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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송시학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 1. 송시학의 수용, 1) 이인로와 죽고칠현의 등장(이인로, 죽림고회)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송시학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 1. 송시학의 수용, 1) 이인로와 죽고칠현의 등장(이인로, 죽림고회)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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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인로(李仁老)와 죽고칠현(竹高七賢)의 등장

 

이인로(李仁老, 1152 毅宗6~1220 高宗, 眉叟, 雙明齋)한문학사 책이나 인터넷엔 이인로의 호가 쌍명재(雙明齋)로 나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쌍명재는 동시대인인 최당(崔讜)의 호로, 최당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즐겼다. 이인로도 여기에 참여하여 시를 지어 쌍명재집(雙明齋集)이 만들어졌고, 최당은 또한 썅명재기(雙明齋記)를 지었기 때문에 와전된 것이다. 이런 내용은 아들 이세황(李世黃)이 쓴 파한집발(破閑集跋)에서 잘 나와 있다는 고려중기(高麗中期)의 소단(騷壇)에서 가장 성실하게 시()를 배우고 익힌 대표적인 시인(詩人)이다.

 

그는 고려 초기의 최충(崔沖)ㆍ이자연(李子淵)ㆍ김근(金覲)을 정점(頂点)으로 하는 삼대(三大) 명문(名門)의 하나인 인주(仁州, 仁川) 이씨(李氏) 자상(子祥)의 현손(玄孫)으로 알려져 있다이만열(李萬烈), 고려경원이씨(高麗慶源李氏) 가문(家門)의 전개(展開), 한국학보(韓國學報)21, p.7.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화엄(華嚴) 승통(僧統) 요일(寥一)의 밑에서 자랐다. 정중부난(鄭仲夫亂) 때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가 뒤에 환속(還俗)하여 명종(明宗) 10()에 등과(登科)했다.

 

그는 성품(性品)이 편급(偏急)하여 시속(時俗)을 따르지 못하였으므로 크게 쓰이지는 못했지만 그는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맹주(盟主)답게 당시의 소단(騷壇)을 주도하였다. 한림별곡(翰林別曲)의 이른바 원순문 인로시(元淳文, 仁老詩)’가 이러한 이인로(李仁老)의 위치(位置)를 가장 잘 대변(代辯)해 주고 있다.

 

그는 스스로 문장(文章)은 천성(天性)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하면서도 후천적(後天的)인 용공(用工)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는 그의 파한집(破閑集)권하(卷下) 19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적에 황산곡(黃山谷)이 시()를 논평(論評)하여 이르되, 옛 사람의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그 말을 만드는 것을 환골(換骨)이라 하고, 옛 사람의 뜻을 본 떠서 형용(形容)하는 것을 탈태(奪胎)라 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산 채로 긁어 먹고 날로 삼키는 것과는 그 차이가 천양지판(天壤之判)이지만, 그러나 표절하여 공교하게 만든 것임에는 틀림없다. 어찌 이른바 옛 사람이 도달하지 못한 데서 신의(新意)를 내어 묘()하게 된 것이라 하겠는가?

昔山谷論詩 以謂不易古人之意 而造其語 謂之換骨 規模古人之意 而形容之 謂之奪胎 此雖與夫活剝生呑者 相去如天淵 然未免剽掠潛窃以爲之工 豈所謂出新意於古人所不到者之爲妙哉 ?

 

 

우리나라 비평사(批評史)에서 이른바 신의(新意)’를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그는 환골탈태(換骨奪胎)로써 도달(到達)할 수 있는 한계(限界)를 스스로 시인(是認)하고, 신의(新意)를 창출(創出)하는 것이 시작(詩作)의 상승(上乘)임을 말하고 있지만, 동파(東坡)나 산곡(山谷)과 같이 조어(造語)가 공교(工巧)하여 부착(斧鑿)의 흔적이 없는 경지(境地)를 높이 칭예(稱譽)하였다. 신의(新意)는 작시(作詩)의 이상(理想)이요 상식(常識)이기 때문에 그는 용사(用事)와 같은 시작(詩作)의 기술(技術)을 특히 강조한 것이다. 타고난 일재(逸材)가 있더라도 마음을 태우는 연탁(鍊琢)의 노력이 있어야만 천고(千古)에 그 이름을 드리울 수 있다고 한 것이 그의 지론(至論)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 대한 후대인(後代人)의 비평(批評)사사여신(使事如神)’ ‘단련불부(鍛鍊不敷)’ 등과 같이 그의 표현기법(表現技法)에 초점(焦點)을 맞추고 있다【『보한집(補閑集)(卷中)용재총화(傭齋叢話)의 비평(批評)이 방향을 같이하고 있다.

 

그의 아들 세황(世黃)에 따르면 그의 평생 저술은 고부(古賦) 5(), 고율시(古律詩) 1,500 여수에 이르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저술(著述)로는 은대집(銀臺集)20(), 후집(後集)4(), 쌍명재집(雙明齋集)3(), 파한집(破閑集)3()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파한집(破閑集)뿐이다.

 

그러나 그는 사부문학(辭賦文學)에 있어서도 단연 우리 문학사(文學史)에서 선구(先驅)가 되고 있었으며 각체시(各體詩)를 두루 시범(示範)한 그의 시작(詩作)은 시선집(詩選集)에 전하고 있는 것만도 80여편(餘篇)에 이르고 있다. 그의 대표작(代表作)으로는 서천수승원벽(書天壽僧院璧)(五絶) 산거(山居)(五絶)을 비롯하여 송적팔경도(宋迪八景圖)(七絶) 8수 가운데서 소상야우(瀟湘夜雨), 동정추월(洞庭秋月)등이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과어양(過漁陽)(七絶), 유지리산(遊智異山)(七律) 등이 시선집(詩選集)에 모두 뽑히고 있으며 고시(古詩)에 있어서도 증사우(贈四友)(五古), 속행로난(續行路難)(七古), 호종방방(扈從放榜)(七古) 등이 함께 뽑히고 있다.

 

 

산거(山居)소상야우(瀟湘夜雨)를 차례대로 보기로 하자.

 

산거(山居)는 다음과 같다.

 

春去花猶在 天晴谷自陰 봄은 가도 꽃은 아직 남아 있고 하늘은 개였지만 골까기는 절로 침침하네.
杜鵑啼白晝 始覺卜居深 대낮에 두견이 우는 것을 보니 비로소 깨닫겠도다 내 사는 곳 깊은 것을.

 

말은 많지 않지만 산속에 숨어 사는 자신의 처지를 잘 그린 작품이다. 이규보(李奎報) 하일즉사(夏日卽事)나무잎이 꽃을 가려 꽃은 봄이 간 뒤에도 남아 있고[密葉翳花春後在]’와 이 산거(山居)봄은 가도 꽃은 아직 남아 있고[春去花猶在]’는 모두 봄이 지난 뒤에까지 꽃이 피어 있는 정경(情景)을 읊은 것이지만 좋은 대조(對照)를 보인다.

 

전자(前者)()’이라면 후자(後者)()’에 가깝다. 박진감(迫眞感)이 없는 것을 탓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외형(外形)에 있어서는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정제(整齊)된 작품이다.

 

 

소상야우(瀟湘夜雨)는 다음과 같다.

 

一帶滄波兩岸秋 한 줄기 파란 물가 두 언덕 가을에
風吹細雨洒歸舟 바람이 가랑비를 불어 돌아가는 배에 뿌린다.
夜來泊近江邊竹 밤 사이 강변의 대나무 숲 가까이서 자니
葉葉寒聲揔是愁 잎마다 우수수 모두 다 수심일세.

 

() 송적(宋迪)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에 작자가 시()를 붙인 것이다. 송적팔경도(宋迪八景圖)는 모두 8()로 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 소상야우(瀟湘夜雨)동정추월(洞庭秋月)점화(點化)의 묘()를 살린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서거정(徐居正)이 그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권상 11에서 소상팔경시(瀟湘八景詩)를 가리켜 모사(模寫)에 공교(工巧)한 작품이라 칭도(稱道)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이 소상야우(瀟湘夜雨)이백(李白)자야오가(子夜吳歌), 전기(錢起)귀안(歸雁), 두목(杜牧)박진회(泊秦淮)등을 연상케 하는 작품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 부착(斧鑿)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한 탁구(琢句)의 솜씨는 바로 이인로(李仁老)의 해박(該博)을 그대로 입증(立證)해 준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이인로(李仁老)ㆍ오세재(吳世才)임춘(林春)ㆍ조통(趙通)ㆍ황보항(黃甫沆)ㆍ함순(咸淳)ㆍ이담지(李湛之) 등이 진대(晉代)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풍류운사(風流韻事)를 사모하여 시주(詩酒)를 즐기던 일곱 사람의 모임이다. 이들을 죽림칠현(竹林七賢, 江左七賢)과 구별(區別)하기 위하여 해좌칠현(海左七賢) 또는 죽림고회(竹林高會, 竹高七賢)이라 한 것이다. 그 명호(名號)고려사(高麗史)파한집(破閑集)에서 각각 따온 것이다.

 

이인로(李仁老)를 맹주(盟主)로 한 이 죽림고회(竹林高會)는 당시 소단(騷壇)의 거점(據點)이었으며 그 구성원(構成員)들은 모두 세상에 뜻을 잃고 시주(詩酒)로써 소요자적(逍遙自適)한 문인(文人)이요 지식인(知識人)이다. 무신란(武臣亂) 이후 소단(騷壇)의 사정에 대해서는 이제현(李齊賢)역옹패설(櫟翁稗說)전집(前集)에서 명료하게 지적한 바 있거니와,

 

 

불행하게도 의종(毅宗) 말년(末年)에 무인(武人)들이 변()을 갑자기 일으켜 향초(香草)와 독초(毒草)가 같은 향기가 되고 옥석(玉石)이 함께 타버렸다. 호구(虎口)에서 몸을 빼쳐 나온 자는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관대(冠帶)를 벗고 굴갓을 쓰고서 여생(餘生)을 마쳤다.

不幸毅王季年, 武人變起所忽, 薰蕕同臭, 玉石俱焚, 其脫身虎口者, 遯逃窮山, 蛻冠帶而蒙伽梨, 以終餘年.

 

 

이들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낙척불우(落拓不遇)하여 그들의 시작(詩作)도 온전하게 전하지 못했다. 시서(詩書)에 무성(茂盛)한 가화(佳話)를 남기고 있는 데 비하여 그들의 시작(詩作)임춘(林春)20(), 오세재(吳世才)3(), 조통(趙通)1()을 각각 시선집(詩選集)에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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