주(上奏)하여 유교(儒敎)를 국교로 정하게 한 것으로 유명한다. 저서에 춘추번로(春秋繁露)가 있다.
동강도(董江都)
동중서(董仲舒)가 한 무제(漢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이 되었기 때문에 동 강도라고 한 것이다. 『한서(漢書)』 卷 56 「동중서전(董仲舒傳)」
동강수(桐江叟)
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을 말한다. 광무제(光武帝)의 절친한 벗으로서, 동강(桐江)에 숨어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었다. 『후한서(後漢書)』 卷83 「엄광전(嚴光傳)」
동강신정(東岡新亭)
옛날 동진(東晉)의 명사(名士)들처럼 난세(亂世)를 개탄하는 우국지정(憂國之情)이 솟구친다는 말이다. 『진서(晉書)』 「왕도전(王導傳)」에 “주의(周顗)가 신정(新亭)에 앉아 탄식하기를 ‘풍경은 똑같은데 강산은 모두가 바뀌었구나.’ 하니, 참석한 이들 모두가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동강칠리탄(桐江七里灘)
전당강(錢塘江)이 동려현(桐廬縣)을 지나는 부분의 이른다. 한(漢) 나라 때 광무제(光武帝)의 친구 엄광(嚴光)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살면서 낚시를 했다는 곳.
동객(峒客)
옛날 황제(黃帝)가 공동산(崆峒山)에서 신선인 광성자(廣成子)에게서 도를 닦았다는 고사가 있으므로, 도인(道人)의 뜻으로 쓰인다. 『장자(莊子)』 「재유(在宥)」
동갱(銅坑)
매화가 많이 나는 곳이다.
동경(同庚)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말로, 동갑(同甲)과 같다.
동경(東京)
① 경주(慶州)의 별칭이다.
② 동경은 낙양(洛陽). 전한(前漢)의 도읍지인 장안(長安)을 서경(西京)이라 한데 대하여, 후한(後漢) 시절의 도읍지를 이른 것.
③ 일본의 수도로 일본어로는 ‘とうきょう’로 표기하고 영어로는 ‘Tokyo’로 표기한다.
동계거사(東溪居士)
저자의 아우인 산광(山光)의 호가 동계(東溪)이다.
동계공(東溪公)
이백(李白)의, “동계공(東谿公)의 유거(幽居)에 제(題) 한다.”는 시가 있다.
동고(東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의 호이다.
동고동락(同苦同樂)
같이 괴로워하고 함께 즐거워 한다.
동고서소(東皐舒嘯)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고에 올라 휘파람 불고, 맑은 물에 다달아 시를 짓는다[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는 구절이 있다.
동고소(東皐嘯)
진(晉)나라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에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분다[登東皐以舒嘯]” 한 데서 온 말이다.
동공원자건(董公元自健)
한(漢) 나라 동탁(董卓)이 임금을 폐(廢)하고 새 임금을 세우려고 조정에 의논하니, 원소(袁紹)가 성을 내며, “천하에 건장한 자(健者)가 어찌 동공(董公)뿐이냐.” 하였다.
동공이곡(同工異曲)
표면은 다른데 내용이 똑같다는 뜻으로, 경멸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동곽(東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은자(隱者)인 동곽자기(東郭子綦)를 말한다.
동곽리(東郭履)
매우 가난하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동곽지량(東郭之良)
제(齊) 나라 사람이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사는데, 매일 나가 술과 밥을 실컷 먹고 돌아와, “부귀한 사람들과 함께 먹었노라.” 자랑했다. 처첩이 의아하여 남편을 뒤쫓아 가 보니 그가 동곽(東郭) 묘지(墓地)에 가서 제수(祭需)의 나머지를 빌어먹고 오는 것이었다. 『맹자(孟子)』 「이루(離婁)」下 / 유의어: 독반제인(獨返齊人)
동관(冬官)
공부(工部)를 동관(冬官)이라 한다. 주(周) 나라 때 육관(六官)의 하나로 토목(土木)ㆍ공작(工作) 등의 일을 맡은 관직명인데, 그 일이 『주례(周禮)』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 적혀 있는데 육부(六部)를 「천지(天地)」ㆍ사시(四時)로 배열하여, 이부(夷部)는 천관, 공부는 동관이라 칭한다.
동관(冬冠)
술(酒)의 별칭이다. 추운 겨울에 모자를 쓴 것처럼 따뜻하다는 뜻이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술은 무서운 추위도 견딜 수 있어[酒能防凜冽] 항간에서 이것을 동관이라 한다네[俗諺號冬冠] 그대 같은 대머리는[禿首如吾子] 추위를 막아 보지 않으려나[能無備禦寒] 하였다.
동관(彤管)
자루에 붉은색을 칠한 붓을 말한다. 고대에 후부인(后夫人)의 공과(功過)를 기록하던 여사(女史)의 붓으로, 적심(赤心)을 나타내기 위하여 붉은 대롱의 붓(彤管)을 썼다 하는데, 일반적으로 여인의 문묵(文墨)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동관(東觀)
한(漢) 나라 때 궁중(宮中)에 있던 관명(觀名)인데, 주로 교서(校書)와 장서(藏書)를 하던 곳이다.
동관귀래(童冠歸來)
성인의 기상을 나타낸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공자(孔子)가 제자들의 소회를 물었더니, 증자가 ‘관자(冠者) 5~6인과 동자(童子) 6~7인으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소풍하고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공자가 허여하였다.” 하였다.
동관기(彤管記)
동관의 기록. 여사(女史)가 붉은 대롱의 붓을 잡고 후비(后妃)의 언행을 하나하나 기록한 것을 말한다.
동관청금(彤管靑衿)
동관은 『시경(詩經)』의 패풍(邶風) 「정녀(靜女)」 편을 가리키며 청금(靑衿)은 정풍(鄭風) 「자금(子衿)」 편을 가리키니, 이는 정녀 편의 ‘靜女其戀 貽我彤管’과 자금 편의 ‘靑靑子衿 悠悠我心’이라 한 대문에서 따온 것이다. 소서(小序)는 한(漢)의 위굉(衛宏)이 찬한 것으로 『시경(詩經)』 각 편의 머리에 붙인 서문을 말한다. “정녀는 그 당시의 무도한 임금과 부덕한 부인을 풍자한 것이며, 청금은 난세가 되어 학교가 폐한 것을 풍자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을 따른 정현(鄭玄)의 전주(箋注)에 “동관은 붓대를 붉게 칠한 붓인데 옛날에는 여사(女史)가 이 붓으로 왕후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곧 정덕(靜德)과 미색(美色)이 있고 또 옛법을 행하여 임금의 훌륭한 배필이 됨을 말한 것이며, 청금은 푸른 옷깃을 가리키니 이는 곧 청금을 입은 학생을 그리워한 것이다.”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주자(朱子)의 집전(集傳)에는 모두 음분시(淫奔詩)로 해석하였다.
동관한기(東觀漢紀)
후한 유진(劉珍)의 찬으로 총 24권인데, 진(晉) 나라 적에는 『사기(史記)』ㆍ『한서(漢書)』와 함께 3사(史)라 하고 많이 읽혀졌다 한다.
동교(東橋)
중국 장안성(長安城)에 있는 파교(灞橋)의 이칭으로, 동쪽에 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동교(東郊)
한(漢) 나라 소광(疏廣)이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갈 때 동대문 밖에서 송별을 하였는데, 그때 전송을 나온 수레가 수백 대나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 「소광전(疏廣傳)」
동교별업(東郊別業)
별장 전원의 뜻과 같다.
동교요(董嬌饒)
전등여화(剪燈餘話)에 나오는 미인(美人)의 이름이다.
동군(桐君)
황제(黃帝) 때 사람인데 일찍이 약을 캐며 도(道)를 구하여 동려현(桐廬縣)의 동산에서 살았다. 초목(草木)과 금석(金石)의 성미(性味)를 잘 알아 삼품(三品)의 약물(藥物)을 정하여 약성(藥性) 4권과 채약록(採藥錄)을 저술하였다.
동군(東君)
봄의 별칭이다. 봄의 신(神). 봄이 오행(五行)상으로 동방(東方)과 목(木)과 청색(靑色)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제(東帝), 청제(靑帝), 청황(靑皇), 태호(太皥)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동군미옥절(東君弭玉節)
동군은 봄을 맡은 동쪽의 신(神)을 말하고, 옥 부절(玉節)은 곧 봄 소식을 의미한다.
동궁(彤弓)
붉은 활인데, 주(周) 나라 때에 제후(諸侯)가 전공(戰功)이 있으면, 천자(天子)가 동궁을 주는 것이다. 주 평왕(周平王)이 진 문후(晉文侯)를 방백(方伯)에 임명하면서 동궁과 노시를 하사한 데서 온 말로 공훈(功勳)의 대명사로 쓰인다. 『서경(書經)』 「문후지명(文侯之命)」 / 사시(四時)에 봄은 동쪽에 해당하는데, 『주역(周易)』의 진괘(震卦)는 장남괘(長男卦)로서 방위로는 동쪽이므로 동궁이라 한 것이다. / 유의어: 동궁훈업(彤弓勳業) / 인용: 貍奴行(정약용)
동궤(同軌)
『좌전(左傳)』 은공(隱公) 원년에 “천자가 죽은 지 일곱 달이 되어 장례를 행하게 됨에, 동궤가 모두 이르렀다[天子七月而葬 同軌畢至].”하였는데, 동궤(同軌)는 왕자(王者)가 일어나 천하를 통일함에 온 세계가 수레바퀴를 같이하고(車同軌) 글 쓰는 문자를 같이하게 되었다는(書同文) 『중용(中庸)』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제후들을 가리킨다.
동귀(東歸)
고향 산천을 찾아가는 날이라는 말이다. 옛날 한(漢), 당(唐) 시대에 모두 장안(長安)이 수도였던 관계로 중원과 강남 인사들이 고향을 찾아갈 때 흔히 동쪽으로 돌아간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후 동귀(東歸)를 귀향의 시어(詩語)로 쓰게 되었다.
동귀석화광(同歸石火光)
부싯돌 불빛이 번쩍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짧은 인생을 홀연히 마감했다는 말이다.
동귀초수(同歸楚水)
진(晉) 나라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명검을 얻어 하나는 자기가 차고 하나는 장화(張華)에게 주었는데, 그 뒤에 장화가 복주(伏誅)되면서 그 칼도 없어지고 뇌환의 칼은 아들이 차고 다니다가, 복건성(福建省) 연평진(延平津)에 이르렀을 때 차고 있던 칼이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면서, 없어졌던 장화의 칼과 합하여 두 마리의 용으로 변한 뒤 사라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
동근연지(同根連枝)
같은 뿌리와 잇닿은 나뭇가지. 즉, 형제자매(兄弟姉妹)를 일컫는 말이다.
동기(童欺)
두보(杜甫)의 모옥위풍우소파가(茅屋爲風雨所破歌)에 “南村群童欺我老無力”이란 어구가 있다. 이 연(聯)은 자기의 신세를 두보에게 비하여 쓴 말이다.
동기상구(同氣相求)
기풍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서로 동류를 찾아 모인다.
동낙서경(東洛西京)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동남(東南)
모두 여울과 먼지 구덩이.
동남누접(童男樓艓)
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불(徐巿)에게 명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을 찾아 선약(仙藥)을 구하도록 했던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동남비(東南轡)
한(漢)나라 범방(范滂)이 지방의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안찰사(按察使)로 임명되자,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으면서 개연(慨然)히 천하를 밝힐 뜻이 있었다.
동녀(童女)
결혼하지 않은 소녀.
동녀시(童女詩)
지원(至元) 12년(1352 元 順帝 12년, 恭愍王 元年) 원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명령하여 양가(良家)집 딸 50명을 뽑아 데려갔으니, 대개 옛날 종주국(宗主國)ㆍ번국(藩國) 간의 혼인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동년(同年)
같은 방(榜)에 급제한 사람을 말한다. 국사보(國史補)에 “급제(及第)한 것을 진사(進士), 서로 공경하는 것을 선배, 함께 합격한 것을 동년, 시관(試官)을 좌주(座主)라 한다.” 하였다. / 유의어: 동년방(同年滂). 동방급제(同榜及第)
동당(東堂)
식년과(式年科) 또는 증광시(增廣試) 때 강경시험(講經試驗)을 보는 곳을 말하며, 후엔 식년과나 증광시를 일컫는 말이 됐다. / 인용: 觀魚臺小賦(이색)
동대(東臺)
동도 어사대(東都御史臺)의 준말로, 도성(都城)을 가리킨다.
동도주(東道主)
주인이 되어 내방(來訪)한 손을 안내하는 사람을 말한다. 『좌전(左傳)』 희공삼십년(僖公三十年)에 “촉지무(燭之武)가 진백(秦伯)에게 말하기를 ‘만약 정(鄭) 나라를 동도(東道)의 주(主)로 삼아 행리(行李)의 내왕에 있어 그 곤핍(困乏)한 것을 지공하게 한다면 군(君)도 해로울 것 없으리라’ 했다.” 하였다.
동도주인(東道主人)
손(客)이 주인을 이르는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때에 정(鄭) 나라가 진(秦) 나라에 대하여, “동도 주인이 되겠다.” 하였으니, 그것은 진 나라 동쪽으로 나올 일이 있으면 정 나라가 주인노릇으로 편리를 보아주겠다는 뜻이다.
동도풍우(東都風雨)
동한 말기에 세상이 요란함을 말한 것인 듯하다.
동동(憧憧)
마음이 잡히지 않는 모양, 끊임없이 오가는 모양
동동(冬冬)
문을 두드리는 소리
동동(橦橦)
북소리
동동(洞洞)
착실함, 텅 빈 모양, 형태가 없는 모양, 더 할 나위 없이 효경스런 모습, 검은 모양
동동(曈曈)
해가 돋을 때의 해 모양, 태양처럼 빛나는 모양
동동촉촉(洞洞燭燭)
매우 공경하고 삼가하여 조심스러운 모양.
동둔무사객(東屯無事客)
두보(杜甫)가 파촉(巴蜀)에서 논농사를 지으며 한가로이 보낸 것을 말한다. 두보의 시에 “東屯稻畦一百頃 北有澗水通靑苗”라는 구절과 “東屯大江北 百頃平若案”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15 夔州歌 6, 卷19 行宮張望 補稻畦水歸
동래자기(東來紫氣)
노자(老子)가 올 때 보라색 기운이 하늘에 감도는 것을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보았다는 “紫氣東來”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注
동량지재(棟樑之材)
기둥이나 들보가 될 만한 훌륭한 인재. 한 집이나 한 나라의 큰 일을 맡을 만한 사람. / 인용: 叢石亭(조위한), 詠路傍松(김정), 木假山記(소순),
동려(桐廬)
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가 부르는데도 나가지 않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하며 숨어살았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엄광전(嚴光傳)」
동령(動鈴)
구걸(求乞)하는 일. 조선 후기에 수령(守令)이 부임하면, 그 관아의 사령(使令)들이 수령에 대한 문안을 핑계하여 동령 혹은 조곤(釣鯤)이라 칭하면서 백성에게 그 비용을 거두었는데 동령은 맨손으로 구걸하는 것, 조곤은 술을 가지고 구걸하는 것이다.
동로가(東魯家)
주인 없이 텅 빈 고향 집을 가리킨다. 이백(李白)의 시 ‘동로에 있는 어린 두 자식에게 부치다.[寄東魯二稚子].’에 “동로에 붙어사는 우리네 가족, 귀음의 전답에다 누가 씨를 뿌려 줄까.[我家寄東魯誰種龜陰田]”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태백집(李太白集)』 卷12
동로옹(東魯翁)
동로(東魯)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를 가리킨다. 노나라가 산동(山東) 지역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기 때문에, 동로옹(東魯翁)은 ‘노나라의 어르신’이란 뜻으로 공자(孔子)를 가리킨 말이다.
동뢰수연(同牢壽宴)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잔치를 말한다. 신혼 부부가 침실에서 함께 혼례 음식을 드는 것을 동뢰(同牢)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혼의(婚儀)」
동료(凍醪)
봄에 먹기 위하여 겨울에 빚어 둔 술을 말한다.
동룡(銅龍)
동룡문(銅龍門). 한대(漢代) 태자궁(太子宮)의 문 이른다. 제왕의 궁궐의 뜻으로 빌려 쓰기도 한다. 『한서(漢書)』 「성제기(成帝紀)」에 “왕이 급하게 태자를 부르니 용루문(龍樓門)에서 나왔다.” 한 주(注)에 “문루(門樓) 위에 구리로 만든 용(銅龍)이 있으므로 용루(龍樓)라고 한다.” 하였다.
동룡문(銅龍門)
구리로 만든 용으로 장식한 한(漢) 나라 태자의 궁문(宮門) 이름인데, 보통 제왕의 궁궐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한서(漢書)』 「성제기(成帝紀)」
동루(銅樓)
한대(漢代) 태자궁(太子宮)의 문루(門樓)인 동룡루(銅龍樓)의 준말,
동류(東流)
사물이 점차 사그라져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동류불일(東流不溢)
동쪽으로 흘러 넘치지 않는다.
동륙(東陸)
태양이 운행하는 동방 칠수(東方七宿)의 구역을 말한다.
동릉(東陵)
진(秦) 나라 때 소평(召平)이 동릉후(東陵侯)로 있다가 진 나라가 망한 뒤에 포의(布衣)를 입고 지내면서 장안성(長安城)의 동쪽에 오이를 심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동릉오이’ 또는 ‘청문오이’라고 불렀다.
동릉과(東陵瓜)
한(漢) 나라 소평(邵平)이 동릉후(東陵侯)를 그만두고 청문(靑門) 밖에서 가꾼 감미로운 오이를 말한다.
동릉과지(東陵瓜地)
동릉은 진(秦)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진 소평(召平)을 말한다. 그는 진 나라가 망하자 가난한 선비가 되어 장안(長安) 동쪽 땅에 오이를 심어 가꾸었는데, 오이가 매우 맛이 좋아 세속에서 이를 ‘동릉과(東陵瓜)’라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卷五十四
동릉소평포(東陵邵平圃)
소평(邵平)이 진(秦)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졌는데,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가난한 선비의 신분으로 장안(長安)의 성(城) 동쪽에 오색과(五色瓜)를 심어서 생활을 영위했던 데서 온 말이다.
동릉주선포인간(東陵晝膳脯人肝)
도척(盜跖)이 동릉(東陵)에서 사람의 간(肝)으로 회를 쳐서 점심 반찬으로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동릉후(東陵侯)
진(秦) 나라의 소평(召平)의 봉호이다. 소평은 진 나라가 망하자 포의(布衣)로 장안성(長安城) 동쪽에 살면서 오이를 심어 생활을 영위했다. 세상에서는 이 오이를 동릉과(東陵瓜)라 하였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동리(東里)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살았던 지명으로 곧 자산을 지칭하는 말인데,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사명(辭命)을 짓는 데는 비심(裨諶)이 초(草)하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자우(子羽)가 수식(修飾)하고, 동리가 윤색(潤色)한다.” 하였다.
동리국(東籬菊)
도연명(陶淵明)의 시 「음주(飮酒)」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도연명집(陶淵明集)』 卷3
동리연분(東籬緣分)
국화를 가장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 도잠(陶潛)의 「음주(飮酒)」 시에, “동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다.
동리옹(東籬翁)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이 동쪽 울타리 가에 국화를 심었으며, 갈건(葛巾)으로 술을 걸러서 마셨다.
동리유상원(東籬幽賞遠)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전원 생활을 즐기면서 국화를 몹시 좋아하였는데, 그가 지은 「음주(飮酒)」에 “동쪽 울서 국화꽃을 따 들고, 한가로이 남쪽 산을 바라다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다. 『남사(南史)』 卷75 隱逸列傳上 陶潛
동리일타(東籬一朶)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 잡시(雜詩) 「음주(飮酒)」의 “동쪽의 울밑에서 국화를 따다 무심히 남녘 산을 바라본다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나온 것으로, 국화를 가리킨다.
동리진물색(東籬眞物色)
도연명(陶淵明)이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좋아하는 술도 없이 울타리 가의 국화꽃을 따면서 하염없이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때마침 자사(刺史)인 왕홍(王弘)이 보낸 백의 사자(白衣使者)가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취하도록 마시고 돌아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송서(宋書)』 卷93 「도잠전(陶潛傳)」
동림(東林)
동림서원(東林書院)의 약칭. 송(宋)의 양시(楊時)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다 동림서원을 세워두고 학문을 강론했는데, 당시 사대부들로서 가슴에 경륜을 지니고 세상과 맞지 않은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그때 집권파인 위충현(魏忠賢) 일파로부터 동림당(東林黨)이라는 지목을 받고 숙청까지 당했다가 충현이 복주(伏誅)된 후 다시 번성하였다. 『명사(明史)』 「고헌성전(顧憲成傳)」
동림(東林)
동쪽에 있는 숲으로, 일본을 가리킨다.
동림사(東林寺)
중국에 있는 절인데 백거이(白居易)가 있었다.
동림사(東林寺)
진(晉) 나라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머물던 여산(廬山)의 절 이름으로, 이곳에서 당시의 고사일인(高士逸人) 18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함께 모여 노닐었다. 『연사고현전(蓮社高賢傳)』 「혜원법사(慧遠法師)」
동림승패(東林勝敗)
사화(士禍)나 당쟁(黨爭)을 말한다. 송(宋)의 양시(楊時)가 무석(無錫)에다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세웠는데, 명대(明代)에 와서 고헌성(顧憲成)등이 그것을 중수하고 학문을 강마하면서 혹은 국정을 논평하기도 하고 인물을 품평하기도 하여 당시 사대부들이 많은 향응을 하였고 그리하여 드디어 동림당(東林黨)이 형성되었다. 그 후 위충현(魏忠賢)이 득세하자 그간 동림당을 시기하고 있던 자들이 그것을 기회로 중상모략을 하여 당옥(黨獄)을 일으켜 거의 망타가 되었다가 충현이 복주(伏誅)되고 나서 공론이 다시 밝아졌다고 한다. 『명사(明史)』 「고헌성전(顧憲成傳)」
동마부(董馬賦)
동중서(董仲舒)와 사마천(司馬遷)의 부(賦).
동명(東明)
고구려시조(始祖). 그의 아버지,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모수(解慕漱).
동명왕(東明王)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인 고주몽(高朱蒙)을 가리킨다.
동모(桐帽)
오동잎으로 만든 모자를 이르는데, 옛날 은자(隱者)가 착용했다고 한다.
동모산(東牟山)
요령성 심양현(瀋陽縣) 동쪽에 위치한 산. 일명 천주산(天柱山)으로 당 나라 고종이 고구려와 발해(渤海) 등을 평정하고 군대를 두어 지키게 한 산이다.
동무(同畝)
같은 밭에 심다.
동무음(東武吟)
악부(樂府) 초조곡(楚調曲)의 이름인데, 당(唐) 나라 이백(李白)에게 가사(歌辭)가 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시사(時事)의 변천과 영화(榮華)의 덧없음을 상심하는 뜻을 담고 있다.
동묵(銅墨)
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의 준말로, 지방의 수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문(同文)
천하가 같은 문자(文字)를 쓴다는 말로, 『중용(中庸)』 28장에 “지금 천하가 수레는 제도가 같고, 책은 문자가 같고, 행동은 질서가 같다[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하였다.
동문과(東門瓜)
동문은 성(城)의 동문. 옛 진(秦)의 동릉후(東陵侯)였던 소평(召平)은 진이 멸망하자, 포의(布衣)로 장안(長安)의 성 동쪽에 오이를 심고 살았는데, 오색(五色) 오이가 있어 유명하였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동문궤(同文軌)
온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뜻이다. 문궤(文軌)는 ‘서동문(書同文) 거동궤(車同軌)’란 말에서 온 것이다. 『중용(中庸)』 28장
동문동궤(同文同軌)
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말한다. 동문(同文)은 문자를 통일하게 하는 것이고, 동궤(同軌)는 법을 같게 한다는 것이다. 『중용(中庸)』 28장
동문동적(東門銅狄)
장생불사하는 신선의 일을 가리킨다. 선인(仙人) 계자훈(薊子訓)이 장안(長安) 동문 패성(覇城) 가에서 어떤 노인과 함께, 진시황(秦始皇) 때 이적(夷狄)의 거인(巨人)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동인(銅人)을 쓰다듬으며 “이것을 만드는 것을 본 뒤로 5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열전(方術列傳)」 子訓傳
동문서답(東問西答)
동쪽에서 묻는데 서쪽에다 대답한다. 묻는 말에 대하여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문수학(同門修學)
한 스승 밑에서 같이 학문을 닦고 배움.
동문오(東門吳)
위(魏) 나라 사람 동문오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았다. 이에 그의 가신(家臣)이 묻기를 “공의 아들 사랑은 천하에 둘도 없었는데, 이제 자식이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옛날에 자식이 없었는데, 자식이 없다고 그때 슬퍼하지 않았었다. 지금 자식이 죽은 것은 옛날에 자식이 없었던 것과 똑같은데,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열자(列子)』 「역명(力命)」
동문일궤(同文一軌)
천하가 통일되어 글은 글자가 같고, 수레는 궤(軌)의 제도가 같다(車同軌 書同文字)는 말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중용(中庸)』 28장에
동문지요상(東門之堯顙)
공자(孔子)가 정(鄭) 나라 동문(東門)에 혼자 섰더니 어느 사람이 보고 말하기를, “동문에 한 사람이 있는데, 이마는 요(堯)와 같고 얻어먹지 못한 상가구(喪家狗)와 같다.” 하였다. 『사기(史記)』 卷十七 「공자세가(孔子世家)」
동미함음(桐尾含音)
채옹(蔡邕)이 타다 남은 오동나무를 가지고 거문고를 만들었다.
동방(同榜)
과거 시험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동방(洞房)
깊숙한 데에 있는 방. 전하여 부인의 침방(寢房)을 말한다.
동방(東方)
당(唐)의 시인(詩人) 동방규(東方虯)를 말하는데, 사람의 시재(詩才)를 극구 칭찬한 말이다.
동방규(東方虯)
당(唐) 나라 시인.
동방만청(東方曼倩)
만청은 한(漢) 나라 동방삭(東方朔)의 자(字)이다. 그는 문사(文辭)에 능하고 해학(諧謔)도 잘하였다. 속설(俗說)에는 “그가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고는 장수(長壽)하였으므로,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이라 말한다.” 한다.
동방삭(東方朔)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字)는 만청(曼倩). 해학(諧謔)과 골계(滑稽)에 뛰어났으며 벼슬이 태중대부 급사중(太中大夫給事中)에 이르렀는데, 그는 또한 선술(仙術)로도 널리 알려졌다. 『한서(漢書)』 卷六十五
동방삭(東方朔)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의하면, 동방삭이 살았을 때에 동사랑(同舍郞)이 말하기를 “천하에 아무도 동방삭을 알 자가 없고, 오직 태왕공(太王公)만이 안다.” 하였는데, 동방삭이 죽은 뒤에 무제(武帝)가 그 말을 듣고는 태왕공을 불러 “네가 동방삭을 아느냐?”고 묻자, 태왕공이 천문(天文)으로 알 수 있다고 하므로, 무제가 또 묻기를 “모든 별이 다 갖춰져 있느냐?”하니, 태왕공이 대답하기를 “다른 별들은 그대로 있으나 다만 세성(歲星)은 18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다시 보입니다.” 하자, 무제가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기를 “동방삭이 살아서 18년 동안을 내 곁에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세성이었음을 내가 몰랐구나.”고 했다 하므로, 이것이 곧 동방삭의 전신이 세성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또 참된 은자(大隱)가 되었다는 것은 동방삭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같은 사람은 조정(朝廷) 사이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다. 속세에 묻혀 살며 금마문에서 세상을 피하노니, 궁전(宮殿) 안이 곧 세상을 피하여 몸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곳인데, 하필 깊은 산중을 들어갈 것이 있겠는가.”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卷一百二十六, 李太白集 卷十一 書懷贈南陵常贊府詩
동방지일(東方之日)
제풍(齊風) 「동방지일(東方之日)」에 실린 장명. 그 내용은 “東方之日兮 彼姝者子 在我室兮 在我室兮 履我卽兮 東方之月兮 彼姝者子 在我ꞟ兮 在我ꞟ兮 履我發兮”라는 것으로 2장(章) 5구(句)이다.
동배주창류(同杯酒娼類)
한 잔의 술을 같이 마신 창녀(娼女). 곧, 한 사내에게 약속하고 몸을 맡긴 창녀.
동번(東樊)
조선 철종(哲宗) 연간의 문신이며 시인이었던 이만용(李晩用)의 호이다.
동벽(東壁)
문장(文章)을 맡은 별 이름으로, 전하여 천자(天子)의 도서(圖書)를 관장한 비부(祕府)를 이른다. 『대상(大象)』 「열성도(列星圖)」
동벽(東壁)
홍문관원의 별칭이다. 홍문관원이 사진(仕進)하여 앉는 좌차(座次)가 그 벼슬의 별칭이 되었으니, 곧 직제학(直提學)ㆍ전한(典翰)ㆍ응교(應敎)ㆍ부응교(副應敎)를 동벽, 교리(校理)ㆍ부교리(副校理)ㆍ수찬(修撰)ㆍ부수찬(副修撰)을 서벽, 박사(博士)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를 남상이라 했다. 그리고 모두 경연을 겸임하였으며, 부제학에서 수찬까지는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동벽성(東壁星)
이십팔수(二十八宿) 중의 하나, 이 벽성은 문장을 맡은 별이라 한다.
동벽휘(東壁輝)
제(齊)나라에 서오(徐吾)라는 가난한 부인이 있었다. 이웃 부인들과 밤에 촛불을 어울려 방적(紡績)을 하는데, 서오는 가장 가난하여 촛불을 계속해 대지 못하니 이웃 부인들이 촛불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서오는, “내가 가난하여 촛불을 같이 대지 못하므로, 항상 먼저 와서 소제(掃除)하고 자리를 정돈하여 당신들 오기를 기다린다. 한 방에서 나 한 사람 더 있음으로 해서 촛불이 따로 소비될 것도 아니니 동벽(東壁)의 남은 빛을 왜 아끼는가.” 하니, 이웃 부인들이 서오에게 촛불을 같이 쓰기를 허락하였다.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살아가는 것 또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잘 이해해 줌
동보(同甫)
진량(陳亮)의 자(字)로 학자들이 용천 선생(龍川先生)이라고 불렀다. 가슴에 웅대한 계책을 품고 있었으나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몇 번이나 하옥되었다가 겨우 풀려나곤 하였다. 주희(朱熹)와 황제 왕패(皇帝王霸)의 학문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주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그의 뜻을 뺏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송원학안(宋元學案)』 卷56
동복(僮僕)
말구종 드는 하인.
동봉(東峯)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별호이다.
동봉(東封)
사마상여가 임종(臨終) 전에 지은 봉선문(封禪文)을 가리킨다. 그 내용을 보면, 한 무제(漢武帝)에게 동쪽으로 태산(泰山)에 가서 봉선(封禪)의 제사를 드리라고 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봉(東封)
옛적에 제왕(帝王)이 천하가 태평한 공을 이루면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하늘에 제사하고 옥첩(玉牒)을 땅에 봉하는 것이니, 이것을 봉선(封禪)이라 한다.
동봉자(東峯子)
김시습(金時習)의 별호이다.
동부(銅符)
구리쇠로 만든 부신(符信). 동어부(銅魚符)의 준말로, 지방관이 차는 인끈. 동인(銅印)과 같은 말로, 지방 수령을 말한다.
동부(洞府)
도교(道敎)의 용어로, 신선(神仙)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송사(宋史)』 「예지(禮志)」
동부담병(同父談兵)
동보는 송 효종(宋孝宗) 때의 학자인 진량(陳亮)의 자이다. 재기(才氣)가 뛰어나 병법을 담론하길 좋아하였으며, 일찍이 옛사람이 무력을 사용한 것과 승리하고 패배한 것에 대한 사적을 상고하여 작고론(酌古論)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송사(宋史)』 卷四百三十六 「진량전(陳亮傳)」
동북(東北)
관동(關東)과 관북(關北). 곧 강원도와 함경도.
동분서주(東奔西走)
동쪽으로 뛰고 서쪽으로 달린다. 사방으로 이리저리 부산하게 돌아다님을 말한다.
동빈(洞賓)
8선(仙)의 하나로 불리는 당(唐) 나라 여암(呂巖)의 자(字)인데, 자신에게는 3검(劍)이 있다고 하면서 각각 번뇌(煩惱)와 탐진(貪嗔)과 색욕(色慾)을 끊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동빙한설(凍氷寒雪)
얼음이 얼고 눈보라가 치는 추위
동사(彤史)
궁중 생활의 기록을 맡은 여관(女官), 또는 그 생활의 기록. 붓대가 붉은 붓을 잡고 궁중(宮中)에서 군후(群后)의 일을 기록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다.
동사(桐社)
동향(桐鄕)의 사당으로, 어진 수령을 제사 지내는 사당을 말한다. 동향은 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지명이다. 한(漢) 나라 때 주읍(朱邑)이 젊어서 동향(桐鄕)의 색부(嗇夫)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 존경하였다. 그 뒤에 주읍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옛날에 동향의 관리가 되었을 적에 그 백성들이 나를 사랑하였다. 그러니 반드시 나를 동향에 장사 지내라.” 하였다. 주읍이 죽자 그 아들이 동향에 장사 지내었는데, 동향의 백성들이 과연 사당을 세워서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 『한서(漢書)』 卷89 「순리전(循吏傳)」 朱邑
동사백(董思白)
명 나라 동기창(董其昌)을 말한다.
동사부(東槎賦)
사행(使行) 길에 지은 시를 말한다. 중종 16년(1521)에 중국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가 조선에 왔을 때 우리측의 접반사 이행(李行), 종사관湖陰)ㆍ소세양(蘇世讓) 등 당대의 저명한 시인들과 서로 많은 시를 수답하였는데, 그들이 돌아간 뒤에 그 시들을 묶어 동사집(東槎集)이라 이름한 데서 나온 말이다. 『패관잡기(稗官雜記)』 卷四
동사자수(同舍自羞)
한 문제(漢文帝) 때 직불의(直不疑)가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이때 동사인(同舍人)이 금(金)을 잃어버리고 직불의를 의심하자, 직불의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 금을 보상해 주었던 바, 뒤에 직불의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금을 잃었던 사람이 대단히 부끄럽게 여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卷一百三
「동산(東山)」
『시경(詩經)』 빈풍의 편명이다. 일찍이 주 무왕(周武王)이 주(紂)를 멸하고 그의 아들 무경(武庚)을 대신 세운 다음, 자기 아우인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을 은(殷)에 보내서 무경을 감시하게 하였는데, 무왕이 돌아가고 이린 성왕(成王)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관숙ㆍ채숙이 무경에게 붙어 “주공(周公)이 장차 유자(孺子; 성왕)에게 불리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성왕이 그 말을 듣고 숙부인 주공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주공이 동쪽으로 정벌하여 무경과 관숙ㆍ채숙을 모두 토멸하였는데, 이 동산시는 바로 주공이 무경 등을 토멸하고 3년 만에 돌아와서 병사들을 위로한 노래이다.
동산(東山)
중국 절강(浙江) 상우현(上虞縣) 서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처음에 좌저작랑(佐著作郞)을 지내다가 병이 들어 그만두고 그곳에 은거하여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자,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석(安石)이 나오려 하지 않으니 장차 이 창생을 어찌할꼬.” 하였는데, 40세에 다시 나가서 환온(桓溫)의 사마(司馬)가 된 뒤에 사도(司徒)까지 지냈다. 『진서(晉書)』 卷七十九 「사안전(謝安傳)」 ☞ 고와동산(高臥東山)
동산(銅山)
철산(鐵山)의 옛 이름이다.
동산각소노(東山覺小魯)
공자(孔子)가 노(魯) 나라의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上
동산고와(東山高臥)
동산에 은거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한다. ☞ 고와동산(高臥東山)
동산기(東山妓)
진(晉)의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서 놀면서 기생을 늘 대동하였다고 한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동산부(銅山富)
돈이 풍부한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가 일찍이 촉(蜀)의 엄도동산(嚴道銅山)을 영신(佞臣) 등통(鄧通)에게 주어서 임의로 주전(鑄錢)하게 하였다.
동산화옥(東山華屋)
동산은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은거(隱居)하던 곳이다. 사안(謝安)이 죽은 뒤에 존경하던 양담(羊曇)이 그 집을 지나다가 조자건(曹子建)의 시에 “살아서는 좋은 집(華屋)에 거처하더니 죽어서는 산으로 돌아간다”라는 글귀를 읊고 통곡한 고사가 있다.
동상(東床)
극감(郄鑒)이 문생(門生)으로 하여금 왕도(王導)의 문하(門下)에서 사윗감을 간택하게 하였더니 왕씨 문중(王氏門中)의 여러 소년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자신(自身)을 칭양하였으나, 왕희지(王羲之)만은 배를 드러내고 동상(東床)에 누워 모른 체하자 그를 사위로 삼았다. 『진서(晉書)』 卷八十 「왕희지전(王羲之傳)」
동상(董相)
한 나라 무제(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을 지낸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꿈. 겉으로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서로 딴 생각을 품음 또는 같은 처지와 입장에서 저마다 딴 생각을 한다.
동생(董生)
한(漢)나라 광천(廣川)사람인 동중서(董仲舒)를 말한다.
동생심장려(董生深長慮)
동생(董生)은 한(漢)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 동중서가 재이지기(災異之記)를 써서 사람의 잘못이 결국 천재지변을 부른다는 경고의 뜻을 담았는데, 그 속에 풍자가 들어 있다 하여 천자(天子)로부터 죄를 받고 그후로는 끝내 재이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
동생유견(董生乳犬)
동생은 당(唐) 나라 때의 은사(隱士)인 동소(董召)를 이른다. 동소의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개도 새끼를 먹일 것이 없어 어미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에 닭이 와서 벌레를 쪼아가지고 개 새끼를 먹이려 하였으나, 개 새끼는 먹지 않고 슬피 울기만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창려집(韓昌黎集)』 「동생행(董生行)」
동서(東序)
하(夏) 나라 시대의 태학(太學)으로 이곳에서 국로(國老)를 봉양하기도 하였는데 『서경(書經)』 고명(顧命)에 “대옥(大玉) 등은 동서(東序)에 둔다.”고 하였다.
동서계(東西階)
『예기(禮記)』 「곡례(曲禮)」 上에, “主人就東階 客就西階 客若降等 則就主人之階”라고 보인다.
동선(銅仙)
한 무제(漢武帝) 때에 구리를 가지고 ‘선인(仙人)이 손으로 쟁반을 받쳐들고 감로(甘露)를 받는 형상’으로 주조한 기물(器物)이다.
동선(同船)
후한(後漢) 때 곽태(郭太)가 낙양(洛陽)에 노닐면서 고사(高士) 이응(李膺)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이응이 그를 대단히 기특하게 여기어 서로 친구가 되었는데, 뒤에 곽태가 향리로 돌아올 적에 수천 명의 선비들이 배웅을 나왔는바, 이때 곽태가 오직 이응하고만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갔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卷六十八
동선사한(銅仙辭漢)
임금이 도성을 떠나 파천(播遷)한 것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명제(明帝)가 한 무제(漢武帝) 때 세워진 동선(銅仙) 즉 선인장(仙人掌)을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기려 할 때 승로반(承露盤)이 땅에 떨어져 크게 소리를 내며 부서지자 동선이 눈물을 흘렸다는 ‘동선사한(銅仙辭漢)’의 고사가 전한다. 『삼국지(三國志)』 魏書 「명제기(明帝紀)」 注
동선장(銅仙掌)
천상(天上)의 선로(仙露)를 받기 위하여 한 무제(漢武帝)가 구리로 만들어 세웠다는 선인(仙人)의 손바닥. 연꽃잎.
동선하로(冬扇夏爐)
겨울의 부채와 여름의 화로. 아무 소용 없는 물건을 말한다.
동성(東城)
서울 중구 광희 2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을 말한다. 당시 도성에서 나오는 모든 하수가 빠져나가는 수문으로, 각종 오물과 쓰레기를 폐기했던 곳이자,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 보인다. 『서울六百年史』 第一卷
동성상응(同聲相應)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여 어울린다. 의견을 같이 하면 자연히 서로 합치게 된다는 의미이다.
동성이속(同性異俗)
사람의 성질은 본래는 같으나 습관에 따라 변함을 말한다.
동속(同俗)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팔정을 고루 행하여 음란함을 예방하고, 도덕을 일관되게 펼쳐 풍속이 같게끔 한다.[齊八政以防淫 一道德以同俗]”라는 말이 나온다.
동손(桐孫)
동목(桐木)의 손지(孫枝). 즉 오동나무 가지에서 다시 생겨난 가지를 말한다.
동수(銅綬)
구리 인장의 인끈. 한(漢) 나라 제도에 지방 수령은 구리 인장을 사용하였다 하여 현감이나 군수 등의 별칭으로 사용한다.
동시(東市)
낙양성 동쪽에 있었던 우마시(牛馬市).
동시(東市)
장안(長安) 동쪽 시가지로 여기에서 사형을 집행하곤 하였다.
동시(東施)
미인 서시(西施)가 가슴병을 앓아 찡그리매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그 마을의 못 생긴 여인 동시(東施)가 보고 부러워하여 가슴을 쥐고 찡그리니 사람들이 보기 싫어 문을 닫았다.
동시(彤矢)
『시경(詩經)』 소아(小雅) 「彤弓(동궁)」의 “시위 느슨한 붉은 활을 받아서 간직하네. 내게 좋은 손님 있으니 성심으로 내려주네[彤弓弨兮 受言藏之 我有嘉賓 中心貺之]”에서 나온 말로, 공을 세우면 천자가 붉은 화살을 상으로 내렸다 한다.
동심결(同心結)
실 같은 것으로 두 고를 내고 맞맺어서 풀리지 않도록 굳게 맺는 매듭을 말하는데, 이는 곧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뜻을 부친 것이다. 양무제(梁武帝) 유소사시(有所思詩)에 “허리에 띤 두 비단띠가 꿈에 동심결이 되었다[腰間雙綺帶, 夢爲同心結].” 한 데서 온 말이다. / 인용: 端川節婦詩(김만중)
동심루(同心縷)
실이 풀리지 않도록 굳게 맺는 매듭. 이 또한 부부가 굳게 서로 사랑하는 뜻을 부친 것이다.
동심인성(動心忍性)
더욱 큰일을 하기 위하여 자기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자기의 성질을 참아 강인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는 말로, 『맹자(孟子)』 「고자(「고자(告子)」)」 下에 나온다.
동심지언(同心之言)
같은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절친한 친구 사이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동심화(同心花)
다른 두 나무의 꽃이 서로 맞붙어 한 꽃을 이룬 것이라 한다.
동쌍성(董雙成)
옛날의 여선(女仙)으로 서왕모(西王母)의 시녀(侍女)였다고 한다.
동씨유(董氏帷)
동씨(董氏)는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동중서는 춘추(春秋)를 전공하였으며, 경제(景帝) 때에 박사(博士)가 되어 장막을 드리우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3년 동안 밖에 나오지도 않았다.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
동아왕(東阿王)
조식(曹植). 위문제(魏 文帝) 조비(曹丕)의 동생.
동악(動樂)
궐희(闕戱) 때의 놀이의 한 가지. 사학(四學)에서 보낸 사신을 예조(禮曹)에서 대접할 때 어린아이에게 솥뚜껑을 치며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호이다.
동악상제(同惡相濟)
함께 악을 행하여 서로 돕는 것.
동악신묘(東嶽神廟)
광녕(廣寧)의 동쪽 성 밖 몇 리 되는 곳에 있는 묘우(廟宇)로, 동악, 즉 대악(岱岳)의 신인 제천인성제(齊天仁聖帝)를 모신 사당이다.
동안심법(同安心法)
심경부주(心經附註) 권3에 “오늘날 배우는 이들이 장족의 발전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소년 시절에 동안에 있으면서 밤에 종소리를 들었는데, 하나의 종소리가 끊어지기도 전에 이 마음이 벌써 다른 곳으로 치달리는 것이었다[嘗記少年時在同安 夜聞鍾聲 聽其一聲未絶 此心已自走作]. 그리하여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을 경책하고 반성하여 학문은 모름지기 전심치지(專心致志)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주자(朱子)의 말이 실려 있다.
동안현리종성단(同安縣裏鐘聲斷)
주자(朱子)의 제자 장현보(張顯父)가 주자에게 올린 편지에 “선생께서 ‘지난번 동안현(同安縣)에서 종소리를 들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마음 거둬들이는 법을 깨달았다.’고 하시셨습니다. ……” 한 데에 대하여, 주자의 답서에 이르기를, “그것은 다만 사람의 마음이 수시로 드나들어서 종소리 하나가 쉬지 않음으로써 내 마음도 이미 수없이 변하던 것을 말한 것일 뿐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卷五十八
동액(東掖)
당 나라 때 왕명의 출납과 국가의 문서를 관장하던 문하성(門下省)의 별칭으로, 우리 나라의 승정원을 말한다.
동야(東野)
당(唐) 나라 때의 시인인 맹교(孟郊)의 자인데, 그는 연해 세 아들을 낳았으나 낳을 때마다 수일 만에 잃었으므로, 한유(韓愈)가 그를 위로하는 뜻에서 지은 맹동야실자시(孟東野失子詩)에 “하늘에게 묻기를 인간을 주관하되 후박을 왜 안 고르게 하는가 하니 하늘이 이르되 하늘과 땅과 사람은 본래부터 상관이 없다 하였네[問天主下人 薄厚胡不均 天曰天地人 由來不相關].” 했던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卷八十七ㆍ『한창려집(韓昌黎集)』 卷四
동야(東冶)
지명.
동야거빈가구소(東野居貧家具少)
당나라 시인(詩人) 맹동야(孟東野)의 이거(移居)하는 시에, “수레를 빌어 가구(家具)를 실으니 가구가 수레보다 적구나.” 하였다.
동약(僮約)
노예(奴隷)의 계약(契約)을 기술한 문장명(文章名)으로, 한(漢) 나라 때 왕포(王褒)가 지은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노예를 사서 부리는 데에 있어 매우 까다로운 조건으로 노예를 혹사시킴을 기술하고 있다.
동양(東陽)
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한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을 가리킨다.
동양(東瀼)
중국 기주(蘷州)에 있는 물이름으로, 당 나라 두보(杜甫)가 그곳에 더부살이 하여 타향의 뜻으로 쓰인다.
동양(東陽)
평산(平山)의 옛 이름이다.
동양대공이(東陽帶孔移)
동양 태수(東陽太守)를 지낸 남조 양(南朝梁)의 시인 심약(沈約)을 가리킨다. 태수로 나간 지 1백여 일 만에 허리띠를 몇 번이나 다시 졸라맬 정도로(革帶常應移孔) 몸이 수척해졌다고 한다. 『양서(梁書)』 「심약전(沈約傳)」
동양도위(東陽都尉)
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한 신익성(申翊聖)의 봉호이다.
동양소수(東陽銷瘦)
몸이 바짝 말라 쇠약해진 것을 말한다. 양(梁) 나라의 시인 심약(沈約)이 동양 태수(東陽太守)로 나가서 힘들게 신경을 쓰는 바람에 허리띠가 자꾸 줄어들고 팔뚝이 반으로 가늘어졌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양서(梁書)』 「심약전(沈約傳)」
동양위(東陽尉)
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한 신익성(申翊聖)의 봉호(封號)이다.
동양진(動梁塵)
양진(梁塵)은 들보 위의 티끌. 옛날 노(魯) 나라의 우공(虞公)은 소리를 발하면 매우 청월(淸越)하여 노래하면 들보 위에 있는 티끌이 움직였다 한다.
동어(銅魚)
동어부(銅魚符)의 준말로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부신(符信)을 이른다. 관등(官等)에 따라 금(金)ㆍ은(銀)ㆍ동(銅)의 구별이 있다.
동어부(銅魚符)
구리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부신(符信)인데, 옛날 지방관이 이를 몸에 지니었었다.
동엽봉제(桐葉封弟)
장난 삼아 오동나무 잎으로 동생을 제후(諸侯)에 봉(封)한다는 뜻으로, 제후를 봉하는 일을 뜻하는 고사성어다.
동엽전규(桐葉剪圭)
규는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나게 옥으로 만든 것인데, 천자가 제후를 봉(封)할 때에 내려 주는 것이다.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어릴 적에 아우 강숙(康叔)과 희롱하면서, “오동잎(桐葉)을 오려서(剪) 규를 만들어 강숙에게 주며 이것으로 너를 봉(封)해 주리라[成王以桐葉, 與小弱弟戱曰, 以封汝].” 하였다.
동영(冬榮)
겨울 꽃.
동영(東瀛)
조선 시대에 홍문관(弘文館)을 영각(瀛閣)이라 했으니, 동영은 바로 홍문관을 가리킨 것이며, 선화(仙化)했다는 말은 홍문관에 들어가 영광을 누리는 것이 신선이 된 것과 같다는 뜻이다.
동오(東吳)
춘추시대(春秋時代) 오(吳) 나라 지방으로 오늘날의 절강성(浙江省)과 호남성(湖南省) 일대인데,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동오(童烏)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아들 신동(神童) 오(烏)를 가리킨다. 그는 무척 총명하여 일곱 살에 웅이 논한 현문(玄文)에 참여하였는데, 불행히도 아홉 살에 요절하였다. 『화양국지(華陽國誌)』 「선현양웅전(先賢揚雄傳)」
동온하청(冬溫夏凊)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 겨울에는 따습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린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동옹(東翁)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을 가리킨다.
동요(棟撓)
『주역(周易)』 대과(大過)에 “대과는 들보가 휜 것이다[大過棟撓].”하였고, 단사(彖辭)에 “들보가 휜 것은 본말이 약한 때문이다[棟撓本末弱也].” 한 데서 온 말이다.
동용(動容)
초목이 모습을 바꾸는 것
동우인(桐偶人)
동우인은 동목(桐木)으로 만든 우상(偶像)인데, 한 무제(漢武帝)가 병이 났을 적에, 일찍이 여태자(戾太子)와 사이가 나빴던 강충(江充)이 태자를 제거하기 위해, 상(上)의 병환은 무고(巫蠱)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 하고 옥사를 일으켜 수만 명을 죽이고, 끝내는 무당을 시켜 동우인을 만들어서 태자의 궁중에 묻어 놓았다가 뒤에 이것을 파내어 마치 태자가 임금을 저주한 것처럼 꾸밈으로써 결국 태자와 황후까지 모두 자살하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卷四十四
동원(東垣)
금(金) 나라 때의 명의(名醫) 이고(李杲)의 별호이다.
동원(董源)
남당(南唐)사람. 자는 북원(北苑).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산수화(山水畫)에 능하였다. 『십국춘추(十國春秋)』
동원(東園)
한(漢) 나라 때 왕공 귀족의 무덤에 쓰이는 기물을 만들어 제공하는 일을 맡았던 소부(少府)에 소속된 관서의 이름이다.
동원기(東園器)
동원 비기(東園秘器)의 준말로, 한(漢) 나라 때에 동원이란 관서(官署)에서 제작한 최상품의 상장 도구(喪葬道具)를 말하는데, 이것은 주로 제왕(諸王)이나 공훈이 큰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하사하던 것이다.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
동원비(東園秘)
동원은 한(漢) 나라 때 장구(葬具)를 만들던 관서(官署)의 이름이고, 비기는 곧 장사(葬事) 때 쓰는 관(棺) 이하 여러 가지 장구를 가리킨다. 한 나라 때 특히 공신(功臣)ㆍ대신(大臣) 등이 죽었을 적에는 관례적으로 이 동원의 비기를 하사했다고 한다.
동원숙자환(東垣叔子環)
아들이 어려서 일찍 죽은 슬픔을 말한다. 서진(西晉)의 정남장군(征南將軍) 양호(羊祜)가 다섯 살 되었을 적에, 이웃에 사는 이씨(李氏)의 동쪽 담 뽕나무 밑으로 곧장 가서 금환(金環)을 찾아내어 가지고 놀았는데, 이씨 집에서 이것을 보고는 “어려서 죽은 내 아들이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던 물건이다.”라고 경악해 마지않았으며, 당시 사람들도 이씨의 아들이 양호로 환생(還生)했다고 믿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진서(晉書)』 卷34 「양호전(羊祜傳)」 숙자(叔子)는 양호의 자(字)이다.
동월(東越)
지금의 절강성 동부와 남부, 복건성 동남부 지역에 걸쳐 있던 나라.
동월작부(董越作賦)
동월은 명(明) 나라 영도(寧都) 사람이다. 헌종(憲宗) 때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효종(孝宗) 때에 우서자(右庶子)가 되어 사신으로 조선(朝鮮)에 나와서 저술을 많이 남기었고 사동일록(使東日錄)이 있다. 『국조헌징록(國朝獻徵錄)』 卷五十二
동위(東闈)
왕세자 있는 곳
동유(董帷)
동중서(董仲舒)의 장막을 말한다. 한(漢) 나라 때 동중서는 일찍이 박사(博士)가 되어 학문에 전념하느라 장막을 내리고서 강의하였으며, 제자들에게 차례로 학업을 가르치므로 혹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한서(漢書)』 卷五十六 「동중서전(董仲舒傳)」
동의(童衣)
청의동자(靑衣童子)를 줄인 말이다. 옛날 전진왕(前秦王) 부견(苻堅)이 사람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사면령(赦免令)을 쓰고 있었는데, 쉬파리(靑蠅)가 한 마리 날아들어와 쫓으면 다시 오곤 하였다. 조금 뒤에 사람들이 사면령 내릴 것을 전부 알고 있으므로, 사실을 알아보니 한 청의동자(靑衣童子)가 길거리에 사면령이 내렸다고 소리치고 다녔다 했다. 그제서야 부견은 전의 쉬파리가 바로 청의동「자로(子路)」 화했음을 알았다 한다. 『백공육첩(白孔六帖)』
동이누(東夷陋)
공자(孔子)가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되, “누(陋)하리이다.” 공자가 말하되, “군자가 살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君子居之, 何陋之有].” 하였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동이불화(同而不和)
겉으로는 동의를 표시하면서도 내심은 그렇지 않음.
동이수(童二樹)
청 나라 산음(山陰) 사람인데 이름은 옥(鈺), 자는 박암(璞巖), 호는 이수이다. 산수(山水)ㆍ난죽(蘭竹)ㆍ목석(木石)에 두루 공력이 있었음.
동인(銅人)
구리로 주조하여 궁문(宮門)과 묘문(廟門) 앞에 세웠던 동상. 동적(銅狄)이라고도 한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에 계자훈(薊子訓)이 장안(長安) 동쪽 패성(霸城)에서 한 늙은이와 함께 동인을 마사(摩挲)하며 서로 이르기를 “마침 이것을 지어붓는 것을 보았는데 이미 5백 년이 가까웠다.” 하였다. 소식(蘇軾)의 시에 “摩挲古銅人 歲月不可計”라 하였다.
동인(銅印)
지방 관원이 차는 동호부(銅虎符)를 말한다.
동인(同人)
뜻을 같이하는 벗을 말한다.
동인(同仁)
피차(彼此)의 차별없이 평등하게 인애(仁愛)를 베푼다는 뜻이다. 『한창려집(韓昌黎集)』 권11 「원인(原人)」에 “성인(聖人)은 온 천하를 한결같이 보아 인애를 같이 베푼다[是故聖人一視而同仁].” 하였다.
동인괘(同人卦)
뜻이 맞는 사람들의 화합을 상징한다.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로 중국 전한 때의 대학자로 한때는 학문에 열중하여 3년 동안이나 자기집 밭을 들여다보지 않기까지 하였다고 전해진다.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
동자하유(董子下帷)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에, “下帷講誦 弟子傳以久次相授業 或莫見其面”이라고 보인다.
동작대(銅雀臺)
악부가사(樂府歌詞)의 이른다. 이 동작대 가사의 내용은 위 무제(魏武帝 삼국(三國)시대의 조조(曹操)가 죽을 무렵에 그의 기첩(妓妾)들을 연연(戀戀)한 일과 그의 기첩들이 무제가 죽은 뒤에 쓸쓸히 무제의 은총을 추모하는 등의 일을 서술하였다.
동장(東墻)
송(宋) 나라 조사행(趙師睪)의 호(號). 그 당시에 정권을 잡은 한탁주(韓侂冑)가 애첩(愛妾) 14명을 두었는데, 어떤 사람이 북주관(北珠冠) 4개를 선사하였다. 탁주는 4명의 애첩에게만 나누어주었으므로 나머지 10명이 모두 욕심을 냈으나 주지를 못했다. 사행은 그 소문을 듣고 돈 10만 꾸러미를 들여 북주(北珠)를 사서 관(冠) 10개를 만들어 바치고, 자기의 첩을 시켜 벼슬을 구하도록 하여 공부 시랑(工部侍郞)에 승진되었다. 『송사(宋史)』 卷二百四十七
동장(銅章)
지방 수령이 차는 구리로 된 관인(官印)을 말한다. 동부(銅符)라고도 한다.
동장묵수(銅章墨綬)
지방관이 차는 관인(官印)과 인끈으로, 외직(外職)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2천 석(石) 이하의 관리가 몸에 차던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로, 보통 현령(縣令)을 뜻하는 말이다.
동적(銅狄)
동인(銅人)이라고도 하고 금적(金狄)이라고도 하는데, 진시황(秦始皇)이 만들어 함양(咸陽; 장안)에 세워 두었던 것이다. 후한(後漢) 때 도사 계자훈(薊子訓)이란 사람이 장안의 동쪽 패성(覇城)에서 어떤 노인 한 사람과 동인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나누기를 “내가 때마침 이것을 주조한 일을 보았는데 벌써 5백이 다 되어 간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로, 장수를 누린다는 뜻으로 인용된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二下 「계자훈전(薊子訓傳)」
동전미긍부(董傳未肯附)
양웅(揚雄)의 당시의 세력 가진 정부(丁傅) 동현(董賢)에게 붙지 않고 『태현경(太玄經)』를 짓다가 뒤에 왕망(王莽)에 붙어서 「미신부(美新賦)」를 지었다.
동정(動靜)
고려 시대에 이부(吏部)가 해마다 백사(百司)의 서리(胥吏)를 가려서 유임시키거나 이동하는 것.
동정(東征)
고려와 원(元)의 연합군으로 일본을 쳤는데, 제1차 동정은 원종(元宗) 15년(1274) 10월, 제2차가 충렬왕(忠烈王) 7년(1281) 5월이었다.
동정(銅鉦)
구리로 된 종 모양의 북으로 상고 때 전쟁에서 군대의 진격을 중지시키는 신호로 치던 것이다.
동정(洞庭)
남방에 있는 수택(水澤) 이른다. 지금의 동정호(洞庭湖).
동정(彤庭)
대궐의 뜰을 말한다. 천자의 궁정(宮庭)은 붉은 칠(漆)로 바르기 때문이다.
동정(東井)
동쪽에 있는 정수(井宿)로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이다.
동정(彤廷)
붉은색을 칠한 한(漢) 나라 대궐의 뜰이다.
동정동감적(動靜洞感寂)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上에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느낌을 받으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한다[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한 데서 온 말인데, 곧 마음의 영묘(靈妙)함을 말한 것이다.
동정서벌(東征西伐)
전쟁을 하여 여러 나라를 이리 저리로 정벌한다.
동정심존육이곤(動靜心存六二坤)
속마음은 곧고 바르게 하면서 외부에 드러내는 행동은 유순(柔順)하게 한다는 말이다. 곤괘(坤卦) 육이효(六二爻)는 지도(地道)를 상징하는 곤괘의 주체가 되는데, 그 효사(爻辭)에 “정방형의 땅처럼 광대한지라,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直方大 不習 無不利].”라고 하였다.
동정지부(彤庭持斧)
대궐 뜰에서 도끼를 손에 쥔다는 것은 곧 죽기를 각오하고 임금을 극간(極諫)하는 일이다.
동정춘색(洞庭春色)
동정(洞庭)에서 나는 귤(橘)이 가장 유명한데 귤의 빛깔을 비유한 것이다.
동정향(洞庭香)
동정산(洞庭山)에서 생산되는 감귤을 말한다. 동정산의 감귤은 특히 껍질이 얇고 맛이 좋다고 한다. 동정호 근처에서 나는 것이 제일 향기롭다는데,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 한다.
동정호위근(動靜互爲根)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設)」에, “양(陽)은 동(動)하고 음(陰)은 정(靜)한데 동이 극도에 가면 정이 되고 정이 극도에 가면 동이 되어 서로 뿌리가 된다[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하였다.
동제(東帝)
봄을 맡은 신인 동방청제(東方靑帝)를 가리킨다.
동제란도(銅鞮攔道)
남조(南朝)때 양양(襄陽)의 동요(童謠) 가운데 “양양백동제(襄陽白銅鞮)”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이 즉위한 뒤에 이를 고쳐서 백동제(白銅鞮)라는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이백(李白)의 시에 “양양의 어린것들 일제히 손뼉치며, 거리 막고 다투어 백동제 노래 부르누나[襄陽小兒齊拍手 攔街爭唱白銅鞮].”라는 구절이 있다. 『이태백집(李太白集)』 卷6 「양양가(襄陽歌)」 / 인용: 襄陽曲(이달)
동제속환천(東齊俗還遷)
한(漢) 나라 때의 어진 수령인 공수(龔遂)가 제(齊) 지역에 가 보니, 사람들이 사치를 좋아하고 농사에 힘쓰지 않았다. 이에 공수가 검약을 실천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상(農桑)에 힘쓰게 하니 백성들의 풍속이 바뀌어졌다. 『한서(漢書)』 卷89 「순리전(循吏傳)」 龔遂
동조(東朝)
한(漢) 나라 미앙궁(未央宮) 동쪽에 있던 장락궁(長樂宮)의 별칭으로, 늘 태후가 이곳에 거하였으므로 황태후(皇太后)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동조(同調)
취향이 서로 같은 사람을 말한다.
동조간서도(東棗間西桃)
제삿상을 말하는 것인데, 원래 복숭아는 제사에 사용하지 않으나 신선들이 먹는 과일을 들었기 때문에 쓴 것이다. 한(漢) 나라 때 방사(方士)였던 이소군(李少君)은 “일찍이 해상(海上)에 유람하다가 안기생(安期生)이 오이만한 큰 대추를 먹는 것을 보았다.”『한서(漢書)』 卷二十五 「교사지(郊祀志)」 하였는데, 안기생은 옛 신선의 이름이며, 서왕모(西王母)라는 천도(天桃)가 있었는데 이 복숭아를 먹으면 천 년을 산다 한다. 한(漢)의 동방삭(東方朔)은 이 복숭아를 3개 훔쳐 먹어 3천 살을 살았다 한다. 『한서(漢書)』 卷六十五 「동방삭전(東方朔傳)」
동족방뇨(凍足放尿)
언 발에 오줌누기.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임시변통.
동주(銅柱)
구리로 만든 기둥. 국경을 표할 때 쓰는 것으로, 중국의 남쪽 변방 지방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마애전(馬援傳)」에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이르러 동주(銅柱)를 세워, 한(漢) 나라의 경계를 만들었다.”라 하였다.
동주(東周)
동방의 주 나라이다. 인으로써 나라를 잘 다스려 매우 이상적인 나라인 옛 주 나라처럼 만들어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만일 능히 나를 써주는 자가 있다면 나는 주도(周道)를 동방에 다시 일으키겠다[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하였다.
동주마형잉도지(銅柱磨瑩仍塗脂)
은(殷) 나라 주왕(紂王)이 구리 기둥에 기름을 칠하고 그 밑에 탄(炭) 불을 깔아 놓은 다음 죄인을 구리 기둥에 매달려 있게 하였는데, 죄인이 탄불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웃지 않던 왕비 달기(妲己)가 비로소 웃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열녀전(列女傳)』 卷7 「은주달기(殷紂妲己)」
동주상구(同舟相救)
사람은 알건 모르건 친하건 미워하건 상관없이 위급한 경우를 함께 만나면 서로 도와주게 된다는 의미이다.
동주의(東周意)
동쪽 나라를 주(周) 나라 같은 이상국가로 만들어보겠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동주장군(銅柱將軍)
마원(馬援)이 동주(銅柱)를 세웠다.
동주지지(東周之志)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만일 나를 써 주는 자가 있다면 내가 동주(東周)를 만들겠다[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하였는데, 주(周)는 서(西)에 있으므로 동방에서 자기를 써 주는 이가 있다면 동주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동주표(銅柱標)
후한 때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가서 구리로 만든 기둥을 세워 한(漢) 나라의 끝 경계로 삼았던 것을 말한다.
동중서(董仲舒)
한(漢)나라 광천(廣川) 사람으로 한대(漢代)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젊었을 때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를 공부하여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으며, 3년 동안 밖에 나오지 않고 책만 읽어 그의 제자들 중에는 스승의 얼굴도 보지 못한 자가 있었다 한다. 평생 동안 학문을 강론하고 책을 저술하였는데 유학을 떠받들고 잡가(雜家)를 배격함으로써 후세에 유학을 정통으로 삼는 국면을 열어놓았다. 유향이 그를 일러 왕좌지재(王佐之才)가 있다고 하였으며, 당시에 순유(醇儒)라 하여 모든 학사(學士)들이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사기(史記)』 「동중서전(董仲舒傳)」ㆍ『한서(漢書)』
동중천(洞中天)
신선이 산다고 하는 명산(名山) 승경(勝景)을 말한다.
동지(彤墀)
전정(殿庭)을 이른다.
동지력(冬至曆)
옛날에는 동짓날 관상감(觀象監)에서 달력을 만들어 모든 벼슬아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을 동지력이라 불렀다.
동지발(銅指鈸)
동발(銅鈸)과 같은 말로, 동(銅)으로 만든 악기(樂器)이다.
동진두릉시(東津杜陵詩)
두릉(杜陵)은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그의 시에 “면주 땅 부강(涪江) 동쪽 나루터[綿州江水之東津]”로 시작되는 ‘관타어가(觀打魚歌)’와 “고기잡이 구경하러 동진에 다시 왔네[東津觀魚已再來].”라는 구절의 ‘우관타어(又觀打魚)’가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11
동차궤(同車軌)
모든 제도를 통일하여 왕권을 이룩한다는 말이다. 『중용(中庸)』 이십팔장(二十八章)에 “이제 온 천하가 수레는 바퀴의 제도가 같고, 글은 문자가 같고, 행하는 데에는 도가 같다[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하였다.
동창(董昌)
?~896. 당(唐)나라 말기 무장(武將)으로 항주(杭州) 임안(臨安) 사람이다. 희종(僖宗) 건부(乾符) 2년에 절서(浙西)의 비장(裨將) 왕영(王郢)이 반란을 일으키자, 백성들을 모아 의병(鄕兵)을 일으켜 삭감진(石鑑鎭)의 진장(鎭將)이 되어 왕영(王郢)을 토벌하였다. 이후 전류(錢鏐)와 함께 황소(黃巢)의 반란군에 대항하여 항주(杭州)를 점령하고 항주자사(杭州刺史)가 되었으며, 越州觀察使 劉漢宏을 토벌하여 越州를 병탄하고 杭州刺史의 직위를 錢鏐에게 넘겨주었다. 董昌은 이후 唐나라 朝廷에 조공하여 隴西郡王에 봉해졌으나, 昭宗 乾寧 2년(895) 자신을 越王으로 봉해줄 것을 조정에 청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大越羅平國이라 칭하고 稱帝하였다. 그러나 錢鏐에게 토벌되고 자살하였다. 『오대사(五代史)』 「오월세가(吳越世家)」 / 인용: 表忠觀碑(소식)
동창(東窓)
송(宋) 나라의 간신(奸臣) 진회(秦檜)의 별칭이다. 그가 충신인 악비(岳飛)를 죽이려고 할 때 그의 처 왕씨(王氏)와 동창(東窓) 아래에서 모의하였는데, 나중에 죽어 지옥에 떨어져서 온갖 고통을 맛보는 가운데, 자기 부인에게 “동창의 일이 발각되고 말았다[東窓事發矣]고 전해 달라.”고 도사에게 말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서호유람지여(西湖游覽志餘)』 「행반황(倖盤荒)」
동창계(東窓計)
충신을 해치는 음모를 말하는데, 송(宋) 나라 때 간신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죽이기 위해 동창(東窓) 아래서 음모를 꾸몄던 일에서 유래한다.
동척(銅尺)
건초(建初) 동척의 원품(元品)에 “建初六年八月十五日造”라고 전예(篆隸)간의 문자로 명각(銘刻)된 것인데 옹성원(翁星原)이 추사에게 진척(眞尺)의 탁본(拓本)과 목척(木尺)의 탁본 두 종을 기증하였다.
동천(洞天)
도가(道家)의 용어로, 골짜기 안에 따로 있는 별천지(別天地)라는 뜻으로 신선이 사는 세계를 가리킨다.
동천(僮千)
만석군의 집에 동복(僮僕)이 천여 명이나 됨을 이른 말이다.
동천(東遷)
①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된 뒤에 그의 아들인 평왕(平王)이 동쪽 낙읍으로 왕도(王都)를 옮긴 일을 가리킨다.
② 동쪽으로 추방되다.
동천남도공잉주(東遷南渡孔仍朱)
공자(孔子)는 서주(西周)가 약해져서 동천한 뒤에 태어났고, 주자는 북송(北宋)이 약해지자 남도(南渡)할 때의 사람이다.
동천복지(洞天福地)
신선이 사는 곳에 있다는 36동천(洞天)과 72복지(福地)로, 천하의 절승(絶勝)을 의미한다.
동천왕부(洞天王府)
천하의 승경(勝境).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 십육동천(十六洞天)이니, 또는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이니 하는 따위다.
동청(冬靑)
항시 푸르른 사철나무의 이름이다.
동춘(動春)
봄에 움직이다. 꽃망울이 움틈.
동취(銅臭)
구리 냄새, 즉 동전 냄새라는 말로, 재산을 써서 관직을 얻는 사람이나 재물을 탐하는 사람을 일컫는 고사성어다.
동치(童稚)
어린 자식.
동타(銅駝)
나라가 망할 것이란 뜻이다. 진(晉) 나라 색정(索靖)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낙양궁문(洛陽宮門)에 서 있는 구리쇠 낙타(銅駝)를 가리키며, “장차 네가 가시덤불 속에 누워 있는 모양을 보리로다.” 하였다.
동타예형극(銅駝翳荊棘)
진(晉) 나라 색정(索靖)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미리 알고는, 낙양(洛陽)의 궁문 앞에 서 있는 동타(銅駝)를 가리키며 “너도 형극(荊棘) 속에 묻히고 말겠다.”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 「색정전(索靖傳)」
동타형극(銅駝荊棘)
진(晉) 나라 상서랑(尙書郞) 색정(索靖)이 장차 서진(西晉)이 멸망할 줄을 예감하고는, 낙양(洛陽) 궁문(宮門) 앞에 서 있는 구리 낙타(銅駝)를 가리키며 “앞으로는 네가 가시나무 덤불 사이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겠구나[會見汝在荊棘中耳]”라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 卷60 「색정전(索靖傳)」
동택(董澤)
중국 산서성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동파(東坡)
송(宋) 나라 문장가 소식(蘇軾)의 호이다. 그는 항주(杭州; 송대의 임안(臨安))의 지부(知府)로 좌천되었을 때 그곳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많은 유적(遺蹟)을 남겼다.
동파계(東坡界)
소식(蘇軾)이 정혜흠장로(定慧欽長老)에게 하답한 시에, “유마힐(肹摩詰)에게 그만 기대고 한번 이 동파의 세계를 찾아오게나[請判維摩憑 一到東坡界].” 한 것이 있다.
동파역(東坡驛)
경기도 문산(汶山)이다.
동파옥상동(東坡屋上銅)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이 황주(黃州)에서 귀양살이하면서 그 고을 동쪽 언덕에다 집을 짓고 살면서 자기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했는데, 당시 큰 부자를 상징하는 구리기와(銅瓦)를 얹을 턱이 없었기에 한 말이다.
동파점(東坡店)
경기도(京畿道) 파주(坡州)에 있는 역 이름이다.
동파회록좌무전(東坡懷祿坐無田)
동파는 소식(蘇軾)의 호인데, 소식의 「차운주개조장관견기시(次韻周開祖長官見寄詩)」에 “점차 전사를 꾀하면서도 녹봉에 연연하고, 파도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또 물가를 곁하였네[漸謀田舍猶祿 未脫風濤且傍洲].”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동파집(蘇東坡集)』 卷十九
동판(銅板)
구리로 만든 판. 운판(雲板)이라고도 한다. 역시 이를 두드려 소리를 낸다.
동편(彤編)
궁중 생활의 기록을 맡은 여관(女官), 또는 그 생활의 기록을 말한다.
동평선락(東平善樂)
동평은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의 여덟째 아들인 동평헌왕(東平憲王) 유창(劉蒼)을 말하는데, 누가 그에게 묻기를 “집에서는 무슨 일이 가장 즐거운가?”하니, 대답하기를 “선을 하기가 가장 즐겁습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동평완(東平阮)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일찍이 동평상(東平相)이 되었던 완적(阮籍)을 가리킨다. 『삼국지(三國志)』 卷21
동포(東浦)
맹사성(孟思誠)의 호이고, 온양(溫陽)은 맹사성이 태어난 곳이다.
동포물아(同胞物我)
우주에 있는 만물은 똑같이 천지(天地)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으니 한 동포라는 뜻이다.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백성은 나의 동포이며 물건은 나의 친구이다[民吾同胞 物吾與也].” 하였다.
동포전(洞布錢)
대원군(大院君)이 섭정할 때 장정 한 사람에게 1년에 2민(緡)씩 받아들이던 세금.
동표(銅標)
오랑캐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쪽 변방이라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멀리 교지(交趾)를 정벌한 뒤, 두 개의 구리 기둥을 세워 한 나라의 영토임을 알린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마원열전(馬援列傳)」
동풍(東風)
봄바람.
동풍기(東風起)
도리(桃李)가 다 지고 나면 다른 꽃들이 다시 피기 시작할 것이라는 말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북쪽 동산에 동풍이 건듯 불어오니, 별의별 꽃들이 차례차례 피는구나[北園東風起 雜花次第開].”라는 구절이 있고, 소식(蘇軾)의 시에 “수줍은 꽃의 자태 아쉬워하지 마소, 뒷날 동풍이 건듯 불어오리니[幽姿不可惜 後日東風起].”라는 구절이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 卷9 北園ㆍ『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20 雨中看牧丹》
동필(董筆)
동호필(董狐筆)의 약칭으로 사실을 숨김없이 바르게 쓴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 사관(史官) 동호의 사필(史筆)을 말한다.
동합영군현(東閤迎羣賢)
동합(東閤)은 동쪽으로 난 소문(小門)을 가리키는데, 전한(前漢) 때에 승상공손홍(公孫弘)이 동합을 열어놓고 어진 선비들을 맞아들인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卷五十八 「공손홍전(公孫弘傳)」
동해견래조호발(東海遣來朝虎發)
회계(會稽) 지방에서 정월 14일이 되면 무당을 불러 백호(白虎)의 신(神)에게 제를 지낸 뒤 홍록색의 실로 백호의 화상을 매어 문 위에 부착시켜 놓고 “백호를 떼어 보낸다.” 하는 의식에서 인용된 말이다.
동해노련비(東海魯連悲)
강포(强暴)한 적에게 짓밟히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국사(國士)의 처절한 마음을 말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제 나라 노중련(魯仲連)이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蹈東海而死] 포악한 진(秦) 나라가 천하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것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卷八十三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동해비(東海碑)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가리킨다. 미수 허목이 이 비에 글씨를 썼다.
동해삼세(東海三世)
동해(東海)는 선경(仙境)인 봉래도(蓬萊島)가 있다는 동쪽 바다를 가리키고, 삼세는 선녀(仙女)인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이르기를, “동해가 세 번 상전(桑田)으로 변한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동해상전(東海桑田)
선녀(仙女)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말하기를, “동해(東海)가 물이 말라서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세 번이나 보았다.” 하였다.
동해제련(東海齊連)
전국시대(戰國時代) 장평전(長平戰) 이후 진(秦)이 조(趙) 나라 서울을 포위하자, 위(魏) 나라 임금은 신원연(新垣衍)을 조 나라에 보내어 진왕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조왕을 설득하라고 시켰는데, 마침 조 나라에 와 있던 제(齊) 나라 사람 노중련(魯仲連)이 신원연을 만나 그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이때 노중련은, “만일 진 나라가 황제가 된다면 우리 선비와 인민들을 종으로 부릴 것이니, 나는 차라리 동해 바다에 빠져 죽겠다.” 하였다 한다.
동해직구(東海直鉤)
동해(東海)는 동해 사람인 강태공(姜太公)을 말하고, 직구(直鉤)는 고기가 걸리지 않도록 낚시바늘을 곧게 한 것을 이르는데, 즉 강태공이 주(周) 나라에 등용되기 전에 위수(渭水)에서 항상 곧은 낚시바늘로 낚시질을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동해효부(東海孝婦)
한나라 때 동해에 주청周靑이라는 효부가 있었는데, 그녀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고생만 시키는 것을 걱정하여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이에 시누이가 주청이 시어머니를 목매달아 죽였다고 모함하였고, 관부에서는 곧 주청을 체포하였다. 가혹한 형벌 때문에 주청은 자신이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는데, 형이 집행되기 전 주청은 만약 자신이 정말로 죄가 있다면 목의 피가 아래로 흐를 것이고, 죄가 없다면 목의 피가 거꾸로 솟구쳐 흐를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형이 집행된 후, 과연 목의 피는 거꾸로 흘러 사형장 깃대 끝으로 솟구쳤다. 주청이 죽은 후, 그 지방에는 삼 년 동안이나 큰 가뭄이 들었다.
동향(桐鄕)
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지명인데, 수령이 어진 정사를 베푼 고을을 말한다. 한(漢) 나라의 대사농(大司農) 주읍(朱邑)이 젊은 시절 동향(桐鄕)의 색부(嗇夫)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정사를 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 존경하였다. 그 뒤에 주읍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옛날에 동향의 관리가 되었을 적에 그 백성들이 나를 사랑하였었다. 그러니 반드시 나를 동향에 장사 지내라.” 하였다. 주읍이 죽자 그 아들이 동향에다가 장사 지내었는데, 동향의 백성들이 과연 사당을 세워서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 『한서(漢書)』 「순리전(循吏傳)」 朱邑傳
동향유애(桐鄕遺愛)
지방관이 정사를 잘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음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 나라 때 주읍(朱邑)이 동향색부(桐鄕嗇夫)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 그곳 백성들이 그의 묘 옆에 사당을 짓고서 세시(歲時)에 향사를 올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순리전(循吏傳)」
동현문동취(東縣聞銅臭)
촉 땅 사람들이 철전(鐵錢)을 사용하다가 무산을 지나면 동전(銅錢)을 쓰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이에 연유하여 무산의 강 위에 있는 두 돌이 동전퇴(銅錢堆)와 철전퇴(鐵錢堆)로 명명되었다 한다.
동호(銅壺)
누수(漏水)를 만들 때에 밑에 물 담는 것을 호(壺)라 하는데, 구리쇠로 만들었다.
동호(東湖)
독서당(讀書堂)의 별칭이다.
동호(童號)
자는 정서(廷瑞). 명(明) 나라 홍치(弘治) 연간에 공부 시랑(工部侍郞)을 지냈고, 저서에는 『고매화시집(古梅花詩集)』가 있다.
동호(董狐)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의 사관(史官)으로서 어떤 위세(威勢)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대로 직필(直筆)하였기 때문에 아주 훌륭한 사관으로 이름 높았다. 영공(靈公)이 조순(趙盾)을 죽이려고 하니, 조순은 외지로 도망갔는데 이윽고 조천(趙穿)이 영공을 죽였다. 조순은 환국하여 조천을 토죄(討罪)하지 아니하므로 동호는 사책에 쓰기를, “조순이 그 임금을 죽였다.” 하였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동호는 고대의 양사(良史)이다.” 하였다. 『좌전(左傳)』 宣公 二年條
동호(東胡)
흉노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 동북방의 호족(胡族)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동호부(銅虎符)
한대(漢代)에 구리로 범 모양처럼 만든 부절(符節). 지방관이 차던 신부(信符)로, 오른쪽은 경사(京師)에 두고 왼쪽은 군국(郡國)에 주어 군사를 출동하는 데에 썼다. 『한서(漢書)』 제4권 문제기(文帝紀)에, “처음에 군수(郡守)에게 동호부와 죽사부(竹使符)를 주었다.” 하였다.
동호여계(董狐厲階)
동호는 여악(厲惡)의 계제가 되었다.
동호지필(董狐之筆)
중국 진(晉)나라의 사관(史官)인 동호의 직필(直筆). 권세나 외압에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대로 적음
동호직(董狐直)
동호(董狐)는 춘추(春秋) 시대 진(晉) 나라 사관(史官). 영공(靈公)이 조돈(趙盾)을 죽이려 하자, 조돈은 망명했었다. 뒤에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하자, 조돈은 돌아와 조천을 토벌하지 않았다. 동호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했다.’ 하여, 직접 시해하지는 않았지만 동조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이렇게 쓴 것인데, 공자(孔子)는 “동호는 옛날의 양사(良史)다.”고 칭찬했으므로 후세에 직필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좌전(左傳)』 宣公二年
동호직필(董狐直筆)
동호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의 태사(太史)인데, 조순(趙盾)이 그 임금 영공(靈公)을 시해했다고 곧장 쓴 고사를 말한다. 실제로 임금을 시해한 자는 조천(趙穿)이었는데, 이때 조순이 정경(正卿)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를 토벌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그에게 돌린 것으로서 기록을 하는 자가 거리낌 없이 바른 대로 쓰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宣公 二年
동홍(冬烘)
겨울에 불 땐 듯이 뜨거운 것. 겨울에는 머리가 식어서 차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따뜻하다는 말로, 당(唐) 나라 정훈(鄭薰)이 시험관이 되어, 안표(顔標)를 안진경(顔眞卿)의 후손인 줄로 잘못 알고 장원을 매겼다는 고사이다. 전(轉)하여 훈장(訓長)을 기롱하는 말로 쓰인다.
동화(東華)
① 중국의 중앙 관서가 동화문(東華門), 즉 도성의 동문(東門) 안에 있었던 데에서 조정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② 송나라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처음 임명되면 동화문(東華門)으로부터 들어가서 좌승천문(左承天門)에 이르러서 말(馬)에서 내렸다.
동화문(東華門)
① 궁성(宮城) 동문(東門)의 이름인데, 학사(學士)들이 이 문으로 출입하였다고 한다.
② 명(明) 나라 때 궁성의 동쪽에 있던 문인데, 중앙 관서가 이 문 안에 모여 있었다.
동화잠(東華簪)
중앙 관서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을 말한다. 동화는 궁성의 동쪽 문 이름인데, 이곳에 중앙 관서들이 모여 있다.
동화잠신(東華簪紳)
조정의 관직을 말한다. 중국의 중앙 관서가 모두 궁성의 동화문(東華門) 안에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황(東皇)
봄을 주관하는 신(神)의 이름이다. 봄은 동방(東方)과 청색(靑色)으로 대표되기 때문에 동제(東帝), 동군(東君), 청황(靑皇), 청제(靑帝) 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상서위(尙書緯)에 “봄은 동황이 되고 또 청제(靑帝)가 된다.” 하였다.
동황태을(東皇太乙)
굴원(屈原)의 「구가(九歌)」에 동황태일(東皇太一)이 나오는데, 태일은 천신(天神)의 이름으로, 동제(東帝)에 배비(配比)하기 때문에 동황태일이라 한다 하였다. 태을은 태일과 같다.
동황태일(東皇太一)
봄을 주관하는 신(神)의 이름이다.
동회(東淮)
호가 동회거사(東淮居士)인 신익성(申翊聖)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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