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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어휘사전 - 158. 석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58. 석

건방진방랑자 2020. 4. 19.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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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

추석(酋腊))으로 잘 익은 독주(毒酒).

 

석가(石家)

만석군(萬石君)의 집안을 말한다. () 나라 석분(石奮)과 그의 네 아들이 모두 2천 석()의 관직에 이르렀으므로 경제(景帝)가 석분에게 내린 호()인데, “만석군의 질행(質行)은 제()ㆍ노()의 제유(諸儒)들도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기(史記)卷一百三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석가만석(石家萬石)

석가는 한() 나라 때의 명신(名臣) 석분(石奮)을 이른다. 그는 아들 건()ㆍ갑()ㆍ을()ㆍ경() 4형제와 함께 모두 이천석(二千石)의 관직에 올랐으므로 만석군(萬石君)이라 일컬어졌는데, 그의 부자(父子)간에는 특히 효근(孝謹)으로 명망이 높았었다. 사기(史記)卷一百三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석가산(石假山)

바로 돌을 산의 모양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석가측의향(石家厠衣香)

()의 석건(石建)은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았으나 5일 간격으로 돌아오는 휴가 때마다 아버지 분()의 한삼(汗衫)을 몰래 가져다가 손수 깨끗이 세탁하였다고 한다.

 

석간주(石間硃)

붉은 산화철(酸化鐵)을 많이 포함한 빛이 붉은 흙.

 

석간토혈(石間土穴)

바위사이에 구멍을 팔만한 자리.

 

석갈(釋褐)

천자(賤者)의 의복을 벗고 관복을 입는다는 말로 처음 벼슬살이를 나가는 것을 말한다. 중국의 옛 제도에 전시(殿試)를 치른 뒤에 새 진사(進士)는 태학(太學)에 나아가 석갈(釋褐)을 하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고 잠화(簪花)를 꽂고 술을 마시고 나오는 것으로 되었다. / 인용: 夜登練光亭(김창흡), 題自庵詩帖(윤근수)

 

석갑천년자기함(石匣千年紫氣含)

경륜을 펴 보지 못하는 불우한 신세를 비유한 것이다.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보검이 땅속에 묻혀 두우(斗牛) 간에 자색 기운을 내뿜고 있다가 진() 나라 뇌환(雷煥)에 의해 발굴되었던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유성처럼 빠른 화살 허리춤에 꽂아 넣고, 연꽃무늬 칼빛 번쩍 돌궤 속에서 꺼냈어라[流星白羽腰間挿 劍花秋蓮光出匣].”라는 구절이 있다. 이태백집(李太白集)2 호무인(胡無人)

 

석거(石渠)

돌로 둑을 쌓은 수로(水路)로 어구(御溝)와 같다.

() 나라 때에 소하(蕭何)가 지은 각()인데, 유향(劉向)이 일찍이 여기에서 오경(五經)을 강론하였다. 한서(漢書)劉向傳

 

석거각(石渠閣)

석거각(石渠閣)은 한() 나라의 비서(秘書)를 쌓아둔 집이다. 석거각(石渠閣).

창덕궁 안에 있던 규장각을 가리킨다.

 

석경(石逕)

돌 길.

 

석경(石經)

돌에 새긴 경서(經書).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채옹이 조명(詔命)을 받아 고문(古文)ㆍ전()ㆍ예(羿)3()로 오경(五經)을 돌에 새겨 태학(太學) 문밖에 세웠음.

 

석경(石鯨)

한무제(漢武帝)가 곤명(昆明)을 치기 위하여 수전(水戰)을 연습시키려고 장안(長安)에 곤명지란 큰 못을 파고 거기에 돌고래(石鯨)를 만들어 두었는데, 그 뒤에 한 나라가 망한 뒤에 곤명지는 황폐하고 돌고래만 남아 있다.

 

석계룡(石季龍)

후조(後趙)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로서 이름은 호(), 계룡은 그의 자이다. 후조 석늑(石勒)의 조카로, 늑이 죽자 늑의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후조의 황제가 되었다.

 

석고(石鼓)

() 나라 선왕(宣王) 때 사주(史籒)가 선왕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서 북처럼 생긴 돌에 새겼다고 하는데, 이 돌이 북경 부자묘(夫子廟)의 대성문(大成門) 안에 있다.

 

석고가(石皷歌)

석고(石鼓)에 대한 노래. 석고는 중국 고대의 석비(石碑). 그에 대해 한유(韓愈)석고가(石鼓歌), 소식(蘇軾)후석고가(後石鼓歌)를 지었는데 두 석고가는 고문진보(古文眞寶)전집에도 보인다.

 

석고문(石鼓文)

주 선왕(周宣王)이 기양(岐陽)으로 사냥 나갔을 때 그의 업적을 돌을 다듬어 북(石鼓) 열 개를 만들어서 공을 기록하였는데, 그 자체(字體)는 사주(史籒)의 대전(大篆)이었다 한다. 처음에는 기양현(岐陽縣)에 세워졌는데, () 나라 사람 정여경(鄭餘慶)이 봉상현(鳳翔縣)의 공자묘(孔子廟)로 옮겼다 한다.

 

석곡(石谷)

조박(趙璞)의 호이다.

 

석과(碩果)

큰 열매로, 큰 이익이나 공적을 말한다. 주역(周易)박괘(剝卦) 상구(上九), “큰 열매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하였다.

 

석과부지(碩果扶持)

석과는 큰 과일, 곧 군자(君子)의 뜻이다. 역경(易經)산지박괘(山地剝卦)상구(上九)는 석과가 먹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여론의 추대를 받는다.” 하였는데, 군자를 보존하여 여론의 추대하는 바가 되게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석관(石關)

한대(漢代)의 궁관(宮觀)이른다. 석궐관(石闕觀).

 

석교(石橋)

삼제략기(三齊略記)라는 책에 진시황(秦始皇)이 돌다리를 놓아 바다를 건너가서 해가 뜨는 곳을 살펴보려 하였다. 그러자 신인(神人)이 바위를 몰아 바다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속도가 느리면 문득 채찍질을 가하였으므로, 바위마다 모두 피를 흘린 흔적을 지니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석교진제단(石橋秦帝斷)

진시황(秦始皇)이 해상(海上)에다 석교(石橋)를 만들 적에 해신(海神)이 기둥을 세워주었으므로, 진 시황이 그를 고맙게 여겨 해신을 만나보려고 하자, 해신이 말하기를 내 형상이 추하니 내 형상을 그리지 않기로 약속만 한다면 만나드리겠소.” 하므로, 진 시황이 석교를 타고 30리를 들어가 해신과 만났는데, 진 시황의 좌우에서 몰래 해신의 다리를 그렸다. 그러자 해신이 크게 성내어 황제가 나와의 약속을 저버렸으니 빨리 가시오.” 하므로, 시황이 곧장 말을 타고 나오는데, 말 뒷다리가 석교에서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석교가 무너졌다고 한 고사이다.

 

석권(席卷)

자리를 마는 것처럼 한쪽으로부터 모조리 감아 취하는 것으로, 완전히 자기의 세력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것. 토지 등을 공략하여 쉽게 차지한다.

 

석궐(石闕)

너무 슬퍼 말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고악부(古樂府)입안에 석궐이 생기니 빗돌을 문 듯 말할 수 없네[石闕生口中 銜碑不得語]” 한 데서 나온 것이다.

 

석규(石閨)

바위 틈에다 규방(閨房)을 만든 것으로 선녀(仙女)의 거실이다.

 

석규(析圭)

한서 사마상여전(漢書 司馬相如傳)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에 부절을 쪼개어 작위를 내려주고 옥그릇을 갈라 벼슬을 내려주는 것이 있었다.[故有剖符之封, 析圭而爵]”라고 하였다. ‘은 앞가리마를 타는 것이고 는 옥그릇이다. 벼슬자리를 주는 것을 가리킨다.

 

석기린(石麒麐)

자품이 뛰어난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말이다. 진서(陳書)』 「서리전(徐摛傳)서릉이 어렸을 때 보지상인(寶誌上人)이란 도사가 그를 보고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이 아이는 천상의 석기린이다.’ 했다.” 하였다.

 

석녀(石女)

유마힐경(維摩詰經)의 번역된 이른다. 통속편(通俗編)』 「석녀(石女)

 

석녀(石女)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계집. () 나라 현장(玄奘) 이후에는 허녀(虛女)라 번역했다.

 

석노(石砮)

돌화살촉. 고대에 우리나라가 중국에 공물로 바쳤음.

 

석노(釋老)

석가와 노자를 말한다.

 

석두일편요강기(石頭一片搖降旗)

항복했음을 말한다. () 나라 때 왕준(王濬)이 석두성을 격파하여 손호(孫皓)에게 항복을 받고 위명(威名)을 크게 떨쳤는데, 유우석(劉禹錫)서새산회고시(西塞山懷古詩)천 길의 쇠사슬은 강물 속에 잠겨버리고 한 조각 항복 깃발만 석두성에 나왔네[千尋鐵鎖沈江底 一片降幡出石頭].” 한 데서 온 말이다.

 

석두저노(石竇猪奴)

중국의 삼국(三國) 시대 위() 나라 왕필(王弼)의 호칭이다. 왕필은 뛰어난 문인(文人)으로서 주역(周易)노자(老子)의 주석을 내었다.

 

석란산(錫蘭山)

인도양 가운데 있는 섬.

 

석랑(石郞)

후진 고조(後晉高祖)인 석경당(石敬塘)을 말하는데, 경당이 거란의 힘을 빌려 후당(後唐)을 멸망시켰고 이어 거란의 힘에 의하여 후진의 황제가 되었으므로, 거란에 대하여 신하라고 일컬으면서 섬겼다.

 

석루(石樓)

() 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만년에 향산(香山)에다 석루를 짓고 여기에서 유유자적하였다.

 

석루(石樓)

돌로 만든 패방(牌坊)으로, 패방은 어떤 사람의 덕행을 표창하기 위하여 세운 일종의 건축물을 말한다. 공덕패방(功德牌坊), 정절패방(貞節牌坊) 등이 있다.

 

석류(錫類)

효자(孝子)의 덕행이 널리 퍼져서 계속 남에게까지 미침을 이른 말이다.

 

석류시(錫類詩)

시경(詩經)대아(大雅) 기취(旣醉)효자가 다하지 않아서 길이 너의 유를 내리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 한 데서 온 말로, 효자의 행실이 널리 퍼져서 효자가 계속하여 나오게 됨을 이른 말이다.

 

석륵(石勒)

중국 후조(後趙)의 시조 갈()족 출신, 원래 노예이며 도적이었다. 후에 북한(北漢) 즉 전조(前趙)의 유연(劉淵)의 장군으로 활약하였으나, 나중에 배반, 자립하여 건국하였다. 양국(襄國)에 도읍하고, 한때 강북(江北)을 지배하였다.

 

석륵씨(石勒氏)

중국을 점령하여 남북조 시대가 되었다.

 

석름(石廩)

중국 형주부(衡州府) 형산(衡山)의 한 봉우리이다.

 

석름봉(石廩峯)

형산(衡山)에 있는 한 봉우리의 이름인데, 이 봉우리의 모양이 창름(倉廩)과 같이 생겼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한다.

 

석림(石林)

돌이 나무와 같이 생긴 것. 석목의 숲, 이 속에 말하는 짐승이 있다 한다.

 

석마(石馬)

돌을 조각하여 만든 말이다. 무덤 앞에다 세워둠.

 

석막(石幕)

부령의 옛 이름이다.

 

석만경(石曼卿)

만경은 송() 나라 석연년(石延年)의 자()이다. 송 진종(宋眞宗) 때 대리시승(大理寺丞)을 지냈으며, 그의 문장은 매우 기운이 있고 더욱 시에 뛰어났다 한다.

 

석목(析木)

별자리 이름이다. 이십팔수 중 기(), ()에 해당하고,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중 인마궁(人馬宮)에 해당하며, 십이지(十二支)의 인()에 해당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국가의 위치를 별들의 방위에 따라 배분하여 불렀는데, 우리나라와 중국 북경이 여기에 속한다 하여 이 지역을 석목지위(析木之位)라 불렀다. 진서(晉書)卷十一 천문지(天文志)

② 『이아(爾雅)석천(釋天)석목은 기성(箕星)ㆍ두성(斗星)의 사이요 은하수 가에 있다.” 했는데, 그 주에 십이차(十二次)로 나누면 석목은 연() 나라의 위치이다.” 하였다.

중국의 유연(幽燕) 지역을 가리킨다. 본디는 성차(星次)의 이름으로, 십이진(十二辰)으로는 인()이고, 이십팔수(二十八宿)로는 미수(尾宿)와 기수(箕宿)의 사이에 속하는데, 이곳은 유연(幽燕)의 분야(分野)에 해당되므로, 유연 지방의 대칭(代稱)으로 쓴다.

 

석목진(析木津)

기성(箕星)과 두성(斗星) 사이에 천한(天漢)이 있고, 기성이 목()에 속하기 때문에 석목의 나루라고 한 것인데, 지역으로는 바로 요동(遼東) 땅을 의미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昭公 8, 讀史方輿紀要 山東 遼東都指揮使司 海州衛

하늘의 석목성(析木星) 별자리에 속한 분야로, 중국에 있어서는 연() 나라 즉 유주(幽州)가 여기에 해당된다.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

 

석문(石門)

이백(李白)이 젊어서 은거하던 곳으로 은자가 사는 곳을 말한다. 이백의 하도귀석문구거(下途歸石門舊居)석문(石門)에 흐르는 물엔 온통 복사꽃이 떠 있네.”라 하였다.

 

석문(席門)

헌 자리로 단 문으로 가난한 집을 말한다.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집이 성 밑 궁벽한 마을에 있고 떨어진 자리로 문을 달았으나 문밖에는 찾아오는 장자(長者)의 수레가 많이 있었다.” 하였다. / 인용: 女織屦(황상)

 

석문군평복(石問君平卜)

군평(君平)은 한() 나라 엄준(嚴遵)의 자로, 성도(成都)의 시장에서 점을 치던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황하(黃河)의 근원에서 한 부인이 비단을 빠는 것을 보고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여기는 천하(天河)이다.” 하고는 돌 하나를 주면서 돌아가 군평에게 물어 보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서 군평에게 물으니, “이 돌은 직녀(織女)의 베틀을 괴었던 돌이다.” 하였다.

 

석문륜제(席門輪蹄)

석문(席門)은 거적을 매달아 놓은 문으로 청빈한 집이나 은자(隱者)의 거처를 뜻하는데,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다 떨어진 거적으로 문을 매달아 놓은 집에 장자(莊子)의 수레 소리가 많이도 찾아왔다[以弊席爲門 然門外多有長者車轍].”하였다.

 

석문인(席門人)

거적으로 문을 달만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석범(石帆)

왕사정(王士禎)의 석범정(石帆亭)을 말한 것인데 옹방강이 그 석범 두 글자를 자기의 당 앞에 새겨 두고 시경헌(詩境軒)이라 이름하였다.

 

석범구게자(石帆舊偈子)

석범은 왕어양(王漁洋)의 석범정(石帆亭)을 말한다. 옹방강의 소석범정저(小石帆亭著)가 있다. 왕어양의 추림독서도(秋林讀書圖)는 문점(文點)이 그린 것인데 소재(蘇齋)에 수장되어 있었음.

 

석범정(石帆亭)

왕사정이 육유를 사모하는 뜻에서 육유가 살았던 석범에다 정자를 짓고 이를 석범정이라 하였다.

 

석본(石本)

석각(石刻)의 탁본을 말한다.

 

석부(舃鳧)

한 나라 때 왕교(王喬)가 신었던 신발로, 신선들이 신는 신발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왕교에, “왕교는 하동(河東)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 섭령(葉令)이 되었다. 왕교는 신술(神術)이 있어서 매달 삭망(朔望)에 대()에 나와 조회하였다. 황제는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였다. 태사가 엿본 뒤에 왕교가 올 때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상방(尙方)에 명하여 자세히 살펴보게 하니 전에 상서원(尙書院)의 관속들에게 하사한 신발이었다.” 하였다.

 

석불난(席不暖)

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戲)성철(聖哲)들은 세상을 구제하기에 항시 급급하여 늘 천하를 주유하느라 공자(孔子)가 앉은자리는 따스해질 겨를이 없었고, 묵자(墨子)가 사는 집에는 굴뚝에 그을음이 낄 여가가 없었다.” 하였다.

 

석불반면(石佛反面)

돌부처가 얼굴을 돌린다는 뜻으로, 아주 미워하고 싫어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석사(夕死)

진리를 탐구하는 일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이인(里仁)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석상번경호경참(石上繙經虎更參)

옛날에 어느 고승이 불경을 연역(演繹)하여 설법하면 문 밖에 호랑이가 와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한다.

 

석상와준(石上窪樽)

바위 구덩이 술동이로, 바위가 움푹 패여 그곳에 술을 부어놓고 떠 마실 만하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 나라 호주 별가(湖州別駕) 이적지(李適之)가 현산(峴山)에 올라가 한말 술을 부어놓을 만한 바위 구덩이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와준정(窪罇亭)을 세우고 놀았다 하여 산에서 술자리를 벌여 호방하게 노는 경우에 흔히 인용된다.

 

석상정혼(石上精魂)

() 나라 때의 고승(高僧) 원택(圓澤)이 그의 친구 이원(李源)과 함께 삼협(三峽)에 이르러 어느 물 긷는 부인(婦人)을 보고는 이원에게 말하기를, “저 부인이 바로 내 몸을 의탁할 곳이다. 앞으로 12년 뒤에 항주(杭州)의 천축사(天竺寺) 뒷산의 삼생석(三生石)에서 서로 다시 만나자.” 하고는, 그날 밤에 원택이 죽었는데, 그 후 12년 만에 이원이 약속대로 그곳을 찾아가 보니, 과연 원택이 재생(再生)하여 목동(牧童)이 되어 노래하기를, “삼생석 위의 옛 정혼이 풍월을 읊는 것은 논할 필요도 없네 친구가 멀리 찾아와 주니 부끄러워라 이 몸은 달라졌지만 본성은 길이 그대로라오[三生石上舊精魂 賞月吟風不要論 慚愧情人遠相訪 此身雖異性長存].”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석상진(席上珍)

상고(上古)의 아름다운 도()를 늘어 놓은 것을 말하는데, 유자(儒者)의 학덕(學德)을 비유하기도 한다.

 

석서(碩鼠)

시경(詩經)위풍(魏風)의 편명으로, 폭정(暴政)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달픔을 읊은 시이다.

 

석서(石鼠)

쥐의 일종으로 석서(碩鼠)라고도 한다. 중화고금(中華古今) 주에 석서는 다섯 가지 기능이 있으나 모두 능통하지 못하다. 날기는 하지만 집을 뛰어넘지 못하고, 기어오르기는 하지만 나무 끝까지 가지 못하고, 헤엄치기는 하지만 골짜기를 건너지 못하고, 땅을 파기는 하지만 제몸 하나 감추지 못하고, 달리기는 하지만 사람을 피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여러 가지 재주가 있으나 한 가지도 능통하지 못함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석서편(惜誓篇)

초사(楚辭)편명. 혹은 가의(賈誼)가 지었다고 하고, 혹은 작자 미상이라고도 하는 작품으로 내용은 초 회왕(楚懷王)이 자기와 약속을 하고서도 끝에 가서 그 약속을 저버려 결국 유시무종의 인물이 되었음을 풍자한 것이다. 초사(楚辭)賈誼 惜誓 章句

 

석석(析析)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 소리

 

석석(淅淅)

바람 소리, 방울 소리

 

석선(石扇)

부채 모양의 바위.

 

석성(石城)

지명(地名)으로 막수(莫愁)의 고향인데 막수는 노래를 잘 불렀다. 당서(唐書)』 「악지(樂志)

 

석성악(石城樂)

남조 송(南朝宋) 때 장질(臧質)이 경릉내사(竟陵內史)로 있으면서 그곳에 있던 석성(石城) 위에 올라가, 멀리 관망을 하다가 뭇 소년들의 통창한 가요 소리를 듣고 이를 인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석수(石髓)

삼국 시대 위() 나라 왕렬(王烈)이 태행산(太行山)에 갔을 때 산이 쪼개지며 그 속에서 골수(骨髓) 같은 푸른 진액(津液)이 나왔으므로 그것을 환약(丸藥)으로 만들어 복용해서 장생했다는 이야기와, 그 약을 다시 혜강(嵇康)에게 건네주자 곧바로 딱딱한 청석(靑石)으로 변해 버렸으므로 혜강이 신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왕렬이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신선전(神仙傳)王烈晉書 혜강전(嵇康傳)

 

석수(石髓)

석종유(石鍾乳), 즉 돌 고드름의 이명(異名)인데, 선인(仙人)들이 곧잘 이것을 복용한다고 한다. ()나라 왕렬(王烈)이 산중에 들어갔더니 바위가 벌어지며 그 속에서 푸른 진흙 같은 것이 흘러 나왔다. 왕렬은 그것을 조금 가지고 집어 왔더니 단단한 돌이 되고 말았다. 혜강(嵇康)이 듣고, “그것은 석수(石髓)인데 먹었더라면 신선이 될 수 있다.” 하였다. 본초(本草)石髓

 

석수(石獸)

옛날 무덤 앞에 세우던 돌로 만든 짐승의 형상을 말한다.

 

석수황정(石髓黃精)

모두 선인(仙人)이 복용하는 약명(藥名)이다.

 

석숭(石崇)

자는 계륜(季倫), 아명(兒名)은 제노(齊奴), 청주(靑州) 사람. 산기랑(散騎郞)과 형주자사(荊州刺史) 등을 지냄. 당대의 최고 갑부로서 귀척(貴戚) 왕개(王愷)ㆍ양수(羊琇) 등과 부()를 다툼. 나중에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에게 살해됨.

 

석실(石室)

금궤석실(金匱石室)의 준말로, 국가의 귀중한 도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신선이 사는 석혈(石穴)을 이른다. 상고 시대 선인(仙人) 광성자(廣成子)가 공동산(崆峒山) 석실에서 살았다 한다. 장자(莊子)』 「재유(在宥)

청음(淸陰) 즉 김상헌(金尙憲)의 전리(田里)에 있는 산 이름으로,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 자호(自號)하기도 하였다.

 

석실낭함(石室琅函)

석실은 옛날 도서(圖書)를 소장하는 곳을 가리킨 말로, 즉 엄중히 봉장(封藏)하는 뜻을 부쳐 이른 말이다.

 

석실박(石室縛)

석실은 돌로 만든 장서실(藏書室)인데, 즉 그 안에 소장된 서적을 말한다.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나라가 고문(古文)을 없애버리고 시()ㆍ서()를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명당(明堂) 석실에 서적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하였다.

 

석실서(石室書)

석실(石室) 금궤(金匱)에 영원히 보관될 가치 있는 저술을 말한다. 한편 김상헌(金尙憲)은 청음(淸陰) 외에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

 

석실서재(石室書齋)

양주목(楊州牧)에 있는 서원(書院). 효종 7(1656)에 건립한 것으로,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ㆍ김수항(金壽恒)ㆍ민정중(閔鼎重)ㆍ이단상(李端相)등이 배향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석실옹(石室翁)

호가 석실산인(石室山人)인 김상헌(金尙憲)을 가리킨다.

 

석씨전가록(石氏全家祿)

한 나라 때 하내(河內) 온현(溫縣) 사람인 석분(石奮)을 가리킨다. 15세 때 하급 관리로부터 시작하여 고조(高祖)ㆍ문제(文帝)ㆍ경제(景帝)를 계속 섬기는 동안 태중대부(太中大夫)ㆍ태자태부(太子太傅)를 지내고 구경(九卿)에 까지 이르렀으며, 그의 건()ㆍ경()등 네 아들의 받는 녹이 각각 2천 석에 이르러 그의 몫까지 모두 1만 석이 되었으므로 세상에서 만석군(萬石君)이라 불렀다. 사기(史記)卷一百三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석씨지궁근(石氏持躬謹)

한대(漢代)의 석분(石奮)을 말한다. 석분이 15세 때 한 고조(漢高祖)를 만났는데, 고조는 그의 공손하고 조심성 있는 태도가 좋아서 그의 누이를 미인으로 맞아들이고 석분을 가까이 했다. 경제(景帝)때는 천자(天子)가 만석군(萬石君)이라고 부를 만큼 네 아들과 함께 부귀를 누렸는데 자손들도 그 가르침을 받아 효근(孝謹)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사기(史記)卷一百三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석양(石羊)

() 앞에 세워놓은 돌로 조각한 양을 말한다

 

석양문적루응점(夕陽聞笛淚應霑)

() 나라 향수(向秀)사구부(思舊賦), “산양(山陽)을 지나다가 피리소리를 듣고 옛날 혜()ㆍ완()과 함께 놀던 생각이 나서 슬프다.” 하였다.

 

석양풍수제자오(夕陽風樹啼慈烏)

돌아간 부모를 생각하여 슬퍼하는 말이다. 바람 부는 나무란 곧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고, 까마귀는 본디 제 어미에게 반포(反哺)를 하는 효조(孝鳥)이므로 이른 말이다.

 

석연(石鷰)

모양이 제비처럼 생긴 돌로 뇌풍(雷風)을 만나면 제비처럼 날아 오르는데, 이는 큰비가 내릴 조짐이다. 본초(本草) 석연(石鷰)제비처럼 생겼고 무늬가 있는데 둥글고 큰 것이 수놈이고, 길고 작은 것이 암놈이다.” 하였다.

 

석연(石燕)

제비처럼 날아다니는 돌이라는 뜻이다. 상수(湘水) 부근에 있는 석연산(石燕山)의 돌이 바람을 맞으면 마치 제비처럼 공중에 날린다는 고사가 있다. 수경(水經)상수(湘水)

중국 영릉산(靈陵山)에 있는 모양이 마치 제비처럼 생긴 돌인데, 비바람을 만나면 즉시 날아오른다고 한다.

 

석연배녹평(錫宴陪鹿苹)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녹명(鹿鳴)편은 조정의 연회에 쓰는 시편(詩篇)인데, “내가 아름다운 손이 있어 비파를 두드리고 피리를 분다.”는 구절이 있다.

 

석요(石銚)

소식의 돌솥이 우수촌(尤水村)의 집에 남아있었는데 수촌이 화모(畫摹)하여 옹방강에게 부쳤음.

 

석우도(石牛道)

() 나라 혜왕(惠王)이 촉 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이에 돌로 소 다섯 마리를 만들고는 그 뒤에다가 금()을 놓아 둔 다음 소가 금똥을 누었다.”고 소문을 내니, 촉 나라 사람들이 그 소를 달라고 하였다. 혜왕이 주겠다고 하자, 촉에서 역사(力士) 다섯 명을 보내어 길을 뚫고 끌어오게 하였다. 그 뒤 신왕(愼王) 때에 이르러서 그때 뚫은 길을 통하여 가서 촉 나라를 정벌하였다. 화양국지(華陽國志)

 

석우풍(石尤風)

거세게 부는 역풍(逆風)을 말한다. 옛날에 석씨(石氏)에게 딸이 있어서 우랑(尤郞)에게 시집갔는데, 우랑이 다른 곳으로 장사를 가겠다고 하였다. 아내가 한사코 말렸으나 듣지 않고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다. 아내가 몹시 애통해하다가 병을 얻어 죽게 되었는데, 임종할 때 내가 죽은 뒤에 멀리 항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큰바람을 일으켜서 배가 떠나지 못하게 해 천하의 부인네들이 화를 당하지 않게 하겠다.” 하였다. 그 뒤로는 배가 떠나려 할 때 거센 역풍이 불면 이를 석우풍이라 하여 출항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호기문(江湖紀聞)

 

석위(石尉)

일찍이 남만 교위(南蠻校尉)를 지낸 진() 나라의 거부(巨富) 석숭(石崇)을 말한다.

 

석음빙(夕飮氷)

왕명(王命)을 받들고 책임감에 의해 몹시 두렵고 걱정이 되어 속이 타는 것을 이른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나는 아침에 명()을 받고 저녁에 얼음을 마셨으니, 나에게 내열(內熱)이 생겼는가 보다[今吾朝受命而夕飮冰, 我其內熱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석인(碩人)

덕이 높은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시경(詩經)위풍(衛風) 고반(考槃),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하였다.

아름다운 덕의 소유자를 일컫는 말로, 옛날 시랑(侍郞) 이상의 부인을 봉()할 때 이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석일모(惜一毛)

세상이 이기주의(利己主義)로 변한 것을 탄식한 말이다. 양주(楊朱)는 전국(戰國) 때 사람으로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하여 자신의 털 하나를 뽑으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하여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석작(石碏)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위()나라의 대부이다. 그의 아들 후()가 자기의 경계를 듣지 않고 공자 주우(公子州吁)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서 환공(桓公)을 죽이고 주우를 왕으로 추대할 계책을 꾸미자, 그들을 진()나라로 유인하여 죽인 뒤에 공자 진(公子晉)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웠다. 좌전(左傳)隱公 三年, 四年條

 

석작준(石作尊)

소식(蘇軾)의 시에 산사람이 권하는 술 국자가 필요 있나, 바윗돌 움푹 패어 술통을 이뤘는걸.[山人勸酒不用勺 石上自有尊罍窪].”이라는 표현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39 次韻正輔同遊白水山

 

석장(錫杖)

선장(禪杖)을 이른다. 막대에 육환(六環)의 금석(金錫)이 달려 있기 때문에 석장(錫杖)이라 칭한다. () 나라 손작(孫綽)유천태산부(游天台山賦)진정한 도인은 석장을 날려 허공을 밟고 다닌다[應眞飛錫以?].”라는 말이 있다.

 

석장군(石將軍)

() 나라 갑부였다는 석숭(石崇)을 가리킨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태치(汰侈)석숭은 금곡원(金谷園)에서 기생들이 손님에게 술을 취하도록 권하지 않으면 기생을 죽이기까지 했다.” 하였다.

 

석장무진(石藏無盡)

불가의 무진장(無盡藏)을 말하는데 천만 덩이의 돌을 뜻하는 것이다.

 

석전(釋奠)

() 앞에 술잔을 올리고 제사하는 것을 이른다. 예기(禮記)』 「문왕 세자(文王世子)무릇 학궁(學宮)을 세우면 반드시 선성(先聖)ㆍ선사(先師)에게 석전(釋奠)한다.” 하였으므로, 주자(朱子)는 창주(滄洲)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孔子)를 위시,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맹자(孟子)와 송조(宋朝)의 군자(君子)를 모셔 사시로 제사하였다.

 

석전(石戰)

음력 대보름날 각 지방에서 행하던 남성의 돌던지기 놀이는 편쌈’ ‘石戰’ ‘便戰으로도 불리었다. 전쟁에 대비하여 鍊武의 큰 뜻을 가지는 전투적 놀이로 삼포 왜변 때 석전선수들을 모아 왜인의 난동을 막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전승은 되고 있지 않음.

 

석전성선생(石田成先生)

석전(石田)은 성로(成輅)의 호이다.

 

석점두(石點頭)

도리(道理)가 투철하고 설복(說服)하는 힘이 강하여 다른 사람을 능히 신복(信服)시키는 것을 말한다. 중국의 축도생(竺道生)이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서 돌들을 모아 놓고 문도(門徒)로 삼은 다음 열반경(涅槃經)을 강론하면서 내가 설법한 것이 부처의 마음과 들어맞는가?”하니, 돌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는데, 열흘 만에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연사고현전(蓮社高賢傳)』 「도생법사(道生法師)

 

석정(石井)

강릉부(江陵府) 동쪽 15리 지점의 한송정(寒松亭) 옆에 있는 우물 이름으로, 이곳에서 술랑(述郞) 등 네 선인(仙人)이 차를 다려서 마셨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44 江陵大都護府

② 『수경(水經)사수주(沙水注)상동(湘東) 음산현(陰山縣)에 있는 후담산(候曇山) 위에 석정이 있는데, 평소에 물이 없다가 기도를 할 때에는 물이 솟아난다.” 했다.

 

석정연구(石鼎聯句)

도사(道士) 헌원 미명(軒轅彌明)과 유사복(劉思服)ㆍ후희신(侯喜新)이 합작한 시. 한퇴지(韓退之)는 이상 세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석정연구서(石鼎聯句序)를 지었다.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호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과거에는 뜻이 없이 유생들을 가르치고 가난하게 살면서 시명(詩名)을 떨쳤는데, 광해군 척족(戚族)들의 방종한 행태를 비방하다가 시안(詩案)에 걸려 귀양가는 도중에 폭음으로 죽었다. 성로(成輅)가 특히 석주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가 죽은 뒤로는 항상 비통하게 여겨 체읍(涕泣)하면서 자신의 시고(詩稿)도 모두 불태운 채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석주집(石洲集)

조선 선조(宣祖) 때 학자 권필(權韠)의 문집.

 

석죽군(石竹裙)

석죽은 패랭이꽃으로, 곧 이 꽃의 무늬가 놓인 치마를 말한다.

 

석지(石砥)

돌 주춧돌을 말한다.

 

석지국(析支國)

임강(臨江)서쪽에 있었던 상고 때의 나라 이름이다.

 

석진(席珍)

석상(席上)의 보배. 유자(儒者)의 학덕을 석상(席上)의 진품(珍品)에 비유한 것. 예기(禮記)』 「유행(儒行)儒有席上之珍 以待聘이라 하였다.

 

석참충빙루(昔慚蟲氷陋)

여름에만 사는 벌레는 겨울을 모른다는 뜻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석채(釋菜)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제사하는 의식. / 유의어: 석전(釋奠).

 

석책(射策)

과거의 일종으로 경서(經書)의 의의(疑義)와 시무(時務)에 대한 문제의 답안을 책()에 써서 올리게 하여 그 사람의 우열을 결정하는 것이다.

 

석척(蜥蜴)

도마뱀으로, 오랫동안 가물어 기우제를 지낼 때 도마뱀을 물동이 속에 넣고 동자(童子)들이 비를 내려 달라고 제사를 지낸다.

 

석척(夕惕)

저녁에 두려운 마음

 

석척기우(蜥蝪祈雨)

중국에서 기우제를 용과 비슷한 도마뱀을 잡아 병 속에 넣고 지냈다는 고사.

 

석척시우아(蜥蝪狋吽牙)

석척은 도마뱀이고, 시우아(狋吽牙)는 개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이른다. 한 무제(漢武帝)가 일찍이 엎어놓은 그릇 속에 수궁(守宮)을 넣어 두고는 여러 수가(數家)들에게 이를 알아맞히게 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다 못 알아맞혔으나 동방삭(東方朔)은 이를 수궁이 아니면 석척입니다.”고 알아맞혔고, 또 곽사인(郭舍人)이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시우아(狋吽牙)는 뭐냐?”며 알아맞히라고 하자, 동방삭은 또 시우아는 개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이다.” 하여 대번에 알아맞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六十五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호이다. 임억령은 나주 인근의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지냈다.

 

석천(石泉)

조선 말기 순조(純祖) 때의 학자로, 일찍이 학문에 전심하여 경서(經書)들을 고증학적 방법으로 주석하는 등 많은 저술을 남겼던 신작(申綽)의 호이다.

 

석천노(石川老)

임억령(林億齡)을 말한다. 문장과 풍류가 뛰어났으며 아우 임백령(林百齡)을사사화(乙巳士禍)에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과 합세함을 보고 은퇴하였다.

 

석천옹(石泉翁)

조선 후기의 경학자로 호가 석천인 신작(申綽)을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경서(經書)에 많은 주해(註解)를 냈다고 한다.

 

석청(石靑)

안료(顔料) 이른다. 도자기 장식용으로 쓰이는 물건. 본초(本草)扁靑

 

석치(石癡)

영조(英祖) 때의 화가(畵家)정철조(鄭喆祚)의 호이다.

 

석탄(石灘)

이존오가 석탄(石灘)에 살았기 때문에 호()가 석탄이었다.

 

석허중(石虛中)

돌 벼루를 의인화(擬人化)한 표현이다.

 

석호(石湖)

원 나라 시인 범성대(范成大)의 호인데 일찍이 국보(菊譜)의 서()를 짓고 30여종의 국화를 유별로 모아 명품(名品)에 따라 서술하였다.

 

석호궁중형극생(石虎宮中荊棘生)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후조(後趙) 임금 석호(石虎)가 궁전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중() 불도증(佛圖證)이 읊조리기를, “(殿)이여, 전이여, 가시()가 숲을 이루어 장차 사람의 옷을 찢으리로다.” 하므로 석호가 사람을 시켜 궁전의 돌 밑을 파보니 가시가 나 있었다. 석호의 수양손(收養孫) 염민(冉閔)의 아명(兒名)이 극노(棘奴)인데, 후일에 석호의 자손이 모두 염민의 손에 죽음을 당하였다.

 

석호룡(石虎龍)

후조(後趙)의 무제(武帝)를 가리킨다.

 

석호봉누(石戶蓬累)

석호농(石戶農)은 순() 임금의 친구였던 농사꾼 석호를 말하고, 봉루(蓬累)는 날리는 쑥대처럼 정처없이 떠돌며 사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이 석호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 처자를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석호열경현(石虎裂驚絃)

석호(石虎)는 범처럼 생긴 돌. 옛날 초() 나라의 웅거자(熊渠子)가 밤에 길을 가다가 돌을 보고는 엎드려 있는 범으로 착각한 다음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깊이 박혔다. 뒤에 돌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화살을 쏘았으나 촉이 들어가기는커녕 흔적조차 나지 않았다. 이것은 먼젓번에는 거자가 꼭 범인줄 알고 온 정성을 쏟아 쏘았기 때문에 지성에 감동되어 돌이 쪼개진 것이라 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석획(石畫)

치밀하고 원대한 계책을 말한다. ()은 석()과 같은 뜻이다.

 

석획지신(石畫之臣)

()은 석()과 통용하는 것으로서, 즉 큰 계책을 지닌 신하들을 말한다.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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