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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 서막: 공자의 생애와 사상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 서막: 공자의 생애와 사상

건방진방랑자 2021. 5. 2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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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막: 공자의 생애와 사상

 

 

논어를 접근하는 인식론적 과제상황

 

 

과거는 알 수가 없다. 바로 어제로 지나가버린 나의 과거도 기실 나의 의식 속의 기억(Memory)’이라고 하는 특수한 작용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과거의 총체가 될 수가 없다. 기억은 과거의 체험적 사건의 선택이며, 그 선택을 기억해내는 과정에는 이미 상상력이라든가 주관적 판단이라든가 감성적 왜곡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잡스러운 사태들이 개입한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이 아닌, 과거체험의 해석(Interpretation)이다. 기억은 저등동물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기억은 의식작용이 고도화된 동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기억은 언어와 결부된 상징작용(Symbolism)의 소산이다. 과거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는 선택이며, 해석이며, 상징이다. 더구나 과거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간접체험의 소산일 때 이러한 문제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논어를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인식론적 반성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논어에 대한 언설들이 이러한 인식론적 반성을 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처로운 것이다. 논어를 달통했다 하는 박학지사(博學之士)들의 고론이 이러한 인식론적 반성을 결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천루(淺陋)한 것이다.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읽을 때 우리는 노자(老子, 라오쯔, Lao Zi)라는 한 역사적 인간을 반드시 전제로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추상적 사유의 산물이므로 그 사유의 주체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없이 추상적 사유의 체계 자체만으로도 적확하고 충분한 이해가 성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노자속에는 노자 그 개인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논어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언급이 있다.

 

 

논어라는 것은 공자(孔子, 콩쯔, Kong Zi)Confucius라고 하는 서양의 표현은 공부자(孔夫子, Kong Fuzi)를 라틴어로 표기한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가 제자나 당시의 사람들의 물음에 응하여 답한 것과, 제자들이 서로 더불어 토론하고 그것을 공부자에게 직접 물어 들은 말들이다. 그 당시 제자들이 각기 그것을 필기하여 두었다. 공부자가 세상을 뜨자 문인들이 서로 모여 그것을 모으고 논찬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일러 논어라 한 것이다.

論語者, 孔子應答弟子時人及弟子相與言而接聞於夫子之語也. 當時弟子各有所記. 夫子旣卒, 門人相與輯而論纂, 故謂之論語.

 

 

논어라는 서물의 성격과 제목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밝혀준 문장이라 할 것이다. ‘논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들이나 당시의 사람들과 대화한 말, 그리고 제자들끼리 토론한 말, 그리고 공자에게 접문(接聞)한 말이다. ‘()’집이논찬(輯而論纂)’의 뜻으로, 그 말들을 편찬했다는 뜻이다. 논어는 편찬된 것이다.

 

논어에는 역사적으로 살아있는 한 인간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논어는 반드시 그 논어의 주체자인 한 인간의 모습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읽히는 논어인 것이다. 노자속에는 노자가 없다. 그러나 논어속에는 어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시공의 맥락에 따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는 사람들간의 논어다. 그 사람들간의 사이라는 것은 반드시 상황성(Situationality)을 가지고 있다. 그 역사적 상황 상황에서 그려진 그림들의 파편인 것이다. 노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지만, 논어는 시공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만 일차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의미는 반드시 이러한 시공 속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발현하는 것이다. 논어는 분명히 어느 한 사람이 일상적으로 먹고 자고 울고 웃고 성내고 기뻐하고 있다.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논어는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을 우리는 공자(孔子)’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공자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어느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우리와 공통의 기반을 가진 생물학적 을 소유한 일상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매우 명백한 사실(crude fact)예수의 경우에도, 싯달타의 경우에도,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전혀 예외일 수가 없다. 이 사실을 초월하는 모든 주장도 반드시 이러한 명백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 대한 기술이 우리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공자는 과연 존재했는가? 공자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상징작용의 착각에 의하여 날조된 픽션의 인물은 아닐까? 사이버공간의 인조인간이 너무도 유명해져서 역사 속에서 실존성을 획득한 것은 아닐까? 맹자(孟子, 멍쯔, Meng Zi)가 공자를 직접 만나지 못한 이상맹자는 공자가 죽은 후, 공자의 이웃동네에서 100여 년 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맹자가 직접 경험으로 공자의 실존성을 확인하지 못한 이상, 맹자의 공자에 대한 생각도 이미 이러한 소문에 의한 픽션이었다고 하는 가능성이 배제될 수는 없다. 과연 공자는 실존했는가? 실존했다면 지금의 우리와 같이 고민하는 동시대의 어느 한 인간의 유형이었을까? 공자는 과연 있었는가?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에 대하여, 이 책의 첫머리에서 과거는 상징체계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이상, 어떤 확답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과연 실존했는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떠한 대답을 내려야 할 것인가? 공자는 과연 실존한 어떤 사람이었을까? 실존했다고 한다면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어떻게 생겼으며 어떠한 삶을 영위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어떠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살았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최선의 방도는 공자의 그림자가 드리운 가능한 한 모든 자료를 섭렵하여 그 가운데서 살아있는 공자를 정직하게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이때 정직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그 정직(intellectual integrity)은 살아있는 공자의 역사적 실상(historical reality)에 접근하는 것이다.

 

 

 

 

 곡부로 가서 느낀 것

 

 

공자는 존재했는가? 살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나는 중요한 결단을 하나 감행하였다. 공자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활동하고 죽었다는 그의 고향 곡부(曲阜, 취후우, Qu-fu)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청도(靑島, 칭따오, Qing-dao)에서 기차를 타고 황하(黃河, 후앙허, Huang-he)와 태산(泰山, 타이산, Tai-shan) 앞의 광활한 대지를 달려 새벽의 여명을 깨뜨리고 연주(兗州, 옌저우, Yan-zhou) 후어츠어잔(火車站, huo-che-zhan)에 도착한 것이 이천년 유월 삼일 아침의 일이었다.

 

곡부에 공자가 있었는가? 곡부의 웅대한 대성전(大成殿)의 위용 속에 공자가 있었는가? 나의 대답은 간결하다. 곡부의 유적 어느 곳에도 공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곡부의 유적 그 모두가 후대에 건조된 것이다. 그 대부분이 송()ㆍ원()대 그리고 청대(淸代)에 크게 개축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찌는 태양 아래 고호의 밀밭보다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곡부의 산하(山河), 공자의 망령을 쫓아, 하염없이 헤매면서 다음과 같은 명백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읽고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정약용(丁若庸, 1762~1836)이라는 사람의 실존성을 크게 의심하지는 않는다. 퇴계전서(退溪全書)를 읽고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그 숨결을 느껴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황(李滉, 1501~1570)이라는 사람이 나의 몇대조 할아버지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크게 회의감을 느끼지 않는다. 곡부에서 내린 나의 결론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의 고적(孤寂)한 울분을 느끼고,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고매(高邁)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느낌만큼의 공자는 똑같이 느껴질 수 있는 어떤 역사적 실존태라는 것이었다. 공자는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최종적 결론은 독단적으로도 들릴 수 있겠지만 그 역사적 실존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방대한 문헌을 통한 내 일생의 공자와의 해후가 그러한 직감을 가능케 했을지도 모른다. 공자는 분명 살아 있었다! 공자는 곡부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었던 어떤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의 기나긴 지적 방황에 이러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곡부 여행의 어마어마한 소득이었다. 역사적 판단, 즉 과거에 대한 판단은 예술적 직관과도 같은 어떤 느낌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한 직관적 판단을 내리기까지 반세기의 고독한 방황을 거쳐야 했던 나의 삶의 역정이 나에게는 소중했다. 공자를 탄생시킨 산하는 굽이굽이 나의 의식 속에서 살아 꿈틀거렸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자가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하는 존재의 유무의 확인은 우리가 추구하는 문제의식에 아무런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의 유무에 대한 확신이 신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맥락인 것이다. 안젤므스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은 신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도 별 의미가 없다. 플라톤테아에테투스(Theaetetus)이래 제기되어온 서양철학 2천년의 존재의 문제가 럿셀(Bertrand Russell, 1872~1970)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에 의해 면박당하는 것과도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공자가 존재한다는 나의 확신은 나의 내면에서 기술되는 여러 가지 의식의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공자라는 고유명사가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하는 것은 우리가 묻고자하는 공자라는 의미체와 무관한 헛질문일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공자라는 고유명사가 기술되고 있질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라는 역사적 자기동일적 실체(Substance)에 관한 논의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공자는 존재한다공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국 다 같이 무의미한 명제들이다. 이 명제를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보다 본질적 질문은, ‘공자는 어떤 사람이었냐?’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최초의 존재론적 근거로서 나는 공자는 살아있었다라는 믿음을 직관적으로 전제할 수 있기에 이른 것이다.

 

공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어떤 사람이었다는 명제는, 인식론적으로 공자의 행위로서 기술되고 있는 많은 문헌적 사실들이 시공 속에 존재했던 어떤 주체의 실제적 행위에 대한 해석의 체계들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헌적 사실들이 완전한 인간의 상상력의 날조가 아닌, 시공 속의 어떤 인격체의 리얼한 행위의 해석체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와 공자전기문학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결국 이 질문은 공자의 삶에 관한 질문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나? 그런데 삶(Life)이란 행위나 사건, 느낌들의 복합적 연속체인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결국 이러한 역사적 공자의 삶의 행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공자의 삶을 전달하는 가장 권위있고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정보의 집약 체계로서 우리는 사마천(司馬遷, 쓰마 치엔, Sima Qian, BC 145~c.86)사기(史記)속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꼽는다. 사실 공자의 삶에 대한 한우충동(汗牛充棟)하는 헤아릴 수 없는 기술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천언만언(千言萬言)의 잡설(雜說)보다 공자세가(孔子世家)한 편의 문장을 꿰뚫는 것이 공자의 삶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는 첩경이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들에게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史記卷四十七, 世家第十七)의 일독을 권할지언정, 그 내용을 번잡스럽게 여기 부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사기(史記)는 위대한 책이다. 서구에서는 18세기 말엽에나 기번(Edward Gibbon, 1737~1794)로마제국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가 달성한 히스토리오그라피의 수준을 사마천은 그보다 무려 18세기를 앞선 기원전 1세기 초엽 한무제 정화(征和) 연간(BC 92-89)에 달성하였던 것이다. 본기(本紀)ㆍ표()ㆍ서()ㆍ세가(世家)ㆍ열전(列傳)이라는 다섯 개의 다른 기술형식을 빌어 기전체(紀傳體)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대표적인 형식으로 간주하여 축약한 말의 전형을 수립한 사마천의 히스토리오그라피는 방대한 사료의 정밀한 편집이 과시하는 놀라운 실증사학의 정신과 함께 그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또 자유롭고 비판적인가를 말해준다. 사마천은 역사에 대하여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피력하는데 하등의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주관적 포폄을 가하기까지 얼마나 세심한 객관적 사료의 제시를 선행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찬탄의 혀를 차게 만든다.

 

본기(本紀)는 제왕(帝王)의 역사다. 세가(世家)는 제왕(帝王)이라는 액시스(axis)(): 정확하게는 축이 박히는 바퀴통를 둘러싸고 굴러가는 제후(諸侯)라는 바퀴살[]들의 전개사. 세가가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이러한 세계인식의 모델을 가정케 한다. 노자(老子)11‘30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축을 공유한다[三十輻共一轂]’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리고 최근 진시황 무덤에서 나온 동거마(銅車馬)가 정확하게 30개 바퀴살의 바퀴모양을 과시하고 있듯이, 사마천의 세가가 정확히 30권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의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공자는 제후가 아니다. 국군(國君)의 위치는 커녕 대부(大夫)의 지위에도 가본 적이 없는 일개 포의(布衣)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마천은 공자를 제후의 대열인 세가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당대 이미 공자의 위치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공자묘소에 참배한 이래 제왕들은 자기들의 도덕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키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거로서 공자를 존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무제(漢武帝)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파출백가(罷黜百家)하고 독존유술(獨尊儒術)하여 유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의 사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마천 자신이 공자를 지성(至聖)’으로 존숭하고 공자가 전개한 역사가 결코 일개 제후가 전개한 역사에 조금도 뒤지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공자를 열전(列傳)에 집어넣지 않고 세가(世家)에 집어넣은 그의 과감한 역사인식은 바로 한낱 원한에 사무친 품팔이 농사꾼[傭耕]에 지나지 않았던 진섭(陳涉, 츠언 서, Chen She, 또는 츠언 성陳勝, 은 자)의 경우 더욱 극렬하게 표출된다.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혁명을 도모할 수 있는 인물들을 모을 수 있는 덕망이나 가문의 배경이 전무한, 그야말로 일개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았던 진승이었다. 사마천 자신이 그 찬란한 위용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신흥 진제국(秦帝國)이 허무하게 무너져가버린 그 붕괴의 기폭제가 된 농민반란을 주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승을 세가에 올려놓은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숙연하게 사마천의 역사의식을 느끼게 된다. 사마천은 귀천을 막론하고 세계사적 개인의 역사적 의미를 물을 줄 알았던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세가(孔子世家)라고 하는 공자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내가 가본 그 곡부(曲阜)의 구석구석을 직접 답사하였다. 내가 본 곡부의 모습보다는, 더 원형에 가까운 공자의 체취가 서린 광경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생생한 구전자료들을 채록하였을 것이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은 말한다:

 

 

나는 노나라로 직접 가보았다. 그래서 중니(仲尼)의 사당과 살던 집, 그리고 그가 탔던 수레, 입던 옷, 그리고 예()에 썼던 그릇들을 다 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유생들이 그 집에 모여 때에 맞추어 예를 배우고 있는 모습도 관람하였다. 나는 공자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와 머뭇거리며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適魯, 觀仲尼廟堂車服禮器, 諸生以時習禮其家, 余祗迴留之不能去云

 

 

공자세가야말로 권력의 희생양으로 불알발린[宮刑] 사마천이 분세(憤世)의 그 마음속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권력을 흠모했다가 결국 권력 그 자체를 부정했던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경애감으로 집필한 역작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센티멘탈(sentimental)한 공감이 공자의 삶에 관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평심(平心)하게 한번 생각해보자! 사마천이 공자의 정통적 전기를 집필한 것이 공자가 죽고 난 후 꼬박 400년 후의 사건이다.

 

생각해보자! 섬서(陝西, 산시, Shan-xi) 하양(夏陽, 시아양, Xia-yang)의 사람이 400년 전의 산동(山東, 산동, Shan-dong) 곡부(曲阜)의 어느 따한(大漢, 키 큰 사람)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집필한다고 하자! 어떠한 사료에 어떻게 근거하든지 간에 400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편년체로 세밀하게 기록한다는 것이 사실 그 자체일 수는 없다. 불과 몇십 년 전에 비명에 간 박정희 대통령의 전기문학도 집필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번 되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마천에게 주어진 사료들은 이미 해석되어진 사료들이다. 그리고 그 해석되어진 사료들을 사마천이 또다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마천이 해석한 사료들을 또 다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실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해석을 요구하는 하나의 자료일 뿐인 것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과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최술(崔述, 췌이 수, Cui Shu, 호는 동벽東壁, 1740~1816)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이 낱낱이 밝힌 것이다.

 

 

 

 

 예수 탄생과 베들레헴

 

 

우리는 예수가 베들레헴(Bethlehem)의 어느 말 구유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방박사 세 사람이 와서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는 사실을 크리스마스설화의 주요테마로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분명 갈릴리(Galilee)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요셉도 분명 갈릴리의 나자렛(Nazareth)사람이고, 예수도 나자렛에서 성장하여 갈릴리 바다의 북단에 있는 가버나움(Capernaum)에서 활동을 개시한 사람이다. 그런데 베들레헴이라는 곳은 남쪽 유대지방 예루살렘에서도 더 남쪽으로 6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편벽한 곳이다. 저 북방에 위치한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그야말로 험준한 광야의 천리길이다. 그런데 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나야만 했을까? 왜 북방 갈릴리사람인 예수가 저 남방 유대아 광야의 베들레헴에서 나야만 했을까? 이 사실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저자는 매우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시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

(누가 2:1~5)

 

 

누가기자에 의하면 예수가 태어난 해에 바로 캐사르를 이은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아구스도)에 의하여 로마제국 전역에 걸친 총호구조사(general census)가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호구조사를 현주소가 아닌 본적지에서 받기 위해 요셉이 애기를 밴 마리아를 데리고 천리길인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매우 정확한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지방사적인 사실을 하나 더 첨가하고 있다. 이 총호구조사는 퀴리니우스(Quirinius, 구레뇨)가 시리아(Syria,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실시한 것이며, 바로 헤롯이 유대아의 왕이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누가의 기자는 이러한 사건이 매우 역사적 배경 위에서 진행된 사실인 것처럼, 마치 역사가가 당대의 역사를 기술하듯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로마사는 우리에게 매우 정확하게 알려져 있다.

 

시저 아우구스투스의 로마제국 전역의 총호구조사명령이라면 그것은 정확한 연대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우선 로마제국의 총호구조사는 세금의 부과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의 피지배인인 요셉이 애기 밴 마리아를 데리고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단지 본적지에서 호구등록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걸어갔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더욱 명백한 사실은 아우구스투스의 총호구조사명령은 AD 6년에 한 번 있었으나 예수가 탄생한 시점을 전후로는 그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c. 100)와 같은 당대의 사가의 증언에 의하여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헤롯왕의 치세 기간은 BC 37년부터 BC 4년까지에 걸치고 있다. 예수의 탄생이 헤롯왕 치세기간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BC 4년 이전의 사건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헤롯의 치세기간 동안에 퀴리니우스(구레뇨)는 시리아의 총독이 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기자의 이 모든 기술은 날조된 것인가? 물론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말한다면 그것은 날조된 것이다. 그런데도 누가는 그것을 태연하게 마치 당대의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듯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는 나자렛에서 태어나도 마리아의 처녀잉태를 정당화시키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왜 하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어야만 했을까?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을 잘 서술했다고 여겨지고 있는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요한복음7:41~42). 그렇다고 우리는 요한의 기자가 누가마태의 기자보다 더 사실적인 실증적 사료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여기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을 때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로서 읽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누가마태의 기자들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건을 기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내면적 논리와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내면적 논리와 목적이 바로 케리그마(Kerygma)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단지 역사적 인간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이 땅에 보내여졌고, 천국의 도래를 외쳤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으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고 하는 신념의 선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대가로 죄사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 선포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기술된 것이 바로 복음서인 것이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케리그마의 맥락 속에서만 명백해질 수 있는 것이다. 베들레헴은 바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왕의 고향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농부의 아들이었으며 양떼를 지키는 목동이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바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혈통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마태는 예수의 베들레헴탄생을 선지자 미카(Micah, 미가)의 예언의 성취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마태2:6, 미가5:2

 

 

이러한 성서의 케리그마적 기술과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술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다. 공자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야 할 아무런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마천의 공자기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편년체적(編年體的) 기술처럼 보인다. 공자의 삶에는 케리그마를 비신화시켜야만 할 만큼, 신화적 요소가 염색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신화를 우리의 상식적 인과적 틀에서 벗어나는 사태로서만 생각하기 쉽다. 처녀잉태(parthenogenesis)라든가 죽은 자의 부활(resurrection)이라든가 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상식적 인과 속에서 가능한 사태가 아니다. 확률적 예외일 가능성조차 없다.

 

그러나 신화는 불가능한 것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화는 있을 수 있는 것, 즉 현실이 아닌 가능한 사태 속에서도 얼마든지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현존재의 행위는 항상 수없이 가능한 사태 속의 한 실현이다. 그러나 이 실현이 그 수많은 가능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가능한 사태 속에 무한히 신화적 기술이 가능하다.

 

 

 

 

 예수의 케리그마, 공자의 케리그마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이미 그것이 세가(世家)로 편입되었다는 사태가 이미 명백한 어떤 케리그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가 지성(至聖)’이심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것을 집필한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료가 된 많은 공자에 관한 기술의 파편들(fragments)이 모두 일정한 목적을 지니고 공자제자의 집단들에 의하여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것도 역시 공자 사후의 초기 교단(敎團, 가르침을 신봉하는 집단)의 케리그마적 성격에서 파생된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 관한 기술은 신화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초자연적 사태를 개입시킨다는 것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거부한다는 것이 신화적 기술의 유무의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매우 평범한, 가능한 사실적 기술이 오히려 신화적일 수도 있다. 공자의 삶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상식의 전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환경의 문화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말대로 삶의 형식(Lebensform)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선진중국인(先秦中國人)들의 삶의 형식은 격렬한 사막의 유대인들처럼 어떤 초자연적 사태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공자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케리그마처럼 괴력난신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의 기술도 예수의 기술과 똑같이 비신화되어야 할 신화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명실공히 공자라는 인간에 관하여 최초로 쓰인 가장 포괄적인 전기문학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 우리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전에는 공자 그 인간에 관한 기술을 찾아볼 수 없는가? 선진(先秦)문헌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나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거의 모든 문헌에서 공자라는 인간에 관한 언급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공자세가(孔子世家)는 그 이전의 공자에 관한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묵자(墨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순자(荀子), 열자(列子), 예기(禮記), 한비자(韓非子), 공손룡자(公孫龍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초사(楚辭), 윤문자(尹文子), 공총자(孔叢子)등 거의 모든 주요문헌에 공자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이것은 곧 공자는 일가를 이룬 제자백가의 모든 사람들에게 떠날 수 없는 어떤 심상을 제공한 강력한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춘추말(春秋末)에서 진한지제(秦漢之際)에 이르는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거의 최고의 스타였다. 공자는 결코 은학(隱學)이 아닌 현학(顯學)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학단(學團) 조직의 실제적 지구력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문헌에 나오고 있는 공자얘기를 다 살펴볼 적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모든 문헌에 공자에 관한 기사가 지금 현존하는 논어(論語)라는 텍스트를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예기』 「방기편(坊記篇)중에 논어왈(論語曰)’이라는 표현이 있으나 공자가 논어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문맥상 가당치 않고, 따라서 후대의 찬입이 확실하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방기편은 한대에 성립한 것으로 본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논어는 서한말(西漢末) 원제(元帝, 위앤띠, Yuan Di, BC 49~33) 때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 장 위, Zhang Yu)노론(魯論)을 주()로 하고 제론(齊論)을 참조하여 오늘날의 20장 체제로 확정한 장후론(張侯論)텍스트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논어고주의 정본을 남긴 정현(鄭玄, 정 쉬앤, Zheng Xuan, AD 127~200)노론의 편장을 주로 하여 제론고론을 참작하면서 교정을 가하여 주석을 했다고 하안(何晏)이 말했는데[漢末, 大司農鄭玄, 就魯論篇章, 考之齊古, 以爲之注. 集解敍] 이때 정현이 저본으로 삼았다고 하는 노론이란 바로 장후론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안(何晏, 허 옌, He Yan, BC c.193~249)의 집해(集解)나 황간(皇侃, 후앙 칸, Huang Kan, 488-545)과 형병(邢昺, 싱 삥, Xing Bing, 932~1010)의 이소(二疏)가 모두 이 장후론에서 발전한 정현주본에 의거한 것이다. 장후론이전의 전국시대 상황을 말하자면 논어텍스트의 부분적 파편들이 전승되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오늘 보듯이 볼 수 있는 논어라는 서물은 전국시대 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최근 BC 300년경의 유물로 추정되는 곽점죽간(郭店竹簡) 중에 어총3(語叢三)이라고 분류된 문헌이 나왔고 그 문헌 속에 논어』 「술이자한의 두 구절이 발견되었다 하여, 논어가 이미 자사子思 때 성립하였다고 하는 일부 중국학자들의 논의가 있으나 그것은 엄밀한 논리를 결한 성급한 결론일 수밖에 없다. 그 두 구절의 발설의 주체가 공자라는 것이 명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한4毋意, 毋必, 毋固, 毋我로 추정되는 죽간의 자의와 맥락적 해석 그 자체가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므로 과연 논어의 구문인지 확정짓기 어렵다. 이러한 죽간 구문의 존재가 오히려 공자와 무관하게 떠돌아다니던 정형구를 공자의 말로서 나중에 편집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도 있다. 어총3논어유사구는 전혀 논어라는 서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논어라는 텍스트가 없이도 이미 공자와 그의 집단의 행적과 언론은 전국시대 때 제자백가에 의하여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사후에 크게 역사의 표면에 등장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역사를 움직여가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의 배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였다. 제자백가의 흥기는 기실 이 공자집단이라는 이 에너지에 제동을 걸든가 혹은 철저히 옹호하든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피어난 것이다. 이들 모두가 논어라는 텍스트를 정확히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논어의 많은 사상적 주제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제자백가들은 제멋대로 그 주제들을 평가하고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꾸며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결론은 매우 진솔하다. 묵맹(墨孟)으로부터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이르는 모든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픽션적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소설을 놓고 정밀한 역사적 사실을 논구한다는 것 자체가 연구방법에 인식론적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소설(小說)이란 본시 작은 이야기. 삶의 자질구레한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대설(大說)아닌 소설(小說)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자의 세계에는 체계적 대설이 별로 없다.그 모두가 삶의 정황 그 구비구비에서 피어난 소설인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란 본시 픽션(fiction)과 넌픽션(nonfiction)의 구분이 어렵다. 픽션과 넌픽션이 모두 인간의 의식의 사태이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말할 때는 픽션이 넌픽션이 되기도 하고, 넌픽션이 픽션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어차피 소설이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력의 필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공자에 관하여 최후로 쓰여진 소설의 집대성이다. 그 이전의 모든 단편소설을 묶어 장편으로 편집한 것이다. 물론 장편소설을 쓰는 가운데 사마천의 케리그마가 가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의 모든 공자논의의 조형이 되었다. 그것은 최후의 집대성이며 최초의 대하 드라마였다. 물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 드라마 속에 역사적 근거로서의 공자 그 사람은 엄존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내용을 축자적(逐字的)으로 신봉할 수는 없다. 사마천은 분명 공자의 삶의 터전이었던 곡부까지 두 발로 답사하여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썼으므로 상당부분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정보를 수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공자에 관한 신빙성 있는 유일절대의 기록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할 때 일단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논의들을 기준으로 삼지 않을 수는 없다. 공자세가(孔子世家)라는 언어의 벽을 뚫고 어떠한 공자의 모습을 심상에 남기는가 하는 것이 결국 공자세가(孔子世家)이후의 모든 논의의 과제가 되었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정확한 실상(實相)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가상한 것이지만, 그 노력에 절대적 정론(定論)이 확정되기는 어렵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규명보다는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에 대한 나의 이해의 구조가 궁극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장자와 묵자와 맹자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전의 문헌으로 우리가 공자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나는 묵자(墨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예기이 네 개의 책을 들겠다. 이 네 개의 서물은 모두 그 나름대로 확고한 공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장자(莊子)라는 서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莊子)를 유가와 대립하는, 유가와 전혀 무관한 독자적인 도가적 사상체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자(莊子)속에는 공자에 관한 수없는 알레고리가 있다. 그러한 알레고리를 통하여 반사적으로 자기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마구 희화(戱化)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초라한 모습으로 무대 위에 올려진다. 때로는 도둑놈으로, 때로는 창녀로, 때로는 겁쟁이로, 때로는 달변의 유세객으로, 때로는 진지한 구도인으로, 한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둔갑된다. 그러나 나는 장자(莊子)속에 그려지고 있는 공자의 소설 속에서 매우 진실한 공자의 상을 본다. 이것은 좀 범인들이 생각키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의 서향(書香) 속에 좀 머리를 묵힌 자라면 수긍이 갈 수 있는 문제이다. 공자는 공자를 디펜드하려는 자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공자는 공자의 비판자들 속에서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낸다. 안회(顔回, 옌 후에이, Yan Hui) 속에는 공자가 보이지 않는다. 공자의 모습은 오히려 자로(子路, 쯔루, Zi-lu) 속에 있다. 공자와 좀 거리감이 있는 자공(子貢, 쯔꽁, Zi-gong)이나 재여(宰予, 짜이위, Zai-yu) 속에서 공자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묵자(墨子, 뭐쯔, Mo Zi)는 공자를 극렬하게 비판하지만 그 언설을 뒤짚고 보면 묵자야말로 공자의 충실한 후계자임이 분명해진다. 묵자는 공자의 충실한 신도였다. 공자의 집단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흉내내어 일어난 어떤 패시피스트(pacifist, 평화주의자)적인 용병집단이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결코 공자의 세계에서 멀리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다. 묵자가 말하는 겸애(兼愛)’절용(節用)’은 그 이데올로기적 외피를 벗기고 보면 이미 공자의 핵심적 사상에 속하는 것이다. 묵자는 공자의 핵심사상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독자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공자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하는 공자는 모두 비판의 대상으로서 희화된 공자의 외피들이다.

 

이러한 묵자의 확고한 안티테제로서, 양묵(楊墨)에 대한 유가(儒家)의 적통성을 확립하려고 했던 맹자(孟子, 멍쯔, Meng Zi)야말로 공자의 최대의 이단일지도 모른다. 맹자가 유교(儒敎, Confucianism)의 적통일지는 모르지만, 공자의 가르침(Teachings of Historical Confucius)에 대해서는 최대 이단일 수도 있다.

 

맹자에게는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의 공자가 없다. 인의(仁義)라는 도덕주의적 사상의 주체로서 추상화되어 있고 논리화되어 있고 형해화(形骸化)되어 있다. 마치 사도 바울에게 역사적 예수의 상이 없는 것과도 같다. 예수는 오직 부활이라는 자신의 케리그마를 정당화시켜 주는 이념덩어리일 뿐이다. 맹자에게도 공자는 삶의 예지의 역사적 전승이 아닌, 맹자 자신의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주는 이념일 뿐이다. 맹자의 이러한 추상적ㆍ이념적 공자상은 증자(曾子, 쩡쯔, Zeng Zi)에게서 받은 것이다. 증자는 공자의 14유랑장정의 고난길에 참여한 적이 없는 후기의 어린 제자이다. 증자는 공자를 한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증자가 공자를 만났을 때는, 공자는 이미 한 면만 쳐다볼 수밖에 없도록 높이 솟아있는, 너무도 인간적일 수 없는, 거목이었다. 증자는 공자의 추상적 한 측면만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아이였다. 맹자는 증자를 이어받아 공자의 대설(大說)을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맹자의 대설은 본래의 소설(小說) 정신에도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다.

 

 

 

 

 미자편을 만든 사람들

 

 

나는 오늘날의 논어의 틀이 미자(微子)편을 만든 사람들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의 학설을 깊게 공감한다(孔子傳, 東京: 中公叢書, p. 273).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자(微子)편은 분명 논어의 상층대에 속하는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장자학풍에 노출된 공문의 사람들에 의하여 꾸며진 이야기들일 것이다. 공자와 자로가 장자가 구현하는 어떤 은자들의 모습 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림들은 분명 후대의 날조일 것이지만, 그 설화들이 상징하는 것은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삶의 전환, 사상적 대오(大悟)의 계기들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이었다. ‘무지의 자각을 외친 소크라테스가 과연 얼마나 자신의 무지로부터 벗어났는지는 형량키 어렵다.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변증법적 종국이 그의 제자 플라톤의 기술 때문일지는 몰라도 너무 이데아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죽을 때까지 일순간도 자신의 무지를 벗어나려는 호학(好學)의 노력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었고 과정적이었다. 종국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끊임없는 사상적 비상(飛翔)의 한 차원을 미자(微子)는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자의 편집자들은 장자(莊子)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공자상을 극복할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장자류의 은자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고양된 성자 공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비상의 계기를 통해 논어는 자유롭게 편집된 것이다. 그래서 보다 생생하고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적인 공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만약 논어가 적통임을 주장하는 아성(亞聖) 맹자(孟子) 계열에서 편집되었더라면 훨씬 더 경직되고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서물이 되었을 것이다. 논어속에는 제자백가의 모든 원형이 숨어 있다. 논어는 결코 유교만의 성전이 아닌 것이다.

 

장자(莊子)가 희화하고 있는 공자의 모습은 공자의 본래모습이 아니라 바로 맹자계열에 의하여 도덕주의적으로 고착화되어버린 공자에 대한 모멸감의 분출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장자가 말하는 모든 논리는 노자를 원형으로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살아있는 공자의 원래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본시 유()ㆍ도()의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장자(莊子)의 자유분방한 설화문학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공자의 살아있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가 젊은 시절에 주()나라의 수도 낙양(洛陽, 루어양, Luo-yang)에 가서 노자(老子)에게 예()를 물었다하는 이야기도, 그 노자(老子)가 오늘날의 도덕경의 저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공자사상에는 이미 도가적(道家的) 본질이 함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인()이나 노자의 수()나 유()가 모두 유교 이전의 유()의 내면적 특질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이야기나 장자(莊子)의 이야기를 우리는 같은 평면에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이해의 한 지평이다. 공구(孔丘, 콩 치우, Kong Qiu)가 말하는 인()의 궁극적 경지나 장주(莊周, 주앙 저우, Zhuang Zhou)가 말하는 좌망(坐忘)이나 현해(縣解, 懸解)를 모두 그 깊은 내면에서 상통하는 가치로서 인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곽점(郭店, 꾸어띠엔, Guo-dian) 초묘죽간(楚墓竹簡)의 출현은 노자(老子)라는 텍스트에 관한 BC 300년 이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는 놀라운 사실 이외로, 14편에 달하는 방대한 유교전적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첨가하고 있어 우리에게 연구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14편 중의 한 편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예기치의(緇衣)라는 사실이 우선 눈에 띈다. 장수(章數), 장서(章序), 문자(文字) 상에 출입이 있지만 현존하는 치의의 고본형태가 확실하다. 오늘날 이 14편의 성격이 대강 예기의 저본이 된 고문(古文) ()131한서』 「예문지에 공자의 70제자의 후학들이 기록한 것으로 책 제목이 실려있다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그 일부는 자사(子思)학파 계열의 저작이 분명하다고 주장되고 있다. 하여튼 곽점초간의 출현으로, 예기가 한대에 성립한 것이라는 의고풍적 통념은 통용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것들이 예기의 원본인지는 알 수 없어도 예기를 구성하는 담론들이 이미 BC 4세기에 문헌으로서 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 사후 공자학단에서 전파되어 나간 사상이 매우 활발하게 토론되고 기술되고 있었던 전국시대의 발랄한 사상풍토가 매우 생생하게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곽점죽간에 포함되어 있는 어총3에 현행 논어의 두 구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비록 논어의 편집사실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논어를 구성하는 공자의 말씀자료복음서로 말하자면 로기온자료들이 BC 4세기에는 이미 기록되어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할 수도 있다. 논어()’는 살아있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의 로기온이다. ‘()’이란 예문지의 표현대로 로기온들을 수집하여 논란을 거처 편찬한 것[輯而論纂]’이다. 그러니까 불교경전에 비추어 말하자면 결집을 뜻하는 것이다. 일부 성급한 주장처럼 (결집)’의 시기를 함부로 끌어올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로기온자료)’는 상당히 오랜 시간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73년에는 하남성 정주(定州, 띵저우, Ding-zhou)에 있는 서한(西漢) 중산회왕(中山懷王) 유수(劉脩, 리우 시우, Liu Xiu)의 무덤에서 논어죽간이 발견되었다. BC 54년 이전의 초본(抄本)이며 장후론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문헌이다. 이 정주한묘죽간본 논어장후론과는 또 다른 노론 계열의 판본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單承彬, “定州漢墓竹簡本論語爲魯論考,” 韓民族語文學36.

 

이제 다시 한번 우리의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이 질문에 가장 포괄적인 대답을 제공하는 전기문학서로서 우리는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논구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속에도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총체적 상이 리얼하게 그려지고 있질 않다. 공자의 삶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나에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삶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공자가 노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 장면. ()대의 무량사(武梁祠) 석각(石刻)

 

 

 짱구와 잉어

 

 

공자세가(孔子世家)보다도 더 늦게 편찬된 것이지만, 왕숙(王肅, 왕 쑤, Wang Su, AD 195~256)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공자 19세에 송() 나라의 병관씨(幷官氏, 삥꾸안스, Bing-quan Shi)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아들 백어(伯魚, 뿨워, Bo-yu)를 낳았다. 공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당대의 국군(國君)이었던 노나라 소공(昭公, 자오꽁, Zhao Gong)이 사신을 보내어 접시에 커다란 잉어[鯉魚] 한 마리를 담아 보내왔다. 공자는 아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문득 소공(昭公)이 보낸 잉어를 보고 잉어[]’라고 이름지었다. 백어(伯魚)는 리()의 자()이다. 그래서 지금도 곡부(曲阜)에 가면 공부가(孔府家)의 연석(宴席)에는 잉어요리가 올라오지 않는다. 공씨(孔氏)들이 어쩌다 타지에서 잉어를 먹게 되면 그들은 지금도 그것을 잉어라 부르지 않고 홍어(紅魚)’라 부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곡부에서 지금도 사실 그대로 신봉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공자전기의 작가들이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청년 공자의 지위가 국군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의 저자 자사(子思, 쯔쓰, Zi-si)의 아버지의 이름이 리()라는 사실에서 추론해보아도 이런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공자는 20세경에는 계씨(季氏, 지스, Ji Shi)의 일개 가신(家臣)인 양호(陽虎, 양 후, Yang Hu)에게도 문전박대를 당할 정도의 ()’에도 못미치는 천민(賤民)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자신이 자신의 과거 시절을 회상하여 나는 젊었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吾少也賤]”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고, 사마천도 공자는 어렸을 때 가난했고 또 천한 사람이었다[孔子貧且賤]”라고 말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어떻게 해서 스무살의 천민 공자가 곡부의 판자촌 어느 한 구석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그 나라의 국군(國君)인 소공(昭公)이 경축의 사신을 보내 성대하게 은쟁반에 담긴 잉어 한 마리를 선사했겠는가? 곰곰히 생각해봐도 좀 터무니없다.

 

시골 사람들이 애를 낳으면 산후조리가 어려우니까 잉어를 한 마리 구해다가 폭 고아먹는 것은 우리 어릴 적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습속의 하나였다. 아마도 공자부인이 고생 중에 아이를 낳았기에 건강이 좋질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보다가 딱한 주변의 당골네나 촌장이 잉어나 한 마리 고아먹으라고 주었을 것이다. 천민 공자는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부인에게 잉어 한 마리 고아 멕이고, 아들 이름을 잉어라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아들 이름이 잉어[]’라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사고방식이 즉물적이고 천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어릴 때 천민들의 자식들 이름을 보면, ‘개땅쇠’ ‘말똥이그런 류의 이름이 많았다. 내가 살던 천안동네 행길가 끝에 살던 오두막집 자식의 이름이 붙뚜리였다. 그 이름의 유래인 즉, 자식을 낳아 놓으면 하두 어디로 돌아다니다가 없어지곤 해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요번에는 집에 좀 꼭 붙어있으라고 붙뚜리라 했다는 것이다. ‘붙뚜리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의 삶이 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이 얼마나 곤고로운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공자의 이름이 구(, 치우, Qiu: 언덕의 뜻)이다. 그 아비 숙량흘(叔梁紇, 수리앙 허, Shu-liang He)과 어미 안징재(顔徵在, 옌 정짜이, Yan Zheng-zai)가 니구산(尼丘山, 니치우산, Ni-qu-shan)에서 빌어 낳았다 해서 ()’라 했다는데, 기실은 그 공자의 머리 생김새가 펑퍼짐한 니구산의 언덕 모양을 닮아 머리 꼭대기 정수리부분이 좀 움푹 파이고 주변으로 두상이 퍼져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구()라 했다는 것이다[生而首上圩頂, 故因名日丘云. 世家). 사마천의 이와 같은 명료한 기술에 의하여 말하자면 공자의 이름은 언덕대가리’, 가장 친근한 우리말로는 짱구[]’. 아버지의 이름은 공짱구’, 아들의 이름은 공잉어’, 짱구의 아들 잉어의 탄생을 놓고 국군(國君) 소공(昭公)이 경하의 사절을 보냈다는 것, 그래서 공자가어(孔子家語)의 표현을 빌리면, ‘영군지황(榮君之貺, 임금의 경하를 영예롭게 생각)’하여 잉어란 이름을 지었다 운운하는 이런 식의 기술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신화적 기술양식과 그 픽션적 성격은 비슷하다. ‘짱구와 잉어라는 부자(父子)의 이름이야말로 우리가 그 출신의 비천함을 알 수 있는 너무도 명백한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국군(國君)의 공경의 대상으로 기술되는 사태는, 후대의 공자인식이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공자가 말년이나 사후에 점한 어떤 위치에 의하여 그 삶의 모든 사건이 유기적으로 일관되게 해석되어야만 했던 어떤 권위주의적 인식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자가 35세 때, 계평자(季平子, 지 핑쯔, Ji Ping-zi)와 후소백(郈昭伯, 허우 사오뿨, Hou Shao-bo)닭싸움[鬪鷄]’을 벌였는데, 서로 야비한 짓을 하다가 화가 나서 큰 싸움으로 비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소공은 후소백편을 들어 계평자를 쳤는데, 계평자는 맹손씨(孟孫氏, 멍쑨스, Meng-sun Shi), 숙손씨(叔孫氏, 수쑨스, Shu-sun Shi)와 연합하여 소공을 쳤다. 소공은 이에 크게 패하여 제(, , Ji) 나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이 사건을 공자가 제나라로 간 사건과 병치시키고 있다. 사실 닭싸움과 공자가 35세라는 사실은 전혀 무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가의 기술방식은 마치 공자 35세 시점에 어떠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이 공자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소공이 제나라로 패주한 사실과, 공자가 젊었을 때 한때 제나라로 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두 사실을 교묘하게 병치시켰다. 그래서 마치 공자가 패주한 국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계씨의 독재로 어지러워진 노나라를 떠나 국군을 보좌하기 위하여 제나라로 간 것처럼 위장시킨다. 그러나 공자는 대부간 닭싸움에의 불필요한 개입으로 패주했어야만 하는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소공을 보좌하러 같이 제나라로 가야만 할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공자가 그 후 제나라에서 한 행위들, 고소자(高昭子, 까오 자오쯔, Gao Zhao-zi)의 가신(家臣)이 되어 제나라의 경공(景公, 징꽁, Jing Gong)과 통()하려 했다든가, 제나라의 태사(太師)에게 소(, 사오, Shao)음악을 배웠다든가 하는 일련의 사건은 패주한 노나라 소공을 보좌한다고 하는 명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간 것은 소공이 십오 년 전에 아들 낳았을 때 잉어를 보내준 그 감격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을까? 소공과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암시로서 잉어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까?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바로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공자기술이 이렇게 정당화되기 어렵고 필연적 인과관계가 부족한 사태들의 그럴듯한 몽따쥬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러한 기술 속에서 살아있는 리얼한 공자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어려워진다.

 

 

초병정(焦秉貞)의 공자성적도(孔子聖迹圖) 7영광과 축하의 이름을 짓다(命名榮貺)

 

 

 공자가문 3대 이혼설

 

 

예기』 「단궁의 기록에 의하면 공짱구는 잉어를 낳은 부인 병관씨(幷官氏)와 이혼했다. 그 이혼한 부인(出母, 정확하게 내쫓긴 부인의 뜻)이 죽었을 때 일 년이 지나도록 잉어가 슬피 울었다[期而猶哭], 잉어가 그토록 슬피 운다는 소리를 듣고 공짱구는 화가 나서 너무 심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잉어는 곡을 뚝그치고 말았다. 그뿐인가? 잉어[]는 또 그의 부인과 이혼했다잉어가 죽은 후에 재가했다는 설도 있고, 이혼설도 있다. 그 부인은 위(, 웨이, Wei)나라로 가서 서씨(庶氏, 수스, Shu-shi)와 다시 결혼했다. 그러다가 위나라에 가서 재가(再嫁)한 그 잉어의 부인, 그러니까 중용(中庸)을 지은 자사(子思)의 엄마가 되는 셈인데, 그 부인이 죽었다. 그러자 자사가 그 소식을 듣고 곡부 공씨의 사당에서 슬피 울었다[子思之母死於衛, 赴於子思. 子思哭於廟]. 그러니까 자사의 문인들이 자사에게 와서 물었다.

어찌하여 서씨의 엄마가 죽었는데 공씨의 사당에서 곡을 하십니까?[庶氏之母死, 何爲哭於孔氏之廟乎]”

그러니까 자사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하면서 딴 집으로 가서 몰래 울었다는 것이다[子思曰: “吾過矣, 吾過矣.” 遂哭於他室].

그뿐인가? 자사도 또 이혼했다. 그 자사의 이혼한 부인이 죽었을 때 그 아들인 자상(子上, 쯔상, Zi-shang, 이름은 백)이 복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사의 문인들이 와서 선대(先代)에는 출모(出母)라도 상을 입었는데 왜 선생의 아들인 자상으로 하여금 상을 못 입게 하냐고 물으니까, 자사가 골이 나서, “그년은 내 마누라가 아니니까 자상의 엄마도 아니다. 복상할 필요없다고 잘라 말하는 광경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공씨가문에서 출모에게는 상을 입지 않는 전통이 자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故孔氏之不喪出母, 自子思始也].

 

공씨가문의 사람들이 짱구와 잉어, 이런 천한 이름을 소지한 신분의 사람들이다. 게다가 잉어의 아들 자사(子思)까지 삼대에 걸쳐 모두 이혼한 불행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정중심의 도덕원리를 표방한 유교의 패러곤(paragon, 표본)들의 실상이 과연 무엇일까? 짱구에 의하여 논어가 나왔고 짱구의 손자 자사에 의하여 희대의 위대한 철학서 중용(中庸)이 나왔고, 이것들이 모노가미(일부일처제) 가족윤리의 규범을 설정했다고 한다면, 그 규범의 주인공들의 사생활이 이와 같이 개차반이었다는 이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공자를 위대한 예악(禮樂)의 완성자로서 기리고자 하는 예기가 왜 이와 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기록하고 있는가? 이것은 과연 사실의 투영인가? 상상의 날조인가? 사실이라면 무당동네 판자촌에서 개차반으로 산 천민들의 이그러진 삶의 실상의 고발인가? 날조라면 과연 왜, 어떠한 목적으로 날조한 것일까? 이혼한 부인이지만 생모이기에 구슬피 흐느끼는 자식의 울음마저 그치게 만드는 이 졸렬한 인간상들 앞에 우리는 과연 어떠한 경외감을 느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공자의 얘기들을 위대한 경전 속에서 읽고 다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 덮었어야만 했을 과거 조선의 유생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했을까?

 

 

 

 

 인성과 신성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과연 악처(惡妻)였을까?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였다는 사실을 통해 반사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철인(哲人)으로서 위대해졌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공자 삼대에 걸친 가족사의 비극은 공자 삼대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어떤 반사적 장치였을까? 나는 공자를 둘러싼 이와 같은 끝도 없는 이야기들의 실상을 파헤치려는 노력 그 자체의 허구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이든, 단궁의 기록이든, 장자(莊子)의 기록이든, 이 모든 것이 사실의 르뽀([reportage)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양식(Form)목적론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기록의 사실여부에 대한 추정에 앞서 근원적인 어떤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단궁의 상기의 기록은 예의 근본이었던 상례(喪禮)를 둘러싼 어떤 양식적 논의 속에서 공패밀리의 인물들이 드라마틱한 구현체로서 설정된 것일 뿐이다. 진위(眞僞)의 논변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세칭(世稱)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경우, 반드시 그 정체를 폭로하고 그 가면을 벗겨내리고 그 신화적 의미를 깎아내리는 짓을 통해서만, 그들의 실상이 드러나고 실증사학의 정신이 성취된다는 그러한 단순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목적이 저속화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파헤치고 있는 과정은 단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공자라는 인간, 그 인간의 삶과의 만남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분개할 것이다. 그 질문 자체가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너무도 신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논의를 뛰어넘는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는 상상 속에 날조된 인물일 수밖에 없다. 가버나움의 시몬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 예루살렘의 타락한 성전을 뒤엎어 버리고, 가롯 유다의 배반 속에 로마병정에 팔려 넘김을 당하고, 십자가라는 형벌 속에서 죽고, 다시 돌무덤을 열고 부활의 영광을 보인 그 예수, 벤허와 같은 수없는 당대의 인물들이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을 그 예수의 역사적 실존성을 거부한다면 기독교의 존립근거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든, 성령스러운 빛의 화현(化現)이었든, 죽어도 죽어버리지 않고 다시 부활하는 로고스(λόγος, Logos)였든지 간에, 그 예수가 역사 속에 실존한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신성(divinity)100퍼센트 인정하는 만큼 예수의 인성(humanity) 또한 100퍼센트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반신반인의 어중간한 신화적 존재일 수는 없는 것이다.

 

복음서 속에서도 예수는 연민하고 분노하며 먹고 마신다. 갈릴리의 소외받은 연약한 민중들과 희노애락을 공유하며 그들과 공감하는 일상적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였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게걸스러운 먹보(glutton)’, 그리고 술주정뱅이(drunkard)’로서 인지되었다(11:19, 7:34), 세례 요한은 금식과 금욕을 일삼았지만 예수는 잔치를 즐겼다(John fasts, Jesus feasts. J. D. Crossan, Jesus, 48). 이러한 인간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의 최종적 존립근거인 성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나 공자나 우리와 같은 동일한 일상성 속에서 그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자의 삶에 관한 기록을 전달하는 문헌이 그 일상적 현실감각을 결하는 어떤 양식이나 케리그마의 소산이라는 데 그 근원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우리의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을까? 그 삶의 과정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문헌인 공자세가(孔子世家)가 결코 이러한 문제에 시원한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면 과연 다음의 접근방식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사기(史記)외에 다른 문헌이 있는가?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논어라는 문헌인 것이다.

 

공자는 공자세가(孔子世家)속에도 예기속에도, 여타의 어느 문헌 속에도 없다. 공자는 오직 논어속에만 살아 있다. 나는 논어이상의 진실한 공자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공자세가(孔子世家)도 결국 논어의 어(, 로기온자료)를 의미있게 만들기 위하여 역사적 사건들을 배열했을 뿐이다. 로기온파편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그럴듯한 역사적 사태들을 구성해낸 것이다. 그러나 논어속에는 공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공자의 숨결이 생동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대로 노양공(魯襄公, 루 시앙꽁, Lu Xiang Gong) 22(BC 551)에 탄생했는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나 곡량전(穀梁傳)의 기록대로 노양공 21(BC 552)에 탄생했는가? 이러한 논쟁은 학자들에 따라 끊임없는 고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공자가 BC 551에 태어났든, BC 552에 태어났든, 공자의 이해나 공자를 둘러싼 역사의 이해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사태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가능한 사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이 논어의 위대성에 크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어가 말하고 있는 공자의 사실이야말로 구극적으로 살아있는 공자에 관한 사실인 것이다. 공자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일차적으로 논어를 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주장은 또 다시 인식론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노정(露呈)시킨다. 논어그 자체가 공자의 삶의 직접적 전달은 아니라는 것이다. 논어, 공자가 직접 쓴 것도 아니고, 공자의 직전 제자들이 편찬한 것도 아니다. 공자 사후에 오랜 세월에 걸쳐 공자문인들의 다양한 유파에 의하여 성립한 단편들이 집적된 것이다. 그렇다면 논어공자세가(孔子世家)나 여타문헌에 비해 그 오리지날리티를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매우 희박해진다. 어찌 논어만이 공자의 진실한 모습을 전달한다고 호언할 수 있단 말인가? 논어도 공자가 죽은 후 삼사백년 후에나 편집된 것이라고 한다면.

 

 

 

 

 논어의 Q와 안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논어는 유교의 이단서이다. 논어야말로 성인공자의 최대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논어가 유교의 이단이라 함은, 유교를 국가종교(state religion)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 유교를 절대적인 권위체계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의 정직하고 비권위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은 이단으로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어가 성인 공자의 걸림돌이라 함은, 공자를 성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에 비치는 너무도 인간적이고 변화무쌍한 희노애락의 공자상은 성인화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어에 있어서처럼 한 인간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펼쳐진 문헌은 고대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서구문명의 고전을 이루는 대부분의 문헌이 초자연적 설화나 신화적 각색을 탈피하지 못한다. 논어는 인류문명사의 한 축복이다.

 

논어는 분명 공자사후에 제자들의 활약으로 분기되어나간 여러 학파들의 전승, 또 공자를 흉내내는 유사집단들에게 화제가 된 전승 등을 통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집적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논어텍스트는, 공관복음서의 ()마가자료Ur-Markus, 현존하는 마가이전의 마가조형으로서 공관복음서 모두에게 영향을 준 가상적 원초자료‘Q자료Quelle, 마태」 「누가에 공통되면서 마가에는 없는 자료, 그러니까 마태, 누가는 마가두 자료를 보고 복음서를 집필했다. 두 자료가설, The Two-Document hypothesis[TDH]와 같이, 어떤 공자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하는 초기자료, 즉 이미 공자의 생전부터 기록되었을지도 모르는 원()자료들이 상당 부분 그 기저에 남아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공자는 천민출신의 개비적 인간이었지만, 그의 최대의 강점은 문자를 활용하는 능력과, 문헌을 다루는 실력에 있었다. 그의 제자집단(공자운동집단)이 강력한 유대감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문자적 표현의 학습과정에서 획득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문아(文雅)한 측면을 가장 잘 계승한 제자는 안회(顔回)’였다. 그러나 안회는 불행히도 장년의 나이에나는 안회의 죽음의 나이를 30세 전후로 보지 않고, 40세 전후로 본다,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만약 안회가 공자 사후에 장시간 살아남았더라면, 오늘 논어의 모습은 보다 전일하고 체계적인 성격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안회의 요절은 공자에게 저주이자 축복이었다. 안회가 요절하지 않고 오래 살아남아 공자의 말씀을 꼼꼼히 편집했더라면 논어는 안회의 인식의 울타리에 갇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회의 요절은 공자를 안회의 인식의 울타리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나 논어에는 분명 안회의 오리지날한 기록의 파편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공자와 자로(子路, 쯔루, Zi-lu)와의 대화는 그 생생한 캐릭터의 모습과 내면적 심성에서 북받쳐 우러나오는 진실이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공자와 자로의 대화는 그 상당 부분이 안회가 살아있을 때 기록해 놓은 매우 초기의 생생한 파편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논어라는 텍스트의 경우 정확하게 공관복음서 문제(Synoptic Problem)와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같은 자료의 다른 전승이라는 비슷한 문제가 논어에도 개재되어 있다. 그러나 논어는 공자의 어록일 뿐이다. 복음서 또한 예수의 어록이지만, 논어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말을 케리그마적 의미체계로 둔갑시키는 삶의 내러티브(narrative)를 전제로 해서 배열되고 있는 어록인 것이다. 그 내러티브는 당연히 예수의 삶의 일정한 시간적 서열이라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공관복음서의 원자료라고 생각되는 마가복음은 매우 직선적인 시간서열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세례 요한의 이야기

2) 예수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

3) 예수의 갈릴리 선교

4) 유대지방에로의 여행

5) 예루살렘에서의 클라이막스

6) 수난의 내러티브

7) 빈 무덤의 발견

 

마가에는 예수처녀탄생 설화나 예수의 부활이야기가 없다.

 

마태누가는 이러한 마가의 틀을 기본적으로 준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가의 자료에다가, 앞을 서로 다른 예수탄생 설화로 장식하였고, 후미를 또 서로 다른, 부활한 예수의 현현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리고 마가에 없는 어록자료 큐와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다른 자료들을 첨가시켰다.

 

그러나 논어는 이러한 공자의 삶의 시간서 열적 구조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어록의 상황은 그 상황을 만들고 있는 캐릭터나 사건들에 의하여만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복음서에 가까운 것은 논어가 아니라 공자세가(孔子世家). 만약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와 같은 것이 동시대의 여러 사가들에 의하여 비슷한 시기에 집필되었다면 공자도 예수처럼 공관복음서문제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명료하게 인지해야 할 사실은 노론(魯論)’ ‘제론(齊論)’ ‘고론(古論)’의 문제가 결코 공관복음서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다른 전승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어라는 서물이 편집된(상한이 전국말) 이후에 제나라와 노나라 지역에서 각기 통용되던 약간 상이한 판본의 배리에이션 정도의 문제일 뿐이며, 편집되기까지의 다른 전통을 과시하는 전승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제론이라고 해봐야 노론에 비해 문왕(問王)」 「지도(知道)두 편이 많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두 편의 내용은 장후론이 성립할 때 이미 노론 체제 속에 흡수되어 장후론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니까 논어의 전승은 어디까지나 노론 중심일 수밖에 없다. 고론(古論)이라는 것도 많은 사람이 논어 그 자체의 옛 전승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고론은 옛 논어가 아니라 단지 금문(今文)이 아닌 고문(古文)으로 쓰여진 것으로서, 후대에 발견된 판본이라는 뜻이다. 소위 공벽(孔壁)에서 나왔다는 것인데 그 진실성 여부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분석하여 보면 허구적 풍문에 기초한 것일 수 있으며, 실체의 확인이 근본적으로 난감하다. 하여튼 삼론(三論)의 문제는 춘추전국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한대(漢代)의 문제의식일 뿐이다. 그리고 삼론의 차이가 공자에 대한 이미지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그러한 내용의 차이는 없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도마복음서큐복음서의 출현과 같은 사태를 논어의 판본의 세계에서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논어의 편 사이에 있어서도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고, ‘자왈(子曰)’계씨편이나 다른 곳에서 공자왈(孔子曰)’로 바뀌는 등 다양한 양식적 변화가 감지되며, 1인칭, 2인칭, 조사 등의 다양한 변화가 있고, 또 각 편에 따라 특이한 주제전개방식이나 기술형식의 다양성이 있으며,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문헌에 동일한 주제가 달리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공관복음서에 적용되는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나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과 유사한 문제의식으로 텍스트를 접근할 수도 있다. 성서의 경우는 아람어나 히브리어 자료를 희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에서 이미 다른 버젼의 문제가 생겨났겠지만, 논어의 경우는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제국간에 말은 달라도 문자는 어느 정도 공통되었을 것이다. 동일한 구문이 여러 텍스트에 나오고 있다는 것은 동일한 초기 파편의 유통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떤 프로토 텍스트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전승의 차이가 기독교복음서에 있어서처럼 근원적인 케리그마의 패러다임적 변화를 수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어도 현행 논어의 보충자료가 될지언정, 현행 논어의 패러다임을 바꿀만한 사태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신화와 상식의 차이를 오가는 비약적 관점변화의 문제가 아니라, 공통된 인문학적 상식내에서의 관점의 차이 정도에 머무르는 문제일 것이다.

 

현존하는 논어20편은 그 편제가 일찍 확정된 것이므로, 각 편마다 어떤 주제적 통일성이나 시공적 균일성이나 전승의 독자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편의 각 내용이 이러한 독자적 성격을 말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각 편들의 편집 시기는 각기 한 시점으로 규정할 수 있어도, 한 편의 전승의 내용의 성격은 도저히 균일한 것으로 묶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이미 학이(學而)’술이(述而)’니 하는 식으로 의미론적 구조와 관계없이 첫 두 글자만을 따서 편명을 삼았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어떤 일관된 주제를 내걸기에는 너무도 그 내용이 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각 편의 편해에서 상술하겠지만 각 편의 이름은 우연적인 요소로만 보기에는 매우 치밀한 편집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편명이 세 글자인 경우도 두 편이 있다.

 

논어의 모든 편의 편집시기를 세밀하게 재구성한 최근의 브룩스E. Bruce Brooks 白牧之 and A. Taeko Brooks 白妙子의 역작(力作), 논어변(論語辨)The Original Analect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이 있다. 이 책은 매우 광범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치밀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엄밀하게 검토하여 보면 좀 황당한 가설들에 기초하고 있다. 이 책은 그 노력의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논어에 대한 왜곡일 수도 있다. 논어각 편의 편집시기를 연도별로 세밀하게 구성한다는 것은 논어의 경우 많은 무리가 뒤따른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편집되었든지 간에, 그 편집된 내용이 곧 그 편집 시점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각 편을 구성하는 어록의 파편이 공자의 삶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체험을 반영하는가 하는 것이 보다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것도 근원적으로 정확한 논의가 불가능한 것이다. 공자의 삶의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에니그마(enigma, 수수께끼)에 속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불가지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학문은 정밀성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지만, 고전 텍스트의 경우, 정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왜곡도가 높아질 수도 있다는 파라독스를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의 삶은 정밀한 분석이 불가능하다. 공자의 삶은 어차피 현재의 시점에서 끊임없이 재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마가복음의 패션 내러티브(Passion narrative, 수난 이야기)처럼 어떤 교리적 케리그마의 구조에 갇혀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개방된 인문학의 장()이다. 논어자체가 우리에게 신화적 도그마를 강요하지 않는다.

 

 

북한이 평양시 낙랑구역 한 목관묘(木槨墓, 귀틀무덤)에서 발굴했다는 사실만을 지난 1992년에 간단히 보고한 죽간논어(竹簡論語, 대나무 조각에 쓴 논어). 2009년에 비로소 실물이 공개된 이 죽간은 논어 중에서도 선진(先進)과 안연(顔淵), 두 편을 묵서(墨書)로 적은 텍스트로, 정백동(貞柏洞) 364호분이 출토지며, 정확한 출토량은 39매로 밝혀졌다. 2009.11.29 연합뉴스

 

 

 이인술이, 상론과 하론

 

 

상식적 느낌 이상의 정밀한 논의는 아니지만, 언뜻 이인(里仁)편이나 술이(述而)편과 같은 것은 공자의 어록으로서는 매우 초기자료일 것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이인(里仁)이 두 개의 파편(15, 26)을 빼놓고는 모두 간결한 자왈(子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든가, 술이(述而)편의 내용 또한 중간 중간에 ()’로 시작되는 공자의 일상적 삶의 자세나 용태(容態)가 삽입되어 독특한 편집양식을 과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공자 스스로의 삶의 철학에 관한 자술(自述)이며, ‘자왈子日"의 간결한 형식으로 편집되어 순결한 공자의 원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노나라에서 비교적 초기에 편집된 공자격언집 같은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각 편에 즉()하여 논의될 것이다.

 

상론(上論, 1~10)과 하론(下論, 11~20)의 구분도 결코 엄밀한 구분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상론에도 후대의 파편이 편입되어 있고 하론에도 초기의 파편이 편입되어 있는 사실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론이 그 정편(正篇)이며 하론이 그 속편(續篇)이라고 하는 이토오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상ㆍ하론논의는 그 확실한 근거를 찾기도 어려우며 실제로 무의미하다. 상론의 마지막 편인 향당(鄕黨)편이 그 내용이 매우 특수한 성격임에 비추어, 상론을 마감하는 의도로 말미에 붙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황간소(皇侃疏)에 의하면 한()시대에 전승되고 있던 고문(古文)학파 텍스트 고론의 체제 속에선 향당(鄕黨)편이 학이(學而)편 다음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어, 그 편제의 실상을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론과 하론의 구분은 방편상 유용한 논의로서 수용될 수도 있다. 상론과 하론에서 각각 대체적으로 일관되는 어떤 분위기를 감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상ㆍ하로 구분짓기에는 역시 어려운 문제가 많다. 내 느낌으로 상론 맨앞에 나오고 있는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편은 오히려 하론적 성격이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우풍영의 날조

 

 

논어를 읽을 때, 간결한 자왈(子曰)’의 형태를 취하거나, 제자들의 자()를 직접 호칭하거나, 노나라 밖으로 출사(出仕)하지 않은 직전제자의 전승이나, 공자보다 일찍 죽은 안회나 자로가 등장하는 파편과 같은 것들은 대체로 고층대에 속하는 파편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공자왈(孔子曰)’한다는 것은 공자학단 밖의 사람들이 공자를 객관화시켜 부르는 말이므로 후대의 전승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러 사람사이에서 오가는 기다란 대화형식을 취한 것, 아규먼트(argument, 주제)의 성격이 강한 것, 그리고 드라마적인 구조를 갖춘 것들은 대체적으로 후대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진(先進)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자로(子路)ㆍ증석(曾晳)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가 공자를 시좌(侍坐)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특기할 사실은 중석(曾晳)의 답변이 제일 나중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의 무우풍영(舞雩風詠)’의 답변내용만을 공자가 허여(許與)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로ㆍ염유ㆍ공서화 3인이 나가고 난 후에 증석 혼자만이 공자 곁에 남아, 공자와 사적인 정담을 나누며, 나간 3인의 답변내용을 분석검토하는 공자의 멘트를 듣는다. 이것은 명백히 공자 교단내의 증석의 위치가, 자로ㆍ염유ㆍ공서화에 비해 한 레벨 높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증석에 대한 허여의 차원이 타 3인과는 질적으로 격상되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로를 내보내놓고 자로 등 뒤에서 공자가 증석과 멘트를 나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불성설의 상황이다. 여기에 모종의 음모가 감지된다. 증석은 증자의 아버지다. 맹자(孟子)는 바로 증자계열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이다. 이 파편은 증자 - 맹자 계열에서 증석 - 증자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꾸민 드라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진(先進)25 본문에서 자세히 분석하겠지만 기존의 파편들을 조합하여 새롭게 공자상을 구성한 증자학파외의 작품일 수도 있다. 증석은 증자의 아버지가 아닌 전혀 가상적 인물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증자가 들은 공자의 말로서 기록되고 있는 파편들은 대부분 후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조작적 성격이 강하다. 증자는 공자 최만년에 입학한 제자였으며 공자와 직접 심오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위치에 있었을 기회가 없었다. 이인(里仁)15편의 그 유명한 일이관지(一以貫之)’에 대하여 증자가 충서(忠恕)’ 운운한 종류의 파편도 그 실제상황이 의심되는 것이다. 증자계열에서 자파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드라마이며 역사적 공자의 원래사상을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충서를 공자사상의 일관된 본질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논어를 분석해 들어가는 작업은, 끊임없이 재미있는 텍스트의 비평(textual criticism)의 묘미를 제공할 수도 있고, 텍스트의 원형을 복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또 텍스트의 무한히 가능한 새로운 배열이나, 텍스트 자체의 교정이나 변형에 의한 새로운 의미의 발굴을 가능케 해줄 수도 있지만, 최종적인 문제는 이러한 문헌비평의 궁극적 성과가 과연 논어의 오리지날리티를 바르게 변()할 수 있으며 더 나은 공자의 이해로 우리를 다가가게 하는가,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질문에 매우 회의적 답변을 내린다. 논어그 텍스트를 아무리 분석해도, 논어를 아무리 재배열해도, 논어를 아무리 변형시켜도, 우리의 시각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공자의 말씀이라는 어떤 오리지날리티로 우리를 데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변형된 텍스트가 있는 그대로의 텍스트에 비해 더 우수하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무수한 고증학자들의 땀방울이 황하의 물결처럼 도도히 흐르기만 하는 논어의 탁류 속에 족적없이 명멸할 뿐이다.

 

우리가 해석해야 할 것은 논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논어, 이천여년을 묵묵히 흘러내려온 논어라는 의미체계, 이미 역사 속에서 수없는 인간들의 의식의 장 속에 새겨진 텍스트 그 자체의 해석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논어라는 텍스트는, 이미 그 오리지날리티의 시비를 떠나,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공자라는 관념을 형성시킨 것이다. 논어로 돌아가자!(Return to the Analects!)

 

논어그 자체로 회귀하라는 나의 외침은 매우 소박한 요구이지만, 이러한 소박한 요구는 결코 소박하지가 않다. 논어라는 텍스트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텍스트의 이해는 공자 그 인간에 대한 선이해(先理解, Pre-Understanding)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텍스트의 의미가 맥락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선이해는 또 다시 논어라는 텍스트에서만 발현되어야 한다고 하는 파라독스에 우리는 봉착한다. 결국 이러한 파라독스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논어라는 텍스트와 공자라는 인간 사이를 왕래하는 우리 인식의 변증법적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는 시험적인 모델들을 요구한다. 논어는 분명 공자라는 인간의 삶의 구조 속에 던져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공자의 삶의 구조를 변증법적으로 전제할 것인가?

 

 

 

 

 공자의 출생

 

 

앞서 누누이 말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공자의 삶의 역사적 사건의 나열이나 그 사실성의 여부에 대한 논의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한 사실(史實)들을 거점으로 해서 펼쳐지는 인간 공자의 가능한 심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공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선 그 출생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그 이해의 실마리를 추적해보자!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공자는 숙량흘(叔梁紇, 수리앙 허, Shu-liang He)’을 아비로, ‘안씨녀(顔氏女, 옌스뉘, Yan-shi-ni)’를 어미로 태어났다. 이 두 개의 표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아비는 성()이 없고 그 어미는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숙량(叔梁)은 자(), ()은 명()이다. 그런데 그 아비를 부를 때 공흘(孔紇, 콩 허, Kong He)이라 아니 부르고, 숙량흘(叔梁紇)이라 부르는 것은 왠지 어색하다. ‘중니구(仲尼丘)’자로유(子路由)’라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춘추이전(春秋以前)에 이렇게 자()와 명()을 합쳐 부르거나, ()직명과 명()을 합쳐 부르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컨대 그 숙량흘의 족보를 따져 올라가는 모든 논의가 후대의 날조라는 인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공자의 증조부가 노나라 장손씨(臧孫氏, 짱쑨스, Zang-sun Shi)의 채읍(采邑)인 방읍(防邑, 황이, Fang-yi)의 읍재(邑宰)를 함으로써, ()나라에서 몰락한 귀족이지만 노()나라에 망명하여 와서 평민화(平民化)된 지위를 떨쳐버리고 귀족신분을 회복했다. 그래서 그를 사람들이 방숙(防叔)’이라 부르고, 그 앞에 공()이라는 애칭을 덧붙였는데, 그 후에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으로써 성()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공이라는 성은 실제로 공자가 유명해짐으로써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그 아버지대에까지도 성이 없었던 어떤 평민족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아버지 이름이 성이 없는 숙량흘이 된 것이다. 이것은 곧 공자가 유명해져서 성이 생겨나기 이전의 어떤 진실을 전하는 이름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내가 여기서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숙량흘이 추읍(鄹邑, 쩌우이, Zou-yi)의 대부(大夫)였다는 등등의 논의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의 족보를 귀족화시키기 위한 이러한 설화적 이야기를 일체 기록하지 않았다.

 

안씨녀(顔氏女)’의 정체는 무엇인가? 전승되어 내려오는 여러 설화에 의하면, 곡부성 내에 글 쓸 줄을 알고 예에 통달한 안양(顔襄, 옌 시앙, Yan Xiang)이라는 훌륭한 노인이 있었다. 그에게 세 딸이 있었는데, 그 막내의 이름이 안징재(顔徵在)였다. 이 현숙한 셋째 딸이 바로 안씨녀다. 숙량흘은 원래 부인 시씨(施氏, 스스, Shi-shi)가 있었는데, 이 첫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아홉이나 낳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들 모두가 딸이었다. 팔공주가 아닌 구공주였던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려면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은 어김없는 당시의 통념이었다.

 

그래서 부인을 하나 더 얻었다. 그래서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아뿔사, 불행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은 맹피(孟皮, 멍피, Meng-pi)라 했는데 선천성 기형의 절름발이가자(瘸子), 공자가어(孔子家語)』 「본성해(本姓解)에는 병족(病足)’이라 표현였다. 공야장(公冶長)1에 보면 공자가 자기의 제자 남용(南容, 난 르옹, Nan Rong)온전한 이름은 남궁자용(南宮子容)에게 형의 딸을 시집보낸 이야기가 나오는데, 공자에게 이 있었다는 것은 논어의 문맥상 입증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공자의 자()중니(仲尼)’인데 중()이란 둘째 아들의 뜻이다. 중니란 곧 니구산(尼丘山)에서 빌어 얻은 둘째 아들이란 뜻이다. ()은 맏맹 자이고, 맏아들의 뜻이다. ‘(: 가죽의 뜻)’라는 이름은 간접적으로 불구자의 뜻을 시사한다. 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맏가죽(孟皮)’이란 이름을 붙여주었겠는가?

 

그래서 숙량흘은 셋째부인을 얻으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곡부의 안양(顔襄) 노인에게 가서 딸 하나를 달라고 간구한다. 그때 이미 숙량흘은 70세에 가까웠다. 첫째 딸은 청혼을 거절한다. 둘째 딸도 거절한다. 우선 나이가 많아 골골하게 보이는 숙량흘에게 시집갈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셋째 딸은 육감이 달랐다. 무엇인가 신의 뜻을 감지했다는 것이다. 안징재는 기꺼이 숙량흘에게 시집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從父命爲婚]. 그때 안징재의 나이는 꽃다운 이팔(二八), 16세의 청춘이었다. 복사꽃 만발하는 봄날의 향기가 흐드러지는 니구산(尼丘山)에서 70노인과 16세의 새악씨가 아들 낳아 달라고 빌러가는 뒷모습을 연상하는 우리의 가슴속엔 태고의 낭만이 서린다.

 

사마천은 공자세가(孔子世家)1에서 이 두 사람의 결합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숙량흘과 안씨녀는 들에서 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니구에서 빌어 공자를 얻은 것이다.

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禱於尼丘得孔子.

 

 

이 표현에서 역대 주석가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야합(野合)’이라는 한 마디였다. 색은(索隱)야합이라 함은 숙량흘이 늙었고, 안징재가 어려서, 머리 얹고 비녀 꽂는 예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야합이라 했다고 했다. 곧 정식의 예의에 합당한 결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正義)는 보다 관념적인 해석을 내렸다. 소문(素問)』 「상고천진론(上古天眞論)의 의학적 상식을 인용하여 남자는 팔팔(八八) 64세면 양도(陽道)가 절()하는 법인데 숙량흘의 나이 64세를 넘어 정식 혼인(婚姻)이 성립할 수 없으므로 야합(野合: 억지 결합)’이라 한 것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결국 우리는 야합이라는 말이 통례적인 예의에 합당치 않은 결혼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적나라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의 해석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사실을 단순한 사실 그대로, 단순한 표현을 단순한 표현 그대로 읽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들에서 합한다는 뜻이다. ()에는 이라는 뜻 이외로도, ()이 문()을 승()하면 야()하다 했고[옹야], 자로의 인간됨을 야()하다 했고[자로], 선진(先進)의 예악이 야()하다 했으니[선진] 대체적으로 문아(文雅)하지 못한 행동을 일컫는 것이다.

 

공자의 전기를 연구하는 사계의 대부분의 석학들이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안씨녀는 무녀(巫女)였다. 안씨 집안은 무속과 관계된 집안이었다. 안씨녀의 부친도 아마 큰 만신이었을 것이다. 안씨녀가 죽었을 때 그녀를 빈()오보지구(五父之衢, 우후우즈취, Wu-fu-zhi-qu)라는 곳이 바로 노성내(魯城內)에 상례(喪禮)를 전담하는 당골네 님들의 집성촌락이었다.

 

 

 니산치도(尼山致禱)

 

 

 숙량흘의 무용담

 

 

숙량흘에 관해서도 많은 무용담이 전하고 있다. 우리가 공자라는 한 인간을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그의 덩치다. 지금도 산동 사람들이 체구가 크기로 유명하다. 일메타 팔구십 되는 대한(大漢)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산똥따한(山東大漢, Shan-dong da-han)이라는 말이 있다.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3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공자는 키가 아홉척하고도 여섯촌이나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모두 키다리라고 불렀다. 정말 그를 볼 때마다 기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孔子長九尺有六寸, 人皆謂之長人而異之.

 

 

96촌을 정확히 주제(周制)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주제의 1척은 약 22.5cm이다. 그렇다면 9척만 해도 공자의 신장은 2m 2cm가 된다. 그러니까 공자의 신장은 정확하게 2m 10cm가 넘는다.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라고 불렀는데 그를 볼 때마다 기이하게 생각했다[人皆謂之長人而異之]’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러한 치수가 결코 과장되었거나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자를 생각할 때 우리는 농구선수 서장훈과 같은 덩치를 정확히 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염달린 사막의 목동, 아담한 덩치의 예수 이미지와는 전혀 느낌이 다른 거한(巨漢)을 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러한 사실은 공자라는 인간의 인간됨의 핵심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이 공자의 덩치는 공자의 행적의 모든 사실에 깊게 스미어 있다. 공자의 엄청난 정열, 기나긴 방황, 세간에서의 결단과 초세간적 승화의 모든 사실이 바로 이 체구, 이 체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자의 체구는 바로 그의 부친 숙량흘에서 유전되어 받은 것이다. 노양공 10(BC 563) 봄의 일이다. 진국(晉國)이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노()ㆍ조()ㆍ주() 삼국과 연합하여 지금의 산동성 조장시(棗莊市, 짜오주앙스, Zao-zhuang Shi)에 자리잡고 있었던 핍양(偪陽, 삐양, Bi-yang)이라는 작은 나라를 침공하였다. 이때 숙량흘은 맹헌자(孟獻子, 멍 시엔쯔, Meng-Xian-zi) 막하의 진근보(秦堇父, 친 진후우, Qin Jin-fu, 혹은 진동보秦董父), 적사미(狄虒彌, 띠 쓰미, Di Si-mi) 두 장수와 함께 출전하여, 핍양성의 북문을 공타(攻打)한다. 핍양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핍양군(偪陽軍)은 술책을 쓴다. 성의 북문이 위로 들어올리는 갑문(閘門)이었는데, 이 문을 들어올려 적장과 부하들을 성내로 유인시킨 후에 성내에서 몰살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갑문이 서서히 들어올려지고, ()ㆍ적() 휘하의 부대는 성내로 돌격한다. 이들이 성내로 진입했을 때 갑문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술책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 때였다. 이것이 계책이라는 것을 깨달은 숙량흘은 성문 아래 정 가운데 우뚝 서서 두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아틀라스처럼, 내려오는 갑문을 치켜올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퇴각을 호령하는 것이다. 이 덕분에 노군(魯軍)은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공자가 태어나기 12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 7년 후, 노양공 17(BC 556), 이웃 강대국인 제국(齊國)은 노나라의 북부변경을 침략한다. 제국의 장수 고후(高厚, 까오 허우, Gao Hou)는 막강한 세력으로 노국의 대장인 장흘(臧紇, 짱 허, Zang He, 장무중臧武仲)과 숙량흘을 방읍(防邑)에서 포위한다. 보급이 차단되고 위기에 몰린 노군은 원군을 요청했다. 원군은 양관(陽關, 양꾸안, Yang-quan: 태안泰安의 동쪽)으로부터 진공을 시도했지만 제군(齊軍)의 엄중한 포진을 뚫을 수 없었다. 이때, 숙량흘은 대장 장흘의 두 형제인 장주(臧疇, 짱 츠어우, Zang Chou)와 장고(臧賈, 짱 꾸, Zang Gu)와 더불어 300여 명의 용사를 데리고 제국의 포위망을 뚫는 작업을 감행한다. 숙량흘의 무용 앞에 막강하던 제군의 포위망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얘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숙량흘이 힘이 막강하고 용맹스러운 거대한 체구의 무인(武人)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어떠한 족보와 혈통의 사람이든지 간에 매우 명백한 사실은 숙량흘은 거대한 체구의 무인이었고, 그 체격을 공자가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공자의 탄생에 관하여 아주 단순한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다.

 

야합(野合)’이란 아주 단순하게 새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들판에서 한다는 뜻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술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아주 단순하고 최종적인 사실은 이것이다. 무명의 늙은 무사 한 사람과 무명의 젊은 무녀 한 사람이 들판에서 합하여 남자아기 하나 얻었다. 그것이 모든 역사의 시작이었다.

 

예수가 왜 하필 그 더러운 말 구유깐에서 태어나야만 했는지, 마리아가 요셉과 동침한 사실이 없었다면, 인간 예수의 탄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AD178년경 이방인 철학자 켈수스(Celsus)는 예수가 마리아와 식민지 주둔의 로마 보병(a Roman legionary)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당시의 초대교회에 퍼져있던 소문을 들추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경 야고보서는 예수의 엄마 마리아를 헬레니즘시대의 성전의 한 창녀로서 기술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초대교회역사에 있어서는 다반사(茶飯事)였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초월적 권위가 정착되기 이전에는, 예수에 관하여 풍문으로서 떠도는 항담(巷談)은 끝이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진위나 불경을 논하기 전에 인류역사에 실존한 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탄생에는 이미 그 탄생부터 불운이나 고난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예수의 탄생이나 공자의 탄생이나 모두 순탄한 시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야합과 비지팅 허스밴드

 

 

야합(野合)’이란 표현은 내가 생각키로 요즈음의 인류학 용어를 빌리면, 아마도 비지팅 허스밴드 매리지(visiting husband marriage)’ 형태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숙량흘은 첫 부인ㆍ둘째 부인과 이미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고, 셋째 부인인 안징재는 그와는 별도로 니구산(尼丘山) 산자락에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어, 숙량흘은 안징재가 있었던 그곳으로 가끔 통근을 했을 것이다이런 제도를 인류학에서는 방혼(訪婚) 혹은 통혼(通婚)이라고 부른다. 안징재라는 무녀가 왜 니구산 산자락에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의 무녀들이 삼각산과 같은 성산(聖山) 밑 바위자락에 촛불 켜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어떤 가옥형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씨녀의 본가(本家)는 곡부 성내(城內)에 있었다. 방혼(訪婚)의 의미는 공자의 탄생이 전혀 숙량흘 본가에서는 인정이 안 된 문자 그대로의 야합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공구(孔丘)와 안씨녀 모자는 완전히 부계에서는 버림받은 모자였다.

 

니구 산자락 무녀오두막집에서 쌔큰거리는 아기공자의 울음은 태산(泰山, 타이산, Tai-shan) 대원(大原)의 정적을 깨뜨리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희미한 호롱불 밑에 아기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는 늙은 장수 숙량흘, 자손을 잇게 되었다는 안도감과 자부감에 흐뭇한 얼굴을 지었을 숙량흘, 그 옆의 꽃다운 여인 안징재는 늠름하고 비범한 기상의 짱구대가리 아기보고 곱게곱게 자라나라고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니구 자락의 이들 삼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스럽게 화평한 정경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만년의 행복을 산신은 더 받아주지를 않았다. 삼 년 후에 숙량흘은 이승을 떴다.

 

공자가 17세 때 엄마도 세상을 떴다. 사마천은 공자가 엄마를 아버지 묘에 합장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묘가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해 합장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엄마가 생전에 공자에게 아비의 묘를 아르켜주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숙량흘의 죽음과 관련된 많은 사연이 있어, 안씨녀가 숙량흘의 묘지를 아르켜주기를 꺼려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방혼(訪婚)의 의미와 관련지어 안씨녀는 남편의 상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안징재 자신이 남편의 상례에 참여할 수 없었고 따라서 남편의 묘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자는 엄마를 우선 오보지구(五父之衢)에 빈소를 차렸다가, 만보(輓父, 완후우, Wan-fu)의 어머니를 만나 아버지의 묘소가 방산(防山)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로 합장한다. 만보의 엄마는 아마도 숙량흘의 상례에 직접 참여했던 숙량흘 본가계열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숙량홀과 안씨녀의 사별은 그렇게 비극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곧 어린이 공자의 운명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슬하에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는 맹자(孟子) 어머니의 고사는 후대의 열녀전(列女傳)과 같은 문헌에 나오는 것으로써 실제상황이라기 보다는 후대에 어떤 현녀상(賢女像)의 패턴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공자의 엄마 안씨녀의 보살핌이야말로 극진하고 또 극진한 것이었을 것이다. 안씨녀는 공자가 17세의 나이로 장성할 때까지 살았다. 그때까지 공자는 안씨 가통 속에서 사물을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균천강성(鈞天降聖)

공자를 낳을 때 공자의 모친이 방에서 천상의 음악 소리를 들음.

孔子出生時, 顔氏在房中聽到天上的音樂聲.

 

 

 맹이자가 말하는 성인

 

 

사마천의 사기(史記)』 「세가, 공자가 17세 때, 노나라의 대부인 맹이자(孟釐子, 멍 리쯔, Meng Li-zi)맹희자(孟僖子)와 동일인임가 병으로 죽게 되어, 그의 후계자인 맹의자(孟懿子, 멍 이쯔, Meng Yi-zi)에게 훈계하는 장면이 실려 있다. 공자 17세 때라면 소공 7년인데 그때는 맹의자는 태어나 있지도 않았다. 맹이자(釐子)가 죽은 것은 소공 24, 공자 34세 때의 일이었다.

 

이와 같이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이벤트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꼴라쥬 되어있다. 그런데 여기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그 훈계의 내용이다. 이 훈계의 내용은 내가 죽은 후에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후계자인 맹의자에게 17세의 공자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사마천이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누가복음의 저자가 아우구스투스의 호구조사를 날조하는 방식으로, 조립하였다 할지라도 어쨌든 이 메시지의 내용은 17세의 공자의 모습을 전하려는 것이다. 그 첫마디가 다음과 같다.

 

 

()라는 아이는 성인의 후예다.

그 가계는 송()나라에서 망하여 노()나라로 옮긴 집안이다.

孔丘, 聖人之後, 滅於宋.

 

 

()는 애명이다. 따라서 맹이자(희자)가 구라 부른 것은 친근하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공구(孔丘)는 성인지후(聖人之後)’라는 말은 도무지 우리의 범상한 의미론의 맥락으로는 이해되기가 어려운 표현이다. 우선 성인이라는 표현의 대상이 된 사람은, 공자의 7대조인 정고보(正考父, 정카오후우, Zheng-kao-fu)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공자는 나이 17, 전혀 알려지지도 않은 평민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공자는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의미에서의 성인(Sage)’이라는 의미맥락과는 전혀 무관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공짱구()는 성인이라고 지칭되기에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7대조를 가리켜 성인이라 표현한 것도 참으로 이상하다. 그것은 분명 어떤 사람의 직업이나 관직이나 특징을 지칭하는 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자시대에 성인이라는 말이 과연 우리가 쓰는 의미에서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한 지고의 문화인이라는 말로서 통용되고 있었고, 그러한 맥락에서 성인의 자손이라고 말함으로써 공자를 성인과 같은 위치로 높이려 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성인이라는 말은 그러한 특수한 의미부여의 맥락이라기보다는, 공구라는 청년의 할아버지의 단순한 직업을 표현하는 말일 수밖에 없다. ‘공구 성인지후(孔丘, 聖人之後)’라는 표현은 공구 걔말야, ‘성인집 자손이야!”라는 친근한 표현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성인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발달된 문자학(文字學)의 연구는 ()’이라는 글자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요소는 귀()라는 부수(部首)에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재미있게도 최근에 발굴된 백서(帛書) 노자(老子)에 의하면, 보다 고본(古本)인 갑본(甲本)은 성인을 聲人으로 표기하고 있고, 을본(乙本)𦔻人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또 성()자는 청()자와도 통한다. 이 모두 소리[]를 귀[]로 듣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소리란 곧 신의 소리. ()이란 곧 신의 소리를 들음이다. 성인(聖人)이란 곧 신탁의 소리를 듣는 무당이란 뜻인 것이다. 옛날 무당 중에는 장님의 악사가 많았다. 청각이 비상하게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춘추좌씨전양공(襄公) 18년조()에 진()과 초()가 서로 싸우는데 진나라의 눈먼 악사인 사광(師曠, 스 쿠앙, Shi Kuang)이 바람소리를 듣고 전쟁의 승패를 점치는 장면이 나온다. ‘남쪽의 바람(노래)은 흥이 나질 않고, 죽은 소리가 많습니다. 초나라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南風不競, 多死聲, 楚必無功].’ 바람타고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곧 신의 소리였다. 이 소리를 듣는 자들을 예로부터 성인(聖人 혹은 聲人)’이라 불렀던 것이다.

 

공자가 성인(聖人)의 후예라는 말은 곧 무당집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나의 논증은 사마천이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기록하고 있는 맹이자의 훈계 자체의 논리에서 명료해진다. 맹이자는 다시 이 성인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듣기로, 성인 집안자식들은 비록 세상에서 대접은 못 받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사리에 통달한 자들이 있다고 한다.

지금 공구라는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예()를 좋아한다. 예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이 곧 통달한 자의 증표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으면 곧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吾聞聖人之後, 雖不當世, 必有達者.

今孔丘年少好禮, 其達者歟? 吾卽沒, 若必師之.

 

 

여기 의미맥락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

 

1) 성인의 자식들은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한다[不當世].

2) 성인의 자식들은 통달(通達)한 자들이 많다.

3) 호례(好禮)가 바로 그 통달함의 증표이다.

 

여기서 성인의 의미맥락은 매우 명백해진다. 성인이란 예의 달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란 무엇인가? 공자의 부계를 성인으로 간주한다면 무인 숙량흘 계보 속에도 이미 무속의 핏줄을 읽어낼 수 있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공자의 계보가 송인(宋人)의 계보라는 사실은 은()의 문화를 계승했다는 것을 뜻한다. 은의 문화는 종교적 문화였다. 이러한 부계의 문화전승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 맹이자의 언명은 곧 안씨() 가풍에 대한 인상을 전이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공자는 안씨녀 당골 슬하에서 컸다. 사마천은 안씨녀 슬하에서 성장하는 소년 공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자는 어릴 때 소꼽장난하기를 좋아했는데, 항상 도마와 목기 등의 제사 그릇을 벌려놓고, 예에 맞는 복장을 입고 놀았다.

孔子爲兒嬉戱, 常陳姐豆, 設禮容.

 

 

이것은 우리가 당골네집 자식들의 소꼽장난을 생각하면 쉽게 연상이 간다. 여기서 말하는 예라는 것은 바로 시킴굿과도 같은 굿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즉 공자는 어려서부터 굿(=)의 달인으로 컸다는 것이다. 니구 산자락의 당골네의 아들로서 이런 굿을 접한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환경의 소산이었다. 여기 예에 맞는 복장이라고 번역한 예용(禮容)’의 문제는 순자(荀子)의 유자비판에 이르기까지 집요한 테마 중의 하나이다. ()인 계열의 독특한 복장을 입었다는 것이다.

 

 

 조두예용(俎豆禮容)

孔子爲兒嬉戱, 常陳俎豆設禮容.

 

 

 개비의 세계

 

 

우리 국악계에 통용되는 말로서 개비라는 말이 있다. 개비란 그 태생으로부터 국악인의 집안에서 큰 달인들을 말한다. 그런데 개비의 백퍼센트가 무속집안이다. 즉 개비는 모두 성인(𦔻人)’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실상 모두 사마천의 기술대로 빈()하고 천()한 사람들이다. 이 개비들의 큰 특징으로서 우리는 두 측면을 들 수가 있다. 그 첫째가 그들은 상례(喪禮, 시킴굿)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째가 곧 그들은 가무(歌舞)의 달인이며, 또 탁월한 악사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시나위의 명인들이다. 시나위란 당골의 무용을 반주하기 위하여 고안된 계면길의 즉흥기악곡이다. 서로 다른 가락들이 동시에 연주되어 이루어가는 앙상블(ensemble)개념이 존재하는 유일한 음악이다. 보이지 않는 본청을 따라가는 자유로운 변주음악이다. 시나위는 곧 째즈다. 공자는 곧 째즈의 명인이요 달인이었던 것이다. 나의 이런 발언에 눈을 휘둥그레 뜰 많은 학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산동(山東)의 고속(古俗)이 우리나라 백제문화권인 남도음악에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비근한 사례를 들어 공자와 논어를 이해할 때, 오히려 역사적으로 가장 정확한 실상에 접근할 수도 있다.

 

남도 당골네를 따라다니는 악사들을 우리가 삼현육각(三絃六角)이라고 부르는데, 이 삼현육각이란 세 개의 현악기와 여섯 개의 뿔관악기(three strings and six horns)’란 의미와 전혀 관계가 없다. 삼현육각은 실제로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그려져 있듯이, 지금까지도 향피리 두 개, 젓대(대금) 하나, 해금 하나, 장고 하나, 북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육각이란 연주자의 숫자를 말하는 것으로 여섯 명의 총각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삼현이란 새면이라는 토속어의 와전으로 시나위와 같은 어원의 말일 것이다. 공자는 실제로 새면육각잽이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이 새면육각잽이야말로 시나 위의 명수들이며 째즈의 달인이며 상례(喪禮)주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예식의 달인이었다. 성인의 일차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죽음의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그 구체적 맥락을 잡아야 할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이 모두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주되는 것도 바로 공자가 이러한 째즈의 명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그 상황 상황에 예민한 탁월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논어가 말하는 예()의 핵심이 관혼상제(冠婚喪祭) 중에서도 바로 신종추원(愼終追遠)하는 상례(喪禮)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상례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는 사회질서의 근간이었고 그 예의 근간은 상례였다. 상례는 삶과 죽음의 교두보였기 때문에 가장 정중하고 가장 화려하게 치루어졌으며 음악과 춤의 전문성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고대문화의 핵이었다.

 

어린 공자는 니구산 자락에서 조두(俎豆, 제기)를 진()하고, 예용(禮容)을 설()하며, 가무와 악기와 굿의 달인으로,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늠름하게 자라났을 것이다. 공자가 자라난 니구산 자락에서 노성(魯城)까지는 약 22km, 한 육십 리 되는 거리다. 소년 공자가 죽으라고 열심히 걸으면 한나절(6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다. 우리는 아버지를 사별하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외로운 소년 공자가 가끔 곡부의 벌판을 열심히 횡단하는 모습을 연상해볼 수 있다. 외로운 소년 공자는 곡부 노성 내에 있는 외조부의 집을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외조부의 집에 도착했을 때, 호기심이 많은 시골 당골후보생인 소년 공자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것은 성내 지위 높은 자들의 상례를 치루는 장엄한 위용이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본격적인 상례, 시킴굿을 보고 공자는 끓어오르는 어떤 예술적 충동, 그리고 무한한 지적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장엄한 예식들이 모두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과연 어떤 근거 위에서 이러한 예식들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제사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 호기심 많은 소년 공자의 가슴에는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끊어 올랐다. 그는 엄마에게 졸랐을 것이다. 더 이상 촌구석 산자락에서 살기 싫다고, 아들의 강렬한 배움의 욕구를 감지한 엄마 안징재는 공자의 소년시절 어느 시점에 용단을 내린다. 이렇게 해서 공자는 노성 내 한복판 곡부 궐리(闕里, 취에리, Que-li)에서 컸다. 그는 비록 천한 신분으로 컸지만 끊임없는 물음[多問]의 인간이었고, ‘박학다능(博學多能)’의 귀재였다.

 

나는 이 시점에서 공자에 관한 더 이상의 작은 이야기들[小說]을 써내려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논어라는 텍스트가 독자들에게 속삭여야만 할 부분이다. 공자의 삶의 이야기를 내가 지금 여기서 완벽하게 다듬어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약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에 관한 가능한 모든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근원적으로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개념적인 틀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은나라와 주나라

 

 

우선 공자의 탄생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지배하는 일관된 거시적 축은, 바로 공자의 족보에 관련된 ()과 노()’라는 두 문화의 패러다임이다. 송과 노는 곧 중국고문명의 쌍벽인 은()과 주()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은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이다. 반경(盤庚)이 현재 하남(河南) 안양(安陽) 소둔촌(小屯村) 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에, 상은 탕()으로부터 반경에 이르기까지 이미 5(五遷)을 했다고 하는데, 반경 이전의 사적은 정확히 구성되지 않는다. 상은 은에서 제신(帝辛, )에 이르기까지 8, 12, 273년간 존속했다. 혹자는 나라이름을 부를 때는 상()이라 해야 옳고, 은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을 멸망시킨 주()가 경멸의 뜻으로 지역이름을 따라 부른 것이라 말하나, 실제로 상이라는 나라이름도 탕의 조상 설()이 분봉된 지역의 이름에서 온 것이므로, ()으로 도읍한 이후는 은나라로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상은 실제로 은으로 도읍한 이후에는 국호를 은으로 바꾸었다. 상대(商代) 전체를 부를 때는 은상(殷商) 혹은 상은(商殷)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자는 상()이라는 표현을 안 쓰고 은()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당시의 객관화된 상식적 용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폭군 제신(帝辛, 띠신, Di Xin) (, 저우, Zhou)의 이야기나,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탕녀 달기(妲己, 따지, Da-ji)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항상 한 왕조의 끝에는 음탕한 폭군이 자리잡게 마련이다. 사마천은 은본기(殷本紀)11에서 주()를 평가하여, 타고난 자질이 사리를 명료히 분변하며 판단력이 매우 빠를 뿐 아니라 듣고 보는 것이 매우 민첩했고 힘이 보통사람보다 출중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帝紂資辨捷疾, 聞見甚敏; 材力過人, 手格猛獸]. 사실 주()에 대한 실상은, 후대의 왜곡된 자료에 의해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백이숙제가 그토록 주를 정벌하러가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눈물 흘리며 불인(不仁)하다 간했어야만 했는지 우리는 그 실상을 다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여하튼 주()는 실정을 거듭하여 국민의 원성을 샀을 것이고, 그래서 서백(西伯, 시뿨, Xi-bo) (, 츠앙, Chang)의 아들 무왕(武王, 우왕, Wu Wang)에 의하여 정벌되었을 것이다. 주는 바로 상()왕조의 마지막 임금이고, 무왕은 주()나라의 첫 임금이다. 오늘날 은허(殷墟, 인쉬, Yin-xu)에서 발굴되는 갑골문(甲骨文)이나, 여기저기 상나라의 넓은 지역에서 발굴되는 정교하고 찬란한, 방대한 수량의 거대한 청동기 제기들은 상나라 문명이 얼마나 높고 섬세한 문화 수준을 과시하고 있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상문명(Shang Civilization)이 비록 시대를 앞서있다고 해서, 후대에 성립한 주문명에 비해, 초극(超克)되어야만 할 유치하고 난폭한 문명이었다는 식의 선입견을 우리는 배제해야한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양태의 고문명들이었다. 그리고 이 문명들은 순차적으로 기멸(起滅)한 것이 아니라, 상당기간 공존했던 문명들이었다.

 

상왕조는 서백 창의 아들 무왕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그것은 정치적 좌절이었다. 정치적 지도자들의 무리수가 국권의 파탄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상왕조의 문화와 전통은 멸망될 수 없었다. 은말(殷末)의 삼인(三仁: 세 명의 현자. 미자(微子)1)으로 우리는 미자(微子, 웨이쯔, Wei Zi)ㆍ기자(箕子, 지쯔, Ji Zi)ㆍ비간(比干, 삐깐, Bi Gan)을 꼽는다. 비간이 바른 간언을 많이 하자, 주는 성인의 마음에는 일곱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런가 하고, 비간의 심장을 갈랐다. 미자와 기자는 모두 주임금들의 서형들이다. 미자의 모친은 은나라 멸망 직전의 국왕인 제을(帝乙, 띠이, Di Yi)의 첩이었다. 그녀는 미자와 기자를 낳았을 때는 정비(正妃)가 아니었다. 정비가 죽고 첩이었던 미자의 모친이 정실이 되어 낳은 아이가 바로 수(, 서우, Shou) 즉 주(). 그래서 정비로서 낳은 아들이 주였기 때문에 비로소 적자로 간주되었고, 주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그러니까 미자와 기자는 실상 주임금의 친형들이었던 것이다. 기자는 주의 황음(荒淫)과 방종(放縱)을 간곡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면서 타인의 노비가 되었다. 그러다가 감옥에 갇히고 만다. 미자는, 부자간에는 골육의 정이 있어 간해서 안 들어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울고불고라도 할 수 있지만, 군신 사이에는 의()로서 맺은 것이라 불의(不義)하면 떠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떠나 버렸다. 무왕은 주를 벌하고 왕위에 즉위하면서 기자를 석방하였다. 무왕은 그에게 천지의 대법(大法)을 묻자, 기자는 홍범(洪範)의 대도(大道)를 술()하였다. 이에 무왕은 그를 조선(朝鮮)의 제후로 봉하였고, 그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宋微子世家).

 

그리고 무왕이 주를 벌()하자, 미자는 종묘 안의 제기를 가지고 무왕의 군문(軍門)에 이르러 상의를 벗고 손을 등뒤로 묶게 한 후, 무릎을 꿇고 앞으로 나아가 무왕에게 고()하였다. 무왕은 현인 미자의 작위를 종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었다.

 

무왕은 그의 동생 단(, , Dan)을 곡부(曲阜)에 봉하고, 그 지역을 노()나라라고 불렀다. 그러나 단은 무왕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아직은 위태로운 상황이므로 그를 보좌하는 일이 시급하다 판단되어 그의 아들 백금(伯禽, 뿨친, Bo Qin)을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계속 남아 무왕을 보좌하였다.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키는 대업을 이루었으나 2년 후에는 신병으로 붕어하고 만다. 그의 어린 아들 태자 송(, , Song)이 대를 이었는데 그가 곧 성왕(成王, 츠엉왕, Cheng Wang)이다. 무왕의 동생, 단은 실상 우리나라의 세조처럼, 어린 조카 성왕의 왕위를 찬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은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어린 조카 성에게 깎듯한 신하의 예를 다하면서 섭정을 베풀어 주나라 초기의 문물제도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 단이라는 인물이 바로 항상 공자가 꿈에서조차, 오매불망 그리는 주공(周公, 저우꽁, Zhou Gong, the Duke of Zhou)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한 후, 그 마지막 임금 주의 아들 무경(武庚, 우 껑, Wu Geng) 녹보(祿父, 루후우, Lu Fu: 무경의 이름)를 은나라 당지에 제후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은나라의 유민을 종속시켰다. 정복당한 은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으며, 혁명초기의 불안정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은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은나라 사람을 다스리게 하는 매우 현명한 정책이었으나, 그것은 곧 주나라가 방대한 은나라 영역을 일시에 관장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주공은 자기의 두 동생 관숙선(管叔鮮, 꾸안수 시엔, Guan-shu Xian)과 채숙도(蔡叔度, 차이수 뚜, Cai-shu Du)로 하여금 무경의 사부가 되게 하여 보좌하게 하였고, 은나라의 역법과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였다[以續殷祀].

 

그런데 이렇게 후하게 대접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왕이 죽자 무경이 관숙과 채숙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 일어난 주왕조를 배반했다. 물론 그것은 주왕조 입장에서는 배반으로 기술하겠지만 무경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항명이었다. 당시 은나라 유민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동벌(東伐)을 감행하고, 무경을 주살하고 친동생인 관숙을 죽였으며, 또 채숙을 멀리 추방시켜 버렸다. 주공은 이에 은나라의 유민을 모아 주()의 형이며 현자인 미자(微子)를 따르게 하고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상치우 시엔, Shang-qiu Xian) 부근 은나라 고지에 송(, , Song) 나라를 세우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자(微子) (, 카이, Kai: 본명이 계인데 한나라 경제景帝의 휘자를 피해 개로 쓴다)는 송의 시조가 되었고, 송은 은나라를 이어받은 주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다. 하남의 상구(商丘)에 자리잡은 송과 산동의 곡부에 자리잡은 노는 지도를 놓고 보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곡부에서 서남쪽으로 약 200km 정도의 거리에 상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다이애스포라송

 

 

공자는 송나라의 후예다. 공자는 분명 송나라 사람이다. 아무리 로스안젤레스에 오래 살았어도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인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공자는 은나라 사람인 셈이다. 송을 통해 내려오는 은나라 문화전통을 계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노나라 사람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살았다. 그러니까 공자의 삶의 입각처(立脚處) 자체가 이미 태생부터 매우 미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인물 내면에서 유대교전통의 고수와 유대교전통의 강인한 부정, 그리고 헬레니즘의 보편주의적 언어와 사고가 묘한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동시에 일으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도 바울이 헬레니즘이 만개한 소아시아 이방의 도시, 다소(Tarsus) 속의 유대인 다이애스포라에서 성장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송나라는 이미 은유민(殷遺民)들의 다이애스포라였다.

 

그런데 공자의 선조는 송에서 또 다시 실패하여 노나라로 이주하였다. 공자의 선조이자 송나라의 대사마(大司馬, 따쓰마, Da Si-ma)였던 공보가(孔父嘉, 콩후우 지아, Kong-fu Jia)의 부인이 아주 미녀였는데, 송나라의 수상에 해당되는 태재(太宰) 화독(華督, 후아 뚜, Hua Du)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여 결국 공보가를 독살하고 그 부인을 차지한다. 공보가의 아들인 목금보(木金父, 무 진후우, Mu Jin-fu)까지 암살하려고 하니까, 목금보는 송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노나라로 도망온 것이다. 이 목금보의 손자가 바로 공방숙(孔防叔, 콩 황수, Kong Fang-shu: 공자의 증조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계는 이중의 다이애스포라생활을 거친 사람들이다. 송나라의 다이애스포라에서 또 다시 노나라의 다이애스포라로 이주한 사람들인 것이다.

 

춘추전국의 제자백가서에서 송인(宋人)’들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의 질이 악질적인 것이 아니라, 좀 코믹하다. 코믹하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다는 것은 순진하지만 상식의 궤를 일탈한다는 것이다. 맹자(孟子)조장(助長)’ 이야기의 주인공도 송인이다. 한비자(韓非子)오두(五蠹)편에는 송인의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고사로서 그 유명한 수주대토(守株待兎)’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송인의 고사가 인용되고 있는 맥락이다. 한비자는 물론 복고(復古)적 세계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역사를 상고지세(上古之世), 중고지세(中古之世), 근고지세(近古之世), 당금지세(當今之世)로 나누어 해설한다. 그 시대는 그 시대의 역사적 환경에 따라 그 시대 나름대로 행위의 당위성이 있다는 것이다. 상고지세에는 짐승이 사람보다 더 많았고, 맹금이나 독충이나 독사에 물리는 경우가 많아 나무를 엮어 원두막처럼 올라 살게 만든 사람이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유소씨(有巢氏, 여우츠아오 스, You-chao Shi). 그리고 사람들이 나무나 풀의 열매, 조개, 전복 따위를 먹었는데 비린내가 심하고 복통이 생계질병이 잦자 불을 발명하여 화식을 하게 해준 사람이 임금 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수인씨(燧人氏, 쒜이르언 스, Sui-ren Shi)이다.

 

중고지세에는 물이 많았고 홍수가 잦아 물길을 트고 제방을 쌓아 물을 잘 유통시키는 사람이 제왕 노릇할 수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곤 임금(, , Gun: 우 임금 아버지)이요 우임금(, , Yu)이다. 그러나 유소씨가 하던 짓을 우 임금 시대에 하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요, 우 임금이 하던 짓을 땅이 마른 오늘날 하면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결국 선왕지도(先王之道)를 가지고 당세의 백성을 다스리겠다고 하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망상의 대표적 예로서 송나라 사람의 수주대토 고사를 들고 있는 것이다. 밭을 갈다 우연히 토끼 새끼 하나가 나무에 머리를 박고 목이 뼈서 뒤졌는데 밭가는 일은 하지 않고 계속 나무를 지키면서 또다시 토끼를 얻을 요행만을 기다리고 있는 송인의 어리석음이나 선왕의 정치(先王之政)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인의 단순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어리석게도 나무를 지키면서 득토(得兎)의 기회만을 기다리는 변통을 모르는 고집이다. 그러니까 송나라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시대와 변화와 무관하게, 남들이 보기에 어리석다고 생각되는 일이지만,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지키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은나라 유민들이 국권을 상실한 절망감과 동시에 가슴에 품었던 은나라 문화에 대한 자부감, 그리고 그들의 제(, , Di)그들의 고유한 하느님, 서양의 데우스Deus와 음이 상통한다는 설도 있다에 대한 종교적 신앙, 그들만이 보유했던 고도의 문명의 기술 등등은 그들의 삶에 어떤 타협이나 동화의 틈을 주지 않았다. 변통을 모르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어리석음이야말로 다이애스포라 사람들의 타협을 모르는 고지식함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내면의 울분을 외면적으로는 어리석게, 공손하게, 유순하게 표현했다. 노자가 어리석음[]을 예찬하고, 절학(絶學)을 찬양하며, 유순함[]을 숭상하는, ()적 우주관을 표방하는 내면에는 이 다이애스포라 은도(殷道)의 가치관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도가의 사상도 은유민과의 관련성을 떠나기 어렵다. 그리고 유()의 원래 의미가 유()였다고 하는 설문(說文)의 주장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다.

 

한비자(韓非子)외저설우상(外儲說右上)4편에는 또 하나의 어리석은 송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송인으로서 술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서 술이란 청주나 소주가 아닌 막걸리와 같은 탁주였을 것이다. 술을 너무도 잘 만들고, 손님을 대하는 예의도 매우 정중하고, 뒷말도 속임수 없이 아주 공정하게 재는 사람이었으나 술이 잘 팔리지 않아 술이 쉬어버리곤 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송인이 동네 현자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너의 집 개가 사나우냐[汝狗猛耶]?”하고 되묻는 것이다. 송인이 개 사나운 것하고 술 안 팔리는 게 뭔 상관유[狗猛, 則酒何故而不售]?”하고 물으니, 그 현자는 다음과 같이 타이르는 것이다.

 

술집이란 본시 사람들이 친근하게 느껴야하는 것이다. 더구나 막걸리를 받아오게 할 때는 사람들이 곧잘 아이들에게 심부름시키기도 하는데, 무서운 개가 짖어대면 딴 집으로 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가 사나우면 막걸리가 안 팔릴 수밖에. 쯧쯧, 한비자는 이 고사를 개새끼들(대신大臣) 때문에 유도지사(有道之士)가 국군(國君)에게 접근할 길이 없어 국정이 어지러워지는 딱한 상황에 원용(援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고사는 이 시대의 송인에 대한 인상, 다이애스포라 사람들의 속성들을 관찰해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송인들이 술을 잘 빚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은나라는 술로 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상서 (尙書)』 「주고(酒誥)에도 잘 나타나 있다. 주고는 여러 설이 있으나 주공 단이 어린 동생 강숙을 위나라에 봉할 때 여러모로 걱정되어, 특히 은나라가 술로 망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타이르는 포고문이다. 결국 그것은 주() 일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로 인하여 전국민이 술독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은허 등지에서 발견되는 찬란한 청동기 예술작품들이 거개 술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은나라사람들에게 스며있던 종교문화가 술과 춤의 세계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디오니소스적 세계였다. ‘술과 항상 같이하지 말라. 여러 나라가 술을 마실 때는 오직 제사 때만 마실 것이니, 덕으로 교류하고 취함에 이르지는 말라[無彞酒, 越庶國飮, 惟祀, 德將無醉].’고 한 문왕(文王)의 고유(告諭)가 반사적으로 은나라의 디오니소스적인 광란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송인은 손님을 대하는 데 예의범절이 매우 정중했으며[遇客甚謹]’, ‘됫박을 재는 데도 매우 공평했다[升槪甚平]’. 송인은 예악(禮樂)에 밝은 사람이었으며, 일상적 행동거지가 매우 겸손하고 은근했다. 됫박이 공평했다는 것은 후덕함과 사리에 정확함을 동시에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공자의 인격을 추측하는 데 있어서도 우원하게 들리는 것 같지만 이런 자료들은 매우 구체적 도움을 준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집에 맹견을 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어떤 독자적 세계를 보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이야기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송인들의 이러한 폐쇄성은, 송인들의 계보를 잇고 있는 서은(庶殷: 은계제족殷系諸族)의 자손 낙양(洛陽) 지역 사람들의 행태를 일부 묘사하고 있는, 육조시대의 작품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북위(北魏) 말기의 양현지(楊衒之)가 불타버린 낙양을 애석해하면서 그 번화한 시절을 그린 명저에도 잘 그려져 있다.

 

아둔함이나 어리석음이란 천재의 특질이다. ‘속이 빈 듯이 보이는 성격(absentmindedness)’이야말로 천재들의 속성이다. 물론 이러한 설화는 주나라 문화권에서 자기들이 멸망시킨 왕조의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자아내기 위하여 지어낸 것이다. 정언약반(正言若反), 우리는 그 말의 반면을 읽어내어야 한다. 경상도왕국이 되면, 전라도사람들을 모멸하는 온갖 설화들이 꾸며진다. 전라도사람들은 거짓말 잘하고, 교활하고, 이중성이 강하다. 그런 이미지를 창출하는 온갖 이야기들이 항담(巷談)을 차지한다. 그러나 전라도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열려있으며, 머리가 좋으며, 판소리나 남도민요가 입증하듯이 예술적이다. 아마도 고도의 문화를 자랑하던 은인의 후예 송인들은 이렇게 정면(正面)과 반면(反面)이 교착(交錯)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서구사회에 있어서 다이애스포라에서 사는 유대인들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도 이와 별 다름이 없다. 유대인들은 폐쇄적이며 깊게 종교적이며 독선적이며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일반적 소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외 없이 천재적이며, 예술ㆍ과학ㆍ인문 각분야에 인류사회를 리드하는 눈부신 업적들을 쏟아내어 놓았다. 왜 그다지도 유대인들은 천재적인가? 예수로부터 지그문트 프로이드, 칼 맑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촘스키나 아인슈타인, 마르크 샤갈에 이르기까지 왜 이들 민족에서만 집약적으로 천재들이 쏟아지는가? 나는 그 이유는 실로 간단히 설명된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다이애스포라에서 사는 과정을 통하여 어떤 내면적 갈등을 축적해왔으며, 그것은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면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유대인치고 바이링규알(bilingual, 2개 모국어 화자) 아닌 사람이 없다. 유대인치고 박해의식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항상 자신이 지켜야할 내면적 규범과 삶의 외부적 환경이 극심한 콘트라스트(contrast, 대립)와 타협하기 어려운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갈등을 어려서부터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예술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라나게 마련이다. 노나라라는 다이애스포라에서 살던 송인 공자의 유년시절의 삶 자체도 이러한 갈등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이애스포라에서 배출되는 유대인 천재들이라 해서 반드시 유대인의 전통과 인습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맑스에게 있어서나 프로이드에 있어서나 유대인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숭배나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맑스나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궁극적으로 해방의 대상이다. 위대한 천재들은 항상 인간을 아토믹한 개인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사유재산이나 이기적 권익에 의하여 꽁꽁 묶여있는 그런 절대적 자유의 개인을 그들의 배움의 전제로 삼지 않는다. 맑스는 묻는다. ‘자유(Liberty)란 기껏해야 불간섭(Non interference)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들이 문제시하는 것은 보편적 콤뮤니티의 한 멤버로서, 즉 공민(公民)으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냐에 관한 것이다. 정치적 해방(political emancipation)은 시민사회(biürgerliche Gesellschaft, Civil Society)의 원자적 구조를 하나도 근원적으로 개혁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맑스나 프로이드가 말하는 것은 정치적 해방을 넘어서는 인간해방(human emancipation)이다. 유대인전통이야말로 이러한 인간해방에 부정적인 모든 인습의 덩어리일 뿐인 것이다.

 

맑스나 프로이드가 유대인이면서도 종교적인 폐습이나 율법적 구속에 갇혀 있는 유대인을 비판하는 문제의식과 매우 유사한 의식구조를 우리는 공자의 삶 속에서 발견한다. 공자는 송의 후예로서 송의 모든 종교적ㆍ문화적 인습체계 속에서 성장했지만, 그는 가장 강렬하게 송의 전통을 거부하고, 은의 문화에 반발한다(팔일).

 

 

찬란하도다! 그 문화여! 나는 주를 따르리로다.

郁郁乎文哉! 吾從周.

 

 

오종주(吾從周)!’ 이 한마디에는 공자의 삶을 지배하는 줄기찬 긴장, 공자의 이데아와 현실 사이의 황량한 암곡과도 같은 갈등구조가 숨어 있다. 나는 주를 따르리로다! 여기서 말하는 주는 곧 송()의 거부다. 공자가 비록 하()를 같이 이야기하지만 그에게 하는 실제로 큰 의미가 없다. 그에게 관념화되어 있는 것은 송과 노, 은과 주의 긴장감이다.

 

공자는 송인으로서 노나라에 살았다. 노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그것은 바로 은을 정복한 왕조 주나라의 문물을 완성한 주공(周公, 저우 꽁, Zhou Gong, the Duke of Zhou), 무왕의 정복으로부터 성왕의 과도기적 제패(制覇)에 이르기까지의 주문화 초기정착의 모든 측면을 완성한 이상적인 패러곤, 그 주공이 분봉된 곳이었다. 노는 곧 주문화를 가장 정통적으로 정착시키고 보존한 문명인 것이다. 성왕은 주공을 신하로 취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공의 사후에도 성왕은 주공에게 천자의 모든 예우를 다했다. 그리고 노나라에 있는 주공의 사당, 즉 태묘(太廟, 타이마오, Tai Miao)에는 천자의 예악을 허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왕실의 교제(郊祭)를 노나라에서 올렸다. 따라서 노나라에는 은의 종교문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주()600년 인문전통이 가장 정통적으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송인(宋人)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아이덴티티를 철저히 노인(魯人)으로 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장성한 이후의 의식구조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의식 속에서 송이 노에 대해 대자적으로 분열을 일으킨 이후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은 곧 자기가 송인이라는, 바로 그 자신의 속성을 거부하는 안티테제의 정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부정(Self-negation)은 성인의 길의 출발이다. 공자는 분명 성인의 후예[𦔻人之後]’.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인이란 무속집안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인은 곧 개비. 그가 17세 때까지 자모(慈母) 안씨녀의 슬하에서 자라났다면, 외가의 훈도 속에서 성장하였다면, 그것은 곧 그가 송의 적통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주의 적통을 이은 노나라라 해도 은ㆍ주혁명시에는 이 지역은 주나라의 영역이 아니라 은나라의 영역이었다. 산동지역의 용산(龍山, 롱산, Long-shan)문화로부터 이리강(二里岡, 얼리깡, Er-li-gang)문화를 거쳐 은허 지역에 이르는 상문화 영역 속에 이 지역은 속해 있었다. 주나라는 섬서성의 황토고원지대에서 유래한 서방의 신흥세력이었다. 그것은 마치 은나라를 로마제국에 비유한다면 주나라는 게르만 야만족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통치세력은 주나라 사람들이었지만, 피통치인민들은 대체로 은나라 문화습속에 젖어 있었다. 그러니까 공자의 부계나 모계나 모두 은나라의 후예로 보는 것은 발달된 오늘날의 고고학의 성과로 볼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공자의 삶이란 곧 송의 개비적 성격으로부터 노의 비개비적 성격으로 근원적 전환을 시도하는 모험적 삶이었다. 은이라고 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세계를 탈피하여 주라고 하는 아폴로적 세계로 진입하려는 근원적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니체가 희랍비극정신을 말하면서 디오니소스적 세계와 아폴로적 세계의 융합을 말했다면 공자야말로 그러한 융합의 구현체였다.

 

그것은 곧 공자의 삶에서 최초로 우리가 의미론적으로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성인(聖人, Sage)이 구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의 삶은 곧 종교적 성인(개비)으로부터 도덕적ㆍ문화적 성인(비개비)에로의 탈바꿈(transformation)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샤만적 충동(shamanic impulse)으로부터 도덕적 인격의 구현(moral incamation)으로의 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송에서 노로의 전화, 은문화에서 주문화로의 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주의 상징적 구현체가 곧 주공(周公, the Duke of Zhou)이었다. 니체는 물론 이러한 전화(轉化)를 혐오할 것이다. 그러나 잘 뜯어보면 공자의 삶에는 니체가 그리워하는 디오니소스적 음악성과 해방감, 그 합창과 보편적 가치(universalia ante rem: 음악은 사물 이전의 보편이라는 뜻)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지성과 기독교의 신화성과 노예도덕이 결합된 그러한 질식과 질곡의 방향은 아니었다(니체, 비극의 탄생, 책세상 니체전집, 2-125).

 

 

심하도다!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되었도다! 주공을 꿈에 다시 보지 못함이여(술이).

甚矣, 吾衰也久矣, 吾不復夢見周公.

 

 

공자가 과연 은나라 역사나 주나라 역사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명료하게 알 길이 없다. 공자는 사가로서 하()그 전승을 보유한 나라는 기()나 은()그 전승을 보유한 나라는 송()의 역사를 캘려고 할 때 그 문헌(文獻)’이 부족하다는 것을 탄식하고 있다(팔일(八佾)9), 엄밀한 실증적 사가로서 그 문명의 실제적 정황에 관하여 논구하고 있다기보다는 그가 역사를 바라보는 자신의 인식의 틀을 독백하고 있는 것이다. 은과 주는 직접적으로 대비된 언명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논어에 기술된 공자의 로기온 전반에 걸쳐 어떤 관념적 틀로서 깔려있는 것이다. ‘주감어이대(周監於二代)’라고 말한 것을 보면, 공자는 주를 하ㆍ은의 장단점을 이미 창조적으로 변용시키고 포섭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태백8

 

 

()란 공자에게 있어서는 언어를 의미했다. 공자의 언어는 곧 노래였던 것이다. 여기서의 노래란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 있어서, 곧 무당의 가사다. 우리의 개명한 삶은 곧 노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노래는 흥이요 바람이요 언어다. 그것은 개비의 신적 중얼거림이다. ()의 핵심은 무당의 상례(喪禮)였다. 그것은 죽음의 제식이었다. ()은 단순히 악기연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곡이요 창작이요, 문명의 창조행위다. 그것은 삶의 영감의 완성이다. 공자의 삶은 시ㆍ례ㆍ악이 세 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어떻게 은적인 시례악을 주적인 시례악으로 전환시키느냐에 달려있었다.

 

공자의 개비적 삶, 안씨녀 슬하의 가풍, 그것은 전통적 성인(무당)의 삶이었다. 그것은 바로 송인의 문화였다. 부계ㆍ모계를 막론하고 어떤 송문화의 전통 속에 젖어있었던 것이다.

 

무당의 삶은 죽음의 삶이다. 죽음의 사제로서, 죽음을 영위하는 삶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은()죽음의 문화, ()삶의 문화'였다. 은문명의 순장묘나, 방대한 청동기문화가 실증하듯이 그것은 술의 문화요, 제식의 문화요, 죽음의 문화인 것이다. 은문화는 바카이들이 들판에서 동산에서 삼현육각에 맞추어 유오이(Euoi)를 외치며 오르기아(orgia)의 광란의 축제를 벌리는 것과도 같은 취함의 문화. 그러나 주문화는 깨임의 문화. 주왕실은 바로 은문화의 취함을 깨우게 함으로서 성립한 것이다. 은나라가 그 얼마나 술에 빠져 국정을 그르쳤는가 하는 것은 주공의 작으로 전하는 주고(酒誥)에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공의 문제의식은, 무분별한 종교적 광기에 빠져있는 은문화의 상태로부터 탈피하여, 어떻게 합리적 문아(文雅)의 덕성으로 인간을 살려내느냐 하는데 있었다. 주공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하향적 제(, , Di)의 축을 상향적 천(, 티엔, Tian)의 축으로 전환시키느냐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천심(天心)은 곧 민심(民心)이었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경복이나 화려한 장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집단적 도덕성이야말로 새로운 통치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
죽음의 문화 삶의 문화
취함의 문화 깨임의 문화
무분별한 광기 합리적 문아(文雅)
하향적 제() 상향적 천()

 

 

 

 

 르쌍띠망

 

 

아사노 유우이찌(淺野裕一)씨는 최근 중국철학 학계의 한 문제작이라 말할 수 있는 공자신화(孔子神話)(岩波書店, 1997)에서 유교의 근원으로서의 공자의 삶 자체를 니체가 말하는 르쌍띠망(ressentiment)’독일어로는 Empfindlichkeit가 이에 해당되지만 니체는 독일어 개념이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충분히 전달 못한다 하여 보다 압축적이고 참신한 불어적 표현을 선호한다. 영어로는 resentment으로 가득찬 종교적 신비주의의 한 전형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공자는 하급무사의 한 사생아로서 천한 신분의 인간이었으며 주공이 확립했다 하는 주()나라 예악의 사도(斯道)를 한 몸에 구현할 정도의 작위나 체험이나 연출이나 문화적 배경을 소유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나라 문화에 대한 집념은 마치 지금 어느 사람이 잉카제국 전성기의 왕조의례를 정확히 한 몸에 구현하고 있다고 호언하는 정도의 환상이나 사기술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환상에 공자는 집착했을까? 그의 일생은 정치권력에로의 지향성 일변도였으며, 그 지향성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무기로서 그러한 환상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향성의 궁극은 노나라 삼환(三桓)의 전복, 노나라 국공의 지위 획득, 결국 주나라 천자가 되고자 하는 일념에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일념이 없었더라면, 위기상황에서도 자신에게 구현된 사도는 하늘이 부여한 것이므로 인간세가 자기존재를 임의적으로 컨트롤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태연하게 앉아있을 정도의 돈키호테적 망상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꿈에서도 주공을 항상 그린 것은 결국 자신을 주공과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것이며 그것은 문ㆍ무ㆍ주공의 역성혁명과도 같은 어떤 혁명의 주체로서의 자기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정치혁명의 꿈은 좌절되었고, 그 좌절을 아사노 유우이찌는 공자의 르쌍띠망(원망, 원한)이라고 불렀다. 공자의 사후 공자학단의 문제의식의 주류도 바로 이 르쌍띠망의 해원(解怨)이었다. 그것은 실의(失意) 속에 세상을 떠난 공자의 혼을 구제하려는 노력이었으며 복수와 진혼(鎭魂)’의 달성이었다. 그들은 이 명()을 받지 못한 사나이를 지고의 신적 인간인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자공(子貢)으로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자사의 중용(中庸)에서 이미 공자를 무관의 제왕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이론적 틀을 완성시켰고, 맹자(孟子)500년 주기의 공자 왕자설공자의 춘추 저작설을 유포시켰다. 순자 역시 그의 제자들이 그를 공자에 못지않은 제왕(帝王)으로 묘사함으로서순자(荀子)』 「요문(堯問) 이러한 흐름에 가담하고 있다. 제왕으로서 신왕조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은 공ㆍ맹ㆍ순의 공통된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춘추를 중심으로 전개된 공자소왕설(孔子素王說), 신비적 공자상을 날조하는 위서(緯書), 그리고 13경 중에서 유독 경()이라는 명칭이 당초로부터 붙여진 효경(孝經)속에서 이미 공자는 선왕(先王)을 대치하는 지고한 존재가 되었으며, 전국말효경(孝經)을 제작한 공자학파의 음모는 효()라는 개념을 충()으로 전환시킴으로써니체가 말하는 부정적 가치의 전도 통일제국의 치론(治論)을 완성하고 암암리 그 제국을 효치(孝治)의 공자왕조(孔子王朝)로서 모델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뒤로 한고조 유방(劉邦)도 황제에 즉위한 후 곡부에서 공자제사를 지냈고(BC 195),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주공의 제사를 폐하고 그 자리에 공자를 선성(先聖)으로 승격시키고 주신(主神)의 좌()에 앉혔다. 천하 주현(州縣)의 학교에 공자묘(孔子廟)를 설치시키고 정관(貞觀) 11(637)에는 산동 연주(兗州)에 공자묘를 신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공자에게 선보(宣父)의 시호를 증()한다. 그리고 개원(開元) 27,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는 공자에게 문선왕(文宣王)의 시호를 추증하는 조()를 발()한다. 공자는 드디어 명실공히 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송나라 3대왕 진종(眞宗) 조항(趙恒)1008년 태산에서 봉선제를 올린 후에 곡부의 문선왕묘(文宣王廟)를 방문하여 모든 위의(威儀)를 갖추어 배례하기에 이른 것이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도 남경의 공자묘에 배례했고 곡부에 사자를 파견하여 공자제사를 올렸으나, 명나라 11대 황제 세종(世宗) 때에는 예송(禮訟)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그 여파로 공자를 상천(上天)의 제()와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이 부당하다 하여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왕호를 박탈하고 그냥 선성선사(先聖先師)’로 칭하고 제왕의 궁전을 의미하는 대성전(大成殿)도 묘()로 격하시킨다. 그러나 이족 왕조인 청나라가 들어서자 그들은 한족문화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하여 공자에 관한 모든 신성성과 왕호를 회복시키고, 중화의 지배자로서의 정통성을 과시한다. 그리고 곡부의 공묘를 장대한 황제의 왕성(王城) 규모로 꾸미고 강희대제는 친히 공자묘를 방문하여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큰절 한다)’의 배례를 행하였다.

 

이러한 청조의 열광은 캉 여우웨이(康有爲, 1858~1927), 금문경학의 절대적 우위에 기초한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의 유교신학(儒敎神學)의 선양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캉 여우웨이는 선왕지도(先王之道)의 조술자(祖述者)로서의 공자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시ㆍ서ㆍ예ㆍ악ㆍ역ㆍ춘추 육경(六經)이 모두 공자의 창작이며, 따라서 육경에 나타나는 선왕의 예제(禮制)는 모두 객관적 사실(史實)이 아니라 공자가 구세(救世)를 위하여 선왕에 가탁(假託)하여 개제(改制)한 신제(新制)라는 것이다. 공자는 탁고개제(託古改制)의 제작권능을 발휘한 구세의 성왕이라는 것이다. 캉씨는 그가 산 시대의 변혁의 논거를 공자에 구하여 결국 공교(孔敎: 공자종교)를 만든 것이다. 아사노 유우이찌씨는 이 모든 국가종교로서의 유교의 죄악의 근원이 공자 자신에게 있다고 고발하면서 그의 장황한 논의를 하기(下記)의 신랄한 메시지로서 끝맺고 있다.

 

 

공자의 사기술사적인 인생이야말로, 그 이후의 모든 범죄행태를 결정적으로 방향지운 악의 원흉이다. 유교라는 것은 일개의 필부에 지나지 않았던 공자가, 실제로 공자왕조를 창건했어야만 했던 무관의 제왕(소왕)이었다고 믿고, 춘추경을 비롯한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기만 한다면 중국세계(中國世界)에 태평성세가 도래한다고 믿는 종교이다. 범부 한 사람의 과대망상과 원념(怨念, 르쌍띠망), 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부정하고 세계에 복수를 성취하려고 하는 어두운 정열이, 이 세계에 기만과 허구에 가득찬 종교, 유교를 탄생시켰다

-공자신화(孔子神話), 319

 

 

나는 예수에게 다양한 비판의 메스가 가해질 수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공자에게도 다양한 시각의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사노씨는 근원적으로 너무 편협한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한문의 세계를 접근하고 있다. 한문의 세계를 해석하는 그의 논리는 너무도 서구적이며 너무도 평면적이다. 그러한 논리의 틀로써 한문의 자료를 나열하면 그 나름대로 매우 그럴듯한 구조가 부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의 르쌍띠망이 아닌 아사노씨 자신의 천박한 르쌍띠망의 소산일 수가 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아사노씨가 르쌍띠망을 니체철학의 전체적ㆍ유기적 맥락 속에서 근원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르쌍띠망은 단순한 좌절과 복수’, 이런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예도덕(slave morality)과 관련되어서만 의미를 갖는 개념이며, 약자에게 나타나는 도덕적 이원성의 허구를 전제로 한다. 르쌍띠망은 약자가 겪는 경멸, 굴욕, 억압, 잠복된 증오, 무기력한 복수심으로 야기되는 반동적 감정이며 쓰라린 좌절의 반응체계이다. 니체는 말한다.

 

 

도덕에 있어서 노예의 반란은 르쌍띠망이 그 자체로 창조적이 되고, 가치생산하게 될 때 가동되기 시작한다. 진정한 반응체계, 행위의 보상이 거부되는 성격의 르쌍띠망은 가상적인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보상받는다.

모든 고귀한 도덕은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전개해 나가지만, 노예도덕은 그 출발부터 항상 밖에 있는 것’, ‘자기와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부정이 곧 노예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이다. 가치를 설정하는 시선을 이렇게 전도시키는 것, 즉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리는 대신 반드시 밖으로 향하게 만드는 것, 이런 것은 실로 르쌍띠망의 본질에 속한다. 노예도덕은 존재하기 위하여 항상 먼저 대적적인 외부세계를 필요로 한다. 생리적으로 말해도, 그것은 반응하기 위하여서 외적인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노예도덕의 작용은 근본적으로 반작용인 것이다(On the Genealogy of Morals, I-10).

 

니체는 또 말한다.

 

 

고귀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신뢰와 개방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 반해겐나이오스’, 고귀한 혈통의라는 단어는 정직한’, 그리고 순박한이라는 뉘앙스를 강조하는 말이다, 르쌍띠망의 인간은 정직하지도, 순박하지도 않으며, 자기자신에 대해서 솔직하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만 일삼는다. 그의 정신은 숨을 곳, 은밀한 골목길, 뒷문을 사랑한다. 은폐된 모든 것을 자신의 세계로, 자신의 안정으로, 자신의 생기(生氣)로 유혹하는 것이다. 그는 침묵할 줄 알며, 잊어버리지 않고 꽁할 줄 알며, 기다릴 줄 알며, 잠정적으로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고 굴종할 줄 안다. 르쌍띠망의 인간 종족은 어떠한 고귀한 종족보다도 훨씬 더 영리하게 된다(Ibid).

 

 

니체가 르쌍띠망의 모델로 삼은 것은 유대민족의 종교적 성향이었다. 유대민족은 현실적인 허약함을 도덕적 이원론으로 극복하려 했고, 자신을 억압하는 자들의 가치를 전도시킴으로써 정신적인 복수를 감행했다. 선과 악의 확연한 구분은 선민의 축복과 타민족의 저주를, 구원과 멸절, 천국과 현세, 빛과 암흑의 타협할 수 없는 홍구(鴻溝)를 노출시켰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에게만 신의 축복이 내려지고, 고귀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힘있는 자들은 오히려 사악한 자, 잔인한 자, 음란한 자, 무신론자, 저주 받은 자, 망할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 가치전환을 상속한 사람이 바로 유대교에 가장 대적적인 것처럼 보이는 예수라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복수의 정신이 아무리 섬세해도 도대체 이보다 더 위험한 미끼를 생각해낼 수 있단 말인가? 유혹하고, 도취시키고, 마비시키고, 압도시키고, 붕괴시키는 힘에 있어서 신성한 십자가라는 저 상징에,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라는 저 전율할 만한 역설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신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마지막 극단적인 잔인함의 미스테리에 견줄 만한 것이 있을까?”

 

니체의 이토록 화려한 레토릭의 언어들은 단순히 문학적인 현시가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치가 전도되었다는 자각인 동시에 그가 살고 있는 현세를 개벽해야만 하겠다는 피 토함의 절절한 언어들이다. 그가 말하는 르쌍띠망의 독소는 단순히 유대인의 역사적 좌절과 복수를 지칭하는 사태가 아니라, 그 정신적 복수가 초월적 세계에로의 집념을 낳았고 그것이 현실적 선악의 허구적 근원이 되었으며 인간의 대지에서의 삶을 거부하게 만든, 인류의 피 속으로 2천년 동안 서서히 번져나간 독소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초인은 초월적 인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지의 의미인 것이다.

 

공자는 우선 르쌍띠망의 주체로서의 인종적 단위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선민적 고민이 근원적으로 없다. 그리고 자기의 철학적 가치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르쌍띠망이 전제로 해야만 하는 대적적 외부세계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공자의 삶에는 르쌍띠망의 반사적 결정체인 초월적 세계가 없다. 공자는 그러한 모든 초월적 허구를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하여 삶을, 귀신에 대하여 인간을, 하늘에 대하여 이 땅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공자는 철저히 대지의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대지의 의미를 발견하고 대지의 인간으로서 죽었다.

 

공자의 삶을 관철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정치권력에로의 지향성이라는 것은 부정할 건덕지조차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르쌍띠망의 픽션이 아닌, 바로 니체가 말하는 빌레 추르 마하트(Wille zur Macht)’인 것이다. 이것은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가 말하는 마하트(Macht, )’는 우주의 자연적 생명력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과 그의 권력의지는 모두 우주의 생명력 속에서 용해되는 것이다.

 

아사노씨가 말하는 중국정치권력의 제도적 장치로서의 공교(孔敎)의 위험성은 분명 경계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것은 결코 가톨릭교황청과도 같은 제도적인 압제성을 과시한 적은 없다. 아사노씨는 주자학이나 양명학 같은 운동을 가톨릭 본류에 저항하는 프란시스 어브 아씨시(Saint Francis of Assisi, 1182~1226)의 참신한 방계종파운동과 같은 느낌으로 바라본다. 개인이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주자학이나 양명학의 흐름은 국가종교로서의 유교의 대세에서 본다면 마이너한 신흥종교일 뿐이라는 것이다. 매우 계발적인 역설이긴 하지만, 아사노씨는 유교의 대세에 있어서의 본말을 전도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사노씨의 문제의식이 근본적으로 일본사회의 유교적 허구성에 있거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의 유교적 국민도덕을 가장한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를 표방하고 있다면 매우 존경스러운 학자의 태도이지만, 그렇다면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을 심화시키는 방향이 보다 정직하고 용기있는 태도일 것이다.

 

왜 애꿎게 공자라는 오토코(おとこ, , 사내)’를 그토록 사감(私感)서린 언어로 저주해야만 할까? 아사노씨는 중학교 2학년 때 논어를 사서 보고 공자로부터 감동을 받으며 자라났다가 생애 어느 시점에 니체를 읽고 보다 적극적으로 공자를 사랑해야겠다는 심정이 생겨 본서를 집필케 되었다는 애매한 소리를 하고 있으나, 어찌하여 니체로부터의 감동이 니체가 증오하는 유대교 - 기독교 전통의 허상을 공자와 유교에 뒤집어 씌우는 허구적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어찌하여 니체가 증오하는 도덕의 계보를 초극하려고 노력한 공자라는 사나이를 그 계보에 종속된 인간으로 규정하려고 애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규명하려는 것은 유교가 아닌 공자라는 역사적 인간의 소박한 다면적 실상이다.

 

(), () (), ()
죽음의 문화 삶의 문화
종교의 문화 인문의 문화
바카스적 문화 아폴로적 문화
주색의 문화 논어의 문화
()의 문화 ()의 문화
춤의 문화 문자의 문화
취함의 문화 깨임의 문화
신기(神氣)의 문화 ()의 문화
()의 문화 ()의 문화
저 하늘의 문화 이 땅의 문화
소인(小人)의 문화 군자(君子)의 문화
소인유(小人儒)의 문화 군자유(君子儒)의 문화

 

공자의 삶은 소유적(小儒的)인 르쌍띠망을 초극하고 진정한 강자인 대유(大儒)가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의 철학이 후대의 독존유술(獨尊儒術)적 정치이데올로기로 활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로마세계에 있어서의 국교(state religion)개념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적 도덕이념이며 초월적 권위나 묵시적 환상은 아니었다. 그 세속적 도덕이념이 정치적 권력과 결탁되어 저지르는 문제는 일반 정치제도의 보편적 성향의 한 패턴일 뿐이다. 물론 그 죄악의 탓을 그 남상에 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 공자는 이미 역사 속에서 그러한 후대적 규정으로부터 항상 새롭게 초탈되어왔다.

 

공자의 삶의 출발은 죽음이었다. 비천(鄙賤)한 삶의 환경 속에서 죽음의 제식과, 그 제식에 동반된 시례악(詩禮樂)을 익혔다. 그러나 공자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탈출하느냐에 있었다. 죽음의 가치를 어떻게 삶의 가치로 전환하느냐?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 공자는 철저히 이 현세 속에서의 자기 존재의 가치를 알고 싶어했다. 공자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죽음의 세계를 철저히 삶의 세계로 이전시키고 싶어했다. 그것은 곧 자기뿌리와의 결별이었다. 죽음의 가치를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그 열쇠는 인간 공자에게 있어서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이 바로 학(, 배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논어라는 서물의 첫 글자인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학()이라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의 열음이다. 끊임없는 대지의 삶의 가능성을 향한 도전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수용이다. 공자는 그의 삶에 대한 자서전적 고백 속에서 그 첫 구절을 다음과 같이 발하고 있다(爲政).

 

 

나는 열 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15세 즈음, 그의 어머니가 죽을 즈음, 그가 양호(陽虎, 양 후, Yang Hu)라는 필생의 숙적 사나이와 첫 대면을 할 즈음, 비천하게 살아온 자기 삶을 반추하기 시작할 즈음, 그는 학 즉 배움이라는 삶의 행위로 몰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열 가호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있을 거야.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걸!(公冶長)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이처럼 공자의 젊은 삶을 자신있고 정직하고 소박하게 그려낸 명구절은 없을 것이다. 공자가 낙양에 가서 노자(老子, 라오쯔, Lao Zi)를 만났다든가, 청년공자가 또 제나라에 가서 장중한 소()의 오케스트라 음악에 충격을 받는다든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공자의 삶이 얼마나 강렬한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충격으로 가득찬 것이었나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학의 대상은 물론 예()였다. 그러나 공자의 학은 이 죽음의 예를 어떻게 삶의 예로 전환시키느냐 하는 학이었다. 이 학은 곧 요새말로는 정치(politics)와 교육(education)을 의미한다. 공자에게서 정치는 곧 삶의 예의 정치였다. 공자에게서 교육이란 곧 이 삶의 예를 제자들의 삶에 구현시키는 것이었다.

 

()는 곧 삶의 질서(Order of Life)의 총칭이었다. 그가 바로 주공의 태묘(太廟)에서 자신을 힐난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묻는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다[是禮也。 「팔일(八佾)15]라고 말했을 때의 예가 곧 고착된 의례로서가 아닌 삶의 상황적 질서를 의미했던 것이다. 공자는 이제 개비적인 삶을 탈피하여 철저히 정치적 삶을 추구하게 된다. 정치적 권력만이 그에게 예악의 실현의 기회를 허용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공자는 대부(大夫)가 된 적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대로, 공자가 50세 전후로 대사구(大司寇, 따쓰커우, Da-si-kou)’라는 벼슬을 했다고 해서 아무 의식없이 그를 대부(大夫)라고 이야기한다. 요시카와 코오지로오(吉川幸次郞)와 같은 사계의 대가도 별 생각없이 여기저기서 공자를 노나라의 대부로 기술하고 있다. 보통 공자를 대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대사구라는 벼슬이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대부로서의 식습을 분봉받았으리라고 하는 전제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과연 공자가 정확하게 대부로서 분봉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가 대부에 준하는 대접을 받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는 순수한 조정의 관료로서 활약했다. 공자는 대부가 되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바로 공자를 공자다웁게 만드는 사실의 핵심이다. 공자 본인도 그래서 항상 나는 대부의 뒤를 따르는 사람[吾從大夫之後(선진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공자시대의 대부(大夫)’라는 것은 후대 특히 송대(宋代)에 형성된 사대부(士大夫)’라는 막연한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경대부(卿大夫)’를 의미한다. 공자시대는 진시황에 의하여 시작된 군현(郡縣)제도 이전의, 인류문명사상 서구의 중세와 일본의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에서나 목격할 수 있는 봉건(封建)제도라는 매우 특이한 정치제도의 규율 속에 있었다. 그것은 군사ㆍ경제ㆍ정치적으로 독립된 단위들 사이의 계약관계를 의미하는 특이한 분권적 위계질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천자(天子) ()
제후(諸侯) ()
대부(大夫) ()
() ()
서인(庶人) ()

 

은대에만 해도 천자를 제()라 불렀으나 주대에 내려오면서 무왕을 비롯하여 왕()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주대의 왕은 천자를 의미한다[其後世貶帝號, 號爲王. 殷本紀]. 제후는 천자로부터 국()을 봉토(封土)로 받는다. 그리고 대부(大夫)는 반드시 제후로부터 식읍(食邑)을 분봉(分封)받는다. 대부는 단순한 관리(officer)의 직위가 아닌 봉토(封土)를 가지고 있는 토착세력이다. 그 유명한 맹손, 숙손, 계손의 삼환(三桓)이 바로 대부들이다. 다시 말해서 대부는 나라 안의 작은 나라를 방불케 하는 조그만 성읍(城邑)을 보유하는 군사ㆍ경제 정치의 독립단위인 것이다. 그러나 란 그러한 식습을 보유하지 않는다. 사는 단지 녹(祿: 월급이나 연봉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관리직책인 것이다. 그리고 매우 유동적인 직책이다. 요새말로는 쉽게 임용되고 쉽게 해고되는 직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정적인 경제적 하부토대가 없는 것이다.

 

공자가 어렸을 때 위리(委吏), 직리(職吏, 乘田), 사공(司空) 벼슬을 했다는 것은 계씨 즉 대부의 사적 조직 내의 관리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56(정공 14) 때 대사구(大司寇) 노릇을 했다는 것은 제후, 그러니까 국공(國公)의 관리를 했다는 것이다. 둘 다 사()라는 직분의 한계 속에 있는 것이지만 계씨의 가신노릇을 한다는 것은, 요새로 치면 사기업의 임원노릇을 하는 것이고, 정공(定公) 밑에서 관리가 된다는 것은 중앙청의 국가공무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그룹의 국장이나 중앙청의 국장이나 다 같은 사()이지만 격()이 다르고, 세력의 범위가 다르다. 공자와 그의 제자집단은 공가(公家)와 사가(私家)의 관료조직을 들락거린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자는 꾸준히 대부의 직책을 탐내었다. 그가 제나라에서 경공(景公)에게 등용된다함은 곧 제나라의 대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법가계열의 재상인 안영(晏嬰, 옌 잉, Yan Ying)이 그를 니계(尼谿, 니시, Ni-xi)의 땅에 봉()하려는 경공(景公, 징꽁, Jing Gong)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사실 안영은 공자의 은인이다. 공자가 만약 경공에 의하여 대부로 등용되었다면, 공자는 오늘날 정자산(鄭子産, 정 쯔츠안, Zheng Zi chan)이나 제안영(齊晏嬰) 이상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라 영공(靈公, 링꽁, Ling Gong)과의 관계도 동일한 것이었다. 공자는 대부(大夫)의 직책이 그에게 어떤 정치적 음모나 사회적 이상의 꿈을 실현시키는 확고한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양호의 꼬임에도, 공산불뉴(公山不狃, 꽁산 뿌니우, Gong-shan Bu-niu)의 유혹에도 공자는 항상 쉽게 넘어갔다. 공자는 정치적으로 매우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공자의 설레임은 항상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자로에 의하여 좌절당했던 것이다. 자로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주소정묘(誅少正卯)

 

 

 ()의 새로운 의미

 

 

공자는 사()로 살고 사로 죽었다. 공자의 삶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결코 이 사()라는 성격에서 이탈해본 적이 없다. 그의 제자 중에 나중에 대부가 된 자도 적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공자의 교단은 사의 집단이었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사실은 어폐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라는 개념의 모든 속성을 최초로 구현한 자가 바로 공자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삶으로써 사를 규정해야지, 사로써 공자의 삶을 규정할 수 없다. 공자에게서 최초로 ()’ 새로운 의미맥락이 생겨났다면, 마찬가지로 ()’도 공자에게 이르러서 새로운 의미맥락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사는 전통적으로 공()ㆍ경()ㆍ대부(大夫)의 계층과 민()의 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관리계층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의 외연과 내연이 다르다. 시경에 흔히 나오는 사녀(士女)’라는 표현에서의 , 거의 통속적 의미에서 계집[]’과 짝을 짓는 사내[]’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즉 어떤 계급적ㆍ신분적 의미로 한정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의 원초적 의미는 그 자형이 도끼나 도끼를 상징하는 의기(儀器)로 상정되듯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문사(文士, 선비)적 의미보다는 단순한 전사(戰士)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즉 왕이나 제후의 공민으로서 전투에 참가할 자격을 지니는 사람을 무분별하게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공자 이전의 사의 일차적 의미는 문적(文的)인 의미보다는 무적(武的)인 의미가 더 강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관학교라 할 때의 사관(士官)’의 총체적 의미를 생각하면 아마도 연상이 쉬울 것이다. 더욱이 춘추와 전국시대를 통틀어, 특히 공자의 시대에는 문()ㆍ무()의 구분이 거의 없었다. 중앙청 과장이 따로 있고, 소위(少尉)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행정업무인력이 곧 전투수행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공자시대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전차전(戰車戰)’ 중심이며, 보병(步兵)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전국(戰國)시대로 내려가면서 전투의 양상은 보병전(步兵戰)’ 중심이 되면서 대규모화되고 장기화되는 양상을 띤다. 공자시대의 사의 기본기는 육예(六藝) ()ㆍ어()’였다. 그것은 전차전의 특성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전차수레에 타서 말을 모든 것을 ()’라 했고, 그 수레에 타서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을 ()’라 한 것이다.

 

자한편에 달항당인(達巷黨人)이 공자를 비판하여 박학이무소성명(博學而無所成名)’이라 한 대목이 나오는데, 나는 이 구문에서 ()’를 전ㆍ후로 하여 어떤 문ㆍ무의 대립적 맥락이 감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학(博學)’은 공자가 추구한 문적인 세계지만, 그것은 사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이 깔려있는 것이다. ‘무소성명(無所成名: 이름을 이룬 바가 없다)’이란 곧 사의 본질인 무인으로서 이름을 날린 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공자의 대답이 구체적으로 이해가 된다.

 

 

공자가 이러한 비판을 듣고 문하의 제자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뭘 잡을까? 말고삐를 잡을까? 활을 잡을까? 난 역시 말고삐를 잡아 이름을 날려야지.”

子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執?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

 

 

여기서 공자는 자신도 전차(戰車)몰이의 명수라고 하는, 사로서의 재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육예의 커리큐럼이, ()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라고 하는 사실은 곧 공문의 사의 집단이 기본적으로 문ㆍ무 통합적 인격체의 집단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예악은 문적이다. 사어는 무적이다. ‘서수는 문무에 공통적인 기본교양이다. 육예는 실제적으로 공문(孔門)에서 그 구체적 커리큐럼이 완성된 것이다. 물론 공자 이전에도 이러한 커리큐럼의 조형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소수 귀족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한, 국도(國都)에 한정된 특수한 학교들의 커리큐럼이었다. 그러나 공자시대에는 그러한 학교제도는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존립기반을 상실했다. 따라서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공자는 새로운 교육의 커리큐럼과 고매한 정신이상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요새처럼 젊은이들 가운데 상무(尙武)정신이 희박한 가치관 속에서는 육예가 이해되기 힘들다. 전차를 몬다든가[], 활을 쏜다든가[]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예악의 인문적 교양과 완전히 동일한 교육적 가치였고, 그러한 교육을 받아 사가 되고, 사가 되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영예였다. 그리고 군공(軍功)에 의하여 작위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군인과 학자가 요즈음처럼 직업적으로 분리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사학의 문제의식 속으로 깊게 진입하여 생각해보아도 사실 이 라는 개념은 도무지 명료한 계급적ㆍ분적 규정이 불가능하다. ‘계급(Class)’이다, ‘신분(Status)’이다 하는 말들이 모두 서양사학에서 명료히 규정되고 있는 말들이며 그러한 개념이 도무지 공자시대의 의 정확한 외연이나 내연을 그려내기에 적합하질 않기 때문이다. 계급이란 부르죠아혁명 이후에나 쓸 수 있는 개념이며, 신분이란 부르죠아혁명 이전의 중세기적 체제 안에서 쓸 수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는 계급도 아니요, 신분도 아닌 것이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첫 머리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맹자와 양혜왕의 하필왈리(何必曰利)”의 대화 속에서, ‘이 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대부가 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분명하게 사서인(士庶人)’이 하나의 통합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곧 사()와 서인(庶人) 사이에 뚜렷한 신분적ㆍ계급적 차별이 없는, 상하이동(upward and downward mobility)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사는 분명히 서인 위에 가장 직접적으로 군림하는 지배계층임이 분명하다. 물론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전쟁이 대규모화 되어 군대편제 속에 서인들의 참여가 필요했고, 군부(軍賦)의 징수가 서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으므로 사와 서인의 구분은 더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혹자는 사()의 존재를 지역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사()는 씨족 중심적인 성읍(城邑) 국가에 있어서 국성(國城) 안에 사는 국인(國人)이며, 이는 밖의 ()’에 사는 야인(野人) 즉 서인(庶人)들과는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도 절대적인 준거를 찾을 수 없다. 사가 현실적으로 국인(國人) 중에서 공경대부(公卿大夫)를 제외한 말단의 관료층으로 이해하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문제는 사가 정확히 세습적인 신분이 아니라고 한다면, (: 현실적 관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인간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냐는 것이다. 삼례(三禮) 의례(儀禮)라는 책 중에는 사관례(士冠禮)니 사혼례(士昏禮)니 사상견례(士相見禮),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 사상례(士喪禮), 사우례(士虞禮) , 사를 규정하는 매우 까다로운 예식들이 질서 정연하게 기술되어 있다. 의례의 정확한 성립시기와 맞물리는 문제이지만, 이러한 예에 의하여 규정되는 사의 신분의 성립은 결코 공자시대로 올라갈 수는 없다. 공문의 제자(諸子)들이 모두 이렇게 까다로운 삶의 절차 속에서 규정되는 사의 신분을 획득한 그런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이러한 모든 제반논의와 관련하여 사의 문제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계층의 공간적ㆍ시간적 구조를 퍽 소상하면서도 명료하게 다룬 논문이 있다. 李成九, ‘春秋戰國時代國家社會’, 講座中國史 I, 지식산업사, 1998.

 

 

 

 

 민과 호학과 예와 사문

 

 

()뿐만 아니라 (, 庶人)’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로 애매하고 유동적이다. 우선 논어에서 말하는 은 절대적인 다수의 대중을 종국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며, 그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등 희랍철학에서 말하는 폴리스의 시민시민은 상민(常民, the common people), 군인(the soldiers), 수호인(the guardians)의 세 계층을 합친 개념과도 같이 광범위한 노예계층을 전제로 한 제한된 소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희랍의 민주제의 개념은 결코 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논어에서 말하는 이야말로 오히려 21세기 우리사회에 적응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이고 종국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맥락에 따라서 군() 앞에서는, 경대부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무차별적으로 민의 개념 속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춘추전국시대의 문헌에서 사민(士民)’이니 사졸(士卒)’이니 하는 표현은 대체적으로 장교와 졸병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는 특수한 기술을 보유한 지도적인 전사들이며, 민 즉 서인에서 차출된 전력은 대개 보병이나 치중대(輜重隊)의 노역을 제공하는 천역(賤役)의 사람들이었다.

 

공자세가(孔子世家)2에 기록되어 있는 공자 청년시절의 일화, 즉 계씨의 문전에서 양호를 최초로 만나는 대화는 지극히 시사적이다.

 

 

계씨는 사를 대접하려 한 것이다. 감히 너 같은 놈을 대접하려는 것이 아니다. 끼웃거리지 말고 썩 꺼져라!

季氏饗士, 非敢饗子也.

 

 

이것은 공자가 모상(母喪) 중에 상복을 입고 계씨집 잔치에 나타났을 때 당한 봉변이다. 공자는 아무말 없이 굴욕을 참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孔子由是退].

 

이 양호의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양호는 공자보다 약간 연배의 사람이며, 즉흥적으로 시운(詩韻)을 밟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문사(文辭)의 교양인이었다, 17세 전후의 공자는 도저히 로서 간주될 수 없는 수준의 천민이었다는 것이다. “계씨는 사를 향응하려 한 것이다. 너 같은 천한 놈을 향응하려 한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에 깔려있는 정조는, 곧 공자는 어렸을 때 라는 신분과는 거리가 먼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로서조차 간주될 수 없었던 천민, 송의 후예며 성인(무당)의 후예인 공자는 과연 어떻게 사의 최고지위인 대사구(大司寇)’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대부분의 선진(先秦) 전적에는 사구(司寇)’로만 되어 있다. ‘대사구(大司寇)’란 표현은 공자세가(孔子世家)의 창작일 수도 있다. 치엔 무(錢穆)는 사구에는 대()ㆍ소()의 구분이 있다고 한다. 대사구는 소사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답을 주는 것이 논어, 논어속에 담긴 공자의 삶의 향기 그 자체인 것이다. 즉 공자의 삶에서 비로소 최초의 의 의미가 구현되어 나간 것이며, 공자를 통하여 의 의미가 새로 창출된 것이다. 공자는 사로서 간주될 수 없는 소년이었다. 이 미천한 소년이 사의 지도적 인물로 변화되어간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곧 공자의 호학(好學)’이다. 공자의 학의 대상은 ()’였다. 공자가 사를 지향한 배움으로서의 예는 곧 죽음의 예가 아닌 삶의 예였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질서의 예였던 것이다. 공자는 학을 통하여 예를 새롭게 창출했던 것이다.

 

공자가 예를 배웠다는 것은, 마치 오늘날 내가 멕시코 유카탄반도(Yucatán)의 치첸잇차(Chichén Itzá) 등지에 널려있는 석판의 판화를 보고 9세기경의 찬란했던 마야문명의 의례(儀禮)를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노력과도 유사하다. 공자가 재현하려 했던 것은 주공의 주례였다. 그러나 사실 소년 공자는 전혀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로칼한 당골네의 상례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고례의 담지자로서 공자의 자부감은 그의 호학(好學)의 행위로부터 얻어진 결과였다. 공자는 일찍 문자를 터득하였고 문헌을 연구하였으며 가능한 모든 사람들의 구전자료들을 모았다. 그는 끊임없이 물었다. 그는 물어서 배웠다[問而學], 그것이 공자의 사문(斯文)’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자부감은 당대의 지배계급에게는 매우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외경의 대상이었다. 실상 그것은 공자의 허풍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의 허풍은 진실한 삶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정치적 권력의 기회를 허용하는 찬스였다. 그는 고례(古體)의 회복을 통하여 새로운 도덕적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꿈이 구() 한 사람의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집단적 행위였다는 사실이야말로 공자를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공자는 도덕을 정치화(politicization of morality)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정치를 도덕화(moralization of politics)하려 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집단적 노력이었다.

 

 

 

 

 공자 집단의 성격과 구성원

 

 

공자의 집단의 성격은 애초에는 무()와 무()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무()와 무()의 성격 속에서 새로운 문()의 요소를 창출했다. 이 새로운 문의 요소야말로 향후의 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사는 신분적으로, 계급적으로 고정된 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사문(斯文)의 획득자가 된 것이다. 공자가 새롭게 규정한 사문(斯文)을 공부(工夫)에 의하여 획득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교단이야말로 중국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사의 전문적 집단이다. 그것은 기존의 어떤 정치세력과도 타협할 수 없는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

 

()
() + () ()

 

그리고 이러한 공자의 사의 집단이야말로 구체적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효시(嚆矢)를 이루는 것이다. 이후의 모든 ()’들이 사실 공자의 교단을 모방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용병집단인 묵가(墨家)’였다. 묵자(墨子, 뭐쯔, Mo Zi) 또한 송인(宋人)이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리고 묵가집단이야말로 제민지배체제(齊民支配體制)제민이란 원칙상 신분의 귀천, 경제적 빈부의 차이가 없는 국가의 공민으로서 지배체제의 통제를 무차별하게 받는 존재를 위한 변법(變法)의 배후주체세력이었다는구체적 사례로서 진묵(秦墨)’을 논증 이성규(李成珪)의 논의는 설득력 있는 것이다中國古代帝國成立史硏究, 一潮閣, 1997 중에서 3齊民支配體制形成擔當集團을 보라.

 

법가사상가들은 사실 어느 기존 집단으로부터 이탈된 이단적인 개인의 성격을 띠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학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민적(齊民的) 보편주의(universalism)의 사상적 기저는 실제로 묵가(墨家)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공자집단에게 내재하는 보편주의를 극단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집단 속에 이미 영토국가적 제국(帝國) 출현의 맹아적 요소가 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공자의 사의 집단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에 의하여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여기에 해답을 주는 한마디가 나는 ()’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무리는 였다. 이러한 나의 갑작스러운 결론에 독자들은 의아심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말이 아닌 장자(莊子, 주앙쯔, Zhuang-Zi)의 말이다. 장자는 공자집단을 도적의 무리로 규정하는데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고전의 언어는 우리의 현재언어의 맥락 속에서 왜곡해서는 아니 된다. 논어』 「자로에서 말하는 ()’의 의미를 오늘날의 정신병자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미셸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논구할 때 광기를 각시대적 맥락의 특수성에 따라 고찰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도 입증되는 것이다.

 

()’의 의미의 본질에 관하여 역시 이성규의 논의가 매우 시사적이다中國古代帝國成立史硏究, 1편 제1장 제3, “春秋時代新聚落.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는 성읍국가의 기반이 흔들려가는 시대에 국과 국 사이에, 봉강(封疆)’의 사이에 어느 국에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공백지대에서 새로운 취락을 형성하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규정되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기존의 읍의 지배체제의 가혹한 수탈로부터 이탈된 사람들이며, 따라서 도적질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확고한 존재이유를 갖는 집단이었다. 성읍국가의 붕괴과정에서 이러한 군도(群盜)의 출현은 적지 않은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도는 균분(均分)’을 지향하며, 본질적으로 유객(遊客)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기존의 어떤 체제적 가치와도 타협하지 않는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들일 수 있다. 제자백가의 모태가 바로 이 도에 있었다고 해도 망언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 ()이니, ()니 하는 말들이 공자시대에는 모두 상통하는 말들이었다. 논어에 계강자(季康子, 지캉쯔, Ji-kang-zi)를 걱정하여 공자에게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안연顔淵18), 이를 둘러싼 문답의 배경에는 공자 자신이 도로서 규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체험과 동정이 서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공자는 곡부시내에 영수학원이나 무술도장을 차렸던 사람이 아니다. 공자라는 천민무당의 아들 밑에 와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사()로의 출세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개비에서 비개비로의 전환의 길은 참으로 요원한 것이었다.

 

공자라는 성인 밑에 모여든 사람들은, 물론 곡부에 사는 안씨 자제들 같은 읍내(邑內)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뿌리없이 부랑하는 갈 곳 없는 유사(遊士)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가치관을 희구하는 성실한 도()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자연발생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그 구심점에 공자라는 거인(巨人)이 있었다. 짱구대가리에, 거구의 몸체, 뛰어난 음악의 장인, 고례(古禮)의 담지자(擔持者), 잡기에 능한 달인(達人), 엄청난 정열의 호학지사(好學之士), ()ㆍ어()의 강력한 무장, 이러한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구현체로서의 구()가 곡부에 살고 있다는 소문은 유협(遊俠)들의 세계에 널리널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자를 가장 유니크하고 위대하게 만든 것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첫째가 그가 섬세한 음악의 명인이라는 사실이고,

그 둘째가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문자의 세계에 달통했다는 사실이었다.

공자는 그를 찾아오는 도()들에게 음악을 통해 새로운 감수성(aesthetic sensitivity), 문자를 통해 새로운 역사성(historical perspective)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공자교단의 형성에 결정적인 사회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바로 공자의 평생의 반려가 된 자로(子路, 쯔루, Zi Lu)라는 인물과의 만남이었다. 자로는 도였다. 문자 그대로의 도였다. 공자는 자로를 만나 더불어 공생애를 시작하였고, 자로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삶을 마감하였다. 공자는 자로의 시체가 토막이 나서 소금에 절여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공자는 친구를 대하는 예로써 가운데 뜨락[中庭]에 내려와서 어쩔 줄 모르며 서성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자는 소리쳤다. “우리집 안에 있는 짠지독(절임독)을 몽땅 엎어버려라[遂命覆醢]!” 그리고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공자는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종기해).

 

 

泰山其頹乎 태산이 드디어 무너지도다!
梁木其壞乎 대들보가 마침내 쓰러지도다!
哲人其萎乎 ~ 철인이 소리없이 스러지누나!

 

 

 치임별귀(治任別歸)

 

 

 자로의 첫 대면과 비장한 최후

 

 

자로와 공자가 처음으로 상면하는 장면과, 자로의 최후를 기록한 두 장면은 공자 일생의 드라마를 가장 생생한 콘트라스트(contrast) 속에서 전달해주는 감동의 씬들이다. 첫 장면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 장면은 사기(史記)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에 자세하다.

 

자로와 공자가 첫대면하는 장면을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6에서 다음과 같이 그 대강을 스켓치하고 있다.

 

 

자로는 본성이 야인기질이 있어 거칠었다. 용감하고 힘쓰는 일을 좋아하였다. 그 심지가 강직하고 직설적으로 뒤받기를 좋아했다. 수탉의 꼬리를 머리에 꽂고 산돼지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허리에 찼다. 그리곤 공자를 업신여기며 공자를 때릴려고까지 하였다.

子路性鄙, 好勇力, 志伉直, 冠雄雞, 佩豭豚, 陵暴孔子.

 

공자는 자로를 예로써 대하며 살살 달래어 인도하였다. 후에 자로는 유복을 입고, 폐백을 드려 죽음의 충절을 맹세하고, 문인들을 통해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孔子設禮稍誘子路, 子路後儒服委質, 因門人請爲弟子.

 

 

자로는 변(, 삐엔, Bian)땅의 사람이었다. ()땅은 노()와 위() 사이에 있는 새로운 개간지였다. 집해(集解)에 자로는 변의 야인(野人)’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야인이란 곧 사의 신분이 아닌, 국 밖의 야에서 사는 사람인 것이다. 한마디로 체제에 예속됨이 없는 방외인이었고, 도였고, 깡패였다. 그의 외관의 형용이 무척 재미있다. 머리에 수탉의 깃털을 꼽았고, 허리에 산돼지 가죽주머니를 찼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Now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and had a leather girdle around his waist, and ate locusts and wild honey. (마가1:6)

 

 

자로의 무인다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세례요한의 모습이나 변땅의 자로의 모습은 같은 야인으로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만나 물의 세례를 주려 했지만, 자로는 공자를 만나자마자 쥐어 팰려고하였다. 자로는 무지막지한 깡패였다. 이러한 야인 자로를 공자는 같은 무력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예를 설()하였다. 그리고 인격으로 감화시켰다. 강직한 자로는 공자의 인격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자로는 평생, 공자 곁을 지켰다. 한번 굳게 맺은 맹서를 자로는 평생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강직한 사람이었다. 사실 공자는 자로 덕분에 그의 정치적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가 대사구가 되어 삼환(三桓)의 습성을 무너뜨리고 무장해제를 시키는 혁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자로 덕분이었다. 그리고 실각하자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를 첫 망명지로 삼은 것도 자로의 처형 안탁추(顔濁鄒, 옌 주어쩌우, Yan Zhuo-zou)가 위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로는 위나라에 대소가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공자는 평생을 자로의 보호 속에 살았다. 공자는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9에서 고백하였다.

 

 

내가 자로를 얻게 된 후로부터는 내 귀에 험담이 사라지게 되었다.

自吾得由, 惡言不聞於耳

 

 

공자가어(孔子家語)』 「자로초견(子路初見)에는 두 사람의 만남을 다음과 같은 대화로 시작하고 있다.

 

 

자로가 처음 공자를 만났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子路見孔子, 子曰: “汝何好樂?”

 

자로가 대답하였다. “나는 긴 칼을 좋아한다.”

對曰: “好長劍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대의 능한 바에다가 학문을 얹히기만 한다면 아무도 그대를 따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孔子曰: “吾非此之問也, 徒謂以子之所能, 而加之以學問, 豈可及乎

 

자로가 말하였다: “학문이라는 것이 도무지 무슨 도움이 될 것이 있는가?”

子路曰: “學豈益哉也?”

 

공자가 말하였다: “임금이 되어서 간해주는 신하가 없으면 실정하게 되고, 선비는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귀가 멀게 된다. 미친 말을 몰 때는 채찍을 잠시도 놓을 수 없고, 활을 당길 때는 이미 두 번 다시 당길 수가 없다. 나무는 목수의 먹줄이 닿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비판을 받아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 배움을 얻고 물음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나? ()을 어지럽히고 사()를 미워하면 사회와 마찰을 일으켜 감방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니 사나이라면 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孔子曰: “夫人君而無諫臣則失正, 士而無敎友則失聽御狂馬不釋策, 御狂馬者不得釋箠策也操弓不反檠弓不反於檠然後可持也木受繩則直, 人受諫則聖, 受學重問, 孰不順哉毁仁惡仕, 必近於刑謗毁仁者憎怒士人必主於刑也君子不可不學

 

자로가 굴복하지 않고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남산에 푸른 대나무가 있는데 휘어잡지 않아도 스스로 곧고, 그것을 짤라 화살로 쓰면 가죽과녁을 뚫어버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뭘 또 배울 것이 있겠는가?”

子路曰: “南山有竹, 不柔自直, 斬而用之, 達于犀革以此言之, 何學之有?”

 

공자가 타이르며 말했다: “그 대나무 밑둥아리를 잘 다듬어 깃털을 달고, 그 앞머리는 쇠촉을 달아 날카롭게 연마한다면, 그 가죽을 뚫는 것이 더 깊지 않겠는가?”

孔子曰: “括而羽之, 鏃而礪之, 其入之不亦深乎

 

이에 자로가 무릎꿇고 두 번 절하였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子路再拜曰: “敬而受敎

 

 

[長劍]에 배움[學問]! 이것이 곧 공자교단의 출발이었다. 자로는 공자보다 아홉 살 연하였고, 제자 중에서는 가장 연상의 한 사람이었다. 사실 자로는 공자의 막역한 친구였다. 자로의 비장한 최후는 공자 723세 고령 때의 사건이었다. 14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노로 돌아온 후 자로는 공자 곁을 떠나 위()나라에 가서 당시의 재상이자 대부였던 공회(孔悝, 콩 퀘이, Kong Kui)의 읍재(邑宰)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라에는 본시 불민한 임금 영공(靈公)이 있었다. 영공에게는 총애하는 부인 남자(南子, 난쯔, Nan Zi)가 있었다. 남자는 본시 송()나라의 귀족의 딸이었는데, 그녀가 위나라에 시집온 것은 이미 송의 공자인 조(, 츠아오, Chao: 송조宋朝라고도 부름)라는 색골의 미남자와 염문을 뿌린 후였다. 남자는 보기 드문 음녀(淫女)였다. 공자를 불러들여 자로를 불쾌하게 만든 음녀였다. 각색된 이야기이겠지만 남자는 살랑거리는 침실의 옥구슬 발에 가린 채 공자를 접견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하늘에 맹세코 나는 아무 일 없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해야만 했다(雍也).

 

이 남자가 영공의 사이에서 난 자식이 괴외(蒯聵, 콰이 퀘이, Kuai Kui)였다. 괴외가 과연 영공의 자식인지, 송조의 자식인지도 알 바가 없다는 것이 당시의 소문이었다. 그런데 영공 39, 괴외는 음녀인 엄마 남자의 횡포를 보다 못해 엄마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전에 발각되어 송나라로 도망갔다가 뒤에 진()나라로 갔다. 그 후 영공이 죽자 위나라는 도망친 괴외의 아들 첩()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출공(出公, 츠우 꽁, Chu Gong)이다. 출공이 즉위한 후 12년이 되도록 괴외는 귀국하지 못했다. 출공은 막강한 신하들을 동원하여아버지 괴외의 입국을 막았다. 그러나 괴외는 집요하게 복위를 꾀하였다. 기나긴 부자간의 싸움이었다.

 

괴외는 마침내 출공 막하의 벽을 뚫을 수 있는 인물을 하나 잡았다. 괴외의 누나, 그러니까 위령공의 큰 딸, 백희(伯姬, 뿨지, Bo-ji)는 위대부(衛大夫) 공어문자(孔圉文子, 꽁 위 원쯔, Kong Yu Wen-zi)에게 시집을 갔다. 그 공문자(孔文子, 콩원쯔, Kong Wen-zi)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자로가 섬기고 있는 대부, 공회(孔悝)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공문자(공회의 아버지)가 죽고 나자 공회의 엄마 백희는 그 공씨집에 있었던 젊고 잘생긴 노비[] 혼양부(渾良夫, 훈 리앙후우, Hun Liang-fu)와 정을 통하였다. 혼양부는 공회의 엄마 백희와 괴외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괴외의 복귀를 도왔던 것이다. 괴외는 혼양부에게 성사만 시켜주면 모든 죄를 감면해주고 대부의 높은 지위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 누이 즉 공회의 엄마와 결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부추겼다.

 

드디어 백희는 괴외를 공회의 집으로 끌어들여 공회를 협박하여 외삼촌, 괴외를 도와 출공을 습격하도록 작전을 세운다. 출공은 드디어 노나라로 도망을 갔고 출공의 뒤를 이어 괴외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장공(莊公, 주앙 꽁, Zhuang Gong)이다. 여기서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에는 공회와 자로의 관계가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질 않다. 공회는 자기 엄마가 종놈인 혼량부와 밀통하여 외삼촌 괴외를 즉위시키려는 계획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리 없다. 그러나 공회는 엄마의 엄명 때문에 할 수 없이 반란에 휘말려 들었을 것이다.

 

공회가 괴외에 의하여 높은 누각 위에 붙잡혀 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우직한 자로는 공회의 집으로 뛰어갔다. 공씨집에 들어가려는 참에 같은 동문의 제자로서 공회의 가신을 지내고 있었던 자고(子羔, 쯔까오, Zi Gao)()은 고(), ()은 시(), 자고(子羔)는 자()를 만났다. 자고는 공씨집을 나와 피신하려던 참이었다.

 

자고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고 자로에게 충고하였다. 공연히 개입하여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말렸다. 그러나 자로는 개의치 않고 공씨집의 밥을 먹고 있는 이상 이 집의 재난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가까스로 공씨 문안으로 단신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자로는 괴외가 공회를 붙잡고 있는 누각 밑에 떡 버티고 서서 소리를 지른다: “공회를 풀어 놓아라!” 괴외가 말을 들을 리 없다. 그러자 자로는 그 누각에 불을 지르려 한다. 그러나 괴외는 날쌘 검객 두 명, 석걸(石乞, 스치, Shi-qi)과 호염(壺黶, 후엔, Hu-yan, 혹은 우염盂黶)을 파견한다. 자로는 이미 늙었다. 젊은 검객들의 날쌘 칼을 피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날쌘 장검이 얼굴을 스치며 갓끈이 끊어지고 갓이 땅에 뒹굴었다. 그 순간 자로는 이미 자기의 최후를 감지한다. 얼굴에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가운데 자로는 유유히 손을 들어 외친다(중니제자열전9).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을 수 없다!

君子死, 冠不免!

 

 

자로는 정좌하고 땅에 떨어진 갓을 다시 쓰고 단정하게 갓끈을 맨다. 순간 두 검객의 시퍼런 칼날들이 엄숙하게 정좌한 자로의 등을 갈랐을 것이다. 자로는 태연하게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스러져 갔다. 서늘한 칼날이 그의 심장을 에는 순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마도 이와 같이 중얼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 형님! 나는 형님의 가르침대로 한 치도 어김없이 살았소.

이제 나는 당당한 군자(君子)가 되었소.

군자로서 갓끈을 매는 순간에 형님 곁으로 갈 수 있어 나는 행복하오.

나는 형님의 가르침대로 사()로서 살고 사()로서 작별하오. …… 굿바이,

 

 

자로의 인생의 출발은 숫닭 꽁지깃털과 산돼지 불알이다. 그런데 그의 삶의 마감은 죽음 앞에 태연히 정좌하고 앉아 갓끈을 매는 모습이다. 수탉꽁지털에서 갓끈으로의 트란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바로 이것이 공자의 삶의 본질이며, 자로의 삶의 도약이며, 향후 모든 의 의미를 규정하는 인류사의 교양(studia humanitatis)의 전범을 이루는 것이다. 자로의 삶의 도약이 곧 사()를 규정하였고, 공자의 교단의 성격을 규정하였고, 제자백가의 인문학을 규정하였고, 제민(齊民)의 통일제국에로의 새로운 길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곧 내가 말하는 무()와 무()에서 사문(斯文)을 창출해낸 공자의 위대성이다. 장자(莊子)도척(盜跖)4편에는 도척이 공자를 힐난하면서 자로를 꾀어낸 죄를 크게 꾸짖는 장면이 있다.

 

 

천하사람들이 왜 널 도둑놈 짱구[盜丘]라 아니 부르고, 하필 날 도둑놈 척[盜跖]이라 부르는지 알 수가 없다. 너는 달콤한 말로 자로를 설복시켜 너를 따르게 했다. 자로로 하여금 높은 무사의 관을 벗게 하고, 긴 칼을 풀게 하고, 너의 가르침만을 받게 만들었다. 그래서 천하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기를 공구는 폭력을 그치게 하고 비리를 금지시키는 힘이 있다고 했다.

天下何故不謂子爲盜丘, 而乃謂我爲盜跖? 子以甘辭說子路而使從之. 使子路去其危冠, 解其長劍, 而受敎於子. 天下皆曰: ‘孔丘能止暴禁非.’

 

그러나 그 결과가 뭐냐? 자로는 위군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몸은 동강나 소금에 절여져 위나라 동문 꼭대기에 걸리고 말았다. 이것은 곧 너의 가르침이 아직 모자란다는 뜻이다.

其卒之也, 子路欲殺衛君而事不成, 身菹於衛東門之上, 是子敎之不至也.

 

 

무량사석각(武梁祠石刻)의 공자제자들. 자로의 무인다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와 유()

 

 

우리는 이러한 공자에 대한 힐난의 반면에 깔려있는 역설적인 공자의 힘과, 당대에 무()에서 문()으로 화()한 자로의 모습, 공자의 가르침의 정도를 지키기 위해 억울하고 또 평화롭게 죽어간 자로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당대에 통념으로 깔려 있었다는 정황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의 문제에 관하여 재미있는 외물(外物)4편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유()와 직접 연결되는지 한번 살펴보자!

 

 

유란 본시 시경을 읊으며 예를 운운하며 도굴을 일삼는 놈들이다. 오야붕인 대유는 밖에서 망을 보면서 무덤 안에 들어간 꼬붕 소유들에 말을 전한다. “이놈들아! 벌써 동이 트는데 뭘 꾸물거리고 있냐?”

儒以發冢, 大儒臚傳曰: “東方作矣, 事之何若?” 小儒曰: “未解裙襦, 口中有珠.”

 

무덤속의 소유들은 말한다. “아이쿠 아직 시체 속바지 저고리를 못 벗겼다우. ! 아가리 속에 찬란한 구슬이 보이는구만, 시경에 이런 노래 있지 않수: ‘푸르고 푸른 보리가 무덤가에 무성쿠나. 살아 베풀지 못한 이들이 어찌하여 죽어 구슬을 머금고 있는고!’”

固有之曰: ‘靑靑之麥, 生於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爲?’”

 

그리곤 시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턱밑을 세게 누르자, 무덤 속 유들이 쇠망치로 톡톡 아래턱을 친다. 서서히 아가리가 벌어지는 것이다. 입속의 구슬에는 흠집하나 내지않고 솜씨좋게 훔쳐 달아나는 것이다.

接其鬢, 擫其顪, 儒以金椎控其頤, 徐別其頰, 無傷口中珠.

 

 

우리는 이러한 장자(莊子)의 기술을 단순히 꾸며낸 창작 설화로 볼 수가 없다. 엄연한 당시의 유()들의 실상을 전하는 리얼한 역사적 장면을 희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가 어려서 종사하고 목격한 세계는 이러한 세계였다. 즉 낮에는 상례를 주관하는 사제자로서의 무()의 집단이지만, 그들이야말로 묘혈의 내부구조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밤이면 음험한 도굴꾼으로 변하여 왕후장상들의 보물을 훔쳐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의 세계요, ()의 세계요, ()의 세계요, ()의 세계였다. 설문에 유()를 가리켜 술사(術士)라 말한 것도 결국 이런 특수한 기술을 소유한 인간들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기술자들은 천시받는 사람들이었다.

 

또 전통적으로 유()란 주유(侏儒, 난장이)를 의미했으며 소지소언(小知小言)의 편협한 인간들이라는 매우 부정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무당계열의 사람들에는 실제로 꼽추가 많았다. 꼽추였기 때문에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사색에 깊게 빠지거나 천문(天文)이나 수리(數理)에 밝거나, 보통사람들이 못가지는 통찰력을 소유하여 결국 영적인 무당의 길로 들어갔고, 이러한 당골 집단은 세습적 씨족을 형성하면서 의례화되어갔다. 이들이 말하는 시례(詩禮)’가 기껏해야 도굴을 위한 양념격이라고 하는, ()의 타락한 모습에 대한 장자의 통렬한 비판은 비단 유가의 도덕주의에 대한 도가의 준엄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 공자라는 인간의 자기부정과 자기도약의 핵심적 과제상황이기도 했던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소인(小人)과 군자(君子)의 준엄한 분별, 그리고 소인유(小人儒)가 되지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라고 하는(雍也11) 간곡한 당부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과거모습의 잔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했던 것이다. 공자는 어떤 경우에도 서인(庶人)에게 소인(小人)’ 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소인(小人)은 곧 유()에 대한 비판이요, ()에 대한 비판이다. 종교적[] 질곡에 빠져 보물이나 탐내고 있는 자들, 바킥 컬트(Bacchic Cult)적 광란 속에서 주색에 곯아 몽롱하게 소일하는 집단으로부터 어떠한 새로운 문화의 리더십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광기 속에 은총의 강림을 외치며 십일조나 강요하고, 의미없이 장대한 성전이나 지으려하고, 성직자의 직위마저 세습시키려고 하는 오늘 우리나라 교계의 작태는 바로 공자가 목격한 소인유(小人儒)의 세계였던 것이다. 니체가 노예도덕의 극복을 외쳤을 때, 인간이 노예도덕에 함몰된 가장 근원적 이유로서 든 것이 인류사에 있어서 성직자의 출현이라는 사건이었다.

 

성직자들은 귀족주의에 빠져 침울하고 감정을 폭발치 못해 위장질환과 신경쇠약증에 잘 걸린다. 그 치료제로 고안한 것이 단식이니, 성적 금욕이니, 황야로의 도피, 이 따위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금욕주의적 자기최면은 오만, 복수, 영민함, 방종, 사랑, 지배욕, , 질병 등 이 모든 것을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든다. 성직자적 인간의 위와 같이 본질적으로 위험한 생존형식의 기반 위에서 비로소 인간 일반은 흥미로운 동물이 되었고, 여기에서 비로소 인간의 영혼은 좀 더 고차원의 의미에서의 깊이를 얻었으며 아주 사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직자민족의 대표적인 사례가 유대인이며 이 유대인의 사악함을 유감없이 구현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공자의 사문에 대한 갈망도 바로 니체가 저주한 유대교-기독교의 위선적 소인유의 세계를 탈피하려는 것이다. 은대적(殷代的) 종교주의로부터 주대(周代的) 인문주의로 문명의 축을 바꾸려는 창조적 시도였다. 니체가 초월적 신존재 앞에 비소해진 인간에 대해 치욕과 분노와 구토를 느끼는 그 감정을 공자는 소인유에게 느꼈을 것이다. , 영혼, 자아, 정신, 자유의지, 이런 것이 모두 가공적인 것이요, 따라서 죄, 구제, 은총, , 용서, 회개, 양심의 가책, 악마의 유혹, 신과의 해후, 하늘나라, 최후의 심판, 영원한 생명, 이 따위 것들이 모두 가공의 개념이라고 니체는 포효한다. 이러한 가공의 세계에 인간이 종속되게 된 근본이유는 자연적인 것에 대한 증오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연적 인간의 생의 약화, 생의 퇴조, 생의 데카당스(Deca-Dence, 퇴폐)를 초래한다. 초자연적 희망을 말하는 모든 자들은 사기꾼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혈관에 독을 붓는다. 그들은 생명의 경멸자다.

 

물론 공자의 언어는 이토록 격렬하지는 않다. 그러나 공자가 인()을 말한 것은 니체가 갈망한 원초적 생명과 우주적 생명력에 대한 대긍정이다. 니체는 2천 년의 기독교 질곡과 고독한 맞대결을 했지만, 공자에게는 그토록 가혹한 하중이 짓누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정신을 근대라는 크로놀로지(Chronology, 연대기)에서만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역사적 사태는 시간을 초월하여 동시점적(contemporary)이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근대화 = 탈주술의 도식을 외치기 양천년(兩千年) 전에 이미 공자는 그러한 근대적 문명의 도식을 완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史記)』 「골계열전에 서문표(西門豹, 시먼 빠오, Xi-men Bao)가 업(, , Ye)의 영()이 되어 하백에게 처녀를 바치는 풍속을 단절시키기 위하여, 신화와 관련된 모든 무당들과 동네의 장로들을 그들의 논리를 역이용하여 물속에 수장시키는 장쾌한 모습, 그리고 동네사람들을 각성시켜 관개시설을 하게 하는 그런 모습이, 모두 공자의 사상적 기저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씨족공동체의 조선신앙(祖先信仰)의 신화적 편협성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한 신화적 세계관이 더 이상 현실적 삶의 질서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부조리의 인식을 공자는 과감하게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축에서 일상적 삶의 질서의 축으로의 전환이었다. 공자에게서 윤리란 곧 민()의 삶의 재발견이었다.

 

 

 

 

 공자의 정치적 입장

 

 

공자가 계씨의 팔일무를 놓고 통탄하는 모습에서, 많은 학자들이 공자의 입장을 시대착오적 복고주의라고 비판했다. 천자의 예일지라도, 일개 소국의 대부가 사정(私庭)에서 춤추어 무방하다면, 그런 예를 충분히 행할 수 있는 패권의 시대로 이미 진입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계씨가 시대적 흐름을 타고 가는 진보세력이고, 그것을 탄()하는 공자야말로 수구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비판이 비림비공(批林批孔)’197387, 인민일보에 실린 공자 - 완고하게 노예제를 옹호한 사상가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문화대혁명 후기의 정치운동시대의 일반적 논리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오류에 불과하다. 오늘의 관념을 과거에 덮어씌우는 폭력 이상의 그 아무 것도 아니다. 노국(魯國)의 현실에서 삼환(三桓)의 세력은 당시 역사의 진행을 봉쇄하는 가장 보수적인 봉건세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읍국가(城邑國家的) 사유(私有)방식으로 인민대중을 착취하는 전형적인 봉건제적 구습의 타락형태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인민에 대한 보편주의적 지향점이 전무했고, 팔일무(八佾舞)를 춘다고 하는 것도 타락한 인간들의 쾌락적 행태의 과시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공자는 팔일무(八佾舞)가 천자(天子)에게만 전유되어야 한다고 하는 좁은 명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젊은 공자는 아사노(淺野裕一)씨의 빗나간 주장처럼, 그 자신이 천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동키호테식의 꿈을 꾸고 있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공자의 관심은 그러한 명분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타락한 삼환(三桓)세력을 어떻게 근원적으로 분쇄시키고 무기력화 시키느냐에 있었다. 공자는 봉건적 구질서의 옹호자가 아니라, 오히려 봉건적 위계질서를 넘어서는 어떤 보편적인 횡적 민의 질서를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공자의 정치제도적 사유의 틀 속에는 오늘날의 의회민주제도나, 선거제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군권(君權)의 강화를 통한 보편적 민의 질서를 구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민의 질서의 담당자는 개방적 외연을 갖는 사()일 수밖에 없었다. 공자집단의 정치적 성격은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가 실제로 소정묘(少正卯, 사오정 마오, Shao-zheng Mao)를 죽였다고 한다면 법령으로 이끌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이 모면키만 할 뿐이요 부끄러움이 없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라고 하는 그의 도덕주의적 입장과는 다른 매우 법가적 엄형주의의 행위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자에게는 이러한 법가적, 변법적(變法的) 보편성과 과단성이 있었다. 그러한 무단적(武斷的) 측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삼가무장해제소정묘주살과 같은 일련의 조치는 그의 정치적 입장을 단순히 맹자류의 도덕주의적 왕도(王道)주의자로 해석하기 어려운 복합적 측면을 내포한다.

 

공문그룹은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사람들이었다. 춘추시대의 폐습에 종언을 고하고 제국의 제민지배체제를 향한 새로운 질서의 태동에 근원적인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매우 유동적인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정치적 입장만으로는 공자를 해석할 수가 없다. 그가 말하는 정치는 제도의 효율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다웁게 만드는 인간성의 회복에 그 궁극적 소이연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는 곧 인간을 인간다움게 만드는 인간해방이요, 그것이 곧 인()의 길이었다. ‘삼년상(三年喪)’을 둘러싼 재아(宰我)와의 논쟁에서도(陽貨21) 공리주의적인 재아의 합리론에 끝까지 양보할 수 없었던 공자의 고집이 엿보인다. 공자는 매우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했지만, 그러한 진보적 입장을 묶을 수 있는 인간학의 상위질서가 항상 그에게는 예악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아마도 이러한 공자의 고집은 은문화와 주문화를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융회시킨 우리 동양사회의 깊이와 보수성, 그리고 진보성의 다면적 심층을 대변하는 것이다.

 

 

 

 

 14년간 장정의 의미

 

 

사실 나는 공자에 대하여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 독자들이 나의 편견의 전제가 없이 논어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 같아 송구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의 선이해(先理解, Pre-Understanding)를 밝혀 놓는 것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편견을 제공하지 않는 첩경이라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다.

 

공자의 생애에 관한 세간의 논의는 문자 그대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다. 공자의 거로(去魯)’노나라를 떠나 유랑의 길을 밟게 됨에 대한 의견도 한없이 분분하다. 이러한 사견들을 여기 조정하여 다시 나의 사견을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확실한 것은 거로를 계기로 이루어진 14년간이것도 정확한 루트와 연수는 학자들에 따라 분분하다유랑의 길이 그에게 어떤 중요한 삶의 각성을 주었다는 것이다. 14년간의 망명의 길은 마오 쩌똥(毛澤東, 1893~1976)장정(長征)’에 비유할 수도 있는 고난의 길이었다. 이 고난의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동반한 사람은 단지 자로(子路)와 안회(顔回), 두 사람뿐이었다. 자공(子貢)과 염유(冉有)도 동반했지만 그들은 들락거렸다. 14년간의 망명의 삶은 인간 공자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도전이었고 궁극적인 비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인식을 크게 전환시켰다.

 

예수에게 있어서 40일간의 광야의 고난과 굶주림은 돌을 모두 떡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모두 떡덩이로 만들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돌을 떡으로 만든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현실적 욕구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첩경이었을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의 기본적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예수의 독백은 모든 신비주의를 거부하는 명쾌한 해답이자, 그것은 긴박한 현실주의를 거부하는 명료한 자기신념의 관철이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다(4:4).”

 

14년간의 망명의 최종적 의미는 공자에게 있어서 삶의 좌절이었다. 공자는 결코 자기의 이상을 실현해줄 수 있는 현세적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 논어첫머리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말로 시작하고, 논어마지막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회한과 통탄이 숨어있는가 하면, 그러한 좌절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고 하는 수미일관된 어떤 테마를 감지할 수가 있다. 14년간의 유랑을 점철하는 기대와 좌절의 숨가쁜 연속은 공자에게 심오한 깨달음을 주었다. 그것은 자기 이상(理想)의 긴박한 현실적 실현의 꿈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단순한 타협이나 양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상의 환영의 거품, 그 자체의 말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상의 포기가 아닌, 이상의 비상이었다. 정치적 실현이 아닌 인문의 이상을 통하여 새로운 문명의 축을 구축할 수 있다고 하는 미증유의 신념이었다. 그 비상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죽음의 체험이었다. ()에서의 구류, ()에서의 박해, ()ㆍ채()에서의 두절과 굶주림 …… 이 모두가 끊임없는 삶과 죽음의 기로였다.

 

공자의 삶은 죽음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죽음의 세계를 탈출하여 삶의 세계로 진입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기존재에 대한 자의식이 생기고 난 후부터 공자는 철저히 삶의 의미를 물었다. 자기가 오늘 여기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그 현실적 의미를 확실히 알고 싶어했다. 그 현실적 의미의 전부를 그는 한때 정치적 실현(political realization)에 두었다. 그러나 14년간의 유랑을 통해 그는 다시 죽음의 세계를 체험한다. 그가 다시 체험한 죽음의 세계는 더 이상 송인(宋人)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소인유(小人儒)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 속에 현존하는 죽음의 새로운 의미였다. 삶이라고 하는 것을, 죽음을 포괄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새로운 자각이었다. 삶과 죽음이 새로운 하나의 지평으로 융합되는 사문(斯文)의 세계였다.

 

그것은 그윽히 넓고 깊은 무한한 생명의 발출이었다. 그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정치적 실현이 아닌 인간정신의 내면적 고양의 새로운 계기들을 발견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전세계 인민의 상당수가 죽음을 빙자한 신화적 종교관에 삶의 모든 가치를 투여하고 있는 인류의 현실을 개관할 때, 공자의 이러한 자각은 아직도 인류에게 구원한 미래적 이상인 것이다.

 

14년간의 유랑이란 외면적으로 관찰하면 계씨에 대한 반항에서 계씨에 대한 굴복으로 끝난 매우 평범한 정치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유랑의 세월을 통해 공자는 진정한 성인으로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자유인으로서 비상하였던 것이다. 그가 다시 노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제 더 이상 정치적 꿈을 꾸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만인에게 국부(國父)’ 이상의 외경의 대상이었다.

 

 

 

 

 공자의 전기사상과 후기사상

 

 

공자의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이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것처럼 14년 유랑을 전후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에 실린 공자의 사상의 틀의 대부분은 망명생활이 끝난 후, 대강 68세부터 73세까지 45년에 걸친 말년의 생각이 그 골간을 이루는 것이다. 거기에는 천()과 명(), 인간의 종교적 심성, 그리고 감관에 잡히지 않는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나 포용이 깃들어 있다. 그 모든 것은 논어그 자체가 말할 것이다. 공자는 죽을 때, 자신이 은나라 후예의 사람임을 확인하고 죽었다.

 

 

관을 안치할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은나라 사람들은 양쪽 기둥 사이에 안치한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나는 양쪽기둥에 앉아 사람들이 분향을 하고 제삿밥을 올리는 것을 받았다. 나는 역시 은나라 사람이다. 이제 곧 나는 죽을 것이다(의역).

夏后氏殯於東階之上, 則猶在阼也; 殷人殯於兩楹之間, 則與賓主夾之也; 周人殯於西階之上, 則猶賓之也. 而丘也殷人也. 予疇昔之夜, 夢坐奠於兩楹之閒. 夫明王不興, 而天下其孰能宗予. 予殆将死也. 禮記』 「檀弓上

 

 

귀로(歸魯) 후 얼마 안 있어 아들 백어(伯魚)가 죽었다. 그리고 또 가장 총애하던 수제자 안회(顔回)가 죽었다. 그리고 평생의 반려 자로(子路)가 죽었다. 공자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먼저 저 현묘한 세계로 떠나보냈다. 안회는 초기 제자 안로(顏路, 옌 루, Yan Lu)의 아들이었다. 안로는 자로보다도 나이가 세 살이나 위였다. 그런데 안로는 바로 곡부성내 공자 모친이 살았던 동네의 사람이었다. 공자의 집에서 엎드리면 코닿을 곳에 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안회는 어린 시절부터 공자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안회는 공자의 그늘 속에서 태어났고, 공자의 훈도 속에서 성장했고, 어린 나이에 공자슬하에 입문하여 삼천제자 중에서 학덕(學德)으로는 비견할 자가 없는 인물이 되었다. 안회의 아버지 안로는 매우 무능하고 지더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안회는 빈천한 환경 속에서 컸다. 안회는 체질적으로 빈천에 익숙한 인간이었다. 안회는 평생을 빈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성장기가 빈천했고, 문하생(門下生)이 된 후로는 고난의 장정을 줄곧 같이 했고, 그리고는 곧 죽었기 때문이다. 안회가 요절한 것도공자의 관념 속에서 요절한 것이지 실제로는 40세경까지 살았으니 그다지 요절도 아니다, 14년의 유랑기간 동안에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로가 한 사발을 먹을 때, 안회는 주먹밥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진ㆍ채에 갇혀 모두 굶주리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陳蔡之厄]. 매우 구슬픈 정경이 하나 논형(論衡)』 「지실(知實)4편에 기록되어 있다. 안회가 공자를 위하여 밥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먼지가 한웅큼 푹 떨어졌다. 밥을 다시 지을 수도 없는 일, 안회는 안절부절했다. 그렇다고 모처럼 지은 귀한 밥을 내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안회는 생각타 못해 먼지 떨어진 부분의 밥을 떠서 자신이 먹어버렸다. 이때 공자는 멀리서 바라보고는 내심 안회가 배가 고파서 남몰래 밥을 먼저 훔쳐먹는 것으로 생각했다[孔子望見以爲竊食]. 안연이 밥을 다 지어 공자에게 정성스럽게 들고 왔을 때, 공자는 모르는 체 하면서, “먹는 것은 청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에둘러 말했다. 그러자 안회는 공자가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금방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자기가 먼지떨어진 부분을 먹어치운 사정을 이야기했다. 공자는 오해임을 깨닫고는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얼마나 인간적인 정경인가? 공자도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사랑하는 제자가 밥을 훔쳐 먹는다고 고깝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안회는 영양실조에, 요즈음 말로는 암() 같은 것으로 죽었을 것이다. 자로는 공자말을 뒤받기가 일쑤였다. 안회는 단 한 번도 공자의 말씀대로 실천 안한 바가 없고, 공자에게 단 한 번도 거역의 언행을 시도한 적이 없다. 그리고 공자도 안회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 그러니 안회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암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공자는 안회를 편애했다. 공자의 안회에 대한 총애의 도수는 지나치다. 그리고 안회가 죽은 후 공자가 몇 년을 못 살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논어전편을 통해 죽은 안회에 대한 공자의 회상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논어가 공자의 지긋한 말년의 언행의 모음집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공자의 안회에 대한 편애의 그림자에는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니산의 꽃동산에서 공자를 키웠던 엄마 안씨녀의 잔상이 겹쳐있을지도 모른다. 공자 17세 때 상여가마를 어깨에 메어야만 했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안회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고요한 인품 속에 잔잔히 비쳐있었을 것이다. 안회는 두말 할 나위없이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안회의 죽음은 곧 공자의 인()의 사상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의 학문의 적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의 학문은 안회와 더불어 죽고, 공자라는 인간은 자로와 더불어 죽은 것이다. 결국 공자는 현세(現世)에 세속적으로 남긴 바가 없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변신되는 그러한 과정이 일체 없다. 공자와 더불어 모든 것이 단절된 것이다. 향후의 모든 출발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었다. 그것이 곧 공자의 축복이었다. 그것이 오늘의 논어를 보다 잡하고 보다 생생하고 보다 여백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공자의 삶은 미완성교향곡이었다.

 

나는 논어를 선()이라고 생각한다. 유생들은 또 이게 뭔 망발이냐고 다그칠지 모르겠으나 선()이란 본시 언어가 단절되는 곳에서 피어나는 모든 깨달음의 통칭이다. 인과적 고리가 단절되는 절대적 경지에로의 도약인 것이다. 아사노류의 모든 공자이해가 공자를 고정된 실체로 규정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공자의 삶은 끊임없이 유동적인 호학(好學)의 삶이었다. 그의 삶은 일체의 규정성을 거부한다. 그 거부야말로 인류의 가장 지혜로운 인문학의 출발인 것이다. 대승불학이 당초로부터 중국언어의 외투를 빌렸기 때문에, 격의(格義) 불교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격의의 종국이 선이었다고 한다면, 그 선의 원형, 그 조형은 인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문명에 내재하는 것이다. 중국언어에 심재(深在)하는 것이요, 중국마음(Chinese Mind)에 고유한 것이다.

 

그 중국마음의 조형이 곧 논어라는 서물이다. 논어맹자와 같이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 논어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경구일 뿐이다. 그것은 계발의 단서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노년의 공자의 심경이었을 것이다. 남에게 강요함이 없이, 현실에 대한 긴박한 기대감이 없이, 긴박한 파루시아(재림)에 대한 환상이 없이,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타인의 계발(Enlightenment)을 위하여 툭 툭 던졌다. 논어는 논쟁이 아니요, 계발이다. 그것은 무한한 논리의 시작이요 끝이다. 논어는 선사들의 말장난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더 일상적으로 인간을 대각으로 인도하는 선어(禪語)인 것이다. 나는 말한다. 논어는 선이다. 정자(程子, 츠엉쯔, Cheng Zi)의 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요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을 모른다. 논어을 읽으매, 읽기 전에 이런 놈이었는데, 읽은 후에도 이런 놈일 뿐이라면, 그 놈은 전혀 논어를 읽은 자가 아니다.

今人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 是此等人. 讀了後, 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논어는 선이다. 논어는 그냥 읽으면 아니 된다. 바울이 말한 바대로, 항상 마음이 새로워지는(transformed by the renewal of your mind, 로마서12:2) 변화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논어는 트랜스포메이션인 것이다. 읽기 전에도 이놈이고 읽은 후에도 이놈이라면 전혀 트랜스포메이션이 없는 것이다. 논어는 재즈요, 선이요, 대각이다.

 

정자의 말에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논어를 읽으매, 어떤 자는 읽고 나서도 전혀 아무 일이 없었던 것과도 같다. 어떤 자는 읽고 나서 그 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또 어떤 자는 읽고 나서 참으로 배움을 즐기는 경지에 오르는 자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읽고 나서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구르는 자도 있다.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수지무지족지도지(手之舞之足之蹈之, 출전은 예기』 「악기)’, 이것은 선의 엑스타시(ecstacy, 황홀감), 깨달음의 환희다. 이제 지적 희열에로의 기나긴 여행을 시작해보자.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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