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서(通序)
인류문명전관(人類文明全觀)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
爲天地立心 위천지입심 |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
爲生民立道 위생민입도 |
동포를 위하여 도를 세운다 |
爲往聖繼絕學 위왕성계절학 |
지나간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
爲萬世開太平 위만세개태평 |
만세를 위하여 태평한 세상을 여노라. 장횡거(張橫渠) |
나는 평생을 동서고금의 고전세계를 흠모하며 살아왔다. 고전(古典)이란 동(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西)에도 있고, 고(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금(今)에도 있다. 그러나 서의 고전은 동의 고전에 비하면 우리에게 일용지간에 비근한 느낌이나 절실한 감회가 부족할 수가 있고, 신화적 틀에서 벗어나질 못하여 소원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금(今)의 고전은 고(古)의 고전에 비하면 아직 시간의 시련을 더 거쳐야 한다.
인류문명의 발상지를 보통 4대 강역(江域)으로 나누어 논한다. 황하(黃河)유역, 인더스 갠지스강역, 티그리스ㆍ유프라테스강역의 메소포타미아지역, 그리고 나일강역이 그것이다. 그런데 나일강역만 유독 아프리카대륙 속에 들어 있고, 나머지 세 강역은 모두 아시아대륙에 속해 있다. 아시아대륙의 극서에는 캐러반(caravan, 隊商)들이 보스포러스해협(Bosporus Strait)을 바라보며 기나긴 비단길의 종착을 노래했던 위스퀴다르(Üsküdar)를 북서의 계한(界限)으로 하는 아나톨리아(Anatolia)문명이 자리잡고 있고, 극동에는 매일 새벽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며 아침의 정적을 깨는 침략자들에게 눈부신 위용의 빛을 발했던 토함(吐含)의 장중웅려(莊重雄麗)한 석불이 곤륜의 기상을 등에 업고 백두대간을 지키고 있는 조선문명이 자리잡고 있다.
기실 이집트문명이라는 것도 본시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과의 연계보다는 메소포타미아, 비옥한 초생달(Fertile Crescent), 팔레스타인문명과 보다 연속적인 내면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저 레바논산맥과 안티레바논산맥 사이를 훑어내리는 베카밸리(Beqaa or Al-Biqāʿ Valley)로부터 시작하여, 헤르몬산 앞 계곡, 골란 고원, 갈릴리 호수, 요단강, 사해, 아라바산맥 와디(Wadi Arabah Mts.), 아카바만(the Gulf of Aqaba), 홍해, 에티오피아의 다나킬 함몰지대(Danakil depression),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Turkana L.), 나이바샤(Naivasha), 마가디(Magadi), 그리고 서쪽에서 연속되는 저지대인 알버트, 에드와드, 키부, 탄가니카(Tanganyka L.), 루크와(Rukwa L.), 나사(Nyasa L.) 호수들을 연결하여 모잠비크의 베이라(Beira, Mozambique)에서 종결되는, 이 지구상에 가장 거대한 지각함몰인 대열극(大裂隙, Great Rift Valley)이 뻗쳐있다. 이 열극을 따라 인류의 중요한 고문명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열극을 주축으로 양옆을 연결하여 생각해보면 이집트문명은 팔레스타인ㆍ페니키아ㆍ메소포타미아문명의 대세와 연속적 홍류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인류의 4대문명이 모두 아시아대륙과 그와 연속적 일체를 형성하는 아프리카대륙의 일부에서 발생한 것이다.
내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여태까지 이해하여온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우리에게 왜곡된 인상을 던져주기 좋도록 기술되어 왔기 때문에, 그러한 기술에 근원적 패러다임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의 학문을 광정(匡正)하려는 무리한 야심의 발로가 아니다. 이미 기초하고 있는 정보체계에 대한 우리자신의 인식체계의 변화를 요구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 요구되고 있는 변화의 핵에 다음과 같은 단순한 사실이 자리잡고 있다. 인류문명 발상지인 4대강역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서양(the West)’이라고 하는 것은 ‘라틴 웨스트(the Latin West)’를 말하는데 이 라틴 웨스트야말로 고문명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후세의 서방기독교문명권을 지칭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근대화
우리 민족은 18세기 말기부터 주자학 유일신앙의 권위주의 사상풍토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불행하게도 또 하나의 유일신앙적 권위주의를 도입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것이다. 조선왕조 남인계열의 유자들이 권력에서 소외되고, 또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로서 신봉하고 있는 성리학적 틀이 유학의 본래정신에서 벗어나 민중과 역사를 소외시키고 있다는 판단이 들 무렵, 그들이 구원과 구세의 빛으로서 접한 기독교라는 것은 양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본다면 온갖 개혁의 흐름에 대하여 반사적으로 교조화된 서구 가톨릭의 말류였다. 그러나 비록 제국주의적 이념의 틀 속에 갇혀있었던 기독교이긴 했지만, 그 기독교는 유교보다는 더 철저한 사민평등의 보편주의적 가치관을 가르쳤고, 근세 과학정신과 결부된 신교육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서구예술ㆍ문화ㆍ의복ㆍ건축ㆍ음식ㆍ예법 등등을 수용케 하는 새로운 일상 소양의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민족은 기독교의 핵심인 기독론(Christology)을 신봉하든, 신봉하지 않든 간에 부지불식간에 기독교라는 문화현상에 침윤(浸潤)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우리민족의 19세기는 조선왕조의 몰락이라는 비극적 문명해체과정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으며, 20세기는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상황, 그리고 남북분열, 그리고 범세계적 냉전구도를 구조 지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대규모 전쟁, 그리고 분단국가의 이념대결이 우리의 연대기를 메꾸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민족국가의 등장과 함께 창궐한 제국주의의 모든 죄악의 산물이 결집된 역사를 살아가면서 우리 민중은 암암리 기독교라고 하는 새로운 정신문명을 하나의 초월적 구심체로서 신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신앙체계를 접했으며, 또 기독교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강렬한 유교문명의 상식적 바탕을 지닌 우리 한민족의 사람들이 사분의 일에 가까운 인구가 기독교를 신앙하고 있다면 그것은 종교심리학적 분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민족사적으로 고찰해야 할 현상일 수밖에 없다.
20세기의 근대화(Modernization)라고 하는 현상은 암암리 서구적 가치의 수용이라는 대세(大勢)와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화가 반드시 서구화(Westernization)를 의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민족사의 현실은 ‘근대화 = 서구화’라는 검증되지 않은 등식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당수의 조선식자들이 ‘근대화 = 서구화’라는 등식에 부지불식간 또 하나의 가치를 얻어서 생각했으니 그것이 바로 기독화(Christianization)라는 것이다.
근대화 Modernization |
= | 서구화 Westernization |
= | 기독화 Christianization |
과연 이러한 도식을 우리는 우리 삶의 정당한 가치관으로서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나 정작 핵심적 문제는 이러한 도식의 정당성에 관한 논박에 있지 않다. 불행하게도 상기의 도식을 자신의 검토되지 않는 신념체계로서,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국의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현실이 먼저 지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서구유학의 깃발을 휘날렸으며, 법조계, 정계, 재계, 예술계, 학계, 교육계 등 한국문화 일반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트층은, ‘보수’라는 말의 개념규정조차 애매하지만, 보수의 논리에 헌신하는 경향성을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엘리트층의 상당수가 상기의 도식을 자기의 신념체계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다. 불교도라해서 근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과학과 같은 근대화의 선두에 서있으면서도 서구적 가치에 자신을 오염시키지 않으려고 방비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화 = 서구화 = 기독화’라는 가치관을 수용하든 하지않든간에 대부분의 한국식자들이 인류의 역사를 서구중심으로 생각하고, 모든 인류의 경험의 축적의 형태가 오로지 그들이 생각하는 서구적 근대의 가치를 발현하기 위한 목적론적 체계(a teleological system)라고 인지하는데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감증세(無感症勢)는 일차적으로 무지에서 온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는 의도적 무지가 아니라 별다른 정보가 부재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매우 상식적인 현실이다. 이러한 상식적 현실이야 말로 가증스럽고 가공스러운 것이다. 비의도적 무지는 아무 곳에나 쉽게 별 저항없이 침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땅의 젊은이들의 가치관과 비젼을 형성하는 교과서가 모두 그러한 왜곡된 서구중심의 역사기술,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모든 무형의 가치기술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좌ㆍ우이념의 말초적 시비는 있으되, 이러한 거시적이고도 본원적인 문제에 대한 대책이나, 새로운 인식이나, 정보의 발굴은 없는 것이다. 서양역사가 인류사의 주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든 텍스트를 장악하고, 철학사, 건축사, 음악사, 미술사, 문학사 등등의 모든 개론이 그에 준하여 기술되고 있다. 중국문명에 관한 기술도 소외된 변방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인도문명에 관한 이야기도 이그조틱한(exotic, 이국적인) 판타지 테일(tale, 이야기)처럼 들리며, 중동문명에 이르게 되면 흑암의 커텐이 차단의 막을 친다.
서구의 정체
‘서구’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방로마를 중심으로 기술되어온 역사를 일컫는 것이다. 서방로마라는 것은 로마제국권 내에서의 동방세계(the Orient)를 의식하여 점차적으로 형성된 개념이지만 그것이 세계사의 주원(主源)인 것처럼 인식되게 된 것은, 로마황제 중에서도 유례를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포악하고 사악하기 그지없었던 콘스탄티누스가 쓰러져가는 로마를 재건하기 위하여 박해의 대상이던 기독교를 우대받는 특권의 기독교로 전환시킨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6명의 분권 황제를 단 하나의 유일절대 권력의 황제로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유일신관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이데올로기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범용한 사가들이 기술하는 것처럼 그 사건으로 인하여 로마가 재건되었던 것도 아니요, 로마사회의 해체가 역전되었던 것도 아니다. 결국 서로마는 기독교의 수용과 무관하게 멸망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향후 모든 서양역사의 전개에 가톨릭의 이념을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양역사를 인류역사의 주류처럼 인식하는 모든 기술방식의 저변에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인류사를 바라보는 매우 협애한 편견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AD 313년의 밀라노칙령(Edict of Milan) 이후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기독교를 이야기하면, 말(末)을 숭상하여 본(本)을 파기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본시 밀라노칙령이란 로마제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 대한 평등한 관용을 의미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칙령을 계기로 모든 법적 권리를 독점했다. 더 불행한 사실은 그 특혜적 입지를 활용하여 그들이 한 200여년간 받아온 박해보다 몇천배 가혹한 박해를 타종교에 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세기를 대변하는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가 지적했듯이 로마가 공인한 이후의 기독교는 차라리 ‘황제교’ 아니면 ‘시저교’라 해야 옳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국교로서 정식화하는 과정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메시아에 관하여 그릇된 관념을 품어왔다는 사실을 단순히 유대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또다시 매우 하찮은 형태의 종교관에 매달렸다. 거기에는 매우 뿌리 깊은 우상숭배가 숨어있다. 즉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이집트ㆍ페르시아ㆍ로마제국의 황제의 이미지로서 형상화시켰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하나님에게 시저에게만 속하였던 모든 속성을 거침없이 부여하였던 것이다(Process and Reality, 342).
오늘날 상식이 있는 신학도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본질을 논구하는데, 교회사적 혹은 교리사적 탐구를 제외하고는, 밀라노칙령 이후의 황제교를 가지고 기독교를 운운하지는 않는다. 말틴 루터가 이미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캣치프레이즈를 그의 신학의 핵심적 테제로 삼았듯이,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학자들도 성서 27편의 성립시대와 로마국교화 이전의 초대교회사를 중심으로 신학적 논쟁의 광장을 마련하려 한다. 그런데 초대교회사의 직접적 터전은 로마제국이지만, 당대의 로마제국의 정신적 토양은 헬레니즘문명의 모든 성과를 흡수한 것이었다.
예수도 로마제국의 사람이었다. 그에게 던져진 질문 중의 하나가 로마황제인 시저(캐사르=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문제였다(막 12:14, 눅 20:22). 부당하다고 말하면 그는 정치적 혁명가가 될 것이요, 정당하다고 말하면 그는 민족적 반역자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레토릭하게 매우 세련되어 있지만 실내용인즉슨 사뭇 애매하다. 아마도 자신의 사역이 정치적인 목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자기를 골탕 멕이려는 자들의 피상적 논쟁의 함정을 회피했을 것이다.
예수와 헬레니즘
예수는 갈릴리사람이었고, 그의 사역의 대부분은 갈릴리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천국을 선포했던 것이다. 갈릴리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 ‘이방인의 지역(Gelil)’(사 9:1)에서 왔듯이, 갈릴리는 전통적으로 남부의 유대지역과의 연속성보다는 북부의 페니키아문명이나 시리아지역과의 연속성이 더 강한 곳이며, 신약의 시대에도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정치적ㆍ민족적 단위(an autonomous and self-contained politico-ethnic unit)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매우 풍요로운 농작과 어업이 가능했기 때문에,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부유했고 인구의 밀도가 높았다. 따라서 동방으로 가는 대상루트의 배경지역으로서 헬레니즘문명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예수의 일생에 관해 일차적인 전기적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온 마가복음이 갈릴리바다 북단의 자그마한 어촌인 가버나움(Capernaum)지역을 사역의 터전으로 선택하고 있고, 그 주변의 실제적 도시문명의 정황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매우 목가적인 향촌인으로 인식하기 쉬우나, 당시 갈릴리와 그 부근은 엄청난 헬레니즘의 대도시로 가득 차 있었다. 나자렛에서 불과 2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세포리스(Sepphoris)와 같은 대도시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가버나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헤롯 안티파스에 의하여 갈릴리호숫가에 세워진 티베리아스(Tiberias)와 같은 중요한 도시도 공관복음서에는 언급조차 되고 있질 않다. 예수는 갈릴리사람으로서 헬레니즘문명의 훈도를 충분히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헬레니즘이란 알렉산더대제(Alexander the Great, BC 356~323)에 의하여 건설된 제국문명 이후의 사태를 말하는 것으로, 아테네와 같은 작은 폴리스(polis, 도시국가)의 국부적 영역에 제한되지 않은, 지중해연안에서 인도에 걸친 거대한 코스모폴리스(cosmopolis)로 진화된 개방문명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아람어(Aramaic)라는 당시의 갈릴리지역의 국제통용어를 말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아람어는 보통 페니키아 알파벳으로 표기되었다가 다양한 형태로 진화되었다】, 그가 헬레니즘문명에 정통한 수준으로 볼 때 희랍어에 노출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역사적 예수의 진상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문헌적으로 실존의 신빙성이 확실하며, 역사적 예수를 부활의 케리그마(Kerygma)【‘전달자로서 선포하다’는 뜻으로 복음의 선포와 구두 문답】로 변모시킴으로써 기독교 성립의 최초의 한 전기를 마련했다고 사료되는 사도 바울은 철저히 헬레니즘문명의 훈도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헬라말이야말로 사도 바울의 모국어였고, 그의 사유체계는 전적으로 헬라어의 개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헬레니즘철학의 핵심적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를 헬레니즘의 견유학파(犬儒學派)의 한 카리스마적 현자(Cynic)로서 파악하는 최근의 학계동향이 두드러지고 있지만, 헬레니즘 문명권 내의 예수라는 견유(犬儒)를 부활과 재림의 메시아로서 둔갑시킨 사도바울의 정신세계도 유대교와의 연속성보다는 헬레니즘과의 연속성이 더 명료하게 드러나는 언어적 패러다임을 과시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다. 여기 이방인(Gentiles)이란 헬레니즘문명권내의 헬라적 사유에 젖어있는 비유대계 사람들을 가리킨다. AD 70년경부터 AD 100년경 사이에 성립한 4복음서문학도 모두 코이네(koine) 희랍어로 기록된 것이다. 마태복음서가 유대교와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복음서문학은 모두 헬레니즘 문화에 젖어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감동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는 구약의 세계와의 관련성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결국 스스로 구약적 세계관, 즉 율법주의적 유대교와의 단절을 선언함으로써 그레코ㆍ로만 세계에로의 대로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헬레니즘의 산물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암암리 인류의 역사의 시원을 더듬어 올라갈 때 그레코ㆍ로만문명에서 멈추게 마련이다. 아예 구약적 뿌리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역사가 웰즈(H. G. Wells)가 지적하는 바, 최근까지만 해도 창세기라는 사건이 BC 4004년 봄이냐 가을이냐라는 문제를 놓고 심각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A Short History of the World, 1). 기독교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역사며 그 이후에 전개된 중세기와 르네상스, 그리고 서구라파 중심의 근대적 변용의 역사다. 그런데 로마제국은 헬레니즘문명의 틀 속에서 독자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가들이 헬레니즘 그 자체의 연구를 심각하게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을 희랍제국에서 로마제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으로만 규정해 버린다. 동ㆍ서가 교류된 그 개방적 문명의 독특한 성격을 독자적으로 규명하는데 소홀하였던 것이다. 철학사에서도 스토아학파(Stoicism), 에피쿠로스학파(Epicurianism), 견유학파(Cynicism), 회의학파(Skepticism) 등의 헬레니즘 사상은 좀 천박한 인생철학인 것처럼 가볍게 간과하기가 일쑤다. 그들이 추구한 세계관과 가치관의 총제적 모습을 심도있게 천착하는 노력이 과거의 철학사 기술에는 별로 엿보이질 않았다.
물론 헬레니즘은 폴리스의 고전시대, 즉 헬레니스틱(Hellenistic)이라는 형용사와 대비되는 헬레닉(Hellenic)이라는 형용사로 수식되는 아테네중심의 희랍 시대를 모태로 삼는다. 결국 서양역사나 서양정신사의 프로토타입이 모두 소크라테스 이전철학(Pre-Socratics)에서 출발하여 소피스트를 거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완성되는 희랍고전철학시대로 귀속되는 것이다.
건축사를 쓸 때에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신전과 그 부속 건축물들을 서양의 모든 건축구조의 프로토타입인 것처럼 기술한다면, 그 도리아식 질서감의 완성미가 아무리 정치(精緻)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BC 5세기 중반의 작품일 뿐이다. 그것은 고대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연출한 탁월한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429)에 의하여 발원되었다. 그리고 조각가 피디아스(Phidias)의 지휘하에 이크티누스(Ictinus)와 칼리크라테스(Callicrates)의 설계로 BC 447년에 착공하여 BC 438년에 아테나 여신상이 안치되었고, 외장은 BC 432년에나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잠깐 우리의 눈을 돌려 이집트 카이로 남서쪽 교외에 있는 기자(Giza)의 장쾌한 대피라미드(the Great Pyramid)를 쳐다본다면, 그것이 자그만치 아테네의 파르테논보다 약 2150년을 앞선 작품이라는 사실을 우뚝 목격하게 된다. 이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인류문명의 시원을 그레코ㆍ로만문명으로 보는 시각을 교정해야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파르테논을 바라보는 시간의 격차만큼, 또 다시 희랍인들의 입장에서 시간의 격차를 느꼈을 태고성 그 자체에 우리의 경이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으로부터 22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쿠푸왕(Khufu, BC. 2609~2584, Oxford Encyclopedia of Ancient Egypt에 준거)의 피라미드의 건설에 동원된 인력동원방식의 조직성과 토목ㆍ기계공학기술, 천문학, 수학, 예술, 그리고 그에 부속되는 명부신전(mortuary temple)과 장엄한 신도(causeway)와 거대한 명부 범선(레바논 백향목소재, 길이 43.5m) 저장실 등등의 정교함과 방대한 규모의 수준이 도무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에 우리의 진정한 경이감이 엄존하는 것이다. 아테네 파르테논과 같은 신전의 가능성이 이미 다 배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문명수준의 격차의 느낌이 역사발전의 방향화살표를 전도시키고 있다는 충격을 안겨준다. 파르테논 정면의 너비는 30.89m이다. 그러나 피라미드의 지상 한면의 길이는 230.35m이며 높이가 146.50m, 사각이 50° 50′ 35″이다. 내부의 현실(玄室)이 3개나 되며 평균 2.5톤이나 되는 돌이 230만개 정도 배열되어 있다. 나는 대피라미드 내부 중앙에 위치한 쿠푸왕 자신의 대석관이 놓여있는 현실(玄室)을 답사하면서 그 기하학적 구도의 정교함과 적석(積石)의 정밀함에 찬미의 탄성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태일생수(太一生水)
쿠푸왕은 제4왕조의 둘째왕이다. 그러나 피라미드는 제3왕조로부터 제18왕조 초에 이르기까지 100여 개 만들어졌다. 최근 호북성(湖北省) 형문(荊門) 곽점(郭店) 1호묘에서 발견된(1993년 10월) 죽간(竹簡) 중에 『태일생수(太一生水)』라고 하는 전국중기(戰國中期)의 우주론관계 문헌이 하나 있다. 그 문헌에 보면 ‘태일(太一, the Great One)이 물을 생(生)하고, 물이 거꾸로 태일을 도와 하늘을 이루고, 하늘이 거꾸로 태일을 도와 땅을 이루고,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도와, 신명(神明, 생명)을 이룬다[太一生水, 水反輔太一, 是以成天. 天反輔太一, 是以成地. 天地復相輔也, 是以成神明]’라는 말이 있다. 피라미드도 바로 이러한 태일생수적인 세계관을 반영하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피라미드는 대부분 나일강 범람의 한계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피라미드 자체가 천지창조의 시기에 물에서 솟아오르는 태초의 동산을 상징하며, 그 동산에서 신명(神明) 즉 생명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피라미드는 사후의 ‘다시 탄생’ 즉 부활을 상징한다. 그 영혼이 같이 묻어준 범선을 타고 밤하늘을 항해하여 영원불멸의 별이 된다고 하는 믿음을 구현한 것이다. 쿠푸왕의 현실에도, 왕비의 현실에도 밤하늘로 통하는 공기 통로가 남ㆍ북면으로 뚫려있다. 그 통로야말로 왕과 왕비의 영혼이 밤하늘로 올라가는 길일 것이라는데 사계의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그레코ㆍ로만의 신전들을 바라보면서 테베지역의 거대한 카르낙신전【전체면적이 347에이커에 이르는 인류사상 최대의 신전】이나 룩소르신전의 프로토타입을 연상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찬란한 문명의 업적을 바라보면서도 종교적 광신에 사로잡힌 포악한 파라오만을 연상하거나, 기껏해야 맑스의 역사발전단계도식에 의한 노예제사회의 참혹한 현실을 상상하면서, 관념적으로는 원시사회의 낙후성만을 개탄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과 현실의 갭을 메꾸기 위해 외계인이 비행접시를 타고 와서 지어놓고 갔다는 등, 황당무계한 낭설을 기발한 학설인냥 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문명의 성취에 대한 모독도 이러한 조잡한 모독이 있을 수 없다. 이집트 석조건축의 노우하우(knowhow)는 이미 사계의 학자들에 의하여 치열하게 연구되었다.
이러한 연구업적들을 외면하고 피상적인 인상만을 운운하는 것은 진실로 인간문명의 위대한 가능성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모독이다. ‘포악한 파라오(우리나라 구약성서의 발음은 바로)’의 이미지는 대부분 「출애굽기」라는 후대의 유대문학에서 온 것이다【문헌성립의 최후층대는 BC 4세기초에까지 내려온다】. 물론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위기의식을 대자적으로 설정하여 이스라엘의 정신적 단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포악하기로 말한다면 인류사에서 유대교-기독교로 이어지는 유일신 신앙처럼 포악한 종교형태는 없다. 파라오에게 그러한 포악한 이미지를 덮어씌우는 것처럼 포악한 폭력은 없다.
일례를 들면, 쿠푸왕의 피라미드나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의 네크로폴리스가 노예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것은 완벽한 낭설(浪說)이다. 칼 맑스의 역사 발전도식의 편견은 인류의 고대사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귀납적 연구에 의한 사실이 아니라 관념적 연역의 소산일 뿐이다. 한두 개의 사례로 인류사의 발전단계를 획일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만 해도 연 3만5천 명으로 추산되는 노동인력이 소요되었다. 과연 이러한 대규모인원의 잡졸 노예들이 채찍질의 위협 아래서 이토록 정교한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21세기 오늘날에도 영화촬영장에서 동원되는 엑스트라들을 다루는 일만 해도 보통 문제가 아닌데 하물며 하등의 의식없는 노예들의 강제노역만으로 왕들의 계곡의 정교한 벽화들이 조각되고 그려질 수 있겠는가?
▲ 룩소르 카르낙신전. 134개의 파피루스모양 기둥에 성각문자가 새겨져 있다.
나일강의 범람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홍수(Flood)가 아니다. 그것은 이넌데이션(Inundation)이라고 부르는 특수한 자연현상으로 찬란한 태양빛 아래 전개되는 나일강의 예측 가능한 수위의 변화일 뿐이다. 게다가 범람의 결과는 해마다 비옥한 뻘흙으로 경작지를 개토해주기 때문에 비료의 필요성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범람의 주기에 따라 나일강역은 아케트(akhet, 범람기), 페레트(peret, 경작기), 쉐무(shemu, 건조기)의 3절기로 나뉜다. 대체로 6월에서 10월에 이르는 아케트기(범람기)에는 전국민이 나일강의 수위의 변화만을 기다릴 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BC 5세기 중반에 이집트를 여행한(BC 449-430?) 희랍의 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 BC c.484~c.420)는 하늘을 쳐다보고 농사를 짓는다는 이야기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이집트인들의 표정을 묘사해놓고 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나일강에서 쏟아졌다. 매일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태양과 비옥한 경작지, 그리고 풍부한 수량이 확보된 천혜의 조건은 이 지구상에 나일강밖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블루나일(Blue Nile), 화이트나일(White Nile), 아트바라(Atbara) 세 강이 유입되어 6741km나 뻗쳐 흐르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긴 이 강의 경작조건은 BC 9000년부터 BC 5000년 사이에 오늘의 조건으로 정착된 것이다. 문명의 발상을 규정하는데 가장 핵심적 요인은 식량의 생산(food production)이다. 어떠한 문명도 풍성한 식량생산의 확고한 기반이 없이 발생할 수가 없는 것이다(No civilization has ever developed without the sure base of a prosperous food production. The Penguin Encyclopedia of Ancient Civilizations, 17)
그러니까 나일강을 빼놓고 이집트문명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리고 고왕조(Old Kingdom, BC 2687~2190)로부터 신왕조(New Kingdom, BC 1569~1076)에 이르는 찬란한 문명의 업적을 토인비의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이라는 각박한 도식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나일강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가장 밀도 높은 문명의 조건을 호모 사피엔스에게 제공했던 것이다. 그것을 도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풍요로운 도전이었다.
▲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 전경이다.
노예제의 허구, 발전사관의 허구
샹폴리옹(Jean-Fransçois Champollion, 1790~1832)이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을 해독한 1822년 이래 진행되어 온 집중적인 고고학적 연구성과는 고왕조의 피라미드나 신왕조의 왕들의 계곡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한 사람들이 노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증짓는다. 우선 이집트는 잉여가치가 풍요로운 사회였다. 그리고 민중과 통치자 사이에 비록 신화적 세계관이긴 해도 삶의 가치관에 관한 일체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년에 아케트 범람기 4.5개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이러한 휴식기는 나일강의 수위가 높아 석재를 배로 나르기에 편했고 건축지 가까운 곳에 접안이 용이했다. 따라서 아케트시기에는 자발적 인력동원이 수월했다. 이들의 상당수가 높은 수준의 보수를 지급 받는 전문 기술자들이었다. 거대 공사 주변에는 이들의 집단주거지가 있었으며 이들의 보수에 관한 명세자료도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대피라미드 주변에는 이들 공사기술자들의 무덤도 발견되었는데, 귀족이나 고관처럼 그들도 영생을 위한 자신들의 무덤까지 함께 건설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동등한 권리를 대접받는 존재였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노동(εργασία)이란 개념은 평범한 인간들뿐 아니라, 동물, 신, 왕이 같이 참여하는 개념이었다. 이집트사회에는 ‘노예’라는 유전적 신분개념이 명료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고등한 성직자들도 신의 노예였다. 그러니까 ‘노예(slave)’라는 개념보다는 ‘종(servant)’이라는 상식적 개념이 더 어울린다. 중요한 사실은 문헌상 전혀 ‘노예판매’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전쟁에서 얻은 외국의 포로들은 ‘왕의 노예(king's slave)’가 되었지만은 이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으며 응분의 보상을 받았다. 노예의 학대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멀리서 보면 정확한 정사각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6면체의 돌을 쌓아올린 것이기 때문에 들쑥날쑥한 계단처럼 모든 면이 되어있다. 그러나 피라미드가 완성되었을 당시에는 최외각에는 그 톱니같은 계단면을 아주 정교하게 돌로 끼어맞추어, 광택나는 매끄러운 평면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4개의 정삼각형이 만나는 꼭대기 일정부분은 금도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완성되었을 당시(BC 2580년경)에는 거대한 수정사각뿔처럼 찬란하게 빛났을 것이다. 금도금된 부분으로부터 찬란하게 비쳐내리는 모습은 태양이 만물을 비추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이다. 태양신에게 바치는 인류 최고(最高)의, 최상(最上)의 심볼리즘이었다.
인간은 흘러가는 시간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은 저기 저 우뚝 서 있는 피라미드를 두려워했다. 이러한 지교(至巧)한 정성이 과연 포악한 파라오의 채찍 아래서 신음하는 노예들의 작품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칼 맑스의 노예제사회를 연상할 수는 없다. 노예제사회를 찾으려 한다면 고대 이집트사회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의료혜택도 없이, 영주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맨하탄의 뒷골목에서 찾든가, 전 인류를 상대로 자신들도 먹기를 꺼려하는 식품을 타국민들에게 퍼멕임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유지하고자 하는, 도덕성을 상실한 병적인 미국의 일부 자본주의 행태에서 찾는 것이 훨씬 리얼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새카즘(Sarcasms, 비아냥)이 아니다. 인류의 고대문명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근원적으로 혁명하지 않는 한 『논어』와 같은 고전을 공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지고 만다. 맑스의 단계발전사관이 역사발전의 경제사적 시각을 제공하고, 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장치로서 기능했다는 맥락에서는 나름대로 의미를 지닐 수도 있겠지만, 인류사를 전관(全觀)하는 새로운 틀이 되기는 어렵다. 알고보면 그러한 발전사관의 다양한 형태들이 모두 기독교의 섭리사관(攝理史觀)의 세속적 표현일 뿐이다.
우리의 논지는 매우 명료하다. 인류고대문명의 4대 발상지가 모두 나일강역과 아시아대륙에 속하는 것이며, 서양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문명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미개지역이라는 것이다. 인류문명의 근원을 그레코ㆍ로만 중심으로 생각하는 모든 역사기술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편협한 편견의 소산일 뿐이다. 인류문명의 주축은 어디까지나 아시아대륙이다. 서양의 근대를 생각하고 그 이전의 중세를 생각하고 그 이전의 로마문명을 생각하고 그 이전의 희랍문명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만큼 세월의 문명축적의 총량이 그 이전에 이미 이집트ㆍ아시아대륙에 선재했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
수메르문명과 이집트문명
그러니까 소크라테스ㆍ플라톤ㆍ아리스토텔레스, 이런 이름들은 인류문명의 원류가 아니라 원류의 말류에 속하는 것이다. 희랍문명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희랍인들에게 알파벳 문자수단을 전달해준 레방트(Levant)의 페니키아문명(Phoenician civilization)을 이야기해야 하고, 페니키아문명을 이야기하자면 그 남쪽으로 성각문자(聖刻文字, hieroglyphs)를 만든 이집트문명과, 그 비옥한 초생달 동쪽 끝자락에서 이미 BC 3300년경부터 쐐기문자(楔形文字, cuneiform writing)로 쓴 문헌을 남기고 있는 수메르문명(Sumerian civilization)을 이야기해야 한다. 인류문명의 최고(最古)의 양대축이라 할 수 있는 이 두 문명은 매우 성격이 대조적이다. 수메르를 양(陽)이라 하면 이집트를 음(陰)이라 해야할까? 수메르의 조각들을 보면 성나있고 공격적이고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집트의 조각들은 정적이며 평화롭고 내성적이며 추상적이고 양식화되어 있다. 전쟁의 묘사는 있지만 이방인에 대해서도 대적적인 자세가 전면에 노출되지는 않는다. 외부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포용적이다. 벽면에 새겨진 부조들을 보아도 이집트의 부조는 대체적으로 평면에 새겨진 부조들이다. 벽면밖으로 돌출하지 않는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계열의 부조는 대부분 돌출되어 있다. 평화로운 이집트인과 공격적인 수메르인의 대비적 성격은 아마도 이집트 나일유역의 압도적 풍요로움과 고립적 안정성,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유역의 비교적인 각박함과 아시아대륙의 고지대로부터 항상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지정학적 특성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문명의 극적인 대비는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삶과 죽음이 연속되어 있다. 죽음은 삶의 연장이며, 이집트인들에게 부활이란 죽음의 세계로의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초기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을 정당화하기 위한 폭력이나 협박이 없다. 죽음이 오히려 삶의 모든 영화와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장엄하게 치장된다. 삶의 풍요로움이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해소시키고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전은 평화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메르인들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삶과 죽음은 철저히 단절적으로 이해되었다. 죽어야만 하는 인간존재의 숙명에 대한 비통이 문명의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인간은 지옥의 문앞에 발가벗은 채 홀로 서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수메르인의 세계관은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에 매우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어 있다.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이 인간인 우르크(Uruk)의 다섯 번째 왕, 길가메시가 인간이기 때문에 죽어야한다는 비극을 자각했을 때 그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기나긴 여로에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죽습니다. 내 가슴은 무겁습니다.
가장 큰 인간도 하늘에 닿을 수 없습니다.
가장 넓은 인간도 땅을 다 덮을 수 없습니다.
나 역시 무덤 속으로 가게 됩니까?
나도 그런 운명입니까?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인간에게는 죽음을 주었고
자신들은 생명을 가졌다.
BC 3000년경부터 이미 형상화되기 시작한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이미 우리는 향후 모든 문학의 아키타입을 발견한다.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이야기도, 뱀의 꼬임에 선악과를 따먹는 에덴의 이야기도, 일리아드ㆍ오딧세이의 여정도, 도사 서불(徐巿; 서복徐福)의 이야기를 듣고 낭야대로부터 동해로 수천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태운 배를 띄우는 진시황의 불로초 이야기도 그 조형적 가닥들이 씨줄 날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연약한 인간의 두려움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대비가 양대문명의 분묘형태에서 극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수메르계통의 문명에서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찬미가 없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는 그냥 지하일 뿐이다. 따라서 분묘는 그냥 지하에 정중하게, 소박하게 안치될 뿐이며 지상에 슈퍼스트럭쳐(super structure, 상부구조)를 만들지 않는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무덤이라는 것에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의 세계는 장엄한 화엄의 세계이며, 삶 속에, 태양의 빛 속에 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묘가 영원성을 상징하는 지상의 슈퍼스트럭쳐로서 웅장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고문명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수메르와 이집트의 디프 스트럭쳐(deep structure)로부터 시작하여, 아카드(Akkad), 엘라미트(Elamites), 히타이트(Hittite), 바빌로니아(Babylonia), 앗시리아(Assyria), 가나안(Canaanites), 페르시아(Persia), 페니키아(Phoenicia) 등등에 이르는 고대문명의 방대한 문헌과 유물의 수천년간의 축적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레코ㆍ로만을 이야기 하거나, 서구 문명의 시원을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으로 단순화시키는 발상은 ‘기독교 신학의 확대해석적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최근 이 고대문명지역을 몸소 세밀하게 답사하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나의 무지를 개탄했고, 인간존재의 가능성에 관한 새로운 비젼을 획득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언어에 관한 사피르(Edward Sapir, 1884~1932)의 통찰을 재확인 했다.
미대륙의 아메리칸 인디언을 깊게 연구하고 6개 주요 인디안 어군을 분류까지 제시한 민족언어학(ethnolinguistics)의 창시자이며, 언어학적 인류학(linguistic anthropology)의 풍요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미국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개척한 사피르는 1921년에 출판한 언어(Language)라는 저작 속에서 인간의 언어와 사유의 문제를 통하여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 통찰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피르가 말하는 언어
먼저 그는 언어습득의 과정을 걸음마(walking)와 비교한다. 갓난 아기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예를 들면 정글에서 홀로 크는 아이라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걷게 되어있다. 직립보행은 이미 인간의 DNA에 내장되어 있는 생리적 기능의 발현이다. 그러나 언어는 어떠한 경우에도 저절로, 즉 생리적 과정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습득되지 않는다. 언어습득은 완벽히 사회적 행위이며, 비본능적인 후천적 문화기능 (cultural function)이다.
그런데 인간에 있어서 언어발생을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이 인간의 언어가 감탄사에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감탄이라는 감정의 본능적 표현은 언어의 자격을 구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개의 감정상태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언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고도의 상징체계가 개입되는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수단이기에 앞서 이성적 관념의 소통인 것이다. 아무리 감탄사가 축적되어도 그러한 축적에서 언어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꼬끼오’ 같은 의성어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의성어유래설(the onomatopoetic theory of the origin of speech)도 마찬가지의 문제에 봉착한다. 인간의 언어는 비의도적 우발적 소통이 아닌, 의도된 상징체계를 수단으로 하여 욕망, 감정, 관념, 그 모든 것을 비본능적으로 소통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자연발생적 생리기능이 아니라는 것은 인간의 몸에 언어의 독립적 기관이 없다는 사실로써도 입증되는 것이다. 입은 일차적으로 먹기 위한 것이며, 혀는 맛보기 위한 것이며, 이빨은 씹기 위한 것이며, 코는 숨쉬기 위한 것이며, 폐는 가스를 교환하기 위한 것이다. 언어는 우발적으로 이러한 기관들을 부차적으로 빌려서 그 기능들을 조립한 산물일 뿐이다. 언어가 두뇌중추에 일정한 부위를 가지고 있다는 생리적 반응기전 때문에 언어 현상을 그러한 두뇌의 로칼리티에 한정시켜 생각하는 것도 넌센스에 속하는 일이다. 언어는 인간의 영혼, 그러니까 정신적 기능 전반에 걸친 유기적 장일 뿐이다. 그것은 심리-물리적 개념 속의 한 실체(an entity)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는 어떠한 특정한 사태를 즉물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즉물적 지사(指事)는 말의 요소가 될 수 없다. 말의 요소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것’ ‘저것’이라는 시공의 즉물적 사태로부터 추상되어 그 카테고리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태를 보편적으로 지시하는 개념(concept)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집’은 이미 이 집, 저 집의 특수 사태가 아닌 모든 집을 지칭하는 추상적 개념이다. 따라서 감탄사와 같은 본능적 발성과는 근원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개념은 심볼이며, 심볼은 ‘1:1’의 대응관계를 가지는 싸인이 아닌 ‘1: 무한’의 상징체계인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이 기적적으로, 고립적으로 하나 발생했다고 해서 언어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집’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 나무, 풀, 정원, 산, 안방, 아버지, 엄마 등등 하이데가(Martin Heidegger: 1889~1976)가 말하는 바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의 도구연관구조 그 전체가 동시에 성립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부분이 아닌 전체이다. 점진이 아닌 도약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언어가 없이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매우 쉽게 언어가 없이도 나는 사고할 수 있으며 언어는 나의 사고의 의복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언어에 대한 사고의 선재(先在)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궁극적으로 언어를 따라서, 언어를 매개로 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언어는 사유에 선행한다. 사유(thought)는 이미지 연상(imagery)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일차적으로 상징의 청각체계(an auditory system of symbols)이다. 언어의 순환계는 소리에서 시작하여 소리에서 끝난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선사(先史)와 역사(歷史)의 구분을 문자의 유무로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암암리 인간의 문명을 생각할 때 문자의 중요성을 극대화시킨다. 그러나 문자의 성립과 인간의 언어의 성립이 동시적이라는 터무니 없는 착각을 해서는 아니 된다. 문자라는 시각체계의 도입은 언어라는 청각체계에서 매우 부차적인 것이다. 일례를 들면, 요즈음 농아에게 언어를 습득시키는 방법으로 입술의 모양만을 보고 말의 의미를 터득케 하는 훈련이 있는데, 이때 입술의 모양은 문자와 완벽히 동일한 것이다. 그러니까 갑골문의 성립과 동시에 중국말이 시작했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된다. 갑골문성립 훨씬 이전의 태고적으로부터 황하문명지역의 사람들은 완벽하게 청각체계의 언어를 보지(保持)하고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정확히 인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않으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말하고 있는 육서(六書)라는 것도 이해될 길이 없다. 다시 말해서 육서는 언어의 생성방법이 아닌 것이다. 이미 완벽하게 존재하고 있는 소리체계의 언어를 어떻게 시각화하느냐에 관한 6가지 방법일 뿐이다. 우리가 고문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거대한 편견은 문자의 수준의 정도에 따라 문명수준의 고하를 운운하는데, 실상 그것은 부차적인 방법상의 문제일 뿐이다. 그 문명의 인식체계의 핵심적 정황을 그것으로 다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문자의 부재로 인하여, 실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고 하여 그들을 미개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문명과 언어와 사유에 관한 우리의 상식적 편견을 타파해야할 너무도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언어의 생성과정을 정확히 기술할 길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언어의 도약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어느 인종집단에게 있어서 이미 습득되어지고 소통되어지는 체계로서 인간의 출생의 순간부터 그에게 던져지고 있는 청각체계의 언어가 엄존한다는 사실은 그 언어자체가 이미 보편적인 인간의 언어의 모든 자격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으며, 그 이전에 이미 기나긴 진화의 과정을 거친 고도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이미 그들이 살고 있는 우주를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사유의 개념적 지도를 완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관한 사피르의 기술은 참으로 우리에게 대오(大悟)의 체험을 안겨준다.
인간의 언어에 관한 일반적 사실의 최종적 사태는 모든 언어의 보편성이다. 학자들은 어떤 특정한 부족의 형태가 종교나 예술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어떤 수준을 과시하고 있는지에 관해 논란을 벌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의 언어에 관한 한 그러한 논란은 무의미하다. 완벽하게 진화되지 않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종족은 이 지구상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저등하다고 생각되는 남아프리카의 부쉬맨도 아주 풍요로운 상징체계의 모든 양식을 동원하여 언어를 구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주 교양있는 불란서 사람의 언어와 그 본질에 있어서 완벽하게 대등한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반문할 것이다. 고도의 추상적인 개념들이 야만인의 언어에 있어서는 그렇게 풍요롭게는 표상되지 않고 있으며, 또 고등한 문화수준을 반영하는 어휘의 풍성함과 미묘한 뉴앙스의 섬세한 규정들이 저등한 부족들의 언어에는 결여되어있지 않은가 하고, 그러나 문명의 역사적 성장과 병행하는 이런 종류의 언어학적 발전이나 우리가 문학이라고 규정하는 후대의 성취와 관련된 그러한 발전은 언어학적으로 볼 때는 매우 피상적인 것이다. 언어를 성립시키는 아주 근원적인 토대, 명료한 음성학적 체계의 발전, 발성의 요소와 정신적 개념을 일치시키는 연상체계, 그리고 요소들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방법의 형식적 표현에 관한 섬세한 규정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언어에 공통된 엄격하게 완성되고 체계화된 수준에 완벽하게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는 많은 원시언어들이 형식적ㆍ양식적 풍요로움과 잠재하는 표현력의 화려한 광택에 있어서 근대문명의 언어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어떤 것보다도 더 뛰어날 때가 많다. 단순한 어휘목록의 수준에 있어서조차도 상식인들은 경탄의 충격을 받을 각오를 해야한다. 원시언어들(primitive languages)은 필연적으로 표현력에 있어서 심히 빈곤하다고 하는 검토되지 않은 대중적 이론은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Language, 14~15).
언어와 문명
나는 우가리트(Ugarit, Ras Shamra)의 고도시와 그 아크로폴리스에 자리잡고 있는 바알ㆍ다곤 신전을 바라보면서, 레바논산맥과 안티레바논산맥 사이의 거대한 분지 베카밸리에 우뚝 솟은 바알베크(Baalbek)의 압도적으로 웅장한 석조건축물을 쳐다보면서, 영험스러운 카디샤계곡(Qadisha Valley)의 신비로운 백향목 숲, 그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면서, 작열하는 시리아사막 한 가운데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캐러반의 오아시스 대도시 팔미라(Palmyra, Tadmur)의 화려한 테트라 필론과 육중한 바알신전의 위용에 압도되면서, 그리고 우르파ㆍ하란평야에 아직도 카스타 디바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듯 아련한 애수를 전하는 달의 신전(Temple of Sin)의 정적 아름다움을 흠상하면서 나는 사피르의 명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어찌 바알은 나쁜 하나님이고, 야훼는 좋은 하나님이라는 규정성의 폭력이 가능한가? 무력적으로 나약하고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이스라엘민족이 생존의 안간힘으로 그러한 신화와 문학을 지어내는 것은 동정할 수 있으나 어찌 그러한 황당한 환상의 폭력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이 될 수 있는가? 더더욱 황당한 것은 그러한 종교적 폭력을 부지불식간에 인간의 언어에까지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언어에 대한 폭력적 규정은 인간의 사유에 대한 폭력적 규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피르가 말하는 원시언어(primitive languages)는 공간적인 사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시간적인 사태이기도 한 것이다. 마치 동시점 한공간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들이 다른 태고의 시간들을 전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그리고 있는 사람이나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를 그리고 있는 사람의 언어가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철학강의를 하고 있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언어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보편언어라는 사실에 눈을 떠야한다. 이것은 결코 과언(誇言)이 아니다. 칸트의 구성설적 세계관의 핵심은 물론 시대정신이 다르다 할지라도 반구대의 예술가들에게도 궁극적으로 전달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제아무리 『존재와 시간(Sein and Zeit)』의 독일어 어휘의 조어방식이 현란하다 할지라도 하이데가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실존의 본래적 자아의 회복의 테제는 아프리카의 부쉬맨들에게도 전달가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보편철학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동ㆍ서ㆍ고ㆍ금의 모든 문명의 편견으로부터, 그 가치의 폭력으로부터 해탈되지 않으면 편애(偏偏)한 인간존재 이해의 미로를 헤맬 뿐이다. 도무지 고전을 공부할 소이(所以)가 없어지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고도. 하란평원의 달의 신전.
희랍문명의 강점
대체적으로 고문명세계(Old World)에 관하여 우리의 인식의 창구가 차단되어 있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고문명세계의 근원적 축을 이루는 지역들이 모두 공교롭게도 이슬람문명권이라는 표피로 덮여 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세계나 서방세계와 근린정책을 펴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아랍국가라 하면 악의 축으로 인식하거나 우호적이기 어려운 그 무엇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암암리 저변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묘한 국제관계 역학의 산물인 이스라엘국가의 탄생으로 악화되었고, 십자군시대의 오류가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이 고문명세계는 그 본질상 이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문명세계와 이슬람종교의 결합은 AD 7세기 이후의 사태일 뿐이며 이슬람이라는 것도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와 적서의 우열을 다투는 후대의 종교현상이므로, 크게 보면 모두 인류역사의 말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실은 이슬람의 유포가 『꾸란(the Qurʼān)』이라는 경전을 강요하고, 그 아이코노크라스틱(iconoclastic, 우상파괴의)한 절대성ㆍ비형상성ㆍ추상성으로 인하여 『꾸란』의 언어인 아랍어(Arabic)가 모든 무슬림의 삶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버림으로써, 인류 고문명들의 독자적인 아이덴티티가 상실되고, 고문명의 모든 가치를 담지하는 소중한 언어들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집트인들도 프톨레미왕조의 성립과 함께 디모틱 문자(Demotic script, 민용문자)를 만들었고, 로마시대로 들어서면서 희랍어 자모를 이두문자로서 차용한 콥트어(Coptic)를 만들었지만 콥트어까지만 해도 성각문자와 연속성을 이루는 이집트인 자신들의 말이었다. 샹폴리옹도 콥트어의 지식 때문에 로제타 스톤의 성각문자를 해독하는 쾌거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콥트어는 아랍의 침공으로 사어가 되고만 것이다. 예수가 쓴 아람어도 시리아땅에 남아있던 것이나 사어가 되고 말았고, 바빌론의 언어도 사라졌다. 다행히 페르시아어, 터키어, 아르메니아어 등등이 겨우 살아 남았지만, 여하튼 그나마 히브리말이라도 살아 남은 것이 천행이라 할 것이다.
아시아대륙의 고문명세계의 눈부신 성취가 이와 같이 우리의식의 저켠으로 아련히 사라져 버리고, 서구문명을 인류문명의 정본으로 생각하며, 그 원류를 아시아 고문명의 말류인 그레코ㆍ로만문명으로 착각하는 19ㆍ20세기의 사관은, 평심(平心)하게 형량하자면 그 나름대로의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아무리 아시아 대륙과 나일강역의 고문명이 찬란한 문명의 축적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 축적을 토양으로하여 새롭게 개화한 희랍고전문명이 인류문명사에 보다 획기적인 새 국면을 도입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페니키아 알파벳으로부터 진화한, 편리한 표음문자인 희랍어를 매개로 하여 인간에게 연역적 사유의 명증성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연역적 사유는 이성의 초월성과 관념의 실재성을 존재론적 기반으로 하여 물리적 현상을 공제(控制)하는 막강한 힘을 과시한다. 물론 이 연역적 사유의 핵심에는 기하학(geometry)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기하학의 발생연원을 소급한다면 그것은 모두 이집트문명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희랍인들은 기하학의 원리를 측량이나 축조기술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원리를 인간의 사유의 원리로 심화시켜 우주를 관통하는 신적인 제일원리로 확대시켰다.
이 세계의 진보를 위한 희랍인들의 진정한 중요성은, 그들이 바로 인간의 사변이성도 어떤 질서정연한 방법에 귀속된다고 하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엄청난 비밀을 발견했다고 하는 데 있다. 희랍인들은 이성으로부터, 정해진 한계를 초월하는 기능을 손상함이 없이, 이성이 가지고 있던 혼돈스럽고 신비로운 성격을 박탈해버렸다. 이 때문에 바로 우리가 영감(Inspiration) 대신에 사변이성(the speculative Reason)을 지금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변이성이라는 말에서, ‘이성’은 합리적인 것의 질서정연함에 호소한다. 그러나 ‘사변’은 어떤 특정한 방법을 끊임없이 초월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인 것이다. 희랍인의 비밀(the Greek secret)이란, 바로 이러한 초월에 있어서조차도 방법의 구속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희랍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 위대한 발견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것이 2천년 동안 작동해온 기나긴 역사를 목격할 수 있는 행복한 입장에 있다. … 희랍인들은 논리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넓은 함의에 있어서 논리를 발명했다. 그들의 논리는 바로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discovery)였다.
-화이트헤드 지음, 도올 역안, 『이성의 기능』, 263~7.
인간의 논리에 있어서 귀납과 연역의 두 축을 논의한다면, 경험적 사실과 일치하는 명제의 발견이라고 하는 귀납적 측면에 있어서는 어떠한 고문명도 희랍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그러나 희랍인들이 절대적인 우위를 갖는 것은 바로 연역적 사유였다. 연역의 대전제가 근원적으로 부당할 경우, 그것은 귀납적 연구에 의하여 시정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귀납에 근대과학은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서구과학의 주된 장점은 아직까지도 경험과학이 아니라 연역적 사유의 고도성과 정밀성에 있는 것이다.
조금 쉽게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그동안 인류문명의 원류가 희랍문명인 양 착각해왔던 모든 관념의 저변에는 인류의 근세문명을 보편적으로 지배한 과학문명과 민주제도의 원류가 희랍의 고전시대에 있다고 하는 통념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 통념을 크게 반박할 생각은 없다. 오늘날의 근세 의회민주주의가 방대한 노예계층을 전제로 한 희랍의 민주주의와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근대 과학의 눈부신 발전이 희랍인의 과학적 사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BC c.460~370)의 원자와 달톤(John Dalton, 1766~1844)의 원자는 그 존재론적 기반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과학정신이 싹튼 배면에는 사라센문명이 유럽인들에게 다시 각인시켜준 희랍고전의 사유가 르네상스정신을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고, 민주주의만 해도 플라톤의 저작 속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이지만, 데모(démo, 다중)에 의한 크라티아(kratia, 지배)가 시도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후대에 어떤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 영감)을 전달한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약점을 은폐하거나 강변해서는 아니된다. 굳이 그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약한 것은 남의 강한 것을 배워 보충하면 되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동아시아의 문명이 서양문명을 접하는 과정에서 열세를 느꼈던 제1의 요인은 무력(military might)이었다. 그러나 그 무력의 강세의 배경에 있는 것으로서 열등감을 강하게 느꼈던 것은 다음의 3가지 요인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1) 자연과학(natural science)
2) 민주주의(democracy)
3) 자본주의(capitalism)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이 3가지 중에서 가장 쉽게 습득되는 것은 자본주의일 것이다. 인간의 욕망의 확대를 위한 자본의 확대재생산이라고 하는 것은 체제만 잘 갖추어지면 인간세는 그러한 체제에 거의 본능적으로 적응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의 폭력에 관하여 이미 서구사상 자체 내에 균열이 생기면서 그 정당성에 관한 끊임없는 회의가 발생하였고, 그것이 지고의 선이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동방문명도 그것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자본주의라는 것의 규정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무엇이 과연 좋은 자본주의인가에 관하여서는 인류가 아직도 모색 중에 있다.
그 다음으로 민주주의라는 것은 정치제도로서 동방인들에게 충격과 매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이 여태까지 운영해왔던 어떠한 사회 제도보다도 더 바람직한 것이라는 생각에 가치관의 일치가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러니까 동방에서의 근대화라는 작업은 그들이 대안없이 유지해왔던 군주제를 민주제로 바꾸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그 에너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도 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가치평가 자체가 애매한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가치평가는 확실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달성하기가 어려웠다. 제도는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들의 사유나 삶의 방식, 일상적 가치관이나 행태가 그 제도와 일치되지 않으면 제도 자체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동방세계에 있어서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가능한 최선의 형태를 구현하는 데 성공한 사례로서 두 나라를 꼽다면 대한민국과 대만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나라가 모두 객관적인 선거제도에 의하여 정권의 교체를 달성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평가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겠지만, 이 두 나라가 도달한 의회민주주의의 수준은 최소한 일본인들의 정치의식을 능가하는 다이내믹한 것이다. 두 나라가 다 국공내전, 남북내전이라고 하는, 20세기 냉전체제를 결정한 세계사적 축의 변화 속에서 일어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감내해야만 했고 그 뒤로 치열한 반독재투쟁을 벌이면서 민주가 무엇인지를 민중 스스로 자각해간 정치과정을 체험했다. 20세기 전반의 세계 제국주의의 한 주역이었고, 패전 국가로서 제국주의의 죄악을 민중 스스로 청산할 기회가 없이 의타적으로 미군정의 치세에 의존하여 사회적 안정과 부를 획득한 일본의 정치과정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아직도 제국주의적 환상에 함몰되어 그 보편적 가치의 모범을 인류사에 제공하고 있질 못한 것이다.
가치평가가 유동적일 수 있는 상황에 대하여 결정적인 판단은 유보해야 마땅하지만, 지금 우리가 지적해야 할 명백한 사실은 의회민주주의의 바람직한 형태가 서구문화권을 벗어나서도 이미 충분히 실현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이미 몇몇 국가들이 실험적으로 예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관하여서는 서구문명이 프라이오리티(priority, 상위)를 지니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이미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인류사의 가치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끝으로 동방의 문명이 가장 콤플렉스를 느꼈고, 느끼고 있는 주제는 ‘자연과학’일 것이다. 그리고 자연과학이야말로 가치관의 우열에 있어서 그 보편주의적ㆍ합리주의적 성격 때문에 서구문명이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한 주제였다. 따라서 서구문명에 대한 동방인들의 열등의식의 근저에는 모두 자연과학의 후진성이 자리잡고 있다.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의 시대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동방인들은 서구로부터 과학을 배워야 한다는 신념의 일관성에는 크게 변화가 없다. 아직도 과학문명이라는 측면에서는 서양문명이 대체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자연과학이라는 우상과 허상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을 분리해서 논한다면,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당(唐)제국이 도달한 수준은 서양의 여하한 문명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기술수준은 다방면에서 서양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를 과학의 진보라 말할 수 없다. ‘애니콜’을 잘 만들고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기술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과학문명의 수준을 반영하는 사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은 삶의 방편으로서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사변이성이 가설과 입증의 과정을 통하여 자연의 모든 개별적 사실들을 어떤 일반적 원리를 예시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탐구해 들어가는 독자적인 관성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과학의 발전이 기술의 진보를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기술의 증진이 과학적 가설과 입증에 새로운 계기들을 도입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사에 있어서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는 최근 한 200년간의 현상이며, 이러한 상호연관성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기술은 여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로 남는다. 동방인들이 아직도 한참 투쟁해야 할 과제는 과학적 사유의 빈곤이다.
그러나 5ㆍ4운동(五四運動, May Fourth Movement) 직후에 중국의 활발한 근대 여명을 목격했던 럿셀경(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중국의 문제(The Problem of China)』에서 지적했듯이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양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전이 쉬우며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순수한 열정만 있으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질적인 예술이나 종교나 삶의 방식이나 감각같은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럿셀은 아시아인들의 과학적 성취에 관하여 매우 낙관적 예언을 하고 있다. 그가 뉴욕의 시티 칼리지(City College in New York)에서 학생들에게 성적 자유(‘sexual immorality’라는 악랄한 표현으로 그를 매도)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나서 곤요로운 가운데 집필한 세기의 명저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이 대작을 집필한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유럽문명의 우월성은 한편으로는 과학과 과학적 기술에 기인하고 또 한편으로는 중세기를 통하여 서서히 구축해온 정치적 제도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우월성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아무 곳에도 없다. 요번의 세계대전에서도 러시아, 중국, 일본은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이 국가들은 서양의 기술문명을 비잔틴 문명, 유교, 신도와 같은 동방의 이데올로기와 결합시켰다. 인도도 이제 해방되면 세계문명에 또 하나의 동방적 요소를 첨가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다가오는 몇세기 동안에는, 인간의 문명이, 살아남기만 한다면, 르네상스 이후에 보여왔던 문명의 형태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형태를 과시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문화적 제국주의가 무력적 제국주의보다 훨씬 더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서방제국(the Western Empire)이 멸망하고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도, 실로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그 시점까지만해도 모든 유럽의 문화는 로마제국주의의 색채를 짙게 깔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문화야말로 서유럽의 제국주의적 색채에 깊게 물들어 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제2차 세계대전)후에 세계에 평화가 되찾아오고, 그 세계에서 우리가 편하게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유체계에 있어서 아시아를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동등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과연 무엇을 초래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매우 심원할 것이며 매우 엄중한 의미를 갖는 것일 꺼라고(399~400).
럿셀의 예언은 매우 적확한 것이고 우리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혜언(慧言)이지만, 우리는 결코 이러한 혜언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서구인이 아시아 사람들에게 모든 가치관에 있어서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 요원하다. 럿셀은 중국에서 강의하면서 중국인이 서유럽사람들을 30년이면 따라잡을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아직도 1세기의 세월은 족히 남아있다. 이것은 세월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지금 여기서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 자신을 혁명하여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데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에 그 성패가 달린 문제일 뿐이다.
현재 ‘과학입국(科學立國)’이라는 테제는 아시아 민족들의 지상의 과제이며 반드시 성취해야할 지고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기실 과학이라는 인간의 사변 이성의 산물이 동방에 넘어오면서 그것이 소기하고자 하는 인간세의 선(善)을 전혀 달성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성 또한 심화되지 않으면 아니 될 문제상황인 것이다. 과학이 우리에게 절박한 과제로서 느끼게 되는 우리의 콤플렉스의 이면에는 과학이야말로 매우 안전한 진리의 기준이라는 검토되지 않은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과학도 본시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자연과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연이지만, 자연은 본시 자연(自然)일 뿐이다. 즉 노자(老子)의 말대로, 자연은 스스로(自) 그러할(然) 뿐이며 일체의 언어적 규정을 거부하는 것이다[自然者, 無稱之言, 窮極之辭也. 제25장 王弼注].
이신론과 무신론
다시 말해서 자연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Truth)라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인식체계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술어이다. 트루쓰(Truth)라는 것은 트루(true)라는 형용사의 명사형이다. ‘트루’라는 형용사는 ‘틀리다, 거짓이다’를 의미하는 ‘폴스(false)’라는 형용사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맞다. 진짜다’를 의미한다. 진리는 ‘맞음, 진짜임’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타난 현상(appearance)과 실재(reality)의 일치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타난 것과 실재로 있는 것, 그 양변이 모두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에 진리관계라는 것도 유동적일 수 밖에 없다. 현상과 실재의 일치관계라는 것은 우리의 사변이성이 양변에서 추상된 요소들을 일치된 것으로 규정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진리라는 것도 때로는 매우 임의적일 수도 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진부한 것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 이 세계를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과학적 정보의 정밀성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는 생각도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때로는 계측기계들의 정밀성이 과학의 진보를 방해할 수도 있다. 어쩌면 과학적 진리라는 것이 예술가가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처럼, 과학자가 자연에 그려가는 그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림 그 자체의 진리성은 영원히 확보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학을 가장 신빙할 만한 진리체계로서 수용하는 이유는 과학을 하는 인간의 이성이 인류사에 있어서 어떠한 인간의 정신활동보다도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이고도 보편적인 지식체계를 제시해왔기 때문이다. 여기 객관이니, 합리이니, 보편이니 하는 말들은 구체적으로 기독교나 기타 주술적ㆍ신화적ㆍ초월적 종교 혹은 지식체계가 인간세에 저질러온 죄악에 대비하여 일컫는 말이다. 객관은 주관의 임의성을 체크하며, 합리는 비합리의 광신성을 경계하며, 보편은 국부성과 상대성의 독선을 무력화시킨다. 이러한 과학적 진리가 서양역사에서, 아니 인류사에서 우리에게 신빙할 만한 것으로 인지된 것은, 과학적 진리 그 자체의 합리적 정합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면서 국부의 원천이 되고 제국주의의 무기가 되는 실용성을 충분히 과시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과학을 하면 할수록 인간세가 더 못 살게 되고 인간의 삶이 더 초라하게 오그라 붙는다고 한다면, 인류가 서로 다투어 과학을 회피할려고 노력할 것이다.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실용주의)의 진리관은 과학적 진리를 테스트하는 궁극적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세기의 반동으로서 르네상스 시기로부터 발현되었다. 물론 중세기를 통하여 과학의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학은 신의 은총이나 계시를 거부하는 인간의 이성에 오로지 의지하기 때문에, 과학과 교권(敎權)과의 마찰은 서구역사에 있어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과학은 신의 법칙을 신에 의지하지 않고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독자적인 로고스에 의지하여 알아낼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로고스기독론적인 로고스의 이해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신과 신의 아들인 로고스의 관계는 철저히 단절되었다. 신의 법칙을 신이 부여할 필요가 없어졌다. 신의 법칙 그 자체를 인간이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우주의 입법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수학적 계산을 할 줄 아는 평범한 인간의 이성(Reason)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이성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게 되면 인간의 이성 그 자체가 신이 되어 버린다.
한마디로 우주의 법칙은 신의 법칙이 아니라 이성의 법칙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주의 법칙을 존재론적으로 신적인 것이라고 규정할지라도, 최초에 신이 설계한 것이라 말할지라도, 그것을 알아내고 작동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됨으로 더 이상 신에게 신세질 이유가 없어진다. 우주의 알파와 오메가를 인간의 이성에 귀속시키는 모든 법칙적 이해를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구원을 신의 계시에서 찾지 않고 오직 인간의 이성에서만 구하는 것이다. 모든 계시종교는 픽션적 구성일 뿐이며, 그것은 인간의 무지와 정치적 독재와 성직차의 횡포를 조장한다. 모든 과학자는 본질적으로 이신론자가 되어야 하며, 이신론자는 레토릭의 껍데기만 벗겨지면 실제로는 무신론자이다. 무신론이야말로 근대정신의 출발인 것이다.
과학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매우 구차스러운 일이지만, 서양 역사에서 항상 과학이 이런 식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과학이 기독교라는 종교와의 텐션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유교전통을 지닌 동양인들이 과학이라는 것에 관하여 한 번도 그러한 텐션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조적인 현상이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초월성을 과학이성이 대치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초월성과 미신성은 여전히 현세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텐션 속에서 이신론이니 무신론이니 하는 말들이 부정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 이성의 역사성의 정당한 측면들이 과학과 더불어 같이 유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소기하는 진정한 가치관이나 합리적 질서는 유실되고 오직 생존수단이나 국부(國富)의 수단으로서만 이해되고, 과학자가 가장 미신적인 인간이 되고마는 유례는 너무도 많다. 주중에 이신론적 법칙에 의하여 실험을 하고 있는 과학도가 주말에 교회에 나가서 초월신의 은총을 갈구하는 것은 정신박약자이거나, 과학의 신념이 전혀 그에게 가치로서 정착되는 인식의 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과 권력, 과학의 초극
과학의 객관성이 과학의 진리성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원자의 법칙을 이해하여 원자폭탄을 만들었고 그 폭탄이 객관적으로 항상스러운 위력을 과시한다고 해서 그 폭탄을 인간의 대규모 살상무기로 쓴다면 과연 과학의 진리는 무엇으로 확보할 것인가? 너무 적나라한 특수사례인 것처럼 나의 이러한 지적을 비꼬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모든 분야에 있어서 과학의 발전이 과연 인간세의 모습을 어떻게 끌고나갈 것인가에 관한 질문은 항상 유효하다. 현재, 명료한 결론은 과학이 부국강병의 가장 효율적 방편이라는 사실밖에는 없다. 동양인들은 서양인들의 제국주의적 무력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고, 꿇은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과학이 필요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세는 한없이 무력다툼의 굴레로 휘말려 갈 뿐이다.
최종적으로 우리의 결론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자! 동방의 사람들이 20세기를 통하여 서방의 사람들에게서 배워야한다고 생각한 것을 요약하면, 자본주의, 민주주의, 자연과학이라는 세 가지 테마로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우리는 소략하나마 이 세 가지 테마를 다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결론은 이러한 서구문명(+미국)의 위대한 성취를 우리가 따라잡는다해도 결코 인류사회가 더 바람직한 모습으로 발전한다든가, 우리의 삶이 보다 개선된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확실한 보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최종적 진리라고 생각했던 과학이라는 것조차도 우리가 ‘과학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어떤 새로운 진리관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상기의 세 가지 테마가 결국 서구문명의 총결이라고 한다면 그 결론은 매우 편협한 그레코ㆍ로만문명의 흐름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고, 그것은 모두 기독교문명의 횡포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희랍인의 수학, 유대인의 종교적 광신, 그리고 갈릴레오 이래의 자연과학이 모두, 기독교라는 미신과의 텐션 속에서 오늘날의 모든 제국주의적 문명의 형태에 기여한 것이다.
이 제국주의가 인류의 20세기를 장악하였고 민족국가(nation states)시대를 개시하였고 오늘의 국제역학과 환경오염의 재앙을 연출한 것이다. 사실 20세기는 인류사가 진보(Progress)라는 이름 아래 매우 낙관적인 개명(開明)을 구가한 듯이 보였지만 총체적으로 분석해보면 지구문명사의 편협한 일곡(一曲)에 획일적으로 매달려온, 정신사적으로 빈곤한 세기였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은 서양 나름대로 그러한 편견을 탈피해볼려는 정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동양은 동양 나름대로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는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진정한 인류사의 교섭의 장이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나일강으로부터 아시아대륙으로 펼쳐지는 인류문명의 발상지들을 한번 일별하여 보자! 재미있는 사실은 동으로 갈수록 문명의 시원이 늦어진다는 것이다. 나일강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인더스 갠지스로, 황하유역으로! 사실 나일강에서 비옥한 초생달지역으로 뻗쳐 있는 고문명지대의 일찍 개화한 모습을 생각한다면 황하유역의 중국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고문명이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후대의 신생문명에 속한다. 상(商)왕조의 청동기는 매우 정교한 문명의 수준을 나타내고 있지만 당시의 궁궐의 모습을 보면 요즈음의 허름한 맛배지붕 목조창고의 수준을 넘어가지 않는다. 갑골문이래야 이집트 신왕조(New Kingdom)의 후기에 속하는 것이므로 크로놀로지(chronology, 연대기) 상에서는 가히 같은 차원에서 비교하기 어렵다.
사실 우리가 중국문명을 고문명인 것처럼 생각하는 상식적 인상의 이면에는 일차적으로 한반도 출토의 유물에 비해 보다 오래된 찬란한 것들이 중국땅에서 많이 나오기 때문이요, 세계사에서도 중국문명은 곧 잘 희랍ㆍ로마문명과 나란히 대비되어 논의되기 때문일 것이다. 진시황을 알렉산더 느낌으로, 한무제를 줄리어스 시저 느낌으로 대비한다면 분위기는 대강 맞아 떨어지겠지만, 여하튼 이들 모두가 고문명세계에서 본다면 최근세문명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이란 반드시 오래되었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과연 그 문명이 인간세에 어떠한 가치와 어떠한 삶의 방식을 전했느냐 하는 것을 포괄적인 시각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알파벳 단원설
나는 본시 문명의 전파설(diffusionist theory)을 신봉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류학이나 역사학에서의 실체적 사고의 한 측면이다. 즉 한 군데서 발생한 문명이 여러 곳으로 전파된다는 생각은, 문명을 실체화하여 그 실체화된 문명이 떠돌아다닌다는 생각인데, 이것은 근원적으로 제국주의 학문의 말엽적 발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보편인간(Universal Man)의 보편적 가능성을 밀폐시키는 것이다. 물론 페니키아 알파벳으로부터 현재 전세계에서 사용하는 알파벳이 유래했다는 알파벳 단원설(單源說, the monogenesis of the alphabet)과 같은 특수한 주제에 관한 것은 설득력이 있을 수 있는 상황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언어라는 것은 음성체계로 시작하여 음성체계로 종료되는 현상이다. 그것을 시각체계로 바꾸는 노력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각화의 최초의 시도는 대체적으로 상형(象形)으로부터 시작될 것이지만, 상형이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한계는 너무도 빤한 것이다. 뫼 산(山)자가 산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어떻게 ‘사랑’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가 한자 전체를 상형문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한자는 결코 상형문자도 아니고 순결한 표의문자도 아니다. 한자도 90%이상이 형성자(形聲字)인데, 이때의 성부(聲符)는 표음의 알파벳과도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성각문자도 표음(表音, phonogram)과 표어(表語, logogram)가 혼합된 방식이고, 수메르의 쐐기문자도 표음과 표어가 섞여있다. 한자와 같이 1자1어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매우 복잡한 형태이다.
그러나 소리의 체계인 인간의 언어를 시각화하는데 가장 효율성이 높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순수 표음(表音)의 알파벳문자방식이다. 인류의 모든 언어발달이 표어적 성격에서 표음적 성격으로 진화해간 것이다. 그런데 시리아 라스 샴라(Ras Shamra)에서 발견되는 우가리트문자만 해도 외형은 쐐기문자이지만 이미 1자1음의 원칙을 고수하는 모음을 포함하는 30개 심볼의 완벽한 알파벳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자형이 의미와는 무관하게 음만을 표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발성체계를 모음과 자음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각기 한 자형의 단위로 변별력있게 표기하고, 그 표기의 조합에 의하여 모든 발성을 나타낼 수 있다는 발상은 참으로 놀라운 창안인 것이다. 이 알파벳에는 일본어와 같은 음절문자, 한글이나 영어와 같이 음소를 단위로 하는 단음문자, 두 종류가 있다.
그런데 알파벳단원설은 이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알파벳이 이집트 성각문자계(聖刻文字係)와 수메르 설형문자계(楔形文字係)로부터 진화한 셈족언어의 알파벳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라는 설인데 꽤 설득력이 있다. 페니키아의 알파벳이 희랍어 자모로 발전하였고 희랍어 자모에서 로마자 표기를 통하여 현재 서양의 모든 알파벳이 유래했다는 것은 쉽게 설명가능하다. 그렇다면 한글이라는 알파벳 문자체계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그것도 설명이 용이하다. 페니키아문자와 같은 계통의 셈족 알파벳 아람어문자로부터 다양한 문자가 생겨나는데 그 일파가 인도로 들어가 산스크리트 데바나가리가 되고 그것이 티베트로 들어갔고, 그 티베트의 라마승이 몽고의 파스파문자(ḥPhags-pa)를 만들었고 파스파문자에서 한글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한글의 자형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고, 중국음운학의 성모와 운모의 음운체계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음가를 변별해내었지만, 그 알파벳의 발상은 파스파에서 왔다는 사실에 관하여서는 국내외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특수한 사례에 관한 전파설의 논의도 가능하고 또 문명은 본시 주변문명과 끊임없이 교섭하고 교류하기 마련이지만, 문명의 발생을 전파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인종이 지구상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이상,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그 유기적 요소의 결합으로 독자적 문명이 발생하는 것이다. 춈스키의 말대로 인간의 언어는 근원적으로 아프라이오리(A posteriori)한 어떤 내재적 보편구조에서 발생할 것이지만, 그토록 다양한 음성체계를 임의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문명은 독자적으로 다양하게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문명은 그 문명을 만들어간 인간공동체의 로칼한 정체성(identity)의 존재여건을 심층적으로, 전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크레티즘(syncretism)
이집트의 문명에서는 신들의 결합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들의 태양숭배는 어떤 생명의 근원자에 대한 숭배이며 그 숭배의 본질은 무수한 로칼(local)한 신들의 형상으로 현현되기 때문에 신들 사이에는 서로간의 배타가 있을 수 없다. 후대 희랍의 제우스의 원형이 된(헤로도토스의 주장) 테베지역의 토착신인 아문(Amun)신은 멤피스지역의 태양신(Heliopolitan sun-god)인 라(Ra)신과 결합되어 아문라(Amun-Ra)신이 된다. 오시리스도 프타, 소카르와 결합하여 프타ㆍ소카르ㆍ오시리스(Ptah-Sokar-Osiris)가 된다. 이집트인들은 이러한 퓨젼방식에 의하여 주변의【아시아, 누비아, 후대의 희랍 로마】 신들을 거침없이 수용하여 자기들의 토착신과 결합시킨다. 그러한 신크레티즘(syncretism, 융합)을 통하여 장엄한 판테온(Pantheon, 로마의 만신전)을 구성했다.
이집트문명의 특성은 그 풍요로움으로 인한 배타성의 결여이며, 따라서 삶과 죽음이 연속적으로 이해되고 선과 악의 이원적 대결도 그리 강렬한 실체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에 비한다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들은 유일신앙을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보다 공격적이고 배타적이며 전쟁수호신적 성격을 강렬하게 지니며, 특히 선ㆍ악의 이원적 대결구조가 너무도 선명하다. 그리고 죽음과 삶의 세계가 단절되어 있고 인간세와 초월계가 뚜렷히 이원화 되어있다. 우리가 흔히 종교라고 하는 것은 모두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막문화를 원형으로 하는 것이다. 이집트는 사막지대에 위치하고 있지만 문명의 요람으로서의 나일강 유역은 사막적 성격이 없다. 그것은 농경문화일 뿐이다. 사막에서는 한 텐트 안에서 생활하는 베두윈(Bedouin)들의 강렬한 결속력과 배타성, 그리고 초월적 힘에 대한 절대적 숭배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수직적 하이어라키(hierarchy, 계층)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러한 하이어라키의 구조는 신과 인간 사이에도 철저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유대교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왔다갔다하면서 그 중간에서 태어난 비교적 후대의 산물이지만【그것은 지중해지역경계의 한시적 풍요로움을 틈타 BC 9ㆍ8세기에나 형상화된 것이며 그 이전의 모든 족장이야기는 문학에 속한다. 성서적 이스라엘의 민족개념은 페르시아 르네상스기에나 구체화된 것이다】 이집트의 영향보다는 역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최근에 발견된 쿰란공동체 사해문서에 담겨있는 공동체규약을 보아도 이들이 얼마나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의 영향을 강렬하게 반영하고 있는지 자명하게 드러난다. 선과 악의 대결, 공동체내의 사람과 공동체외의 사람의 구분, 선한 영과 악한 영, 의인과 악인, 어둠의 자녀와 빛의 자녀, 저주의 시대와 구원의 시대, 종말론적인 최후의 전쟁, 최후의 심판, 메시아 이 모든 어휘들이 종교라는 이름하에 인간세에서 펼쳐지고 있는 열악한 형태의 모든 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이 후에 요한복음의 ‘빛과 어둠’의 로고스사상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재림의 묵시론적 환상과 결합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아시아대륙의 문명은 서쪽으로 갈수록 신화적ㆍ초월적 성격이 강하고, 동쪽으로 갈수록 인문적ㆍ내재적 성향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대로 동쪽으로 갈수록 문명이 후발이라는 사실과 연관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서(西)← | →동(東) |
신화적(mythical) | 인문적(humanistic) |
초월적(transcendental) | 내재적(immanent) |
기실 인더스강역의 문명은 이집트문명ㆍ메소포타미아문명ㆍ페르시아문명과 연속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문헌에도 인도의 지혜문학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문명사적 전체적 통찰 속에서 조망되어야할 것이다. 헬레니즘시대의 동ㆍ서문명의 교류는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자유로운 것이었다. 실제적으로 캐러반루트의 개척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인도고대문명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아리안족과 토착세력문명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관한 것이지만, 이러한 문제는 고고학적 성과로서도 확정짓기가 매우 어렵다. 인더스강유역 하라파 고대문명(Harappan civilization)의 주역이 토착세력이었냐, 상부에서 내려온 아리안족이었냐 하는 것도 확정짓기 어렵다. 모헨죠다로(Mohenjodaro)나 하라파(Harappā)의 유적이나 유골을 보면 그것은 획일적인 성격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라파문명에 이미 다양한 요소의 유입이 있었고, 그 하라파문명의 토착성과 아리안 요소들이 결합하여 후대의 갠지스강문명의 꽃을 피웠다고 개괄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더스계곡의 하라파문명은 BC 1750년경에는 쇠퇴한다. 그리고 펀잡(Punjab) 지역의 사람들이 점점 갠지스강역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도시국가(폴리스)들이 생겨났고 이 도시국가들은 기존의 종족사회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또 다시 이 도시국가들은 다양한 과도기적 정치체제를 유지하였지만 결국 마가다왕국과도 같이 강력한 전제국가로 통합되어 간다. 이러한 변혁기에 싯달타라는 인류사에 획을 긋는 대사상가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불교와 심리학, 그리고 공자
세부적인 언급은 회피하겠으나, 싯달타 역시 다원론적 신들의 세계가 교차하는 짙은 종교적 문명권에서 태어났다. 싯달타 이전에 이미 인도문명은 베다문학과 우파니샤드경전을 통하여 단 하나의 근원적인 우주의 실체에 접근하였고, 이미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일체가 되는 심오한 철학사상을 개발했으며, 업(karman)이라든가, 윤회(saṃsāra), 해탈(mokṣa)과 같은 기본개념을 확립했다.
그러나 싯달타의 근원적인 혁명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관심을 비실체화시키고, 모든 신적 존재를 그 존재론적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데 있다. 싯달타는 신의 존재를 무화(無化)시켰다. 신이라는 존재의 무화는 나라는 존재의 무화이다. 이 나라는 존재의 무화를 불교에서는 안아트만(anātman), 즉 무아(無我)라고 부른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집트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페르시아를 거쳐 인더스강계곡을 거쳐 갠지스강역에 이르는 동안 꾸준히 초자연적 세계의 신성(Divinity)은 탈색되어간 것이다. 붓다에게는 더 이상 신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붓다의 혁명에는 카필라라고 하는 종족사회의 모든 인간의 픽션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틱한 진실성과 동시에 카스트적인 계급이 타파되고 보편적인 제국의 질서가 새롭게 태동되어가는 시대정신이 결합되어 있다. 그가 인간의 평등과 자유, 그리고 보편적 자비의 사상을 부르짖게 되는 역사적 정황에는 근대 부르죠아 시민계급의 에토스 형성과 유사한 어떤 디프 스트럭쳐가 숨어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자세한 논의는 도올 김용옥 지음,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1-195를 보라】.
그러니까 불교에 있어서는 종교란 일종의 심리학에 불과하다. 여기서 말하는 심리학이란 천박한 행동주의적 실험심리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인간이 언어를 통해 인류역사에 장난질쳐온 모든 신에 대한 담론이 결국 심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신리(神理)는 심리(心理)일 뿐이다. 인간의 마음의 집착을 해소하는 것만으로도[滅執] 모든 종교적 재앙은 사라질 수가 있다.
종교적 환상과 신적 실체가 실제로는 정치권력과 결탁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싯달타의 혁명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미 인류의 신적 지혜(Divine wisdom)는 갈 수있는 궁극에 도달한 것이다. 다(多)가 일(一)로 진화하고, 일(一)이 제로(Zero)로 진화한 것이다. 아이코노클라즘(Iconoclasm, 성상파괴)을 이야기한다면 싯달타의 아이코노클라즘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이고 래디칼(radical, 급진적인)한 것은 없다. 이러한 제로의 평면 위에 우리의 주인공 공자(孔子)는 인문학적 윤리학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 쓸 이 책은 공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인류의 역사를 통관하면서 통감한다. 이집트 수메르지역 저켠에서부터 황하문명의 한 제후국인 노(魯)나라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에 걸친 인류의 지혜의 다양한 발달사의 족적을, 그 한 여파로 시작된 그레코ㆍ로만문명이 서구문명에 그려나간, 오늘날 미국문명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의 역사가, 지혜의 다양한 발달의 측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못 미치고 있다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냉가슴을 치게도 된다. 나의 담론은 거대하다. 그러나 진실을 깨달을 줄 아는 자들은 분명 나의 통관적 담론으로부터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중국문명이 고대문명세계에 있어서 가장 콘템포러리(contemporary, 동시대에 존재한)한 문명이라고 한다면, 공자는 우리에게서 2500년을 격한 인물이 아니라 바로 콘템포러리 사상가이다. 그 충분한 이유는 이제부터 독자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조선문명과 한문
본 서의 모두(冒頭)에서 이야기했듯이 고전이란 고(古)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금(今)에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땅에서 자라나는 나의 후학들이 옛 고전 만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2000년 후에도 읽힐 수 있는 고전을 남겨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한 갑자를 돌고난 인생을 회고해 보면서, 나는 갑자기 나의 학문세계의 초라한 모습을 깨닫게 되었다. 나 자신의 고전을 만들기에는 나의 학문세계가 너무도 소천(疎淺)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어서 확고한 뿌리를 내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중국의 고경인 13경 전체에 대한 주석이다. 중국역사를 통해서도 한 사람이 13경 전체를 주석한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시대의 진보에 따라 막대한 정보의 양이 효율적으로 소통될 수 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작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모한 듯이 보이는 이 작업을 기획하게 된 이유는 우리민족이 세종대왕이라는 걸출한 지도자 덕분에 한글이라는 자기 언어의 시각적 표현방법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 그 이후를 통틀어 민족문화의 자산이 대부분 한문을 매개로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 한문이라는 언어는 13경이라는 고전을 기초적 어휘로 삼는 언어이다. 한문이 불행하게도 표음문자(表音文字)가 아니라 표어문자(標語文字)라는 사실이 더욱 고전에의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 학문의 기본은 인문학이 될 수밖에 없고, 인문학의 기본은 국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학자료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82년도 하바드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이래 ‘번역의 중요성’을 줄기차게 강조하였고 ‘한문해석학’이라는 새로운 치학(治學) 방법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제도적 실현을 역설하였다. 예를 들면, 서구학계와 미국학계에서 고전학이 발달하는 이유는 곧 치열한 고전번역 작업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나라 대학에서도 국학고전자료의 초역작업을 박사학위논문의 주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주장은 전혀 인정되지를 않았다. 학계가 이러한 나의 주장을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학계의 주도권을 이끌어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번역’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없기 때문에, 표절에 가까운 천박한 논문쓰기로 한평생을 보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논문이란 해석 안 되는 부분은 슬쩍 넘어가면 되고, 여기 저기 관계 서적들을 참고하면 어떻게든 외장을 갖출 수 있지만, 번역이란 한 줄 한 줄, 한 글자 한 글자에 소략함이 있을 수 없고, 더 중요한 것은 고전의 창출자에 대한 생평이나 시대배경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서는 적당한 논설이 불가능하다. 번역이야말로 가장 오리지날하고 가장 창조적인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이란 ‘왜놈들이나 하는 천박한 짓’이라는 식으로 폄하하여 온 것이 우리나라 학계의 현실이었다. 기실 그들이야말로 ‘왜놈’을 베껴먹으면서 살아온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왜놈’이야말로 자신의 수치를 은폐하기 위한 역설적인 단어였다. 일본학계야말로 번역을 중시하는,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 학문의 장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20여 년을 줄기차게 소리쳐온 덕분일까, 최근부터 한국학계에서도 나의 진실을 수용하기 시작했고 고전번역을 학위논문으로 인정하는 사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외롭게 한국고전의 국역을 담당해왔던 민족문화추진회도 한국고전번역원이라는 국가기관으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다.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학계도 이제는 일제의 연장선상에 서있던 관료주의적 허위의식이 사라져가고 진정한 인문학을 태동시키려는 소장학자들의 노력이 돋보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행보에 발맞추어 이 땅의 후학들을 위하여 한학의 기초어휘를 바르게 정립해주어야만 하겠다는 발원이 내 마음속에서 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나 자신이 진정한 학문의 대로에 진입하기 위한, 나 자신이 스스로 진정한 호학(好學)의 길을 대성하기 위한 고심의 결단인 것이다. 남은 생명의 가치를 이 작업을 위하여 유감없이 불사르기로 각오한 것이다.
이러한 대업의 실천에는 많은 문제가 뒤따른다. 우선 이러한 작업이 성공리에 수행되기 위하여서는 모든 사회적 활동을 중단하고 오로지 이 작업에만 매달릴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환경의 조성을 위하여 최소한의 기금마련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일정한 제도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러한 지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념적으로나 인상론적으로는 지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기관도 막상 나에게 그러한 혜택을 베푸는 것을 꺼려했다. 일본의 경우 세계인문학의 역사를 뒤바꿔놓은 희대의 걸작, 모로하시 테쯔지(諸橋轍次) 선생 일인의 노력의 결실인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 13권의 웅혼한 모습이 타이슈우칸(大修館) 서점 대표 한 사람의 34년간에 걸친 눈물겨운 지원으로 이루어진 사례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진실을 기대한다는 것은 필자나 지원자 상호간에 어려운 일이었다.
유일한과 명동학교, 동아시아의 미래
이러한 나의 갈망과 진실을 이해하고 나의 작업에 대하여 문화콘텐츠사업 ― ‘인문학 살리기’의 일환으로 지원을 흔쾌히 허락한 유한킴벌리에 나는 감사할 뿐이다. 이러한 문화콘텐츠사업은 동아시아 문명의 미래에 대한 총체적 비젼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유한킴벌리는 우리나라의 신뢰받는 모범기업으로서 시민들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공적사업을 원대한 안목에서 실천해왔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복지를 실현하는 사원공동체의 다양한 시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 이러한 기업철학의 배면에는 무엇보다도 창업자 유일한(柳一韓, 1895~1971) 박사의 정신이 살아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사료된다.
우리시대에 의식을 가지고 성장한 학동으로서 유일한 박사를 존경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그의 사상일뿐만 아니라, 그의 실천적 삶의 역정이었다. 기업이 정치권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에도 일절 불의와 타협함이 없이 기업을 운영했고, 그를 모함하여 그의 기업을 조사케 한 자들이 오히려 그에게 상을 주어야만 했을 정도로 그는 투명한 삶을 살았다. 76세를 일기로 영면할 때도 그에게 부인과 자식들이 있었지만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유언장을 남기어, 모든 사람들을 숙연케 하였다. 이 모든 사적(事績)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투철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 신념이란 ‘기업의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의 논리적 유지만으로 삶의 실천이 관철되어지기는 어렵다. 그 신념을 관철케 만드는 그 혈관의 뜨거운 피가 없으면 안 된다. 그 뜨거운 피는 어디서 흘러들어 왔을까? 나는 그 뜨거운 핏줄의 한 단면을 그의 부친 유기연(柳基淵)의 삶에서 발견한다.
나는 EBS에서 방영된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 다큐를 찍기 위하여 서간도ㆍ북간도, 시베리아 등지로 수난 받는 동포들의 눈물겨운 삶의 족적을 여기저기 찾아 헤맨 적이 있다. 주권 잃은 민족의 수난사를 그들의 핏방울이 떨어져 있는 그 땅을 밟아보지 않고서는, 서면(書面)의 묘사만으로 그 실제정황을 공감하기는 어렵다. 나는 북간도의 명동학교를 찾아갔다. 명동학교는 의정부 참관 이상설(李相卨, 1871~1917) 선생이 을사늑약 직후 자정치명(自靖致命)의 울분을 삼키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가 용정으로 가서 설립한 북간도 최초의 신학문 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의 후신이다. 서전서숙은 일제에 의하여 끊임없이 탄압을 받게 되었고, 또 창설자인 이상설이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떠나게 되자 폐교되어 버리고 만다. 이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 북간도의 정신적 지주였던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선생이 개화기의 탁월한 기독교사상가였던 정재면(鄭載冕)을 교사로 모셔다가 학교를 다시 열었는데 그것이 바로 명동학교다.
명동(明東)의 동(東)이란 주권을 잃고 일제의 사슬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캄캄한 나라, 조선을 말하는 것이요, ‘명동’이란 그 조국을 밝게 한다[明]는 뜻이다. 이 명동학교야말로 우리 민족정기의 맥이었고, 민족교육의 산실이었고, 만주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리고 1919년 서전벌 삼일운동의 주체이기도 하였다. 민중의 예술로 민족의 혼을 일깨운 영화 『아리랑』의 각본ㆍ주연ㆍ감독을 도맡아 한 회령의 천재 나운규도 이곳 명동학교에서 배출되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랬던, 샛별과도 같은 순결한 새벽의 정취와 애수를 우리 가슴에 남겨 놓은 시인 윤동주도, 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애를 마감한 그의 친구 송몽규도 명동학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구약학 학자로서 공동번역에 참가했고 최근까지 남북화해를 위하여 힘쓰다 돌아간 문익환도 윤동주와 한반에서 같이 명동학교를 다닌 사람이었다. 진취적인 기독교장로회를 창설하고 그 운동의 기치를 이끌고 간 장공 김재준선생도 규암 김약연선생 밑에서 공부했는데 규암을 평한 다음과 같은 멋들어진 말이 있다.
규암 선생의 생애는 공자가 도를 행하였던 모습과도 같다.
圭巖先生之生涯, 近於孔子之道.
담박한 인품을 지니며 남을 가르치는 데 싫증냄이 없었고, 간소한 삶을 살면서도 문채가 풍겼고, 온후한 성격을 지녔으되 사리가 분명했다.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먼 것이 가까운 줄을 알았고, 바람이 소종래가 있음을 알았고, 은미한 것일수록 드러난다는 것을 알았다.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이 규암선생에게 학교 자금을 댄 사람이 바로 유일한의 부친 유기연이었다. 유기연은 평생 민족의식이 투철하였고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한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자식이 조금이라도 그러한 민족의식에서 벗어날 때는 채찍질하는 것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유일한이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후에도 꼿꼿이 독자적으로 살았고, 1934년 73세를 일기로 아들 일한이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 평양에서 영면하였다. 유일한은 일제말기에는 유한양행이 일제의 탄압을 받자 미국에서 체류했는데, 1945년 1월에는 자진해서 OSS훈련을 받고 비밀침투작전인 냅코(Napko) 작전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유일한은 아버지로부터 투철한 민족정기와 독립정신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그의 기업행위는 시작부터 끝까지 독립운동이었다. 따라서 기업의 부의 증대는 민족의 건강과 복지를 증대시키는 행위와 일치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는 그러한 철학에 따라 기업의 도덕성을 선구적으로 확립하였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우리나라가 독립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립(獨立)이란 홀로[獨] 섬[立]인데 분단의 현실로는 홀로 설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민족은 아직도 독립운동중이다. 나는 나의 13경한글역주 작업이 유일한 박사가 꿈꾸었던 조선의 완전한 독립의 그 날을 실현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한다. 유교의 21세기적 탐구는 남ㆍ북이 서구적 정치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새롭게 본래적 모습으로 회귀하고 하나 되는데 반드시 기여하리라고 본다. 나는 유교의 새로운 해석이 우리민족의 통일헌법의 기초가 되리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데 기여하리라고 확신한다. 유럽공동체(EU)의 문화적 공통분모 내지 사상적 기반은 역시 기독교다. 그러나 앞으로 생겨날 아시아공동체의 기반은 무엇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지렁이에게는 손톱이라든가 이빨과 같은 날카로운 도구도 없고,
단단한 힘살과 강력한 뼈도 없지만 언제나 땅속에서 위로는 진흙을 먹고
아래로는 황천의 맛있는 물을 먹고 산다.
그것은 오직 마음을 한 군데 쏟기 때문이다. …
두 길을 동시에 걸어가려고 하는 자는
결국 어느 한 길도 그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
蚯螾無爪牙之利ㆍ筋骨之强, 上食埃土, 下飮黃泉, 用心一也. … 行衢道者不至.
학문의 길을 땅속에 사는 지렁이의 삶에 비유한 이 섬세한 말이 나에게는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다. 수만 권의 서향에 갇혀 그 문자 사이를 지렁이처럼 파고 다니는 자족한 나의 모습에서 이 민족역사의 한 새로운 장이 열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008년 6월 29일
무정재(毋井齋)에서
도올 쓰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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