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봉
봉(蓬)
풀은 뿌리에서 떨어져 나와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에 비유한다.
봉가(鳳駕)
왕의 수레. 봉련(鳳輦).
봉가(鳳歌)
초광(楚狂) 접여(接輿)가 공자(孔子)의 문을 지나가며 부른 노래. “봉이여 봉이여, 어찌 이리 덕이 쇠하노.(鳳兮鳳兮 何韓之衰也)”하였다. 『사기(史記)』 卷四十七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미자(微子)」
봉각(鳳閣)
중서성(中書省)을 봉각(鳳閣)이라 한다.
봉간(封干)
비간(比干)은 은 나라의 포악한 임금 주(紂)에게 간(諫)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인데, 주 무왕(武王)이 주를 쳐서 멸하자 비간의 무덤을 봉해 주었다.
봉강(封疆)
① 경계
② 국경을 지키는 장군
③ 국경 근교의 땅
④ 경계 안의 땅 / 인용: 李忠武公龜船歌(황현)
봉개(鳳蓋)
천개(天蓋)가 달린 수레로 고관(高官)을 가리킨다.
봉거(鋒車)
임금이 신하를 급히 부를 때에 내리는 경쾌한 수레를 말한다.
봉격(捧檄)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벼슬하는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의 효자 모의(毛義)가 집안이 빈한하여 모친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다가 현령(縣令) 임명장을 받들고서(奉檄) 그지없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모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관직을 그만두고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고사가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卷39 「유평등전(劉平等傳)」 序
봉격희동안(奉檄喜動顔)
벼슬길에 나아가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한다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모의(毛義)가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긴다고 소문이 나자, 장봉(張奉)이 그의 이름을 흠모하여 찾아갔다. 얼마 동안 함께 앉아 있을 때 모의를 현령으로 삼는다는 격문이 오자, 모의의 얼굴에 좋아하는 기색이 가득하였다. 이에 장봉은 이를 천하게 여기고서 그곳을 떠났다. 그 뒤에 모의는 어머니가 죽자 벼슬을 내던지고 상복을 입었으며, 여러 차례 불러도 나가지 않으니, 장봉이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을 탄식하였다. 『후한서(後漢書)』 卷69 「보하열전(竇何列傳)」
봉계(鳳溪)
길재(吉再)가 살던 마을의 이름이다.
봉고파직(封庫罷職)
창고를 봉하고 관직을 파함(그만두게 함). 암행어사(暗行御史)나 감사(監司)가 바르지 못한 관리(수령)를 파면시키고 관가의 창고를 잠그던 일
봉구봉(鳳求鳳)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촉(蜀)나라 부호(富豪) 탁왕손(卓王孫)의 집 연회(宴會)에 초대받았다. 그 때에 탁왕손의 딸 문군(文君)이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음율(音律)을 좋아한다는 것을 사마상여가 알고, 거문고로 숫봉이 암컷을 구하는 곡조(鳳求鳳曲)를 탔더니 과연 문군이 밤에 상여에게 달려 와서 서로 부부(夫婦)가 되었다고 한다.
봉구약수관(蓬邱弱水寬)
모두 멀다는 뜻인데, 봉래는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고 약수는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江)으로 길이가 삼천 리나 되고 물의 부력(浮力)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
봉구황(鳳求凰)
금곡(琴曲)의 이른다. 봉황(鳳凰)은 화목한 부부의 상징으로 많이 쓰이다.
봉궐(鳳闕)
한(漢) 나라 때 높이가 20여 장(丈)이나 되는 궁궐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궁궐 또는 조정을 가리킨다.
봉기불탁속(鳳饑不啄粟)
봉은 굶주려도 좁쌀을 쪼지 않음. 굳은 지조
봉노(烽櫓)
봉화대(烽火臺)를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민가 위에 씩씩하게 서 있는 기정이요, 해자(垓字)에 어린 봉로 그림자[旗亭壯邑屋 烽櫓蟠城隍]”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23 入衡州
봉단(鳳團)
좋은 차(茶)를 가루로 반죽하여 용이나 봉처럼 뭉쳐 놓은 것이다.
봉당(封堂)
묘소를 말한다.
봉대곡(鳳臺曲)
악부(樂府) 곡사(曲辭)의 하나인데, 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당시에 퉁소를 잘 불던 소사(簫史)라는 사람과 서로 좋아하므로, 마침내 그에게로 시집을 보냈는데, 나중에는 농옥도 퉁소를 배워 봉황(鳳凰)의 울음소리를 잘 냄으로써 봉황이 그의 집에 모여들자, 마침내 봉대를 짓고 부부(夫婦)가 그곳에서 살다가 어느 날 부부가 함께 봉황을 따라 신선(神仙)이 되어 갔다는 내용을 노래한 것이다.
봉덕(鳳德)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 나라의 은자(隱者) 접여(接輿)가 공자(孔子)의 문앞을 지나면서 노래하기를 “봉이여 봉이여, 어찌 그리도 덕이 쇠했는고[鳳兮鳳兮 何德之衰].”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그는 공자를 봉에 비유하여 태평 시대도 아닌데 숨지 않고 세상에 나온 것을 기롱한 것이었다. 『사기(史記)』 卷四十七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미자(微子)」
봉덕지쇠(鳳德之衰)
초(楚) 나라의 은자(隱者) 접여(接輿)가 공자(孔子)의 수레 앞을 지나면서 노래하기를 “봉새여, 봉새여, 어찌 그리 덕이 쇠한고[鳳兮鳳兮 何德之衰].”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봉새란 세상이 도가 있을 때에만 나타나고 무도한 때에는 숨어버리는 것이므로, 접여가 이 봉새를 공자에 비유하여, 공자가 그 무도한 세상에 은거하지 않는 것을 기롱한 것이다. 『사기(史記)』 卷四十七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미자(微子)」
봉도(奉道)
‘도교를 믿다’는 말이다.
봉도(蓬島)
선인(仙人)이 살고 있는 해도(海島).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동해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봉도연하(蓬島煙霞)
봉래산(蓬萊山) 즉 금강산을 끼고 있는 간성(杆城)의 선경(仙境)을 비유한 말이다.
봉두난발(蓬頭亂髮)
봉두는 본래 쑥대머리를 가리키는 말로 웃자란 쑥의 줄기같이 긴 머리털이 마구 흐트러진 모양을 가리킨다.
봉두이면(蓬頭黧面)
흐트러진 머리와 때 묻은 얼굴로, 여기서는 초라한 모습을 말한다.
봉랍(鳳蠟)
봉황새의 모양을 그려 넣은 납촉(蠟燭)을 말한다.
봉래(蓬萊)
신선이 산다는 해도(海島)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봉래각(蓬萊閣)
중국 산동성(山東省) 봉래현(蓬萊縣) 단애산(丹崖山) 위에 있는 누각 이름으로, 예로부터 문인 학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봉래궁(蓬萊宮)
당 나라의 궁전 이름으로, 장안(長安)의 동쪽 봉래지(蓬萊池) 옆에 있었다. 원래 이름은 대명궁(大明宮)이었는데 고종(高宗) 때 봉래궁으로 바꿨다. 전하여 왕궁(王宮)의 뜻으로 쓰인다.
봉래도(蓬萊島)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서 선인이 산다는 곳이다.
봉래산(蓬萊山)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있고 새와 짐승이 모두 희며,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는 영산(靈山)이다.
봉래오색(蓬萊五色)
봉래궁(蓬萊宮)은 당(唐)나라 대명궁(大明宮)인데, 여기서는 우리 궁궐에 비유하여 쓴 것. “천자(天子)의 정궁(正宮)이어서 그 뒤에는 항상 오색의 서운(瑞雲)이 떠 있다.” 하였다.
봉래원교(蓬萊圓嶠)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들이 산다고 하는 산이다. 발해(渤海)의 동쪽에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그 안에 대여(岱輿), 원교(圓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의 다섯 선산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바다에 떠 있으므로 항상 조수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므로 상제(上帝)가 사방으로 떠내려갈까 걱정스러워서 열다섯 마리의 자라로 하여금 머리를 들어 떠받치고 있게 하였는데, 3교대로 하여 6만 년마다 한 번 교대하게 하였다. 이에 다섯 선산이 비로소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용백국(龍伯國)에 거인이 있어서 한 번 낚시질을 하여 여섯 마리의 자라를 잡아서 이를 짊어지고 그 나라로 돌아가자, 대여와 원교 두 산이 북극으로 흘러가서 큰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봉래전각과금오(蓬萊殿閣跨金鰲)
금오(金鰲)는 금빛으로 생긴 큰 자라. 신선(神仙)이 사는 해중(海中)에서 사는데, 이 자라가 신선이 거처하는 봉래전(蓬萊殿) 밑을 머리로 이고 있다는 고사이다.
봉래천(蓬萊淺)
한(漢) 나라 때의 신선(神仙) 왕원(王遠)이 마고(麻姑)를 초청하자, 마고가 봉래산(蓬萊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그 뒤에 마고가 와서는 말하기를, “그대를 만난 이래로 이미 동해가 세 번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네. 이번에 봉래산에 가보니 지난번에 만났을 적보다 바닷물이 반으로 줄어들었더군. 그러니 어찌 다시 육지가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선전(神仙傳)」 「마고(麻姑)」
봉래청천(蓬萊淸淺)
벽해(碧海)가 상전(桑田)이 되는 큰 변천이 있으리라는 말이다. 봉래는 동해(東海) 가운데 있는 섬 이름인데, 선녀(仙女)마고(麻姑)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에게 이르기를 “그대를 접대한 이후로 동해가 세 번 상전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는데, 지난번 봉래도(蓬萊島)를 가보니 물이 얕아져서 전에 우리가 서로 만났을 때보다 대략 반쯤 더 얕아졌으니, 아마도 동해가 다시 육지로 바뀔 듯합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봉래풍악(蓬萊楓岳)
금강산의 별칭이다. 여름철엔 봉래, 가을엔 풍악이라 한다.
봉력(鳳曆)
옛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때에, 봉(鳳)새가 천시(天時)를 안다 하여 봉조씨(鳳鳥氏)로써 역정(曆正)을 삼았으므로, 세상에 기년(紀年)을 봉력(鳳曆)이라 한다.
봉련(鳳輦)
임금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봉루(鳳樓)
금중(禁中)에 설치한 아름다운 누각(樓閣)을 가리킨다.
봉류(封留)
한 고조(漢高祖)가 개국공신 장량(張良)을 유후(留侯)에 봉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봉릉(鳳綾)
당 현종(唐玄宗) 때 영왕(寧王)이 기왕(岐王)ㆍ설왕(薛王) 이하를 거느리고 주청(奏請)하여 승여(乘輿) 앞에 붓을 놓고 행재(行在)의 일을 적어 천보(天寶) 10년에 3백 권을 지어 바치니, 현종이 보고 자주(紫) 용봉릉(龍鳳陵)에 책 표제를 쓰게 하여 별각(別閣)에 두게 했다.
봉린노위(封隣魯衛)
노(魯) 나라는 주공(周公)의 봉국(封國)이고 위(衛) 나라는 주공의 동생 강숙(康叔)의 봉국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노 나라와 위 나라의 정사는 마치 형제처럼 비슷하다[魯衛之政 兄弟也].”라는 말이 있다.
봉마(蓬麻)
봉생마중(蓬生麻中)의 준말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
봉마공장(蓬麻共長)
다른 사람의 영향의 받아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대가 삼 속에서 나면 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며, 흰 모래가 검은 흙 속에 있으면 저절로 검어진다.” 하였다.
봉마붕(蓬麻朋)
그와 사귀게 되면 자연히 바르게 되는 친구를 말한다. “쑥이 삼대 밭에 나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아진다[蓬生麻中 不扶而直].”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
봉마토사상전도(蓬麻兎絲相顚倒)
부부(夫婦)의 이별을 말한다. 두보(杜甫)의 신혼별(新婚別) 시에, “새삼 덩굴이 쑥대 삼을 타고 오르니, 이 때문에 덩굴이 길게 뻗지 못하네. 딸을 원정군에게 시집보내려거든, 차라리 길가에 버리는 게 나으리라[兎絲附蓬麻 引蔓故不長 嫁女與征夫 不如棄路傍].” 한 데서 온 말로, 새삼 덩굴은 본디 소나무나 잣나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하찮은 쑥대와 삼을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자랄 수가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7
봉명전(奉明殿)
민간 출신의 제왕(帝王)이 자기 친부모의 묘소를 개장하는 일을 말한다. 봉명전(奉明殿)은 한(漢) 나라 선제(宣帝)의 생부(生父)인 사황손(史皇孫)의 묘소가 봉명현(奉明縣)에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한서(漢書)』 卷63ㆍ『문선(文選)』 卷10 西征賦 注
봉명화(鳳鳴和)
춘추(春秋)시대 때에 진경중(陳敬仲)이 제(齊) 나라에 망명하여 갔는데 의중(懿仲)이 그에게 딸을 주려고 점을 쳤더니 점괘에, “숫봉 암봉이 날아 화합하게 울음운다. 팔대(八代)를 지나면 더할 수 없이 높겠구나.” 하더니 과연 그 뒤에 그 자손이 제(齊) 나라 임금이 되었다.
봉모(鳳毛)
① 봉황의 터럭 하나라는 말로, 부조(父祖)의 유풍(遺風)을 이어받은 걸출한 인물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진(晉) 나라 왕소(王劭)와 남조 제(齊)의 사초종(謝超宗)이 각각 환온(桓溫)과 제 무제(齊武帝)로부터 “봉모(鳳毛)를 확실히 이어받아 가지고 있다.”는 찬사를 받았던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ㆍ『남제서(南齊書)』 卷36 「사초종열전(謝超宗列傳)」
② 자식이 아버지의 훌륭한 풍채를 닮았음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왕소(王邵)가 자기 아버지인 왕도(王導)의 풍채를 닮았는데, 그가 시중(侍中)이 되어 공복(公服)을 입고 들어오자, 환온(桓溫)이 그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원래 봉의 터럭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故自有鳳毛].”고 하며 찬탄을 했던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
봉목시성(蜂目豺聲)
벌과 같은 눈, 승냥이 같은 소리. 흉악(凶惡)한 인상(印象)
봉미(鳳尾)
① 대나무 가지의 별칭이다. 대나무 가지 끝에 한들거리는 여러 개의 잎들이 봉황 꼬리와 비슷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② 파초의 일종. 봉미초(鳳尾蕉). 그 잎이 봉의 꼬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른다. 『철경록(輟耕錄)』
봉미초(鳳尾草)
상록목본(常綠木本)의 식물 이른다. 여름에 꽃이 피는데 단성(單性)이며 화피(花被)도 없다고 한다. 『본초(本草)』 「무루자(無漏子)」
봉방의질(蜂房蟻垤)
벌이나 개미들도 각자 하나씩의 방을 차지하고 있듯, 이 세상의 어떤 존재이든 간에 대소(大小)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고서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봉번이효(奉蘩以孝)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제사를 정성껏 받든다는 것. 『시경(詩經)』 소남(召南) 「채빈(采蘋)」에 “어디서 다북쑥 캐나 저 여울가 못가로세[于以采蘩 于沼于池].”라고 하였다.
봉봉(唪唪)
과실이 주렁주렁한 모양[結實累累貌] / 인용: 梁四龍傳(이기발)
봉봉불불(蓬蓬拂拂)
다 같이 바람이 부는 모양을 말하는데, 즉 북풍(北風)이 쌀쌀하게 불어오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봉봉연(蓬蓬然)
바람이 일어나 거칠 것 없이 불어제치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바람이여, 지금 그대는 북해에서 쌩쌩 일어나 남해로 쌩쌩 들어가고 있다[今子蓬蓬然起於北海 蓬蓬然入於南海].”는 말이 있다.
봉비(葑菲)
『시경(詩經)』 패풍(邶風) 「곡풍(谷風)」의 “무 캐고 순무 캐네. 뿌리가 맛 없다고 잎까지 내버릴까.(采葑采菲 無以下體)”에서 나온 말로, 비루하지만 하나의 좋은 덕(德)을 자기도 가지고 있다는 뜻의 겸칭(謙稱)이다.
봉비불유(葑菲不遺)
무는 본디 뿌리와 잎을 다 먹는데, 뿌리는 혹 좋은 때도 나쁜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잎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전하여 무슨 물건이라도 좋은 점은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시경(詩經)』 패풍(邶風) 「곡풍(谷風)」
봉비하체인소열(葑菲下體人所悅)
순무와 무(葑菲)는 두 가지 다 잎도 뿌리도 먹을 만한 채소인데, 그 뿌리는 때에 따라 맛이 있을 때가 있고 맛이 없을 때도 있다. 따라서 그 채소를 캐는 사람은 꼭 그 뿌리만을 보고 캐서는 안 되듯이 인간 부부 사이도 얼굴이 젊고 예뻤을 때가 있었는가 하면 늙고 병들 때도 있는데, 지금 늙고 병들었다 하여 옛날 젊어 함께 고생하던 시절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패풍(邶風) 「곡풍(谷風)」
봉사(鳳社)
강원도 고성군(高城郡) 오대면(五臺面) 금강산에 있는 건봉사(乾鳳寺)를 가리킨다.
봉사(封事)
누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밀봉하여 천자에게 올리는 서장(書狀).
봉산(蓬山)
① 동래(東萊)의 고호이다.
② 본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이르는데, 전하여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인 봉관(蓬館)의 뜻으로도 쓰인다.
봉산(鳳山)
황해도 봉산. 그 이름에 의하여 명사(明使) 호부낭중(戶部郞中)가 정작 봉이 나타난 산으로 보아 성대(聖代)의 상서를 부(賦)로 노래했다.
봉산관(蓬山館)
호당(湖堂), 즉 독서당(讀書堂)을 가리킨다.
봉산장실(蓬山藏室)
모두 장서실을 가리킨다. 후한 때 장서실인 동관(東觀)을 가리켜 노씨장실(老氏藏室)ㆍ도가봉래산(道家蓬萊山)이라 일컬은 데서 온 말인데, 즉 노씨장실은 옛날 노자(老子)가 장실주하사(藏室柱下史)를 지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도가봉래산은 곧 봉래산의 선부(仙府)에는 유경 비록(幽經祕錄)이 다 쟁여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후한서(後漢書)』 卷二十三
봉상위녀섬(縫裳魏女攕)
『시경(詩經)』 위풍(魏風) 「갈구(葛屨)」에, “가녀린 여자의 손이여, 가히 치마를 지을 만하도다[摻摻女手 可以縫裳].”하였다.
봉생마중(蓬生麻中)
훌륭한 벗을 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이 삼대 속에 나면 붙잡지 않아도 곧다[蓬生麻中 不扶而直]” 하였다.
봉선(封禪)
옛적에 제왕(帝王)이 천하가 태평한 공을 이루면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하늘에 제사하고 옥첩(玉牒)을 땅에 봉하는 것이니, 이것을 봉선(封禪)이라 한다.
「봉선서(封禪書)」
『사기(史記)』의 편명(篇名)이다. 황제가 태산(泰山)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봉(封)이라 하고, 태산 아래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선(禪)이라 한다.
봉성(鳳城)
① 봉화(奉和)의 고호이다.
② 장안(長安)에 대한 이칭으로 제도(帝都)를 가리킨다.
봉소(鳳沼)
대궐 안에 있는 못. 중서성(中書省)을 가리키는 봉황지(鳳凰池)와 같은 말로, 조정을 가리킨다.
봉소성단채운수(鳳簫聲斷彩雲愁)
혼령이 이미 하늘 위로 멀리 떠나갔다는 말이다. 소사(蕭史)와 농옥(弄玉)이 피리를 불면 봉황이 날아오곤 하였는데, 뒤에 봉황을 타고서 채운(彩雲) 위로 날아 올라갔다고 한다. 참고로 당(唐) 나라 심전기(沈佺期)의 시 ‘봉소곡(鳳簫曲)’에 “昔時嬴如厭世紛 學吹鳳簫乘彩雲”이라는 구절이 있다.
봉수(鳳髓)
① 값비싼 식품으로 치는 것이나, 값진 가야금 줄의 뜻으로도 쓰인다.
② 봉황의 골수로, 뛰어난 사람이 남긴 진귀한 글을 가리킨 듯하다.
③ 봉황의 골수인데 진미(珍味)의 뜻으로 쓰인다. 이함용(李咸用)의 부귀곡(富貴曲)에 “하얀 구슬잔엔 봉수가 무르녹고, 불그레한 상저에는 성순이 가늘어라[雪暖瑤杯鳳髓融 紅施象筯猩脣細].” 하였다.
④ 송 나라 진복령(秦茯苓)의 아칭(雅稱)
봉시(封豕)
큰 돼지라는 뜻인데, 성질이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4년 조(條)에, “오(吳)가 봉시와 큰 뱀이 되어 상국(上國)을 범한다.” 하였다.
봉시상호(蓬矢桑弧)
봉시는 쑥대로 만든 살이며 상호(桑弧)는 뽕나무로 만든 활. 고대에는 남자를 낳으면 활을 문 왼쪽에, 여자를 낳으면 문 오른쪽에 베풀었으며, 세자(世子)를 낳으면 사인(射人)이 상호에 봉시로 천지와 사방에 쏘니 이는 원대한 뜻을 품으라는 뜻이라 한다. 『예기(禮記)』 「내칙(內則)」
봉시상호(蓬矢桑弧)
아들을 처음 낳을 때에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을 사방으로 쏘고는 문에 거는 풍속이 있는데, 그것은 남자는 사방에 다니면서 사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봉심(蓬心)
① 강직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② 원리에 통달하지 못하는 마음.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봉아(蜂衙)
벌집 즉 봉소(蜂巢)를 말한다. 꿀벌들이 아침저녁으로 군아(軍衙)처럼 때를 정하여 집을 드나드는 것을 이른 말로, 관리들이 조석으로 아참(衙參)하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봉안역(奉安驛)
광주(廣州)의 속역(屬驛)이다.
봉암(鳳巖)
이경여(李敬輿)의 호이다.
봉액(鳳掖)
한림원(翰林院)을, 가리킨다.
봉액(縫腋)
공자(孔子)가 송 나라에 살 때에는 그 곳에서 쓰는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노(魯) 나라에 살 때에는 봉액의(縫腋衣)를 입었다 하여 후세에서 유학(儒學)하는 이의 의관(衣冠)을 이것으로 말하였다.
봉액(縫掖)
유자(儒者)가 입는, 겨드랑만 꿰매어 옆이 넓게 터진 옷.
봉액(逢掖)
소매가 넓은 유자(儒者)의 옷을 말한다.
봉억(鳳臆)
천리마의 별칭이다.
봉연(鷄人)
제왕의 가마이다.
봉영(逢迎)
만나는 사람들마다 병사(兵使)의 눈치만 보며 비위를 맞추려 한다는 뜻이다.
봉영(蓬瀛)
봉래산(蓬萊山)과 영주산(瀛洲山)을 말하는데 신선이 산다고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봉영이매(逢迎魑魅)
소동파(蘇東坡)가 먼 곳으로 귀양가서 임금에게 올린 글에, “이매(魑魅)가 바다 위에 마중 나왔으니, 어찌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리이까.”라는 구절이 있다.
봉오(蜂午)
어지럽게 아울러 일어나는 모양이다. 『사기(史記)』 7권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지금 그대가 강동 땅에서 일어나자, 초 땅의 봉오(蠭午)한 장수들이 모두 그대에게 다투어 붙은 것은, 그대가 대대로 초나라 장수인 데다 초나라의 후사(後嗣)를 임금으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입니다[今君起江東 楚蜂午之將皆争附君者 以君世世楚將 爲能復立楚之後也].”라고 하였다. / 인용: 聞隣家哭(송순)
봉옥(封屋)
임금의 교화가 사해에 두루 미쳐 풍속이 아름다워지니 집집마다 모두 덕행(德行)이 있어서 정표(旌表)할 만하다는 말이다.
봉요(蜂腰)
벌의 허리처럼 한 가운데가 가늘다는 뜻이다. 시를 지을 때 칠언시의 4번째 자가 평성(平聲)이고 그 앞뒤의 자가 측성(仄聲)인 경우 또는 오언시에 2번째 글자가 평성(平聲)이고 그 앞 뒤 자가 측성(仄聲)인 경우 허리가 짤록한 벌과 같다하여 봉요(蜂腰)라고 하며 이를 피한다.
봉우장집(鳳羽長戢)
군자(君子)가 출세(出世)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봉우진(封于秦)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갔다가 비를 만나 소나무 밑에 피하고, 그 소나무를 대부(大夫)로 봉했다. 『사기(史記)』 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인용: 見蒼松根入水中(홍만식)
봉원(蓬原)
동래(東萊)의 별칭이다.
봉유(封留)
전한(前漢)의 공신(功臣) 장량(張良)이 유후(留侯)에 봉해진 것을 말한다. 한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에 공신을 봉하면서 장량에게 제(齊)나라 땅에 삼만 호(三萬戶)되는 지방을 마음대로 선택하게 하니, 그는 ‘신이 처음 폐하(陛下)를 유(留)에서 만났으니 유후(留侯)로 봉하면 족합니다.” 하였다.
봉유족(封留足)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공신들을 봉(封)할 적에, 장량(張良)의 공이 가장 크다 하여 그에게 삼만호(三萬戶)를 봉해주려고 하자, 장량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臣)은 유(留) 땅에 봉해진 것만으로 만족하고, 삼만호는 감히 당치 않습니다.” 하여, 마침내 장량을 유후(留侯)로 봉해준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卷五十五
봉의(縫衣)
옛날 유자(儒者)가 입던 소매가 넉넉한 옷이다.
봉이(封姨)
풍신(風神)의 이명(異名)이다.
봉익(鳳翼)
봉황의 날개로, 대궐 처마를 가리킨다.
봉인(封印)
밀봉한 자리에 도장을 찍음. 또는 그 도장.
봉인(封人)
① 변방을 지키는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② 주(周)나라 때 사도(司徒)에 소속된 벼슬로, 제왕의 사직단과 경기 지방의 수호를 맡았다.
봉인(奉引)
임금의 앞에서 수레를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봉일(捧日)
송나라가 망할 때에 황태후인 가씨(賈氏)의 꿈에,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것을 어떤 선비가 받아서 받들고 있었는데, 깨어서 그 꿈에 보았던 선비를 찾다가 육수부(陸秀夫)라는 사람을 발견하여 발탁 등용하였는데, 그 후에 과연 육수부는 원(元)나라 군사에 쫓기면서도 어린 8세 황제를 모시고 충성을 다하다가 최후에는 그 어린 황제를 업고 물로 뛰어들어 같이 죽었다.
봉입금지(鳳入禁池)
중서성(中書省)을 봉황지(鳳凰池)라 한다.
봉입금지교(鳳入禁池翹)
요직(要職)에서 벼슬한 것을 말한다. 중서성(中書省)이 금중(禁中)에 있어 중요한 정무(政務)를 처리하여 임금의 총애를 많이 받기 때문에, 중서성을 봉황지(鳳凰池)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는 문하성(門下省)을 지칭한 것이다. 『문선(文選)』 사조 직중서성시(謝眺 直中書省詩)에 “여기가 상봉지라는 곳이지, 패옥소리 쟁그랑쟁그랑 울리네.[玆言翔鳳池 鳴珮多淸響]” 하였다
봉자(鳳觜)
「십주기(十洲記)」에 “도가(道家)에서 봉의 부리와 기린의 뿔을 합하여 달여 만든 아교를 속현교(續絃膠)라고 하는데 이를 사용해 끊어진 활줄을 잇는다.”고 하였다.
봉자(鳳姿)
임금의 자태
봉자서로(鳳觜犀顱)
신체적으로 특이한다. 봉의 부리, 무소 두개골은 관상학(觀相學)에 있어 모두 귀인(貴人)의 상에 속한다.
봉장추(鳳將雛)
봉황이 새끼를 거느리고 있다는 뜻이다. 어버이와 자식이 함께 있는 것을 노래한 옛 악곡의 이름이다. 고악부(古樂府) 「농서행(隴西行)」에, “봉황새 추추히 우는구나, 한 어미 아홉 새끼 거느리고[鳳凰鳴啾啾 一母將九雛].”라 했다.
봉전(葑田)
줄풀(菰)이나 마름(菱)이 여러 해 동안 자라며 썩은 진흙이 쌓여서 밭이 된 것을 말한다.
봉조(鳳詔)
임금의 조칙(詔勅)이다.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이 오색지(五色紙)에다 조서(詔書)를 써서 나무로 만든 봉(鳳)의 입에 물려서 반포(頒布)하였다.
봉조부지상중니(鳳鳥不至傷仲尼)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봉황새가 오지 않고 하도가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그만인 모양이다[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라고 한 공자(孔子)의 말이 실려 있다.
봉주(鳳咮)
연석(硯石)의 이름이다. 송(宋) 나라 때 용배산(龍焙山)은 마치 나는 봉황이 고개를 숙여 물은 마시는 형상과 같았는데, 그 봉황의 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결이 옥(玉)같이 고운 창흑색(蒼黑色)의 돌이 있어, 그 돌로 만든 벼루를 소식(蘇軾)이 봉주(鳳咮)라고 이름한 데서 온 말이다.
봉주(鳳州)
현재의 섬서성(陝西省) 봉현(鳳縣).
봉지(鳳墀)
궁전(宮殿) 또는 궁궐의 뜰을 말한다.
봉지(鳳池)
당(唐) 나라 중서성(中書省)이 있는 못 이름인데, 전하여 중서성을 말한다. 우리나라 한림원(翰林院)에 해당한다.
봉지(鳳池)
궁궐에 있는 봉황지(鳳凰池)로서 즉 금중(禁中)을 말한다.
봉지완공영(蓬池阮公詠)
완공은 진(晉) 나라 때 완적(阮籍)을 가리킨다. 완적의 영회시(詠懷詩)에 “봉지 가에서 배회하고 다시 머리 돌려 대량을 바라보네(徘徊蓬池上 還顧望大梁).”라고 한 것을 말하는데, 봉지는 즉 진(晉) 나라의 장군 조적(祖逖)이 비분강개하여 후조 황제(後趙皇帝)를 참칭한 오랑캐 석륵(石勒)과 싸웠던 곳이다. 『문선(文選)』 卷二十三
봉창(篷牕)
뜸을 걸어 놓은 배(船)의 창을 말한다.
봉책(鳳柵)
봉황성(鳳凰城)을 가리킨다.
봉천(奉倩)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순찬(荀粲)의 자이다.
봉천위(奉天圍)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으로 피난을 갔다가 주자(朱泚)의 반군(叛軍)에게 포위를 당한 고사가 있다. 『구당서(舊唐書)』 卷12
봉천조(奉天詔)
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당하여 봉천(奉天)으로 쫓겨가 있을 때, 주자의 군대는 철통같이 봉천을 포위하였고, 양식도 거의 다하여 상황이 매우 다급해지자, 덕종이 장리(將吏)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부덕하여 스스로 위망의 지경에 빠졌으니, 이는 실로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경들은 아무 죄도 없으니, 의당 일찍 투항을 해서 처자를 구해야 할 것이다.”고 한 것을 말한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卷二百二十九 唐德宗紀
봉체(封遞)
벼슬아치가 암행어사의 봉고(封庫)로 인해 체직되는 일.
봉춘군(奉春君)
유경(劉敬)의 봉호(封號).
봉취(鳳吹)
생황(笙篁)이나 퉁소 등의 악기. 여기서는 임금의 행차에 연주하는 음악을 말한다.
봉침(縫針)
옷을 꿰매는 바늘.
봉태(逢殆)
액을 당하다.
봉패위(逢覇尉)
한(漢) 나라 때의 명장(名將) 이광(李廣)이 한때 파직되어 초야에 있을 적에, 하룻밤에는 기병(騎兵) 하나를 데리고 나가 어떤 이와 전간(田間)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패릉정(霸陵亭)에 이르렀을 때, 패릉위(霸陵尉)가 취하여 이광을 못 가게 하자, 이광의 기병이 “옛 이 장군(李將軍)이다.”고 말하니, 패릉위가 말하기를, “지금의 장군도 밤에 다니지 못하는데, 무슨 까닭이냐?[今將軍尙不得夜行, 何乃故也]”하고는, 강제로 이광을 패릉정 밑에서 자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卷一百九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봉해(蓬海)
‘봉래도가 있는 바다’를 말한다.
봉해천(蓬海淺)
봉래도가 있는 바다를 말한다. 동한(東漢)환제(桓帝) 때 선인(仙人) 왕원(王遠)이 채경(蔡經)의 집에 내려와 선녀 마고(麻姑)를 불러왔는데, 마고가 말하기를 “내가 선인을 모신 이후 동해가 세 번 뽕밭이 된 것을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 보니 물이 또 그전에 모일 때보다 절반가량 얕아졌었습니다.”에서 나온 것이다.
봉현(鳳絃)
가야금 줄을 말한다.
봉혜(鳳鞋)
봉황새를 수놓아 꾸민 부인(婦人)의 신을 말한다.
봉혜하덕쇠(鳳兮何德衰)
“접여(接輿)가 공자(孔子) 앞을 지내 가며 노래 부르기를, ‘봉이여, 봉이여, 어찌 덕이 쇠한고.’ 하였다.” 했다. 『사기(史記)』 卷四十七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미자(微子)」
봉호(蓬壺)
바다 속에 있다는 신선들이 사는 산인 봉래산(蓬萊山)을 말한다. 습유기(拾遺記) 고신(高辛)에, “삼호(三壺)는 바로 바다 속에 있는 세 산으로, 첫 번째는 방호(方壺)인데 이는 방장산(方丈山)이고, 두 번째는 봉호(蓬壺)인데 이는 봉래산이고, 세 번째는 영호(瀛壺)인데 이는 영주산(瀛洲山)으로, 모양이 마치 술병과 같이 생겼다.” 하였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봉호(封胡)
봉호갈말(封胡羯末)의 약칭으로 진(晉) 나라 사씨(謝氏) 집안의 사소(謝韶), 사랑(謝郞), 사현(謝玄), 사천(謝川)의 자(字)인데, 모두 훌륭한 인물들이었다.
봉호(封狐)
큰 여우를 말하는데, 염토(炎土) 지대에는 이런 것들이 사람을 많이 해친다는 뜻으로, 『초사(楚辭)』 「초혼(招魂)」의 “복사가 쌓여 있고 봉호는 천리에 우글거린다[蝮蛇蓁蓁 封狐千里].” 하였다.
봉호몰인(蓬蒿沒人)
후한(後漢) 장중울(張仲蔚)이 “쑥이 자라 사람이 감춰질 만함[蓬蒿沒人]”한 집에서 영명(榮名) 대신 양성(養性)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인정해 주는 이가 없었으나 오직 유공(劉龔)만은 알아주었다고 한다. 『고사전(高士傳)』 中 張仲蔚
봉화여산하(烽火驪山下)
주나라 유왕(幽王)이 포사(褒姒)란 미인에게 미혹하였는데, 포사는 평생에 웃는 일이 없었다. 왕은 한 번 웃기기 위하여 거짓으로 여산에 봉화(烽火)를 올렸더니 사방의 제후(諸侯)들은 참으로 난리가 난 줄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가 헛걸음을 하니 그제야 포사가 한 번 웃었다. 그 뒤에 정말 외적이 침입하였을 적에 봉화를 드니 제후들이 믿지 않고 군사가 오지 않아 국도(國都)가 함락되었다.
봉황대(鳳凰臺)
① 경주(慶州)에 있는 누대(樓臺)로, 일본을 왕래하는 사신들이 들르던 곳이다.
② 금릉(金陵)에 있는데, 이백이 시를 짓고 놀던 명승지이다. 이백(李白)이 금릉(金陵) 봉황대에 올라서 지은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 시에, ‘삼산은 반이나 푸른 하늘 밖에 떨어졌고, 두 물은 백로주(白鷺洲)를 가운데로 나누었다[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는 구절이 있다.
③ 이백(李白)이 황학루(黃鶴樓)에 갔다가 최호(崔顥)의 「황학루(黃鶴樓)」 시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지어보려고 시도하였으나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아 짓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후 금릉(金陵) 봉황대(鳳凰臺)에 가서 봉황대(鳳凰臺) 시를 지었는데, 그 구성은 황학루 시를 모방하였다. 황학루 시에 “옛사람은 황학을 타고 떠나버리고, 이곳엔 텅 빈 황학루만 남았네[昔人巳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하였다.
봉황령(鳳凰翎)
대나무 잎을 말한다.
봉황명고강(鳳凰鳴高岡)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은 저 고강에서 울고[鳳凰鳴矣于彼高岡].”이라 하였다. 이는 주성왕(周成王)을 경계한 시다.
봉황모(鳳凰毛)
문재(文才)가 뛰어난 것의 비유이다.
봉황비천인(鳳凰飛千仞)
봉황은 높이 천 길 위에 날아서 굶주려도 곡식을 쪼아 먹지 않는다 한다.
봉황주(鳳凰州)
당(唐) 나라 도성인 장안성(長安城)을 봉황성이라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봉황지(鳳凰池)
금원(禁苑) 안의 연못.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 금원에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고 중요 기무를 관장하여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게 하였으므로, 중서성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봉황함서(鳳凰銜書)
임금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가는 사신의 행차를 뜻하는 말이다. 주(周) 나라 때 봉황이 천서(天書)를 입에 물고 문왕(文王)의 도읍지에 날아와 노닐었으므로 무왕(武王)이 봉서(鳳書)의 기(紀)를 받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예문유취(藝文類聚)』 卷99 引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
봉홰조양(鳳噦朝陽)
일반적으로 어진 인재가 때를 만나 일어나는 때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오동나무가 자라날 때를 말한다. 조양은 아침 해가 뜨는 동산이다.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산에서 우는 도다. 오동이 자라니, 저 조양에서 자라는 도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하였다.
봉후골(封侯骨)
먼 변방에서 큰 공을 세워 귀하게 될 골상(骨相)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서역(西域)에 종군(從軍)하여 만년에 정원후(定遠侯)로 봉해졌는데, 일찍이 관상가(觀相家)가 그의 연함호두(燕頷虎頭)의 상을 보고 만리후(萬里侯)가 되리라고 예언했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卷47
봉희(封豨)
큰 멧돼지처럼 생긴 괴물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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