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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5. 문필가의 시세계(허균)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5. 문필가의 시세계(허균)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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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許筠, 1569 선조2~1618 광해군10, 端甫, 蛟山惺所白月居士)은 재정(才情)이 뛰어난 시인으로 의고주의 문풍에 반대하여 정()의 문학을 주창하였으며 시에 대한 조감(藻鑑)은 당대의 제일인자로 지목되었다.

 

국조시산(國朝詩刪)은 그의 조감력(藻鑑力)을 잘 보여준 시선집으로 후대의 제가들에 의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송시(宋詩)가 시리(詩理)가 아닌 성리학적 도리(道理)에 편향되어 시의 참다운 맛을 저상(沮喪)시켰다는 판단에 따라 당대 시문학의 폐습을 일신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언외(言外)의 정()을 함축한 시, 당시(唐詩)를 시의 전범으로 삼았다. 이것은 그의 시()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이달(李達)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허균(許筠)문필진한 시필성당(文必秦漢, 詩必盛唐)”을 내세운 명나라 의고파(擬古派)의 문학관을 거부하였는데 이것은 전후칠자(前後七子)전칠자(前七子):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 서정경(徐積卿), 변공(), 강해(康海), 왕구사(王九思), 왕정상(王廷相) / 후칠자(後七子): 이반룡(李擊龍), 왕세정(王世貞), 사진(謝秦), 종신(宗臣), 양유예(梁有譽), 서중행(徐中行), 오국륜(吳國倫)학당(學唐)이 독창성이 결여된 모의에 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당시(唐詩)의 높은 경지는 칭상(稱賞)하였지만 당시(唐詩) 그 자체를 시법화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정과 개성을 중시하고 상어(常語)로 시문을 지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지(李贄)동심설(童心說)과 공안파(公安派)성령설(性靈說)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허균(許筠)의 시는 재정(才情)이 뛰어나지만 격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김만중(金萬重)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그의 시는 혜성(慧性)이 있으나 정력(定力)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송원명(唐宋元明)의 격조가 뒤섞여 나왔다고 평가하였다. 허균(許筠) 스스로도 자신의 시에는 당조(唐調)만이 아니라 정경에 따라 여러 조(調)가 뒤섞여 나오는 것을 자신 나름대로 조화한 것이기에 당조(唐調) 혹은 송조(宋調)와 흡사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스스로 당시(唐詩)를 시의 전범으로 삼으면서도 시법(詩法)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眞情)을 유출하려고 힘썼던 문학관의 한 표현이라 볼 수도 있다. 허균(許筠)의 이러한 시문 혁신론은 17세기에 대두한 농암(農巖)삼연(三淵) 등 개성주의 문학의 출현에 일조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허균(許筠)은 군서(群書)에 널리 통하고 전고(典故) 및 역대 사적에 대하여 해박했기 때문에 속문(屬文)에 능하였다. 그의 궁사(宮詞)백수(百首)는 전고(典故)가 많이 쓰인 대표적인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많은 전고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정을 잘 그려낸 명편(名篇)이다. 유교적 예교의 틀에 얽매여 인간의 본성인 인욕을 짓밟혀야만 하는 궁녀의 한과 비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직서적인 필치로 형상한 것이다.

 

이 시는 1610년 여름에 허균(許筠)이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을 때 수표교 근처에서 살고 있는 76세의 퇴궁인(退宮人)을 찾아가 인종과 선조의 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와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모실 당시 궁중생활의 애환과 궁중 풍속, 두 왕후의 후덕(厚德)을 듣고 지은 칠언절구의 작품으로, ()의 시인 왕건(王建)궁사(宮詞)백수(百首)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그러나 왕건의 시가 궁중의 화미함과 궁녀들의 염정적인 생활을 유미적인 관점으로 쓴 것과는 달리 허균(許筠)궁사(宮詞)는 궁녀들의 희노애락 등 인간의 정감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권필(權韠)과 양경우(梁慶遇)는 궁중의 고실(故實)을 다 갖춘 일대(一代)의 시사(詩史)로 스스로 일가를 이룬 작품이라고 품평하였다.

 

다음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실린 궁사(宮詞)가운데 일곱째 작품이다.

 

建春門外仗如雷

건춘문 밖 의장대 소리 우뢰 같고

法府豐呈小宴開

사헌부 정재(呈才)로 조그만 잔치 열었네.

花裏一班宮女出

한 줄로 꽃 속에서 궁녀가 나오더니

兩宮初幸瑞蔥臺

양궁(兩宮)께서 비로소 서총대(瑞蔥臺)로 거동하시네.

 

건춘문은 세자궁이 있던 곳이고 서총대는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무관들의 활 쏘는 기예를 점검하던 누대이다. 봄날 임금이 서총대로 거동하는 의례의 장중함과 궁녀들의 화사함을 유려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허균(許筠)은 세상의 예교에 얽매이기를 싫어했으며 세상과의 화합을 쉽게 이룰수 없었기에 노장(老莊)과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목민관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거듭 파직을 당하자 귀거래(歸去來)에 대한 의지를 시로써 표현하기도 하였다.

 

다음의 초하성중(初夏省中)2()가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다.

 

田園蕪沒幾時歸

전원이 거칠건만 어느 때나 돌아갈까??

頭白人間官念微

머리 흰 이 사람은 벼슬살이 뜻이 적네.

寂寞上林春事盡

적막한 산림에 봄일 다 지나가고

更看疎雨濕薔薇

성긴 비에 장미 젖는 것을 다시금 보게 되네.

 

懕懕晝睡雨來初

고요한 낮졸음은 비내릴 때부터요,

一枕薰風殿閣餘

베개머리 더운 바람 관청에 넉넉하네.

小吏莫催嘗午飯

소리야, 점심 먹으라 재촉하지 말아라,

夢中方食武昌魚

꿈 속에서 바야흐로 무창의 고기를 먹나니.

 

번잡한 공무에 시달리던 그는 그리던 전원에 돌아가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 어느 날 성근 비에 촉촉히 젖어드는 장미를 보고 불현듯 귀거래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무창의 고기를 먹으며 단잠에 취해있는 자신을 깨우지 말라고 소리(小吏)에게 타이른다.

 

허균(許筠)귀거래(歸去來)’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개혁의지가 도리어 당대 사대부들에게 용납되지 못하고 도리어 지탄을 받게 되자 남에게 제어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자신의 심정을 피력한 것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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