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왕
왕가(王家)
오대(五代) 시대 전촉(前蜀)을 세운 왕씨(王氏)의 조정을 말한다.
왕가주수(王家珠樹)
① 당나라 왕발(王勃)의 삼형제(三兄弟)가 모두 글을 잘하므로 두이간(杜易簡)이, “왕씨 집의 세 구슬나무라[王家三珠樹].”고 칭찬하였다.
② 왕가(王家)는 당(唐) 나라 때의 왕복치(王福峙) 집을 가리키며, 주수(珠樹)는 선목(仙木)으로 남의 훌륭한 아들을 일컫는 말이다. 복치의 아들 발(勃) 등 5형제가 모두 문장이 뛰어나니 사람들은 주수라고 일컬었다. 한번은 복치가 한언사(韓彦思)에게 아들 자랑을 하자, 언사는 희롱하기를 “무자(武子)는 말을 자랑하는 벽(癖)이 있더니 자네는 아들을 자랑하는 벽이 있네.” 하였다.
왕가주수삼(王家珠樹三)
훌륭한 형제들을 일컫는 말이다. 당(唐) 나라 때 왕거(王劇)ㆍ왕면(王勔)ㆍ왕발(王勃) 3형제가 모두 재사(才士)로 이름이 높아 당시에 이들을 삼주수(三珠樹)라 일컬었다.
왕가착색산(王家着色山)
왕가(王家)는 송(宋) 나라 왕선(王詵)을 가리킨 것으로 자(字)는 진경(晉卿). 시서화(詩書畫)를 잘했으며 동파(東坡) 소식(蘇軾)과 친했다. 착색산은 채색으로 그린 산수화(山水畫). 소식의 왕진경소장착색산(王晉卿所藏著色山) 시에 “그동안 한 번 변하여 풍류가 없어졌으니 누가 장군의 착색산을 보겠는가[爾來一變風流盡 誰見將軍著色山]” 하였다.
왕개(王愷)
진(晉)의 왕개(王愷)는 국척(國戚)으로서 호사와 사치를 좋아하여 그 부유함이 석숭(石崇)과 겨룰 정도였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면 무슨 일이고 기탄없이 저질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라면 모두 무서워 피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추(醜)라 하였다. 『진서(晉書)』 卷九十三
왕개보(王介甫)
개보(介甫)는 송(宋) 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자(字)이다.
왕계묘(王季墓)
왕계(王季)는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아버지로, 임금의 자리에 있지 않았으므로 조정 신하들이 관구에 조회하지 않았다.
왕관곡(王官谷)
사공도가 만년에 중조산(中條山) 왕관곡(王官谷)에 정자를 지어 삼휴라 명명하고 여기에 은거했다.
왕관삼휴(王官三休)
왕관곡(王官谷)은 중조산(中條山)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고, 삼휴는 당 나라 사공도(司空圖)가 지은 정자 이름인데, 여기서는 사공도를 가리킨다. 사공도가 말년에 발병이 나서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 왕관곡에다가 삼휴정을 짓고 살았다. 『구당서(舊唐書)』 卷190 「문원전(文苑傳)」 司空圖
왕교(王喬)
① 왕자 교(喬)로서 주영왕(周靈王)의 태자. 태자 시절에 왕에게 직간하다가 폐해져 서인이 되었다. 그는 젓대를 불어 봉황새 소리를 내었으며 도사(道士) 부구생(浮丘生)을 만나 흰 학을 타고 산꼭대기에서 살았다 한다. 『열산전(列仙傳)』
② 후한 때 사람으로 신술(神術)이 있었는데, 그가 일찍이 섭현 영(葉縣令)으로 있으면서 매월 삭망(朔望) 때마다 거기(車騎)도 없이 머나먼 길을 와서 조회에 참예하므로, 임금이 그를 괴이하게 여겨 그 내막을 알아보게 한 결과, 그가 올 때마다 오리 두 마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오므로, 그물을 쳐서 그 오리를 잡아 놓고 보니, 바로 왕교의 신발이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二
왕교석(王喬舃)
신선들이 신는 신발로, 지방 수령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바, 후한(後漢) 현종(顯宗) 때 하동(河東) 사람 왕교(王喬)가 섭 영(葉令)이 되었는데, 신술(神術)이 있어서 매달 삭망(朔望)에 대궐에 나와 조회에 참석하였다. 황제가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였다. 그러자 태사가 그가 올 때에는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卷82上 「방술열전(方術列傳)」 왕교(王喬)
왕교적석(王喬赤舃)
한 명제(漢明帝) 때 상서랑(尙書郞)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수령으로 내려갔다가, 조정에 올라올 적마다 물오리를 타고 오곤 하였는데, 그 오리를 잡고 보니 상서랑 재직시에 하사받았던 신발이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열전(方術列傳)」 「왕교전(王喬傳)」
왕기(汪錡)
노 애공(魯哀公)의 폐동(嬖童)인데, 제(齊)가 노 나라를 침입할 때 애공의 수레에 배승(陪乘)했다가 죽으니, 애공은 나라를 위하여 죽었다 하여 성인(成人)의 예로 빈(殯)을 하였다. 공자는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좌전(左傳)』 哀公 十一年
왕길(王吉)
한(漢)나라 낭야(琅邪) 고우(皐虞) 사람으로 자는 자양(子陽)인데, 창읍왕(昌邑王) 중위(中尉)로 있을 때 창읍왕이 사냥하길 좋아하여 시도 때도 없이 말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자, 상소하여 사냥을 그만두고 학문에 힘쓰라는 뜻으로 간하였다. 석오사는 까마귀를 쏘아 잡는 노래라는 뜻이다. 곧 다산이, 왕길이 창읍왕에게 사냥을 그만두라고 간한 뜻을 취해 왕길의 입장에 서서 지은 것이다. 『한서(漢書)』 卷七十二 「왕길전(王吉傳)」
왕남전(王藍田)
왕술(王述)을 말한다. 자(字)는 회조(懷祖)이며 산기상시(散騎常侍)ㆍ상서령(尙書令)을 지냄. 남전후(藍田侯)를 습봉했기 때문에 왕남전(王藍田)이라 부른다.
왕내사(王內史)
진(晉) 나라 때 서가(書家)로서 회계내사(會稽內史)를 지낸 왕희지(王羲之)를 말한다.
왕도(王桃)
3천 년에 한 번씩 열린다는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로, 동해 바다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선도(仙桃)를 말한다.
왕도(王導)
자(字)는 무홍(茂弘), 임기(臨沂) 사람. 동진(東晉) 때 승상(丞相)을 지냄.
왕돈(王敦)
진(晉)나라 임기(臨沂)사람인데 그의 종형(從兄) 왕도(王導)와 함께 원제(元帝)를 적극 추대하여 요동대장군 겸 도독육주제군사(遼東大將軍兼都督六州諸軍事)가 되었다가 강주 자사(江州刺史)와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냈다. 나중에는 권력을 잡고서는 군사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왕을 조알(朝謁)하지 않음으로써 조정을 좌지우지할 계획을 갖고 있다가 결국 반란을 일으켜 조정에 들어가 스스로 승상이 되었으며, 원제가 죽은 뒤에 물러나 있다가 또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지휘하던 중 병으로 죽어 결국 실패하고 시신의 목이 잘려 저자 거리에 내걸렸다. 『진서(晉書)』 卷九十八 「왕돈전(王敦傳)」 / 인용: 檄黃巢書(최치원)
왕돈개합(王敦開閤)
진(晉) 나라 때 왕돈(王敦)이 여색(女色)에 빠져 몸이 무척 쇠약해지자 좌우(左右)에서 여색을 삼가라고 간(諫)하므로, 왕돈이 “그것이야 매우 쉬운 일이다.” 하고는, 뒤의 합문(閤門)을 활짝 열어젖히고서 비첩(婢妾) 수십 명을 모두 몰아내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왕랑(王郞)
임공영(臨邛令)으로 있던 왕길(王吉)을 가리킨다.
왕랑담우(王郞啖牛)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소싯적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음식으로 여기는 소 심장을 꺼내 맛본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卷6 汰侈
왕랑회선(王郞回船)
진(晉) 나라 때 호방한 사람으로 유명한 왕휘지(王徽之)가 눈이 내리는 밤 흥에 겨워 배를 저어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를 찾아갔다가 그의 문전에서 다시 되돌아왔다 한다. 『진서(晉書)』 卷八十 「왕휘지전(王徽之傳)」
왕량(王良)
① 말을 잘 다루던 사람. 왕량은 춘추 때 진(晉)의 대부 조간자(趙簡子) 밑에서 말을 몰았던 사람이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下에 “조간자(趙簡子)가 왕량을 시켜 사냥꾼 폐해(嬖奚)의 말을 몰게 하였다.” 하였다. 『논형(論衡)』 솔성(率性)에, “왕량이 말을 몰면 말이 노둔하지 않고, 요순이 정치를 하면 백성들이 어리석지 않다.” 하였다. 죽은 뒤에 말을 관장하는 별이 되었다고 한다.
② 벼슬에 급급하여 친구에게 조롱을 받았던 동한(東漢)의 인물이다. 처음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가던 중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자, 그 친구가 “충성스러운 말이나 기이한 계책도 없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다니, 어쩌면 그렇게도 구질구질하게 거리낌 없이 왔다 갔다 한단 말인가[不有忠言奇謀而取大位 何其往來屑屑不憚煩也].”라고 비난하며 물리쳤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卷27 「왕량전(王良傳)」
왕령(王靈)
‘왕조의 위덕(威德)’을 말한다.
왕령비석(王令飛舃)
왕령(王令)은 후한 때의 섭현령(葉縣令) 왕교(王喬)를 가리키는데, 왕교는 신술(神術)이 있어, 매월 삭망(朔望)이면 그 먼 곳에서 거기(車騎)도 없이 조회를 오곤 하므로, 임금이 그를 이상히 여겨 태사(太史)를 시켜 망을 보게 한 결과, 그가 올 무렵에 오리 두 마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오므로 그물을 쳐서 잡아놓고 보니, 신 한 짝만이 걸려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二
왕리(王李)
왕세정(王世貞)과 이반룡(李攀龍)을 말한다. 명(明) 나라 후칠자(後七子)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감원은 명(明) 나라 때 시문(詩文)으로 이름이 가장 높았던 왕세정을 이르는데, 이반룡 또한 당시 시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으로서 오직 왕세정만을 가장 훌륭하게 여겼고, 세상에서도 이들을 ‘왕리(王李)’라고 병칭하였다.
왕망(王莽)
전한(前漢)의 평제 때 재상을 지냈던 인물로, 훗날 평제를 시해하고 평제의 아들 영(嬰)을 황제로 세운 뒤 섭정을 하며 섭황제(攝皇帝)가 되었다가 3년 만에 결국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여 국호를 ‘신(新)’으로 바꾸었다. 왕망은 고대의 이상적인 국가를 재현한다는 명목 아래 『주관(周官)』이라는 책에 의거해 신나라의 관제(官制)를 제정하였다. 하지만 신나라는 허울만 그러할 뿐 그 내부 모순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주관(周官)』은 『주례(周禮)』라고도 불리는데, 천(天)ㆍ지(地)ㆍ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의 여섯 부문으로 나눠 관제를 편성하고 관직 이름을 정해 놓은 책이다. 주나라의 주공(周公)이 저술한 책이라고 전하나 근대의 학자들은 후대 유학자의 저작으로 본다. 왕망은 재위 15년 만에 살해되고 광무제(光武帝)가 다시 한(漢) 나라를 중흥하게 된다. 이것이 곧 후한(後漢)이다. 『한서(漢書)』 卷九十九
왕망천(王輞川)
망천(輞川)은 당 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별칭이다. 그가 망천의 별장 근처의 승경(勝景)을 20개의 화폭(畫幅)에 담은 ‘망천도(輞川圖)’라는 명화(名畫)가 전한다.
왕맹(王孟)
성당(盛唐)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詩人)이었던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왕맹(王猛)
325년에 태어나 375년까지 살았다. 자가 경략(景略)이고 북해(北海) 사람이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전진(前秦)의 승상을 지낸 인물이다. 젊은 시절 동진(東晉)의 대장(大將) 환온(桓溫)을 찾아가 알현하는 자리에서 여유롭게 이[蝨]를 잡으면서 유창하게 천하를 담론했을 정도로 기백이 출중했던 사람이다. 『진서(晉書)』 卷114 「왕맹열전(王猛列傳)」 / 인용: 韓狗篇(이건창)
왕면(王勉)
당 나라 때 학자. 수(隋) 나라 말기의 대유(大儒)인 왕통(王通)의 손자.
왕명비(王明妃)
한(漢) 나라에서 흉노(匈奴)로 시집간 왕소군(王昭君)을 가리킨다. 그의 본명은 왕장(王嬙)이며 소군은 그의 자(字)였는데, 진(晉) 나라 때 사마소(司馬昭)의 이름을 휘(諱)하기 위하여 이렇게 불렀다. 그는 성제(成帝) 때 궁중에 들어갔는데, 자태가 매우 뛰어났으나 임금은 알지 못하고, 마침내 미인을 요구하는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보내니, 원한이 사무쳐 아들 넷을 낳고 자살하였다. 이때문에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악곡(樂曲)이 생기게 되었다.
왕모(王母)
선녀(仙女)인 서왕모(西王母)의 약칭. 서왕모가 청조(靑鳥)를 사자(使者)로 부렸다 한다.
왕모도(王母桃)
신선인 서왕모(西王母)가 심은 복숭아로, 이를 먹으면 피로가 풀린다고 한다. 일찍이 서왕모가 옥쟁반에 선도(仙桃) 7개를 담아 한 무제(漢武帝)에게 보내주며 말하기를 “ 이 복숭아는 3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습니다.” 하였다 한다.
왕모요지(王母瑤池)
전설상의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거처한다는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의 못 이름이다.
왕몽(王濛)
진(晉) 나라 때 사람으로, 얼굴이 대단히 아름답게 생겼었는데, 한번은 모자(帽子)가 해져서 시장으로 모자를 사러 갔더니, 상점의 주인이 그의 얼굴 잘 생긴 것을 좋아하여 새 모자를 그냥 주었다고 한다. 『진서(晉書)』 卷九十三
왕몽경요(王濛竟夭)
진(晉) 나라 때 왕몽이 나이 39세로 요절하였다. 그는 일찍이 자기가 쓰던 주미(麈尾)를 보고 탄식하기를 “이런 사람은 일찍이 40세를 산 사람도 없었다.” 하였는데, 과연 39세로 죽자 그의 친구 유담(劉惔)이 그의 관(棺)에 주미를 넣어 주고 통곡하였다. 『진서(晉書)』 卷九十七 「왕몽전(王濛傳)」
왕무공(王無功)
무공(無功)은 왕적의 자.
왕문도(王文度)
진(晋) 나라 왕탄지(王坦之)의 자(字)이다. 그의 아버지 왕술(王術)이 아들을 사랑하여 아들이 자란 뒤에도 무릎 위에 앉게 하였다.
왕문중(王文中)
수(隋)의 대학자 왕통(王通)을 이른다. 문하에 수천 명의 생도가 있었으며, 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ㆍ위징(魏徵)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문중자(文中子). 『당서(唐書)』 卷164
왕방야화(王逄野火)
왕방(王逄)은 바둑의 명수인데, 두목(杜牧)의 송국기왕방시(送國棋王逄詩)에 “형세가 약세에 몰린 듯하면서도 봄 샘물처럼 유장한 진(陣)을 구축하고 기회가 포착되면 들불처럼 맹렬한 기세로 공격한다.” 하였다.
왕범(王范)
북송(北宋) 시대 현상(賢相)들이었던 왕단(王旦)ㆍ범중엄(范仲淹)을 합칭한 말이다.
왕부(王裒)
진(晉) 나라 사람으로 아버지 의(儀)가 안동장군(安東將軍) 사마소(司馬昭)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시전(詩牋)을 읽다가 “슬프다 부모이시여, 나를 나으시느라 애쓰고 수고로우셨다[哀哀父母 生我劬勞].”는 대목에 이르면 책을 덮고 울었으므로 문인들이 그 시를 배우지 못했다. 『소학(小學)』 「선행(善行)」
왕부(王符)
후한(後漢)의 학자. 세상을 분하게 여기고 시속을 미워하여 은거하며 ‘잠부론(潛夫論)’ 10권을 지어 당시의 득실(得失)을 논하였다.
왕부(王府)
국사범(國事犯)을 취급하는 의금부(義禁府)를 가리킨다. 왕옥(王獄)과 같은 의미다. / 인용: 有客行(성해응)
왕부현(王鳧縣)
지방의 현(縣)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선인(仙人) 왕교(王喬)가 섭현(葉縣) 영(令)으로 있으면서 거기(車騎)도 없이 삭망(朔望) 때마다 조정에 나오므로, 그를 이상하게 여겨 엿보게 한 결과, 그가 올 무렵에 쌍부(雙鳧)가 동남쪽에서 날아오므로 그물을 쳐서 이를 잡아 놓고 보니, 신 한 짝이 들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三
왕비(王伾)
당(唐) 나라 사람으로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냈는데 성품이 비루하여 뇌물을 좋아하였다. 『신당서(新唐書)』 「왕몽전(王濛傳)」
왕사(王謝)
왕(王)은 동진(東晉)의 왕도(王導)를 말하며, 사(謝)는 사안(謝安)의 후손을 말하는데, 그들의 가문에는 대대로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전해 온다.
왕사(王事)
임금을 위해 복무하는 일. 곧 공사(公事).
왕사가(王謝家)
육조(六朝) 시대의 망족(望族)인 왕씨(王氏)와 사씨(謝氏)의 병칭이다. 후대에는 고문 세족(高門世族)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유우석(劉禹錫)의 시 ‘오의항(烏衣巷)’에, “옛날에 왕씨 사씨 집 앞 살던 제비가, 날아와서 심상한 백성집에 들어가네[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하였다.
왕사난옥(王謝蘭玉)
육조 시대의 망족(望族)인 왕씨(王氏)와 사씨(謝氏) 집안에서 배출된 걸출한 자손들을 가리키는데, 특히 진(晉) 나라 사현(謝玄)이 “지란옥수(芝蘭玉樹)가 집안 섬돌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는 것처럼 하겠다.”고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대답한 고사가 유명하다. 『진서(晉書)』 卷79 「사안열전(謝安列傳)」
왕사례(王思禮)
원래 고려 사람으로서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임)을 수복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서 벼슬이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음.
왕사록(王士祿)
청 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저(子底), 호는 서초(西樵). 이부 고공 원외랑(吏部考工員外郞)을 지냈고 시에 능하였으며 특히 맹호연(孟浩然)의 시를 좋아하였다. 그 동생 사우(士祐)ㆍ사진(士禛)과 함께 삼왕(三王)으로 일컬어진다.
왕사종(王嗣宗)
송(宋) 나라 때 왕사종이 빈주수가 되었을 적에 그 성(城) 동쪽에 영응공묘(靈應公廟)가 있고 그 곁에는 산혈(山穴)이 있어 뭇 여우들이 여기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요무(妖巫)가 그 여우를 가지고 사람의 화복(禍福)을 점치므로, 백성들이 그것을 매우 믿어 수재ㆍ한재나 질병에 대하여 모두 여기에 기도를 하였고, 다른 관장(官長)들도 이곳에 부임하면 으레 그 사당을 참배한 다음에야 일을 보곤 했는데, 왕사종은 그곳에 부임하자마자 그 사당을 불태우고 그 여우들을 모조리 잡아죽임으로써 그곳의 음사(淫祀)가 마침내 폐해졌던 데서 온 말이다. 『송사(宋史)』 卷二百八十七
왕사진(王士禛)
청 나라 사람으로 자는 이상(貽上), 호는 완정(阮亭)이고 별호는 어양산인(漁洋山人)이다. 시를 잘하여 일대(一代)의 정종(正宗)이 되었으며, 죽타(竹坨) 주이준(朱彝尊)과 함께 주왕(朱王)이라 일컬어진다. 저서에 『대경당집(帶經堂集)』ㆍ『지북우담(池北偶談)』 등이 있다.
왕사축승(王思逐蠅)
왕사(王思)는 위(魏) 나라 사람인데 성질이 급하였다. 글씨를 쓰는데 파리가 붓끝에 앉자 두세 번 쫓았으나 또 날아오니 왕사가 분이 나서 일어나 파리를 쫓았다. 그래도 되지 않자 붓을 땅에 던지고 밟아 망가뜨렸다. 『위략(魏略)』 「가리전(苛吏傳)」
왕상(王祥)
진(晉) 나라 때 효자(孝子). 자기에게 모질게 대하는 계모(繼母)에게 극진히 효도하였는데 추운 겨울날 그 어머니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하자 왕상이 냇물에 나가 고기를 잡기 위해 얼음을 깨려 하니, 얼음이 갑자기 저절로 깨지면서 잉어 두 마리가 뛰어나오므로 그것을 가져다가 어머니를 봉양했다 한다. 『진서(晉書)』 卷三十三 「왕상전(王祥傳)」
왕생(王生)
한(漢) 나라 때의 처사(處士)로서 일찍이 황로(黃老)의 도를 닦았고, 기발한 계책으로 죽임을 당하게 된 정위(廷尉) 장석지(張釋之)를 구해 주기도 했다. 『한서(漢書)』 卷五十
왕생읍우의(王生泣牛衣)
왕장(王章)이 제생(諸生)이 되어 장안(長安)에서 공부할 적에 아내와 함께 있었다. 왕장이 병이 들자 이불이 없어 우의(牛衣짚으로 엮은 거적)를 덮고 누워서 그 아내와 이별할 것을 결단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이다. 『한서(漢書)』 卷七十六 「왕장전(王章傳)」
왕섭령(王葉令)
후한 현종(顯宗) 때에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원이 되었는데 신술(神術)이 있었다. 그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와서 조회하니 명제(明帝)는 그가 자주 오는데도 거마(車馬)를 볼 수 없으므로, 태사(太史)를 시켜 지켜보게 했다. 쌍오리가 남쪽에서 날아오기에 그물로 잡았는데 한 쌍의 신[舃]을 얻었다는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卷一百十一
왕세정(王世貞)
명(明) 나라 때 시문(詩文)으로 이름이 가장 높았던 사람으로서 이반룡(李攀龍) 세상에서는 ‘왕리(王李)’라고 병칭하였다.
왕소군(王昭君)
전한(前漢) 효원제(孝元帝)의 궁녀(宮女)로 이름은 장(嬙), 소군은 그의 자이다. 명비(明妃)라고도 한다. 그는 황제의 칙명(勅命)으로, 흉노(匈奴) 호한선우(呼韓單于)에게 시집갔다. 원제가 후궁이 매우 많아 일일이 볼 수가 없기 때문에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려오게 하여 시중들 여인을 고르곤 하였다. 이에 후궁들이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써서 자기 모습을 잘 그려주기를 청하였는데, 왕소군은 뇌물을 쓰지 않음으로 인해서 천자를 모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흉노(匈奴)가 그들의 왕비인 알씨(閼氏)로 삼을 미인을 보내달라고 요청해 왔기에, 그림을 보고 왕소군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왕소군이 흉노로 떠날 때 원제가 그녀를 불러서 보니 후궁 가운데 제일의 미인이었으므로 노하여 화공들을 모두 처형했다. 왕소군은 흉노의 왕비가 되어 그곳에서 죽었으며, 그녀의 무덤을 청총(靑塚)이라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 卷二
왕손(王孫)
① 귀공자란 뜻으로 존칭(尊稱)이다.
② 왕자(王者)의 자손을 이르는데, 『초사(楚辭)』 「초은사(招隱士)」에 “왕손은 놀러 나가 돌아오지 않고 봄 풀은 나서 무성하구나[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하였다.
왕손불귀 춘초처처(王孫不歸 春草萋萋)
『초사(楚辭)』 회남소산왕(淮南小山王) 「초은사(招隱士)」에 “왕손은 놀러 나가 돌아오지 않는데, 봄풀은 저절로 나서 무성하구나[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 하였다.
왕손유불반(王孫遊不返)
왕손(王孫)은 ‘귀족의 자제’를 가리키는 말로, 『초사(楚辭)』 회남소산(淮南小山) 「초은사(招隱士)」의 “왕손은 놀러 나가 돌아오지 않고, 봄풀만 무성하게 자라났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왕손유선령(王孫有先令)
한(漢) 나라 양왕손(楊王孫)이 황로학(黃老學)에 심취한 데다 당시의 후장(厚葬)하는 세태를 바로잡으려는 마음에서, 병들어 죽기 전에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는 벌거벗은 몸으로 땅속에 들어가 자연의 도를 따르려 하니 내 뜻을 어기지 말라. 죽으면 포대로 시신을 감싸서 일곱 자 땅 밑에 집어넣은 뒤 곧바로 발 있는 부분부터 포대를 꺼내 직접 살이 땅에 닿도록 하라.”고 하였던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 卷67 「양왕손전(楊王孫傳)」
왕손초(王孫草)
① 궁궁이[蘼蕪]의 별칭으로 향기가 많은 약초이다. 멀리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할 때 쓰는 말로, 한(漢) 나라 회남(淮南) 소산(小山)의 「초은사(招隱士)」에, “왕손은 노닐면서 돌아오지 않고, 봄풀은 나서 무성하구나[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 한 데서 온 말이다.
② 회남소산(淮南小山)이 지은 『초사(楚辭)』인 「초은사(招隱士)」의 “왕손의 노닒이여 돌아가지 않고, 봄풀이 자람이여 우거졌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에서 온 말로, 고향땅을 떠난 사람의 수심을 불러일으키는 정경을 표현할 때 흔히 쓰인다.
왕쇄장참주일착(枉碎長鑱鑄一錯)
줄(톱을 쓰는 기구)인데 그 음이 착오(錯誤)란 착(錯) 자(字)와 같으므로 이렇게 썼다.
왕숙(王肅)
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의 경학자(經學者)로서 오경(五經)에 대한 주해(註解)를 저술했었다.
왕술란(王述卵)
왕술은 진(晉) 나라 사람으로 벼슬은 산기상시(散騎常侍)였다. 초년에 성질이 너무 급하여 한번은 계란을 먹는데, 젓가락으로 찌르려 하자 뒹굴고 잡히지 않았다. 술은 노하여 땅에 던졌으나 또한 그치지 않고 뒹굴었다. 술은 의자에서 내려와 나막신 이빨로 밟았으나 역시 잡히지 않으니 크게 노하여 입안에 넣고 깨뜨린 다음 뱉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뒤에는 성질을 고쳐 매우 침착하였다. 『진서(晉書)』 「왕술전(王述傳)」
왕승변(王僧辯)
양(梁) 나라 장군. 자는 군재(君才). 그는 후경(侯景)의 난을 평정했고, 뒤에 영녕군공(永寧郡公)에 봉해짐. 『양서(梁書)』 「왕승변전(王僧辯傳)」
왕승상(汪丞相)
송(宋) 나라 사람 왕응신(汪應辰)인데, 벼슬이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고 일찍이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가 되었다. 주자(朱子)는, “왕단명(汪端明)은 한 시대 선인(善人)의 종주이다.”라고 칭하였다.
왕식(王式)
당(唐) 나라 의종(懿宗) 때 무령 절도사(武寧節度使)로 나가, 은도(銀刀) 등의 칠군(七軍)을 모조리 복주(伏誅)시키고 서(徐) 땅의 난리를 평정하였다. 『구당서(舊唐書)』 卷19
왕식(往食)
자상(子桑)은 자상호(子桑戶), 그는 자여(子輿)와 친한 친구였는데 열흘 동안이나 장마가 지자, 자여는 “자상이 거의 병들었을 것이다. 나는 밥을 싸가지고 가서 먹여야겠다.” 하고는 자상호의 문에 이르니, 그는 노래하는 듯 우는 듯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한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왕심사직척(枉尋思直尺)
맹자(孟子)의 제자인 진대(陳代)가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편다[枉尺而直尋].”는 고어를 인용하여, 맹자에게 한 번 먼저 굽혀서 제후를 만나보기만 하면 크게는 왕천하(王天下)도 할 수 있을 것이니, 소절(小節)을 굽히고 먼저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자, 맹자는 매우 불가하다는 뜻으로 말하기를 “대체로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편다는 것은 이(利)를 가지고 한 말이니, 만일 이만을 추구하자면 여덟 자를 굽혀 한 자를 펴는 일이라도 해야겠느냐.”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왕심자(枉尋者)
진대(陳代)가 맹자(孟子)에게 말하기를, “한 자(尺)를 굽혀서 심(尋)을 곧게 할 수 있다면 하여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당신은 왜 몸을 굽혀서 제후(諸侯)를 보지 않습니까.” 하니, 맹자가 답하기를, “내가 몸을 굽혀서 제후를 본다면, 그것은 심(尋)을 굽혀서 자(尺)를 곧게 하는 것이니, 그 짓을 한다는 말인가.” 하였다. 심은 10척(尺)으로 여기서는 자기의 몸을 굽혀서 부귀(富貴)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왕심직척(枉尋直尺)
작은 욕은 돌아보고 큰 일을 하지 않음.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왕양재위 공우탄관(王陽在位 貢禹彈冠)
왕양(王陽)은 한(漢) 나라 때의 왕길(王吉)의 자가 자양(子陽)이므로 그를 가리키는데, 왕길과 공우(貢禹)는 서로 친구 사이로서 취사(取捨)를 똑같이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들을 일컬어 “왕양이 벼슬에 나가면 공우가 관의 먼지를 턴다[王陽在位 貢禹彈冠].”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卷七十二
왕어(王魚)
왕상(王祥)의 고사이다. 왕상의 계모가 생선을 먹고 싶어하였는데, 이때 추위가 몰아쳐 얼음이 꽁꽁 얼었다. 왕상이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얼음이 저절로 쪼개지며 잉어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진서(晉書)』 卷 33
왕언승(王彦昇)
송(宋) 나라 초기에 원주 방어사(原州防禦使)가 되었는데 법을 범한 강인(羌人)에게 바로 형벌을 가하지 않고 관속들을 모아 잔치하다가 대뜸 범인의 귀를 찢어 씹어 먹었으므로 강인들이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엄주(王弇州)
감주는 명대의 문장가인 왕세정(王世貞)의 호이다. 자는 원미(元美), 호는 봉주(鳳洲)ㆍ감주산인(弇州山人)이라고도 한다.
왕역의(往役義)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서 벼슬할 경우에는 높은 관직을 사양하고서 성문을 지키거나 딱따기를 치며 순찰도는 일(抱關擊柝) 등의 낮은 자리에 거해야 하는데, 부득이 조정에서 나라의 일을 위하여 부를 때에는 또 개인의 사정을 돌보지 말고 나아가서 일하는 것이 의리에 합당하다[往役 義也]는 뜻이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왕연수(王延壽)
후한(後漢) 때 사람. 그는 재주가 특출하여 어릴 때 노(魯) 나라에 유람하다가 영광전부(靈光殿賦)를 지었음. 채옹도 영광전부를 지었으나 연수의 부를 보고 매우 칭탄하고 자기의 부를 태워버렸음.
왕열(王烈)
진(晉) 나라 때 왕열은 항상 석수(石髓) 즉 석종유(石鍾乳)를 먹었으며 나이 3백 28세가 되도록 젊은이의 얼굴과 같았는데, 한번 태항산(太行山)에 들어간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었다 한다.
왕옥이산(王屋移山)
왕옥산(王屋山)은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산으로, 우공(愚公)이 산을 옮긴 고사를 말한다. 북산(北山)에 사는 우공이 나이가 90에 가까웠는데, 집 앞에 태항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 두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출입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그 산을 없애서 평평하게 할 결심을 하였다. 지수(智叟)가 그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는 우공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러자 우공은 “내가 죽으면 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있어서 자자손손 끊이지 않을 것이다. 산은 더 높아지지 않으니 어찌 이루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면서 날마다 쉬지 않고 산을 파내었다. 그러자 상제(上帝)가 산을 옮겨 주었다고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왕완(王琬)
청(淸) 나라 사람. 호는 둔옹(鈍翁). 왕완은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예학(禮學)에 이르기까지 발명(發明)한 것이 많았다.
왕완정(王阮亭)
청 나라 시인 왕사정을 말한다.
왕왕(汪汪)
물이 넓고 깊은 모양, 도량이 넓음, 눈에 눈물이 괴어 있는 모양, 곧 울 것 같은 눈의 형용
왕우(王遇)
주희(朱熹)의 문인. 자가 자합(子合)이다.
왕우군(王右軍)
왕희지(王羲之)를 말한다. 진대(晉代)의 저명한 서예가로 일찍이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냈기 때문에 왕우군이라 부른다.
왕우군난정(王右軍蘭亭)
왕희지(王羲之)가 3월 3일에 회계(會稽)의 난정(蘭亭)에서 놀면서 「난정서(蘭亭序)」를 지었다.
왕우칭(王禹偁)
송(宋) 거야(鉅野) 사람. 자는 원지(元之). 아홉 살 때부터 문장에 능했으며, 소축집(小畜集)ㆍ집의(集議)ㆍ오대사궐문(五代史闕文) 등 저서가 있다.
왕운시(王惲詩)
왕운(王惲)은 원(元) 나라 때 사람인데, 그의 ‘농어를 먹다[食鱸魚]’라는 시에 “농어를 옛사람이 좋아했기에 내 또한 오강엘 왔노니, 가을 바람은 이미 지나갔으나, 순로의 향기가 맘에 만족하구려. 내가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특이한 고기를 맛보지 않을 수 있으랴. 큰 입에 아가미는 겹으로 나왔는데, 섬세한 비늘은 눈빛과 겨루어라. …… 기름진 살은 해조보다 낫고, 좋은 맛은 하방을 능가하구나 …… (鱸魚昔人貴 我因次吳江 秋風時已過 滿意薄鱸香 我非爲口腹 物異可闕嘗 口哆頰重出 鱗纖雪爭光 …… 肉膩勝海鯈 味佳掩河魴 ……)”하였다. 『추간집(秋澗集)』 卷四
왕원미(王元美)
명(明) 나라 왕세정(王世貞)의 자(字)이다. 그는 호를 봉주(鳳州) 또는 엄주산인(弇州山人)이라 하고, 고문(古文)을 좋아하였으며, 당시 시문(詩文)에 있어 이반룡(李攀龍)과 함께 이름이 높았음. 저서에는 엄산당별집(弇山堂別集)ㆍ고불고록(觚不觚錄)ㆍ엄주산인사부고(弇州山人四部稿)ㆍ독서후(讀書後) 등이 있다.
왕원지(王元之)
원지(元之)는 송(宋) 나라 사람 왕우칭(王禹稱)의 자(字)이다. 호는 뇌하(雷夏). 당 태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사문(詞文)에 능해 삼출부(三黜賦)를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음. 저서에는 『소축집(小畜集)』ㆍ『승명집(承明集)』 등이 있다.
왕유(王維)
성당(盛唐)시의 대표적 자연 시인. 자는 마힐(肹詰). 상서우승(尙書右丞)을 지냈고 시ㆍ서ㆍ화(詩書畵)에 능했다. 저서에 『왕우승집(王右丞集)』이 있다.
왕윤노이(王倫怒移)
해계(解系)가 조왕 윤(趙王倫)과 함께 저강(氐羌)을 토벌할 때 영인(郢人) 손수(孫秀)와의 의견 대립이 있어, 손수를 베어 저강에게 사례해야 한다는 소(疏)를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뒤에 윤과 수가 이 숙감으로 그를 몰아 죽이려 할 때 나는 물속에 있는 게(蟹)만 보아도 미웁거든 하물며 나를 얕잡아 보는 그들 형제이랴.”며 끝내 해치고 말았다. 『진서(晉書)』 「해계전(解系傳)」
왕융(王戎)
①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로 자(字)는 준충(濬沖)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신채(神彩)가 뛰어나 태양을 보아도 현란하지 않았다. 배해(裵楷)는 “왕융의 눈동자는 바위 밑에 번쩍이는 번갯불과 같다.” 하였다. 『진서(晉書)』 「왕융전(王戎傳)」
② 진대(晉代) 사람. 자는 준중(濬仲), 시호는 원(元).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1인. 혜제(惠帝) 때에 가후(賈后)에게 신임받아 사도(司徒)가 되었으나 한 일이 없었고, 욕심이 많아 전원(田園)을 각 주(州)에 두고서 친히 주판을 놓아 밤낮 회계를 맞추었으며, 집에 좋은 오얏나무가 있었는데 누가 종자를 받을까 싶어 씨에다 송곳질을 했다 한다. 『진서(晉書)』 卷 四十三
왕융불수(王戎不數)
왕융(王戎)은 진(晉) 나라 사람으로 자는 준충(濬冲)이다. 매우 총명하고 풍모가 청수하여 당시의 명사인 완적(阮籍)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죽림칠현(竹林七賢) 속에 끼었으나, 의기를 숭상하고 청담(淸談)을 지향하는 그 무리들과는 달리 명예욕이 강하고 탐욕이 많아 높은 벼슬을 지내고 재산을 한없이 증식하였다 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진서(晉書)』 卷四十三 「왕융전(王戎傳)」
왕융찬이핵(王戎鑽李核)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왕융이 자기 집에 좋은 종자의 오얏이 있어 이를 팔아서 돈을 모았는데, 그는 항상 남이 그 오얏 종자를 얻어 갈까 염려하여 오얏씨에 구멍을 뚫어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卷四十三
왕이(王李)
명 나라 가정칠자(嘉靖七子)인 왕세정(王世貞)ㆍ이반룡(李攀龍)을 말한다.
왕이(王姨)
진(晉) 나라 때 왕연(王衍)의 아내 곽씨(郭氏) 부인이 성질이 고집스럽고 괴팍한데다 탐욕이 많아 무리하게 재물을 모으곤 하여, 왕연이 그를 금하려 해도 되지 않았는데, 당시 그 고을 사람인 유주 자사(幽州刺史) 이양(李陽)이 경도(京都)에서 의협심(義俠心)이 많기로 유명한 사람이어서 곽씨 부인이 본디부터 두려워하던 중이었으므로 왕연이 곽씨 부인에게 “당신의 행위를 나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양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하니, 곽씨 부인이 이 말을 듣고는 그런 짓을 못 했다는 고사이다. 이 사실이 『진서(晉書)』와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다같이 나온다.
왕일(王逸)
후한(後漢) 때 사람. 자는 숙사(叔師), 순제(順帝) 때 시중(侍中)을 지냈고, 『초사장구(楚詞章句)』를 지었음.
왕일소(王逸少)
일소는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자교(王子喬)
① 신선은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 진(晋)인데, 불로장수했다고 한다.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에 놀러 가서 도사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숭고산(崇高山)에 올라갔다. 30여 년 뒤 산으로 찾아간 환량(桓良)을 보고, “우리집에 알려서 7월 7일에 구씨산 꼭대기에서 나를 만나도록 하라.” 했는데, 그 날이 되자, 과연 하얀 학을 타고 산 머리에 나타났다가 떠나갔다고 한다.
②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 진(晉)을 말한다. 직간(直諫)을 하다가 폐세자(廢世子)가 되어 구씨산(緱氏山)에 들어가 학을 타고 퉁소를 불며 신선(神仙)이 되어 갔다 한다. 『열산전(列仙傳)』
왕자량(王子良)
남제(南齊) 때의 경릉 문선왕(竟陵文宣王) 소자량(蕭子良)을 이르는데, 그가 일찍이 밤에 학사(學士)들을 모아 놓고 시를 지을 때 사운(四韻)의 경우는 촛불 일 촌(一寸)이 탈 동안에 다 짓기로 하여 이것을 규정으로 삼았던 데서 온 말이다. 『남사(南史)』 卷五十九
왕자승구령(王子昇緱嶺)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인 왕자 교(王子喬)가 신선이 되고 나서 7월 7일에 구씨산(緱氏山) 정상에 학을 타고 날아와 가족들을 만나고 떠난 전설이 있다. 『열산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
왕자안(王子安)
자안은 초당(初唐)의 문장가인 왕발(王勃)의 자(字)이다. 그는 6세에 이미 글을 지었으며, 초당의 사걸(四傑)의 하나로 일컬어지며, 저서에는 왕자안집(王子安集) 16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文藝傳ㆍ『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왕자유(王子猷)
자유(子猷)는 동진(東晉) 때 고사(高士)인 왕휘지(王徽之)의 자이다. 왕휘지는 그가 사는 곳마다 대나무를 심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대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어찌 하루인들 차군(此君)이 없이 지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진서(晉書)』 卷80 「왕휘지열전(王徽之列傳)」
왕자응림오류가(王子應臨五柳家)
왕자(王子)는 즉 진(晉) 나라 때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 오류 선생은 도연명(陶淵明)의 호이다. 왕홍이 도연명을 알고 싶었으나 만날 길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여산(廬山)에 온다는 말을 듣고 술을 준비하여 중도인 율리(栗里)로 나가 만났다는 고사이다. 『남사(南史)』 卷七十五 「도잠전(陶潛傳)」
왕자지출적(王子之出迪)
왕자는 미자(微子)를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에서 기자가 미자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지금 재앙이 닥쳐오고 있는데 나는 그 화를 받을 작정이다. 그러나 나라가 망해도 남의 신하 노릇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왕자는 어서 떠나라. 그것이 도에 합치된다.”고 하였다.
왕자진(王子晉)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 진(晋). 피리(笙)를 잘 불어 봉의 울음소리를 냄. 뒤에 후령(緱嶺)에서 신선이 되어 백학(白鶴)을 타고 갔다 한다. 『열산전(列仙傳)』
왕저(枉陼)
지금의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왕수(枉水)의 가운데 있는 섬 이름이다.
왕적향(王績鄕)
술에 취해 잠든 것을 말한다. 당(唐) 나라 왕적(王績)이 술을 몹시 좋아하여 취향기(醉鄕記)라는 주보(酒譜)를 저술하였다. 후세에서는 이를 인하여 ‘취향(醉鄕)’이란 의미로 쓰게 되었다. 『신당서(新唐書)』 卷196 「은일열전(隱逸列傳)」 王績
왕전사벌초(王翦辭伐楚)
자신 없는 일은 착수하지 않음. 왕전(王翦)은 전국(戰國)시대의 이름난 장수로서 진시황(秦始皇)을 도와 조(趙)ㆍ연(燕)등의 나라를 평정하고 초(楚)를 치기 위해 다시 회의를 했는데, 이때 이신(李信)은 병력 20만을 요청한 데 반해 왕전은 60만 병력이 아니면 정벌에 나갈 수 없다고 하여, 처음에 이신을 시켰다가 패하고 나서 다시 왕전을 기용하여 초를 평정하였다. 『사기(史記)』 卷七十三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왕절신(王節信)
후한(後漢) 때 자(字)가 절신(節信)인 왕부(王符)가 당시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며 세상을 개탄하는 잠부론(潛夫論) 30여 편을 지었다.
왕정(王程)
왕사(王事)를 위해 분주하는 여정(旅程)을 말한다.
왕정(王鄭)
왕흡(王洽)과 정건(鄭虔). 모두 당(唐) 나라 사람으로 그림과 시문(詩文)에 이름이 높았다.
왕존애관(王尊愛官)
한(漢) 나라 왕양(王陽)이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어 험준하기로 유명한 구절판(九折阪)을 넘어다니게 되자 부모님이 주신 몸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그 뒤에 왕존이 자사가 되어 구절판을 넘을 때에는 마부에게 빨리 말을 몰라고 다그치며 “왕양은 효자이지만 왕존은 충신이다[王陽爲孝子 王尊爲忠臣].”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왕존전(王尊傳)」
왕존질어(王尊叱馭)
한(漢) 나라 때 왕양(王陽)이 일찍이 익주 자사(益州剌史)가 되어 관할 지방을 순행하다가 공래산(邛郲山) 구절판(九折阪)에 이르렀을 때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인(先人)의 유체(遺體)를 받들고 어떻게 이런 험한 곳을 자주 다닐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뒤에 왕준(王尊)이 익주 자사가 되어서는 이곳을 지나면서 아전에게 묻기를, “이곳이 바로 왕양이 두려워하던 길이 아니냐?”하고는, 그의 마부에게 말을 몰도록 질책하면서 말하기를, “왕양은 효자가 되었으니, 왕준은 충신이 될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왕좌(王佐)
제왕(帝王)을 보좌할 사람이라는 말인데, 제갈량(諸葛亮)이 왕좌의 재주를 가지고 처음에 초가집에 누웠다가 뒤에 유현덕(劉玄德)의 간청을 받고 나와서 공을 이루었다.
왕주(王冑)
수(隋) 나라 시인. 수 양제(隋煬帝)보다 시가 낫기 때문에 늘 미움을 받다가 그로 하여 해침을 당했다.
왕준(王濬)
진(晉) 나라 장군. 자는 사치(士治). 홍농(弘農) 사람으로 익주자사(益州刺史)를 지냈으며, 오(吳) 나라를 치기 위하여 누선(樓船)을 제조, 드디어 오왕(吳王) 손호(孫皓)를 사로잡고 오 나라를 멸하였다. 벼슬이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에 이르렀음. 『진서(晉書)』 「왕준전(王濬傳)」
왕중선(王仲宣)
동한(東漢) 사람 왕찬(王粲)의 자. 일찍이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일이 있다.
왕진(王振)
명 나라 영종 때의 환관(宦官)으로, 사례감(司禮監)이 되어 전횡을 하였는데, 영종이 항상 선생(先生)이라고 불렀으며, 공경 대신들이 옹보(翁父)라고 불렀다. 먀선(乜先)이 침입하였을 때 영종을 따라갔다가 토목(土木)에서 전사하였다. 영종이 다시 복위한 뒤에 그를 잊지 못하여 정충사(旌忠祠)를 세웠다. 『사략(史略)』 卷九 「영종헌황제(英宗獻皇帝)」
왕진경(王晉卿)
진경(晉卿)은 송 나라 때 화가로 이름난 왕선(王詵)의 자이다.
왕질(王銍)
송 나라 학자. 자는 성지(性之). 송대(宋代) 고사에 밝았으며, 저서에는 『운계집(雲溪集)』ㆍ『보시아소명록(補侍兒小名錄)』 등이 있다. 일설에는, 『속잡찬』을 왕군옥(王君玉)의 찬이라고도 한다.
왕찬(王粲)
삼국시대 위(魏) 나라 산양(山陽) 사람으로 자는 중선(仲宣)인데, 후한 헌제(後漢獻帝)가 서쪽으로 피신할 때 따라서 장안(長安)으로 갔다가 그곳이 혼란하자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여 15년 동안 지낸 뒤에 조조(曹操)에게 돌아가 승상연(丞相掾)을 지냈다. 널리 배워 아는 것이 많고 문장력이 뛰어났는데, 당시의 학자 채옹(蔡邕)은 그의 재주를 훌륭하게 여겨 올 때마다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마중하였다 한다. 형주에 있을 때 당양현(當陽縣)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부(岳陽樓)를 지어 고향을 그리는 시름과 재주를 지니고 때를 만나지 못한 울분을 토로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국지(三國志)』 卷二十一 「왕찬전(王粲傳)」
왕찬군중시(王粲軍中詩)
삼국 시대 왕찬(王粲)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군막에 의탁하고 있으면서 답답한 심정에 고향을 생각하며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던 고사가 있다. 『삼국지(三國志)』 卷21 魏書 「왕찬전(王粲傳)」
왕찬등루(王粲登樓)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왕찬이 동탁(董卓)의 난(亂)을 만나 형주(荊州)에 피난하여 유표(劉表)에게 의지하고 있으면서,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고향을 바라보며 돌아갈 것을 생각했던 것을 말한다.
왕찬등루부(王粲登樓賦)
왕찬(王粲)은 삼국시대 위(魏)나라 산양(山陽) 사람으로 자는 중선(仲宣)인데, 박식하고 문장이 뛰어나 건안칠자(建安七子)중 하나로 꼽힌다. 한 헌제(漢獻帝)때 난리를 피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15년 동안 의탁해 있다가 조조(曹操)밑으로 들어가 시중(侍中)벼슬까지 지냈는데, 형주에 있을 때 성루(城樓)에 올라가 시사를 한탄하고 고향을 그리는 뜻으로 등루부를 지었다. 여기서는 다산이 자신을 왕찬에게 견준 것이다. 『문선(文選)』 卷十一 「등루부(登樓賦)」
왕찬등루한(王粲登樓恨)
왕찬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하나. 후한(後漢) 말기에 동탁(董卓)의 난(亂)이 일어나자, 그가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에게 의탁, 강릉(江陵) 성루(城樓)에 올랐다가 고향을 그리며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왕찬의란(王粲倚欄)
한(漢) 나라 말에 왕찬(王粲)이 난을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으면서 뜻을 얻지 못함에 누각에 올라가서 「등루부(登樓賦)」를 읊어 시름을 달랬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卷21 「왕찬전(王粲傳)」
왕책(枉策)
‘굽은 말채찍’을 말한다.
왕척(枉尺)
진대(陳代)가 맹자에게 말하기를, “한 자를 굽혀서 열 자를 바르게 할 수 있으면[枉尺直尋]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하였는데, 그것은 몸을 굽히더라도 제후(諸侯)를 보아서 세상을 구제하라는 뜻이다. 맹자는, “몸을 굽혀서까지 남을 바르게 할 수는 없다.” 하였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왕청(王淸)
자유의 청고. 자유(子猷)는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휘지(徽之)의 자이다. 휘지는 성격이 활달하고 남에게 얽매이지 않아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였다. 일찍이 대규(戴逵)를 찾기 위하여 눈내리는 날 밤에 섬계(溪)에 배를 띄웠다가 그의 집 문 앞까지 가서는 흥이 다했다 하여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올 정도로 낭만을 즐겼음. 『진서(晉書)』 卷八十
왕춘(王春)
공자가 춘추(春秋)를 편찬할 때 주(周)나라 왕실을 높이고 대일통(大一統)의 사상을 표시하기 위해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 조(元年條)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쓴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은공(隱公)의 원년(元年)은 곧 주 나라 천자의 춘정월(春正月)이 된다는 뜻으로 주 나라를 높인 것이라 한다.
왕충재(王充才)
후한(後漢) 때 왕충이 집이 매우 가난하여 서책을 구입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항상 낙양(洛陽)의 서사(書肆)에 노닐면서 그 파는 책들을 한 번 죽 훑어보고는 다 외어버림으로써 마침내 박학 다식한 대유(大儒)가 되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四十九
왕침(王沈)
자는 언백(彦伯)인데, 어려서부터 준재(俊才)를 지녔으나 출신이 한미하고 시속에 따라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권귀(權貴)의 제재를 받아 벼슬은 군(郡)의 문학연(文學椽)에 그쳤다. 『진서(晉書)』 卷九十二
왕태부(王太傅)
진 성제(晉成帝) 때 태부 벼슬을 지낸 당시의 명상(名相) 왕도(王導)를 가리킨다. 가뭄이 크게 들었을 때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완강하게 버티다가 황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서를 내리며 간곡히 요청하자 나와서 일을 보았음.
왕태위(王太尉)
진 나라 때 여러 요직을 거쳐 벼슬이 태위에 이른 왕연(王衍)을 가리키는데, 그가 태위에 올랐을 적에 뭇 사람이 그를 원수(元帥)로 추대하자, 구적(寇賊)의 토벌을 감당치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사양하여 말하기를, “나는 조금도 벼슬할 뜻은 없었으나 직첩(職牒)에 따라 옮기다가 마침내 이 지위에 이르게 되었는데, 오늘날의 일을 어떻게 나 같은 비재(非才)로 처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진서(晉書)』 卷四十三
왕통(王通)
수(隋)나라 강주(絳州) 용문(龍門) 사람으로 자는 중엄(仲淹)인데, 촉군 사호서좌(蜀郡司戶書佐)를 지내다가 그만두고 돌아와 학문을 강론하고 책을 저술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한다.
왕패궤대(王霸詭對)
후한(後漢) 왕패(王霸)가 광무제(光武帝)를 따라 전장에 나가서 호타하(??河)를 건너려 할 때 척후병이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다고 보고해 오자 광무의 명을 받고 왕패가 재조사하러 나가게 되었다. 이때 왕패가 사람들이 걱정할까 염려하여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고 거짓말로 답변했는데 뒤에 군대가 현장에 도착해 보니 그동안에 얼음이 얼어 건널 수 있었다는 고사이다. 『후한서(後漢書)』 「왕몽전(王濛傳)」
왕포(王褒)
한 선제(漢宣帝) 때의 문장가인 왕포. 자는 자연(子淵)이다.
왕하(王賀)
한(漢)나라 동평릉(東平陵)사람으로 자는 옹유(翁孺)인데, 무제(武帝)때 수의어사(繡衣御史)가 되어 위군(魏郡)의 도적떼를 몰아 잡는 과정에서 다른 어사들은 만여 인을 죽였으나 그는 죽이지 않고 다 풀어 주었다.
왕형공(王荊公)
송(宋) 나라 왕안석(王安石)을 말하는데, 형공은 그의 봉호(封號)이다.
왕형불형(王兄佛兄)
왕의형 부처의 형을 뜻한 고사성어다.
왕환(王奐)
후한(後漢) 무덕(武德) 사람으로 자는 자창(子昌)인데, 오경(五經)에 밝았다. 일찍이 남의 방아를 찧어주고 채소밭에 물을 주는 고용살이를 하다가 고성 령(考城令)과 한양 태수(漢陽太守) 등 지방 수령을 지냈다.
왕황후(王皇后)
왕망(王莽)의 딸로 어려서 한 평제(漢平帝)의 황후가 되었는데 수년 뒤에 평제가 붕어하고, 자기 아버지인 왕망이 한실(漢室)을 찬탈함에 이르러서는 황후의 나이 겨우 18세였다. 그 후로는 항상 병을 핑계로 조회도 받지 않았는데, 뒤에 한(漢) 나라 군대가 왕망을 잡아죽이고 미앙궁(未央宮)을 불태움에 이르러서는, 왕 황후가 말하기를 “무슨 면목으로 한가(漢家)를 보겠느냐.” 하고 스스로 불속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한서(漢書)』 卷九十七
왕회(王會)
천자에게 조공하기 위하여 제후나 번국(藩國)들이 모이는 모임을 말한다.
왕회음훼독(王淮陰毁毒)
왕회(王淮)는 송(宋) 나라 금화(金華) 사람으로, 벼슬이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다. 그가 일찍이 주희(朱熹)를 미워하고 도학(道學)을 공박하였는데, 송 영종(宋寧宗) 때 주희 등 유학자(儒學者)들을 위학(僞學; 정의에 어그러지는 학문)이라고 몰아세우게 된 원인이 왕회에게서 비롯되었다 한다. 『송사(宋史)』 卷三百九十六 「왕회전(王淮傳)」
왕회종출마읍모(王恢縱絀馬邑謀)
한 무제(漢武帝) 때에 흉노(匈奴) 선우(單于)가 한 나라를 자주 괴롭히므로 무제가 이에 대한 방책을 묻자 대행(大行) 왕회가 그들을 쳐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리하여 30만의 군대를 마읍(馬邑) 골짜기에 정돈하고 선우를 유인하여 습격하려 하였으나, 선우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달아나버림으로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왕회는 수모자(首謨者)로서 진격(進擊)하지 않았다는 죄로 하옥(下獄)되어 죽었다. 『한서(漢書)』 「무제본기(武帝本紀)」
왕회편(王會篇)
『주서(周書)』의 편명으로, 사방의 제후(諸侯)와 사이(四夷)가 천자에게 조회하는 것을 기술하였다.
왕희(王姬)
주왕(周王)의 딸을 가리킨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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