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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139. 부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39. 부

건방진방랑자 2020. 4. 19.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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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

돌아가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을 때先大人(선대인), 先考丈(선고장)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일컬을 때先親(선친), 先考(선고), 先人(선인)

살아 계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을 때椿()府丈(춘부장), 令尊(영존), 尊堂(존당), 椿堂(춘당), 椿丈(춘장)

살아 계신 자신의 아버지를 일컬을 때嚴親(엄친), 父親(부친), 家大人(가대인), 家嚴(가엄), 家親(가친), 家父(가부), 嚴君(엄군)

 

()

물오리는 갈매기와 함께 자기 현재의 분수를 잘 지키는 사람을 상징하는 새로 일컬어져 왔었음. 시경(詩經)대아(大雅) 부예(鳧鷖)

 

()

시체(詩軆)의 하나. 그 일을 서술하여 그 일을 바로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여섯 가지 체가 있으니, 곧 풍()ㆍ비()ㆍ부()ㆍ흥()ㆍ아()ㆍ송()이다. 시나 산문이 아닌 운문인 점에서는 사와 비슷하나 서술을 위주로 한다는 점에서 사와 구별되는데, 이소(離騷)와 풍부(風賦)같은 것은 부인지 사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부가(夫家)

남녀(男女)와 같은 뜻이다.

 

부가(浮家)

물 위에 뜬 집. 곧 배를 집으로 삼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배()안에서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부가대(不可帶)

허리를 맬 수 없다. 부드러운 연꽃 홑옷을 걸쳤으나 몸에 맞지 않아 허리를 맬 수 없다는 뜻이다.

 

부가상자행(附葭常自幸)

가부지친(葭莩之親)과 같은 말이다. 가부는 갈대의 줄기에 있는 엷은 막()으로, 아주 먼 친척을 비유한 말이다.

 

부가진(付家珍)

불서(佛書), “어리석은 아들이 어릴 적에 부모를 버리고 나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부모가 사람을 시켜 그 아들을 데려오려 하나 바로 제 집인 것을 말하면 도망할 것이므로 남의 집에 품팔이하는 것이라고 속여서 일을 시키고 밥을 먹이다가 점점 익숙하매 집안의 보물 있는 데를 알게 하고, 끝내 집안 보물을 전부 전하여 주었다.”는 비유가 있는데, 그것은 부처가 미혹(迷惑)을 지도하여 처음에는 소승경(小乘經)을 가르치고 반야경(般若經)을 가르치는 것은 보물 있는 데를 알리는 것이고, 법화경(法華經)를 가르치는 것은 집안 보물을 전부 전하여 주는 것을 비유하였다.

 

부간부담(附肝附膽)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함

 

부개(瓿蓋)

장독 뚜껑.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유흠(劉歆)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을 보고 왜 세상에서 알지도 못하는 글을 이토록 애써 지었을까. 나중에는 장독 뚜껑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했다.” 하였다. 대개 자기의 저술을 겸칭(謙稱)하는 말이다.

 

부개자(傅介子)

() 나라 소제(昭帝) 때 누란의 왕이 한 나라에 복종하지 않고 대완국(大宛國)으로 가는 한 나라의 사신을 자주 죽였는데, 부개자가 대완(大宛)에 사신으로 갔다가 누란왕(樓蘭王)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돌아와 의양후(義陽侯)에 봉해졌다. 한서(漢書)』 「부개자전(傅介子傳)

 

부견(膚見)

천박하거나 얕은 견해를 말한다. / 인용: 牧民心書序(정약용)

 

부견(苻堅)

전진(前秦)3대 임금. 이름은 문옥(文玉), 자는 영고(永固). 시호(諡號)는 세조(世祖). 저족(氐族) 출신. 2대 임금을 시해하고 즉위한 후 농경(農耕)을 장려하고 법제(法制)를 정비확립하는 등 내치(內治)에 힘쓴다. 376년 화북(華北; 황하 중하류 지방)을 평정하고 전진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음. 국력이 신장되자 천하 통일의 야망을 품고 383년 동진을 쳤으나 비수의 싸움에서 대패한다. 나라가 분열된 가운데 385년 스스로 목숨을 끊음.

 

부견편(符堅鞭)

부견(符堅)은 전진(前秦)의 임금. 대거(大擧)하여 동진(東晉)에 침구(侵寇)할 때에 큰 소리 쳐 말하기를, “나의 숱한 군사로 채찍만을 강에 던져도 족히 흐르는 강물을 끊으리라.” 하였다.

 

부고발계(婦姑勃磎)

장자(莊子)』 「외물(外物)방안에 공간이 없으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장소를 서로 다투어 반목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부곡(部曲)

사신을 수행해서 간 군사(軍士)를 말한다.

 

부공헌납(富公獻納)

부공은 송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부필(富弼), 부필이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헌() 자와 납() 자를 쓰는 일을 가지고 거란의 임금과 다툰 일을 말한다.

 

부과침리(浮瓜沈李)

여름철의 우아한 노닒을 이른 말이다. 위 문제(魏文帝)가 오질(吳質)에게 준 글에 단 오이를 맑은 샘에 띄우고, 붉은 오얏을 찬물에 담근다[浮甘瓜於淸泉 沈朱李於寒水].” 하였다.

 

부곽전(負郭田)

()을 등지고 있는 전지(田地). 전국시대(戰國時代) 때의 소진(蘇秦)은 집이 가난하여 고향을 떠나 육국(六國)의 왕을 유세(遊說)하다가 육국의 정승이 되었다. 고향에 다니러 와서 탄식하기를, “내가 부곽전(負郭田) 수경(數頃)만 있었더라면 어찌 육국 정승의 인()을 찰 필요가 있었겠느냐.” 하였다.

 

부광(扶光)

부상은 동쪽 바다의 해 돋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으로, 막 떠오르는 아침 해를 가리킨 말이다.

 

부괴(桴蕢)

흙을 쌓아서 만든 북. 부고(拊鼓)라고도 하며, 괴초(蒯草)를 묶어서 만든 괴부(蕢桴)라는 북채로 연주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부괵(俘聝)

포로, 또는 죽인 적()의 왼쪽 귀.

 

부구(浮丘)

고대의 선인(仙人) 부구공(浮丘公)을 말한다. 황제(黃帝) 때 사람이라고도 하고 주 영왕(周靈王) 때 사람이라고도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부구공(浮丘公)

주 영왕(周靈王) 때 선인(仙人). 일찍이 왕자 진(王子晉)과 함께 학을 타고 생황을 불며 숭산(嵩山)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태평광지(太平府志)

 

부구광성(浮丘廣成)

부구공과 광성자는 모두 황제(黃帝)때의 선인(仙人)이다.

 

부구씨(浮丘氏)

옛 선인(仙人)인데, 혹은 황제(黃帝) 때 사람이라 하고, 혹은 주 영왕(周靈王) 때 사람이라고도 하며, 혹은 한() 나라 초기의 부구백(浮丘伯)이라고도 한다.

 

부굴(富窟)

유사(遺事)왕원보(王元寶)는 도성(都城) 안의 큰 부호(富豪)로서 금은(金銀)으로 옥벽(屋壁)을 만들고 그 외부는 홍니(紅泥)로 발랐다. 또 집 안에 한 채의 예현당(禮賢堂)이 있는데, 침향목(沈香木)ㆍ단향목(檀香木)으로 마루를 만들고 무부(碔砆)로 지면(池面)을 깔고 금문석(錦文石)으로 주추를 만들었으며, 동선(銅線)으로 돈()을 꿰어 후원 꽃길(花徑)에 깔았으니, 이는 비가 와도 미끄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에 사방의 빈객(賓客)들이 마치 자기집 찾아들듯 했으므로 사람들이 왕가(王家)의 부굴이라 했다.” 하였다.

 

부귀김장(富貴羨金張)

() 선제(宣帝) 때의 고관이었던 김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인데 부귀한 가문이다.

 

부귀화(富貴花)

모란(牡丹)을 가리킨다. () 나라 주돈이(周敦頤)애련설(愛蓮說)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隱逸者), 모란은 꽃 중의 부귀자(富貴者), ()은 꽃 중의 군자자(君子者)이다.”라는 말이 있다.

 

부규비간(剖竅比干)

비간(比干)은 은() 나라 주왕(紂王)의 숙부인데 주왕의 황음무도함을 극간하자, 주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성인의 심장(心臟)에는 일곱 구멍이 있다더라[吾聞聖人心有七竅].” 하고서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보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부근(付根)

우리 나라의 풍속으로 관부(官府)에 설치하여 신에게 제사하는 사당으로 중종 128월에 사헌부(司憲府)가 각사(各司)에 공문을 보내어 불사르게 하였다.

 

부금(覆錦)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말이다. 연감유함(淵鑑類函)용현(用賢)위수(韋綬)가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을 적에, ()가 한림원에 거둥하자 비()도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위수가 잠이 들었기에 제는 비의 촉힐포(蜀襭袍)로 덮어주고 갔다.” 하였다.

 

부기(附驥)

()는 하루에 천리 길을 달릴 수 있는 좋은 말인데, 파리가 그 말꽁지에 붙어 있으면 그 파리도 천리를 갈 수 있다하여 위대한 인물에 붙어 있으면 그 사람도 잘 된다는 말로 쓰인다.

 

부기미(附驥尾)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안연이 학문을 독실하게 하긴 했지만, 공자라는 천리마 꼬리에 붙어서 치달렸기 때문에[附驥尾] 그 행실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에서 연유한 것이다.

 

부기행(附驥行)

파리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간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선배 혹은 뛰어난 인물과 함께 어울리는 자신에 대한 겸사이다.

 

부남난취(浮嵐暖翠)

송 나라 때 호구(湖口) 사람 이정신(李正臣)이 괴이한 돌을 쌓아 구봉(九峯)을 만들었는데, 소동파(蘇東坡)가 호중구화(壺中九華)라 이름 짓고 시를 읊었었다. 그 후에 이정신이 이 시를 가지고 황정견(黃庭堅)을 찾아갔더니, 이미 그 돌도 볼 수 없고 동파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황정견이 감탄한 나머지 그 시에 차운하여 어느 사람 밤중에 산에서 나가니 뜬 남기(嵐氣)와 따스한 취미(翠微)마저 텅 빈 듯하여라.” 하였다. 이는 모든 경물(景物)은 주인될 만한 사람이 있을 때 빛이 나고 그 사람이 없어지면 빛을 잃는다는 뜻이다.

 

부노피은영(負弩被恩榮)

고을 수령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였다는 뜻으로, 옛날에 귀빈(貴賓)이 고을을 지나갈 때에는 고을의 수령이 쇠뇌를 등에 지고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였다. () 나라 때 촉() 땅 사람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중랑장(中郞將)에 제수되어 촉 땅에 사신으로 가자, 촉 땅의 태수(太守) 이하가 모두 나와 영접하였는데, 현령(縣令)이 쇠뇌를 지고서 앞장서서 달려가 길을 열었다고 한다. 사기(史記)117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부당책(斧撞責)

송 태조(宋太祖)가 후원에서 참새를 잡으려는데 군신(群臣)들이 급한 일로 뵙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였다. 태조는 빨리 와서 보니 급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크게 노하여 힐문하니 그 사람은 새를 잡는 것보다는 급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태조는 더욱 노하여 도끼자루로 그를 쳐서 이 2개가 부러졌다. 비급(祕笈)

 

부덕사명(婦德四名)

부인의 심덕(心德)ㆍ부인의 언어(婦言)ㆍ부인의 자태(婦容)ㆍ부인의 일(婦功) 등 부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을 말한다. 예기(禮記)』 「혼의(昏義)

 

부도(符到)

저승사자가 찾아온다는 말로 죽음을 의미한다. / 인용: 梨花庵老僧行(최성대)

 

부동미(不同味)

먹을 것이 많아서 맛이 다른 것. 보통 사람과 다른 취미.

 

부동심(不動心)

마음이 어떤 일이나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동요되는 일이 없음.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부량가(浮梁賈)

()를 파는 장사꾼. 부량(浮梁)은 중국 강서성(江西省)의 차가 많이 나는 곳이다. 당서(唐書)』 「식화지(食貨志)

 

부령(腐令)

한 무제(漢武帝)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염을 사서 부형(腐刑 ; 宮刑)을 당한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그가 저술한 사기(史記)를 말하기도 한다.

 

부로행간로면유(父老行看露冕遊)

후한 때 곽하(郭賀)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으면서 대단히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서 그를 칭송하기까지 하였으므로, 현종(顯宗)이 순수(巡狩)차 그곳에 왔다가 그 사실을 듣고는 특별히 그에게 삼공복(三公服)과 면류관(冕旒冠)을 내리면서, 그로 하여금 부()를 순행할 때에 수레의 휘장을 다 걷어 그의 공복 입고 면류관 쓴 모습을 백성들이 보고 모두 영광스럽게 여기도록 하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二十六

 

부릉(涪陵)

파촉(巴蜀) 남쪽의 땅 이름이다.

 

부림(傅霖)

()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상()으로 명()하던 말이다. 세상을 건지고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라는 말이다. 서경(書經)』 「열명(說命)고종(高宗)이 이르기를 만약에 가뭄이 들거든 너(傅說)를 써서 장마비()를 내리게 하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 공주의 부군(夫君).

 

부묵자(副墨子)

문자(文字)를 이른다. 장자집해(莊子集解)에는, “宣云文字是翰墨爲之 然文字非道 不過傳道之助 故謂之副墨 又對初作之文字言 則後之文字 皆其孶生者 故曰副墨之子라 했다.

 

부미거위(扶微去危)

서경(書經),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다[人心惟危 道心惟微].”라는 말이 있는데, 위태로운 인욕[人欲 人心]을 버리고 미묘한 천리[天理 道心]를 붙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미금(付美錦)

지방관에 임명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대부 자피(子皮)가 윤하(尹何)를 어느 읍재(邑宰)로 삼으려 하자, 자산(子産)이 윤하의 부적합함을 지적하여 자피에게 말하기를 그대에게 좋은 비단이 있을 경우 사람을 시켜 그 비단으로 옷 짓는 일을 배우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좌전(左傳)襄公三十一年

 

부민가(阜民歌)

() 임금의 남풍시(南風詩)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많이 쌓을 수 있도다[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한 데서 온 말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변악해(辨樂解)

 

부반목(腐蟠木)

용렬한 자품을 말한다.

 

부배(浮杯)

산서(山西)의 한 고승(高僧)이 한 조그만 잔을 타고 하수(河水)를 건넜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배도(盃渡)라 불렀다. 고승전(高僧傳)11권에, “옛날에 배도(杯度)란 중이 있었는데, 그의 본래 이름은 알 수 없었고, 항상 나무로 만든 술잔(木杯)을 타고 물을 건넜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배도가 북방의 어느 집에 기숙하고 있다가 그 집에 불상(佛像)이 있는 것을 보고서 이를 훔쳐 달아났는데, 그 주인이 뒤쫓았으나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황하(黃河)의 맹진(孟津)에 이르렀을 때 배도가 목배를 타고 건너는데, 빠르기가 나는 것 같았다.” 하였다.

 

부백(浮白)

벌주(罰酒)를 마신 다음 잔을 들어 고하는 것을 말하는데, 직접 벌주를 칭하기도 한다.

 

부보(符寶)

부보랑(符寶郞)을 말하는데, 고려시대 왕부(王府)의 인신(印信)을 맡아보던 벼슬이다.

 

부복(賦鵩)

()은 올빼미를 말한다. () 나라 때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스승이 된 지 3년 만에 올빼미가 날아와서 가의의 곁에 앉았는데, 올빼미는 불길한 조짐의 새였기에 가의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슬퍼하면서 복조부(鵩鳥賦)를 지었다. 후대에는 문인(文人)이 불행한 일을 당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부복자(賦鵩者)

복조는 흉조(凶鳥)로 알려진 올빼미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있던 가의(賈誼)가 바른말을 자주 한 이유로 대신의 미움을 받아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되어 있을 때 올빼미가 집으로 날아 들어오자, 자기의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을 예측하고 슬퍼하다가 복조부를 지어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부봉(附鳳)

봉과 용()을 성철(聖哲) 또는 영주(英主)에 비유하여, 제자가 성철(聖哲)로 인하여 이름을 전하거나, 신하가 영주(英主)를 좇아 공업을 세움을, “용을 휘어잡아 따르고, 봉에 붙어 따른다[攀龍鱗 附鳳翼].” 한다.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

 

부부(敷敷)

넓게 이어져 있는 모양

 

부부(扶扶)

소아의 어린 모양

 

부부가(拊缶歌)

한 선제(漢宣帝) 때 평통후(平通侯) 양운(楊惲)이 죄에 걸려 폐서인(廢庶人)이 된 후로는, 죄를 받은 데에 불만을 품고 열심히 농사를 지어 산림을 일으키면서 자기 친구인 손회종(孫會宗)에게 답한 편지에 농사짓는 일이 무척이나 수고롭기에 세시 복랍(歲時伏臘)이 되면 양()을 삶아 안주로 삼고 두주(斗酒)를 마시어 스스로 위로하고, 술이 거나해지면 하늘을 우러러 질장구를 치고 노래를 들으며 즐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六十六

 

부부유별(夫婦有別)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일과 아내는 아내로서의 일의 분별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부부자자(父父子子)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하고 아들은 아들 노릇을 한다.

 

부불능득어자(父不能得於子)

아비로도 능히 자식을 제어하지 못한다.

 

부비엽(鳧飛葉)

후한 현종(後漢顯宗) 때에 왕교(王喬)가 섭현의 원(葉令)이 되었는데, 신술(神術)이 있어 매월 초하루에 대()에 나와 조회하였다. 임금이 그가 자주 오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어 엿보니 올 때에 쌍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왔다. 그물을 쳤으나 다만 한 쌍의 신을 얻었다 한다.

 

부사(父師)

태사(太師)와 같은 말로 주 무왕(周武王) 때 조선후(朝鮮侯)로 봉해졌던 은 태사(殷太師) 기자(箕子)를 말하기도 한다.

 

부상(扶桑)

동방 신목(神木) 이름이다. 산해경(山海經)해외동경(海外東徑)양곡(暘谷)에 부상이 있으니 열 해()가 멱감는 곳이다.” 하였고, 십주기(十洲記)에는 부상은 푸른 바다 가운데 있으니 키가 몇천 길, 천여 아름인데 해 뜨는 곳이다.”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해가 양곡(暘谷)에서 돋아 함지(咸池)에서 목욕하고 부상에서 솟는다[日出于暘谷 浴于咸池 拂于扶桑].” 하였다. / 인용: 李忠武公龜船歌(황현)

옛날 나라의 이름이다. 양서(梁書) 부상국전(扶桑國傳)부상은 대한국(大漢國) 동쪽 2만여 리에 있는데 그 지역이 중국의 동쪽에 있다. 그 땅에 부상목(扶桑木)이 많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위치와 방향을 살펴보면 일본과 맞먹기 때문에 후세에 일본의 대칭(代稱)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 유의어: 부상국(扶桑國)

 

부상대견(扶桑大繭)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28 조령안최백대도폭경삼장(趙令晏崔白大圖幅徑三丈)부상의 큰 누에고치 항아리와 비슷한데 천녀가 은하수에서 비단깁을 짰다네[扶桑大繭如甕盎 天女織絹雲漢上].”에서 나온 것이다.

 

부상역(扶桑域)

부상은 동쪽 해 돋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인데, 남사(南史)이맥전(夷貊傳)부상국(扶桑國)은 중국의 동쪽에 있다.” 하였다.

 

부생모육(父生母育)

아버지가 낳고 어머니가 기름

 

부생원(桴生員)

전체생원(傳遞生員). 할 일 없이 각 고을에 몰려다니며 수령들을 위협해서 민폐를 끼치는 양반들을 말한다. 중종때 생원 윤양우(尹湯佑) 등이 벗들과 결탁하고 떼를 지어 지방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자, 수령들이 그들에게 비방당할까 두려워하여 영접과 위로를 극진하게 하고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부생원이라고 한 것은 떼로 모여 횡행하기 때문에 부벌(桴筏)에 비유한 것이며, ‘전체생원이라고 한 것은 각 고을에서 타고 싣는 말과 딸린 종들을 전체하여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부생유은(浮生有垠)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은 가이 있고, 아는 것은 가이 없다[生也有涯 知也無涯].” 하였는데, 인생이 뿌리가 없이 뜬 것과 같다는 뜻이다.

 

부서(扶胥)

광동성(廣東省) 번우현(番禺縣)의 바닷가에 있는 지명인데, 한유(韓愈)남해신묘비문(南海神廟碑文)부서의 어귀 황목의 물굽이[扶胥之口 黃木之灣]’라는 말이 있으므로, 전하여 여기서는 남쪽 바다를 의미한다.

 

부서(腐鼠)

천한 물건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부서(賦芧)

저공(狙公)이 도토리를 주는 숫자를 가지고 원숭이를 속인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를 말한다. “정신과 마음을 통일하려고 수고를 하면서도 모든 것이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조삼(朝三)이라고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고 하는가. 옛날에 저공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내었다. 이에 다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명분이나 사실에 있어서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기뻐하고 성내는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이때문이다.”라는 말이 장자에 있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열자(列子)』 「황제(黃帝)

 

부서혁군(腐鼠嚇君)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의하면, 남방에 원추(鵷鶵)라는 새가 있어 남해(南海)를 출발하여 북해(北海)로 날아갈 적에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물이 나오는 샘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는데, 이때 소리개는 썩은 쥐를 물고 있으면서 마침 그 위를 날아가는 원추를 보고는 제 썩은 쥐를 빼앗길까봐 꿱 하고 으르대었다는 고사가 있다.

 

부석(鳧舃)

오리의 신발로 지방 수령을 고상하게 부르는 칭호이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왕교(王喬), “왕교는 하동(河東)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 섭령(葉令)이 되었다. 왕교는 신술(神術)이 있어서 매달 삭망(朔望)에 대()에 나와 조회하였다. 황제는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였다. 태사가 엿본 뒤에 왕교가 올 때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상방(尙方)에 명하여 자세히 살펴보게 하니 전에 상서원(尙書院)의 관속들에게 하사한 신발이었다.” 하였다.

지방관원의 행차를 이른 것. 후한(後漢)의 왕교(王喬)가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매월 초하루 보름이면 반드시 조정에 와 조회를 하고 갔는데 뒤따라 온 거기(車騎)도 없었다. 그를 이상히 여긴 황제는 태사(太史)에게 밀령을 내려 자세히 지켜보게 하였던 바, 그가 올 때쯤 해서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방에서 날아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오리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그물을 던져 잡았더니 그물속에는 오직 신발 한 짝이 있더라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

 

부석임(傅錫任)

옥수(玉樹)로 가득 찬 숲이라 함

 

부설(負絏)

말고삐를 잡는다는 뜻으로, 임금을 모시고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좌전(左傳)僖公 二十四

 

부설기기미(傅說騎箕尾)

재상의 죽음을 말한다. () 나라 무정(武丁)의 현상(賢相) 부열(傅說)이 죽어서 기미성(箕尾星) 위에 올라탔다는 고사에서 연유한 것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부세(附勢)

유자후가 처음에 왕비(王伾)와 왕숙문(王叔文)의 세력에 붙었다가 그들이 패하자 유자후가 귀양간 것을 말한다.

 

부소(扶疏)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갈라져 번잡한 모습을 말한다. / 인용: 辭辨(이식)

 

부소(膚訴)

남을 참소하는 형용사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에, “침윤(浸潤)의 참소와 부수(膚受)의 하소연이 행하지 아니하면 밝다()할 수 있느니라……하였다.

 

부소(扶蘇)

부여(扶餘)에 있었던 백제(百濟)의 옛 도성(都城)이다.

진시황(秦始皇)의 장자(長子)로 성품이 인자했으나, 시황의 노여움을 사, 북쪽으로 보내어 장군 몽염(蒙恬)의 군사를 감시하게 되었는데, 뒤에 이사(李斯)조고(趙高)에 의하여 거짓 조칙(詔勅)으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차자인 호해(胡亥)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이세(二世)였는데, 이사ㆍ조고 등의 폭정(暴政)으로 말미암아 진 나라는 곧 멸망하고 말았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부소산(扶蘇山)

개성에 있는 산이다.

부여현의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 이름이다.

임천현의 아문이 있던 산 이름으로, 북쪽 절벽은 백제(百濟)가 나당 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할 때 삼천 궁녀가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落花巖)으로 유명하고, 남쪽에는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 등 세 충신의 위패를 모신 삼충사(三忠詞)가 있다.

 

부송영(鳧送影)

후한(後漢)의 왕교(王喬)가 섭() 땅의 수령이 되었는데,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두 마리의 물오리를 타고 왔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上 王喬

 

부수(斧繡)

예전에 어사(御史)는 주로 탄핵하는 것을 담당하였으니, 지금의 감찰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는 임금이 수놓은 옷을 하사하고 관청에 나올 때에는 앞에 도끼를 들려가지고 감으로 부수(斧繡)라 한 것이다.

 

부수지소(膚受之愬)

논어(論語)』 「안연(顔淵), “젖어드는 참소와 살에 닿는 참소[浸潤之譖 膚受之愬].”란 말이 있다.

 

부승구지초(負乘寇之招)

주역(周易)』 「해괘(解卦)육삼효사(六三爻辭)짐을 지고 또 수레를 타면 도둑이 오게 된다[負且乘 致寇至].” 한 데서 온 말인데, 짐을 지는 것은 소인의 일이고 수레를 타는 것은 군자의 일이므로, 소인이 분에 넘치게 수레를 타면 남의 질시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부승어(府丞魚)

관리의 청렴함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 때 양속(羊續)이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있으면서 매우 검소한 생활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는데, 한 번은 부승(府丞)이 생선을 갖다 바치므로, 양속이 이를 받아 뜰에 걸어놓았다가, 뒤에 부승이 또 생선을 바치자, 그때는 이전에 받은 생선을 가져다가 부승에게 보이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三十一

 

부시(罘罳)

궁문(宮門) 밖에 있는 담장에 낸 그물 친 창()을 말한다.

 

부식(賦式)

나라의 쇠미(衰微)함을 탄식한 시로, 시경(詩經)패풍(邶風)식미(式微)을 가리킨다.

 

부신상자채(負薪常自採)

두보(杜甫)의 시에, “자신이 나무를 지고 황정(黃精)을 캔다.”는 말이 있다. 황정은 약초 이른다.

 

부신채신(負薪採薪)

땔나무를 지고 땔나무를 캐다라는 뜻으로, 모두 자기의 병()을 겸손하게 칭하는 말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유의어: 채신지우(采薪之憂)

 

부암(傅岩)

고종(高宗)의 현상(賢相) 부열(傅說)이 숨어 살던 곳

 

부암로(傅巖老)

옛날에는 조미료로 소금과 매실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국정을 다스리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부암의 늙은이는 부열(傅說)을 말한다. 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에 임명하면서 내가 만약 술을 만들거든 그대가 누룩의 역할을 해 주고 국을 끓이거든 그대가 소금과 매실의 역할을 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서경(書經)』 「열명(說命)

 

부앙불참(俯仰不慚)

맹자(孟子)』 「진심(盡心)위를 쳐다봄에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를 굽어봄에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다[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는 말이 나온다.

 

부양(斧壤)

강원도 평강(平康)의 고호이다.

 

부여(夫如)

김화(金化)의 옛 이른다.

 

부열(傅說)

고종(殷高宗) 때의 현상(賢相). 그는 공사장 일꾼에서 재상으로 등용되어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서경(書經)열명(說命)은 바로 고종이 부열에게 명령한 것을 기록한 내용인데, 여기에 만일 크게 가물거든 네가 장마비가 되어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 하여, 그의 교훈을 바란 말이 있다.

 

부열기기(傅說騎箕)

부열은 은() 나라 고종(高宗)이 꿈을 꾸고서 공사장에서 얻어 재상으로 발탁한 인물인데,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부열이 도를 얻어 …… 죽은 뒤에 기미성에 올라탔다[傅說得之 …… 騎箕尾]”는 구절이 있다.

 

부열성(傅說星)

() 나라 어진 재상 부열(傅說)이 죽어서 하늘에 별이 되었다[傅說得之, 以相武丁, 奄有天下, 乘東維·騎箕尾而比於列星].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부열임(傅說霖)

부열은 은 고종(殷高宗)인 무정(戊丁)의 현상(賢相)인데 고종은 그에게 만약 크게 가물면 네가 장마비가 되어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 하였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서경(書經)』 「열명(說命)

 

부열조갱(傅說調羹)

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명하는 말에 단술을 만들면 네가 누룩이 되고 국을 조화하면 네가 염매(鹽梅)가 되어 달라.” 하였다. 서경(書經)』 「열명(說命)

 

부염기한(附炎棄寒)

더우면 붙고 차가우면 버림. , 권세가ㆍ재력가를 붙쫓다가 그들이 쇠퇴하면 떨어져 나간다는 뜻으로, 인정의 부박함을 개탄하여 이르는 말

 

부염추열(附炎趨熱)

막강한 권세에 빌붙어 아부하는 것을 말한다.

 

부예(鳧鷖)

시경(詩經)대아(大雅)의 편명인데, 이 시는 바로 태평한 임금이 능히 왕업(王業)을 잘 지킴으로써 조상의 영혼들이 그것을 안락하게 여기는 뜻을 노래한 것이다.

 

부옥(蔀屋)

가난한 오막살이 다북대로 만든 집이다. 서민을 말한다.

 

부옥봉(斧屋封)

예기(禮記)에 장사지낼 때에 무덤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봉분(封墳)을 당()과 같이 하는 이를 보았고, 하옥(夏屋)을 덮은 것같이 하는 이를 보았으며, 도끼의 형상과 같이 하는 것도 보았다.” 하였다. 부옥봉(斧屋封)은 무덤을 말한 것이다.

 

부옥홀봉경(斧屋忽封扃)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부옥은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나오는 도끼 모양의 봉분(封墳)으로, 묘소의 별칭이다.

 

부온(富媼)

지신(地神)을 말한다.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후토(后土)의 부온이 삼광(三光)을 밝힌다.” 했는데, 그 주에 ()은 노모(老母)를 칭하는 말인데, ()이 모()가 되므로 온이라 한다.” 하였다.

 

부옹(涪翁)

() 나라 때의 문장가인 황정견(黃庭堅)의 호이다. 황정견의 차운중옥수선화(次韻中玉水仙花)’ 시에는 진흙 속에서도 흰 연꽃을 피울 줄 알고, 더러운 땅에서도 황옥화를 피우는구려[淤泥解作白蓮藕 糞壤能開黃玉花].”하였다.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卷十五

 

부옹시(涪翁詩)

황정견(黃庭堅)의 시. 부옹(涪翁)은 황정견의 호이다.

 

부요(扶搖)

붕새()가 북명(北冥)에서 남명(南冥)으로 옮아갈 제 회오리바람을 치고 9만리로 올라갔다 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부요소대붕(扶搖笑大鵬)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3천 리이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나 올라가 6개월을 가서야 쉰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부용(芙蓉)

연꽃[]의 이칭(異稱)이다.

 

부용검(芙蓉劍)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지녔다는 보검 이름이다.

 

부용막(芙蓉幕)

연막(蓮幕)과 같은 말로, 장수의 막부(幕府)를 말한다. 남제(南齊)의 왕검(王儉)이 고제(高帝) 때 위장군(衛將軍)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의 막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마치 붉은 연꽃과 푸른물이 서로 어울려 빛나는 것 같다는 뜻에서 연꽃 못에 들어갔다고 말하였다. 연화막(蓮花幕)이라고도 한다.

 

부용막부(芙蓉幕府)

연막(蓮幕)이라고도 한다. 남북조(南北朝) 때에 유경행(庾景行)이 왕검(王儉)의 부중(府中)에서 장사(長史)가 되었는데, 소면(蕭緬)이 왕검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귀부(貴府)의 속료(屬僚)로 뽑히기는 참으로 어려운데, 경행(景行)은 푸른 물에 떠서 부용(芙蓉)에 의탁한 것과 같다.” 하였다.

 

부운(浮雲)

논어(論語)』 「술이(述而)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부귀를 누리는 것은 나에겐 마치 뜬구름(浮雲)처럼 보이기만 한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공자(孔子)의 말이 실려 있다.

 

부운한(賦雲漢)

시전(詩牋)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에 가물어서 비를 빌던 것을 노래한 시이다.

 

부원(浮源)

시원하다. 서늘한다.

 

부원손숙오(不願孫叔敖)

고관대작을 지내고도 집안이 너무 청빈함을 말한다. 춘추(春秋) 시대 초() 나라 재상 손숙오(孫叔敖)가 장왕(莊王)을 도와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장왕이 결국 패업(霸業)을 달성하게 되었는데, 손숙오는 천성이 청렴결백했으므로 그가 죽자 그의 처자(妻子)는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에 당시 해학의 명수였던 초 나라 악공인 우맹(優孟)이 손숙오 차림을 하고 장왕을 찾아가 손숙오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하자, 장왕은 깜짝 놀라 그를 다시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다. 우맹은 사양하면서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그 노래 끝구절에, “초 나라 재상 손숙오는 죽도록까지 청렴했으나 지금 그의 처자식은 가난하고 곤궁하여 땔나무 팔아 끼니 메우니 그 재상 해서 무엇하리[楚相孫叔敖持廉至死, 方今妻子窮困負薪而食, 不足爲也].” 하였다. 사기(史記)』 「골계열전(滑稽列傳)

 

부월(鈇鉞)

형벌에 쓰는 작두와 도끼로, 역사서에서 포폄(褒貶)을 가해 기리고 내치는 것을 말한다.

 

부월(斧鉞)

도끼. 곧 생살권을 가진 장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부월(鈇鉞)

작은 도끼와 큰 도끼인데 형벌의 기구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제후는 천자가 궁시(弓矢)를 하사해야 정벌할 수 있고 부월을 하사해야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였다.

 

부위부강(夫爲婦綱)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되어야 한다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되어야 한다

 

부유(鳧臾)

부여(扶餘)를 부유로 표기한 것인데, 여기서는 백제(百濟) 왕의 성씨(姓氏)가 부여이므로 일컫는 말이다.

 

부유대분(蜉蝣戴盆)

하루살이가 동이를 이다.

 

부을(鳧乙)

물오리와 제비. 남제서(南齊書)』 「고환전(顧歡傳)옛적에 기러기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데 아득하여 분별하기 어려운 까닭으로, () 나라 사람은 물오리라 하고, () 나라 사람은 제비라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초 나라ㆍ월 나라 사람의 구분이 있어도 기러기는 언제나 한 가지다.” 하였다.

 

부을(鳧乙)

부새와 을새를 말하는데, 이 두 새는 서로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새이다. 장융답주옹서(張融答周顒書)도교와 불교는 서로 현격하게 다른 것으로, 하나가 부새라면 하나는 을새이다.” 하였다.

 

부음(抔飮)

손으로 물을 받아서 마시는 것을 이른다. () 예운(禮運)땅을 파서 웅덩이를 만들고 손으로 떠서 마신다[汙尊而抔飮]”란 대문이 있다.

 

부익(附翼)

후한서(後漢書)』 「광무기(光武紀)지금 여러 사람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대왕을 따르는 것은 용의 비늘을 더위잡고 봉의 날개에 붙어 그 뜻한 바를 이루려 함입니다.” 하였다.

 

부인기원야(不忍棄原野)

전자방(田子方)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위 문후(魏文侯)의 스승이었던 현인(賢人)이다. 일찍이 들판에 버려지려고 하는 늙은 말을 보고는 말하기를 힘 있을 때 마구 부려먹고는 늙고 병들자 내팽개치는 것은 인자(仁者)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속백(束帛)을 주고 데려왔는데, 이에 궁사(窮士)들이 심복하며 귀의하였다고 한다. 연감유함(淵鑑類函)433 마부(馬部)

 

부자(鳧茈)

오우(烏芋), 즉 올방개로 오리가 잘 캐먹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

가정윤리의 실천덕목인 오륜(五倫)의 하나. 아버지와 아들은 친함이 있다. , 아버지와 아들의 도리는 친애함에 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여 그 사이에 진정한 친애의 정이 이루어짐

 

부자장(夫子墻)

자공(子貢)이 자신의 담장 높이는 어깨 높이이고, 부자의 담장은 몇 길이나 된다고 하였다. 논어(論語)』 「자장(子張)

 

부자필변(夫子必變)

논어(論語)』 「향당(鄕黨)빠른 우레 맹렬한 바람이 일면 공자(孔子)가 반드시 낯빛을 변하였다[迅雷風烈, 必變].” 하였다.

 

부장(否臧)

()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말한다. / 인용: 檄黃巢書(최치원), 錦南野人(정도전)

 

부장(斧斨)

목 베는 도끼

 

부장사(釜場師)

가마 장사. 황형(黃衡)이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있을 때에 군졸(軍卒)에게 속바치기를 독촉하니, 가난한 백성은 제 집의 가마솥까지 팔아서 바쳐야 했으므로, 황형을 비꼬아 별명 붙인 말이다.

 

부재역사(不材櫟社)

늑사(櫟社)의 큰 나무는 재목이 못되는 까닭으로, 수명(壽命)을 오래 보전한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부재자전(不材者全)

나무가 재목감이 되지 못하여 누가 베어가지 않음으로써 제 명대로 살 수 있다는 뜻으로 즉 사람도 무능한 사람이 화를 면할 수 있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산목(山木)

 

부재저(不材樗)

고약한 냄새가 나고 옹이가 많아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에 일찍 해침을 당하지 않고 오래도록 수명을 누리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나무 이름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인간세(人間世)/ 인용: 櫟翁稗說前序(이제현)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버지의 것이 아들에게 전해짐.

 

부전조인(跗傳祖印)

전등록(傳燈錄)()이 사라진 뒤에 제1조인 가섭(迦葉)이 쌍림(雙林)의 숲 사이에 가서 부르짖어 울기를 마지아니하니 불은 금관(金棺) 안에서 두 발을 나타내 보였다.” 하였다.

 

부절(符節)

고대(古代)에 군수(郡守)에게 동()으로 만든 부()를 주었는데, 두 쪽으로 쪼개어 오른 쪽은 임금이 지니고, 왼쪽 것은 군수에게 주었다.

 

부정(不庭)

왕실(王室)에 내조(來朝)하지 않는 나라를 말한다. 시경(詩經)대아(大雅) 한혁(韓奕)내조하지 않는 나라를 바로잡아 너의 임금을 보좌하라[榦不庭方 以佐戎辟].” 한 데서 온 말이다.

 

부정섭(不庭讋)

내조(來朝)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 말로, 즉 한() 나라가 당시 내조하지 않던 대완왕(大宛王)을 죽이고 그곳에서 천마를 얻어 왔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부족치치하간(不足置齒牙間)

이빨 사이에 두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로, 입에 올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부주(跗注)

융복(戎服). 좌전(左傳)성공(成公) 16년에 有韎韋之跗注라 했고 그 주()바지와 같은데 발등에 닿는다.” 하였음. / 인용: 哀魚將軍(이희풍)

 

부주(不周)

곤륜산(崑崙山) 서북쪽에 있다고 하는 산 이름이다. 옛날에 공공(共工)이 전욱(顓頊)과 더불어 임금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화가 나서 부주산을 들이받자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끊어졌다고 한다.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 열자(列子)』 「탕문(湯問)

 

부주(不住)

부주(不住)의 법은 머물러 정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부주(涪州)

조정으로부터 쫓겨난 처지를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정이(程顥)가 당쟁(黨爭)에 의하여 부주(涪州)로 유배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송원학안(宋元學案)卷十五 또는 송 나라 황정견(黃庭堅)이 일찍이 부주로 유배되어 부옹(涪翁)이라 자호한 사실이 있기도 하다.

 

부주산(不周山)

곤륜산(崑崙山) 서북쪽에 있다고 하는 산 이름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공공씨(共工氏) 전욱(顓頊)이 서로 싸워서 부주산에 부딪쳐서 천주(天柱)가 꺾어졌다[共工氏與顓頊爭爲帝, 怒而觸不周之山, 折天柱, 絶地維].” 하였다.

 

부주소릉구(鄜州少陵句)

부주는 서안(西安)의 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두보(杜甫)의 처자식이 있던 곳이다. 두보의 시 월야(月夜), “오늘 밤 부주의 하늘에 뜬 달, 규중에서 단지 혼자 바라다보리[今夜鄜州月 閨中只獨看].”하였다.

 

부죽(符竹)

군수(郡守)에게 주는 동호부(銅虎符)와 죽사부(竹使符)를 말한다.

 

부죽빈(剖竹頻)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가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 나라 때 지방 장관을 내보낼 적에는 죽부(竹符)를 나눠주어 신표(信標)를 삼게 하였다.

 

부중감포사(賦重甘捕蛇)

독사에게 물리면서도 뱀을 잡아 바치는 것이 농사지어 세금 바치는 것보다는 덜 고통스럽다는 말이다. 유종원(柳宗元), 포사자설(捕蛇者說)

 

부중생어(釜中生魚)

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오래 계속할 수 없는 일을 말한다.

솥에 너무 오래 밥을 짓지 못해 고기가 생겼다는 뜻으로, 익주채련곡(益州采蓮曲)솥엔 밥을 짓지 않은 지 이미 오래예요[釜中生魚亦已久].”라는 구절이 있다.

 

부중어(釜中魚)

생활이 몹시 빈곤함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 때 일찍이 내무장(萊蕪長)에 제수되었던 범염(范冉)이 워낙 빈핍하여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까지 하였으므로, 향리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시루 속에 먼지가 쌓인 범사운(范史雲)이요, 가마솥 안에 고기가 사는 범내무로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독행전(獨行傳)

 

부중지어(釜中之魚)

삶아질 것도 모르고 솥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눈앞에 닥칠 위험도 모른 채 쾌락에 빠져 있다.

 

부지소종(不知所從)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음. 언제 될지 그 기한을 알지 못함

 

부진(苻秦)

() 나라 때 부홍(苻洪)이 관중(關中)을 점거하여 세운 나라이다. / 인용: 韓狗篇(이건창)

 

부차승(負且乘)

재주에 걸맞지 않은 직위에 있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해괘(解卦), “등에 지고서 또 수레를 탔으니 도적을 오게 한다[負且乘 致寇至].”하였다.

 

부착적(斧鑿迹)

도끼와 끌의 자국을 말한다. 공인(工人)이 목석(木石)을 다룰 때는 도끼와 끌을 사용하여 반드시 흔적이 있으므로, 시문(詩文) 따위에도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오히려 모순을 남기는 비유로 쓰인다. 그래서 시문 따위가 아주 완숙한 것을 들어 부착의 흔적이 없다고도 한다.

 

부창부수(夫唱婦隨)

남편이 창을 하면 아내도 따라 하는 것이 부부 화합의 도리라는 것. 그 남편에 그 부인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부초(夫椒)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에 있는 산 이름인데,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여기에서 오왕 부차(吳王夫差)와 싸워 그를 잡아 죽이고 오 나라를 멸망시켰다.

 

부춘산(富春山)

중국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 서쪽에 있는 산으로, 동한(東漢) 때 엄광(嚴光)이 이곳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양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고 낚시질을 하였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83 일민열전(逸民列傳)嚴光

 

부친(父親)

살아 계신 자신의 아버지를 말한다.

 

부츤(扶櫬)

널을 붙들다라는 뜻임[猶扶柩] / 인용: 梁四龍傳(이기발)

 

부판(蝜蝂)

아주 작은 일종의 벌레인데, 이 벌레는 몸은 작으나 물건을 잘 짊어지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만두지 않는다고 한다.

 

부판충(負版虫)

벌레 이른다. 항상 자기 힘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지다가 엎어진다 한다.

 

부평(富平)

부귀영화를 극했던 한 나라의 부평후(富平侯) 장안세(張安世)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라의 성제(成帝)가 사복(私服)을 입고 다니면서 스스로 부평후(富平侯)의 가인(家人)이라 일컬었다.

 

부평초(浮萍草)

뿌리도 없이 물 위를 떠다니는 하찮은 수초(水草)이다.

 

부하고단학하장(鳧何苦短鶴何長)

장자(莊子)』 「변무(騈拇),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의 다리는 짧은데, 긴 것을 끊어도 안 되고 짧은 것을 이어도 안 된다[鳧脛雖短, 續之則憂 ; 鶴脛雖長, 斷之則悲].” 하였다.

 

부한(富韓)

() 나라의 명재상인 부필(富弼)과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부함(傅咸)

진 혜제(晉惠帝) 때 사람. 글을 잘 지었음.

 

부해(桴海)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가 행하여지지 않는지라, 떼를 타고 바다에 뜨려 하노니 나를 쫓을 자는 그 유([子路])인저.” 하였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부해(浮海)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탄식한 공자(孔子)의 말이 실려 있다.

 

부해고인(浮海高人)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노중련(魯仲連)이 뜻이 고고하여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남을 위해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길 좋아하였는데, () 나라 장수가 요성(聊城)을 점거하여 제 나라가 1년 동안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노중련이 연 나라 장수에게 편지를 보내 회유함으로써 함락되었다. 제 나라 왕이 그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자, 그는 내가 부귀를 누리며 남에게 굽혀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빈천하더라도 세상을 우습게 보고 자유롭게 살겠다[吾與富貴而詘於人, 寧貧賤而輕世肆志焉].” 하고, 동해로 도망가 숨어버렸다 한다. 사기(史記)卷八十三 노중련전(魯仲連傳)

 

부해상니성(浮海傷尼聖)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의하면,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가 행해지지 않으니, 내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겠다.”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부해심(浮海心)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고 싶은데, 나를 따르는 자는 아마 유()일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부해지탄(浮海之歎)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내가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려 한다.”고 한 공자(孔子)의 이른바 부해지탄(浮海之歎)이 나온다.

 

부혁(傅奕)

당 고조(唐高祖) 때 태사령(太史令)으로서 상소하여 불교를 극력 반대한 사람.

 

부현(傅玄)

() 나라 학자로 자는 휴혁(休奕). 그는 박학다식하고 글을 잘했으며, 음률(音律)에도 밝아, () 대의 종묘(宗廟)와 조정의 악장(樂章)이 거의 그의 손에서 나왔다 한다. 저서에는 부자(傅子)가 있다.

 

부형청죄(負荊請罪)

()은 가시나무.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때려 주기를 바란다. , 사죄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화(浮華)

겉보기만 화려하고 실속이 없음.

 

부화(浮花)

열매를 맺지 못하는 쓸데없는 꽃이란 뜻이다.

흐르는 물 위에 뜬 꽃을 말한다.

 

부화뇌동(附和雷同)

천둥이 치면 모든 사물이 덩달아 같이 울림. 자기 주관이 없이 경솔히 남의 의견을 쉽게 따르고, 무턱대고 남의 행동을 따라 한다.

 

부회(傅會)

어거지로 끌어대어 이치에 맞게 하는 것.

 

부휴(浮休)

잠시 왔다 가는 무상한 인생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각의(刻意)삶이란 물 위에 떠 있는 거품과 같고, 죽음이란 피곤한 몸을 휴식하는 것과 같다[其生若浮 其死若休].”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부휴동관착춘야(復携童冠着春夜)

공자(孔子)의 제자 증점(曾點)이 춘복(春服)를 입고 관자(冠者) 5, 6명과 동자(童子) 6, 7명을 데리고 놀러 가겠다던 고사(故事)를 인용하였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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