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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160. 설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60. 설

건방진방랑자 2020. 4. 19.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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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설거(薛據)

송대(宋代)의 학자. 자는 숙용(叔容)으로 일찍이 제자백가에서 추려 뽑아 공자집어(孔子集語)를 만들고, 또 고금을 통하여 당시 재상이나 경략가들이 한 국가 정치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추려서 택규성감(宅揆成鑑)이라는 것을 만들어 조정에 올리기도 하였다. 송원학안(宋元學案)卷四十七

 

설거(雪車)

() 나라 때 한유(韓愈)의 친구 유차(劉叉)가 한유를 처음 찾아가서 지었다는 시()의 이름인데, 노동(盧仝)ㆍ맹교(孟郊)의 시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설계승흥(雪溪乘興)

() 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눈이 내리자 갑자기 친구인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서 밤중에 작은 배를 타고 그를 찾아갔는데, 문 앞에 도착해서는 만나 보지 않고 되돌아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왕희지는 내가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온 것이니 어찌 꼭 대규를 만나 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후대에는 친구를 방문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설고(薛鼓)

노고는 노 나라의 북이고, 설고는 설 나라의 북이다. 노고와 설고의 구분은 곧 음절이 서로 길고 짧고 한 데에 있었다. 예기(禮記)』 「투호(投壺)

 

설관(薛館)

() 나라 객관(客館). 전하여 규모가 가장 작은 나라의 객관.

 

설관탄협(薛館彈鋏)

설관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제 나라 설공(薛公) 맹상군(孟嘗君)의 객관(客館)이다. 그의 수많은 식객(食客)가운데 하나인 풍환(馮驩)이 처음에 자기에 대한 대우가 소홀하자 칼자루를 치며 노래하기를 긴 칼 차고 돌아왔으나 식탁에 고기가 없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사기(史記)卷七十五 맹상군전(孟嘗君傳)

 

설교신(雪窖臣)

설교는 눈으로 덮인 움막. 이는 전한(前漢)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억류되어서도 굽히지 않고 눈을 먹으며 지냈던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설니홍조(雪泥鴻爪)

눈이 녹은 진 땅에 큰 기러기가 걸어가 발자취를 남기나 그것은 곧 사라진다. 인생이 허무하고 남는 것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과거의 역사 속에 묻힌 채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는 말이다.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인생길 이르는 곳 무엇과 비슷하다 할까,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과 같다 하리. 우연히 발톱 자국 남겨 놓았을 뿐,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쪽 서쪽 헤아리리[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3 和子由 池懷舊

 

설당(雪堂)

() 나라 소식(蘇軾)이 황주(黃州)로 귀양가 집을 짓고 사방 벽에 눈()을 그려 놓고 설당(雪堂)이라 하였다.

 

설당노(雪堂老)

황주(黃州)로 유배된 뒤 그곳에 설당(雪堂)이라는 초가집을 짓고 살았던 소동파(蘇東坡)를 가리킨다. 그의 설당기(雪堂記)’동파(東坡) 옆에 버려진 밭이 있기에 집을 짓고 담을 두른 뒤 설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큰 눈이 내리는 가운데 그 집을 지었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방 벽에다 설경을 그린 그림을 빈틈없이 걸어 놓고는 앉거나 눕거나 이를 쳐다보면서 감상을 하였다.” 하였다.

 

설당월토(雪堂月兎)

설당은 소식(蘇軾)의 당명(堂名), 월토는 차 이름인데, 소식(蘇軾) 월토다시(月兎茶詩)고리 같으나 고리가 아니요 패옥 같으나 패옥이 아닌데, 가운데 희미하게 옥토아(玉兎兒)가 걸려 있네하였다.

 

설도(薜濤)

() 나라 중기의 명기(名妓). 음률(音律)과 시사(詩詞)에 능하여 항상 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ㆍ두목(杜牧) 등과 창화(唱和)하였다. () 나라 때 선홍색(鮮紅色)의 종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설도잔(薛濤箋)

설도는 촉() 나라의 명기(名妓)로서 뒤에 교서(校書)가 되어 설 교서라고도 하는데 원미지(元微之)와 서로 좋아하였다. 촉잔보(蜀箋譜)설도가 백화담(百花潭)에 교거(僑居)하면서 심홍소채잔(深紅小采箋)을 만들어 쓰고 읊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설도잔이라 하였다.” 하였다.

 

설도전(薛濤牋)

당 나라 시대에 설도(薛濤)라는 기생이 좋은 종이를 새로 고안하였으므로, 그것을 설도전(薛濤牋)이라 하고, 또 그가 살았던 곳의 이름을 따라 촉전(蜀牋)이라고도 한다

 

설두(雪竇)

송 나라 때 고승의 호이다. 소식(蘇軾)의 재화답양차공시(再和答楊次公詩)此生初飮廬山水 他日徒參雪竇禪이라 하였다.

 

설라(薛蘿)

덩굴이 뻗는 벽려(薛荔)와 여라(女蘿)를 합칭한 말인데, 전하여 은자(隱者)의 옷을 가리키기도 한다.

 

설례돈시(說禮敦詩)

춘추시대(春秋時代) 진 문공(晉文公)이 삼군(三軍)의 원수(元帥)를 임명하려 할 적에 조최(趙衰)가 말하기를 극곡(郤穀)은 예악(禮樂)을 말하고 시서(詩書)를 힘쓰는 사람이니, 그가 반드시 군대를 거느리는 방도를 알 것입니다.” 하므로, 문공이 그의 말에 따라 극곡을 중군장(中軍將)으로 삼았던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卷三十九

 

설루(雪樓)

명나라 때의 시인 이반룡(李攀龍)의 서실(書室) 이름인 백설루(白雪樓)의 준말이다.

 

설루(雪樓)

() 나라 여순(黎恂)의 자. 순은 고문(古文)과 금문(今文)에 두루 능하였으며 시에 더욱 능했다 한다. 저서에는 천가시주(千家詩注)와 영석헌시문집(蛉石軒詩文集)이 있다.

 

설류(泄柳)

춘추 때 노() 나라의 어진 선비로서 자()는 자류(子柳)이다. 목공(繆公)이 그 어짐을 듣고 찾아가 보려 했으나 유가 문을 닫고 들이지 않았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설리송황독후조(雪裏松篁獨後凋)

백설 속의 송죽은 맨 나중에 시든다. 극심한 역경속에서도 꿋꿋하게 절개를 지키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설리순생(雪裏筍生)

효성(孝誠)의 징험(徵驗)을 뜻하는 말이다.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효자 맹종(孟宗)의 모친이 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다 하므로, ()이 눈 속을 무릅쓰고 대밭에 가서 죽순 나오기를 호흡(呼吸)하며 기도하였더니 홀연히 눈 속에서 순이 나왔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강하전록(江夏傳錄)

 

설망어검(舌芒於劍)

혀가 칼보다 날카롭다. 논봉(論鋒)이 날카로움을 말한다.

 

설미(褻味)

맛있게 요리한 음식을 말한다.

 

설부(雪賦)

눈을 읊은 부. () 나라 양 효왕(梁孝王)이 토원(兎園)에다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추양(鄒陽)ㆍ매승(枚乘)ㆍ사마상여(司馬相如)를 불렀다. 때마침 싸락눈이 내리다가 이내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양왕은 북풍시(北風詩)와 남산시(南山詩)을 읊고 나서 상여에게 설경(雪景)을 읊게 하니, 상여는 곧 설부(雪賦)를 지었다. 상여의 설부를 본 추양은 충심으로 감탄, 그 설부를 한 번 읊고 나서 설부의 끝을 이어 적설가(積雪歌)를 지었다. 양왕은 그 적설가를 한 번 읊조리고 나서 매승에게도 한 편 짓게 하니, 매승은 난(; 終章)을 지었던 것이다. 사마상여는 자는 장경(長卿). 그의 작품에는 자허부(子虛賦)상림부(上林賦)대인부(大人賦)가 유명한다. 추양은 변사(辯士)로 유명한다. 매승은 자는 숙(), 문장에 뛰어났음.

 

설부(說郛)

() 나라 도종의(陶宗儀)가 찬술한 총서(叢書)의 서명. 120. () 나라 요안(姚安)ㆍ도정(陶珽) 등이 보완하였다. 내용은 역대의 소설(小說)ㆍ사지(史志) 등이 망라되었으며, 부분별로 저자가 각기 명기되어 있다. 공씨(孔氏)의 잡설(雜說)은 이 중에 한 부분이다.

 

설부기(雪膚肌)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묘고야(藐姑射) 산에 신인(神人)이 사는데 그 살결이 마치 얼음과 눈 같다[肌膚若氷雪].”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선이나 미녀 그리고 특히 매화를 표현할 때 많이 쓴다.

 

설부화용(雪膚花容)

눈처럼 흰 피부와 꽃처럼 고운 얼굴. 빼어난 미인을 말한다.

 

설비(齧臂)

팔뚝을 씹는다는 말로 곧 결심을 뜻하는데, 전국시대(戰國時代) 오기(吳起)가 고향을 떠날 때 자기 어머니와 작별하면서 팔뚝을 씹고 맹세하기를 제가 경상(卿相)이 되지 않고서는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렵니다.” 하였다. 사기(史記)卷六十五 오기전(吳起傳)

 

설비아(說比兒)

왕자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들의 옷을 갈아입게 하는 일. 고려 충렬왕(忠烈王)의 비()인 원()나라의 원성공주(元成公主)가 원자(元子; 후의 충선왕)를 낳자, 왕자와 백관들이 모두 하례하러 가는데 공주의 종자(從者)가 문에서 들어오는 자의 옷을 죄다 갈아입게 하였다.

 

설빈화안(雪鬢花顔)

눈처럼 희고 고운 얼굴.

 

설산(雪山)

천산(天山)의 별칭(別稱)으로 중국 서강성(西康省) 강정현(康定縣)에 있는 산이름이다. 언제나 눈이 쌓여 있으므로 설산 또는 대설산(大雪山)이라 한다.

 

설산동자(雪山童子)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설산(雪山)에서 수도할 때의 이름이다. 열반경(涅槃經)내가 그때 설산에 가니 산이 맑고 깨끗하며, 수림과 약초가 가득하였다.” 하였다.

 

설상(舌相)

불교의 용어인데 삼십이상(三十二相)의 하나인 장광설(長廣舌)을 말한다.

 

설상가상(雪上加霜)

눈 위에 서리가 내림. 엎친 데 덮친다는 말로, 어려운 일이 연거푸 일어남. / 반의어: 금상첨화(錦上添花)

 

설상존(舌尙存)

전국(戰國) 시대의 유세가(遊說家)로서 제후(諸侯)에게 유세하여 소진(蘇秦)의 합종설(合從說)에 반대하고 열국(列國)은 진()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연횡책(連橫策)을 주장했던 장의(張儀), 일찍이 초상(楚相)과 노닐다가 구슬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그들에게 모진 곤욕을 받고는 집에 돌아와 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 혀가 아직 남아 있는지 살펴보시오.” 하자, 그의 아내가 웃으면서 혀가 있습니다.” 하니, 장의는 그것으로 족하오.” 하였다.

 

설상함담홍(舌上菡萏紅)

설법을 잘하는 혀라는 말이다. 불상(佛像)의 등 뒤에는 둥근 광명을 그린다.

 

설생련(舌生蓮)

구마라십(鳩摩羅什)이 평생에 설법(說法)을 잘하였는데, 죽은 뒤에 혀()가 연꽃으로 화()하였다 한다.

 

설생연(舌生蓮)

어느 나무꾼이 호주(湖州) 법화산(法華山)에서 한 줄기 청련(靑蓮)을 발견하고 그곳을 파보았더니 석갑(石匣) 속에 동자(童子)가 들어있었는데 그의 혀가 아직 말짱하고 연꽃은 그 혀 위에서 돋아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평소 법화경(法華經)를 늘 외웠던 소치라 하여 그 산을 법화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연감유함(淵鑑類函)』 『석교부(釋敎部)

 

설석회자유(雪夕懷子猷)

자유(子猷)는 진() 나라 왕휘지(王徽之)의 자()인데, 폭설이 쏟아진 날 밤에 갑자기 친구인 대규(戴逵)가 생각이 나서 밤 내내 배를 몰고 그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설설(渫渫)

설설은 잘못된 독음, 바른 독음과 뜻은 접접(渫渫)’으로 물결이 이어져 있는 모양이다.

 

설설(挈挈)

급한 모양, 절박한 모양

 

설설(泄泄)

맹자(孟子)의 주에선 泄泄은 게으르고 쫓기를 즐기는 모양이다[泄泄, 怠緩悅從之貌].’라고 했으니, ‘해이하고 완만하여 남 따르기만을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대아(大雅) (), 맹자(孟子)』 「이루(離婁)

 

설설(屑屑)

잗단 모양, 부지런한 모양,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모양, 애달프게 구한다. 가랑비가 내리는 모양.

후한(後漢)의 왕량(王良)이 형양(滎陽)으로 부임하는 길에 병이 위독해져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친구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 친구가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충성스러운 말과 기막힌 계책으로 높은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고, 어찌하여 꺼리는 마음도 없이 잗다랗게 굴면서 쏘다니는 것인가[不有忠言奇謀而取大位 何其往來屑屑不憚煩也]”라고 하자, 왕량이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왕량전(王良傳)

 

설수(爇鬚)

명황잡록(明皇雜錄)임금은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다섯 군데의 장막을 설치해 놓고 제왕(諸王)들과 바꿔가며 거처했으므로 이름을 오왕장(五王帳)’이라 했으며, 설왕(薛王)이 병났을 적에는 손수 약을 달이다가 실수하여 수염까지 태웠다.” 하였다.

 

설수(爇須)

자씨(姉氏)의 병구완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의 명신 이적(李勣)의 자씨가 질병이 있자, 이적이 손수 죽을 쑤다가 수염을 태웠던 데서 온 말이다. 당서(唐書)』 「이적전(李勣傳)

 

설숙(雪宿)

설두산인(雪竇山人)을 말한다.

 

설아()

() 나라 이밀(李密)의 애희(愛姬)의 이름인데, 이밀이 매양 빈붕(賓朋)들의 시문(詩文) 가운데 기려(奇麗)한 것이 있으면 설아에게 맡기어 음률(音律)에 맞춰서 노래하게 했던 데서 온 말로, 기예(技藝) 있는 기녀(妓女)를 의미하기도 한다.

 

설아(雪兒)

당 나라 이밀(李密)의 애희(愛姬). 이밀은 손님이나 벗들의 훌륭한 시문을 보면 반드시 그녀로 하여금 음률에 맞춰 노래하게 하였다. 아름다운 기생.

 

설안(雪案)

손강(孫姜)이 집이 가난하여 촛불이 없으므로 항상 눈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었음. 원개(袁凱)의 시에, “瞑歸雪案同溫習……이란 것이 보인다.

 

설야구양체(雪夜歐陽體)

구양수(歐陽修)가 여러 사람과 함께 눈()을 두고 시를 지으면서 옥()ㆍ은()ㆍ경()ㆍ가() 등 눈에 대하여 늘 쓰이는 여러 글자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설야방대도(雪夜訪戴圖)

()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눈 온 날 밤에 대규(戴逵)를 찾아간 광경을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왕휘지는 본디 풍류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일찍이 산음(山陰)에 살 적에 밤 눈이 막 개어 달빛이 청랑(淸朗)하자, 갑자기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가 생각나서, 문득 조그마한 배를 타고 섬계를 향해 밤새도록 가서 친구의 문 앞에까지 이르러서는 들어가지 않고 다시 되돌아와 버렸는데,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본디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온 것인데, 어찌 꼭 안도(安道)를 만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다. 진서(晉書)卷八十

 

설야행(雪夜行)

송 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천하를 평정하기 이전 어느 눈 내리는 날 밤에 조보(趙普)를 찾아가, 지금은 자기가 앉아있는 자리 하나 이외에는 모두가 남의 것이라는 심정을 말하고 조보의 도움을 얻어 뒤에 천하통일을 성취하였다. 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

 

설야회주(雪夜回舟)

손이 왔다가 찾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 왕휘지(王徽之)가 어느 눈 내리는 밤에 섬계(剡溪)에 배 띄우고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갔다가 그의 문 앞까지 가서는 흥이 다하여 찾지도 않고 그냥 돌아와 버린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80,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설영잠(雪盈簪)

옛날에는 머리를 끌어 올려서 상투를 짜고 그 상투에 조그만 관()을 만들어 씌웠는데, 그것을 상투관이라 한다. 그 상투관은 비녀를 만들어서 가로로 상투에 꽂는다. ()은 흰머리칼이요, ()이라 함은 그런 비녀를 말한다.

 

설왕설래(說往說來)

말이 가고 옴. 무슨 일의 시비를 따지느라고 말을 서로 주고받으며 옥신각신 함

 

설월(雪月)

김부륜(金富倫)의 호이다.

 

설월기부방섬주(雪月期浮訪剡舟)

왕자유(王子猷)가 눈 내린 달밤에 배를 타고 섬계(剡溪)로 대안도를 찾으려 했다는 고사. 진서(晉書)』 「왕휘지전(王徽之傳),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설월풍화(雪月風花)

1년 사시(四時)의 경물(景物)을 말한 것이다.

 

설유(猰㺄)

사나운 동물의 이름인데 간신을 비유한 말이다. 이아(爾雅)』 「석수(釋獸)설유는 이리와 비슷한데, 호랑이 발톱을 가졌으며 사람을 잡아먹는다.” 하였다.

 

설의(雪衣)

백앵무(白鸚鵡)를 가리킨다. / 유의어: 설의랑(雪衣娘).

흰옷에 비유한 것이다.

 

설의랑(雪衣娘)

명황잡록(明皇雜錄)영남(嶺南)에서 진상한 앵무새를 궁중에 두고 길러 길이 매우 잘들어 사람의 말을 다 깨쳤는데, 이름을 설의랑이라 하였다. 하루는 귀비의 화장대 위에 날아와 앉으며 새매에게 덮치기 당하는 꿈을 꾸었다.’ 하였다. 귀비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가르쳐 주어 지성으로 지송(持誦)했다. 그 뒤에 데리고 원중(苑中)에 나갔다가 과연 몹시 사나운 새에게 죽음을 당하자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다.” 하였다.

 

설존환치폐(舌存還齒弊)

강한 이는 부러지고 혀는 아무 탈 없다. 안씨가훈(顔氏家訓)』 「면학(勉學)

 

설중송백(雪中松柏)

송백은 눈 속에서도 그 색이 변하지 않는다 하여 사람의 절조(節操)가 굳은 데 비유하는 말이다.

 

설중유객휴회도(雪中有客休回棹)

왕자유(王子猷)는 산음(山陰)에 살고 대안도(戴安道)는 섬계(剡溪)에 살았는데, 눈이 내린 밤에 왕자유가 술이 거나하여 배를 타고 섬계를 거슬러 올라 대안도의 집 문 앞에 이르러서는, 그냥 도로 돌아서므로, 그 이유를 묻자, “내가 처음에 흥이 나서 찾아왔는데, 이제 흥이 식었기에 도로 돌아간다.” 하였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설중지조(雪中指爪)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이 기러기가 날아갔다가 다시 와 보면 흔적이 없게 되듯이 덧없는 인생도 그와 같음을 비유한 것으로, 소식(蘇軾)의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 시에 인생이 이르는 곳에 아는 것이 무엇 같으랴. 응당 나는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과 같으리. 눈 위에 우연히 발자국을 남기었지만, 기러기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서를 헤아리랴[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雲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卷三

 

설창(雪窓)

() 나라 손강(孫姜)이 등불이 없어 눈 온 날 창 앞에서 글을 읽은 고사.

 

설창의(雪氅衣)

신선이 입는다는 새하얀 학창의(鶴氅衣).

 

설촉(薛燭)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사람으로, 칼을 잘 감정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설파(囓破)

깨물다.

 

설편(雪片)

송사리 등 잡어(雜魚) 또는 은빛 물고기를 표현하는 시어(詩語)이다.

 

설포(薛包)

후한(後漢) 때의 효자(孝子). 계모에게 쫓겨났으나 밤낮으로 울며 차마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이문(里門)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정성(定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뒤에 계모도 뉘우치고 다시 그를 맞아들였다 한다. 시중(侍中)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음.

 

설형(雪螢)

() 나라 차윤(車胤)은 여름에 반딧불의 빛을 이용하여 책을 읽었고, 손강(孫康)은 겨울밤에 눈에서 반사되는 빛을 이용하여 책을 읽었다. 이는 가난한 선비가 어렵게 공부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설호(挈壺)

술병으로 양웅(揚雄)의 글에 처세 잘하는 것을 설호(挈壺)에 비유하였다.

 

설홍유(薛弘儒)

신라 때 학자 설총(薛聰)을 말한다.

 

설홍초창전유사(雪鴻怊悵篆留沙)

과거 일을 말한다. 눈에 찍힌 발자국이 눈이 녹으면 없어지므로 하는 말이다.

 

설회초무(雪回楚舞)

()이 돌며 내리듯 기생들이 빙빙 돌면서 춤추는 것을 말한다. 초무는 옛날 초() 나라에서 추던 춤을 말한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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