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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동양식 제국주의의 결론: 중국을 먹어야 일본이 산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동양식 제국주의의 결론: 중국을 먹어야 일본이 산다

건방진방랑자 2021. 6. 9.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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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을 먹어야 일본이 산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경제적ㆍ군사적으로 명실상부한 대국이 된 일본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독점자본주의로의 길이다. 이미 일본은 유럽 열강에 뒤지지 않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서구적인 독점 자본주의, ‘정통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자격이 충분했다. 다른 하나는 군국주의로의 길이다. 군사적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일본은 경제적인 침략보다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을 실행할 힘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경제 노선과 군사 노선 중 일본이 택한 것은 무엇일까? 힌트는 군부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던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1870~1931) 총리가 극우 세력에게 암살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도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이 없었다면 일본은 경제적인 노선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이미 경제 대국이었지만 대외 의존도가 높은 게 문제였다. 대공황이 터지자 서구 국가들은 공황의 피해를 막기 위해 지역적으로는 블록경제를 취하고 국내적으로는 국가독점 자본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다. 그에 따라 수출이 급격히 감소하는 바람에 일본 경제는 순식간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가뜩이나 재벌과 중공업 위주의 성장 전략으로 고통과 희생을 치르고 있던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이 더욱 궁핍해졌다. 노동분쟁과 소작쟁의는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이라는 대책을 내놓았다. 대공황이라는 공동의 문제를 맞아 정부는 서구 국가들과 공동 대응을 모색하고 그들로부터 금융 지원을 받아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같은 문제를 보는 군부의 시각은 달랐다. 비록 시베리아 철병으로 위세가 약간 수그러들었으나 군부는 여전히 일본 정치에서 정부를 능가하는 힘을 가진 권력체였다. 만주에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던 군부는 만주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면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아울러 군부는 신생국 소련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경계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만주를 점령해 소련 공격의 전진기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무렵 하마구치 총리의 피살은 정부와 군부의 싸움에서 군부가 승리했음을 뜻하며, 독점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의 갈림길에서 군국주의가 채택되었음을 나타낸다.

 

 

암흑의 목요일 주식시장이 일시에 붕괴해버린 19291024일 뉴욕 월스트리트의 모습이다. ‘암흑의 목요일로 불리는 이날 이후 전 세계는 기나긴 경제 침체의 터널로 들어갔다. 일본이 계획한 대공황 탈출의 해법은 만주 침략이었다.

 

 

1931918,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은 평텐 교외의 남만주 철도를 자기들 손으로 폭파해놓고 그것을 중국군이 저지른 도발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터진 만주사변은 일본이 도발한 예전의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선전포고 없이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선전포고는커녕 이 계획은 관동군 사령관에게조차 사전에 통보되지 않고 소수의 하급 장교들이 도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후에 보고받은 사령관은 부하들의 불법 도발을 승인하고 즉각 전면전을 준비했다. 또한 관동군 사령관의 요청을 받은 조선군 사령관도 즉각 병력을 만주로 파견하고 탄약을 수송했는데, 이 과정에서도 역시 정부의 허가를 얻지 않은 것은 물론 사전 통보조차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보고받은 일본 정부는 전쟁을 확대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도 전쟁 수행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 하급 장교들이 독단적으로, 그것도 사건을 조작해가면서까지 엄청난 전쟁을 시작할 정도로 일본의 군국주의는 극에 달한 상태였다.

 

정부는 군부의 전쟁 계획에 제동을 걸 능력도 없었지만 사실 그럴 의사도 없었다. 정부 역시 군국주의에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군부가 시작한 전쟁에 대해 정부는 외교적으로 무마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서구 열강이 일본의 만주침략을 맹렬히 비난했을 때도 정부는 침략이 아닌 자위 행위라는 억지를 부리면서 군부의 변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국제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정부는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독일 파시즘이 히틀러의 단독 의지나 괴벨스의 탁월한 선전으로만 가능했던 것이 아님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파시즘이 한 나라의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곧 상당한 정도의 대중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본 군국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야당들은 정부보다 앞서 국제연맹 탈퇴를 주장했고, 그 무렵 일본 국민들도 거의 대부분 전쟁을 지지했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배경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무사 계급의 오랜 지배에서 생겨난 군국주의의 전통도 작용했고, 상황의 측면에서는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경제 불황, 국제적 고립이 가져다주는 불안감, 그리고 그 요소들을 교묘히 대중 선전에 이용한 정부 등이 모두 군국주의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군국주의의 화신으로 바뀌게 된 데는 일반 대중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대중은 조작한다고 해서 쉽사리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철도 폭파 현장 1931년 관동군 장교들은 만주 류타오거우(柳條溝) 부근의 남만주철도를 파괴하고 이 책임을 중국에 뒤집어씌우면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사건이 918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918사변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만주야 원래 관동군이 통제하던 지역이었으므로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중국 본토 침략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은 장제스의 국부군 만을 적수로 여겼으나 의외로 곳곳에서 일본군의 진출을 저지한 것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었다. 더구나 1935년 마오쩌둥이 내전 중지와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주창하고, 이듬해 터진 시안 사건으로 장제스가 그에 동참을 선언하면서 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지자 관동군의 속전속결 작전은 이미 물 건너갔다.

 

한편 일본의 정치 무대는 급속히 완벽한 군국주의로 옮겨가고 있었다. 1932년 군부는 새 내각의 총리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1855~1932)가 적극적인 전쟁 추진의 의지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총리를 암살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이로써 일본의 정당 정치는 완전히 실종되었다. 이후 내각에서는 정당 정치인이 임용되지 않고 오로지 군인이나 군국주의적 입장에서 거국일치를 주창하는 관료들만이 임용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군부 내부의 통일이었다. 당시 군부는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천황 절대론을 내세우며 신흥 재벌들과 결탁하고자 하는 황도파(皇道派)와 미쓰이ㆍ미쓰비시(三菱) 등의 재벌들과 협력하고자 하는 통제파(統制派)로 나뉘어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1936년 황도파는 총리를 비롯한 정부 요인들을 암살하면서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4일 만에 진압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일본의 군부는 통제파가 완전히 장악했다. 내부를 다지고 강력한 통일 권력체를 구성한 일본은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중국 침략에 총력을 기울였다.

 

19376, 관동군 참모장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대소련 작전 준비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 중국을 공격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한 달 후 또다시 선전포고도 없이발발한 중일전쟁의 선전포고에 해당하는 발언이었다.

 

 

중일전쟁의 빌미 사건을 날조해 전쟁의 구실로 삼는 것은 일본의 특기가 되었다. 만주사변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야간 훈련 중 중국군이 기습했다는 사건을 조작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사진은 중일전쟁의 빌미가 된 루거우차오를 중공군이 퇴각하자 일본군이 건너고 있는 모습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군부라는 개념

중국을 먹어야 일본이 산다

군국주의의 말로

정치와 경제의 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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