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이 미덕
먼저 고구려가, 그 다음에는 백제가 차례로 선진 문명권에 합류하면서 한반도의 북부와 서부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에 비해 신라가 자리 잡은 동남부는 아직 잠잠하기만 하다. 이주민 국가로 시작한 출발부터 그랬지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이질적인 성격이 다분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문명권의 막내로 생겨났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대륙을 향하게 된 것과 달리 신라는 처음부터 대륙 문명과는 별개로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성장기에 접어들어서도 그 이질성이 상당 부분 잔존해 있었다(그런 점에서 보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한반도의 토착 문명을 이루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역사에서 과연 어느 것을 토착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그런 이질성 중 하나가 단일한 성씨로 고정되지 않은 왕계다. 초기 신라에 영향을 준 게 중국의 농경문명보다 중국 북부와 만주의 유목문명과 일본의 해양 문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마 신라의 독특한 왕계는 유목문명의 자취인지도 모른다. 유목 민족의 국가에서는 지도자의 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여러 부족장들이 돌아가며 왕위를 잇는 게 전통이기 때문이다. 유리와 탈해가 잇금으로 연장자를 가려 왕위계승자를 정한 것이나, 탈해가 자신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김알지(金閼智)를 계승자로 정하려 했던 것도 그런 전통에 따른 관습일 터이다. 어쨌거나 탈해왕(脫解王)이 한 차례 왕위에 오른 것을 제외하고 대체로 박씨가문이 위주였던 신라의 왕계는 9대 벌휴왕(伐休王, 재위 184~196)에 이르러 다시 석씨로 바뀐다. 전임자인 아달라왕에게 아들이 없었던 탓이지만 다른 성씨의 왕위 승계에도 별다른 파장이 일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꾸로 보면 아직도 신라의 왕권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고 왕권이 중시될 만큼 신라의 국력도 크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에 비해 뒤처졌다는 것은 신라에게 결코 마이너스 요인이 아니었다. ‘선발주자의 벌금(penalty)’이라는 사회학의 용어를 거꾸로 뒤집어 말한다면 신라는 ‘후발주자의 이득(benefit)’을 톡톡히 누렸다고나 할까? 고구려와 백제는 건국 이후 생존과 성장을 위해 정복이라는 인위적인 수단으로 영토와 백성들을 늘려야 했지만, 신라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생존이 곧 미덕이라는 말은 바로 신라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그냥 존속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신라는 하나의 풀(pool)이었다. 처음에 신라와 엇비슷한 처지였던 주변의 소국들은 신라의 풀이 조금씩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풀로 고여들었다. 북쪽의 말갈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지면 그 유민들은 신라로 내려왔다. 낙랑과 대방의 백성들도 난리를 피해 남쪽으로 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바다 건너 신라로 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벌휴왕 시절에는 일본에서 기근을 피해 1천여 명의 유민들이 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중요한 것은 신라가 그 외래인들을 적대시하기는커녕 전혀 낯설게 대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토박이가 없는 이주민 국가였고 초기 왕계도 여러 외래인 세력이 얽혀 형성되었던 만큼 신라는 어느 민족, 어느 집단이 신라를 찾아오든 배척하지 않았다. 초기 신라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이 열린 태도에 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힘을 키운 신라는 마침내 백제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에 힘입어 3세기 초반에 내해왕(奈解王, 재위 196~230)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공격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소극적인 방어 자세 대신 성을 쌓고 경계하는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방어 태세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윽고 파사왕 이래 대가 끊겼던 정복군주도 다시 등장했다. 내해왕의 뒤를 이은 조분왕(助賁王, 재위 230 ~247)은 231년 현재 김천에 해당하는 감문국을 공격해서 영토화하고, 다시 5년 뒤에는 영천의 골벌국을 병합한다. 김천은 경상북도의 남서부, 영천은 남동부에 있으니까 당시 신라의 영토는 적어도 지금의 경상북도 전역까지 확대되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의 지역적 패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외형적으로 나라꼴을 갖추었으니 그 다음 순서는 당연히 내부 정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단연 왕계를 바로잡는 일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박씨와 석씨가 탁구공처럼 왕위를 주고받는 식으로는 정식 왕국으로 새로 태어난 신라를 이끌 수 없다. 때마침 왕계를 손보기에 좋은 기회가 생긴다. 조분왕이 어린 아들만 남기고 죽은 것이다. 일단 왕위는 조분왕의 동생 첨해왕(沾解王, 재위 247~261)이이었는데, 고구려의 경우에는 흔한 일이었지만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형제 계승이 이루어진 경우다. 문제는 첨해도 겨우 15년 동안 재위하고 죽는다는 점이다. 그의 아들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있었다 해도 나이가 아주 어렸을 것이다. 첨해가 남긴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이 조분왕의 사위이자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이기 때문이다.
사위가 장인의 왕위를 이었다는 것은 확실히 특이한 일이다. 유목 문명권에서는 원래 모계 사회의 전통이 강했는데, 그 문명의 일부가 전해진 신라에서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나중에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할 때도 나오지만, 중동의 유목 민족들은 아들보다 사위가 장인의 지위를 상속하는 게 더 일반적이었다(『종횡무진 서양사』, 「줄기」 2장 참조). 하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모계 사회의 전통보다도 왕실의 근친혼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초기부터 신라의 왕실에서는 박, 석, 김의 세 성씨 내에서만 통혼이 이루어졌으므로 근친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들과 사위의 구분이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조분왕과 내해왕의 촌수를 따져보자(물론 ‘촌수’란 훗날 유학이 전래되면서 생긴 개념이지만). 둘은 벌휴왕의 손자로서 사촌형제 사이지만 내해의 아내가 조분의 누나이므로 처남-매부 사이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분의 아내가 내해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분은 내해의 처남이자 사위가 된다(아울러 내해의 아내, 즉 조분의 누나에게는 조분의 아내가 딸이자 동생의 아내, 즉 올케였을 테니 서로 어떻게 대했을지가 궁금해진다). 조분은 조카딸과 결혼한 것이니 후대의 유학 예법으로 치면 반인륜적 행위를 저지른 셈이지만, 동서양을 통틀어 고대에는 그런 근친혼이 많았으므로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그런 근친혼 덕분에 신라 왕실에서는 아들과 사위가 얼마든지 같은 성씨일 수 있었고, 따라서 얼마든지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있었다【신라 특유의 갈문왕(葛文王) 관습은 여기서 비롯된다. 갈문왕이란 신라 초기에 왕의 아버지, 장인, 형제 등에 두루 주어지는 일종의 관직 같은 신분이었다. 쉽게 말해 왕위계승권이 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족들에게 현직 왕이 위로(?)하는 의미에서 수여하는 작위라고 보면 된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아버지를 추서(追敍)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있었고(하권에서 보겠지만 대원군이라는 직함이 그런 예다) 유럽의 역사에서도 흔한 일이지만, 왕의 외가까지 전혀 차별 없이 대우한 경우는 드물다. 신라 왕실은 근친혼 때문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왕의 직계 후손이었고, 따라서 친가와 외가의 구분이 모호했으므로 그런 식의 갈문왕 제도가 성립할 수 있었다】. 사위라 해도 어느 왕의 아들, 즉 왕족의 신분이었으니까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나중에 보겠지만 후대에 신라에서 여왕이 탄생하게 되는 사건도 바로 그 근친혼 관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미추왕의 즉위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사위로서 왕위를 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김씨 최초의 왕이라는 사실이다.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삼아 김씨 성이 생긴 이래 신라 왕실에서 김씨는 주로 왕비 가문을 이루었을 뿐 직접 왕을 배출한 적은 없었다. 물론 이후 신라의 왕통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별다른 치적도 남기지 못한 미추왕에 굳이 주목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미추왕 다음으로 세 명의 석씨 왕 ― 유례, 기림, 흘해 ― 이 등장한 뒤 그 다음 17대 내물왕(奈勿王)부터 신라 왕통은 무려 500여 년 동안 김씨의 단일 성씨로만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후 신라의 김씨 왕들은 제사를 한 번 더 지내야 했다. 시조인 박혁거세와 더불어 김씨 왕의 시조인 미추왕에게도 따로 제사를 지낸 것이다. 게다가 미추왕의 직계 후손들은 재임시에 특기할 만한 업적을 내지 못한 조상에게 ‘사후 업적’을 만들어 붙여주기도 했다. 유례왕(儒禮王, 재위 284~298) 시절인 297년에 이서국이 신라의 수도에까지 침략해 왔을 때 미추왕릉 주변에 있던 대나무잎들이 병사들로 변신해서 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이서국이라면 지금의 경상북도 최남단에 있는 청도에 해당한다. 석씨 유례왕으로선 신라의 강역을 남쪽으로 더욱 확장하는 업적을 세웠으면서도 김씨 후손들의 역사 조작으로 정작 그 공로는 죽은 미추왕에게 돌아갔으니, 죽어서도 억울하지 않았을까?
▲ 김씨 왕의 시조 경주에 있는 미추왕의 능이다. 그 전까지의 왕릉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은 데 비해 미추왕릉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미추왕이 김씨 왕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도 신라 왕실은 잠시 동안 세 성씨 간에 오락가락하지만 4세기 중반 내물왕(奈勿王)부터는 이후 500여 년 동안 김씨로 고정된다. 후대의 김씨 왕들은 자신의 4대 직계 조상들 이외에 시조인 미추왕릉에도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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