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문필가(文筆家)의 시세계
소단(騷壇)에서도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각방면에서 뛰어난 시인이 나와 각각 제 몫을 다해준 결과라 할 것이다. 『어우야담(於于野譚)』을 저작한 유몽인(柳夢寅)과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 이수광(李睟光), 그리고 『국조시산(國朝詩刪)』의 찬자(撰者)인 허균(許筠) 등은 그들이 제작한 시작(詩作)으로도 일정하게 시사(詩史)에 기여하고 있지만, 특히 이수광(李睟光)과 허균(許筠)은 뛰어난 조감(藻鑑)으로 후세의 기림을 받았다.
유몽인(柳夢寅, 1559 명종14~1623 인조1, 자 應文, 호 於于堂)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당대문학의 새로운 기풍을 불러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상투적인 표현을 거부하고 청신한 시어의 선택과 질박한 표현에 주력하였다. 특히 장편시에 특장을 보인 그는 「관동기행(關東紀行)」, 「유두류산(遊頭流山)」 등 백운(百韻) 이상의 장편으로 그의 탁월한 시재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모의하여 지은 「의고시십구수체(擬古詩十九首體)」에서 그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과 뛰어난 시재를 알아주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였다. 시세(時世)에 격상(激傷)할 때마다 그의 답답한 불평음(不平音)을 시작(詩作)을 통하여 토로하기도 했다. 수의어사(繡衣御史)의 몸으로 남북으로 내달릴 때의 작품으로 채워진 「북수록(北繡錄)」, 「서수록(西繡錄)」, 「남수록(南繡錄)」 등에 이러한 시편이 많다. 그는 문장에 있어서도 진한고문(秦漢古文)을 추승하여 간결하고 함축적인 표현에 힘씀으로써 당대는 물론 후대의 제가들에 의하여 최립(崔岦)과 힐항(詰抗)할 대가로 칭송받기도 하였다. 권벽(權擘)은 최립(崔岦)의 문장이 고인을 모의함에 힘쓴 것과는 달리 유몽인은 모든 시문이 자기의 가슴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최립(崔岦)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극찬하였다.
유몽인(柳夢寅)은 성품이 경박하여 스승인 성혼(成渾)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으나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이이첨(李爾瞻)ㆍ유희분(柳希奮) 등 권신들의 전횡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 등의 사건에 불복하는 등 당대 현실의 부패와 모순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서슴지 않아 집권층의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유명한 「제보개산사벽(題寶盖山寺壁)」은 그의 이러한 기질과 문학경향을 사실로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일명 유몽인(柳夢寅)의 「상부사(霜婦詞)」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계해년(癸亥年)에 쓴 것으로 원시(原詩)는 다음과 같다.
七十老孀婦 單居守空壼 | 칠십 먹은 늙은 과부, 홀로 빈 방을 지키네. |
慣讀女史詩 頗知妊姒訓 | 여사잠도 익숙하게 읽었고 태임과 태사의 교훈도 자못 안다네. |
傍人勸之嫁 善男顔如槿 | 이웃 사람 시집가라 권하고는 남자 얼굴 무궁화처럼 예쁘다나. |
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 흰 머리에 봄 교태 짓는다면 어찌 연지분에 부끄럽지 않으리. |
유몽인은 광해군 즉위 후에 당시의 난정(亂政)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그래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괄(李适)의 반란 후에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를 도모한다는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훗일의 화를 우려한 조정 중신들에 의하여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서인층은 유몽인의 이 시를 들어 토역률(討逆律)로 그를 다스려 옥중에서 죽게 만들었다. 칠십 먹은 백발과부가 개가(改嫁)하는 것이 수치스럽듯이 유몽인 자신이 광해군을 버리고 인조에게 출사(出仕)하는 것이 신하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우의(寓意)를 담고 있는 것이 토역률(討逆律)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른 세상이 돌아왔다고 해서 광해군 밑에서 벼슬한 몸으로 두 임금을 섬기지는 않겠다는 것이 유몽인의 뜻이다.
정조 때에 신원되면서 내린 「어제판부(御製判付)」에서는 유몽인의 이 시를 평가하여 『이소(離騷)』의 남은 뜻을 깊이 얻고 김시습(金時習)의 시와 백중(伯仲)이 된다고 하여 그의 충절을 기렸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48에서 이 시의 분방함과 자연스러움을 높이 평가하였다.
다음은 유몽인(柳夢寅)이 44세 되던 해, 백마강상(白馬江上)에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의 작품이다.
夷島颿初返 戎廬鏑欲鳴 | 이도에서 노닐다 처음 돌아오니 융려에선 화살촉이 울려고 하네. |
吾生百年半 朝論幾時平 | 내 생애 백년의 반이건만 조정의 의론 어느 때나 화평할까? |
潭黑龍珠晦 林昏鬼火明 | 못물 검어 여의주도 보이지 않고 수풀 어둑하여 귀신불만 밝네. |
江山空自古 淚落濟王城 | 강산은 자고로 공허하여 눈물 흘리며 왕성을 건너네. |
위 시는 「사회(寫懷)」다.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귀인(貴人)은 나타나지 않고 간신들의 득세로 정치가 논단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경련(頸聯)의 ‘담흑룡주회 임혼귀화명(潭黑龍珠晦, 林昏鬼火明)’에 담겨진 우의(寓意)가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제의 왕성을 건너면서 공허한 현실을 회한(悔恨)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그의 문장 수업은 선진양한(先秦兩漢)에서부터 시작하여 당(唐)에서 그쳤기 때문에 송(宋) 이하의 문자(文字)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했지만【『於于集』 後集 권3, 「哭具二相思孟貞敬夫人輓詩序」】, 대체로 그의 시는 위험(奇險)한 것이 많아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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