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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140. 북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40. 북

건방진방랑자 2020. 4. 19.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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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북고(北固)

지금 단도현(丹徒縣) 북쪽에 있는 산이른다. 삼면(三面)에 물이 둘러 있고 형세가 험준한 곳으로 유명하다.

 

북고(北姑)

한북(漢北)에 있는 지명

 

북고사(北固寺)

() 나라 때의 절로, 좋은 대가 자라는 곳이다. 이덕유(李德裕)가 그 절의 중을 시켜서 매일 대나무가 잘 있는지를 보고하게 하였다.

 

북궁영아(北宮嬰兒)

전국(戰國) 시대 제() 나라의 효녀이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조 위후(趙威后)가 제나라 사신에게 북궁영아는 무고한가[北宮之女嬰兒子無恙耶].’하고 안부를 물었다.” 하였다.

 

북궁유(北宮黝)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역사(力士)로 남에게 지지 않고 임금 찌르기를 거지 찌르듯 하던 자.

 

북궐(北闕)

임금의 대궐은 남향(南向)이므로 북궐(北闕)이 된다.

 

북극(北極)

대궐 쪽의 하늘을 가리킨다. 조정이 위치한 서울을 비유한 말이다.

북극성. 진리.

 

북극성(北極星)

임금을 상징하는 말이다. 참고로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덕으로 정치하는 것이,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모든 별들이 그곳을 향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북당훤(北堂萱)

시경(詩經)위풍(衛風) 백혜(伯兮)어디서 원추리 하나 얻어, 집 뒤켠에 심어 볼꼬[焉得萱草 言樹之背].”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모친의 거처를 북당(北堂) 혹은 훤당(萱堂)이라고 하게 되었다.

 

북두(北斗)

북두칠성(北斗七星)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두칠성이 모든 별들의 중심적인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는 데서 남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에 비유하고 있다.

 

북두남기(北斗南箕)

시경(詩經)소아(小雅) 대동(大東)남쪽엔 키라는 별이 있으나 곡식을 까부르지 못하고 북쪽엔 말이라는 별이 있으나 주장을 뜰 수가 없도다[維南有箕 不可以簸揚 維北有斗 不可以把漿].”하였다.

 

북두불가읍(北斗不可挹)

북두는 임금을 상징한 것으로, 여기서는 요로(要路)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 모시지 못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북두우(北斗牛)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북방의 두성과 우성이다.

 

북두작창명(北斗酌滄溟)

북두성(北斗星)이 말() 모양으로 생겼으므로 그것으로 바닷 물을 푸겠다는 말이다.

 

북등선우대(北登單于臺)

한 무제(漢武帝)18만 병력을 직접 이끌고 장성(長城)을 나와 북쪽으로 가서 선우대에 올랐던 것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元封 元年 冬十月 …… 行自雲陽 北歷上郡西下五原 出長城 北登單于臺라는 기록이 있다. 선우대는 지금의 수원성(綏遠省) 귀화성(歸化城) 서쪽에 있다고 한다.

 

북령욕(北嶺辱)

은자(隱者)가 아닌 사람이 은자인 척하며 산을 더럽힘을 말한다. 북령은 곧 북산(北山)을 가리키는데, 공치규(孔稚圭)북산이문(北山移文)푸른 산을 재차 욕되게 하고, 붉은 절벽을 거듭 때묻게 한다.[碧嶺再辱 丹崖重滓]” 한 데서 온 말이다.

 

북로어(北路魚)

() 나라 서군천(徐君蒨)이 유흥을 좋아하였는데 양() 나라 상동왕(湘東王)의 참군(參軍)이 되자 수레에 기생들을 싣고 형초(荊楚)의 산천을 빠짐없이 유람하였다. 그 때 양양(襄陽) 어홍(魚弘)도 호방하고 사치스럽다고 일컬어졌으므로 부중(府中)에서 노래하기를, “북쪽에는 어씨이고 남쪽에는 서씨이네[北路魚 南路徐].”라고 하였다. 남사(南史)15 서군천전(徐君蒨傳)

 

북리(北里)

북방에 있는 촌리(村里)를 이르는데, 또는 창부(娼婦)가 있는 곳을 말하기도 한다.

 

북리지무(北里之舞)

() 나라 주왕(紂王)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음탕하고도 화사한 무악(舞樂)의 이름이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북린(踣麟)

사필(史筆)을 꺾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이다. 기린은 성군(聖君)의 시대에만 출현한다는 성수(聖獸)인데, 혼란한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나와 사냥에 잡혀 죽게 되자, 공자(孔子)가 이 대목에서 절필(絶筆)하였다는 내용이 서진(西晉) 두예(杜豫)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서문(序文)에 나온다.

 

북망산(北邙山)

낙양현 북쪽에 있는 망산을 말하는데, () 나라 이후로 이곳이 유명한 묘지(墓地)이므로, 전하여 사람의 죽음을 말한다.

 

북면(北面)

북쪽을 향한다. 북면은 제자가 스승에게 공경하는 예이다. 한서(漢書)』 「우정국전(于定國傳)우정국이 정위(廷尉)로 있을 적에 스승을 맞아 춘추(春秋)를 배우면서 몸소 책을 갖고 북면하여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하였다.

 

북면배명산(北面背冥山)

반대쪽으로 가면 갈수록 다른 반대쪽과는 그만큼 더 멀어짐. 남쪽을 가는 자가 초()의 수도인 영()까지 오고 나면 아무리 북을 바라보아도 극북에 위치한 악부해제(樂府解題)에서 명산(冥山)이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명산으로부터 너무 멀리 가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자(莊子)』 「천운(天運)

 

북명(北溟)

북쪽 끝에 있다는 큰 바다를 말한다. 북명(北冥)이라고도 한다.

 

북명곤(北溟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북쪽 바다에 곤어라는 고기가 있는데, 곤어의 크기는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도 없다[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큰 인물을 비유한 것이다.

 

북명어(北溟魚)

북해(北海)에 있다는 물고기. 그 이름이 곤()인데, 이것이 변화하면 붕새()가 된다고 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북문시(北門詩)

시경(詩經)패풍(邶風) 북문(北門)으로, 어진 자가 난세에 처해 어두운 임금을 섬겨서 뜻을 얻지 못한 것을 탄식하면서 읊은 시이다.

 

북문지탄(北門之歎)

북문에서 한탄한다. 북문(北門)은 궁궐의 상징어이다. , 벼슬자리에 나가기는 하였으나 뜻대로 성공하지 못하여 살림이 곤궁함을 한탄하는 말이다.

 

북문화기(北門禍起)

북문(北門)은 홍문관(弘文館)을 지칭하는 말로, 홍문관과 기묘사림들이 공신을 재정하고자 하자, 훈구파가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을 몰아낸 사건을 말한다. / 인용: 題自庵詩帖(윤근수)

 

북방지강(北方之强)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무기와 갑옷을 깔고 지내면서 죽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북방 사람의 강함이다[袵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한 데서 온 말이다. 중용(中庸)10

 

북백(北伯)

관북(關北)의 방백(方伯), 즉 함경도 관찰사의 별칭이다.

 

북비미(北鄙靡)

()는 음악을 북쪽 변두리의 음탕한 소리[北鄙靡靡之聲]’로 만들었다. 예기(禮記)

 

북산(北山)

① 『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으로, () 나라의 유왕(幽王) 때에 역사(役使)가 고르지 못하여 자신만이 일을 하느라 수고로워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읊은 시로 대부가 균평하지 못하여서, 나 혼자만 종사케 해 홀로 어질다 하네[大夫不均 我從事獨賢].”하였다.

남경(南京)에 있는 종산(鍾山)으로, 은자(隱者)가 은거하여 사는 산을 말한다. 육조(六朝) 때 송() 나라의 공치규(孔穉圭)가 주옹(周顒)이 자신과 함께 종산에 은거하다가 벼슬길에 나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종산에다가 이문을 새겨 주옹으로 하여금 다시는 종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後集

 

북산령(北山靈)

남조 제()의 주옹(周顒)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벼슬에 나아간 뒤 다시 이 산을 거쳐서 가게 되자, 공치규(孔稚珪)가 북산의 산신령을 가탁하여 북산이문(北山移文)이라는 글을 지어서 그의 변절을 풍자한 바가 있다.

 

북산문(北山文)

끝까지 은거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남제(南齊) 때에 공치규(孔稚圭)가 주옹(周顒)이 일찍이 북산(北山)에 은거하다가 끝까지 은거하지 못하고 벼슬길에 나간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그를 책망한 데서 온 말이다.

 

북산송초(北山竦誚)

남제(南齊) 때 주옹(周顒)이 처음에는 북산에 은거(隱居)해 있다가 조서(詔書)를 받고는 바삐 나와서 해염현령(海鹽縣令)이 되자 공치규(孔稚珪)가 산령(山靈)의 뜻을 가탁(假托)하여 여러 동학(洞壑)이 비웃고 많은 산봉우리가 꾸짖는다.”는 등의 북산이문(北山移文)를 지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조롱하였다.

 

북산시(北山詩)

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 나라의 유왕(幽王) 때 역사(役使)가 고르지 못하여 자신만이 일을 하느라 수고로워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읊은 시이다.

 

북산이문(北山移文)

남제(南齊) 때 공덕장(孔德璋)이 지은 글로, 은사(隱士) 주옹(周顒)의 변절을 몹시 나무란 내용이다. / 육조(六朝) 시대 송() 나라 주옹(周顒)이 처음 북산에 은거하다가 나중에 관직을 제수받고 나가자, 함께 은거했던 친구인 공치규(孔稚圭)가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북산 신령의 이름을 가탁하여 관청의 통문(通文)을 본떠 이문(移文)을 써서, 주옹이 두 번 다시 북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북산지감(北山之感)

북산에서 느끼는 감회. 북산(北山)은 궁궐의 상징어이다. 나라 일에 힘쓰느라고 부모봉양을 제대로 못한 것을 슬퍼하는 마음을 말한다.

 

북산참(北山慚)

남제(南齊) 때 주옹(周顒)이 처음 북산에 은거하다가 나중에 뜻을 바꾸어 벼슬길에 나가자, 공치규(公稚珪)북산이문(北山移文)를 지어 북산 신령의 뜻을 가탁해서, 주옹이 변절하여 북산에 수치를 끼쳤다는 뜻으로 그를 배척했던 데서 온 말이다.

 

북산편(北山篇)

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으로, () 나라의 유왕(幽王) 때에 역사(役使)가 고르지 못하여 자신만이 일을 하느라 수고로워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읊은 시로 대부가 균평하지 못하여서, 나 혼자만 종사케 해 홀로 어질다 하네[大夫不均 我從事獨賢].”하였다.

 

북수(北首)

머리를 북으로 한다. 신하가 임금을 못 잊어하는 뜻이다.

 

북수(北叟)

북쪽 국경 밖의 늙은이. 새옹(塞翁)과 같은 말이다.

 

북수남능(北秀南能)

선종(禪宗)의 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의 해묵은 논쟁. () 나라 때 육조 대사(六祖大師) 혜능(慧能)5() 홍인(弘忍)의 의발을 전수받고서 남쪽에 내려와 돈오(頓悟)의 교설을 펼쳤고, 홍인의 수상좌(首上座)였던 신수(神秀)는 북쪽에서 점수(漸修)의 교리를 전개했다는 고사가 전하는데, 우리나라 불교는 혜능의 선맥(禪脈)을 이어 받았다고 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8

 

북시(北寺)

대내(大內)의 북쪽에 있는 관사(官司)라는 뜻으로 대리시(大理寺)의 별칭이다. 대리시는 특별사법관청(特別司法官廳)으로서, 좌시(左寺)는 지방의 탄핵 및 대죄(大罪)의 의옥(疑獄)을 다스리고, 우시(右寺)는 서울에 있는 각 관청의 형옥(刑獄)을 심판하였다. 명사(明史)』 「직관지(職官志)

 

북신(北辰)

여기에도 북두칠성을 말하는 것인데, 북두성이 하늘의 왕좌이므로 세상의 제왕도 북두성에 비유하고, 임금 있는 곳을 북두성 있는 곳이라 한다.

 

북우남린(北羽南鱗)

북우와 남린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붕()이라는 새와 곤()이라는 물고기를 가리키는데, 한유(韓愈)의 시에 북극에는 홀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남명에는 깊이 숨은 큰 물고기 한 마리. 대륙의 강물 줄기 그 사이를 가로막아, 그림자도 못 보고 메아리도 안 들리네. 그러나 바람 구름 한번 만나면, 변화해서 한 몸뚱이 합쳐지누나. 거리가 멀다고 누가 말할까, 감동하여 격발하면 귀신처럼 빠른 것을.[北極有羇羽 南溟有沈鱗 川源浩浩隔 影響兩無因 風雲一朝會 變化成一身 誰言道里遠 感激疾如神]”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한창려집(韓昌黎集)2 北極一首贈李觀

 

북운(北雲)

북쪽 구름은 이별의 정을 상징한다.

 

북원(北苑)

남당(南唐) 동원(董源)의 자()이다.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산수화(山水畫)에 능하였다. 십국춘추(十國春秋)

 

북의춘현(北宜春縣)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여남현(汝南縣) 서남부에 있다. 전한(前漢) 때에는 의춘(宜春)’이라 했다가 후한(後漢) 북의춘(北宜春)’으로 개명한다.

 

북정(北征)

두보(杜甫)46세 때에 지은 대표적인 오언 고시(五言古詩). 난증의 행재소(行在所)인 봉상(鳳翔)에서 출발, 처자가 있던 부주(鄜州)에 이르기까지의 기행시(紀行詩).

 

북정편(北征篇)

두보(杜甫)가 당 숙종(唐肅宗) 2(757) 4월에 봉상(鳳翔)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좌습유(左拾遺)를 제수받은 뒤, 8월에 부주(鄜州)의 집으로 돌아갈 때 지은 시이다. 서울에서 봉선으로 갈 때 회포를 읊은 시[自京赴奉先詠懷詩]와 함께 그의 2대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북제(北帝)

겨울을 맡은 신()이다.

 

북제(北第)

한 혜제(漢惠帝) 때 하후영(夏候嬰)이 큰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북제 가운데 가장 좋은 저택을 하사받았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왕이 있는 북궐(北闕)에 인접한 집이란 뜻인데 일반적으로 공신의 집을 가리킨다.

 

북종첩(北宗帖)

북종화(北宗畵)의 화첩인데, 북종화는 중국 회화사상의 2대 유파의 하나이다. () 나라의 이사훈(李思訓)ㆍ이소도(李昭道) 부자를 비조(鼻祖)로 하여 송대(宋代)에 와서 전성하였으나, () 나라 이후에는 남종화에게 압도되었는데 물체의 표현과 색채의 선명함을 주로 하여 누대(樓臺)와 금벽(金碧)을 세밀하게 나타내는 것이 특색이다.

 

북지(北地)

촉한 후주(蜀漢後主)의 아들 북지왕(北地王) ()을 말한다. 촉한이 위장(魏將) 등애(鄧艾)에 의해 항복하게 되자, 그는 한 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옳다면서 항복을 반대하고 소열묘(昭烈廟)에 들어가 통곡하다가 자살하였다.

 

북지(北至)

하지(夏至)의 별칭이다. 태양이 이날 적도(赤道)의 최북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북창고와(北窓高臥)

도연명(陶淵明)이 여름날 한가로이 북창(北窓) 아래 누워 있는데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오자 스스로 복희씨(伏羲氏) 이전 시대의 사람이라 하였다.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 희증정율양(戱贈鄭溧陽)에 도연명의 고사를 인용하여 맑은 바람 부는 북창 아래서 스스로 복희 시대 사람이라 하네하였다.

 

북창고침(北窓高枕)

태평 무사하게 한가로이 지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 나라 도잠(陶潛)의 글에 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에 누워 있노라면[北窓下臥] 서늘 바람이 잠시 스쳐 지나가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내가 희황(羲皇)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도연명집(陶淵明集)7 與子儼等疏

 

북창금운(北窓襟韻)

전원에서 한가로이 즐기는 은일(隱逸)의 정취를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이 전원 생활을 즐기면서 여름철 한가로이 북창가에 잠들어 누웠다가 삽상한 바람이 불어 와 잠을 깨고 나면 문득 태고적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夏月虛閑 高臥北窓之下 淸風颯至 自謂羲皇上人].”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서(晉書)』 「은일전(隱逸傳)陶潛

 

북창삼우(北窓三友)

북쪽 창가의 세 친구. 거문고와 시와 술을 말한다.

 

북평태수(北平太守)

한나라 북평태수 이광(李廣)이 활을 잘 쏘아 범을 잡았다.

 

북풍(北風)

겨울에 부는 바람을 말한다. / 인용: 餓婦行(성간)

 

북풍기량(北風其涼)

시경(詩經)패풍(邶風) 북풍(北風)북풍이 차갑게 불어오며 함박눈이 펑펑 내리도다.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이와 손 잡고 함께 길을 가리라[北風其涼 雨雪其雱 惠而好我 携手同行].”하였는데, 이는 국가에 혼란이 닥쳐오게 되었으므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감을 읊은 시이다.

 

북풍장(北風章)

시경(詩經)패풍(邶風)의 편명인데, 국가가 혼란할 것을 걱정하여 뜻을 같이한 사람들끼리 피난할 것을 읊었다.

 

북풍파남극(北風破南極)

북은 음기운이고 남은 양기운으로, 북풍이 남극을 깨뜨렸다는 것은 소인(小人)의 도가 자라고 군자의 도가 소멸된다는 뜻이다.

 

북풍편(北風篇)

시경(詩經)패풍(邶風)의 한 편 이른다. 심한 학정(虐政) 때문에 백성들 마음이 흩어지고 국가에는 위난(危難)이 곧 닥쳐올 것을 북풍과 눈보라에 비유하여 슬프고 걱정스러운 뜻을 나타낸 내용의 시.

 

북풍한설(北風寒雪)

몹시 차고 추운 겨울 바람과 눈.

 

북학(北學)

북쪽 청나라의 발달된 문명을 배우는 것.

() 나라 때 서울에 설치하였던 최고 학부(學府) 가운데 하나로, 학부 내에는 동ㆍ서ㆍ남ㆍ북의 사학(四學)과 태학(太學)이 있었다고 한다.

 

북해(北海)

공 북해(孔北海), 즉 북해 상(北海相)을 역임한 후한(後漢) 말의 문학가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당시에 금주령(禁酒令)을 내린 조조(曹操)에 반대하여 주덕(酒德)을 찬양하면서 자리에 빈객이 항상 가득하고, 술통 속에 술이 비지 않는다면, 나에게 무슨 근심이 있으랴[座上客恒滿 尊中酒不空 吾無憂矣].”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조조의 미움을 받아 죽었다. 후한서(後漢書)70 공융열전(孔融列傳)

 

북해빈(北海賓)

북해상(北海相)을 지낸 후한(後漢) 공융(孔融)이 손님을 좋아하여 늘 말하기를, “자리에는 손님이 늘 가득하고 술독 속에 술만 바닥나지 않으면 내 다른 걱정은 없노라.” 하였다는 것이다. 몽구(蒙求)

 

북해상휘(北海觴揮)

북해는 후한(後漢) 때 북해상(北海相)을 지낸 공융(孔融)을 가리키는데, 그는 본디 빈객을 좋아하여 그가 한직(閑職)에 물러나 있을 적에는 빈객들이 날로 문에 그득하였으므로, 그가 항상 감탄하여 말하기를 자리에는 빈객이 항상 그득하고, 항아리에는 술이 항상 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북해준(北海樽)

공북해(孔北海)는 한() 나라 때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북해 상(北海相)을 지낸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공융은 성품이 너그럽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선비들을 좋아하였고 후생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다. 한직(閑職)으로 물러난 다음에는 빈객들이 항상 집에 가득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좌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주전자엔 술이 빌 때가 없으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공융열전(孔融列傳)

 

북행(北行)

중국으로 조회하러 가는 사행길을 말한다.

나라에서 귀가(貴家) 자제(子弟)들을 천조(天朝)에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북황(北荒)

북쪽 끝에 있는 황량하고 먼 지역을 말한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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