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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6장 바울의 기독교운동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 제6장 바울의 기독교운동

건방진방랑자 2022. 2. 2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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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바울의 기독교운동

 

 

초대교회사의 재발견: 나그 함마디

 

 

여태까지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의 지적 분위기를 말하기 위하여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해 가면서 기독교 교리의 매우 근원적인 많은 문제들을 논의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가 원래 말하고자 했던 논의의 맥락은 사해문서라고 흔히 불리우는 쿰란사본의 발견에 비견할, 어찌 보면 미래적 가치에 있어서 그것보다 훨씬 더 심원한 중대성을 지니는 또 하나의 발견에 관한 것이었다. 이 발견은 바로 쿰란커뮤니티가 끝난 시점(AD 68)에서부터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의 시대(AD 367)에 걸치는 300여 년의 초대교회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대 사건이었다.

 

194512월의 사건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나일강을 따라 한 100마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Cairo)가 나온다. 카이로에서 계속 나일강을 따라 올라가면 한 300마일 떨어진 지점에 나일강이 남북으로 흐르지 않고 동에서 서쪽으로 횡으로 휘어 흐르는 곳이 있다. 그 남쪽, 그러니까 더 상류쪽으로는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과 고대 이집트의 찬란했던 수도 테베(Thebes)가 있고 그 아래로는 투탄카문이 완성하고 람세스2세가 증축했다는 거대한 신전이 자리잡고 있는 아문(Amun)신의 도시 룩소르(Luxor)가 있다. 거기서 더 올라가면 아스완댐이 나온다. 나일강이 횡으로 휘는 바로 그 지점에 나그 함마디(Nag Hammadi, 토속발음 Nang HaMAH-Dee)라는 도시가 있다. 이 나그 함마디 지역은 초기기독교역사와 너무도 밀접한 역사가 있다.

 

여러분들은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3~373)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취임하자마자(328) 이집트와 리비아의 전역을 샅샅이 방문하고 나일강 상류의 콥틱 수도승들과 중요한 협력관계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 콥틱 수도승의 리더,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이름도 함께 기억할 것이다.

 

이미 4세기의 이집트는 전역이 기독교화되어 있었다. 2~3세기부터 기독교의 이방전도는 이집트를 깊게 파고들었다. 사실 유대민족의 역사가 실제로 이집트라는 다이애스포라에서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출애굽 이전에 400여년을 살았다) 이집트문명과 유대문명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언어, 종교, 문화, 생활관습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침투하기에 매우 자연스러운 토양이었다. 그런데 AD 2세기의 이집트인들은 기독교화되면서 새로운 문화현상을 만들어냈다. 즉 콥틱이라는 문자체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콥틱 크리스챤

 

 

이집트의 상형문자(monumental hieroglyphics)BC 3000년경부터 AD 3세기까지 지속된 고문자이다. 그것은 피라밋 텍스트, 왕들의 전기 텍스트, 그리고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고귀하게 쓰였다. 그런데 BC 7세기초부터 그 상형문자의 간략화된 초서체(cursive form)가 발전하여 상업, 문학, 공문서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쓰였다. 그것을 디모틱문자(Demotic Script)라고 한다. 희랍말 데모티카(demotika, 대중적인)에서 왔기 때문에 민용(民用) 문자라고 한다.

 

이 디모틱문자는 희랍제국인 프톨레미왕조(the Ptolemaic period, BC 304~30)시대에 점차 희랍어로 대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프톨레미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 BC 69~30)가 죽고 로마치하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사법ㆍ행정의 공식문서에서는 오로지 희랍어만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희랍어가 이렇게 보편화되고 공식교양언어로 자리잡자 이집트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기말을 희랍어알파벳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네 발음을 표현하는 데 부족한 측면은 7글자를 디모틱문자에서 보충하여 AD 2세기부터는 희랍어 이두체제인 콥틱문자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가 이집트에 보편화되면서 기독교도들은 이 콥틱문자를 전용하기에 이르렀고 콥틱문자와 콥틱어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콥틱 크리스찬(Coptic Christians)이라고도 부른다. 34세기의 이집트 기독교운동은 모두 이 콥틱어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콥틱어는 7세기 이슬람의 이집트 정복으로 자연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집트의 보편언어인 콥틱언어 자체가 기독교화된 언어였기 때문에 이슬람문명과 양립하기 어려웠다. 아랍인들은 997년 공식적으로 콥틱어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콥틱 기독교 교회는 무슬림의 탄압 속에서 순교자를 내면서도 줄기차게 유지되었고 콥틱어도 콥틱교회의 제식언어와 제식음악인 콥틱 챈트(Coptic chant) , 구술전통을 통하여 살아남았다.

 

19세기부터는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ism)이나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로부터 자기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콥틱 정교회(Coptic Orthodox)라 부르고 교구체제를 정비하였다. 콥틱 정교회는 인간 예수를 인정하고 그 인간 예수 내의 신성과 인성의 혼재나 분열을 거부하는 단일성론(Monophysite doctrine)을 주된 교리로서 신봉한다. 지금도 이집트 인구의 8%가 콥틱 크리스챤이며 소수지만 아직도 콥틱어를 일상언어로서 사용하는 콥틱 기독교 가정이 상존한다. 지금도 이집트에 가면 사방에서 콥틱 교회나 콥틱 관련 박물관을 발견할 수 있다.

 

 

 

 

콥틱어

 

 

콥틱어는 함족과 셈족의 혼합언어(Hamito-Semitic language)인 고대 이집트언어 발달사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무슬림국가인 이집트는 공식적으로 아랍어를 국어로 쓰고 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이집트어는 멸절된 언어다. 이집트역사를 쓸 때에도 서로마제국의 통치가 종료된 395년부터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한 641년까지를 공식적으로 콥틱 시대(Coptic period)라고 부른다. 그것은 기독교시대(Christian period)이며 비잔틴시대(Byzantine period)에 해당된다. ‘콥트’(Copt)라는 말 자체가 아랍말 쿠브트’(qubṭ)에서 왔는데, 그것은 애굽부트’(Aigyptios)라는 희랍어가 와전된 것이다우리말의 짱꼴라가 중국인 즉 종꾸어르언이 와전된 것과 비슷. 그러니까 무슬림으로 전환한 이집트인들은 자신을 이집트인’(콥트)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따라서 이집트 토속 기독교전통을 유지하는 사람들만 콥트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이 콥트 기독교인이야말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전례를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유지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우리가 논의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아리우스나 멜레티우스나 파코미우스, 이런 사람들이 모두 희랍어에 정통한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자기네 말인 콥틱어를 썼다. 아타나시우스도 본국인들에게 훈계할 때는 콥틱어로 썼다. 콥틱어는 이집트 고대문명의 기나긴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자기들의 구어체계를 발음대로 적을 수 있는 알파벳 소리글이었다. 그 이전의 상형문자들은 디모틱 흘림체를 포함하여 모두, 조선왕조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한문과도 같이, 전혀 그 발음체계가 반영되지 않는 뜻글이었다. 그리고 희랍(프톨레미)ㆍ로마의 통치를 통하여, 우리나라 조선왕조말의 언어가 일제시대를 통하여 엄청난 일본말 어휘를 흡수하면서 변하듯이, 희랍어 어휘를 엄청나게 흡수하면서 발전했다. 기독교문명의 모든 것을 표현하기에는 콥틱어가 매우 편리했다. 나일강 주변으로 기독교세력이 넓게 분포되면서 콥틱어 기독교문화가 성립했는데(콥틱어도 지역에 따라 방언이 있다), 이 콥틱어야말로 그 자체가 이미 뿌리깊은 종교ㆍ신화ㆍ예술전통을 지닌 이집트문명과 동방오리엔트문명, 헬레니즘문명, 유대이즘문명, 신흥 기독교문명이 혼합된 복합문명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이 콥틱 크리스챤의 특징은 기독교인이면서도 이 다양한 문명의 물줄기들을 배타함이 없이 개방적으로 수용했다는 데 있다.

 

 

 

 

형성기의 기독교: 배타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기독교는 형성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배타’(exclusiveness)라는 것이 큰 의미를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를 배타하기에는 너무도 문명의 두께와 질감이 다양했고, 창조적이었고, 혼돈스러웠고, 절대적 권위를 갖는 리더십이나 기준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물줄기가 뒤엉키어 하나의 카오스를 이루는 콥틱 크리스챤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일컬어 보통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즉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 부른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교회사의 일반적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혼돈스럽게 그리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영지주의는 영지(그노시스)라는 말과 관련되어 매우 협애하게 쓰이는 신비주의적 이단사상으로서 초기기독교에서부터, 신약성서의 세계에서부터 배척되었던 악종(惡種) 사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영지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야말로 교회 내에서 분란만 일으키는 소수분열주의자들이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통틀어서 그렇게 명료하게 개념화된 영지라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는다. 더구나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말도 없고, ‘영지주의자’(gnostic)라는 말도 없다.

 

성서에서 나타나는 개념은 그냥 지식’(gnosis)이다. 이 지식은 기독교신앙과 관련된 바른 앎이다. 동사형인 기노스코’(ginosko), ‘에피기노스코’(epiginosko)는 모두 안다(to know), 이해하다(to understand) , 인지하다(to perceive)의 일상적 뜻이다. 현상계에 대한 앎, 보고듣고 경험하는 것, 눈으로 검증되는 것, 객관적 관찰에 의한 지식을 포괄하는 앎이다. 플라톤에 있어서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우주의 궁극적 법칙에 대한 이성적 이해이다. 희랍철학에서는 경험적인 차원으로부터 시작하여 경험을 넘어서는 불변의 실재(reality)에 관한 앎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말이었다. 현재 우리가 과학이라는 말로 쓰고 있는 사이언스’(라틴어, 스키엔티아, scientia)그노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킹 제임스 바이블은 그노시스를 어떤 곳에서는 사이언스(science)로 번역하고 있다.(Timothy 6:20).

 

바울의 서한문에 나오는 그노시스는 결코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등에 나오고 있는 담론은 맥락에 따라 해석을 요하는 진지한 용법들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특별한 앎이며, 성령에 의해 행함이 요구되는 앎이다. 이러한 얇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하나님과의 신비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명명백백하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결합됨으로써 성립하는 앎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얇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앎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4:9).

 

 

 

 

바울의 문제의식과 전도여행의 실상

 

 

바울이 명백하게 영지주의 이단론자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구절도 성급한 해석을 내리면 안 된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게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딤전 6:20, 한글개역판)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거짓되게 일컬어지고 있는 그노시스’(falsely called knowledge)제대로 된 그노시스’ ‘거짓된 앎이 아닌 참된 앎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며, 이것이 곧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더구나 디모데전서는 현재 신학계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로 간주되지 않는다. 첫세기말이나 2세기초 바울 정통학파가 바울의 교설을 너무 과격하게 해석하는 좌파적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쓴 목회서신(Pastoral Letters)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서한들은 매우 권위적이고 근엄하며 도덕적으로 순응을 요구하며 창발적이지 않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문제의식은 영지주의와의 투쟁에 있지 않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영지주의라는 어떤 운동이 교회 내에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의 의식 속에서 전혀 대적적인 실체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그의 관심은 오로지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관계설정에 관한 시각들이었다. 그의 가장 정통적인 서한으로 꼽히고 있는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가 모두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명문장들이다. 특히 갈라디아서는 유대교에 대한 신흥 기독교의 독립선언문 헌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강렬하고 명료한 논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갈라디아는 소아시아반도의 북부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부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비시디아 안티옥(Pisidian Antioch), 이고니온(Iconium), 루스드라(Lystra), 더베(Derbe) 등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을 다녔던 곳으로 그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Tarsus)에서 멀지 않은 곳이며 따라서 그에게 과히 낯선 지방이 아니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친 직후에 그 지역선교에서 생긴 문제점을 듣고 시리아의 안티옥에서 썼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는 연대가 AD 48년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바울의 서한 중에서 가장 빠른 서한이 된다.

 

지금 우리나라 가수들이 미국순회공연을 하고 돌아온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이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교포사회를 순회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한국가수를 미국사람들이 쌩으로 알아보고 공연장에 올리는 만무한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자임했다고 하지만, 그냥 쌩으로 이방인들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선 효율적일 수 없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모두가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그리스 본토의 헬레니즘 문명권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유대인 교포사회(이것을 다이애스포라라고 부른다)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회를 세운 여행인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교포들과 더불어 헬레니즘 문명권의 이방인들이 기독교 교회로 묻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그 숫자는 2, 3차 전도여행으로 점점 불어났다.

 

미국에 가서 가장 애국적인 정열을 가지고 있고 모임에 열심인 교포들을 만나보면 대개 한국문명의 환상적 과거에 대한 열렬한 집착이 있으며, 조선민족의 순수혈통에 대한 자부감이 있으며, 정치적 문제에 오면 남ㆍ북문제 등, 여러 가지 현안문제에 관하여 구체적인 상황변화에 대한 인식이 없이 매우 보수적이고 이념적인 주장을 강압적인 어조로 내뱉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말이 많고, 구라가 쎄며, 우격다짐으로 남의 의견을 윽박지르며, 또 고등한 문명 속에 살고 있다는 우월감이 지배적이다. 바울의 이방선교는 이러한 보수적 해외유대인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지배권에서 바울의 선교활동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기독교의 미래는 보장될 길이 없었다.

 

 

 

 

할례와 크리스챤

 

 

우선 해외동포 유대인들은 당연히 바울이 선포하는 십자가 예수의 복음 그 자체를 보수적 유대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즉 예수는 유대교가 대망하던 메시아니즘의 한 성취일 뿐이므로 기독교는 유대교내의 새로운 운동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독교를 유대교화하려고 했다. 이들을 교회사에서는 유대화파(Judaizers, Judaizing Christians)라고 편의상 부른다. 이 유대화파의 주장이 추상적 논변에 머물면 그 나름대로 참아줄 수도 있겠지만, 유대교 자체가 율법종교이기 때문에 이들은 구약의 토라(Torah)나 미쉬나(Mishnah, משנה)가 요구하는 모든 율법을 누구나 일상적 삶 속에서 엄숙하게 지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가 유대인 커뮤니티에 한정된다면 모르겠지만 새로운 기독교의 복음을 듣고 교회로 찾아오는 이방인들에게 강요된다는 것은 참으로 못할 짓이다. 한국교회에 찾아오는 미국의 서양인들에게 한번도 안 먹어본 김치를 퍼멕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악랄한 인권침해였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율법이란 전혀 낯선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인 엑클레시아(1:18, 24, 1:23, 5:23)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네의 전통적인 시나고그(Synagogue, 회당) 정도로 생각했다. 따라서 자기네 시나고그에 이방인이 신자랍시고 끼웃거리거나 설치는 꼴을 눈꼴 사납게 바라보거나 경멸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 할례였다. 그 외로도 안식일의 고수와 그에 따르는 유대교 제식의 엄수, 요즈음에도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코셔음식(kosher foods)의 선별적 식음방법, 그리고 유대인 명절의 지킴 등등이 요구되었지만 가장 상징적인 것은 할례’(Circumcision)였다. 할례란 남성의 성기의 표피를 돌칼로 으깨거나 칼로 도려내어 귀두를 노출시키는 수술인데 이방인들에게는 아프기 그지없고 수치스럽기도 하고, 또 항생제가 없었고 위생시설이 형편없었던 과거시절에는 감염의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에 죽거나 한참을 고생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아브라함이 신과의 약속으로 실행한 것이며 모세의 율법인 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들의 커뮤니티의 멤버십을 획득할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 할례라는 이니시에이션 세리모니’(initiation ceremony,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으면 크리스챤 아이덴티티’(Christian identity)가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입장에서 보면 크리스챤 아이덴티티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 할례를 내세울 수는 없었다. 더구나 할례를 이방인에게 필수 통과의례로서 강요한다면 기독교의 선교는 불가능했다. 바울의 서신에서 그토록 할례문제가 집요하게 주요논제로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체적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이러한 문제는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유대화파 사람들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그들을 비난한다는 것은 바로 이방선교가 유지되고 있는 그 토대를 근원적으로 붕괴시키는 것이 되고 만다. 바울은 현실적으로는 이럴 수도 없었고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메시아의 정치사적 맥락

 

 

한편 유대화파 사람들이 크리스챤 아이덴티티에 관하여 강하게 유대교 율법주의 고수를 주장한 배면에는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 즉 이스라엘민족의 사활이 걸린 정치상황이 개재되어 있었다. 때는 AD 70년 예루살렘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유대교 정통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일수록, 또 메시아의 내림(來臨)을 갈망하는 사람일수록 로마통치로부터 벗어나는 유대인의 독립이나 혁명을 꿈꾸는 정치운동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의 오심은 세속적 정치 해방이었고 외세의 지배로부터의 벗어남이었다.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영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그들을 외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줄, 조약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다윗과 같은 정치적 리더였다. 그래서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에까지 요셉과 마리아가 내려가서 비로소 예수는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누가 2, 마태 1에만 기술됨. 마가, 요한에는 없다. 2:1~2에서 말하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호구조사령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십자가 위에 붙이는 팻말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 총독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19:21)이라 써달라고 요구한 것도 다윗과 같은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기대가 좌절된 것을 조롱하는 언사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형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열성당원들(Zealots) 즉 혁명당원들은 기독교인들에게도, 특히 헬라화된 유대인들에게도 강력한 정치행동의 유대감을 강요했고, 그 유대감의 증명으로서 할례라는 통과의례를 요구했던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 780년대 반독재투쟁의 의식화운동에 가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반드시 모종의 통과의례가 요구되었던 정황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열성당원들의 압력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칼로 위협했으며, 어디서나 폭동을 일으켰고, 조직을 전복시켰고, 배신을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예수재림만을 넋빠지게 기다리는 맹숭맹숭한 신생기독교집단들은 열성당원의 입장에서 보면 풍전등화의 이스라엘민족의 위기를 관망하는 민족배반자들로 보일 수도 있었다. 기독교운동을 이끌어가던 유대인 교포 리더들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집단이 결코 민족배신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유대교 율법고수라는 간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울의 앰비밸런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의 복음을 유대교화할 수도 없는 것이고, 유대교 그 자체를 기독교화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양자선택의 기로를 벗어나는 근원적으로 새로운 복음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 새로움을 적나라하게 어떠한 이론적 유연성의 뒷받침이 없이 노출시킨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바울의 서한을 읽어보면 항상 이러한 이율배반의 긴장감이 서려있다. 바울은 율법의 부정을 논구하면서도 율법의 준수와 율법의 완성을 동시에 논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마음이 열려있으면서도 항상 유대인들의 정통성과 기독교에 대하여 유대교라는 뿌리의 본원성과 우월성을 강조한다. 로마인서 11장에서는 기독교가 유대교라는 올리브나무 원목에 접붙여진 야생올리브 나뭇가지에 불과하다고 구질구질한 논변을 편다. 야생올리브 나뭇가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원 올리브 나무의 뿌리가 야생올리브 나뭇가지를 지탱해준다는 것이다(11:17-24).

 

또 자기 스스로는 항상 베냐민지파(the tribe of Benjamin)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암암리 사울왕의 정통계보의 혈손임을 과시한다. 마치 이승만양녕대군의 후손이라는 것을 과시하듯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3:5~6).

 

 

이렇게 구질구질한 변명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그가 겪고 감내해야만 했던 이방선교의 고뇌의 심오한 측면들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심적 앰비밸런스(ambivalence, 모순, 양립) 속에서도 바울의 위대성은 기독교를 유대교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새로운 궤적 위에 올려놓았다는 데 있다.

 

 

 

 

유대교여! 안녕: 하나님의 의()

 

 

바울에게 있어서 최소한 기독교복음이라는 것이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면 안 된다. 그것은 기쁜소식이 될 수 없다. 복음은 사람에게 자유’(freedom)를 가져다 주는 것이어야 한다. 복음이란 구태의연한 율법체계에 인간을 복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새롭게 태어남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명제가 바울에게는 부활(Resurrection)의 궁극적 의미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16)

 

 

여기 의롭다’(righteous)함은 원래 유대교 전통에서, 물론 유대교 전통에서 자라난 바울의 의식 속에서, 정확하게 법정용어로 쓰인 말이었다. 법정에서 판결을 받을 때 피고인이 무죄다’(innocent) ‘결백하다’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거짓이 아닌 참으로 판명되었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의롭다’(ṣādîq)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로마인서에도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1:17), 이 명사적 구문 때문에 우리는 의()가 마치 하나님 개체의 속성을 드러내는, 하나님 자신의 의로운 덕성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개인적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는 과정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법정에 설 때에 인간이 무죄판결이 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관계설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의롭게 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정에서 무죄판결이 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법을 어긴 적이 없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잘 지키면 법정에서 의롭다는 판결이 쉽게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의 행위’(works of the law)로써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죄판결이 날 수 없다고 일갈한다. ‘율법의 행위라는 말의 행위속에는 축적된 공로라는 뜻이 들어가 있다.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단식을 하고, 유월절 등의 명절을 잘 지키는 그러한 율법지킴의 공로를 축적하는 행위로써, 그러한 덕성으로써 인간은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로움은 오로지 예수 안에서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해진다. 법조문을 쌓아놓고 그것을 피해 사는 것으로써만, 그러한 부정적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의롭게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로움은 그러한 법조문적 부정적 맥락을 뛰어넘는 긍정적 삶의 선택이며 발랄한 생명의 가능성의 발현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19)

 

 

율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간은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이다’(2:20),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부활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요, 인간의 의로움이요 자유다! 바울은 이로써 기독교를 율법의 종교인 유대교로부터 해방시켜 영적 자유의 종교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28~30)

 

 

이제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종교로서 점차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유대화파들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리고 애석한 일이지만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그들은 정치적 세력기반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기독교 초대교회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바울이 유대화파의 논리에 무릎을 꿇었더라면 기독교는 아마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갔을지도 모른다. 쿰란과도 같은 몇몇 유적만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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