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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 논어해석사강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 논어해석사강

건방진방랑자 2021. 5. 24.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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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해석사강(論語解釋史綱)

 

 

()와 소()의 의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그의 역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한유(漢儒)는 경을 주석하는 데 고고(考古)를 기준으로 삼아 명변(明辨)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참위(讖緯)류의 사설(邪說)이 같이 끼어드는 것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것은 배우기만 하고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폐단이다.

漢儒注經以考古爲法, 而明辨不足. 故讖緯邪說, 未免俱收. 此學而不思之弊也.

 

후유(後儒)후대의 유학자들, 송유(宋儒)를 가리킴는 경을 해설하는 데 궁리(窮理)이치를 궁구함. 송유의 이론적 성향을 가리킴를 근본으로 삼아, 고증이나 논거가 소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제도에 관한 것이나 사건이나 이름 같은 것이 틀릴 때가 있다. 이것은 생각키만 하고 공부하지 않는 것의 허물이다.

後儒說經而窮理爲主, 而考據或疎. 故制度名物, 有時違舛. 此思而不學之弊也. (1, 30b).

 

 

이것은 물론 논어』 「위정(爲政)배우기만 하고 생각치 않으면 멍청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구절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한 이야기이므로, 한유를 멍청한 케이스에, 송유를 위태로운 케이스에 해당시켜 각기 그 특징을 논구한 것이다. 다산이 말하기를 멍청하다함은 맹목적이라서 속임수에 잘 빠진다는 뜻이요, 위태롭다 함은 너무 관념적이고 옛 것을 권위주의적으로 신봉하여 환상적이되기 쉽다는 뜻이라 한다.

 

우리가 논어를 읽을 때 주석의 도움이 없이 본문만을 읽는다는 것은 아무리 한문의 달자(達者)라 할지라도 불가능에 속하는 일이다. 주석 없이 읽는다고 호언 해도 그 읽음은 이미 어느 주석의 영향권에서 성립한 담론이나 인식체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본문은 주석과 유기적 일체를 이룬다. 주석은 논어의 해석(Interpretation)이다. 그런데 이 해석은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왔다. 축적이란 시대적 가치관이 하나의 패러다임을 구축하면서 역사적으로 계속 쌓여온 것을 말하는 것이다.

 

조금 전문적으로 약속된 언어를 가지고 논어의 해석문제를 생각해보자. 논어라는 서물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서지학적 조형형태로 구축된 것은 전국말기를 거슬러 올라가기가 어렵다. 따라서 논어의 해석작업은 당연히 논어의 성립 이후, 그러니까 한()제국 시대의 사건일 것이다. ()대에 최초로 이루어진 해석을 우리는 주()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주()라는 말은 한대에 성립한 해석에 한정하여 부르는 전문용어라는 것을 독자들은 유념해야 한다. 그래서 보통 후대학자들이 임의로 쓰는 주라는 말과 혼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고주(古注)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이 고주의 대표적인 것이 정현(鄭玄, 정 쉬앤, Zheng Xuan, AD 127~200)의 해석이다. 정현의 고주를 보통 논어정주(論語鄭注)’라 부르는데, 이 논어정주는 어느 세월엔가 유실되었다가 최근 돈황, 신강성 투루판(吐魯番) 등지에서 당사본(唐寫本)이 발견되어 최근에는 그 원래모습의 한 반 정도가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논어의 경우, 정현의 주를 계승하여 조조(曹操)의 첩의 아들이며, 사위이기도 한 하안(何晏, 허 옌, He Yan, AD c. 193~249)이 만든 논어집해(論語集解)까지를 주()로 간주한다. 그러니까 논어의 고주라고 하면 실제적으로 정현과 하안, 이 두 사람을 염두에 두면 된다.

 

그 후에 육조(六朝)시대로부터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 초기에 이르러 완성되는 해석양식을 우리는 ()’라는 말로써 규정한다. 소라는 말에 소통(疏通)이라는 의미가 있듯이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를 소통시킨 것이다. 기존의 주의 기초 위에서 다시 세부적으로 논의한 것인데, 주를 저수지에서 흘러나오는 주된 간선 도랑이라고 한다면 소는 각 동네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만든 수없이 작은 물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주는 매우 간결하고 군말이 없는데 반해, 소는 매우 장황하고 시시콜콜 자문자답 잔말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한말(漢末)에서부터 중국으로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중국으로 유입된 한역불전들이 초기에는 한대에 성립한 경전해석학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조직화되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역으로 중국경전의 소()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니까 육조ㆍ당 시기의 유경(儒經)의 소는 불경의 소의 양식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청담(淸談)의 학풍이 유행하고, 또 인물의 추천제 등용방식이 성행하여, 속말로 이빨 잘 까는 구라꾼들이 많아, 이들의 주ㆍ객 대립의 다양한 담론과 강의노트가 소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하안과 동시대인이었던 왕필(王弼)만 하더라도 무()의 체득자로서 노자보다 공자를 더 높게 평가하였다. 노자는 무를 입으로 떠들기만 했고, 공자는 무를 소리 없이 실천하고 체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에는 노장사상이나 불교적 사유가 적지 않게 반영되어 있다.

 

()가 간결하고 소()가 용장(冗長)한 것은 상기의 시대적 분위기 이외로도 종이의 발명과 그 보편화라는 하부구조적 사태의 변화가 개입되어 있다. 채륜(蔡倫, 차이 룬, Cai Lun, ?~AD c. 107)이 종이를 발명한 것은 후한 중기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수피(樹皮)를 사용한 그런 순수한 재질이 아니었고, 또 그것이 보편화되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한대에만 해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책()의 자료는 죽간(竹簡)이었다. 죽간은 가격도 비쌌고, 또 많은 내용을 담기 곤란한 소재였다. 죽간 한 조()에 몇 글자밖에는 실리지 않는다. 따라서 주는 간결함을 생명으로 했다. 그러나 서진(西晋) 이후부터 종이가 보편적으로 활용되면서 가격도 저렴해졌고 많은 내용을 수월하게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소의 시대는 종이의 시대였던 것이다.

 

소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독자들은 두 사람의 이름만 기억해도 큰 불편이 없을 것이다. 그 첫째가 벽암록첫 공안의 주인공인 양무제(梁武帝) 시절, 강소성 사람 황간(皇侃, 후앙 칸, Huang Kan, AD 488~545)이다. 황간은 논어의소(論語義疏)라는 작품을 남겼다. 본래 정현은 산동 고밀현(高密縣) 사람이었으며, 그의 학설은 북방에서 유행하였다. 그러나 하안의 집해(集解)는 주로 남조 중심의 남방에서 성행하였던 것이다. 황간의 소는 남방문화의 소산이며, 남방에서 유행하던 하안의 집해를 집중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황간의 소도 중국에서는 송() 이후 자취를 감추어 구해볼 수 없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가학교(足利學校)1439년에 설립된 일본 중세의 유일한 학교, 토찌기현(栃木縣) 아시카가시(足利市) 소재 도서관에 그 온전한 판본이 보관되어 청나라 때 역수입되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었다.

 

다음으로 기억할 소의 대가가 북송(北宋) 진종(眞宗) ,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형병(刑柄, 싱 삥, Xing-Bing, 932~1012)이라는 인물이다. 형병은 황간의 의소(義疏)를 더욱 확대시켜서 소의 전통을 포괄적으로 완성시켰다. 그 작품이 바로 논어정의(論語正義)이다. 논어정의가 정보가 풍부하고 기존의 제설을 포섭할 뿐 아니라, 송나라 때는 목판본 종이책의 대량보급이 이루어지는 시대였으므로, 형병의 논어정의가 나오자 그 이전의 단행본들이 자취를 감추고 마는 불운한 결과를 가져왔다. 황간의 의소가 사라진 것도 그 중의 한 예이다.

 

남송 말기에는 기존의 주()와 소()를 합치어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성립한다. 십삼경주소본이 통용되면서 학문이 획일화되는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인쇄술의 발달이 학문의 다양성을 죽인 것이다. 십삼경주소본의 논어는 하안집해와 형병소를 합친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마무리 지으면서 다음의 표 정도는 머리에 집어넣으면 좋을 것이다.

 

본문(本文) 노론(魯論)
장후론(張侯論)
() 정현주(鄭玄注)
하안 집해(何晏集解)
() 황간 의소(皇侃義疏)
형병 정의(邢昺正義)

 

 

 

 

 후유(後儒)의 주자학

 

 

여기까지가 다산이 말하는 한유(漢儒)개념 속에 들어가는 논의이다. 한유란 아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정현주밖에는 별 신통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이후의 하안의 집해도 주 속에 들어가고 또 그 후의 소도 모두 주를 부연한 것이기 때문에, 보통 한유라 해도 실제적 함의에 있어서는 한당유(漢唐儒)를 총칭해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 한당유가 모두 훈고에 치우쳐 있고 의미에 대한 깊은 생각을 결()하고 있다는 것이 다산의 비판인 것이다. 한당유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그 상식적 관념의 배경에는 바로 한유(漢儒)와 대비되는 후유(後儒)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후유란 바로 남송정권의 주전파(主戰派)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며 경학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주희(朱熹, 주시, Zhu Xi, 1130~1200)라는 인물을 그 패러곤(paragon, 표본)으로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로부터 시작된 학문성향을 크게 묶어 주자학(朱子學, Zhuxism)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도 잘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크게 부연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자의 획기적 패러다임이란 사서집주(四書集註)’ 출현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서논어맹자13경 속에 단행본으로 들어있는 것이지만, 대학(大學)중용(中庸)은 논ㆍ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문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기의 수많은 편 중의 2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예기속에 파묻혀 있어, 예기의 전공자가 아니면 특별히 주목하기 어려운 문헌이었다. 대학중용예기에서 독립시켜 논어맹자와 함께 사서’(네 개의 경서)라는 개념으로 묶고, 사서야말로 공자의 가르침[孔子之敎]의 적통을 전하는 가장 고귀한 문헌들이며, 이 사서야말로 육경에 앞서 읽어야 할 문헌이라는 것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이정자(二程子, 얼 츠엉쯔, Er Cheng Zi)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 두 형제를 가리킴였다. 그러나 이정자는 이러한 주장만을 했을 뿐 사서에 실제로 주석을 달지는 않았다.

 

사서를 육경보다 높인다는 것은 엄청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래로 자기들의 가치관의 기준이 되는 경전은 중국문명을 최초로 만들어간, 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에 해당되는 선왕(先王), 즉 중국문명제작자들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육경은 선왕지도(先王之道)’라는 개념 속에 포섭되는 문헌이다. 그러나 공자는 소인(素人)이기 때문에 선왕(先王)의 반열에는 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요지부동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육경보다 사서를 높이게 되면, ‘공자지교(孔子之敎)’가 실제로 선왕지도(先王之道)’를 능가하게 되고, 공자가 선왕의 지위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즉 유교는 선왕지도를 존숭하는 유교가 아니라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교로 성격전환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송사도학전(道學傳)을 보라!

 

 

그러므로 말하노라: “공부자께서 요임금ㆍ순임금보다 슬기로운 것이 한참 뛰어나시도다.“

故曰: ‘夫子賢於堯舜遠矣.’

 

 

왜 이토록 공자를 선왕보다 더 높여야 했을까? 그 배면에는 북송정권이 이민족에게 굴욕적인 패망을 당하면서(정강지변靖康之變) 주전파들에게는 민족주의적 비분이 솟구쳤고, 따라서 외래사상에 대하여 주체사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렬한 요구가 솟아났다. 여기 외래사상이라 함은 수당을 통하여 장려한 화엄을 만개시킨 불학을 말하는 것이요, 주체사상이라 함은 선진시대로부터 정립되어 내려오는 유교의 도통(道統)을 말하는 것이다. 그 도통의 소이연은 물론 강력한 도덕주의(moral rigorism)의 회복이다. 그러나 불교적 향기에 만취한 당대 지식인들을 유교의 일용지간의 도덕으로 트랜스폼 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속한 일이었다. 불교는 대승불학의 만개와 더불어 다양한 교학의 치열한 논리가 발전되어 있었고, 더구나 선()적인 격조 높은 시심, 그리고 인식론, 우주론을 포함한 근원적인 인성의 문제에 관한 심오한 통찰, 그리고 공안(公案)적 말장난이 주는 일상적 재미, 그리고 한 개념 개념을 치밀하게 분석해나가는 탐구의 논리 등등 무궁한 지적 호기심을 제공했다. 이 모든 삶의 맛을 대치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교도 중국적 토양에서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환되었다면, 유교도 역시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도저히 불학과 길항할 여력이 있을 수 없었다.

 

 

 

 

 소승유교와 대승유교

 

 

소승불교라는 것은 역사적 싯달타가 깨달은 도리를 소박하게 따르면서 정진(精進)하는 사부대중의 삶을 중시한다. 따라서 소승에는 허세가 없다. 그리고 삼장(三藏)으로 말하자면, ()이 가장 중시되는 종교운동이었다. 그러나 대승이 되면, 역사적 싯달타는 중요치 않게 되고 그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논()이 부상하며, 모든 관심이 인간 개개인이 스스로 자각하여 부처가 된다고 하는 성불(成佛)의 논리로 모아지게 된다. 불타는 색신(色身)이 아닌 법신(法身)이 되고, 불타의 가르침 곧 불법(佛法)은 싯달타 개인의 법이 아니라 우주간에 편재하는 보편적 진리가 된다. 그리고 결론은 이러하다: ‘내가 곧 부처다.’

 

소승불학에서 율()이 중시되었다면, 원시유학에서 중시된 것도 그 율()에 해당되는 예()였다. 그러나 소승유교가 대승유교로 점프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예악을 뛰어넘는 새로운 논장(論藏)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논장의 테마는 대승불학의 테마와 비슷한다. 공자의 가르침은 노나라라는 역사적 시공에서 국소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그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을 그들은 새로운 의미맥락에서 도()라 불렀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우리가 송학을 도학(道學)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도학의 도는 공자라는 역사적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나오는 보편적 진리이다.

 

 

도의 커다란 근본은 하늘에서 나온다. 하늘이 변하지 않으면도 역시 변할 바 없다.

道之大原, 出於天. 天不變, 道亦不變. (전한서』 「동중서전 董仲舒傳)

 

 

공자는 이러한 도를 체현한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유교의 도는 선왕의 제작이 아니라 하늘의 이법을 구현한 것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자는 선왕을 뛰어넘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대승적 유교사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공자의 도는 결국 하늘의 이치이므로 하늘의 이치를 구현한 모든 인간이 공자가 될 수 있고 요순이 될 수 있고 선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성불(成佛)이 여기서는 성인이 된다고 하는 위성(爲聖)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유학은 위성의 학문(爲聖之學)이요, 따라서 위인지학(爲人之學, 남을 위한 배움)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 나를 위한 배움)이다. 이렇게 되면 나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또 보편적 인간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어야 한다. 인성론(人性論)이 새로운 유학의 주제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적 논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송유들은 바로 13경 중에서 논어맹자의 해석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논ㆍ맹이라는 경전 속에는 대승적 유교가 지향하는 어떤 논리의 핵이 이미 함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논ㆍ맹으로는 부족했다. 논ㆍ맹의 해석이라는 논장을 보강하기 위하여 새롭게 등장한 서물이 바로 대학(大學)중용(中庸)이었다. 중용을 펼치면 곧바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말이 나온다. 심오한 인성론이 나오고 성()의 본체론이 전개되며, 감정조절의 도덕론이 우주론적 테마로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은 수신으로부터 평천하에 이르는 매우 체계적인 정치철학(political philosophy), 격물치지(格物致知)인식론, 혈구지도(絜矩之道)의 도덕론을 제공하고 있다. 이 네 개의 서물, 즉 사서만 구비되면 불교에 대항할 만한 우주론, 인식론, 가치론을 모두 웅대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교가 일상적 윤리학설에서 도덕적 형이상학(Moral Metaphysics)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게다가 대승불학의 중국적 변용의 극치라 말할 수 있는 화엄론에서 말하는 리법계(理法界)와 사법계(事法界)의 논리가, 각각 리()와 기()로 계승되어 본체계와 현상계의 새로운 우주론적 틀이 형성케 되고, 그것은 또다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인성론적 문제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서에 대한 도학적 틀을 완성하고 사서에 대한 새로운 주석을 가하여 사서를 새로운 유교(儒學, Neo-Confucianism)운동의 기치로 표방한 사람이 바로 복건성 우계(尤溪) 사람 주희(朱熹)였다. 그러니까 유교경전주석사에 있어서 주희(朱熹)사서집주(四書集註)는 한당(漢唐) 이래 가장 거대한 획을 긋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의미했다. 주희는 주자(朱子)로 존숭되었으며, 요ㆍ순ㆍ우ㆍ탕ㆍ문ㆍ무ㆍ주공ㆍ공자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 이래 도통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추앙되었다(道統傳圖). 주희의 주석을 이전의 고주(古注)와 대비하여 신주(新注, 新註)라 부른다.

 

이 신주로부터 발전한 학문을 도학(道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자학(朱子學), 신유학(儒學), 송학(宋學) 등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제각기 뉘앙스의 차이는 있으나 대차가 없다.

 

 

 

 

 주자학에 대한 혐오

 

 

이제 다산후유(後儒)는 경을 해설하는데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삼아 고증이나 논거(考據)가 소홀할 수 있다[後儒說經而窮理爲主, 而考據或疎]’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이인(里仁)8에 누구나 잘 아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朝聞道, 夕死可矣.

 

 

이런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상식적이란 말은 매우 위험한 말이다. 우리의 상식 자체가 이미 우리가 속한 세계의 가치관의 패러다임 속에서 물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도를 듣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어떤 보편적 진리를 깨닫는다는 뜻으로 새긴다는 것 자체가 천리(天理)를 전제로 한 말이며, 그 천리를 깨닫는 인간의 심성의 바탕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전형적인 신주(新注)의 입장인 것이다.

 

고주(古注)에서는 이런 말을 신주처럼 해석하지 않는다. 문도(聞道)는 그런 일상적으로 우리가 깨우칠 수 있는 사물의 당연지리가 아니라[道者, 事物當然之理. 주자집주], 반드시 어떤 제도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 말로서, 그리고 공자의 생애의 구체적 상황과 직결되는 말로서 해설한다. 그러니까 도를 듣는다는 것은 도가 있는 세상의 실현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자기가 갈구하는 정치적 상황의 실현이 공자 삶의 말년에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는 말로서 풀이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아사노식의 풀이를 가하자면, 자기의 정치적 패권의 꿈의 실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개탄한 말일 수도 있고, 제후간의 사이에서 유세객으로서 막강한 실세를 과시하고 있는 자공(子貢)이 좀 더 일찍 자기 꿈을 실현시켜주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는 탄식일 수도 있다. 소라이(徂徠)식의 해설을 빌리자면 문도(聞道)’는 어디까지나 선왕지도(先王之道)’이며, 선왕지도를 추구하는 공자의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말일 수도 있다.

 

고주의 입장은 매우 구체적이고 착실(着實)한 해석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다 논어구절을 해석하다 보면 오히려 논어가 모두 우리에게서 하등의 의미를 갖지 않는 공자라는 개인의 이야기로 소외될 수도 있고, 또 특수한 역사적 정황에서 발생했던 하찮은 이야기로 전락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너무 신주의 입장에 치우치면 보편적 의미는 생겨나지만 관념적이 되기 쉽고, 임의적인 해석이 개입되며, 너무 일상적인 평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신주와 고주의 입장이 장단점을 가지고 엇갈리게 된다. 그래서 보통 고주를 훈고지학(訓誥之學)이라 부르고 신주를 의리지학(義理之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주(古注) 신주(新注)
훈고지학(訓誥之學) 의리지학(義理之學)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고주라 해서 의리(義理)가 없는 것이 아니고, 신주라 해서 훈고(訓誥)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21세기적 안목을 가지고 볼 때, 주자의 신주는 대체적으로 고주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상식적이고 대중적이며 풍요로운 해석이다. 그러나 신주에 대한 모멸감이나 경멸감은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특히 청나라 때의 고증학(考證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주자의 신주적 입장을 버리고 고주적 입장으로 회귀하려는 기치를 내건 사람들이었다. 물론 다산의 미묘한 언급 속에도 이런 당대 시대정신의 텐션(tension, 긴장)이 숨겨져 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경서를 읽으면서 주자학에 대한 혐오를 키웠다. 우리 때에, 성균관에서 유학을 종교처럼 신봉하는 사람이면 모르되, 대체로 양식이 있는 식자라면 반주자학을 논하기를 좋아했다. 안습재(顔習齋, 옌 시자이, Yan Xi zhai, 1635~1704)는 주자의 해독은 비상보다 독하다고 했고, 대동원(戴東原, 따이 똥 위앤, Dai Dong-yuan, 1723~1777)은 혹리(酷吏)는 법()으로 사람을 때려잡지만, 주자는 리()로써 사람을 때려죽인다고 혹평했다. 혹리에게 죽는 사람은 불쌍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나 많지만 주자의 리에 소리없이 죽는 사람은 연민의 정을 가지는 이웃조차 없다고 개탄했다. 모두 성리학의 병폐에 대한 극단적인 반발을 나타낸 예봉(銳鋒)의 명언들이다. 시아버지에게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소박 맞는 며느리나, 시어머니에게 당하다 당하다 못해 우물에 빠져죽는 조선의 여인들의 가슴에는 습재나 동원의 개탄은 공감의 전율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주자학을 혐오했던 이유는 아마도 주자학이야말로 조선의 멸망을 가져오게 한 원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문명의 개화를 근대화 = 반주자학이라는 도식에서 바라보았던 20세기 지식인들의 무반성적인 전제가 암암리 나에게도 작용되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도식이 얼마나 잘못된 도식인가, 그리고 이러한 도식에 기초한 실학이라는 개념이 파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독기학설(讀氣學說)에서 설진(說盡)하였다. 조선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기독교문명의 적극 수용을 불러오고, 또 그 기독교문명의 수용이 중ㆍ일과는 달리, 유독 조선에서 인류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대규모 전도주의로 비화하여 조선성리학의 폐해보다 더 극심한 경직과 망상과 온갖 초월과 종말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이제 예수의 해독이 비상보다 독하다고 말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두 번 반복되는 명사로 주자는 참으로 힘이 세구나라고 나온다.

 

 

 주자학의 근대성

 

 

나는 주자학을 전근대적(pre-Modem) 사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나는 근원적으로 근대라는 개념을 사용키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 상식적 맥락에 즉하여 이야기해도, 주자학이야말로 인류의 근대사조라고 단언한다. 주자는 데카르트코기토나 루소의 에밀과 같은 정신과는 또 다른 하나의 인류의 근대정신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21세기에는 주자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해야 하는 문제상황을 떠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산은 그의 학우 김덕수(金德叟)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가 다소곳이 생각하여 보건대, 한유(漢儒)들은 옛 것을 높이고, 그 훈고가 서로 계승되어, 실제로 취할 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논리들이 엉켜 착오를 일으키는 상황이 진실로 적지 않습니다.

竊嘗以爲漢儒高古, 其訓詁相承, 固多可取, 而其紕繆錯誤, 誠亦不少.

 

그러므로 주자가 많은 곳을 고치고 바로 잡았는데 그것은 실로 완벽한 옥에 흠집을 내는 짓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故朱子多所更改, 非求瑕於白璧也.

 

그런데 요즈음 세상에서는 고주만을 숭상하고 전심하는 일종의 풍조가 휩쓸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주가 말하는 논의에도 진실치 못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면 그런 사람을 지목하여 멍청한 놈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제가 수십 년 동안을 쑤셔 박혀 오랫동안 다양한 경전의 장구에 침잠하여 사색하고, 경험을 축적하여 보니, 고주라 해서 다 옳을 수가 없는 것이고, 후유(後儒)의 신주라 해서 다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近世一種習尙, 乃欲專心古注. 凡古注所言, 有議其不允者, 指之爲妄人. 然窮居數十年, 沈漸章句, 積久稽驗, 知古注未必盡是, 後儒新論未必盡非.

 

이러한 문제에 관한 유일한 해결책은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공평한 마음으로 바라보아, 그 시비의 진상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연도의 전후나 무엇이 더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그 학설을 따를까 말까 하는 것을 단정지우는 것은 학인의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唯當虛心公觀, 以察是非之眞, 不宜按世次考年紀, 以斷其從違也. 詩文集20, 30b.

 

 

우리 민족은, 통일신라 신문왕(神文王) 때 국학을 설치했는데 이미 그곳 커리큐럼에 논어가 필수라 했고, 그 이전에 이미 백제의 왕인(王仁)논어를 일본에 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옛부터 논어를 접하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우리가 논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신주논어요 주자논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하자면 과거 초장시험에 논어가 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영락제 때 편찬된 사서대전(四書大全)의 집주본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누구든지 주자의 논어집주를 달달 외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문으로서의 논어가 아니라, 벼슬 수단으로서의 논어였고, 그 시각에서 일차적으로 주자는 조명되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토록 많은 조선의 유자들이 어려서부터 논어를 달달 외웠건만 논어객관적 대상으로서 객화시켜 연구하고 그에 대한 주석을 가하는 사례는 극히 희소하다는 것이다.

 

다산논어고금주는 그 희례(希例)에 속하는 것이다. 조선의 유자들에게 던져진 논어는 그냥 논어가 아니라 주자집주논어였다. 따라서 그들의 의식세계 속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 주가 곧 논어라는 개념의 유기적 일체를 이루고 있는 마당에, 또다시 주석을 가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며, 불가한 일이며, 불경한 일이었다.

 

중국의 송ㆍ명ㆍ청대에 걸쳐 내려오는 찬란한 주석사나 일본 에도시대 유자들의 고집스럽고도 독창적인 주들을 바라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오늘날 이 땅에 인문학의 빈곤을 운운케 되는 것도 이러한 전통의 연장이라는 힐난을 모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계가 일체의 다양한 논의를 거부하고 성령지상주의에 매달려 세계 신학계의 상식이 되어가고 있는 진보된 학문정보에 어두운 현실 또한 동일한 빈곤과 타락한 종교문화를 후세에 물려주게 되리라는 우려가 우리의 가슴을 애처롭게 만든다.

 

나 스스로의 불민(不敏)을 책()하면서, 요번 나의 논어주석에는 주자의 집주부분은 상론(上論)에 한하여 별도로 충실히 번역하기로 하였다. 하론(下論)에서는 정보가 집약되면서 논어의 총체적 윤곽을 잡아야 하는 마당에 번쇄한 집주는 독서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상론의 집주는 독자들에게 송유의 입장이 과연 무엇인지에 관해 명료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송명유학사를 읽는 것보다 논어에 즉하여 집주를 읽는 것이 철학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첩경일 수도 있다. 집주의 정확한 해독에 필요한 출전은 옥안(沃案)을 통해 상세히 다 밝혔다. 다음은 주자의 서설(序說)이다.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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