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눌(李安訥, 1571 선조4~1637 인조15, 자 子敏, 호 東岳)은 목릉성세기(穆陵盛世期)에 권필(權韠)과 함께 이재(二才)로 칭송받은 시인이다.
동악(東岳)은 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로 알려진 이행(李荇)의 증손이자 박은(朴誾)의 외증손으로 시문을 가학(家學)으로 이어받은 시인이다.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인 이식(李植)은 그의 재종질이다. 동악(東岳)은 정철(鄭澈)의 제자로 권필(權韠)ㆍ이호민(李好閔)과 함께 그들의 시재(詩才)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는 특히 석주(石洲)와 함께 전대 문학의 폐해를 시정하고 새로운 문풍을 개척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동악(東岳)은 권필(權韠)과는 달리 시작에 있어 정련(精鍊)을 중시하였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54에서 석주(石洲)와 동악(東岳)의 시를 비교하면서 석주(石洲)는 돈오(頓悟)의 시풍, 동악(東岳)은 점수(漸修)의 시풍이 보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은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함께 두보(杜甫)와 한유(韓愈)를 전범으로 삼아 시문에 진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삼당시인(三唐詩人)을 대표로 하는 당풍(唐風)의 시작(詩作)들이 주로 만당(晚唐)의 풍습에 빠져 있던 것을 비판한 것이다.
동악(東岳)은 두보의 봉군수관(奉君守官)과 우국충정(憂國忠情)의 시정신을 계승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참상을 사실적 기법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두보의 시정신을 수용했기 때문에 동악(東岳)의 시풍은 혼융(混融)하면서도 침울한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시도(詩道)를 논한 김창흡(金昌翕)은 『삼연집(三淵集)』 「습유(拾遺)」 권15에서 특히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의 시에는 본색(本色)이 없음을 개탄,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이안눌(李安訥)의 시작(詩作) 중에서도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참상을 생생하게 그린 「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은 그가 후일 동래부사로 부임했을 때 동래성의 함락으로 빚어진 당시의 처참한 상황과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애국충절을 기린 작품으로 이호민(李好閔)의 「용만행재 문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 聞下三道兵進攻漢城)」시와 병칭되고 있으며, 「당사탄(當死歎)」은 죽음보다 못한 전쟁의 상황에서 자신의 신세를 울부짖으며 임금을 위해서 죽음도 아끼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아래의 「등총군정(登統軍亭)」은 멀리 만주벌판을 바라보며 물 위에 떠있는 마름과도 같은 조그마한 나라의 운명을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六月龍灣積雨晴 | 유월의 용만에 장마비 개어 |
平明獨上統軍亭 | 새벽에 홀로 통군정에 올랐네. |
茫茫大野浮天氣 | 아득한 넓은 들에 하늘 기운 떠 있고 |
曲曲長江裂地形 | 구비구비 긴 강은 땅 모양 갈라놓았네. |
宇宙百年人似螘 | 우주의 백년 세월에 인생은 개미같고 |
山河萬里國如萍 | 만리 산하에 나라는 부평초와 같네. |
忽看白鶴西飛去 | 문득 흰 학이 서쪽으로 날아가는 걸 보니 |
疑是遼東舊姓丁 | 옛날 요동의 정령위 아닌가 하네. |
동악(東岳)은 칠율(七律)에 특장을 보였는데 이 시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오래동안 계속되던 장마비가 갠 후 통군정에 올라 광대무변한 대지를 바라보면서 조국의 땅덩어리가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마름만큼이나 작은 것을 자탄하면서도 웅대한 그의 호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양경우(梁慶遇)와 조성기(趙聖期)는 이 시를 대가(大家)의 풍도가 있는 작품으로 품평하였는데, 이는 동악(東岳)의 시상이 웅혼함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다음은 석주(石洲)의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과 함께 송강(松江)의 국문시가를 노래한 이안눌(李安訥)의 「문가(聞歌)」이다. 이 시의 원제는 「용산월야 문가희창고인성정상공사미인곡 솔이구점 시조지세곤계(龍山月夜 聞歌姬唱故寅城鄭相公思美人曲 率爾口占 示趙持世昆季)」로 밤에 한 가희(歌姬)가 송강(松江)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 지은 작품이다.
江頭誰唱美人詞 | 강가에서 그 누가 미인곡을 부르나? |
正是孤舟月落時 | 외로운 배에 달빛 지는 바로 그때라네. |
惆悵戀君無限意 | 슬프도다 님 그리는 무한한 이 뜻을 |
世間惟有女郞知 | 세상에선 애오라지 여랑(女郞)만이 알고 있네. |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시화(壺谷詩話)』 21에서 이 시를 석주(石洲)의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과 비교하여 “이안눌(李安訥)의 마지막 구절은 마치 적벽의 퉁소 소리가 실처럼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아서 무한한 의사를 함축하고 있다[李之末句, 有如赤壁簫音不絶如縷, 猶含無限意思].”고 품평하였다.
이 시는 청렴하고 곧은 선비가 임금에게 용납되지 못함을 슬퍼하고 간신들이 아첨하고 시기하는 현실을 탄식하는 언외지의(言外之意)가 함축되어 있다. 정쟁(政爭)의 와중에서 임금에 대한 충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스승 정철(鄭澈)과 자신의 불우한 처지가 가희(歌姬)의 노래를 통하여 상기된다. 정련(精練)에 힘쓰면서 무한한 함축미를 내포하여 시가의 정취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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