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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부 화려한 분열 - 2장 깨어나는 남쪽, 백제의 도약(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2장 깨어나는 남쪽, 백제의 도약(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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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깨어나는 남쪽

 

 

백제의 도약

 

 

고구려가 중국의 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무렵 한반도 중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정식으로 첫 대면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측의 상견례는 영 험악한 분위기다. 고구려에서 명림답부(明臨答夫)의 쿠데타가 발생할 즈음, 그러니까 167년에 신라가 3만에 가까운 대군으로 한강 중류까지 치고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진다. 다행히 신라의 병력을 보고 겁을 먹은 백제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 전투 상황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이 사태는 장차 백제와 신라가 어떤 관계로 엮이게 될지를 말해주는 예고편인 셈이었다.

 

사실 두 나라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미 100년 전부터다. 백제의 다루왕(多婁王)과 신라의 탈해왕(脫解王) 시절이던 기원후 64년에 두 나라는 오늘날 충북 보은에서 전쟁을 벌인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백제는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해서 괴롭혔다. 그런 탓에 마치 당시에 이미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놓고 쟁패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다르다. 백제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쪽과 동쪽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으나 신라는 아직 경상도 일대의 수많은 소국들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아직 자기 지역의 패자로 발돋움하지도 못한 상태였다(앞서 보았듯이 102년에 신라의 파사왕은 가야의 수로왕에게 중재를 구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백제는 굳이 신라를 타깃으로 삼아 공격하려 한 게 아니라 아직 무주공산이 많이 남아 있는 동쪽으로 진출하려 했을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삼국사기에 기재된 백제와 신라의 초기 다툼에서는 신라의 규모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신라는 역사에 이름조차 누락된 여러 소국들과 함께 위로는 진한, 아래로는 변한과 가야를 두고 있었으므로 충청도 일대까지 진출할 힘은 없었다. 따라서 그 기록을 더 정확히 다듬는다면 백제가 장차 신라의 영토가 될 충청도 일대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현지 세력과 빚은 마찰이라고 바꿀 수 있을 것이다역사를 이해할 때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이름과 역사가 전해지는 백제와 신라라는 나라에 익숙한 나머지 막연하게 두 나라를 처음부터 안정되고 고정된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사실 김부식도 그런 오류를 저질렀다). 그러나 사람도 그렇듯이 나라도 생성과 성장과 쇠멸의 과정을 겪는다. 기원후 1세기 무렵까지 백제와 신라는 형성기에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 신라는 당시 사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니 국호로 보면 존재하지도 않은 나라다(신라라는 국호가 정해진 것은 5세기 지증왕 때의 일이다). 아마 당시 한반도 중남부에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 무수한 부족국가와 도시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단군신화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문명 이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으니 나라 이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 사람들과 그 땅들을 초기 백제와 신라의 백성과 영토로 볼 수는 없다(게다가 오늘날과 같은 영토와 주권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가 아니었으니 설사 특정 지역을 정복했다고 해도 거기에 말뚝을 치고 국경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면 신라의 국력도 크게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 3만이라는 엄청난 대군이 실제로 동원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상당한 규모였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과연 간헐적으로 조우했던 100년 전과는 달리 백제와 신라는 2세기 중반부터 치열한 다툼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삼국사기에도 이 무렵부터는 초기에 두 나라를 괴롭혔던 말갈 같은 외부 세력이 등장하지 않고 거의 두 나라의 관계만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실상 전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백제가 일방적으로 신라를 침공하고 신라는 방어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백제는 신라를 압도하지 못했고 신라도 역시 크게 패배하거나 뒤로 밀려나는 일 없이 잘 버티었으나, 공격과 수비가 분명히 나누어진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아무래도 공격 측에 더 후한 점수를 주어야 할 듯싶다. 바꿔 말해 당시 백제와 신라의 힘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생존의 단계를 넘어 한창 뻗어나가는 팽창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신라는 아직 생존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런 두 나라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실이 하나 있다. 243년 정월에 백제의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286)은 커다란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낸다(제사라니까 혹시 대단치 않은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고대국가에서 제사라면 가장 큰 국가적 행사다). 그 전에도 백제의 왕실에서는 아마 여러 가지 제사 의식을 거행했겠지만 기록에 나오는 것은 이게 처음일뿐더러 특히 주목할 것은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냈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과 산과 강, 그 중에서도 특히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백제가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 오늘날로 치면 주권을 지닌 독립국이 되었음을 뜻한다. 건국한 지 200여년이 지나 비로소 백제는 명실상부한 왕국이 된 셈이다(고이왕이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관제를 정비한 데는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다). 그 반면에 신라는 새 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여러 차례 전하는데, 제사 장소는 시조묘로만 국한된다(고구려는 천제와 시조제를 함께 지냈다). 같은 제사이고 국가적인 대행사지만 하늘에 제사를 지낸 백제에 비해 건국시조를 제사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신라가 여전히 부족국가의 체질을 완전히 벗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제사만이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고이왕(古爾王) 때는 그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260년에 여러 가지 관제를 신설한 것도 그 중 하나다. 백제 고유의 관직, 예컨대 좌평과 달솔, 은솔, 장덕, 시덕 등의 관직명이 바로 그 무렵에 생겨났으며, 관직의 품계도 그때 정해졌다. 이렇게 고이왕대에 이르러 백제가 여러 가지 변모를 보여주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 시기에 비로소 백제가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고 보기도 한다한국 최초의 역사학 박사로 꼽히는 이병도(李丙燾, 1896~1989)가 그렇게 주장했는데, 물론 타당성은 있다. 그러나 사실 무엇을 고대국가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냐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을뿐더러 별 쓸모도 없다. 적어도 국가라면 일정한 영토와 백성, 왕계, 군대, 달력, 국호, 각종 제도 등의 요건이 필요한데, 그 요건들이 역사가들의 구미에 맞게 한꺼번에 생겨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제부터 고대국가였느냐는 문제는 역사가들의 사치스런 고민거리는 될지언정 역사의 본령은 아니다.

 

고이왕(古爾王)은 또한 처음으로 북쪽의 정세에 눈을 뜬 왕이기도 하다. 노상 남쪽의 마한, 동쪽의 신라와 토닥거리기만 했던 전대의 왕들과는 달리 그는 선진 문명의 통로인 반도 북부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해온 245년에 고이왕은 북부의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낙랑과 대방의 남부를 공략해서 상당한 영토와 백성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로써 백제는 황해도 남부까지 손에 넣었는데, 눈에 보이는 그 성과보다도 더 큰 성과는 백제가 건국 이래 처음으로 북진을 시도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뼈가 굵지 못한 백제로서 북진은 다소 무리였다. 고이왕은 성공리에 북진을 끝냈지만 그 후유증은 엉뚱하게도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 닥쳐온다. 아들 책계왕(責稽王, 재위 286~298)은 백제의 휘하에 들어온 대방을 지원하다가 고구려와 마찰을 빚어 걱정해야 했고, 급기야는 낙랑의 침입으로 전사하는 비운을 당한다. 또 고이왕(古爾王)의 손자인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4)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낙랑을 침공했다가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하지만 2대에 걸친 백제 왕실의 비극은 오히려 북진의 결심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이미 북으로 옮기기 시작한 발길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북진에서 백제가 거두는 성공을 보기 전에 먼저 신라의 3세기를 보고 넘어가자.

 

 

도성으로 사용된 토성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삼국 가운데 가장 혜안이 있었던 나라는 백제다. ? 전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서울 강남에 도읍을 정했으니까. 위 사진은 당시 백제의 도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몽촌토성이고, 아래는 몽촌토성의 목책이다. 도성에 어울리지 않게 흙으로 쌓은 토성이지만 한강 유역에 쓸 만한 석재가 없었을 테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결과다. 쌓은 시기는 3세기로 추정되니 아마 고이왕 시대쯤 될 법하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백제의 도약

생존이 미덕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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