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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 서막: 공자의 생애와 사상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 서막: 공자의 생애와 사상

건방진방랑자 2021. 5. 2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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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막: 공자의 생애와 사상

 

 

논어를 접근하는 인식론적 과제상황

 

 

과거는 알 수가 없다. 바로 어제로 지나가버린 나의 과거도 기실 나의 의식 속의 기억(Memory)’이라고 하는 특수한 작용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과거의 총체가 될 수가 없다. 기억은 과거의 체험적 사건의 선택이며, 그 선택을 기억해내는 과정에는 이미 상상력이라든가 주관적 판단이라든가 감성적 왜곡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잡스러운 사태들이 개입한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이 아닌, 과거체험의 해석(Interpretation)이다. 기억은 저등동물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기억은 의식작용이 고도화된 동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기억은 언어와 결부된 상징작용(Symbolism)의 소산이다. 과거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는 선택이며, 해석이며, 상징이다. 더구나 과거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간접체험의 소산일 때 이러한 문제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논어를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인식론적 반성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논어에 대한 언설들이 이러한 인식론적 반성을 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처로운 것이다. 논어를 달통했다 하는 박학지사(博學之士)들의 고론이 이러한 인식론적 반성을 결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천루(淺陋)한 것이다.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읽을 때 우리는 노자(老子, 라오쯔, Lao Zi)라는 한 역사적 인간을 반드시 전제로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추상적 사유의 산물이므로 그 사유의 주체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없이 추상적 사유의 체계 자체만으로도 적확하고 충분한 이해가 성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노자속에는 노자 그 개인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논어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언급이 있다.

 

 

논어라는 것은 공자(孔子, 콩쯔, Kong Zi)Confucius라고 하는 서양의 표현은 공부자(孔夫子, Kong Fuzi)를 라틴어로 표기한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가 제자나 당시의 사람들의 물음에 응하여 답한 것과, 제자들이 서로 더불어 토론하고 그것을 공부자에게 직접 물어 들은 말들이다. 그 당시 제자들이 각기 그것을 필기하여 두었다. 공부자가 세상을 뜨자 문인들이 서로 모여 그것을 모으고 논찬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일러 논어라 한 것이다.

論語者, 孔子應答弟子時人及弟子相與言而接聞於夫子之語也. 當時弟子各有所記. 夫子旣卒, 門人相與輯而論纂, 故謂之論語.

 

 

논어라는 서물의 성격과 제목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밝혀준 문장이라 할 것이다. ‘논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들이나 당시의 사람들과 대화한 말, 그리고 제자들끼리 토론한 말, 그리고 공자에게 접문(接聞)한 말이다. ‘()’집이논찬(輯而論纂)’의 뜻으로, 그 말들을 편찬했다는 뜻이다. 논어는 편찬된 것이다.

 

논어에는 역사적으로 살아있는 한 인간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논어는 반드시 그 논어의 주체자인 한 인간의 모습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읽히는 논어인 것이다. 노자속에는 노자가 없다. 그러나 논어속에는 어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시공의 맥락에 따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는 사람들간의 논어다. 그 사람들간의 사이라는 것은 반드시 상황성(Situationality)을 가지고 있다. 그 역사적 상황 상황에서 그려진 그림들의 파편인 것이다. 노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지만, 논어는 시공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만 일차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의미는 반드시 이러한 시공 속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발현하는 것이다. 논어는 분명히 어느 한 사람이 일상적으로 먹고 자고 울고 웃고 성내고 기뻐하고 있다.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논어는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을 우리는 공자(孔子)’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공자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어느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우리와 공통의 기반을 가진 생물학적 을 소유한 일상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매우 명백한 사실(crude fact)예수의 경우에도, 싯달타의 경우에도,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전혀 예외일 수가 없다. 이 사실을 초월하는 모든 주장도 반드시 이러한 명백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 대한 기술이 우리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공자는 과연 존재했는가? 공자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상징작용의 착각에 의하여 날조된 픽션의 인물은 아닐까? 사이버공간의 인조인간이 너무도 유명해져서 역사 속에서 실존성을 획득한 것은 아닐까? 맹자(孟子, 멍쯔, Meng Zi)가 공자를 직접 만나지 못한 이상맹자는 공자가 죽은 후, 공자의 이웃동네에서 100여 년 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맹자가 직접 경험으로 공자의 실존성을 확인하지 못한 이상, 맹자의 공자에 대한 생각도 이미 이러한 소문에 의한 픽션이었다고 하는 가능성이 배제될 수는 없다. 과연 공자는 실존했는가? 실존했다면 지금의 우리와 같이 고민하는 동시대의 어느 한 인간의 유형이었을까? 공자는 과연 있었는가?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에 대하여, 이 책의 첫머리에서 과거는 상징체계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이상, 어떤 확답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과연 실존했는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떠한 대답을 내려야 할 것인가? 공자는 과연 실존한 어떤 사람이었을까? 실존했다고 한다면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어떻게 생겼으며 어떠한 삶을 영위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어떠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살았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최선의 방도는 공자의 그림자가 드리운 가능한 한 모든 자료를 섭렵하여 그 가운데서 살아있는 공자를 정직하게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이때 정직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그 정직(intellectual integrity)은 살아있는 공자의 역사적 실상(historical reality)에 접근하는 것이다.

 

 

 

 

 곡부로 가서 느낀 것

 

 

공자는 존재했는가? 살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나는 중요한 결단을 하나 감행하였다. 공자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활동하고 죽었다는 그의 고향 곡부(曲阜, 취후우, Qu-fu)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청도(靑島, 칭따오, Qing-dao)에서 기차를 타고 황하(黃河, 후앙허, Huang-he)와 태산(泰山, 타이산, Tai-shan) 앞의 광활한 대지를 달려 새벽의 여명을 깨뜨리고 연주(兗州, 옌저우, Yan-zhou) 후어츠어잔(火車站, huo-che-zhan)에 도착한 것이 이천년 유월 삼일 아침의 일이었다.

 

곡부에 공자가 있었는가? 곡부의 웅대한 대성전(大成殿)의 위용 속에 공자가 있었는가? 나의 대답은 간결하다. 곡부의 유적 어느 곳에도 공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곡부의 유적 그 모두가 후대에 건조된 것이다. 그 대부분이 송()ㆍ원()대 그리고 청대(淸代)에 크게 개축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찌는 태양 아래 고호의 밀밭보다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곡부의 산하(山河), 공자의 망령을 쫓아, 하염없이 헤매면서 다음과 같은 명백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읽고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정약용(丁若庸, 1762~1836)이라는 사람의 실존성을 크게 의심하지는 않는다. 퇴계전서(退溪全書)를 읽고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그 숨결을 느껴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황(李滉, 1501~1570)이라는 사람이 나의 몇대조 할아버지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크게 회의감을 느끼지 않는다. 곡부에서 내린 나의 결론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의 고적(孤寂)한 울분을 느끼고,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고매(高邁)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느낌만큼의 공자는 똑같이 느껴질 수 있는 어떤 역사적 실존태라는 것이었다. 공자는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최종적 결론은 독단적으로도 들릴 수 있겠지만 그 역사적 실존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방대한 문헌을 통한 내 일생의 공자와의 해후가 그러한 직감을 가능케 했을지도 모른다. 공자는 분명 살아 있었다! 공자는 곡부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었던 어떤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의 기나긴 지적 방황에 이러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곡부 여행의 어마어마한 소득이었다. 역사적 판단, 즉 과거에 대한 판단은 예술적 직관과도 같은 어떤 느낌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한 직관적 판단을 내리기까지 반세기의 고독한 방황을 거쳐야 했던 나의 삶의 역정이 나에게는 소중했다. 공자를 탄생시킨 산하는 굽이굽이 나의 의식 속에서 살아 꿈틀거렸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자가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하는 존재의 유무의 확인은 우리가 추구하는 문제의식에 아무런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의 유무에 대한 확신이 신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맥락인 것이다. 안젤므스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은 신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도 별 의미가 없다. 플라톤테아에테투스(Theaetetus)이래 제기되어온 서양철학 2천년의 존재의 문제가 럿셀(Bertrand Russell, 1872~1970)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에 의해 면박당하는 것과도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공자가 존재한다는 나의 확신은 나의 내면에서 기술되는 여러 가지 의식의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공자라는 고유명사가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하는 것은 우리가 묻고자하는 공자라는 의미체와 무관한 헛질문일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공자라는 고유명사가 기술되고 있질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라는 역사적 자기동일적 실체(Substance)에 관한 논의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공자는 존재한다공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국 다 같이 무의미한 명제들이다. 이 명제를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보다 본질적 질문은, ‘공자는 어떤 사람이었냐?’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최초의 존재론적 근거로서 나는 공자는 살아있었다라는 믿음을 직관적으로 전제할 수 있기에 이른 것이다.

 

공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어떤 사람이었다는 명제는, 인식론적으로 공자의 행위로서 기술되고 있는 많은 문헌적 사실들이 시공 속에 존재했던 어떤 주체의 실제적 행위에 대한 해석의 체계들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헌적 사실들이 완전한 인간의 상상력의 날조가 아닌, 시공 속의 어떤 인격체의 리얼한 행위의 해석체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와 공자전기문학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결국 이 질문은 공자의 삶에 관한 질문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나? 그런데 삶(Life)이란 행위나 사건, 느낌들의 복합적 연속체인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결국 이러한 역사적 공자의 삶의 행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공자의 삶을 전달하는 가장 권위있고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정보의 집약 체계로서 우리는 사마천(司馬遷, 쓰마 치엔, Sima Qian, BC 145~c.86)사기(史記)속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꼽는다. 사실 공자의 삶에 대한 한우충동(汗牛充棟)하는 헤아릴 수 없는 기술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천언만언(千言萬言)의 잡설(雜說)보다 공자세가(孔子世家)한 편의 문장을 꿰뚫는 것이 공자의 삶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는 첩경이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들에게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史記卷四十七, 世家第十七)의 일독을 권할지언정, 그 내용을 번잡스럽게 여기 부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사기(史記)는 위대한 책이다. 서구에서는 18세기 말엽에나 기번(Edward Gibbon, 1737~1794)로마제국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가 달성한 히스토리오그라피의 수준을 사마천은 그보다 무려 18세기를 앞선 기원전 1세기 초엽 한무제 정화(征和) 연간(BC 92-89)에 달성하였던 것이다. 본기(本紀)ㆍ표()ㆍ서()ㆍ세가(世家)ㆍ열전(列傳)이라는 다섯 개의 다른 기술형식을 빌어 기전체(紀傳體)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대표적인 형식으로 간주하여 축약한 말의 전형을 수립한 사마천의 히스토리오그라피는 방대한 사료의 정밀한 편집이 과시하는 놀라운 실증사학의 정신과 함께 그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또 자유롭고 비판적인가를 말해준다. 사마천은 역사에 대하여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피력하는데 하등의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주관적 포폄을 가하기까지 얼마나 세심한 객관적 사료의 제시를 선행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찬탄의 혀를 차게 만든다.

 

본기(本紀)는 제왕(帝王)의 역사다. 세가(世家)는 제왕(帝王)이라는 액시스(axis)(): 정확하게는 축이 박히는 바퀴통를 둘러싸고 굴러가는 제후(諸侯)라는 바퀴살[]들의 전개사. 세가가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이러한 세계인식의 모델을 가정케 한다. 노자(老子)11‘30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축을 공유한다[三十輻共一轂]’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리고 최근 진시황 무덤에서 나온 동거마(銅車馬)가 정확하게 30개 바퀴살의 바퀴모양을 과시하고 있듯이, 사마천의 세가가 정확히 30권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의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공자는 제후가 아니다. 국군(國君)의 위치는 커녕 대부(大夫)의 지위에도 가본 적이 없는 일개 포의(布衣)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마천은 공자를 제후의 대열인 세가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당대 이미 공자의 위치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공자묘소에 참배한 이래 제왕들은 자기들의 도덕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키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거로서 공자를 존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무제(漢武帝)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파출백가(罷黜百家)하고 독존유술(獨尊儒術)하여 유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의 사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마천 자신이 공자를 지성(至聖)’으로 존숭하고 공자가 전개한 역사가 결코 일개 제후가 전개한 역사에 조금도 뒤지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공자를 열전(列傳)에 집어넣지 않고 세가(世家)에 집어넣은 그의 과감한 역사인식은 바로 한낱 원한에 사무친 품팔이 농사꾼[傭耕]에 지나지 않았던 진섭(陳涉, 츠언 서, Chen She, 또는 츠언 성陳勝, 은 자)의 경우 더욱 극렬하게 표출된다.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혁명을 도모할 수 있는 인물들을 모을 수 있는 덕망이나 가문의 배경이 전무한, 그야말로 일개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았던 진승이었다. 사마천 자신이 그 찬란한 위용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신흥 진제국(秦帝國)이 허무하게 무너져가버린 그 붕괴의 기폭제가 된 농민반란을 주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승을 세가에 올려놓은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숙연하게 사마천의 역사의식을 느끼게 된다. 사마천은 귀천을 막론하고 세계사적 개인의 역사적 의미를 물을 줄 알았던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세가(孔子世家)라고 하는 공자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내가 가본 그 곡부(曲阜)의 구석구석을 직접 답사하였다. 내가 본 곡부의 모습보다는, 더 원형에 가까운 공자의 체취가 서린 광경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생생한 구전자료들을 채록하였을 것이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은 말한다:

 

 

나는 노나라로 직접 가보았다. 그래서 중니(仲尼)의 사당과 살던 집, 그리고 그가 탔던 수레, 입던 옷, 그리고 예()에 썼던 그릇들을 다 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유생들이 그 집에 모여 때에 맞추어 예를 배우고 있는 모습도 관람하였다. 나는 공자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와 머뭇거리며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適魯, 觀仲尼廟堂車服禮器, 諸生以時習禮其家, 余祗迴留之不能去云

 

 

공자세가야말로 권력의 희생양으로 불알발린[宮刑] 사마천이 분세(憤世)의 그 마음속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권력을 흠모했다가 결국 권력 그 자체를 부정했던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경애감으로 집필한 역작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센티멘탈(sentimental)한 공감이 공자의 삶에 관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평심(平心)하게 한번 생각해보자! 사마천이 공자의 정통적 전기를 집필한 것이 공자가 죽고 난 후 꼬박 400년 후의 사건이다.

 

생각해보자! 섬서(陝西, 산시, Shan-xi) 하양(夏陽, 시아양, Xia-yang)의 사람이 400년 전의 산동(山東, 산동, Shan-dong) 곡부(曲阜)의 어느 따한(大漢, 키 큰 사람)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집필한다고 하자! 어떠한 사료에 어떻게 근거하든지 간에 400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편년체로 세밀하게 기록한다는 것이 사실 그 자체일 수는 없다. 불과 몇십 년 전에 비명에 간 박정희 대통령의 전기문학도 집필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번 되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마천에게 주어진 사료들은 이미 해석되어진 사료들이다. 그리고 그 해석되어진 사료들을 사마천이 또다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마천이 해석한 사료들을 또 다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실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해석을 요구하는 하나의 자료일 뿐인 것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과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최술(崔述, 췌이 수, Cui Shu, 호는 동벽東壁, 1740~1816)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이 낱낱이 밝힌 것이다.

 

 

 

 

 예수 탄생과 베들레헴

 

 

우리는 예수가 베들레헴(Bethlehem)의 어느 말 구유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방박사 세 사람이 와서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는 사실을 크리스마스설화의 주요테마로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분명 갈릴리(Galilee)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요셉도 분명 갈릴리의 나자렛(Nazareth)사람이고, 예수도 나자렛에서 성장하여 갈릴리 바다의 북단에 있는 가버나움(Capernaum)에서 활동을 개시한 사람이다. 그런데 베들레헴이라는 곳은 남쪽 유대지방 예루살렘에서도 더 남쪽으로 6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편벽한 곳이다. 저 북방에 위치한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그야말로 험준한 광야의 천리길이다. 그런데 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나야만 했을까? 왜 북방 갈릴리사람인 예수가 저 남방 유대아 광야의 베들레헴에서 나야만 했을까? 이 사실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저자는 매우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시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

(누가 2:1~5)

 

 

누가기자에 의하면 예수가 태어난 해에 바로 캐사르를 이은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아구스도)에 의하여 로마제국 전역에 걸친 총호구조사(general census)가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호구조사를 현주소가 아닌 본적지에서 받기 위해 요셉이 애기를 밴 마리아를 데리고 천리길인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매우 정확한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지방사적인 사실을 하나 더 첨가하고 있다. 이 총호구조사는 퀴리니우스(Quirinius, 구레뇨)가 시리아(Syria,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실시한 것이며, 바로 헤롯이 유대아의 왕이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누가의 기자는 이러한 사건이 매우 역사적 배경 위에서 진행된 사실인 것처럼, 마치 역사가가 당대의 역사를 기술하듯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로마사는 우리에게 매우 정확하게 알려져 있다.

 

시저 아우구스투스의 로마제국 전역의 총호구조사명령이라면 그것은 정확한 연대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우선 로마제국의 총호구조사는 세금의 부과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의 피지배인인 요셉이 애기 밴 마리아를 데리고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단지 본적지에서 호구등록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걸어갔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더욱 명백한 사실은 아우구스투스의 총호구조사명령은 AD 6년에 한 번 있었으나 예수가 탄생한 시점을 전후로는 그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c. 100)와 같은 당대의 사가의 증언에 의하여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헤롯왕의 치세 기간은 BC 37년부터 BC 4년까지에 걸치고 있다. 예수의 탄생이 헤롯왕 치세기간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BC 4년 이전의 사건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헤롯의 치세기간 동안에 퀴리니우스(구레뇨)는 시리아의 총독이 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기자의 이 모든 기술은 날조된 것인가? 물론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말한다면 그것은 날조된 것이다. 그런데도 누가는 그것을 태연하게 마치 당대의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듯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는 나자렛에서 태어나도 마리아의 처녀잉태를 정당화시키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왜 하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어야만 했을까?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을 잘 서술했다고 여겨지고 있는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요한복음7:41~42). 그렇다고 우리는 요한의 기자가 누가마태의 기자보다 더 사실적인 실증적 사료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여기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을 때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로서 읽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누가마태의 기자들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건을 기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내면적 논리와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내면적 논리와 목적이 바로 케리그마(Kerygma)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단지 역사적 인간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이 땅에 보내여졌고, 천국의 도래를 외쳤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으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고 하는 신념의 선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대가로 죄사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 선포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기술된 것이 바로 복음서인 것이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케리그마의 맥락 속에서만 명백해질 수 있는 것이다. 베들레헴은 바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왕의 고향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농부의 아들이었으며 양떼를 지키는 목동이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바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혈통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마태는 예수의 베들레헴탄생을 선지자 미카(Micah, 미가)의 예언의 성취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마태2:6, 미가5:2

 

 

이러한 성서의 케리그마적 기술과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술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다. 공자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야 할 아무런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마천의 공자기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편년체적(編年體的) 기술처럼 보인다. 공자의 삶에는 케리그마를 비신화시켜야만 할 만큼, 신화적 요소가 염색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신화를 우리의 상식적 인과적 틀에서 벗어나는 사태로서만 생각하기 쉽다. 처녀잉태(parthenogenesis)라든가 죽은 자의 부활(resurrection)이라든가 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상식적 인과 속에서 가능한 사태가 아니다. 확률적 예외일 가능성조차 없다.

 

그러나 신화는 불가능한 것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화는 있을 수 있는 것, 즉 현실이 아닌 가능한 사태 속에서도 얼마든지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현존재의 행위는 항상 수없이 가능한 사태 속의 한 실현이다. 그러나 이 실현이 그 수많은 가능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가능한 사태 속에 무한히 신화적 기술이 가능하다.

 

 

 

 

 예수의 케리그마, 공자의 케리그마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이미 그것이 세가(世家)로 편입되었다는 사태가 이미 명백한 어떤 케리그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가 지성(至聖)’이심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것을 집필한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료가 된 많은 공자에 관한 기술의 파편들(fragments)이 모두 일정한 목적을 지니고 공자제자의 집단들에 의하여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것도 역시 공자 사후의 초기 교단(敎團, 가르침을 신봉하는 집단)의 케리그마적 성격에서 파생된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 관한 기술은 신화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초자연적 사태를 개입시킨다는 것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거부한다는 것이 신화적 기술의 유무의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매우 평범한, 가능한 사실적 기술이 오히려 신화적일 수도 있다. 공자의 삶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상식의 전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환경의 문화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말대로 삶의 형식(Lebensform)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선진중국인(先秦中國人)들의 삶의 형식은 격렬한 사막의 유대인들처럼 어떤 초자연적 사태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공자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케리그마처럼 괴력난신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의 기술도 예수의 기술과 똑같이 비신화되어야 할 신화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명실공히 공자라는 인간에 관하여 최초로 쓰인 가장 포괄적인 전기문학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 우리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전에는 공자 그 인간에 관한 기술을 찾아볼 수 없는가? 선진(先秦)문헌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나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거의 모든 문헌에서 공자라는 인간에 관한 언급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공자세가(孔子世家)는 그 이전의 공자에 관한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묵자(墨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순자(荀子), 열자(列子), 예기(禮記), 한비자(韓非子), 공손룡자(公孫龍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초사(楚辭), 윤문자(尹文子), 공총자(孔叢子)등 거의 모든 주요문헌에 공자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이것은 곧 공자는 일가를 이룬 제자백가의 모든 사람들에게 떠날 수 없는 어떤 심상을 제공한 강력한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춘추말(春秋末)에서 진한지제(秦漢之際)에 이르는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거의 최고의 스타였다. 공자는 결코 은학(隱學)이 아닌 현학(顯學)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학단(學團) 조직의 실제적 지구력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문헌에 나오고 있는 공자얘기를 다 살펴볼 적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모든 문헌에 공자에 관한 기사가 지금 현존하는 논어(論語)라는 텍스트를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예기』 「방기편(坊記篇)중에 논어왈(論語曰)’이라는 표현이 있으나 공자가 논어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문맥상 가당치 않고, 따라서 후대의 찬입이 확실하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방기편은 한대에 성립한 것으로 본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논어는 서한말(西漢末) 원제(元帝, 위앤띠, Yuan Di, BC 49~33) 때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 장 위, Zhang Yu)노론(魯論)을 주()로 하고 제론(齊論)을 참조하여 오늘날의 20장 체제로 확정한 장후론(張侯論)텍스트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논어고주의 정본을 남긴 정현(鄭玄, 정 쉬앤, Zheng Xuan, AD 127~200)노론의 편장을 주로 하여 제론고론을 참작하면서 교정을 가하여 주석을 했다고 하안(何晏)이 말했는데[漢末, 大司農鄭玄, 就魯論篇章, 考之齊古, 以爲之注. 集解敍] 이때 정현이 저본으로 삼았다고 하는 노론이란 바로 장후론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안(何晏, 허 옌, He Yan, BC c.193~249)의 집해(集解)나 황간(皇侃, 후앙 칸, Huang Kan, 488-545)과 형병(邢昺, 싱 삥, Xing Bing, 932~1010)의 이소(二疏)가 모두 이 장후론에서 발전한 정현주본에 의거한 것이다. 장후론이전의 전국시대 상황을 말하자면 논어텍스트의 부분적 파편들이 전승되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오늘 보듯이 볼 수 있는 논어라는 서물은 전국시대 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최근 BC 300년경의 유물로 추정되는 곽점죽간(郭店竹簡) 중에 어총3(語叢三)이라고 분류된 문헌이 나왔고 그 문헌 속에 논어』 「술이자한의 두 구절이 발견되었다 하여, 논어가 이미 자사子思 때 성립하였다고 하는 일부 중국학자들의 논의가 있으나 그것은 엄밀한 논리를 결한 성급한 결론일 수밖에 없다. 그 두 구절의 발설의 주체가 공자라는 것이 명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한4毋意, 毋必, 毋固, 毋我로 추정되는 죽간의 자의와 맥락적 해석 그 자체가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므로 과연 논어의 구문인지 확정짓기 어렵다. 이러한 죽간 구문의 존재가 오히려 공자와 무관하게 떠돌아다니던 정형구를 공자의 말로서 나중에 편집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도 있다. 어총3논어유사구는 전혀 논어라는 서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논어라는 텍스트가 없이도 이미 공자와 그의 집단의 행적과 언론은 전국시대 때 제자백가에 의하여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사후에 크게 역사의 표면에 등장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역사를 움직여가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의 배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였다. 제자백가의 흥기는 기실 이 공자집단이라는 이 에너지에 제동을 걸든가 혹은 철저히 옹호하든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피어난 것이다. 이들 모두가 논어라는 텍스트를 정확히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논어의 많은 사상적 주제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제자백가들은 제멋대로 그 주제들을 평가하고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꾸며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결론은 매우 진솔하다. 묵맹(墨孟)으로부터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이르는 모든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픽션적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소설을 놓고 정밀한 역사적 사실을 논구한다는 것 자체가 연구방법에 인식론적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소설(小說)이란 본시 작은 이야기. 삶의 자질구레한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대설(大說)아닌 소설(小說)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자의 세계에는 체계적 대설이 별로 없다.그 모두가 삶의 정황 그 구비구비에서 피어난 소설인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란 본시 픽션(fiction)과 넌픽션(nonfiction)의 구분이 어렵다. 픽션과 넌픽션이 모두 인간의 의식의 사태이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말할 때는 픽션이 넌픽션이 되기도 하고, 넌픽션이 픽션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어차피 소설이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력의 필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공자에 관하여 최후로 쓰여진 소설의 집대성이다. 그 이전의 모든 단편소설을 묶어 장편으로 편집한 것이다. 물론 장편소설을 쓰는 가운데 사마천의 케리그마가 가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의 모든 공자논의의 조형이 되었다. 그것은 최후의 집대성이며 최초의 대하 드라마였다. 물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 드라마 속에 역사적 근거로서의 공자 그 사람은 엄존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내용을 축자적(逐字的)으로 신봉할 수는 없다. 사마천은 분명 공자의 삶의 터전이었던 곡부까지 두 발로 답사하여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썼으므로 상당부분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정보를 수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공자에 관한 신빙성 있는 유일절대의 기록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할 때 일단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논의들을 기준으로 삼지 않을 수는 없다. 공자세가(孔子世家)라는 언어의 벽을 뚫고 어떠한 공자의 모습을 심상에 남기는가 하는 것이 결국 공자세가(孔子世家)이후의 모든 논의의 과제가 되었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정확한 실상(實相)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가상한 것이지만, 그 노력에 절대적 정론(定論)이 확정되기는 어렵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규명보다는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에 대한 나의 이해의 구조가 궁극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장자와 묵자와 맹자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전의 문헌으로 우리가 공자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나는 묵자(墨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예기이 네 개의 책을 들겠다. 이 네 개의 서물은 모두 그 나름대로 확고한 공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장자(莊子)라는 서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莊子)를 유가와 대립하는, 유가와 전혀 무관한 독자적인 도가적 사상체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자(莊子)속에는 공자에 관한 수없는 알레고리가 있다. 그러한 알레고리를 통하여 반사적으로 자기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마구 희화(戱化)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초라한 모습으로 무대 위에 올려진다. 때로는 도둑놈으로, 때로는 창녀로, 때로는 겁쟁이로, 때로는 달변의 유세객으로, 때로는 진지한 구도인으로, 한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둔갑된다. 그러나 나는 장자(莊子)속에 그려지고 있는 공자의 소설 속에서 매우 진실한 공자의 상을 본다. 이것은 좀 범인들이 생각키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의 서향(書香) 속에 좀 머리를 묵힌 자라면 수긍이 갈 수 있는 문제이다. 공자는 공자를 디펜드하려는 자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공자는 공자의 비판자들 속에서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낸다. 안회(顔回, 옌 후에이, Yan Hui) 속에는 공자가 보이지 않는다. 공자의 모습은 오히려 자로(子路, 쯔루, Zi-lu) 속에 있다. 공자와 좀 거리감이 있는 자공(子貢, 쯔꽁, Zi-gong)이나 재여(宰予, 짜이위, Zai-yu) 속에서 공자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묵자(墨子, 뭐쯔, Mo Zi)는 공자를 극렬하게 비판하지만 그 언설을 뒤짚고 보면 묵자야말로 공자의 충실한 후계자임이 분명해진다. 묵자는 공자의 충실한 신도였다. 공자의 집단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흉내내어 일어난 어떤 패시피스트(pacifist, 평화주의자)적인 용병집단이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결코 공자의 세계에서 멀리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다. 묵자가 말하는 겸애(兼愛)’절용(節用)’은 그 이데올로기적 외피를 벗기고 보면 이미 공자의 핵심적 사상에 속하는 것이다. 묵자는 공자의 핵심사상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독자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공자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하는 공자는 모두 비판의 대상으로서 희화된 공자의 외피들이다.

 

이러한 묵자의 확고한 안티테제로서, 양묵(楊墨)에 대한 유가(儒家)의 적통성을 확립하려고 했던 맹자(孟子, 멍쯔, Meng Zi)야말로 공자의 최대의 이단일지도 모른다. 맹자가 유교(儒敎, Confucianism)의 적통일지는 모르지만, 공자의 가르침(Teachings of Historical Confucius)에 대해서는 최대 이단일 수도 있다.

 

맹자에게는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의 공자가 없다. 인의(仁義)라는 도덕주의적 사상의 주체로서 추상화되어 있고 논리화되어 있고 형해화(形骸化)되어 있다. 마치 사도 바울에게 역사적 예수의 상이 없는 것과도 같다. 예수는 오직 부활이라는 자신의 케리그마를 정당화시켜 주는 이념덩어리일 뿐이다. 맹자에게도 공자는 삶의 예지의 역사적 전승이 아닌, 맹자 자신의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주는 이념일 뿐이다. 맹자의 이러한 추상적ㆍ이념적 공자상은 증자(曾子, 쩡쯔, Zeng Zi)에게서 받은 것이다. 증자는 공자의 14유랑장정의 고난길에 참여한 적이 없는 후기의 어린 제자이다. 증자는 공자를 한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증자가 공자를 만났을 때는, 공자는 이미 한 면만 쳐다볼 수밖에 없도록 높이 솟아있는, 너무도 인간적일 수 없는, 거목이었다. 증자는 공자의 추상적 한 측면만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아이였다. 맹자는 증자를 이어받아 공자의 대설(大說)을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맹자의 대설은 본래의 소설(小說) 정신에도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다.

 

 

 

 

 미자편을 만든 사람들

 

 

나는 오늘날의 논어의 틀이 미자(微子)편을 만든 사람들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의 학설을 깊게 공감한다(孔子傳, 東京: 中公叢書, p. 273).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자(微子)편은 분명 논어의 상층대에 속하는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장자학풍에 노출된 공문의 사람들에 의하여 꾸며진 이야기들일 것이다. 공자와 자로가 장자가 구현하는 어떤 은자들의 모습 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림들은 분명 후대의 날조일 것이지만, 그 설화들이 상징하는 것은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삶의 전환, 사상적 대오(大悟)의 계기들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이었다. ‘무지의 자각을 외친 소크라테스가 과연 얼마나 자신의 무지로부터 벗어났는지는 형량키 어렵다.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변증법적 종국이 그의 제자 플라톤의 기술 때문일지는 몰라도 너무 이데아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죽을 때까지 일순간도 자신의 무지를 벗어나려는 호학(好學)의 노력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었고 과정적이었다. 종국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끊임없는 사상적 비상(飛翔)의 한 차원을 미자(微子)는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자의 편집자들은 장자(莊子)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공자상을 극복할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장자류의 은자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고양된 성자 공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비상의 계기를 통해 논어는 자유롭게 편집된 것이다. 그래서 보다 생생하고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적인 공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만약 논어가 적통임을 주장하는 아성(亞聖) 맹자(孟子) 계열에서 편집되었더라면 훨씬 더 경직되고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서물이 되었을 것이다. 논어속에는 제자백가의 모든 원형이 숨어 있다. 논어는 결코 유교만의 성전이 아닌 것이다.

 

장자(莊子)가 희화하고 있는 공자의 모습은 공자의 본래모습이 아니라 바로 맹자계열에 의하여 도덕주의적으로 고착화되어버린 공자에 대한 모멸감의 분출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장자가 말하는 모든 논리는 노자를 원형으로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살아있는 공자의 원래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본시 유()ㆍ도()의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장자(莊子)의 자유분방한 설화문학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공자의 살아있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가 젊은 시절에 주()나라의 수도 낙양(洛陽, 루어양, Luo-yang)에 가서 노자(老子)에게 예()를 물었다하는 이야기도, 그 노자(老子)가 오늘날의 도덕경의 저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공자사상에는 이미 도가적(道家的) 본질이 함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인()이나 노자의 수()나 유()가 모두 유교 이전의 유()의 내면적 특질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이야기나 장자(莊子)의 이야기를 우리는 같은 평면에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이해의 한 지평이다. 공구(孔丘, 콩 치우, Kong Qiu)가 말하는 인()의 궁극적 경지나 장주(莊周, 주앙 저우, Zhuang Zhou)가 말하는 좌망(坐忘)이나 현해(縣解, 懸解)를 모두 그 깊은 내면에서 상통하는 가치로서 인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곽점(郭店, 꾸어띠엔, Guo-dian) 초묘죽간(楚墓竹簡)의 출현은 노자(老子)라는 텍스트에 관한 BC 300년 이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는 놀라운 사실 이외로, 14편에 달하는 방대한 유교전적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첨가하고 있어 우리에게 연구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14편 중의 한 편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예기치의(緇衣)라는 사실이 우선 눈에 띈다. 장수(章數), 장서(章序), 문자(文字) 상에 출입이 있지만 현존하는 치의의 고본형태가 확실하다. 오늘날 이 14편의 성격이 대강 예기의 저본이 된 고문(古文) ()131한서』 「예문지에 공자의 70제자의 후학들이 기록한 것으로 책 제목이 실려있다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그 일부는 자사(子思)학파 계열의 저작이 분명하다고 주장되고 있다. 하여튼 곽점초간의 출현으로, 예기가 한대에 성립한 것이라는 의고풍적 통념은 통용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것들이 예기의 원본인지는 알 수 없어도 예기를 구성하는 담론들이 이미 BC 4세기에 문헌으로서 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 사후 공자학단에서 전파되어 나간 사상이 매우 활발하게 토론되고 기술되고 있었던 전국시대의 발랄한 사상풍토가 매우 생생하게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곽점죽간에 포함되어 있는 어총3에 현행 논어의 두 구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비록 논어의 편집사실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논어를 구성하는 공자의 말씀자료복음서로 말하자면 로기온자료들이 BC 4세기에는 이미 기록되어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할 수도 있다. 논어()’는 살아있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의 로기온이다. ‘()’이란 예문지의 표현대로 로기온들을 수집하여 논란을 거처 편찬한 것[輯而論纂]’이다. 그러니까 불교경전에 비추어 말하자면 결집을 뜻하는 것이다. 일부 성급한 주장처럼 (결집)’의 시기를 함부로 끌어올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로기온자료)’는 상당히 오랜 시간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73년에는 하남성 정주(定州, 띵저우, Ding-zhou)에 있는 서한(西漢) 중산회왕(中山懷王) 유수(劉脩, 리우 시우, Liu Xiu)의 무덤에서 논어죽간이 발견되었다. BC 54년 이전의 초본(抄本)이며 장후론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문헌이다. 이 정주한묘죽간본 논어장후론과는 또 다른 노론 계열의 판본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單承彬, “定州漢墓竹簡本論語爲魯論考,” 韓民族語文學36.

 

이제 다시 한번 우리의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이 질문에 가장 포괄적인 대답을 제공하는 전기문학서로서 우리는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논구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속에도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총체적 상이 리얼하게 그려지고 있질 않다. 공자의 삶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나에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삶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공자가 노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 장면. ()대의 무량사(武梁祠) 석각(石刻)

 

 

 짱구와 잉어

 

 

공자세가(孔子世家)보다도 더 늦게 편찬된 것이지만, 왕숙(王肅, 왕 쑤, Wang Su, AD 195~256)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공자 19세에 송() 나라의 병관씨(幷官氏, 삥꾸안스, Bing-quan Shi)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아들 백어(伯魚, 뿨워, Bo-yu)를 낳았다. 공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당대의 국군(國君)이었던 노나라 소공(昭公, 자오꽁, Zhao Gong)이 사신을 보내어 접시에 커다란 잉어[鯉魚] 한 마리를 담아 보내왔다. 공자는 아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문득 소공(昭公)이 보낸 잉어를 보고 잉어[]’라고 이름지었다. 백어(伯魚)는 리()의 자()이다. 그래서 지금도 곡부(曲阜)에 가면 공부가(孔府家)의 연석(宴席)에는 잉어요리가 올라오지 않는다. 공씨(孔氏)들이 어쩌다 타지에서 잉어를 먹게 되면 그들은 지금도 그것을 잉어라 부르지 않고 홍어(紅魚)’라 부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곡부에서 지금도 사실 그대로 신봉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공자전기의 작가들이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청년 공자의 지위가 국군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의 저자 자사(子思, 쯔쓰, Zi-si)의 아버지의 이름이 리()라는 사실에서 추론해보아도 이런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공자는 20세경에는 계씨(季氏, 지스, Ji Shi)의 일개 가신(家臣)인 양호(陽虎, 양 후, Yang Hu)에게도 문전박대를 당할 정도의 ()’에도 못미치는 천민(賤民)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자신이 자신의 과거 시절을 회상하여 나는 젊었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吾少也賤]”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고, 사마천도 공자는 어렸을 때 가난했고 또 천한 사람이었다[孔子貧且賤]”라고 말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어떻게 해서 스무살의 천민 공자가 곡부의 판자촌 어느 한 구석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그 나라의 국군(國君)인 소공(昭公)이 경축의 사신을 보내 성대하게 은쟁반에 담긴 잉어 한 마리를 선사했겠는가? 곰곰히 생각해봐도 좀 터무니없다.

 

시골 사람들이 애를 낳으면 산후조리가 어려우니까 잉어를 한 마리 구해다가 폭 고아먹는 것은 우리 어릴 적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습속의 하나였다. 아마도 공자부인이 고생 중에 아이를 낳았기에 건강이 좋질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보다가 딱한 주변의 당골네나 촌장이 잉어나 한 마리 고아먹으라고 주었을 것이다. 천민 공자는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부인에게 잉어 한 마리 고아 멕이고, 아들 이름을 잉어라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아들 이름이 잉어[]’라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사고방식이 즉물적이고 천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어릴 때 천민들의 자식들 이름을 보면, ‘개땅쇠’ ‘말똥이그런 류의 이름이 많았다. 내가 살던 천안동네 행길가 끝에 살던 오두막집 자식의 이름이 붙뚜리였다. 그 이름의 유래인 즉, 자식을 낳아 놓으면 하두 어디로 돌아다니다가 없어지곤 해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요번에는 집에 좀 꼭 붙어있으라고 붙뚜리라 했다는 것이다. ‘붙뚜리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의 삶이 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이 얼마나 곤고로운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공자의 이름이 구(, 치우, Qiu: 언덕의 뜻)이다. 그 아비 숙량흘(叔梁紇, 수리앙 허, Shu-liang He)과 어미 안징재(顔徵在, 옌 정짜이, Yan Zheng-zai)가 니구산(尼丘山, 니치우산, Ni-qu-shan)에서 빌어 낳았다 해서 ()’라 했다는데, 기실은 그 공자의 머리 생김새가 펑퍼짐한 니구산의 언덕 모양을 닮아 머리 꼭대기 정수리부분이 좀 움푹 파이고 주변으로 두상이 퍼져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구()라 했다는 것이다[生而首上圩頂, 故因名日丘云. 世家). 사마천의 이와 같은 명료한 기술에 의하여 말하자면 공자의 이름은 언덕대가리’, 가장 친근한 우리말로는 짱구[]’. 아버지의 이름은 공짱구’, 아들의 이름은 공잉어’, 짱구의 아들 잉어의 탄생을 놓고 국군(國君) 소공(昭公)이 경하의 사절을 보냈다는 것, 그래서 공자가어(孔子家語)의 표현을 빌리면, ‘영군지황(榮君之貺, 임금의 경하를 영예롭게 생각)’하여 잉어란 이름을 지었다 운운하는 이런 식의 기술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신화적 기술양식과 그 픽션적 성격은 비슷하다. ‘짱구와 잉어라는 부자(父子)의 이름이야말로 우리가 그 출신의 비천함을 알 수 있는 너무도 명백한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국군(國君)의 공경의 대상으로 기술되는 사태는, 후대의 공자인식이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공자가 말년이나 사후에 점한 어떤 위치에 의하여 그 삶의 모든 사건이 유기적으로 일관되게 해석되어야만 했던 어떤 권위주의적 인식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자가 35세 때, 계평자(季平子, 지 핑쯔, Ji Ping-zi)와 후소백(郈昭伯, 허우 사오뿨, Hou Shao-bo)닭싸움[鬪鷄]’을 벌였는데, 서로 야비한 짓을 하다가 화가 나서 큰 싸움으로 비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소공은 후소백편을 들어 계평자를 쳤는데, 계평자는 맹손씨(孟孫氏, 멍쑨스, Meng-sun Shi), 숙손씨(叔孫氏, 수쑨스, Shu-sun Shi)와 연합하여 소공을 쳤다. 소공은 이에 크게 패하여 제(, , Ji) 나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이 사건을 공자가 제나라로 간 사건과 병치시키고 있다. 사실 닭싸움과 공자가 35세라는 사실은 전혀 무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가의 기술방식은 마치 공자 35세 시점에 어떠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이 공자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소공이 제나라로 패주한 사실과, 공자가 젊었을 때 한때 제나라로 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두 사실을 교묘하게 병치시켰다. 그래서 마치 공자가 패주한 국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계씨의 독재로 어지러워진 노나라를 떠나 국군을 보좌하기 위하여 제나라로 간 것처럼 위장시킨다. 그러나 공자는 대부간 닭싸움에의 불필요한 개입으로 패주했어야만 하는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소공을 보좌하러 같이 제나라로 가야만 할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공자가 그 후 제나라에서 한 행위들, 고소자(高昭子, 까오 자오쯔, Gao Zhao-zi)의 가신(家臣)이 되어 제나라의 경공(景公, 징꽁, Jing Gong)과 통()하려 했다든가, 제나라의 태사(太師)에게 소(, 사오, Shao)음악을 배웠다든가 하는 일련의 사건은 패주한 노나라 소공을 보좌한다고 하는 명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간 것은 소공이 십오 년 전에 아들 낳았을 때 잉어를 보내준 그 감격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을까? 소공과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암시로서 잉어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까?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바로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공자기술이 이렇게 정당화되기 어렵고 필연적 인과관계가 부족한 사태들의 그럴듯한 몽따쥬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러한 기술 속에서 살아있는 리얼한 공자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어려워진다.

 

 

초병정(焦秉貞)의 공자성적도(孔子聖迹圖) 7영광과 축하의 이름을 짓다(命名榮貺)

 

 

 공자가문 3대 이혼설

 

 

예기』 「단궁의 기록에 의하면 공짱구는 잉어를 낳은 부인 병관씨(幷官氏)와 이혼했다. 그 이혼한 부인(出母, 정확하게 내쫓긴 부인의 뜻)이 죽었을 때 일 년이 지나도록 잉어가 슬피 울었다[期而猶哭], 잉어가 그토록 슬피 운다는 소리를 듣고 공짱구는 화가 나서 너무 심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잉어는 곡을 뚝그치고 말았다. 그뿐인가? 잉어[]는 또 그의 부인과 이혼했다잉어가 죽은 후에 재가했다는 설도 있고, 이혼설도 있다. 그 부인은 위(, 웨이, Wei)나라로 가서 서씨(庶氏, 수스, Shu-shi)와 다시 결혼했다. 그러다가 위나라에 가서 재가(再嫁)한 그 잉어의 부인, 그러니까 중용(中庸)을 지은 자사(子思)의 엄마가 되는 셈인데, 그 부인이 죽었다. 그러자 자사가 그 소식을 듣고 곡부 공씨의 사당에서 슬피 울었다[子思之母死於衛, 赴於子思. 子思哭於廟]. 그러니까 자사의 문인들이 자사에게 와서 물었다.

어찌하여 서씨의 엄마가 죽었는데 공씨의 사당에서 곡을 하십니까?[庶氏之母死, 何爲哭於孔氏之廟乎]”

그러니까 자사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하면서 딴 집으로 가서 몰래 울었다는 것이다[子思曰: “吾過矣, 吾過矣.” 遂哭於他室].

그뿐인가? 자사도 또 이혼했다. 그 자사의 이혼한 부인이 죽었을 때 그 아들인 자상(子上, 쯔상, Zi-shang, 이름은 백)이 복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사의 문인들이 와서 선대(先代)에는 출모(出母)라도 상을 입었는데 왜 선생의 아들인 자상으로 하여금 상을 못 입게 하냐고 물으니까, 자사가 골이 나서, “그년은 내 마누라가 아니니까 자상의 엄마도 아니다. 복상할 필요없다고 잘라 말하는 광경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공씨가문에서 출모에게는 상을 입지 않는 전통이 자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故孔氏之不喪出母, 自子思始也].

 

공씨가문의 사람들이 짱구와 잉어, 이런 천한 이름을 소지한 신분의 사람들이다. 게다가 잉어의 아들 자사(子思)까지 삼대에 걸쳐 모두 이혼한 불행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정중심의 도덕원리를 표방한 유교의 패러곤(paragon, 표본)들의 실상이 과연 무엇일까? 짱구에 의하여 논어가 나왔고 짱구의 손자 자사에 의하여 희대의 위대한 철학서 중용(中庸)이 나왔고, 이것들이 모노가미(일부일처제) 가족윤리의 규범을 설정했다고 한다면, 그 규범의 주인공들의 사생활이 이와 같이 개차반이었다는 이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공자를 위대한 예악(禮樂)의 완성자로서 기리고자 하는 예기가 왜 이와 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기록하고 있는가? 이것은 과연 사실의 투영인가? 상상의 날조인가? 사실이라면 무당동네 판자촌에서 개차반으로 산 천민들의 이그러진 삶의 실상의 고발인가? 날조라면 과연 왜, 어떠한 목적으로 날조한 것일까? 이혼한 부인이지만 생모이기에 구슬피 흐느끼는 자식의 울음마저 그치게 만드는 이 졸렬한 인간상들 앞에 우리는 과연 어떠한 경외감을 느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공자의 얘기들을 위대한 경전 속에서 읽고 다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 덮었어야만 했을 과거 조선의 유생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했을까?

 

 

 

 

 인성과 신성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과연 악처(惡妻)였을까?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였다는 사실을 통해 반사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철인(哲人)으로서 위대해졌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공자 삼대에 걸친 가족사의 비극은 공자 삼대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어떤 반사적 장치였을까? 나는 공자를 둘러싼 이와 같은 끝도 없는 이야기들의 실상을 파헤치려는 노력 그 자체의 허구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이든, 단궁의 기록이든, 장자(莊子)의 기록이든, 이 모든 것이 사실의 르뽀([reportage)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양식(Form)목적론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기록의 사실여부에 대한 추정에 앞서 근원적인 어떤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단궁의 상기의 기록은 예의 근본이었던 상례(喪禮)를 둘러싼 어떤 양식적 논의 속에서 공패밀리의 인물들이 드라마틱한 구현체로서 설정된 것일 뿐이다. 진위(眞僞)의 논변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세칭(世稱)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경우, 반드시 그 정체를 폭로하고 그 가면을 벗겨내리고 그 신화적 의미를 깎아내리는 짓을 통해서만, 그들의 실상이 드러나고 실증사학의 정신이 성취된다는 그러한 단순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목적이 저속화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파헤치고 있는 과정은 단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공자라는 인간, 그 인간의 삶과의 만남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분개할 것이다. 그 질문 자체가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너무도 신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논의를 뛰어넘는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는 상상 속에 날조된 인물일 수밖에 없다. 가버나움의 시몬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 예루살렘의 타락한 성전을 뒤엎어 버리고, 가롯 유다의 배반 속에 로마병정에 팔려 넘김을 당하고, 십자가라는 형벌 속에서 죽고, 다시 돌무덤을 열고 부활의 영광을 보인 그 예수, 벤허와 같은 수없는 당대의 인물들이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을 그 예수의 역사적 실존성을 거부한다면 기독교의 존립근거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든, 성령스러운 빛의 화현(化現)이었든, 죽어도 죽어버리지 않고 다시 부활하는 로고스(λόγος, Logos)였든지 간에, 그 예수가 역사 속에 실존한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신성(divinity)100퍼센트 인정하는 만큼 예수의 인성(humanity) 또한 100퍼센트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반신반인의 어중간한 신화적 존재일 수는 없는 것이다.

 

복음서 속에서도 예수는 연민하고 분노하며 먹고 마신다. 갈릴리의 소외받은 연약한 민중들과 희노애락을 공유하며 그들과 공감하는 일상적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였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게걸스러운 먹보(glutton)’, 그리고 술주정뱅이(drunkard)’로서 인지되었다(11:19, 7:34), 세례 요한은 금식과 금욕을 일삼았지만 예수는 잔치를 즐겼다(John fasts, Jesus feasts. J. D. Crossan, Jesus, 48). 이러한 인간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의 최종적 존립근거인 성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나 공자나 우리와 같은 동일한 일상성 속에서 그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자의 삶에 관한 기록을 전달하는 문헌이 그 일상적 현실감각을 결하는 어떤 양식이나 케리그마의 소산이라는 데 그 근원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우리의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을까? 그 삶의 과정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문헌인 공자세가(孔子世家)가 결코 이러한 문제에 시원한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면 과연 다음의 접근방식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사기(史記)외에 다른 문헌이 있는가?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논어라는 문헌인 것이다.

 

공자는 공자세가(孔子世家)속에도 예기속에도, 여타의 어느 문헌 속에도 없다. 공자는 오직 논어속에만 살아 있다. 나는 논어이상의 진실한 공자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공자세가(孔子世家)도 결국 논어의 어(, 로기온자료)를 의미있게 만들기 위하여 역사적 사건들을 배열했을 뿐이다. 로기온파편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그럴듯한 역사적 사태들을 구성해낸 것이다. 그러나 논어속에는 공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공자의 숨결이 생동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대로 노양공(魯襄公, 루 시앙꽁, Lu Xiang Gong) 22(BC 551)에 탄생했는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나 곡량전(穀梁傳)의 기록대로 노양공 21(BC 552)에 탄생했는가? 이러한 논쟁은 학자들에 따라 끊임없는 고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공자가 BC 551에 태어났든, BC 552에 태어났든, 공자의 이해나 공자를 둘러싼 역사의 이해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사태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가능한 사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이 논어의 위대성에 크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어가 말하고 있는 공자의 사실이야말로 구극적으로 살아있는 공자에 관한 사실인 것이다. 공자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일차적으로 논어를 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주장은 또 다시 인식론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노정(露呈)시킨다. 논어그 자체가 공자의 삶의 직접적 전달은 아니라는 것이다. 논어, 공자가 직접 쓴 것도 아니고, 공자의 직전 제자들이 편찬한 것도 아니다. 공자 사후에 오랜 세월에 걸쳐 공자문인들의 다양한 유파에 의하여 성립한 단편들이 집적된 것이다. 그렇다면 논어공자세가(孔子世家)나 여타문헌에 비해 그 오리지날리티를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매우 희박해진다. 어찌 논어만이 공자의 진실한 모습을 전달한다고 호언할 수 있단 말인가? 논어도 공자가 죽은 후 삼사백년 후에나 편집된 것이라고 한다면.

 

 

 

 

 논어의 Q와 안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논어는 유교의 이단서이다. 논어야말로 성인공자의 최대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논어가 유교의 이단이라 함은, 유교를 국가종교(state religion)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 유교를 절대적인 권위체계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의 정직하고 비권위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은 이단으로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어가 성인 공자의 걸림돌이라 함은, 공자를 성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에 비치는 너무도 인간적이고 변화무쌍한 희노애락의 공자상은 성인화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어에 있어서처럼 한 인간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펼쳐진 문헌은 고대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서구문명의 고전을 이루는 대부분의 문헌이 초자연적 설화나 신화적 각색을 탈피하지 못한다. 논어는 인류문명사의 한 축복이다.

 

논어는 분명 공자사후에 제자들의 활약으로 분기되어나간 여러 학파들의 전승, 또 공자를 흉내내는 유사집단들에게 화제가 된 전승 등을 통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집적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논어텍스트는, 공관복음서의 ()마가자료Ur-Markus, 현존하는 마가이전의 마가조형으로서 공관복음서 모두에게 영향을 준 가상적 원초자료‘Q자료Quelle, 마태」 「누가에 공통되면서 마가에는 없는 자료, 그러니까 마태, 누가는 마가두 자료를 보고 복음서를 집필했다. 두 자료가설, The Two-Document hypothesis[TDH]와 같이, 어떤 공자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하는 초기자료, 즉 이미 공자의 생전부터 기록되었을지도 모르는 원()자료들이 상당 부분 그 기저에 남아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공자는 천민출신의 개비적 인간이었지만, 그의 최대의 강점은 문자를 활용하는 능력과, 문헌을 다루는 실력에 있었다. 그의 제자집단(공자운동집단)이 강력한 유대감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문자적 표현의 학습과정에서 획득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문아(文雅)한 측면을 가장 잘 계승한 제자는 안회(顔回)’였다. 그러나 안회는 불행히도 장년의 나이에나는 안회의 죽음의 나이를 30세 전후로 보지 않고, 40세 전후로 본다,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만약 안회가 공자 사후에 장시간 살아남았더라면, 오늘 논어의 모습은 보다 전일하고 체계적인 성격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안회의 요절은 공자에게 저주이자 축복이었다. 안회가 요절하지 않고 오래 살아남아 공자의 말씀을 꼼꼼히 편집했더라면 논어는 안회의 인식의 울타리에 갇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회의 요절은 공자를 안회의 인식의 울타리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나 논어에는 분명 안회의 오리지날한 기록의 파편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공자와 자로(子路, 쯔루, Zi-lu)와의 대화는 그 생생한 캐릭터의 모습과 내면적 심성에서 북받쳐 우러나오는 진실이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공자와 자로의 대화는 그 상당 부분이 안회가 살아있을 때 기록해 놓은 매우 초기의 생생한 파편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논어라는 텍스트의 경우 정확하게 공관복음서 문제(Synoptic Problem)와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같은 자료의 다른 전승이라는 비슷한 문제가 논어에도 개재되어 있다. 그러나 논어는 공자의 어록일 뿐이다. 복음서 또한 예수의 어록이지만, 논어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말을 케리그마적 의미체계로 둔갑시키는 삶의 내러티브(narrative)를 전제로 해서 배열되고 있는 어록인 것이다. 그 내러티브는 당연히 예수의 삶의 일정한 시간적 서열이라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공관복음서의 원자료라고 생각되는 마가복음은 매우 직선적인 시간서열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세례 요한의 이야기

2) 예수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

3) 예수의 갈릴리 선교

4) 유대지방에로의 여행

5) 예루살렘에서의 클라이막스

6) 수난의 내러티브

7) 빈 무덤의 발견

 

마가에는 예수처녀탄생 설화나 예수의 부활이야기가 없다.

 

마태누가는 이러한 마가의 틀을 기본적으로 준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가의 자료에다가, 앞을 서로 다른 예수탄생 설화로 장식하였고, 후미를 또 서로 다른, 부활한 예수의 현현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리고 마가에 없는 어록자료 큐와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다른 자료들을 첨가시켰다.

 

그러나 논어는 이러한 공자의 삶의 시간서 열적 구조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어록의 상황은 그 상황을 만들고 있는 캐릭터나 사건들에 의하여만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복음서에 가까운 것은 논어가 아니라 공자세가(孔子世家). 만약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와 같은 것이 동시대의 여러 사가들에 의하여 비슷한 시기에 집필되었다면 공자도 예수처럼 공관복음서문제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명료하게 인지해야 할 사실은 노론(魯論)’ ‘제론(齊論)’ ‘고론(古論)’의 문제가 결코 공관복음서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다른 전승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어라는 서물이 편집된(상한이 전국말) 이후에 제나라와 노나라 지역에서 각기 통용되던 약간 상이한 판본의 배리에이션 정도의 문제일 뿐이며, 편집되기까지의 다른 전통을 과시하는 전승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제론이라고 해봐야 노론에 비해 문왕(問王)」 「지도(知道)두 편이 많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두 편의 내용은 장후론이 성립할 때 이미 노론 체제 속에 흡수되어 장후론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니까 논어의 전승은 어디까지나 노론 중심일 수밖에 없다. 고론(古論)이라는 것도 많은 사람이 논어 그 자체의 옛 전승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고론은 옛 논어가 아니라 단지 금문(今文)이 아닌 고문(古文)으로 쓰여진 것으로서, 후대에 발견된 판본이라는 뜻이다. 소위 공벽(孔壁)에서 나왔다는 것인데 그 진실성 여부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분석하여 보면 허구적 풍문에 기초한 것일 수 있으며, 실체의 확인이 근본적으로 난감하다. 하여튼 삼론(三論)의 문제는 춘추전국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한대(漢代)의 문제의식일 뿐이다. 그리고 삼론의 차이가 공자에 대한 이미지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그러한 내용의 차이는 없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도마복음서큐복음서의 출현과 같은 사태를 논어의 판본의 세계에서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논어의 편 사이에 있어서도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고, ‘자왈(子曰)’계씨편이나 다른 곳에서 공자왈(孔子曰)’로 바뀌는 등 다양한 양식적 변화가 감지되며, 1인칭, 2인칭, 조사 등의 다양한 변화가 있고, 또 각 편에 따라 특이한 주제전개방식이나 기술형식의 다양성이 있으며,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문헌에 동일한 주제가 달리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공관복음서에 적용되는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나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과 유사한 문제의식으로 텍스트를 접근할 수도 있다. 성서의 경우는 아람어나 히브리어 자료를 희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에서 이미 다른 버젼의 문제가 생겨났겠지만, 논어의 경우는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제국간에 말은 달라도 문자는 어느 정도 공통되었을 것이다. 동일한 구문이 여러 텍스트에 나오고 있다는 것은 동일한 초기 파편의 유통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떤 프로토 텍스트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전승의 차이가 기독교복음서에 있어서처럼 근원적인 케리그마의 패러다임적 변화를 수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어도 현행 논어의 보충자료가 될지언정, 현행 논어의 패러다임을 바꿀만한 사태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신화와 상식의 차이를 오가는 비약적 관점변화의 문제가 아니라, 공통된 인문학적 상식내에서의 관점의 차이 정도에 머무르는 문제일 것이다.

 

현존하는 논어20편은 그 편제가 일찍 확정된 것이므로, 각 편마다 어떤 주제적 통일성이나 시공적 균일성이나 전승의 독자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편의 각 내용이 이러한 독자적 성격을 말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각 편들의 편집 시기는 각기 한 시점으로 규정할 수 있어도, 한 편의 전승의 내용의 성격은 도저히 균일한 것으로 묶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이미 학이(學而)’술이(述而)’니 하는 식으로 의미론적 구조와 관계없이 첫 두 글자만을 따서 편명을 삼았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어떤 일관된 주제를 내걸기에는 너무도 그 내용이 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각 편의 편해에서 상술하겠지만 각 편의 이름은 우연적인 요소로만 보기에는 매우 치밀한 편집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편명이 세 글자인 경우도 두 편이 있다.

 

논어의 모든 편의 편집시기를 세밀하게 재구성한 최근의 브룩스E. Bruce Brooks 白牧之 and A. Taeko Brooks 白妙子의 역작(力作), 논어변(論語辨)The Original Analect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이 있다. 이 책은 매우 광범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치밀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엄밀하게 검토하여 보면 좀 황당한 가설들에 기초하고 있다. 이 책은 그 노력의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논어에 대한 왜곡일 수도 있다. 논어각 편의 편집시기를 연도별로 세밀하게 구성한다는 것은 논어의 경우 많은 무리가 뒤따른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편집되었든지 간에, 그 편집된 내용이 곧 그 편집 시점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각 편을 구성하는 어록의 파편이 공자의 삶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체험을 반영하는가 하는 것이 보다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것도 근원적으로 정확한 논의가 불가능한 것이다. 공자의 삶의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에니그마(enigma, 수수께끼)에 속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불가지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학문은 정밀성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지만, 고전 텍스트의 경우, 정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왜곡도가 높아질 수도 있다는 파라독스를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의 삶은 정밀한 분석이 불가능하다. 공자의 삶은 어차피 현재의 시점에서 끊임없이 재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마가복음의 패션 내러티브(Passion narrative, 수난 이야기)처럼 어떤 교리적 케리그마의 구조에 갇혀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개방된 인문학의 장()이다. 논어자체가 우리에게 신화적 도그마를 강요하지 않는다.

 

 

북한이 평양시 낙랑구역 한 목관묘(木槨墓, 귀틀무덤)에서 발굴했다는 사실만을 지난 1992년에 간단히 보고한 죽간논어(竹簡論語, 대나무 조각에 쓴 논어). 2009년에 비로소 실물이 공개된 이 죽간은 논어 중에서도 선진(先進)과 안연(顔淵), 두 편을 묵서(墨書)로 적은 텍스트로, 정백동(貞柏洞) 364호분이 출토지며, 정확한 출토량은 39매로 밝혀졌다. 2009.11.29 연합뉴스

 

 

 이인술이, 상론과 하론

 

 

상식적 느낌 이상의 정밀한 논의는 아니지만, 언뜻 이인(里仁)편이나 술이(述而)편과 같은 것은 공자의 어록으로서는 매우 초기자료일 것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이인(里仁)이 두 개의 파편(15, 26)을 빼놓고는 모두 간결한 자왈(子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든가, 술이(述而)편의 내용 또한 중간 중간에 ()’로 시작되는 공자의 일상적 삶의 자세나 용태(容態)가 삽입되어 독특한 편집양식을 과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공자 스스로의 삶의 철학에 관한 자술(自述)이며, ‘자왈子日"의 간결한 형식으로 편집되어 순결한 공자의 원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노나라에서 비교적 초기에 편집된 공자격언집 같은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각 편에 즉()하여 논의될 것이다.

 

상론(上論, 1~10)과 하론(下論, 11~20)의 구분도 결코 엄밀한 구분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상론에도 후대의 파편이 편입되어 있고 하론에도 초기의 파편이 편입되어 있는 사실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론이 그 정편(正篇)이며 하론이 그 속편(續篇)이라고 하는 이토오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상ㆍ하론논의는 그 확실한 근거를 찾기도 어려우며 실제로 무의미하다. 상론의 마지막 편인 향당(鄕黨)편이 그 내용이 매우 특수한 성격임에 비추어, 상론을 마감하는 의도로 말미에 붙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황간소(皇侃疏)에 의하면 한()시대에 전승되고 있던 고문(古文)학파 텍스트 고론의 체제 속에선 향당(鄕黨)편이 학이(學而)편 다음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어, 그 편제의 실상을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론과 하론의 구분은 방편상 유용한 논의로서 수용될 수도 있다. 상론과 하론에서 각각 대체적으로 일관되는 어떤 분위기를 감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상ㆍ하로 구분짓기에는 역시 어려운 문제가 많다. 내 느낌으로 상론 맨앞에 나오고 있는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편은 오히려 하론적 성격이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우풍영의 날조

 

 

논어를 읽을 때, 간결한 자왈(子曰)’의 형태를 취하거나, 제자들의 자()를 직접 호칭하거나, 노나라 밖으로 출사(出仕)하지 않은 직전제자의 전승이나, 공자보다 일찍 죽은 안회나 자로가 등장하는 파편과 같은 것들은 대체로 고층대에 속하는 파편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공자왈(孔子曰)’한다는 것은 공자학단 밖의 사람들이 공자를 객관화시켜 부르는 말이므로 후대의 전승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러 사람사이에서 오가는 기다란 대화형식을 취한 것, 아규먼트(argument, 주제)의 성격이 강한 것, 그리고 드라마적인 구조를 갖춘 것들은 대체적으로 후대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진(先進)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자로(子路)ㆍ증석(曾晳)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가 공자를 시좌(侍坐)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특기할 사실은 중석(曾晳)의 답변이 제일 나중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의 무우풍영(舞雩風詠)’의 답변내용만을 공자가 허여(許與)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로ㆍ염유ㆍ공서화 3인이 나가고 난 후에 증석 혼자만이 공자 곁에 남아, 공자와 사적인 정담을 나누며, 나간 3인의 답변내용을 분석검토하는 공자의 멘트를 듣는다. 이것은 명백히 공자 교단내의 증석의 위치가, 자로ㆍ염유ㆍ공서화에 비해 한 레벨 높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증석에 대한 허여의 차원이 타 3인과는 질적으로 격상되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로를 내보내놓고 자로 등 뒤에서 공자가 증석과 멘트를 나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불성설의 상황이다. 여기에 모종의 음모가 감지된다. 증석은 증자의 아버지다. 맹자(孟子)는 바로 증자계열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이다. 이 파편은 증자 - 맹자 계열에서 증석 - 증자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꾸민 드라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진(先進)25 본문에서 자세히 분석하겠지만 기존의 파편들을 조합하여 새롭게 공자상을 구성한 증자학파외의 작품일 수도 있다. 증석은 증자의 아버지가 아닌 전혀 가상적 인물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증자가 들은 공자의 말로서 기록되고 있는 파편들은 대부분 후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조작적 성격이 강하다. 증자는 공자 최만년에 입학한 제자였으며 공자와 직접 심오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위치에 있었을 기회가 없었다. 이인(里仁)15편의 그 유명한 일이관지(一以貫之)’에 대하여 증자가 충서(忠恕)’ 운운한 종류의 파편도 그 실제상황이 의심되는 것이다. 증자계열에서 자파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드라마이며 역사적 공자의 원래사상을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충서를 공자사상의 일관된 본질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논어를 분석해 들어가는 작업은, 끊임없이 재미있는 텍스트의 비평(textual criticism)의 묘미를 제공할 수도 있고, 텍스트의 원형을 복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또 텍스트의 무한히 가능한 새로운 배열이나, 텍스트 자체의 교정이나 변형에 의한 새로운 의미의 발굴을 가능케 해줄 수도 있지만, 최종적인 문제는 이러한 문헌비평의 궁극적 성과가 과연 논어의 오리지날리티를 바르게 변()할 수 있으며 더 나은 공자의 이해로 우리를 다가가게 하는가,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질문에 매우 회의적 답변을 내린다. 논어그 텍스트를 아무리 분석해도, 논어를 아무리 재배열해도, 논어를 아무리 변형시켜도, 우리의 시각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공자의 말씀이라는 어떤 오리지날리티로 우리를 데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변형된 텍스트가 있는 그대로의 텍스트에 비해 더 우수하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무수한 고증학자들의 땀방울이 황하의 물결처럼 도도히 흐르기만 하는 논어의 탁류 속에 족적없이 명멸할 뿐이다.

 

우리가 해석해야 할 것은 논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논어, 이천여년을 묵묵히 흘러내려온 논어라는 의미체계, 이미 역사 속에서 수없는 인간들의 의식의 장 속에 새겨진 텍스트 그 자체의 해석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논어라는 텍스트는, 이미 그 오리지날리티의 시비를 떠나,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공자라는 관념을 형성시킨 것이다. 논어로 돌아가자!(Return to the Analects!)

 

논어그 자체로 회귀하라는 나의 외침은 매우 소박한 요구이지만, 이러한 소박한 요구는 결코 소박하지가 않다. 논어라는 텍스트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텍스트의 이해는 공자 그 인간에 대한 선이해(先理解, Pre-Understanding)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텍스트의 의미가 맥락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선이해는 또 다시 논어라는 텍스트에서만 발현되어야 한다고 하는 파라독스에 우리는 봉착한다. 결국 이러한 파라독스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논어라는 텍스트와 공자라는 인간 사이를 왕래하는 우리 인식의 변증법적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는 시험적인 모델들을 요구한다. 논어는 분명 공자라는 인간의 삶의 구조 속에 던져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공자의 삶의 구조를 변증법적으로 전제할 것인가?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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