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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 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 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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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의 이름은 구요, 자는 중니이다. 그 선대는 송나라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숙량흘이요, 어머니는 안씨이다. 노나라 양공 22(B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21)에 공자를 노나라 창평현 추읍에서 출생하였다. 공자는 어린이가 되어 소꿉장난을 좋아하였는데, 항상 제기그릇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예를 행하는 모습을 갖추었다.
史記世家曰: “孔子, 名丘, 字仲尼. 其先, 宋人. , 叔梁紇; , 顔氏. 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 十一月庚子, 生孔子於魯昌平鄕陬邑. 爲兒嬉戱, 常陳俎豆, 設禮容.
 
장성하여 위리(창고지기)가 되어서는 재는 양을 공평하게 하였고, 사직리(가축 담당 관리)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케 하였다.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고, 돌아오니 제자들이 더욱 많이 찾아왔다.
及長爲委吏, 料量平; 爲司職吏, 畜蕃息. 適周, 問禮於老子, 旣反而弟子益進.

 

이것은 주희(朱熹) 자신의 말이 아니고 사마천이 쓴 공자세가(孔子世家)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므로 따로 주석할 바가 없다. 단지 주자가 공자세가(孔子世家)의 내용을 축약하는 태도가 진실로 놀랍다. 경중을 가리어 중요한 사례를 놓치지 않으면서 번거로운 부분은 과감히 삭제하였다.

 

공자 출생연도는 춘추좌씨전에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애공(哀公) 16 4월 기축(己丑)에 죽었다[孔丘卒]고만 쓰여있다. 몰년으로부터 추산한 것이다. 공양전」 「곡량전에는 모두 양공 21에 공자가 태어났다고 쓰고 있다.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노자에게 갈 때 남궁경숙(南宮敬叔)과 같이 갔다. 노자는 당시 주나라 수도 낙양에 살고 있었다. 곡부에서 낙양까지, 그것은 화려한 나들이었을 것이다.

 

 

소공 25(BC 517) 갑신은 공자의 나이 35세였다. 이때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야 했고 노나라는 어지러워졌다. 이에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 까오 자오쯔, Gao Zhao-zi)의 가신이 됨으로써 제나라 경공과 통하였다. 경공이 니계의 봉토로써 공자를 봉해주려고 하니, 안영이 반대하였고, 이에 경공이 흔들렸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昭公二十五年甲申, 孔子年三十五, 而昭公奔齊, 魯亂. 於是適齊, 爲高昭子家臣, 以通乎景公. 公欲封以尼谿之田, 晏嬰不可, 公惑之. 孔子遂行, 反乎魯.
 
정공 원년(BC 509) 임진은 공자의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권으로 참람하고 그의 가신인 양호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전횡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정치에 나가지 않고 물러나 시ㆍ서ㆍ예ㆍ악을 닦으니 제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定公元年壬辰, 孔子年四十三, 而季氏强僭, 其臣陽虎作亂傳政. 故孔子不仕, 而退修詩書禮樂, 弟子彌衆.

 

공자의 나이 35세 때, 과연 대부들의 지저분한 싸움에 휘말려 패하고 도주하는 노나라 국군(國君) 소공을 모시고 제나라로 갔는지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여기서도 그냥 ()’라는 접속사로 병치시켰을 뿐 그 두 사건의 필연적 관련성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자는 당시 국군을 모시고 다닐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또 당시에는 충신(忠臣)’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는 시대였다. 충성을 바치어 패주하는 국군을 모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약 이 시대에 공자가 제나라에 갔다면 그것은 순전히 공자 자신의 삶의 필연성에서 우러나온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동벽(崔東壁)고신록(考信錄)에서 비판하고 있듯이 제나라에 가서 변변치 못한 인물인 고소자의 가신이 되었다는 것도 이상한 말이고, 또 가신이 됨으로 해서 경공과 통하였다는 말도 논리적인 신빙성이 없다. 고소자와 경공의 관계가 그러한 정도의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나라에 가서 경공을 만났다면 고소자의 가신이 된 연줄로 만난 것은 아닐 것이다. 공자 자신의 역량으로 만났을 것이다.

 

소공은 제나라로 도주하여 결국 제나라의 인질이 되었다. 제나라는 소공을 인질 삼아 노나라의 내정에 간섭하고 소공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결국 소공은 진()나라에 유폐되어 망명 7년만에 건후(乾侯)의 땅에서 죽고 만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인물이 양공의 아들이며 소공의 동생인 정공(定公, 띵 꽁, Ding Gong, 재위 BC 509~495)이다.

 

정공이야말로 개혁적인 마인드가 있었던 인물로 공자를 중용하여, 공자 생애에 있어서는 노나라의 황금기를 연출한 인물이다. 그러나 조광조를 중용했다가 나중에는 흐지부지하게 제자리로 돌아가고만 조선왕조의 중종처럼 정공은 개혁의 의지를 관철시키지 못했다.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능주의 붉은 꽃이 되었지만, 공자는 다시 노나라를 떠나고 만다. 정공 때의 일이었다.

 

공자의 생애에서 정치적 이유로 노나라를 떠나 망명한 것이 두 번, 노나라로 다시 돌아온 것이 두 번이다. 그러나 첫 번째 망명은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젊은 시절, 단기간에 걸친 사건이었다. 제나라는 당시 노나라에 비해 대국이었고 문물도 풍요로웠고 문화도 선진이었다. 따라서 경공에게 벼슬을 구한 것보다는, 음악을 연구하고 예악형정의 선왕지도(先王之道)를 상고하는 매우 진지한 유학생활을 보냈던 것 같다.

 

이 첫 번째의 귀로(歸魯) 직후의 시기가 아마도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는 젊은 날의 조용했지만 열정으로 가득 찬 특별한 시기였을 것이다. 공자주변으로 학단이 형성되면서 그의 정신세계가 사회적으로 소통되어가는 장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양호가 작란전정(作亂專政)하니 공자가 불사(不仕)하고 퇴(退)하여 시서예악에 몰두하였고 제자들이 더욱 많이 몰려들었다고 말한 것은 그러한 정황을 말해준다. 정치적 좌절로 그의 학문이 깊어졌고, 그로 인하여 학단이 형성되어간 젊은 날의 패기에 찬 공자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였다면 그는 타락한 인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정치적 성공은 일시의 운세일 뿐 궁극적으로 인간의 타락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앞단에서 낙양에 있는 노자에게 예를 묻고 돌아오니 제자가 익진(益進)하였다는 표현과, 이단에서 또 제나라에서 돌아와 시서예악에 몰두하니 제자가 미중(彌衆)하였다는 표현을 병치시킨 주자의 감각이 놀랍다. 교육자로서의, 학문을 좋아하는 인간으로서의 공자상의 테마를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양호라는 인물에 관해서는 제설이 분분하다. 혹자는 양호가 노나라의 대부(大夫)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고, 논어17편에 나오는 양화(陽貨, 양 후어, Yang Huo)와 별개의 인물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양호와 양화는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는 것이 사계의 정설이다. ()는 양호의 자()일 것이다. 그리고 양호 또한 토착적 대부(大夫)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그도 공자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서 노나라의 정치에 막강한 실력을 행사한 유자(儒者)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공자시대에 공자와 같은 사람이 공자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한 유형의 인간이 많았다. 예수의 시대에도 수없는 예수가 있었고, 수없는 세례 요한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걸출하게 역사에 남은 인물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다. 그도 일찍이 계손씨(季孫氏)의 가신(家臣)으로서 노나라의 국정(國政)을 장관(掌管)했고 삼환의 전복을 꾀했다. 즉흥적으로 운을 맞추어 시적으로 담론을 할 줄 아는 것을 보면 매우 높은 문학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정치적 수완이 공자보다는 뛰어났다. 공자도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었지만 혁명가, 혁명꾼은 아니었다. 공자의 관심은 개인의 정치적 야망보다는 보편적 인간의 삶의 제고에 있었다. 공자의 정치학은 인간학이었다. 공자의 일생에는 양호라는 라이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 땅에서 포위당했을 때도 공자에게는 양호의 이미지가 겹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양호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양호도 공자처럼 될 뻔한 당시의 한 호걸이었지만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구원한 주체를 찾지 못하고 인간세 풍진의 한 티끌이 되고만 비운의 사나이였을 것이다.

 

 

정공 9(BC 501) 경자는 공자의 나이 51세였다. 공산불뉴가 비읍을 근거지로 하여 계씨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공자 보고 가담하라고 꼬였다. 공자는 가고 싶어 했으나 끝내 가지 않았다.
九年庚子, 孔子年五十一. 公山不狃, 以費畔季氏, 召孔子, 欲往而卒不行.
 
정공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로 삼았다. 일 년만에 그 읍이 성하여 사방에서 본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공(司空)이 되고, 또 대사구(大司意)가 되었다.
定公以孔子爲中都宰. 一年, 四方則之. 遂爲司空, 又爲大司寇.
 
정공 10(BC 500) 신축, 정공을 도와 제나라 군주, 경공과 협곡(夾谷)에서 회맹하였다. 그 외교적 성과로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에게서 침략한 땅을 되돌려주었다.
十年辛丑, 相定公, 會齊侯于夾谷, 齊人歸魯侵地.
 
정공 12(BC 498) 계묘, 공자는 중유(자로)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이 되게 하여 삼환의 도읍의 성()을 허물게 하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다. 유독 맹손씨 집안에서는 성() 땅의 성()을 허무는 것에 저항하였다. 정공은 성 땅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十二年癸卯, 使仲由爲季氏宰, 墮三都, 收其甲兵. 孟氏不肯墮成, 圍之不克.

 

공산불뉴는 성이 공산(公山)이고 명()이 불뉴(不狃, 不擾, 弗擾)이다. 계씨의 가신으로서 계씨의 영지인 비() 땅의 수장격 관리로 근무했으나, 비를 근거지로 반란을 꾀한 인물이다. 양호와 친하여 양호와 같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도 있고, 양호가 먼저 반란을 꾀하여 실패하여 달아나자 그 뒤를 이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이 반란에 가담하라고 공자를 꼬였는데, 그 꼬임에 공자는 마음이 여리어 가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상정치를 실현할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공자는 이상정치의 실현이라는 꿈만 앞서고 현실적 정치판단이 어두운, 좀 어리석은 구석이 있는 순진한 인물이라는 것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공자를 저지시킨 것은 강직하고 정치감각이 탁월한 자로였다.

 

공자가 또다시 노나라를 떠나야만 했던[去魯] 결정적 계기가 된 삼도파괴(三都破壞)의 책략은 시대상황을 모르면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노나라 공실을 얕보는 삼가(三家)로 하여금 자진해서 자기들의 도읍의 성계손씨는 비읍(費邑), 숙손씨는 후읍(郈邑), 맹손씨는 성읍(成邑)을 허물고 무장해제까지 하게 만든다는 책략은 정공 입장에서는 물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과연 어떻게 삼환 당사자들을 설득시켰을까? 공자는 주례의 규정을 들어 대부가 군대를 소유할 수 없으며 일정규모 이상의 성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걸지만 그것으로 삼환이 설득될 리 없다.

 

공자가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자로를 매개로 하여 계씨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당대 최고권력자였던 계씨에게는 당시 충분한 사정이 있었다. 비읍이 계속해서 가신들의 반란의 거점이 되어 골치가 아팠기 때문에 공권력을 동원하여 비읍의 성을 허물고 무장을 허물면 그런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삼가가 모두 같이 성읍을 허물고 무장을 해제하면 오히려 자신의 권력입지가 강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평화협정을 맺고 핵포기를 하면 미국만 강해지는 결과가 될 수도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래서 비읍을 해제시키고, 이어 가장 약체였던 숙손씨의 후읍은 쉽게 해제시켰으나, 제나라와의 접경지대에 위치하여 보호본능이 강하고 공렴처보(公斂處父)와 같은 현명한 권신을 둔 맹손씨는 끝까지 저항하였던 것이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공자나 자로나 노나라 내에서 성세를 유지할 수 있는 세력기반을 다 상실케 된 것이다.

 

이 고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공자가 중앙집권적 군권확립주의자로 비쳐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고사는 황제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하여서는 지방의 호족세력을 끊임없이 억압해야만 했던 중국역사의 현실에 매우 적합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사마천이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쓸 한 무제 당시의 상황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감돌고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정공 14(BC 496) 을사는 공자의 나이 56세였다. 대사구로서 노나라 최고의 정승의 일을 섭행(攝行)하였다. 얼마 후 공자는 소정묘를 주살하고, 국정에 참여하여 친문(親聞)하였다. 그런지 3개월만에 노나라는 크게 다스려지고 질서가 잡혔다.
十四年乙巳, 孔子年五十六. 攝行相事, 誅少正卯, 與聞國政. 三月, 魯國大治.
 
이에 제나라는 음모를 꾸미어 어여쁜 여인들과 악단을 보내어 노나라 기강을 흩뜨리려 하였다. 어리석게도 계환자가 이를 수용하였고, 또 교제를 지내고도 제사 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나누어주는 의례도 갖추지 않았다. 공자는 개탄하며 노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齊人歸女惡以沮之, 季桓子受之, 郊又不致膰俎於大夫, 孔子行.

 

소정묘 주살의 이야기는 논어에 나오지 않는다. 증자ㆍ자사ㆍ맹자 계열에서는 전혀 논의되지 않았던 고사라고 간주된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이야기를 어디서 채록했을까? 이것은 순자(荀子)』 「유좌(宥坐)편에 나오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정묘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공자와 비슷한 성격의 유자로서 그 나름대로 학풍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소정묘는 노나라의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처럼 주살되었다. 그 주살의 주인공이 바로 공자라는 사실이 재미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독자들의 해석은 자유다. 그러나 아마도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기보다는 순자계열의 엄형주의적 법가사상가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철학을 구현하는 사건을 공자의 인생에 덮어씌워 만든 이야기로 보는 것이 보다 정당할 것 같다. 그만큼 공자는 인기가 있었고 권위가 있었다. 그래서 법가적 사상가로 둔갑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 날조를 근거지울 만한 그 무엇이 공자의 삶에 없었다고 시치미 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공자의 철학은 다면적이며 그의 삶의 판단은 상황적이었기 때문이다. 소정묘 스타일의 사상가를 주살해야만 했던 상황윤리가 개재된 어떤 역사의 장이나 삶의 현장이 있었을 것이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기 전의 여악(女樂) 문제는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자세하므로 부연치 않는다. 이번 공자의 유랑은 따라서, 제나라쪽이 아닌 그 반대쪽, 곡부 남방으로 이루어졌다. 공자 56, 자로가 47, 안회가 26세였다.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연표(年表)에 의하면 이 사건은 정공 13(BC 497)이 된다. 공자 나이 55세였다. 그래야 14년 유랑의 햇수가 맞아떨어진다. 이제 공자는 죽음의 방랑을 거치면서, 인간의 운명과 하늘()과 본성에 관하여 심오한 통찰을 획득하는 사색의 여로로 심입(深入)하게 되는 것이다.

 

 

공자는 먼저 위나라로 가서,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의 집에 거점을 정하였다. 참소를 당하자 위를 떠나 진나라로 가려는데 광 땅을 지나게 되었다. 광 땅의 사람들이 공자를 양호로 착각하여 그를 구류시켰다.
適衛,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 適陳, 過匡, 匡人以爲陽虎而拘之.
 
구류가 풀려나자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이번에는 거백옥(蓮伯玉, 취 뿨위, Qu Bo-yu)의 집에 거점을 정하였다. 이때 남자(南子)를 만나는 사건이 있었다.
旣解還衛, 主蘧伯玉家, 見南子.
 
다시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다. 그런데 송나라 사마(司馬)인 환퇴(桓魋, 후안 퉤이, Huan Tui)가 공자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또다시 정()을 거쳐 진()나라로 갔다.
去適宋, 司馬桓魋欲殺之. 又去適陳,
 
진나라에서는 사성정자(司城貞子, 쓰츠엉 정쯔, Si-cheng Zheng-zi)의 집에 거점을 정하였다. 진나라에서 3년을 머물렀고 또다시 위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위령공은 태만하여 공자를 기용할 수가 없었다.
主司城貞子家, 居三歲而反于衛, 靈公不能用.
 
()나라 조씨(趙氏: 조간자趙簡子를 가리킴)의 가신인 필힐(佛肹, 삐 시, Bi Xi)이 중모(中牟) 땅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꼬셨다. 공자는 가려고 하였으나 자로의 만류로 결국 가지 않았다.
晉趙氏家臣佛肹, 以中牟畔, 召孔子. 孔子欲往, 亦不果.
 
위나라에서 등용되지 못하자 공자는 장차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의 조간자를 만나려 하였다. 황하에 이르러 나쁜 소식을 듣고 포기하고 돌아와 또다시 거백옥의 집에 거점을 정하였다. 위령공이 공자에게 군대의 진법에 관해 물었다. 공자는 좀 터무니없어 대답치 않고 위나라를 떠났다. 또다시 진()나라로 갔다.
將西見趙簡子, 至河而反. 又主蘧伯玉家, 靈公問陳, 不對而行, 復如陳.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기초하여 약간 전후 맥락을 살피어 의역하였다. 광 땅에서 양호로 착각되어 공자가 구류된 사건은 단순한 착각으로 볼 수는 없다. 공자의 유랑 자체가 단순한 망명이 아니라 적극적 정치행위였으므로 공자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는 우발적이 아닌 어떤 정치적 모함(maneuvering)이 항상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광 땅에 공자가 구류된 사건의 배후에는 실제로 양호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연루되어 있었을 것이다.

 

공자의 유랑을 보통 천하주유라고 말한다. 그리고 매우 복잡한 루트를 그리고 있는 것 같이 기술하지만, 여기까지의 편력은 실제로 노나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 하남성 복양濮陽 근처)를 중심으로 들락거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지금 경계로 말하면 산동성 옆에 있는 하남성 중심으로 돌아다닌 것이다. 위나라는 본시 주공의 동생 강숙(康叔)이 봉해진 나라며 은나라 유민이 바탕이 된 나라이므로 노나라와는 형제지방(兄弟之邦)’이며 문화적으로도 상통하는 바가 많아 노나라 사람인 공자에게는 친근감과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고장이었다.

 

거백옥(蘧伯玉)은 위()나라의 대부이며 성이 거()이고 이름[]은 원(), ()가 백옥이다. 인품이 매우 훌륭했던 인물로서 논어에도 기술되고 있다(14-26, 15-6).

 

 

노나라 계환자(季桓子, 지 후안쯔, Ji Huan-zi)가 세상을 뜰 때에, 그의 아들 계강자(季康子, 지 캉쯔, Ji Kang-zi)에게 유인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공자를 되불러 등용하라 하였다. 계강자는 유언대로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저지하였다. 그러자 계강자는 공자 대신 공자의 제자인 염구(冉求, 르안 치우, Ran Qiu)를 불렀다. 한편 공자는 채()나라로 갔고 또 초나라의 섭(, , She) 땅으로 갔다.
季桓子卒, 遺言胃康子, 必召孔子. 其臣止之, 康子乃昭冉求. 孔子如蔡及葉.
 
초나라의 소왕(昭王)은 서사(書社)700리로써 공자를 봉해주려고 하였는데, 그 나라 영윤(令尹)인 자서(子西, 쯔시, Zi-xi)가 불가하다 하니, 이에 계획을 취소하였다.
楚昭王, 將以書社地, 封孔子. 令尹子西不可, 乃止.
 
공자는 다시 위나라로 돌아왔다. 때는 이미 영공이 죽고 없었다. 위나라 군주인 첩(, , Zhe)이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나, 이즈음 제자 염구가 노나라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 전공을 올리게 되니, 계강자가 그것을 핑계로 그의 스승 공자를 불러들였다. 공자는 기꺼이 노나라로 돌아왔다.
又反乎衛, 時靈公已卒. 衛君輒, 欲得孔子爲政. 而冉求爲季氏將, 與齊戰有功, 康子乃召孔子, 而孔子歸魯.
 
실로 애공(哀公, 아이꽁, Ai Gong) 11(BC 484) 정사년, 공자의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치 못했다. 공자 역시 이제는 더 이상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전예기를 서()하였고, 를 산()하였고, 악을 바르게 하였으며, ()의 단전ㆍ계사ㆍ상전ㆍ설괘ㆍ문언을 서()하였다. 제자가 대저 3천 명에 이르렀고, 그 중 몸에 육예(六藝)를 달통한 자가 72인이었다.
實哀公之十一年丁巳, 而孔子年六十八矣. 然魯終不能用孔子, 孔子亦不求仕. 乃敍書傳禮記, 刪詩正樂, 序易彖繫象說卦文言.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 七十二人.
 
애공 14(BC 481) 경신에,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잡혀 죽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어났다. 공자는 이때 춘추를 지었다. 다음에 신유년에 애제자 자로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에공 16(BC 479) 임술 418일 기축일 공자는 이 생애를 마치었다. 나이 일흔 셋이었다.
十四年庚申, 魯西狩獲麟, 孔子作春秋. 明年辛酉, 子路死於衛, 十六年壬戌四月己丑, 孔子卒, 年七十三.

 

참으로 정갈한 요약이다. 앞서 서막에서 충분히 설명하였으므로 췌언(贅言)을 삼간다.

 

 

공자는 노나라 도성의 북쪽 사수(四水, Si-shui)가에 묻혔다. 제자들은 상복을 입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으로 3년상을 지내고 떠났다. 그러나 오직 자공만은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모두 6년을 머물렀다. 공자는 아들 리()를 낳았는데, 그의 자()가 백어(伯魚)였다.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는 아들 급(, , Ji)을 낳았는데 그의 자()가 자사(子思)이다. 이 자사가 중용(中庸)을 지은 것이다.”
葬魯城北泗上,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 惟子貢廬於塚上, 凡六年. 孔子生鯉, 字伯魚, 先卒. 伯魚生伋, 字子思, 作中庸.”

 

여기까지가 공자세가(孔子世家)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 중요한 내용이 다 들어가 있다. 중용(中庸)으로 그 끝맺음을 한 것도 주희(朱熹)의 의도가 서려있다. 중용의 저자로서 자사라는 인물에 관해서는 세설이 분분했으나, 요즈음 간백(簡帛) 자료들이 출토되면서 그 인물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생생하게 부각되고 있다. 공자의 손자이지만 실제로 훌륭한 사상가였던 것 같다.

 

 

하씨가 말하였다. “노논어20편이다. 제논어는 별도로 문왕(問王)편과 지도(知道)편이 있어서, 모두 22편이다. 20편 중의 장구도 노논어보다는 사뭇 많다. 고론은 공씨 벽중에서 나온 판본인데, 요왈(堯曰)편 속의 자장문(子張問)’으로 시작되는 장을 분리시켜 한 편으로 만들었으므로 자장(子張)편이 2개 있기 때문에 편수가 모두 21편이다. 편의 순서도 제논어노논어와 같지 않다.”
何氏曰: “魯論語, 二十篇. 齊論語, 別有問王知道, 凡二十二篇. 其二十篇中章句, 頗多於魯論. 古論, 出孔氏壁中, 分堯曰下章子張問, 以爲一篇, 有兩子張, 凡二十一篇. 篇次不與齊魯論同.”

 

여기 하씨라 함은 하안(何晏)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내용은 하안의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있는 내용이다. 고론은 제1편이 학이(學而), 2편 이 향당(鄕黨), 3편이 옹야, 4편이 위정(爲政), 5편이 팔일(八佾), 6편이 이인(里仁), 7편이 공야장(公冶長), 8편이 술이(述而), 10편이 자한, 11편이 선진(先進)20편이 요왈, 21편이 자장문(子張問)으로 되어있다 한다. 그러나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논의라고 간주하기에는 어렵다.

 

 

정자가 말하였다. “논어라는 책은 유자(有子)와 증자(曾子)의 문인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논어속에서 많은 제자가 있어도 유독 이 두 사람만을 자()로써 호칭하였다.”
程子曰: “論語之書, 成於有子曾子之門人, 故其書獨二子以子稱.”

 

정자(程子)란 송나라 도학의 선하(先河)인 정호(程顥, 츠엉 하오, Cheng Hao: 정명도程明道)와 정이(程頤: 츠엉 이 Cheng Yi: 정이천程伊川) 두 형제를 가리킨다. 주자는 이 두 형제의 학문을 깊게 흠모하였으나 시대가 달라 직접 배울 기회는 없었다. 주자의 학통은 정자밑에서 직접 배운 양시(楊時), 그 제자 나종언(羅從彦, 1072~1135), 그 제자 이통(李侗, 1093~1163)으로 이어진다. 주자는 아버지 주송(朱松), 유면지(劉勉之), 호헌(胡憲), 유자휘(劉子翬), 이통(李侗)에게서 배웠으므로, 정자의 4전 제자라 할 수 있다. 형인 명도는 학문의 기풍이 포용적이고 원융한 깊이가 있어, 도ㆍ불의 세계도 수용하는 측면이 있다. 동생인 이천은 학문의 풍이 배타적이고 도덕적 엄격주의가 강해 날카로워 이단에 대해 용서가 없다. 주자는 정명도보다는 주로 정이천의 학풍을 본받았다.

 

그런데 이 두 형제의 글월이나 어록이 구분 없이 한 책으로 이정유서 (二程遺書)로 편집되어 있어 정확하게 유서의 글이 누구의 말을 전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자(二子)에 관한 논의는 시사적이다. 허나 그 이문(二門)에서 다 편집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자(二子) 이외에도 염자(冉子), 민자(閔子)도 나타난다. 논어의 성립과정은 손제자(孫弟子) 그룹에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루트를 거쳤다. 정자의 텍스트 인식은 매우 제한된 것이다. 전문적 탐구가 없는 인상주의적 발언에 머무르고 있다.

 

 

정자가 말하였다. “논어를 읽으매 어떤 자는 읽고 나서도 전혀 아무 일이 없었던 것과도 같다. 어떤 자는 읽고 나서 그 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또 어떤 자는 읽고 나서 참으로 배움을 즐기는 경지에 오르는 자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읽고 나서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구르는 자도 있다.”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깨달음의 기쁨을 표현한 명언이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신선한 감각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 책을 읽고 춤을 추는 모습이야말로 영원한 젊음 그 자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출전은 예기』 「악기.

 

 

정자가 말하였다. “요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을 모른다. 논어를 읽으매, 읽기 전에 이런 놈이었는데, 읽은 후에도 이런 놈일 뿐이라면, 그 놈은 전혀 논어를 읽은 자가 아니다.”
程子曰: “頤自十七八, 讀論語, 當時已曉文義. 讀之愈久, 但覺意味深長.”
 
정자가 말하였다: “나 이천은 나이 1718세 때부터 논어를 읽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도 이미 글월의 뜻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읽기를 오래할수록 그 문의의 맛이 점점 더 깊어지고 영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程子曰: “頤自十七八, 讀論語, 當時已曉文義. 讀之愈久, 但覺意味深長.”

 

참 심오한 독백이다. 정이천과 같은 대가도 논어178세 때나 처음 접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후대의 천편일률적 소독(素讀)의 교육과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자의 서설은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서설 전체가 단 한 구절도 구질구질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삽입하지 않았다. 놀랍게 깔끔한 표현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직사위리(職司委吏)

孔子成年後 曾爲季孫氏的委吏(管理倉庫的小官)

 

 

인용

목차 / 본문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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