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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2. 시 300편을 한 마디로 하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2. 시 300편을 한 마디로 하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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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300편을 한 마디로 하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2-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시 삼백편을 한마디로 덮어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
2-2. 子曰: “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

 

 

공자와 육경

 

다산시삼백(詩三百)’이라는 표현에 대해 성호선생(星湖先生)의 말을 이라는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보주(補注)를 하고 있다.

 

 

()하여 말한다: ()는 정확하게 311편이다. 그런데 그중 6개가 생시(笙詩)주공(周公)이 당시의 노래를 기악곡화해서 생황으로 연주한 6. 가사는 일찍 사라지고 그 제목만 남아있다이고, 5개가 상송(商頌)이다. 생시()는 본래 가사가 없는 것이고, 상송(商頌)은 주()나라 것이 아닌 전대(前代)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종류는 시()의 편수에서 계산될 수 없다. 그래서 시()는 단지 300편이라 하는 것이다.

補曰: , 三百十一篇. 其六, 笙詩也; 其五, 商頌也. 笙詩本亡, 商頌, 前代之詩, 故不在數. , 惟三百篇也.

 

 

아주 정밀하게 말한 좋은 주석같이 여겨지지만, ‘시삼백(詩三百)’이라는 표현은 너무 그렇게 정밀하게 따질 수가 없는 것이다. 상송(商頌)이 전대(前代)의 시()래서 카운트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시가 꼭 주대(周代)의 것에 한정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경311편인데, 그중 6편은 제명만 있고 그 가사가 없다. 그래서 보통 305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자의 시삼백(詩三百)’이라는 표현은 그냥 어림잡아 말하는 구어적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자의 이 말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정확한 문헌적 지식을 과시하는 듯, ‘시경삼백 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운운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번역이다. 공자에게서 ()’는 단순히 노래(Songs)’를 의미한 것으로 시경일 수가 없다. 비록 공자가 말한 노래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문헌으로서 보유하고 있는 시경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공자의 말 중의 ()’시경(詩經)으로 번역될 수가 없다. ()시경(詩經)’으로서 경전화(經典化)된 것은 한대에서나 이루어진 것이며, 전국시대까지의 모든 문헌에서 ()’는 그냥 노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경(五經) 중의 하나인 시경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 된다. ‘()’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일정한 제도권의 커리큘럼내 에서 권위를 갖게 된 후의 사건이며 그것은 고전의 정경화(canonization)를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 유교의 경전으로서 손꼽는 십삼경(十三經) 중에서 공자시대에 리얼한 문헌으로서 엄존했던 유일한 경전이 시경이라고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생각되어지고 있다. 공자의 생애와 관련되어 오늘 우리에게 남아있는 문헌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경단 한 권일 수도 있다. 이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통 시()ㆍ서()ㆍ예()ㆍ악()ㆍ역()ㆍ춘추(春秋)육경(六經)이 모두 공자의 작()이라고 말한다. 이때 과연 이라는 행위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시ㆍ서ㆍ예ㆍ악ㆍ역ㆍ춘추가 모두 공자의 창작이라는 말인가? 다시 말해서 공자 이전에는 그러한 내용의 문헌이 전혀 없었다는 말인가? ‘이라는 말이 요새 우리가 쓰는 방식의 창작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용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물론 소라이(荻生徂徠)가 육경(六經)이 모두 선왕(先王)의 작()이라 했을 때의 작은 거의 창작이라는 개념에 가깝지만, 그것은 선왕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며, 공자에게는 그러한 작의 의미내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소라이(徂徠)에게 있어서 공자는 선왕이 아니었으므로, 엄밀히 작자(作者)가 아니다. ‘술이부작(述而不作)’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창작자(Creator)가 아니라 있는 것을 수집하고 편찬하고 전달한 사람(Transmitter)이 될 것이다. 과연 공자가 시()ㆍ서()ㆍ예()ㆍ악()ㆍ역()ㆍ춘추(春秋)를 모두 수집하고 편찬하여 후대에 전달한 것일까? 여기에 정확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현존(現存)하는 십삼경(十三經)이라는 문헌의 성립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중국경학사(中國經學史)의 모든 논의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어떤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난해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경학사의 논의 자체가 어떤 일치된 결론을 도출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갈래가 있기 때문이다.

 

()는 현재 시경(詩經)으로 남아있고, ()는 현재 서경으로 남아 있다. ()는 현재 삼례(三禮)의례(儀禮), 예기(禮記), 주례(周禮)가 있고, ()은 악경(樂經)이라고 할 만한 문헌이 따로 존재하지를 않는다. ()은 현재 주역(周易)혹은 역경(易經)이라고 불리는 문헌이 남아있고, 춘추(春秋)는 삼전(三傳)춘추좌씨전,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이 있다. 여기에 논어(論語), 효경(孝經), 이아(爾雅), 맹자(孟子)를 보태면 십삼경이 되는 것이다. 복잡한 경학사를 들먹일 필요가 없이 우선 이 십삼경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논어(論語), 효경(孝經), 이아(爾雅)는 분명 공자 이후에 성립한 문헌들이다. 그리고 삼례(三禮)도 모두 공자이후에 성립한 문헌임이 확실하다. 춘추(春秋)의 삼전(三傳)()에 대한 세 종류의 주석도 물론 공자 이후에 성립한 것이다. ()은 문헌이 본시 없으며, 주역(周易)은 나의 기나긴 연구성과에 비추어 볼 때, 현존하는 주역이라는 문헌은 전혀 공자의 창작으로 간주될 수 없다. 공자와 관련되어 후대에 성립된 문헌을 공자의 이름을 빌어 부분적으로 삽입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공자시대에 엄존했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문헌이래야 십삼경(十三經) 중에서 ()그리고 춘추(春秋)본경(本經) 정도가 남을 뿐이다. 그러나 이중 서경은 고문(古文) 논쟁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춘추(春秋)경 그 자체도 공자의 저작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소위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에 관해서도 제설이 분분하다. ‘춘추란 본시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에 따라 흘러가는 인간세의 사적(事跡)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책의 이름으로 채택된 것이다. 춘추(春秋)는 향후의 모든 편년체(編年體) 역사기술의 조형을 이루는 것으로, 은공(隱公)으로부터 애공(哀公)에 이르기까지의 십이대(十二代) 242년간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역사연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역사적 인물이나 주변의 제자나 지인들에 대한 인물평론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공자가 말년에 자국의 역사를 서술하여 연대기의 모범을 과시할 목적으로 춘추를 지었다는 가설을 세우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간결한 사적의 나열에 불과한 것으로, 그 문장 속에 필자의 도덕적 주관에 의한 포폄(褒貶)의 필법이 숨어있다고 말하기가 실로 어렵다. 하여튼 춘추경과 공자와의 관계를 말한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공자의 말년 몇 년 사이에 관계되는 것이다. 공자의 교육커리큘럼 속에 항존하는 어떤 것으로 공자의 일생을 지배한 문헌, 춘추경을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공자가 공자 입으로 춘추를 말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역도 말한 적이 없다. 주역의 내용과 관련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자가 공자 입으로 육경(六經)’을 말한 적이 없으며, ()ㆍ서()ㆍ예()ㆍ악()’을 함께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단지, ()와 서(), ()와 악()이 각기 하나의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서 논어에 나타날 뿐이다. 이때 시서(詩書)’는 어느 정도 문헌적 근거가 있는 그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예악(禮樂)’은 거의 문헌적 지시가 없다. 다시 말해서 공자에게 있어서 예약이라는 말은 예경악경이라는 어떤 문헌을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사용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의례와 음악이라는 어떤 추상적 문화질서나 행위를 지칭하고 있을 뿐이다.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시경

 

이상의 모든 논의를 총괄하면 공자의 인생에 있어서 육경(六經)이나 십삼경(十三經)과 관련하여 확실하게 남는 문헌은 오직 ()’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외로도 ()’만은 그 조형이 되는 어떤 문헌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에 관한 나의 해답은 매우 아이러니칼하다. ‘()’는 문헌일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공자의 생애를 지배한 확실한 문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이 공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리얼한 그 무엇이었다. 우리는 먼저 의 의미를 확실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공자에게 있어 서 노래였다. 그것은 문헌이 아닌 민요였으며 민중의 노래였다. 현재 시는 풍()ㆍ아()ㆍ송()이라는 세 개의 장르로 구분되는데, ()은 민중의 노래며, ()는 대부(大夫)의 노래며, ()은 종묘제례악이다. 이 풍()ㆍ아()ㆍ송() 중에서 시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국풍(國風)이다. 즉 여러 나라(제후국)들의 민요들이다. 이 민요는 백성의 삶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으로, 문헌으로 익히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전으로 가락과 운율에 따라 암송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자시대에 육경(六經)의 문헌은 없었다 해도, 민중 속에 노래는 살아있었다는 매우 평범하고도 명백한 사실을 유추해낼 수가 있다.

 

() 민중의 노래
() 대부(大夫)의 노래
() 종묘제례악

 

여기서 우리는 공자가 안씨녀(顔氏女) 당골네 슬하에서 자라난 째즈의 명인이었다고 하는 개비론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공자라는 개비는 소악(韶樂)을 듣고 3개월동안 육미(肉味, 고기맛)를 잊어버릴 정도의 탁월한 연주가였으며 비범한 음악평론가였다(술이(述而)13).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으며 노래부르기를 심히 즐겨하여 노래 잘 부르는 사람만 만나면 노래를 먼저 부르게 하고 따라 부르곤 하는 전문적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술이(述而)31). 그리고 음악이 인간의 심성에 미치는 효과에 대하여 매우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공자는 이러한 무속의 전통 속에서 크면서 일찍이 이 노래라는 인간의 문화현상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당대까지 흩어진 고래의 민요들이나 음악들을 수집하는 민속학자적인 취미를, 아니 사명을 소유한 예인(藝人)이었던 것이다.

 

당대의 인민에게 문자(文字)라고 하는 것은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었다. 다시 말해서 식자율이 너무도 낮았던 문맹의 시대에, 그리고 오늘과 같은 매스컴의 효율적인 전파매체가 전무한 상태에서 과연 일반백성들의 교양을 선도할 수 있는 매체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백성들 사이에 이미 널리 퍼져있는 노래를 외면하고 과연 그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공자는 노래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노래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노래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는 길거리를 걸을 때도 노래를 안 듣는 적이 거의 없다. 뻐스를 타도 노래를 듣고,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을 때도 노래를 듣고, 영화를 봐도 테레비를 켜도 꼭 노래는 있다. 사람들과 앉아서 담화를 나눌 때도 노래는 토론의 주제로 부상한다. 그리고 비틀즈를 좋아하는 사람들, 이미자를 좋아하는 사람들, 서태지를 좋아하는 사람들, 제각기 감성의 취향이 다르고 인문적 교양이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어떤 공통된 주제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노래는 감정을 순화시키기도 하고 격양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또 노래를 통하여 의사를 소통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의 하루하루 일상생활 속에서도 독서의 시간보다 노래를 듣는 시간이 더 많다고 한다면, 2500년 전의 고대사회의 민중을 묶을 수 있는 문화적 매체가 과연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나치고 마는 아주 비근(卑近)한 문제에 대해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생각을 가진 인류 최초의 사상가였다. 공자에 있어서 인간의 문명이란 노래로 시작하여 노래로 끝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공자에게 있어서는 철학이 노래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인간의 논리성보다, 인간의 심미성이나 감수성이 더 인간의 본질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그의 ()’의 사상이었다.

 

공자의 시대에 공자가 수집할 수 있었던 노래들은 수천 편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는 이 많은 노래 중에서 인간의 교양체계로서, 인간의 문명의 기본질서체계로서, 인간의 교육커리큘럼으로서 의미있는 노래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이 당시 얼마나 성문화(成文化)되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공자의 업적은 문자에 밝은 자로서 그 노래를 문서화시키는 작업을 했을 뿐 아니라 반드시 그 악보를 같이 남겼다는데 있다. 공자시대의 악보가 오늘의 오선지나 정간보 형태의 어떠한 구체적인 형상의 것이었는지, 손에서 손으로 전하는 무형의 것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공자가 수집한 노래 들은 그것이 가사만을 중심으로 채록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음악적으로 탁월한 멜로디나 기악곡의 성격을 지녔던 것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공자가 말하는 시()ㆍ서()는 예()ㆍ악()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는 악()이요, ()는 곧 예()였다.

 

() ()
() ()

 

공자라는 무녀의 아들, 개비 중의 개비, 삼현육각(三絃六角) 중의 삼현육각이었던 그는 노래와 춤 속에서 컸다. 그러면서 그는 노래를 감정의 흥얼거림, 그 순간의 쾌락으로 흘려버린 것이 아니라, 그 노래를 앞으로 올 수천년의 인류의 문명의 보 편적 교양의 전범으로서 승화시켰다. 그의 호학(好學)’의 구체적 내용은 바로 노래를 채집하고 기록한 것이다. 노래의 채록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역사요 인간의 삶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강 공자의 일생을 통해 가다듬은 노래들이 약 삼백여개!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시삼백(詩三百)’의 의미내용이다.

 

자로(子路)5에 보면 시()를 삼백(三百)편이나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도 못하고 사신으로 나가서도 제 역할을 못해내면, 아무리 시를 많이 외운다한들 그게 뭔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공자가 학인들을 꾸지람을 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곧 공자는 일찍이 시삼백(詩三百)’을 확립시켰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암송시키는 것을 교육의 내용으로 삼았다는 사실의 방증이 되는 것이다.

 

현행본 시경의 내용과 공자가 말하는 시삼백(詩三百)’의 내용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금본 시경에 수록 안 된 시도 있고, 또 수록된 것의 텍스트도 다양한 이본(異本)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는 시경의 모체는 공자의 편찬이다. 이것은 곧 공자라는 개비의 일생의 헌신적 사업을 통하여 허공으로 없어지고 말았을 고대사회의 귀중한 삶과 예술과 역사의 모습이 우리에게 전달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시경의 저자로서 공자의 이름을 명확히 거론하는데 주저하고 싶지 않다. 시경은 확실한 공자의 저작이며, 따라서 시경은 저자와 연대가 확실한 가장 신빙성 있는 문헌이 되는 것이다. 십삼경(十三經)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고문헌은 서경(書經)도 아니요 역경(易經)도 아니다. 오로지 시경(詩經)하나인 것이다. 시경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중국 고문명의BC 8세기~6세기가 그 중심축을 이룬다 가장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삶의 언어인 것이다. 공자는 오늘날 20세기의 인류학자의 선구를 이루는 위대한 업적을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다. 사실 공자와 공자의 제자집단을 특징지우는 것은 그들이 ()’를 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이면 노래를 같이 부르고 노래로서 모든 제식을 진행시킨 위대 한 군사집단이며 예술집단이었다. 시는 공문(孔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를 주자(朱子)()’로 훈했다. 덮는다는 뜻이다. 고주(古注)()’이라 훈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그 핵심을 찌른다는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재판에서 판결을 내린다는 뜻도 된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의 실내용을, 를 구성하는 7,195구절 중에서 대표적인 한 구절을 뽑는다면 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자들도 많으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사무사(思無邪)’라는 구절이 노송(魯頌), ()편에 나오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나, 기실 공자의 ()’에 대한 언급의 맥 락에서의 사무사(思無邪)’()편의 사무사(思無邪)’는 비록 그것이 문자가 일치하고 있다한들 직접적 관계가 없는 것이다. 비록 의 가사에 그러한 말이 있었다 할지라도 공자는 얼마든지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의미맥락에서 자신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생각된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시삼백(詩三百)을 단 한마디로 덮어 (포괄하여) 평한다면의 추상적 뜻이 될 것이다. 시삼백 전체를 휘덮고 있는 정조(情調)를 단 한마디로 단언한다면 무엇이 될 것인가?

 

시경의 송()은 삼송(三頌)으로 되어있는데, 주송(周頌), 노송(魯頌), 상송(商頌)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중 노송(魯頌)은 네 편으로 되어있는데, ()」 「유필(有駜)」 「반수(泮水)」 「비궁(閟宮)이 그것이다. 노송(魯頌)은 본시 공자보다 한 150년 전에 노나라에 살았던 희공(僖公, 시공, Xi Gong, BC 659~627 재위)의 공덕을 칭송하는 노래로서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4편의 노래 중에서 후반의 반수(泮水)비궁(閟宮)은 분명 희공이 반궁(泮宮)과 비궁(閟宮)을 잘 보수한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그의 치세기간에 강성해진 국력을 과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앞의 ()」 「유필(有駜)은 단순히 목마(牧馬)의 번식(蕃息)을 염원하는 축도(祝禱)의 노래이며, 후반의 두 노래와 전혀 관련이 없는 노래일 수도 있다. 물론 목마(牧馬)의 목적이 군역(軍役)에 제공되는데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 말의 노래가 곧 희공의 무공을 칭송하는 노래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그것은 견강부회일 수도 있다. 많은 자들이 국풍에 노풍(魯風)이 없다는 사실을 들어, 노나라는 원래 정통 양반나라로서 자처했기 때문에 민요따위를 싣지 않고 종묘제례악인 송()만을 실었다는 설을 편다. 그러나 실상 노송(魯頌)은 그 노래 이름이 ()’으로 되어 있어 송()으로 분류해 넣었을 뿐, 실상은 노송(魯頌)이 노풍(魯風) 즉 노나라의 민요일 수도 있다는 가설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은 단순히 말을 예찬하는 민요일 수도 있다. ()편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종구(終句)가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는 것이다.

 

1 사무강(思無疆), 사마사장(思馬斯臧).
2 사무기(思無期), 사마사재(思馬斯才).
3 사무역(思無斁), 사마사작(思馬斯作).
4 사무사(思無邪), 사마사조(思馬斯徂).

 

사무사(思無邪)’는 제4장의 종구(終句)에 나오는 말인 것이다. 상기(上記)의 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주자(朱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라는 동사로 전제하고 그 행위의 주체를 희공()으로 설정하고 있으나, 그렇게 하면 도무지 이 시()는 풀릴 길이 없다. 앞구절까지 살찌고 건장하고 수레를 잘 끄는 말에 대한 예찬의 구절이 나오다가 갑자기 희공의 생각이여 끝이 없어라! 말들을 생각하시니 말들은 이에 아름답도다!’하는 엉뚱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 사무강(思無疆), 사마사장(思馬斯臧)’의 앞의 두 사()자는 생각한다는 동사가 아니라 노래의 리듬을 위하여 그냥 삽입된 의미없는 어조사일 뿐이며, 이에 대한 해석도 말을 계속 주어로 해야 풀린다: ‘아아 찬란한 수레말이여! 끝없이 달려가니, 말들이여 이에 아름답도다!’

 

이러한 종구(終句)의 파라렐리즘을 유지하여 해석하면 사무사(思無邪), 사마사조(思馬斯徂)’아아 건장한 수레말이여! 사특함이 없으니 아 말이여 이에 힘차게 달리는도다!’ 정도의 의미가 된다. 공자의 시()에 대한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와는 전혀 무관한, ‘말이 삿됨이 없이 힘차게 달린다는 정도의 전혀 다른 맥락의 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래서 노송(魯頌)의 한 구절이 머리에 떠올랐을 수도 있으나 그것은 천만의 말씀! 전혀 시()에 대한 공자의 총평(總評)과는 무관한 구절일 뿐이다. 공자는 전혀 노송(魯頌)을 인용한 것이 아니다. ‘출전학의 용렬함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공자는 출전과 전혀 무관하게 그냥 자기말을 한 것이다. ‘시삼백에 대한 공자 자신의 평소의 느낌을 요약한 말이, 출전의 훈고와는 관계가 없는 사무사(思無邪)’라는 이 한마디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무사(思無邪)’는 무엇인가? 여기서 사()는 의미없는 어조사가 아닌,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를 가리키는 본동사임이 분명하다. ‘생각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자가 생각한 시()는 주로 국풍(國風)이었다. 국풍(國風)은 민요다. 민요의 주제는 역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바람이요, 신명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바람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랑처럼 우리를 신바람나게 하는 것은 없다. 사랑은 신적(神的)이다. Love is divine!

 

 

생각함과 괴다

 

생각한다는 말의 우리말 고어는 괴다’ ‘고이다이다. 이 말이 일본말 속에는 코이스루(こいする)’라는 말로 그 원의가 정확하게 보존되었다. ‘코이(こい)’의 어원은 우리말의 고임인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랑이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누구를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자식이래도 생각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송강의 사미인곡(思美人曲)’()’도 생각인 동시에 사랑이다. 옛사람들은 사랑을 생각이라는 완곡한 어법으로 표현하였지마는, 생각이야말로 곧 사랑의 핵심인 것이다. 보고싶다는 생각, 사모하는 정, 그것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랑이란 보고 싶다는 감정이요, 생각나는 감정이다. 사랑의 감정이 남아있으면 어쩌다가 어쩌다가도 생각이 나고야 마는 것이다.

 

사랑의 굄[]이란 그것이 어떠한 관계에서 성립하든지간에 그 자체는 순수 한 인간의 정감의 유로일 뿐이며 사특한 것이 개입될 수가 없다고 선언하는 공자의 과감한 발언 속에서 우리는 그의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감과 친밀감, 그리고 공자 자신의 감성적 순수성을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노래는 사랑을 노래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무사(無邪)’한 것이다. 사랑은 거짓을 모르는 것이다.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이 어찌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어찌 논어를 읽을 수 있으며, 어찌 희대의 예술가였던 공자의 삶을 이해할 수 있으리오! ‘시삼백(詩三百) = 사무사(思無邪)’를 선언하는 이 공자의 한마디야말로 논어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도 남을 명언이며, 공자 자신의 좌우명으로 우리가 깊게 새겨 두어야 할 금언이다.

 

 

시는 311편이다. ‘삼백(三百)’이라고 말한 것은 대강의 수를 들어 말한 것이다. ()’는 덮는다는 ()’와 같은 뜻이다. ‘사무사(思無邪)’라는 것은 노송 ()편의 가삿말이다. 대저 시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선()을 말한 가사는 인간의 선심(善心)을 촉발시킬 수 있고, ()을 말한 가사는 인간의 일탈하는 성향을 징계할 수 있다. 그 효용인즉슨,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성정의 바름을 얻도록 하는 데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래의 가사들이 은미하고 완곡하여,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에 즉하여 발할 때가 많으므로, 그 전체의 뜻을 직접 가리키는 것을 구한다면 이 장에서 공자께서 하신 말씀처럼 명쾌하고 그 뜻을 남김없이 전하는 명언이 없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시 삼백 편을 총괄하여 이 한마디라면 족히 그 모든 뜻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참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시려는 뜻이 깊고 절절한 것이다.

詩三百十一篇, 言三百者, 擧大數也. , 猶蓋也. ‘思無邪’, 魯頌篇之辭. 凡詩之言, 善者可以感發人之善心, 惡者可以懲創人之逸志, 其用歸於使人得其情性之正而已. 然其言微婉, 且或各因一事而發, 求其直指全體, 則未有若此之明且盡者. 故夫子言詩三百篇, 而惟此一言足以盡蓋其義, 其示人之意亦深切矣.

 

정자가 말하였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것이 곧 성()이다.”

程子曰: “‘思無邪, 誠也.”

 

범순부가 말하였다: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요점을 체득하기를 힘써야 한다. 요점을 체득하면 그 요약됨을 지킬 수 있고, 요약됨을 지킬 수 있으면 해박한 것을 다 소화해낼 수 있다. 벼리가 되는 예 삼백, 자세한 예 삼천도 또한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할 수 있으니, 말하자면, ‘()이 아닌 것이 없다이다.”

范氏曰: “學者必務知要, 知要則能守約, 守約則足以盡博矣. 經禮三百, 曲禮三千, 亦可以一言以蔽之, 毋不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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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철학 /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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