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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157. 서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57. 서

건방진방랑자 2020. 4. 19.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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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서가조(犀可照)

서각은 물소의 뿔인데, 이를 태우면 밝은 빛을 낸다고 한다. () 나라의 온교(溫嶠)가 여행을 하다가 무창(武昌)의 저기(渚磯)에 당도하니, 물이 아주 깊은데, 사람들이 모두들 물속에 괴물이 산다고 하였다. 이에 온교가 서각에 불을 붙여서 물 속을 비추니, 얼마 뒤에 물속에 있던 기이한 모습의 물고기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진서(晉書)卷六十七 온교열전(溫嶠列傳)

 

서가지폐(徐家之肺)

서씨는 당 나라 때 강직하기로 이름난 서회(徐晦)이고, 심가는 그와 같은 시대의 심전사(沈傳師)인데, 한림학사(翰林學士)ㆍ중서사인(中書舍人) 등 청직과 여러곳의 지방관을 오랫동안 지냈으나 세상의 영욕에 관심이 없어 권세가에 아부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서회는 술을 즐겨마시고 심전사는 음식을 잘 먹어 당시의 재상인 양사복(楊嗣復)이 말하기를 서가의 폐장과 심가의 비장은 참으로 편안한가.”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당어림(唐語林)

 

서간(徐幹)

삼국시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하나로 뛰어난 문장으로 조조(曹操) 부자(父子)의 예우를 받았다.

 

서간(鼠肝)

세상 만물 가운데 대단히 미세한 존재.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위대하도다. 조화(造化)! 너를 장차 무엇으로 만들려나? 너를 쥐의 간(鼠肝)으로 만들 것인가, 너를 벌레의 팔뚝(蟲臂)으로 만들 것인가?[偉哉造化! 又將奚以汝爲? 將奚以汝適? 以汝爲鼠肝乎? 以汝爲蟲臂乎?]”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자연의 변화에 순응해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서간충비(鼠肝蟲臂)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너를 쥐의 간으로 만들어 주랴, 너를 벌레의 팔로 만들어 주랴[以汝爲鼠肝乎? 以汝爲蟲臂乎?].”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만물의 태어난 형태 가운데 가장 하찮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서강월(西江月)

사곡(詞曲) 이름인데, 남녀의 애정을 노래한 것이다.

 

서강중(徐剛中)

강중은 서거정(徐居正)의 자()이다.

 

서거(犀渠)

방패 이름이다. 좌사(左思)오도부(吳都賦), “家鶴膝 戶有犀渠라고 한 그 주에, ‘渠楯也라 하였다.

 

서거(犀炬)

() 나라 온교(溫嶠)가 배를 타고 우저기(牛渚磯)를 지날 적에 물속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무소의 뿔에 불을 붙여 비춰 보자, 말과 수레를 타고 붉은 모자를 쓴 물속의 괴물들이 나타났는데, 그날 밤에 온교가 괴물로부터 너와 나는 각각 다른 이승과 저승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에게 불을 비췄느냐.”고 꾸지람을 당하는 꿈을 꾸고 나서 얼마 뒤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진서(晉書)』 「온교전(溫嶠傳)

 

서거유위(西去遊渭)

태공(太公)이 주를 피해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면서 지내다가 문왕(文王)을 만나 등용되고, 그 뒤에 다시 무왕(武王)을 도와 상나라를 정벌하였다. 이에 백이(伯夷)와 숙제는 무왕에게 정벌하지 말 것을 간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굶어 죽었다. 사기(史記)卷六十一 백이열전(伯夷列傳)

 

서검(書劍)

()은 문()을 배우는 것이요, ()은 무()를 배운다는 것인데, 문무(文武)의 재주를 지녔다는 말이다. 항우(項羽)의 숙부 항량(項梁)이 항우에게 글을 가르치고 칼 쓰는 법은 가르쳤다. 사기(史記)卷七 항우본기(項羽本紀)

글을 읽어 관리가 되고 칼을 잡고 종군(從軍)하는 것으로 문관이나 무관이 되는 것을 말한다. 맹호연집(孟浩然集)3 자락지월(自洛之越) 시에 삼십 년을 허둥지둥 글과 칼 다 못 이뤘네[遑遑三十年 書劍兩無成].” 하였다.

 

서검응난적만인(書劍應難敵萬人)

항우(項羽)가 젊을 때 글공부도 안하고 검술(劍術)도 전념하지 않으므로 그의 삼촌인 항량(項梁)이 꾸짖으니, 항우가 글이란 성명(姓名)이나 기록하는 것이고 칼이란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니 배울 것이 못됩니다. 나는 만인(萬人)을 상대하는 것을 배우려 합니다.”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사기(史記)卷七 항우본기(項羽本紀)

 

서검탁심정(徐劍托深情)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계찰(季札)이 상국(上國)에 사신 가는 길에서 서() 나라에 들렀을 때, 서 나라 임금이 계찰의 보검(賓劍)을 보고 좋아하면서도 차마 말을 못 하였는데, 계찰은 그의 생각을 알기는 했으나 사신을 가는 길이라 보검을 그에게 선사하지 못하고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서 나라에 들르니, 서 나라 임금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 보검은 그이 묘소의 나무에 걸아 놓아서 일찍이 그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뜻을 편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서검현(徐劍懸)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계찰(季札)이 사행(使行) 중에 서군(徐君)을 방문하였을 때, 서군이 계찰의 칼을 부러워하면서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자, 계찰이 그 마음을 헤아리고는 사신의 임무를 끝내고 돌아올 때 그에게 칼을 주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는데, 돌아오고 보니 서군이 이미 죽어서 땅속에 묻혔으므로, 그 칼을 서군의 무덤가 나무 위에 걸어 놓고 떠나간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서견(噬犬)

깨무는 개라는 뜻이다.

 

서경(署經)

당하관(堂下官)을 임용할 때, 이조(吏曹)에서 피임자(被任者)의 문벌ㆍ이력ㆍ내외 4(曾祖外祖)와 처()4조를 기록하여 양사(兩司; 司憲府司諫院)에 제출하면, 양사는 그를 심사한다. 그리하여 결점이 없다고 판단되면, 양사의 대간(臺諫)이 모두 서명하는데 이를 서경(署經)이라 하고, 부당하다고 판단되면 서명을 거부하는데 이를 월서(越署) 또는 월서경(越署經)이라고 하였다. 서경에 통과되어야 직첩(職牒)을 발급하는 것이 법례이므로, 이조(吏曹)는 양사에 3차 서경(署經)을 요구하는데 그래도 통과되지 않을 경우는 부득이 체임(遞任)시켰던 것이다. / 인용: 용재총화(성현)

 

서경(西京)

()나라 때의 도성(都城)인 장안(長安)을 이른다. 서한(西漢)의 수도는 장안이고, 동한(東漢)의 수도는 낙양(落陽)이었는데, 이 때문에 낙양을 일컬어 동경(東京)이라 하고, 장안을 일컬어 서경(西京)이라 이르게 되었다. 또한 원 뜻을 확대, 파생하여, 동한을 동경, 서한을 서경이라 하기도 한다.

 

서경(西坰)

한준겸(韓浚謙)의 봉호(封號)이다.

 

서경루망(西京漏網)

서경은 전한(前漢) 시대의 도읍지를 말하고, 누망(漏網)은 죄인이 법망(法網)을 빠져나가는 것을 이르는데, 육기(陸機)오등제후론(五等諸侯論)육신은 약망을 범하였고, 칠자는 누망에 저촉되었다.(六臣犯其弱網 七子衝其漏網)” 한 주석에 누망은 한 경제(漢景帝) 때에 법망이 느슨했던 것을 이른 말이다.” 하였다.

 

서경이자(徐卿二子)

서경(徐卿)의 두 아이란, 두보(杜甫)가 서씨(徐氏)의 비범한 두 아이를 찬미하여 지은 서경이자가(徐卿二子歌)그대는 서경의 비범하게 생긴 두 아이를 못 보았나 …… 장부가 아이를 낳아 이 두 아이 같은 아이를 둔다면 후일에 명위가 어찌 드러나지 않겠는가[君不見徐卿二子生絶奇 …… 丈夫生兒有如此二雛者 異時名位豈肯卑微休].” 한 데서 온 말이다.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年譜점필재집(佔畢齋集)年譜杜少陵集 卷十

 

서경지자(西京之字)

한 나라 서경의 예서(隸書) 이다.

 

서계(書契)

문자(文字)를 말한다. 중국의 아주 태고 적에는 문자가 없어서 노끈으로 매듭을 맺어 정령(政令)의 부호로 삼다가, 복희씨(伏羲氏)가 왕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주역(周易)』 「계사(繫辭)

 

서곡(黍谷)

() 나라에 치운 골()이 있어 곡식이 되지 않는데, 추연(鄒衍)이 음률(音律)로서 양기(陽氣)를 불어넣었더니 따뜻하여져서 기장()이 나서 자랐다. 그러므로 서곡(黍谷)이라 한다.

중국 하북(河北) 밀운현(密雲縣)에 있다. 서곡은 땅이 아름다우나 너무 차서 오곡이 나지 않는데 추연(鄒衍)이 살면서 율()을 불어 따뜻하게 하여 화서(禾黍)가 자식(滋殖)했다고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주희의 매화시(梅花詩)自欣羌笛娛夜永 未要鄒律回春溫의 구가 있다.

 

서곤(西崑)

서방의 곤륜군옥산(崑崙群玉山)으로 고대 제왕의 장서각(藏書閣)이 있던 곳이다.

 

서곤장길(西崑長吉)

서곤은 중국의 서쪽에 있는 곤륜산(崑崙山)인데, 여기서는 옥()이 많이 생산되므로 전()하여 제왕(帝王)의 도서관을 칭한다.

 

서공(書空)

속마음이 불평스러우나 겉으로는 표출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나라 때 은호(殷浩)가 중군장군(中軍將軍)이 되었다가 남의 무함을 입어 신안(信安)으로 쫓겨났는데, 겉으로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평상시처럼 담소하였다. 그러면서 매일 손가락으로 허공에 대고 무슨 글자를 썼는데, 사람들이 몰래 엿보니 돌돌괴사(咄咄怪事)’라는 글자를 반복해서 쓰고 있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黜免)

 

서공부(舒公賦)

서공은 당() 나라의 서원여(舒元輿)를 말한다. 그의 모란부(牡丹賦)저 하늘의 상서, 기운 별이 되고 구름 되고[圖元瑞精 有星而景 有雲而卿].”라는 구절이 있다.

 

서광(曙光)

새벽 빛.

 

서군(書裙)

() 나라 왕헌지(王獻之), 양흔(羊欣)이 낮잠을 잘 적에 입고 있던 새 치마에 글씨를 쓴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송서(宋書)』 「양흔전(羊欣傳)

 

서궁오기(鼠窮五技)

쥐가 지닌 다섯 가지 졸렬한 기예. 날긴 해도 지붕에는 오르지 못하고, 헤엄은 치지만 계곡을 건너지 못하며, 나무를 오를 수 있으나 꼭대기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달릴 수는 있으나 사람보다 빠르지 못하며, 굴을 팔 수 있지만 제 몸도 다 가리지 못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시경(詩經)위풍(魏風) 석서(碩鼠)

 

서권(舒卷)

펼치는 것과 돌돌 말음. 전하여 경우에 따라서 자기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함을 의미한다.

 

서귀(西歸)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서극(西極) 극서쪽으로 곤륜산(崑崙山) 부근의 서역(西域) 지방을 가리킨다.

 

서극곤륜(西極崑崙)

한사(漢使)가 서역의 우전국(于寘國)에서 하원(河源)을 찾아내었는데, 그 산 이름을 곤륜(崑崙)이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사기(史記)』 「대원열전(大宛列傳)에 나온다.

 

서극풍(西極風)

말을 형용한 것이다. 서극은 중국 서쪽에 있는 대완국(大宛國)에서 준마가 나오므로 인용한 듯하다.

 

서긍위도(徐兢爲圖)

서긍은 송() 나라 사람인데, 산수(山水)와 신물(神物)을 잘 그리었고 전주(篆籒)도 잘 썼다. 선화(宣和) 때에 사신을 따라 고려(高麗)에 나와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지었다. 송사익(宋史翼)卷二十七

 

서기실(徐記室)

남조(南朝) 시대 진() 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기실참군(記室參軍)을 지냈던 서릉(徐陵)을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시문(詩文)에 뛰어나서 당시 유신(庾信)과 병칭되었다. 진서(陳書)卷二十六

 

서기형환사(胥起荊還社)

서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초 나라 대부 신포서(申包胥)이다. 오자서(伍子胥)가 이끄는 오 나라의 군대에 의해 초 나라의 서울이 함락되자, () 나라로 달려가 진 나라 조정에서 7주야를 통곡하며 구원을 요청하여 마침내 오 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았다. 사기(史記)卷四十 오세가(楚世家)

 

서길사(庶吉士)

서상(庶常)이라고도 한다. 한림원(翰林院)에 소속된 관원(官員)으로, 진사(進士) 중에 문학과 서법(書法)에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임명했다.

 

서냉교(西冷橋)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현(杭縣) 서쪽 호반(湖畔)의 고산(孤山)과 소제((蘇隄) 사이에 있는 다리인데, 고산처사(孤山處士) 임포(林逋)가 고산에 은거하면서 집안에 매화를 많이 심고 음영자적(吟詠自適)하였다. 임포의 유명한 매화시가 있다.

 

서년(書年)

() 나라 절신(節臣) 소노풍(蕭露豐)의 자. 장헌충(張獻忠)이 난을 일으켜 성을 함락시켰을 때 그가 아내와 함께 부모를 모시고 달아나다가 아버지가 적에게 붙잡히므로, 아버지를 구출해내고 자기가 대신 붙잡혀 있었는데, 그것을 안 그의 아내가 다시 그를 구출하러 갔다가 부부가 함께 적에게 살해되었다.

 

서당(書堂)

문신(文臣)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던 곳.

 

서대(犀帶)

일품관(一品官)의 조복(朝服) 위에 두르는 물소뿔로 장식한 띠이다.

 

서대(西臺)

중서성(中書省)을 말한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중서성을 후위(後魏)에서 서대라 하였다. 선무제(宣武帝)가 중서감(中書監) 최광(崔光)에게 말하기를 경은 짐의 서대 대신이다했다.” 하였다.

 

서대육(西臺肉)

서대(西臺)는 당()의 서가(書家) 이건중(李建中)의 호인데, 그의 글씨가 명필이었으되 비속(肥俗)하여 살이 많고 뼈가 적다는 평이 있었다.

 

서대초(書帶草)

다년생으로 꽃은 담자색(淡紫色)이고 열매는 벽록색(碧綠色)에 모양이 둥글다. 삼제기략(三齊記略)정강성(鄭康成)이 불기성(不其城) 남산(南山) 속에서 학도를 가르칠 때, 잎은 부초와 같고 길이는 한 자 남짓한 풀이 산 밑에 났으므로, 사람들이 강성의 서대초라 불렀다.” 하였다.

 

서대초(書帶草)

() 나라 정현(鄭玄)의 제자들이 책을 맬 때 썼다는 길고도 질긴 풀 이름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庭下已生書帶草 使君疑是鄭康成이라는 구절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14 書軒

 

서도(西都)

고려 때 평양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 나라 때의 호경(鎬京)을 말한다.

 

서도(書徒)

학궁(學宮)에서 공부하는 유생(儒生)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해 매일 읽은 글을 기록해서 매달 예조(禮曹)에 보고하는데, 이를 서도라고 한다. 예조에서 이를 근거로 장부를 비치하면 이에 의거 수시로 유생들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보이고 일정 기간의 점수를 통계한다. 그리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는 직부(直赴)를 허락하는 특전을 베풀고, 성적이 저조한 자는 벌을 시행하게 되어 있다.

 

서동부언(胥動浮言)

거짓말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한다.

 

서랑(徐郞)

() 나라 때의 시인인 서정경(徐禎卿)을 말한다. 당인(唐寅)ㆍ축윤명(祝允明)ㆍ문징명(文徵明) 등과 함께 오중(吳中)의 사재자(四才子)로 불렸다.

 

서래의(西來意)

조사 서래의(祖師西來意)의 준말로, 선가(禪家)에서 흔히 쓰는 화두(話頭)의 하나이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달마(達磨)가 서쪽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선법을 전한 그 궁극적인 뜻이 무엇인가 참구(參究)하는 것으로, 즉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말한다. 오등회원(五燈會元) 조주장(趙州章), 어떤 승려가 조사 서래의를 물으니 조주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라고 대답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서래의(西來意)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의 준말로,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摩)가 전한 불법의 의취(意趣)라는 뜻이다. 곧 불법의 근본의(根本義), 선의 진면목(眞面目)을 말한다.

 

서량자사(西凉刺史)

() 나라 영제(靈帝) 때 환관(宦官) 장양(張讓)이 권세를 한 손에 쥐었는데, 맹타(孟他)가 그에게 뇌물을 주면서 포도주 한 말을 바친 결과, 서량(西凉)의 자사(刺史)에 임명되었던 고사가 전해 온다. 삼국지(三國志)魏書 명제기(明帝紀)

 

서령(西泠)

서령교(西泠橋)를 말한다.

 

서령일휘휘(西嶺日暉暉)

노모(老母)의 자애로운 은덕을 비유한 말이다.

 

서로(犀顱)

이마뼈가 서골(犀骨)로 된 것을 말하는데, 귀인의 상()이라 한다.

 

서롱(西隴)

() 나라 때 뛰어난 시인 이백(李白)의 고향인 농서(隴西)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룡(瑞龍)

여지(荔支)를 말한다.

 

서룡뇌(瑞龍腦)

양비외전(楊妃外傳)교지국(交趾國)에서 서룡뇌를 진상해 왔는데 그 모양이 선잠(蟬蠶)과 비슷하였다. 이를 임금이 귀비에게 주었는데 귀비가 몰래 안녹산에게 주었다.” 하였다.

 

서류불부동(西流不復東)

중국 사람들은 강물은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중국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였다. 그래서 아무데로 구부러져도 반드시 동으로 간다[百折必東]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한 번 망한 뒤에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동으로 흐른다는 말이 헛말이라는 말이다.

 

서릉(徐陵)

남조(南朝) ()ㆍ진() 때의 사람으로, 어려서 매우 총명하여 석보지(釋寶誌)로부터 천상(天上)의 석기린(石麒麟)이란 칭찬을 받기도 했었는데, 그는 특히 당시에 시문(詩文)으로 유신(庾信)과 병칭(竝稱)되었었다.

 

서리(黍離)

시경(詩經)왕풍(王風)의 편명(篇名)으로 이것은 대부가 옛 도읍터를 지나다가 화려하였던 궁궐이 모두 헐리고 기장만이 무성한 것을 보고 서글퍼하여 읊은 시이다. / () 나라가 쇠약하여 동으로 옮긴 뒤에 시인(詩人)이 옛 서울을 지나며 서리(黍離)을 지어서 옛 도읍터 기장이 우거졌다[彼黍離離].”고 읊었다.

 

서리불부아(黍離不復雅)

유왕(幽王)이 망하고 그 아들 평왕(平王)이 도읍을 동도(東鄕; 洛陽)에 옮긴 뒤로 지위가 일반 제후와 같이 낮아져서, 그 지방의 시()를 왕풍(王風)이라 하고 다시 아()로 칭하지 않았다. 서리(黍離)은 왕풍의 첫 편이다.

 

서린(西隣)

서쪽의 인근 마을이라는 뜻으로, 주역(周易)』 「기제괘(旣濟卦)구오효(九五爻)동쪽 인근 마을에서 거창하게 소 잡는 것보다는 서쪽 인근 마을에서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고 복을 나눠 받는 것이 훨씬 낫다[東隣殺牛 不如西隣之禴祭 實受其福].”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서림(西林)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 기슭에 있는 절 이른다. 주자(朱子)가 그곳에 머물면서 승() 가사(可師)와 학문을 강론하였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卷二

 

서림(書林)

서책이 숲처럼 많이 쌓여 있다는 것으로 서책을 간직해둔 곳을 말한다.

 

서막(徐邈)

삼국 시대 위() 나라 사람이다. 상서랑(尙書郞)으로 있을 때 금주령(禁酒令)이 있었는데, 막이 술을 마음껏 마시고 취하여 중성(中聖)이다.” 했다. 조조(曹操)가 듣고 성을 내자, 선우보(鮮于輔)취객들이 술이 맑은 것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술이 탁한 것을 현인이라 한다.” 했다는 고사가 있다. / 인용: 태평한화골계전, 麴先生傳(이규보)

 

서명(西銘)

() 나라 때 학자(學者) 장재(張載)가 서재(書齋)의 서쪽 창에 걸어 놓았던 명()인데, 인도(仁道)의 원리를 밝혀 놓은 글이다.

 

서목(鼠目)

소견이 작다는 뜻이다. 쥐의 눈은 작으면서도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 흡사 탐욕스러워하는 모양이므로 전하여 이렇게 비유한다.

 

서묘(誓墓)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하는 것을 말한다. 육유(陸游)의 상서걸사(上書乞祠) 시에 서묘하는 것이 어찌 한갓 조상이 그리워서겠는가. 세상이곳곳마다 위기일레[誓墓那因一懷祖 人間處處是危機].” 하였는데, 이는 난세를 만나 시골로 내려갈 것을 선영에 고하기 때문이다.

 

서문루(西門淚)

옛 추억을 떠올리며 비통한 심정으로 흘리는 눈물을 말한다. () 나라 사안(謝安)의 외생(外甥)이었던 양담(羊曇)이 사안 사후에 추억이 깃들었던 서주(西州)의 성문을 술에 취하여 지나게 되었을 때, 말 채찍으로 성문을 치면서 살아서는 화려한 집에 사시더니 죽어서는 낙엽처럼 산언덕으로 돌아갔네[生存華屋處 零落歸山丘].”라는 조자건(曹子建)의 시를 외우고는 대성통곡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서문표(西門豹)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사람인데, 그가 일찍이 업령(鄴令)으로 나갔을 적에 그곳 풍속이 하백(河伯)에게 부녀자를 시집보내야만 해를 입지 않는다하여, 늙은 여자 무당의 지휘 아래 자주 부녀자를 하수(河水)에 바쳤으므로, 서문표는 그 사실을 들은 즉시 그 늙은 무당들을 하수에 빠뜨려 죽여서 영원히 그런 폐해가 없게 하였다.

 

서미(胥靡)

죄수(罪囚)를 말한다.

 

서박(鼠璞)

쥐를 포떠서 말린 쥐포. 쓸모도 없고 별다른 해로움도 없는 하찮은 것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응소전(應劭傳)() 나라 사람은 다듬지 않은 옥()을 박()이라 하고, () 나라 사람은 말리지 않은 쥐를 박()이라 한다. 주 나라 사람이 쥐의 박을 가지고 정 나라 상인을 찾아가서 박을 사지 않으려는가 하므로, 정 나라 상인이 가져다 보니, 바로 쥐의 박이었다.” 하였다. () 나라 대식(戴埴)이 이를 따서 책 이름으로 했는데, 그는 명물(名物)의 동이(同異)를 구별한다는 뜻이었음.

 

서발(舒發)

신라 17관등(官等)의 첫째 위계(位階)인 서발한(舒發翰)의 준말로, 벼슬이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었던 김유신(金庾信)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방미인(西方美人)

서방(西方)의 미인이란 곧 서쪽 주() 나라의 성왕(聖王)을 가리킨 것으로, 시경(詩經)패풍(邶風) 간혜(簡兮)누구를 생각하느뇨, 서방의 미인이라네. 저 미인이야말로 먼 서방 사람이라오[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 한 데서 온 말인데 위() 나라의 한 현사(賢士)가 미관 말직인 악공(樂工)의 자리에 있으면서 은밀히 그 불만을 토로함과 동시에 주 나라의 옛 성왕을 사모하여 노래한 것이다.

 

서백(西伯)

() 나라 문왕(文王)으로, 문왕이 주 나라를 세우기 전에 은() 나라의 서백으로 있었다. 문왕이 은 나라 주()를 물리치자 봉황이 글을 물고 오는 상서가 있었다고 한다.

 

서백창성(西伯彰聖)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맏인 태백(太伯)과 둘째인 우중(虞仲), 그리고 태강(太姜)이 낳은 막내 계력(季歷),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계력이 장차 서백(西伯)이 될 창()을 낳자 그 창이 성덕이 있음을 알고는 계력에게 위()를 전할 뜻을 비쳤으므로 태백ㆍ우중이 자기 아버지 뜻을 알아차리고 형만(荊蠻)으로 망명하여 살면서 막내 계력에게 양보하였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서벽(西壁)

홍문관원의 별칭이다. 홍문관원이 사진(仕進)하여 앉는 좌차(座次)가 그 벼슬의 별칭이 되었으니, 곧 직제학(直提學)ㆍ전한(典翰)ㆍ응교(應敎)ㆍ부응교(副應敎)를 동벽, 교리(校理)ㆍ부교리(副校理)ㆍ수찬(修撰)ㆍ부수찬(副修撰)을 서벽, 박사(博士)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를 남상이라 했다. 그리고 모두 경연을 겸임하였으며, 부제학에서 수찬까지는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서복(徐福)

진시황(秦始皇)의 명을 받고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떠난 방사(方士)의 이름인데, 뒤에 일본에 건너갔다는 설이 있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서복사(徐福祠)

()의 방사(方士). 혹 서시(徐市)라고도 한다.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초(不死草)를 구해온다고 진시황(秦始皇)을 달래어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 명을 거느리고 누선(樓船)을 타고 바다에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일행이 일본에 건너가 정주(定住)했다 하며 와까야마(和歌山) 지방에 그 유적과 신사(神祠)가 있었다고 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서봉(西鳳)

서봉사(西鳳寺) 즉 건봉사(乾鳳寺)의 옛 이름이다.

 

서부(西浮)

서쪽에서 떠 와서 동쪽으로 간다는 말이다.

 

서부등단(西府登壇)

서부(西府)는 추밀부(樞密府). 등단(登壇)은 대장이 된 것을 말하는데, 한왕(漢王)한신(韓信)을 대장으로 삼을 때에 단을 쌓고 예식을 갖추어 임명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서분금고문(書分今古文)

서경(書經)에는 금문(今文)고문(古文)이 있는데, 금문은 총 29편으로 진() 나라 분서갱유(焚書坑儒) 때 복생(伏生)이 숨겨두었다가 한() 나라 때 다시 강()한 것이며, 고문은 한 나라 경제(景帝) 때 공자(孔子)의 옛 집을 헐다가 벽 사이에서 발견됐다. 고문은 총 45편인데, 고문자(古文字)인 과두문(蝌蚪文)으로 쓰여져서 알아보지 못하다가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사기(史記)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사기(史記)7 항우본기(項羽本紀)

 

서불(徐巿)

() 나라 때의 방사(方士)였는데, 진시황(秦始皇)에게, 해중(海中)의 삼신산(三神山)에는 신선(神仙)이 살고 있으니,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가서 신선을 찾겠다고 청하여 과연 동남 동녀를 5백 명을 거느리고 신선을 찾으러 해중으로 들어간 뒤 소식이 없었다 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전설에 그가 일본에 가 살았다 한다. 특히 화가산(和歌山 와카야마) 지방에 서불사(徐巿祠)가 있었다 한다.

 

서불가진신(書不可盡信)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다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서불사(徐巿祠)

서불은 진() 나라의 방사(方士) 서복(徐福)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서복에게 동해의 삼신산(三神山)으로 가서 불로초(不老草)를 캐 오라고 하면서 동남 동녀(童男童女) 3천 명을 데리고 가게 하였는데, 서복이 일본에 도착하여 그곳에 살면서 돌아오지 않아 일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화가산현(和歌山縣)에 서복의 무덤이라는 것이 있고, 그의 사당이라는 것도 있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서비(犀比)

무소의 뿔로 만든 요대(腰帶)의 꾸미개를 말한다.

 

서비(西飛)

새로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承文院)에 속하여 있다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나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어 영전(榮轉)하는 것. 예문관, 승정원이 승문원의 서쪽에 있으므로 이렇게 말하였다.

 

서비(徐妃)

양 원제(梁元帝)의 비()로 이름은 소패(昭佩)인데, 원제가 한 눈이 애꾸눈이었으므로, 반면(半面)에만 화장(化粧)을 하고 임금을 맞이했다가 임금의 노염을 샀다. 그 뒤에 그녀는 임금의 근신(近臣)과 음통(淫通)하였다.

 

서사(西祀)

무제가 서쪽으로는 분음(汾陰)에 가서 땅의 신인 후토(后土)를 제사 지냈다.

 

서사(筮仕)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처음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指初出做官].”고 했고,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송신원외북상서(送辛員外北上序)에서는 처음 벼슬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제학과 대언을 거쳤다[筮仕不幾年, 歷提學代言].”라고 했다.

 

서사가(徐四佳)

세종~성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의 호가 사가(四佳)이다.

 

서의사(鼠依社)

사당에 사는 쥐는 사당에 불이 날까봐 연기로 내쫓지도 못하고, 바닥이 더러워 질까봐 물을 붓지도 못하므로 죽일 수가 없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 나오는 고사로, 성고사서(城狐社鼠)는 교활하게 남의 세력에 의지하여 나쁜 짓을 하는 간사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 인용: 贈左蘇山人(박지원)

 

서산(西山)

() 나라 진덕수(眞德秀)인데, 자는 경원(景元) 또는 희원(希元)이다. 세상에서 서산 선생(西山先生)이라 일컬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서산결(西山訣)

진서산(眞西山)이 엮은 심경(心經)을 말한다. 심경은 거경(居敬) 공부를 위주하여 마음의 혼침과 나태함을 일깨우는 내용이 많음.

 

서산아(西山餓)

서산(西山) 즉 수양산(首陽山)에서 숨어 살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 굶어 죽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절개를 말한다. 사기(史記)61 백이열전(伯夷列傳)

 

서산연의(西山衍義)

() 나라 진덕수(眞德秀)의 호는 서산인데, 대학(大學)을 해설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지어 임금께 올렸는데, 이때에 경연(經筵)에서 그 책을 강의하였다.

 

서산오색환(西山五色丸)

서산이란 절강성(浙江省) 태호(太湖) 가운데 있는 동정서산(洞庭西山)을 가리킨다. 예부터 동정귤(洞庭橘)이 유명했다.

 

서산의사(西山義士)

백이(伯夷)ㆍ숙제(叔齊)를 가리킨다. 주무왕(周武王)이 은() 나라를 치자 두 사람이 말을 두드리며 간하였으나 은 나라가 망하자 주 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수양산(西山)에 숨어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드디어 굶어 죽었다. 사기(史記)61 백이열전(伯夷列傳)

 

서산이자(西山二子)

서산의 두 사람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이들은 주() 나라 무왕(武王)이 주()를 정벌하는 것을 반대해서 간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면서 지내다가 굶어 죽었다. 사기(史記)61 백이열전(伯夷列傳)

 

서삽체(徐澁體)

() 나라 서언백(徐彦伯)이 문()을 만들면 많이 변경하여 새로운 것을 구했다. 그래서 봉각(鳳閣)은 언각(鶠閣)으로, 용문(龍門)은 규호(虯戶), 죽마(竹馬)는 소참(篠驂)으로 고쳐서 쓰니, 후진들이 본받아, 그를 서삽체(徐澁體)라 하였다.

 

서상(鉏商)

() 나라 애공(哀公) 14년에 서쪽 교외의 사냥에서 기린을 잡은 사람의 이름인데, 성군(聖君)의 시대에만 출현한다는 기린이 난세에 나타나 붙잡힌 것과 관련하여 공자가 자신의 신세를 또한 한탄하면서 여기에서 춘추(春秋)의 저술을 끝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서상시(徐常侍)

남당(南唐)의 마지막 임금인 이욱(李煜)과 함께 송() 나라에 항복하여 누차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한 서현(徐鉉)을 가리킨다. 당시에 한희재와 명성을 다퉈 한서(韓徐)로 병칭되었다. 송사(宋史)441

 

서새녹사의(西塞綠蓑衣)

() 나라의 은자(隱者) 장지화(張志和)를 가리킨다. 잠시 벼슬살이를 하다가 물러나와 강호(江湖)에 노닐며 연파조도(煙波釣徒)라 자칭하고는 낚시로 소일을 하였는데, 그의 시 어가자(漁歌子)’서새의 산 앞에 백로가 날고, 복사꽃 흐르는 물 궐어가 살졌도다[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라는 표현이 있다. 신당서(新唐書)196

 

서새풍우(西塞風雨)

당 나라 장지화(張志和)가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연파조수(煙波釣叟)라 호()하며 배를 타고 살면서, 어부가(漁父歌)를 짓기를, “서새산 앞에 백로가 나는데, 복사꽃 흐르는 물에 궐어가 살찐다. 푸른 갈대 삿갓, 푸른 도롱이로 비낀 바람 가방비에 돌아가지 않으리라[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 靑篛笠綠蓑衣晩 斜風細雨不須歸].” 하였다.

 

서생(徐生)

서복(徐福)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서복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바다로 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캐 오게 하였는데, 돌아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서생륵비(書生勒碑)

전승 기념비를 말한다. 서생(書生)은 한() 나라의 반고(班固), 두헌(竇憲)이 흉노를 격파하고 나서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공적비를 세울 때, 반고가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을 지어 주었다. 후한서(後漢書)』 「두헌전(竇憲傳)문선(文選)』 「봉연연산명서(封燕然山銘序)

 

서생입해(徐生入海)

서생은 서복(徐福)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서복을 시켜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바다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캐 오게 하였는데, 불사약은 캐 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서서(棲棲)

거마를 검열하는 모양,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모양, 안달하는 모양

 

서서(恓恓)

마음의 번뇌하는 모양. 바쁜 모양

 

서서(西澨)

서쪽 개펄.

 

서서(湑湑)

잎이나 가지가 무성한 모양, 바람이 부는 형용, 샘물이 솟는 형용

 

서서(徐徐)

행동이 침착한 모양, 잠을 자고 있는 모양, 조용히, 천천히, 의심하여 두려워하는 모양

 

서서(徐庶)

영천(潁川) 사람으로 자는 원직(元直)이고, 초명은 서복(徐福)이다. 제갈량을 와룡(臥龍)이라 지목하며 유비에게 추천하였다. / 인용: 韓狗篇(이건창)

 

서서추로(栖栖鄒魯)

추로(鄒魯)공자(孔子)맹자(孟子)를 말하는 것이니, ()는 맹자의 고국이요 노()는 공자의 고국이다. 서서라는 말은 서성댄다는 말인데, 그렇게 서성대고 쫓아다녀도 옳게 길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는 말이다. / 유의어: 서서추로(棲棲鄒魯)

 

서서황황(棲棲遑遑)

쉴 틈도 없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중니(仲尼)는 서서(棲棲)했고 묵자(墨子)는 황황(遑遑)했다는 말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소경전(蘇竟傳)

 

서석(瑞石)

광주(光州)의 옛 이름이다.

 

서석산(瑞石山)

광주(光州)에 있는 무등산(無等山)의 별칭이다.

 

서소(西笑)

중원(中原)의 사람이 서쪽의 장안(長安)을 향해 웃음 짓는다는 뜻인데. 환담신론(桓譚新論)』 「거폐(袪蔽)사람들이 장안의 음악을 들으면 문을 나서면서 서쪽을 향해 웃음 짓고, 고기 맛이 좋은 것을 알면 푸줏간을 대하고서 입맛을 크게 다신다[人聞長安樂 則出門西向而笑 知肉味美 則對屠門而大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서쪽 향해 웃는다는 것은 서울인 장안이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송신원외북상서(送辛員外北上序)에서 이제 조정의 관리로 부름을 받아 행장을 정리하고 떠난다[今以朝官被召, 騰裝而西笑].”라고 써있으니, 여기서는 서촉(西蜀)에 몽진한 황제에게 조회하기 위해 찾아간다라는 뜻이다

 

서소일(西笑日)

서울을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 나라 환담(桓譚)이 지은 신론(新論)거폐(袪蔽), “사람들이 장안(長安)의 음악을 들으면 문을 나가 서쪽으로 장안을 향해 웃고, 고기가 맛이 좋으면 푸줏간 문을 마주 보며 씹는다.” 하였다.

 

서소지(西笑地)

서울을 말한다. 사람들이 장안(長安)의 음악 소리를 듣고 나서 성문을 빠져 나와서는 서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웃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조식(曹植)與吳季重書 注

 

서수(犀首)

고대 중국의 관명(官名)인데,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공손연(公孫衍)이 일찍이 이 관직에 몸담았으므로 그의 이칭(異稱)이 되었다.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에 공손연이 공은 어찌하여 술 마시기를 좋아하느냐[公何好飮].”는 물음을 받고 일이 없어서 그렇다.(無事也)”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서수사혜구백(庶脩辭兮求白)

초사(楚辭)』 「이소(離騷)중화(重華 순임금의 이름)에게 나아가 글을 올리리라[就重華而陳詞].”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즉 굴원(屈原)이 순임금께 글을 올려 의심난 것을 물어서 스스로 도를 깨닫고자 했던 데에 비유한 것이다.

 

서수음(犀首飮)

서수는 호아장군(虎牙將軍)과 유사한 상고 때의 벼슬 이름인데,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공손연(公孫衍)이 그 벼슬을 하였다 하여 그를 가리킨다. 당시의 유세가(遊說家) 진진(陳軫)이 공손연을 연()ㆍ조()ㆍ제() 세 나라의 재상을 만들어 주기 위한 계책을 말해주기 위해 그를 만났을 때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까?”하자, 대답하기를 할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사기(史記)卷七十 진진전(陳軫傳)

 

서시(西施)

춘추(春秋) 때 월() 나라 미녀의 이른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패한 뒤에, 그의 모신(謀臣) 범려(范蠡)가 서시를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자, 부차가 서시에게 혹하여 관왜궁(館娃宮)을 짓고 갖은 향락을 누리다가 마침내 오 나라는 정사가 어지럽게 되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부차가 서시를 고소대(姑蘇臺)에 두고는 무척 총애했으므로 미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서자(西子)라고도 한다.

 

서시(徐市)

() 나라 때의 방사(方士)진시황(秦始皇)을 위하여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명을 데리고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을 구하려고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서시불환(徐市不還)

서시와 안기생(安期生)은 모두 진() 나라 때의 방사(方士). 시황(始皇)은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서시를 삼신산(三神山)에 보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자(使者)를 해중(海中)으로 보내어 안기생을 만나려 하였으나 풍랑을 만나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列仙傳

 

서시빈(西施嚬)

()나라 미인(美人) 서시(西施)가 속 아픈 병이 있어서 얼굴을 찡그리니 그의 찡그리는 것도 어여쁘고 아름다웠다 한다.

 

서시빈목(西施嚬目)

()나라의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가 눈을 찌푸린 것을 아름답게 본 못난 여자가 그 흉내를 내고 다녀 더욱 싫게 보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분수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남을 따라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시옥골(西施玉骨)

작약을 취서시(醉西施)라고 하는 데서 온 말이다. 서시는 춘추(春秋) 때 월()의 미인으로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계획에 의하여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쳐져 오궁(吳宮)에 있으면서 온갖 총애를 받았다.

 

서시유소추(西施有所醜)

()나라의 서시(西施)같은 이름난 미인도 추()한 구석이 있다. ‘현명한 사람이라도 과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서시혼소(徐市魂銷)

진시황(秦始皇) , 서시가, 삼신산(三神山)의 불로초(不老草)를 구하여 오겠다고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동해(東海)로 가서 오지 않았음을 말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서식일지변(棲息一枝邊)

뱁새는 깊은 숲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나뭇가지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사람이 각각 자기 분수에 만족해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서신(書紳)

오래 두고 보며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장(子張), 공자에게서 명심(銘心)할 교훈을 듣고 자기의 띠()에 그것을 썼는데, 항상 보고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서신도기(棲神道氣)

모두 도가(道家)의 술어로서, 서신은 마음을 통일시켜 신()이 엉기게 하는 것이고, 도기는 도가의 기풍(氣風)을 말한다.

 

서씨적(徐氏迹)

() 나라의 방사(方士) 서불(徐巿)이 시황(始皇)을 위하여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떠나간 채 뒷 소식을 모르는데, 전설에 그가 일본에 가 살았다 한다. 특히 화가산(和歌山 와카야마) 지방에 서불사(徐巿祠)가 있었다 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서아습(棲鴉濕)

까마귀는 검은 빛을 뜻하므로, 즉 문서를 기록할 적에 먹물이 종이에 젖는 것을 이른 말이다.

 

서악서원(西岳書院)

경주에 있는 서원으로, 명종(明宗) 때 귀암(龜巖) 이정(李楨)에 의해 세워졌다.

 

서악정사(西岳精舍)

경주(慶州)의 서악정사(西岳精舍)를 가리킨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과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각간(角干) 김유신(金庾信)을 향사(享祀)하는 곳으로, 명종(明宗) 16(1561)에 세워졌다.

 

서암승(瑞巖僧)

마음 수양(修養)하는 것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이르기를, “서암(瑞巖)의 중()은 매일 항상 스스로 자신에게 묻기를 주인옹(主人翁)은 성성(惺惺)하는가?’ 하고, 또 스스로 답하기를, ‘성성하노라.’고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심경(心經)卷一

 

서암한로(瑞巖閒老)

주희(朱熹)가 이르기를, “서암(瑞巖)의 중()은 매일 항상 스스로 자신에게 묻기를 주인옹(主人翁)은 성성(惺惺)하는가?’ 하고, 또 스스로 답하기를, ‘성성하노라.’고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심경(心經)卷一

 

서애상공(西厓相公)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柳成龍).

 

서액(西掖)

중서성(中書省)을 말한다. 중서성이 대궐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우조(右曹)라 하고, 오른편은 서쪽이 되므로 서액이라고도 한다.

 

서어(鉏鋙)

서로 어긋남.

 

서엄가(西崦家)

두보(杜甫)적곡서엄인가(赤谷西崦人家)…… 참새들은 띠 지붕에 노닐고 울타리엔 솔과 국화가 섞이었네, 마치 무릉의 저문 경치와도 같아 도원을 찾아서 묵고 싶어라[鳥雀依茅茨 藩籬帶松菊 如行武陵暮 欲問桃源宿].” 한 데서 온 말이다. 두소릉집(杜少陵集)卷二

 

서여왕찬(書與王粲)

나이는 연소하지만 재질이 특출하여 자신의 학문을 전수해 주고 싶다는 말이다. 삼국 시대(三國時代) () 나라의 채옹(蔡邕)이 소년 왕찬의 자질에 탄복한 나머지 극진한 환대를 베풀며 내 집에 있는 서적을 모두 그에게 줘야 하겠다.”고 말한 고사가 전해 온다. 삼국지(三國志)21 왕찬전(王粲傳)

 

서오(徐吾)

()나라에 서오(徐吾)라는 가난한 부인이 있었다. 이웃 부인들과 밤에 촛불을 어울려 방적(紡績)을 하는데, 서오는 가장 가난하여 촛불을 계속해 대지 못하니 이웃 부인들이 촛불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서오는, “내가 가난하여 촛불을 같이 대지 못하므로, 항상 먼저 와서 소제(掃除)하고 자리를 정돈하여 당신들 오기를 기다린다. 한 방에서 나 한 사람 더 있음으로 해서 촛불이 따로 소비될 것도 아니니 동벽(東壁)의 남은 빛을 왜 아끼는가.” 하니, 이웃 부인들이 서오에게 촛불을 같이 쓰기를 허락하였다.

 

서오거(書五車)

장자(莊子)의 친구 혜시(惠施)가 학식이 많아 그 서책이 다섯 수레나 되었다 한다. 장자(莊子)』 「천하(天下)

 

서오조(棲梧鳥)

봉황새를 가리킨다. 시경(詩經)대아(大雅) 권아(卷阿)봉황새가 날아서 퍼덕퍼덕 날개짓을 하도다[鳳凰于飛 翽翽其羽].” 한 데서 온 말로, 봉황은 곧 어진 신하를 비유한 것이다.

 

서옥(鼠獄)

쥐에 대한 옥사(獄事)라는 뜻이다. 전한(前漢) 때 법관 장탕(張湯)이 어렸을 때에 쥐가 고기를 도식(盜食)한 것을 보고 그것을 들어 쥐를 탄핵하여, 심문한 문서를 갖추어 논죄(論罪)하고 쥐를 당() 아래에서 찢어 죽였는데, 그 문사(文辭)가 매우 노련하여 옥리(獄吏)와 같았다는 고사이다. 뒤에 장탕은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자 과연 옥을 다스림에 있어 매우 각혹(刻酷)하게 하였다 한다. 사기(史記)卷一百二十二 혹리열전(酷吏列傳)

 

서왕(徐王)

진시황(秦始皇)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간 서복(徐福)을 가리킨다. 진시황(秦始皇)이 서복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바다로 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캐 오게 하였는데, 돌아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서왕모(西王母)

금모(金母)라고도 하니, 옛날 곤륜산(崑崙山)에 있던 선녀(仙女)로 불로장생(不老長生)한다고 하고, 한 무제(漢武帝)가 장수(長壽)를 빌고 있을 때 서왕모가 선도(仙桃) 7개를 가지고 내려와 무제에게 주었다고 한다.

 

서우(瑞羽)봉황의 별칭이다.

 

서운관(書雲觀)

고려 때 천문(天文)을 보던 곳을 서운관(書雲觀)이라 하였는데 조선 세종(世宗)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하였다.

 

서울(徐伐)

수도를 이르는 말이다. 서완은 경주(慶州)의 옛 이름인데 경주가 오랜 세월 도읍지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중국에서 수도를 장안(長安)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서원(西原)

서원경(西原京)으로 청주(淸州)의 옛 이름이다.

 

서원(西園)

한말(漢末)조조(曹操)가 업도(鄴都)에 만든 동산 이름으로, 귀공자들이 연회를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다.

 

서원(西垣)

중서성(中書省)의 이칭(異稱).

 

서유(徐庾)

서능(徐陵)ㆍ유신(庾信). 모두 진() 때 사람으로, 다같이 문사(文辭)에 뛰어나 당시에 서유체(徐庾體)라 불렸다.

 

서유(書帷)

서재(書齋)에 치는 장막을 말한다.

 

서유(徐孺)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서치(徐穉), 자는 유자(孺子). 태수 진번(陳蕃)이 원래 손님 접대를 않는데 서치만은 찾아오면 특별히 자리 하나를 깔고 대접하다가 그가 가면 곧 그 자리를 걷어 다시 매달아 두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고사전(高士傳)

 

서유잠건개(書帷暫褰開)

책 읽고 연구하는 일도 잠시 접어 두었다는 말이다. () 나라 동중서(董仲舒)가 강학(講學)을 할 때 항상 휘장을 드리웠으므로 제자들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이런 일을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속하면서 정원에 나와 거닐어 보지도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 「동중서전(董仲舒傳)

 

서유탑(徐孺榻)

서유는 후한 때 서치(徐穉)를 가리키는데 그의 자가 유자(孺子)이므로 서유라 한 것이다. 그 당시 태수(太守)인 진번(陳蕃)이 일반 빈객(賓客)은 접견하지 않고 오직 서치가 올 때에만 걸상()을 내놓았다가 그가 가면 걸상을 매달아 놓았다는 고사이다. 후한서(後漢書)卷五十三 주황서강열전(周黃徐姜列傳)

 

서음(書淫)

독서(讀書) 또는 장서(藏書)에 탐미(耽味)하는 벽성(癖性)을 말한다. 또는 정도(正道)가 아닌 서적을 즐겨 읽는 것을 말한다.

 

서응시졸악(徐凝詩拙惡)

육조(六朝) 때에 서응(徐凝)의 폭포(瀑布)시에, “한가닥으로 청산의 빛을 한계지어 깨었다[一修界破靑山色].”는 글귀가 있는데 소동파(蘇東坡)는 그것을 악시(惡詩)라 하였다.

 

서이음와(徐摛淫哇)

서이는 남조 때 양() 나라 사람으로 자는 사수(士秀). 신기한 문장을 만들었는데 곧 염문체(艶文體)로서 궁체(宮體)라 이름한바, 애정의 시문이 되었으므로 음와라 한 것이다.

 

서인(西人)

당 나라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가 일찍이 사천성(西川省) 봉절현(奉節縣) 양수의 서쪽에서 살았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서일(西日)

지는 해로서 즉 사람의 죽음을 말한다.

 

서자(西子)

춘추시대(春秋時代)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첩이었던 서시(西施)를 말한다. 오 나라는 월() 나라와 이웃하였는데 오가 월을 쳐서 항복을 받았었다. 월은 그 후 군비에 더욱 힘쓰고 미인 서시를 오왕에게 바쳐 오왕을 고혹하게 하였다. 오왕이 과연 서시에게 반하여 정사를 태만히 하자 월이 다시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소식(蘇軾)의 음호상초청후우시(飮湖上初晴後雨詩)물 빛은 넘실넘실 맑음이 좋거니와, 산 빛은 어둑하여 비오는 것 또한 기이하네. 서호를 가지고 서자에 비유하자면, 묽은 화장 짙은 화장이 다 아름다움이로세[水光瀲艶晴方好 山色空蒙雨亦奇 欲把西湖比西子 淡粧濃抹總相宜].” 한 데서 온 말이다.

 

서자몽부결(西子蒙不潔)

서자는 미인으로 소문난 서시(西施)를 가리킨다. 맹자(孟子)』 「이루(離婁), “서자라도 오물을 뒤집어쓰면 사람들이 모두 코를 감싸쥐고 지나간다.” 하였다.

 

서자생추(徐子生蒭)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 서치(徐穉). 태수 진번(陳蕃)은 사람의 접대에 인색했으나, 서치가 찾아가면 매달아 두었던 의자를 내려놓고 환대했다 한다. 한번은 곽임종(郭林宗)이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서치가 생추(生蒭) 한 묶음을 가지고 가서 조문하였다.

 

서자탑(徐子榻)

동한(東漢) 때 남창 태수(南昌太守) 진번(陳蕃)이 일반 손님은 접대하지 않았으나 오직 그 고을 은사(隱士) 서치(徐穉)가 오면 특별히 그를 위해 앉을 자리를 내놓고 그가 떠나면 그 자리를 다시 걸어두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卷五十三 서리전(徐摛傳)

 

서자호(西子湖)

중국 북평(北平)에 있는 서호(西湖)를 말하는데, 이곳에는 물이 맑고 연꽃이 많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직예(直隸)

 

서작경청(黍嚼更淸)

복숭아를 먹고 나서 기장밥으로 입을 맑게 씻는다는 뜻이다. 공자가 일찍이 노 애공(魯哀公)을 모시고 앉았을 때, 공이 복숭아와 기장밥을 하사하자 공자가 기장밥을 먼저 먹고 복숭아를 뒤에 먹으니 애공이 말하기를 기장은 복숭아를 먹은 뒤에 입을 씻는 것이다.” 하였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

 

서장(庶長)

() 나라 때의 작위(爵位)의 이름이다.

 

서재(西齋)

문인의 서재(書齋)를 뜻하는 말이다.

 

서재영설(書齋映雪)

눈빛이 밝아 서재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 나라 손강(孫姜)이란 사람이 집이 가난하여 눈빛으로 책을 읽었다 한다. 몽구(蒙求)

 

서저(棲苴)

가뭄이 들어 나무 위에 바짝 말라 엉겨 붙은 수초(水草)를 말하는데, 백성들이 은택을 입지 못한 채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소민(召旻)저 가뭄이 든 해에, 풀도 뻗지 못하는 듯하며, 나무 위의 시든 부평초와 흡사하니, 내가 이 나라를 살펴보건대, 어지럽지 않은 것이 하나 없도다[如彼歲旱 草不潰茂 如彼棲苴 我相此邦 無不潰止].”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서적(徐積)

() 나라 때 서적(徐積)이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었는데, 뒤에 과거를 보려고 도성(都城)에 들어갔다가 차마 어버이를 오래 떠날 수 없어 다시 되돌아와버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송사(宋史)卷四百五十九

 

서절구투(鼠竊狗偸)

쥐가 물건을 훔치고 개가 남의 눈을 속이는 것. 남 모르게 숨어서 부당한 물건을 취하는 좀도둑을 말한다.

 

서점양치지재삼(序點揚觶至再三)

서점(序點)은 사람 이름이다. 공자가 서점을 시켜서 잔을 들고 소리치기를, “배우기를 좋아해서 게을리하지 않고, 예를 좋아해서 변치 않으며, 8, 90의 나이가 되도록 도를 받들어 행해 이단에 빠지지 않을 자만 이 자리에 있으라.” 하니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예기(禮記)』 「사의(射義)

 

서제막급(噬臍莫及)

노루가 배꼽의 사향 때문에 사람에게 잡힌 줄 알고 배꼽을 물어뜯으려 해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말로, ‘후회하여도 이미 늦었다는 말이다. / 유의어: 서제불급(噬臍不及), 서제(噬臍) / 인용: 檄黃巢書(최치원), 懊惱曲(신국빈)

 

서조(西曺)

병조(兵曹)의 별칭이다.

 

서조우저(犀照牛渚)

못된 행위는 반드시 남에게 밝혀지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온교(溫嶠)가 우저(牛渚)라는 못가에 이르렀을 때 물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당시에 그 못 속에는 괴물(怪物)이 많이 있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마침내 서각(犀角)에 불을 붙여서 비추어 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서족이기성명(書足以記姓名)

글은 성과 이름만 기록할 줄 알면 그만이다란 뜻으로, 너무 학식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비웃는 뜻으로도 쓰이고, 지식보다는 행동이 우선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서주(西州)

지금의 서천(舒川)을 말한다.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의 옛 지명이다. / 인용: 詰楊吏(허격)

 

서주(黍珠)

지극히 작은 구슬을 이름인데 실상(實相)의 묘리를 비유한 것이다.

 

서주(絮酒)

솜 뭉치에 적신 술. 후한(後漢) 서치(徐穉)의 고사로 먼 곳에 조문하러 갈 때 솜에 술을 적셔 볕에 말린 다음 가지고 가 필요할 때 물에 적셔서 술기운이 나오게 하여 사용했다 한다.

술에 담근 솜. 후한 때 서치(徐穉)가 항상 미리 솜을 술에 담가 바싹 말린 다음, 여기에 구운 닭(炙雞)한 마리를 싸 두었다가, 어디에 상사(喪事)가 있을 경우에는 그의 무덤으로 찾아가 그 술에 담근 솜을 물에 적시어 주기(酒氣)가 있게 한 다음 백모(白茅)를 깔고 그 솜과 닭을 차려서 전작(奠酌)을 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서리전(徐摛傳)

 

서주(西疇)

전원(田園)을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농부가 알려 주는 봄철 농사 소식, 이젠 서쪽 밭을 갈아야겠네[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於西疇].”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서주문외루(西州門外淚)

죽고 없는 자를 그리워하여 흘린 눈물. ()의 사안(謝安)이 신성(新城)을 진무하다가 병이 위독하여 환도(還都)하면서 그 수레가 서주문(西州門)을 통과했었는데, 사안이 죽은 후 그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던 양담(羊曇)이 일부러 그 길을 피하여 서주(西州) 길을 가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크게 취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문 앞에 당도하였는데, 좌우에서 여기가 서주문이라고 하자 양담은 비감을 못이겨 말채찍으로 문짝을 두드리며 통곡을 하고 갔었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서주철복동(西周轍復東)

중국의 서쪽 풍호(豐鎬)에서 도읍하던 주() 나라는 유왕(幽王)이 학정(虐政)을 하다가 견융(犬戎)에게 시해(弑害)된 후, 평왕(平王)은 동쪽 낙읍(洛邑)으로 도읍을 옮기었다. 이것을 동천(東遷)이라 하며, 이 이전을 서주라 한다. 평왕이 동천하고 나서부터 주 나라는 쇠약해졌다. 사기(史記)卷四 주본기(周本紀)

 

서주화류(西州花柳)

() 나라 때 사안(謝安)이 신성(新城)을 지키다가 병이 위독해져 부득이 서주의 성문을 통하여 돌아오게 되자, 평소 동산(東山)에 은거하려던 뜻을 이루지 못함을 매우 슬퍼했었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 그의 생질인 양담(羊曇)이 자기 외숙의 일을 가슴아프게 여겨 서주의 길로 다니지도 않았는데, 한번은 크게 취해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지나다가 좌우 사람이 이곳이 서주의 성문이라.”고 말하자, 양담은 비감(悲感)을 견디지 못해 통곡을 하고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七十九

 

서지영대(棲遲靈臺)

동한(東漢)의 제오힐(第五頡)이 낙양(洛陽)에 기거할 집이 없어 영대(靈臺)에서 기숙(寄宿)하면서 며칠 동안이나 불을 때지 못한 채 실의에 잠겼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41 第五倫列傳 附 第五頡

 

서지책(西知柵)

경주(慶州)에 있는 진보(鎭堡)의 하나인 하서지목책(下西知木柵)의 준말이다.

 

서진(犀鎭)

서는 무소의 가죽으로 견고하다. 따라서 크고 견고한 진영(鎭營)을 가리킨다.

 

서진(西塵)

() 나라의 실권자 유량(庾亮)이 외지의 군사를 휘몰아 왕궁을 공격할 것이라는 말을 왕도(王導)가 듣고는, 때마침 서풍이 불면서 먼지를 휘날리자 왕도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원규의 먼지가 사람을 오염시키누나.(元規塵汚人)”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경저(輕詆)

 

서진갑자(書晉甲子)

도연명(陶淵明)이 시()를 지은 연()ㆍ월()을 기록하는데, () 나라 망하기 전에는 연호(年號)를 썼고, 망하고 송() 나라가 된 후에는 갑자만 썼다 한다.

 

서참(舒慘)

음양(陰陽)ㆍ고락(苦樂) 등 대립 개념을 총괄하여 표현하는 말이다.

양서 음참(陽舒陰慘)의 줄임말로 따뜻하게 펴주고 참혹하게 처벌함을 이른다.

 

서창곡(徐昌縠)

명 나라 때의 문장가 서정경(徐禎卿)을 말하는데 창곡은 그의 자이다.

 

서천(西川)

고향을 말한다. 서천은 촉()을 가리키는데 촉 망제(蜀望帝)가 그의 신하 별령(鱉靈)의 아내를 간음하고서 왕위를 내놓고 도망갔다. 이때 촉인(蜀人)들이 망제를 슬퍼한 나머지 두견새 울음 소리가 불여귀거(不如歸去)라고 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한다. 그래서 후세에 고향에 가고픈 소망을 말할 때 흔히 두견새와 서천을 인용한다. 촉왕본기(蜀王本紀)

 

서천(西天)

성군(聖君)이 있는 나라를 상징한 것. 시경(詩經)에서는 서주(西周)를 말하고 있다. 시경(詩經)패풍(邶風) 간혜(簡兮)

 

서천십양금(西川十樣錦)

() 나라 때 만든 열 가지 비단을 말한 것인데 사람의 조업(操業)이 무상한 것을 말한다. 패초헌객설(佩楚軒客說)

 

서청(西淸)

궁궐 안에 있는 서방(書房)을 말한다.

궁성 내의 맑고 조용한 곳으로 보통 관각(館閣)을 말한다.

홍문관의 별칭이다.

 

서촉민유화(西蜀民猶化)

() 나라 경제(景帝) 때 문옹(文翁)이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학교를 세워 문풍(文風)을 크게 떨치자, 그곳에 남아 있던 오랑캐의 풍속이 교화되었다. 한서(漢書)89 순리전(循吏傳)文翁

 

서촉유통사마격(西蜀喩通司馬檄)

사마(司馬)는 곧 한()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한 무제(漢武帝) 때 낭중(郞中) 당몽(唐蒙)이 야랑(夜郞)ㆍ북중(僰中) 등 오랑캐의 땅을 점령하기 위해 파촉(巴蜀)의 이졸(吏卒) 수천 명을 징발하여 그들의 괴수를 군법(軍法)으로 베죽이곤 하므로, 파촉의 백성들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자, 무제의 명을 받고 사마상여가 격문(檄文)을 지어 파촉의 백성들을 효유하여 진정시켰던 일을 말한다. 사기(史記)卷一百十七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서총대(瑞葱臺)

임금이 임어(臨御)하여 무관(武官)의 활 쏘는 것을 점검하던 대().

 

서총대(瑞蔥臺)

창덕궁(昌德宮) 후원에 쌓았던 석대(石臺)와 정자. 연산군 때 만든 것으로 영화당(映花堂) 동남쪽인 지금의 춘당대(春塘臺) 동편에 있었다.

 

서총대포(瑞蔥臺布)

연산군의 명으로 서총대 앞에 못을 파는 역사에 동원된 백성이 혹시라도 일을 빠지거나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감역관이 그 대가로 면포를 받아들였다. 이에 백성들이 지탱하지 못하여 재산이 탕진되면 헌 옷에서 썩은 솜까지 빼내어 면포를 짜서 변상하였는데, 제품이 너무 헐어 쓸 수 없었으므로 후인들이 이 베를 서총대라고 하였고 시장에서 팔려고 하여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서추(西樞)

중추원을 이른다.

 

서추(西樞未歸客)

중추부의 별칭이다.

 

서축(西竺)

천축국(天竺國)으로, 인도(印度)를 말한다.

 

서치(徐穉)

후한 때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로 자는 유자(孺子). 동한(東漢) 남창(南昌) 사람으로 가난하여 농사를 짓고 살면서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았는데, 진번(陳藩)이 그곳의 태수(太守)가 되어 여타 손님들은 접대하지 않았으나 서치가 찾아오면 항상 특별히 자리 하나를 놓아주고 그가 떠나면 도로 걸어두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卷五十三 서리전(徐摛傳)

 

서침등욕절(鼠侵藤欲絶)

불경(佛經), “어떤 사람이 깊은 구렁에 떨어지다가 칡덩굴에 걸려 위태로운 지경인데, 밑에는 독사가 우글거리고, 붉고 흰 쥐 2마리가 번갈아 칡덩굴을 쪼고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해와 달이 재촉하여 죽음이 가까워온다는 비유이다.

 

서탑(徐榻)

서치(徐穉)의 걸상. 후한 때 홍주(洪州)의 태수 진번(陳蕃)이 여간해서는 손님들을 접대하지 않는데 서치에게 만은 그의 덕을 흠모하여 특별히 걸상을 만들어 벽에 걸어놓았다가 그가 오면 앉게 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후한서(後漢書)卷五十三 서리전(徐摛傳)

 

서토(西土)

서촉(西蜀) 지방으로 오대 시대 촉()을 말한다.

 

서판(書判)

서법(書法)과 문장의 우열을 판정하는 일. 당대(唐代)의 관리 선발의 네 가지 기준인 신()ㆍ언()ㆍ서()ㆍ판()을 말한다. 신당서(新唐書)』 「선거지(選擧志), “凡擇人之法有四 一曰身 言體貌豊偉 二曰言 言言辭辯正 三曰書 言楷法遵美 四曰判 言文理優長 四事皆可取 則先德行 德均以才 才均以勞 得者爲留 不得者爲放이라 했다.

 

서평(西平)

서평부원군 한준겸(韓浚謙)을 말한다.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인조(仁祖)의 장인인 한준겸(韓浚謙)의 봉호(封號)이다.

 

서포(漵浦)

지금의 호남성 진양부(辰陽府) 서포현(漵浦縣).

 

서풍(山西風)

장재(將材)다운 인물이 있음을 말한다. 진한(秦漢) 이래로 산동(山東) 지방에는 재상이 나고, 산서 지방에는 장수가 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六十九

 

서풍(緖風)

여풍(餘風), 한풍(寒風).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바람

 

서풍오인(西風汚人)

() 나라 유량(庾亮)과 왕도(王導) 두 사람이 서로 권세를 다투었는데, 유량은 석두(石頭)에 있고, 왕도는 야성(冶城)에 있었다. 왕도가 앉았을 때에 서풍이 크게 불어 티끌을 날리니 왕도가 부채를 들어 티끌을 막으며, “원규(元規 유량(庾亮)의 자())의 티끌이 사람을 더럽히네.” 하였다.

 

서하(西河)

전국시대(戰國時代) ()나라 땅으로 오늘날의 섬서(陝西) 동부와 황하(黃河) 서쪽의 일대인데, 공자의 문인 자하(子夏)가 그곳에서 아들을 잃고 통곡하다 실명(失明)하였다 하여, 자식을 잃은 슬픔을 말할 때 흔히 인용된다. 사기(史記)』 「중니제자전(仲尼弟子傳)

 

서하삭거(西河索居)

서하는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를 가리키고, 삭거는 벗을 떠나 홀로 외로이 살고 있는 것을 말한다. 자하가 서하에서 노년을 보내던 중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상명(喪明)을 하고는 증자(曾子)의 꾸지람을 받자 내가 벗들을 떠나 혼자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고 사과했던 고사가 있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서하통(西河慟)

아들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말한다.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있을 때 아들을 잃은 슬픔에 통곡하다가 실명(失明)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기(史記)』 「중니제자전(仲尼弟子傳)

 

서학(書鶴)

공치규(孔稚圭)북산이문(北山移文)학서(鶴書)가 언덕 위로 달려온다.” 한 주에 () 나라 때 선비를 초빙하는 편지를 마치 학의 머리처럼 쓰는 전자체(篆字體)를 이용한 까닭에 그 편지 명칭을 학두서(鶴頭書)라 했다.” 하였다.

 

서함구수영용혈(鼠銜窶籔寧容穴)

세상에 용신(容身)하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양운(楊惲)의 말에 쥐가 굴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또아리를 물었기 때문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서향각(書香閣)

춘당대(春塘臺) 북쪽에 있다.

 

서혈재통(鼠穴纔通)

()나라와 한()나라가 알여(閼與)에서 싸우면서 한()나라가 조()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조사(趙奢)가 말하기를, “길이 험하고 좁아서 두 쥐가 구멍에서 싸우는 것 같아서 장수가 용맹한 자 이길 것입니다.” 하였다.

 

서호(西湖)

중국 절강(浙江) 항주(杭州)에 있는 호수 이름인데, () 나라의 임포(林逋)가 학을 기르고 매화를 가꾸며 은거한 채 살던 곳이다. 구양수(歐陽修)소식(蘇軾) 등도 모두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고 절경(絶景)을 감상했었다.

 

서호농말여서시(西湖濃抹如西施)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만일 서호(西湖)를 가지고 서자(西子)에 비한다면, 얕은 화장과 짙은 화장이 모두 마땅하다.” 하였다, 이것은 서호의 경치가 개인 날에도 좋고 비오는 날에도 좋다는 뜻이다.

 

서호처사(西湖處士)

() 나라 때의 은사인 임포(林逋)를 이른다. 그는 서호의 고산(孤山)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혼자서 매화를 심고 학()을 길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까지 하였다. 서화(書畫)와 시를 잘하여 그가 읊은 산원소매시(山園小梅詩)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에 비끼어 있고 은은한 향기는 황혼 달 아래 부동하누나[疏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 한 것을 세상에서 절창(絶唱)으로 일컬었다.

 

서호칠월주(西湖七月舟)

소동파(蘇東坡)6월의 서호가 좋다고 하여 畢竟西湖六月中 風光不與四時同이라는 구절을 남겼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50 서호절구(西湖絶句)

 

서호팔경도(西湖八景圖)

서호(西湖)는 중국 항주부(杭州府) 서쪽에 있는 둘레가 30 리쯤 되는 호수로 주위 산천이 수려하고 모든 물색도 화려하여 당() 나라 이후로 손꼽히는 명승지인데, 거기에는 평호추월(平湖秋月)ㆍ소제춘효(蘇堤春曉) 등 십경(十景)이 있다고 한다. 명일통지(明一統志)

 

서화(西華)

공자의 제자 공서화(公西華)이다. 공자(孔子)가 자로(子路)ㆍ증석(曾晳)ㆍ염유(冉有)ㆍ공서적 등에게 세상에서 혹시 너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공서화는 대답하기를 종묘의 제사에 관한 일이거나 혹은 외국 사신과의 회동이 있을 때 조정에서 예복을 갖춰 입고 예절을 보좌하는 조그만 재상이 되고 싶습니다.” 하였다 한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서회종(書會宗)

서한(西漢) 때 광록훈(光祿勳) 양훈(楊惲)이 폐서인(廢庶人)이 된 것을 억울해하는 글을 그 친구 손회종(孫會宗)에게 보냈다가 그것이 화근이 되어 사형당한 고사가 있다.

 

서희(徐熙)

오대(五代) 남당(南唐)의 종릉(鍾陵) 사람으로, 자연의 생물을 잘 그린 것으로 이름난 화가이다. 사생(寫生)을 잘하여 무릇 화죽소과금충(花竹蔬果禽蟲)의 유에 있어서 옛사람의 뜻 밖에 나왔다. 그래서 몰골도(沒骨圖)를 잘 그렸는데 필묵(筆墨)의 골기(骨氣)는 없고 다만 그 농려(濃麗)한 생태를 취하였다. 청 나라 초에 혼수평(渾壽平)이 오로지 그 법을 사용하여 세상에 유명하였다.

 

서희수묵도(徐熙水墨圖)

서희(徐熙)는 남당(南唐)의 강령(江寧)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화과(花果)에 솜씨가 절묘하여 후주(後主)의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성조명화평(聖朝名畵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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