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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221. 완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21. 완

건방진방랑자 2020. 4. 2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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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완가질(阮家姪)

그 숙부에 그 조카라는 세상의 좋은 평판. () 나라 명사인 완함(阮咸)이 완적(阮籍)의 조카로서 똑같이 죽림칠현(竹林七賢)에 속했으므로 당시에 대완(大阮)과 소완(小阮) 혹은 이완(二阮)이라고 불렸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서(晉書)』 「완함전(阮咸傳)

 

완계사(浣溪沙)

옛 사패(詞牌) 이름이다. 43자로 되어 있다. 사율(詞律)卷三

()의 군악(軍樂) 명칭. 18곡 중의 하나로, 마음이 변한 님을 다시는 생각지도 말고 만나지도 말아야겠다는 슬픈 내용으로 되어 있다.

 

완공(阮公)

완적(阮籍)을 말한다.

 

완공곡도궁(阮公哭途窮)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그는 가끔 마음이 내키면 혼자서 수레를 타고 놀러 나가 오솔길로는 가지 않고 큰길이 끝나면 통곡하고 돌아오곤 하였다.” 한 데서 온 말로, 대개 운명의 공궁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완남(阮南)

가난하면서도 소탈하기로 유명한 진() 나라 완함(阮咸)을 가리킨다.

남쪽의 완씨로, 남완(南阮)과 같다. ()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구성원인 완적(阮籍)과 그의 조카 완함(阮咸)이 예속(禮俗)을 무시하고 청담(淸談)을 일삼으며 자유롭게 살았는데, 완씨 종족으로서 길 북쪽에 사는 부유한 자들은 북완이라 하고 길 남쪽에 사는 완적과 완함은 남완이라 불렀다 한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완함전(阮咸傳)

 

완대(緩帶)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 나라 때 양호(羊祜)가 영병(營兵)을 거느리고 나가서 남하(南夏)를 진압할 적에 군중(軍中)에서 항상 갑옷을 입지 않고 가벼운 갖옷 차림에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지냈던 데서 온 말이다.

 

완도통(阮途痛)

궁도(窮途)의 아픔. () 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완적(阮籍)이 놀러 나갔다가 수레가 통과하지 못하는 곳에 이르러 통곡하고 돌아온 고사(故事)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완동(阮洞)

택당(澤堂)의 거처를 말한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인 진() 나라 완적(阮籍)과 그 조카인 완함(阮咸)을 이완(二阮)이라고 불렀는데, 택당이 자신의 숙부인 동악(東岳)과 병칭하면서 흔히 이 비유를 원용하였다.

 

완랑귀(阮郞歸)

() 나라 때 안기도(晏幾道)가 지은 악부가사(樂府歌詞)의 이름인데, 내용은 곧 머나먼 타향에 기우(寄寓)하는 나그네의 통절한 고민(苦悶)과 유원(幽怨)의 심정을 담은 것이다.

옛날 사패(詞牌)의 곡명(曲名)이다. 한 명제(漢明帝) 때 유신(劉晨)과 완조(阮肇) 두 사람이 천태산(天台山)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선녀(仙女)를 만나 극진한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는 전설에 근거한 노래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41 引用註

 

완름연계(完廩捐階)

맹자(孟子)』 「만장(萬章)그 아버지가 순()에게 창고의 지붕을 이라고 하여 순이 올라가 지붕을 이는 사이에 아버지가 사다리를 떼고 불을 질렀다.” 하였다.

 

완물상지(玩物喪志)

쓸 데 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소중한 자기의 의지를 잃음. 물질에만 너무 집착한다면 마음 속의 빈곤을 가져와 본심을 잃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완벽(完璧)

전국시대(戰國時代) 인상여(藺相如)의 고사(故事)로 구슬을 온전히 지켜 냈다. 어떤 사물이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거나 또는 일처리를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게 한 것을 가리킨다.

 

완보병(阮步兵)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역임한 진() 나라 완적(阮籍)을 이른다. 완적은 천성이 방달불기(放達不羈)하여 때로는 마음 내키는 대로 수레를 타고 아무 곳으로나 가다가 더 이상 갈 수 없이 길이 막히면 통곡하고 돌아왔다 한다. 진서(晉書)』 「완적열전(阮籍列傳)

 

완부(頑夫)

욕심이 많고 고약한 자

 

완부(阮孚)

() 나라 사람. 자는 요집(遙集). 안동 참군(安東參軍)을 지냈다.

 

완부극(阮孚屐)

밀칠한 나막신이 닳도록 여러 번 구경 온다는 말이다. () 나라 완부가 나막신을 매우 아껴 항상 신에다 밀[]을 칠하여 신고 다녔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아량(雅量)어떤 사람이 완부를 찾아가니, 그가 직접 불을 불면서 나막신에 밀[]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스스로 평생에 나막신을 몇 번이나 더 신을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하였다.” 하였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완부전(阮孚傳)

 

완부자(阮夫子)

완 부자는 진() 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을 말하는데, 세속 사람들이 찾아오면 백안시(白眼視)하고 친구 혜강(嵇康)이 술병을 들고 오면 반가워 청안(靑眼)으로 대했다고 한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완적전(阮籍傳)

 

완부호리화교전(阮孚好履和嶠錢)

()나라 때에 완부(阮孚)는 나막신[]에 대한 습벽()이 있어 늘 나막신에 밀[] 칠을 하였고, 화교(和嶠)는 명사(名士)이면서도 돈을 좋아하는 습벽이 있어 항상 손으로 돈을 헤아리고 있었다.

 

완사종(阮嗣宗)

사종은 중국 삼국 시대 위() 나라 사람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의 자()이다.

 

완사천(浣紗泉)

고려 태조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가 주둔하고 있을 적에 목포(木浦)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 위를 바라보니 오색 구름이 서려 있으므로, 그곳을 가 보니 후일 장화왕후(莊和王后)가 될 오씨(吳氏)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 처녀는 앞서 용()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태조는 그 처녀를 불러 동침을 하면서 그가 미천한 신분이라 하여 임신을 시키지 않으려고 정액(精液)을 자리에 쏟았더니, 왕후는 곧 자리를 핥아 빨아먹고 드디어 임신하여 아들 혜종(惠宗)을 낳았다. 그래서 혜종은 얼굴에 자리의 무늬가 있었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섭주()라고 불렀는데, 그곳에는 큰 절을 세워 흥룡사(興龍寺)라 하고, 그 앞에 오씨가 일찍이 빨래했던 우물은 완사천(浣紗泉)이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완산부(完山府)

완산은 전주(全州)의 옛 이름이다.

 

완산자기(完山紫氣)

고려 왕조 5백 년이 다할 무렵에 전라북도 완산(完山; 전주)이 본관인 이성계(李成桂)의 역성 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난 것을 뜻한 말이다.

 

완산조(完山鳥)완산의 새는 새끼 네 마리를 길러서 날개가 다 나면 그들을 사방으로 날려보내려면서 몹시 슬프게 운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안회(顔回)에는 환산(桓山)으로 되어 있다.

 

완생(阮生)

()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을 말한다.

 

완선(頑癬)

피부병을 말한다.

 

완선(頑仙)

이제 막 초보 단계에 접어든 어수룩한 신선이라는 말이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의 봉호(封號)이다.

 

완시(宛市)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남양시(南陽市).

 

완안(完顔)

여진족(女眞族). 대대로 중국 송화강(松花江) 동쪽에 살았는데, () 나라 때에 와서 그 부족이 강대하여 금() 나라를 세웠다.

 

완안(阮眼)

() 나라 완적은 예속(禮俗)의 선비를 싫어하여, 일찍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혜희(嵇喜)가 가서 정중히 조문을 하자 백안(白眼)으로 그를 대하더니, 혜희의 아우인 혜강(嵇康)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가자 그제는 크게 기뻐하여 청안(靑眼)으로 그를 대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완안씨(完顔氏)

() 나라이다.

 

완염(琬琰)

둘 다 옥이른다.

 

완완(宛宛)

구불구불 길게 이어지는 모양, 용이 나는 모양, 부드러운 모양, 나긋나긋한 모양

 

완완(婉婉)

낭창거리는 모양, 착하고 순한 모양, 아름다운 모양, 구불구불 구부러진 모양

 

완완(睕睕)

해가 서산에 지는 모양

 

완우(阮瑀)

삼국 시대에 위()의 완우는 서기(書記)의 솜씨가 뛰어났다는 품평을 받았다.

 

완유(阮隃)

산 이름이다.

 

완유(阮裕)

() 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사광(思曠)인데, 사람은 글을 많이 배우는 것보다는 예절과 겸손한 행동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왕돈(王敦)에게 발탁이 되어 그의 주부(主簿)가 되었으나 그에게 아부하지 않아 쫓겨났으며, 나중에 임해(臨海)ㆍ동양(東陽) 두 군의 태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완적전(阮籍傳)

 

완육미의창(剜肉未醫瘡)

() 나라 섭이중(聶夷中)상전가(傷田家)시에 이월에 새 고치실을 미리 팔고, 오월이면 새 곡식 미리 팔아 세금 바쳐, 우선 눈앞의 부스럼은 고치지만, 도리어 심장의 살을 도려내누나.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剜却心頭肉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농민들의 몹시 어려운 생활고(生活苦)를 의미한다. / 인용: 兎山村舍 錄田父語(서거정)

 

완음획이개(頑陰劃已開)

주역(周易)64() 가운데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하는 지뢰복(地雷復)괘는 동짓날 자시(子時) ()에 시작된다는 송() 나라 소옹(邵雍)의 자반설(子半說)을 인용한 것이다.

 

완이(莞爾)

빙그레 웃는 모양.

 

완적(阮籍)

()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 ()는 사종(嗣宗)으로 제서(諸書)를 박람하였고 특히 노장(老莊)을 모범으로 삼았다. 평소 술을 너무 좋아하여 보병주(步兵廚)에 술이 1백 곡()이나 저장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보병교위(步兵校尉) 벼슬을 구하여 부임하자 매일 술에 취하여 업무를 폐할 정도였으며, 모상(母喪)을 당해서는 술에 취해 통곡하다 피를 쏟고 기절할 정도로 행동이 예절을 벗어났다 한다. 진서(晉書)卷二十一

 

완적곡(阮籍哭)

()의 완적(阮籍)이 아무 곳이나 마음 내키는 대로 가다가 길이 막혀 더 이상 갈 수가 없으면 곧 수레에서 내려 통곡을 하고 되돌아왔었음. 진서(晉書)卷四十九

 

완적곡도궁(阮籍哭途窮)

앞길이 가망이 없음에 상심하여서 통곡하는 것을 말한다. () 나라의 명사인 완적은 사람됨이 활달하여 일반적인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에 답답한 일이 있으면 때때로 혼자서 수레를 타고 마음내키는 대로 길을 가다가 길이 막혀 갈 수 없는 곳에 이르러서는 한바탕 크게 통곡하고서 돌아왔다고 한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완적전(阮籍傳)

 

완적광무탄(阮籍廣武嘆)

() 나라 완적(阮籍)이 광무성(廣武城)에 올라서 옛날 초한(楚漢)의 전쟁하던 터를 보고 탄식하기를, “때에 영웅이 없어서 더벅머리 자식들로 하여금 이름을 이루게 하였도다.” 하였다. 이태백(李太白)은 이 말을 그릇 해석하여, “초한(楚漢) 시절에 영웅이 없어 항우(項羽)ㆍ패공(沛公) 같은 더벅머리 자식들이 이름을 이뤘다는 뜻이라.” 하였고, 소동파(蘇東坡), “완적 자신이 사는 당시에 패공ㆍ항우 같은 영웅이 없어서 조조(曹操)나 사마의(司馬懿) 같은 더벅머리 자식이 이름을 이뤘다는 뜻이다.” 하였다.

 

완적도로곡(阮籍徒勞哭)

() 나라 완적이 혼자 수레를 몰고 나갔다가 길이 막다른 곳에 이르러 문득 통곡하고 돌아온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완적위주환(阮籍爲酒宦)

()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한 사람인 완적이 매우 술을 좋아하여, 보병교위영(步兵校尉營)에는 술 3백 석을 저장해 두었다는 말을 듣고 자청하여 보병교위가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晋書)卷四十九

 

완적장소(阮籍長嘯)

() 나라 사람. ()는 사종(嗣宗),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 박학하였고 장로(莊老)를 즐겼으며, 휘파람을 잘 불고 거문고에 능했다.

 

완적청안(阮籍靑眼)

푸른 눈이란 곧 반겨주는 표정의 눈을 말한다. () 나라 완적이 본디 법도 있는 선비를 미워하여 자기 어머니 초상을 당했을 때, 혜희(嵇喜)가 예의를 갖추어 조문하자 그것이 못마땅하여 눈을 희게 뜨더니, 혜강(嵇康)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가자 그제야 좋아하여 눈을 푸르게 떴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완적전(阮籍傳)

 

완전(宛闐)

한 나라 때 서역(西域) 나라인 대완(大宛)과 우전(于闐)의 합칭이다.

 

완정(玩亭)

왕사진(王士禛)의 호이다. 자는 이상(貽上), 별호는 어양산인(漁洋山人). 신성(新城) 사람이며 문집으로는 대경당전집(帶經堂全集)등이 있다.

 

완정시(玩亭詩)

완정(玩亭)은 왕사정(王士禎)의 호이다. () 나라의 문장가였는데 시에 능하였다.

 

완조(頑操)

맹자(孟子)』 「만장(萬章)백이(伯夷)의 풍도를 들으면 완부(頑夫)도 방정해지고 나부(懦夫)도 신조를 갖게끔 된다.”는 구절이 있다.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의 봉호(封號) 이다.

 

완함(阮咸)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로 완적(阮籍)의 조카이다. 호방하여 세속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음률에 밝아 비파를 잘 탔다.

 

완항(阮巷)

죽림칠현(竹林七賢)인 완적(阮籍)과 그의 조카 완함(阮咸)이 남쪽 마을에서 함께 살았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완항(鵷行)

조정에 늘어선 관리의 항렬(行列)을 말한다. ()은 봉황새의 일종인 원추새로 높은 새이기 때문에 조관(朝官)에 비유한 것이다.

 

완협(緩頰)

비유 등을 해 가며 느릿느릿 말하는 것. 사기(史記)』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緩頰徃說魏豹 能下之 吾以萬戶封若이라고 보인다. / 인용: 통감절요,

 

완화(浣花)

두보(杜甫)가 일찍이 성도(成都)의 완화리(浣花里)에 초당을 짓고 살았는데, 그 근처에는 금강(錦江)과 완화계(浣花溪)ㆍ완화교(浣花橋) 등의 경치 좋은 곳들이 있었다. 성도의 태수가 정월 10일에 출유(出遊)하였다가 419일에 완화계에 이르러서야 그만두었다는 풍속이 전한다.

 

완화계(浣花溪)

두보(杜甫)의 초당(草堂)이 있던 촉() 땅 성도(成都) 금강(錦江) 지류의 시냇가 이름이다.

사천(四川)에 있는 시내 이름이다.

 

완화당(浣花堂)

완화당은 성도(成都) 완화계(浣花溪) 옆에 있던 두보의 초당(草堂)

 

완화락(浣花樂)

만년에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완화는 사천성(四川省) 성도현(成都縣)에 있는 완화계(浣花溪)의 약칭인데, 두보(杜甫)가 여기에서 살았었다.

 

완화소갈객(浣花消渴客)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완화초당(浣花草堂)은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교외의 지류(支流)인 완화계(浣花溪)에 있던 두보의 초당 이름이며, 두보 자신이 소갈증에 걸린 것으로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뛴다. 그의 시에 난리 겪은 성도 참담한 기상, 완화초당 역시 어찌 남아 있으리.[成都亂後氣蕭索 浣花草堂亦何有]”라는 구절과 나의 소갈증 비록 심하나, 우리 황제 수고로움 어찌 감히 잊으리.[我雖消渴甚 敢忘帝力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1 從事行 贈嚴二別駕, 14 別蔡十四著作

 

완화일(浣花日)

419. 이 날 환화계(浣花溪)에서 노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성도(成都)에서 완화일이라 이른다.

 

완화자분(玩火自焚)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완화초당(浣花草堂)

성도(成都)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있던 두보(杜甫)의 초당 이름이다.

 

완화촌(浣花村)

사천성(四川省) 성도현(成都縣) 서쪽 완화계(浣花溪)에 있는 마을로 당()의 시인 두보(杜甫)의 고택(故宅)이 있는데 골짜기가 깊고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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