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마르시온의 등장
유대인 성경의 부정
그러나 바울의 생애기간 동안에는 이 유대화파들과 이방인 사이의 알력은 강력히 유지되었다. 그의 모든 추상적 논변들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한 편에 치우친 이해 관계를 피해가기 위한 이론적 장치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장치 때문에 바울의 서한은 오히려 구체적 역사정황을 초월하는 보편성,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사후에도 유대인기독교도들과 이방인기독교도들 사이의 알력은 첫 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2세기 초반부터는 이미 유대인들의 압력으로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2세기 중엽에는 완전히 유대교로부터 독립되었고 더 이상 유대인들의 종교가 아니었다. AD 144년에 정통교회조직으로부터 이단으로 간주되어 파문당한 마르시온(Marcion, ?~160)이 기독교는 구약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구약의 폐기를 강력히 주장했던 것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도들이 믿는 하나님은 근원적으로 구약의 하나님,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며, 질투와 저주와 보복의 하나님이며, 잔인하고 허황되고 화 잘 내고 믿기 어려운 하나님이다. 이런 폭군적인 하나님을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믿음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내는 새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챤들이 믿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대 로마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구약성경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마르시온은 원래 소아시아의 시노페(Sinope, 흑해 남쪽의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의 해안도시, 파플리고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당대 크게 선박업을 운영하는 부상(富商)이었다. 그는 기독교에 심취했고 특히 사도 바울의 서한들을 깊게 탐독했다. 그리고 당대 세계기독교의 센터노릇을 했던 로마교회에 나타나 20만 세스터스(은화)라는 거금의 연보를 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많은 신도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런데 왜 마르시온을 파문시켰을까?
구약과 신약
우리가 기성의 교회사에 대한 편견이 없이 사태를 관망해보면, 마르시온(Marcion, ?~160)이 구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정당한 일이다. 그것은 기나긴 유대화파와의 투쟁의 역사의 결말로서는 너무도 명료한 결론이다. 생각해보라! 구약의 약(約)이란 계약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이란 ‘헌 계약’(Old Testament)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습관에서 확실히 알 수 있듯이 계약이란 새계약을 맺으면 반드시 헌계약을 파기해야 한다. 새계약을 맺을 때 헌계약증서는 찢어 버리거나 법적 효력을 발생치 못하게 만드는 장치를 반드시 한다. 헌계약이 계속 유효하다면 새계약을 맺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복음을 하나님과의 새계약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신약’(新約, New Testament)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구약은 폐기되어야 한다. 구약이 폐기되지 않으면 신약은 신약이 아니다.
더구나 구약은 야훼하나님과 이스라엘민족 사이에서만 맺은 유대인의 계약이다. 그것은 오직 이스라엘 선민과 야훼 사이에서만 성립한 배타적 계약이다. 이스라엘민족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지역적 계약이다. 그러나 신약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전세계 이방인 누구든지, 더구나 남녀노소 귀족 노예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아주 새로운 보편적 계약이다. 한 작은 고을의 지방자치 법령을 보편적인 만민법이나 자연법과 혼동할 수는 없다. 이제 기독교는 유대인의 종교가 아닌 이방인의 종교요 세계인의 가톨릭(보편적) 종교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정당한 주장을 그토록 이단시했을까? 사도시대를 승계한 인물로서 당대의 가장 권위있었던 스뮈르나(Smyrna, 현재의 터키 이즈미르)의 희랍인 주교 폴리캅(Polycarp)은 로마교회에까지 와서 마르시온을 만나보고 뒤돌아서면서 이와 같이 말했다. “사탄이 제일 먼저 낳은 놈일 게다.” 왜 그토록 혹평했어야만 했을까?
비록 유대화파들의 압력은 사라졌고 더 이상 구약이 기독교인에게 강요되는 율법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럴수록, 즉, 더 이상 유대인의 목소리가 교회내에서 권위를 가질 수 없는 자유로운 상황이 도래될수록 역설적으로 초기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정통 보수파들의 입장에선 구약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신약이라는 것이 신약이라는 막연한 개념만 있었지 실제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신약성경’이라는 보편적 공약문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구두계약만 있었지 문서계약이 없었던 것이다.
성경없는 초기 기독교
당시 기독교는 형성기였으며 구전(口傳)과 예배제식만 있었지 경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이 없었던 기독교!’
이것이 당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1세기에만 해도 교회에서 가장 권위를 갖는 전통은 사도성(Apostolicity)의 기준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직전제자의 말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경전적 기준이었다. 좀 너그럽게 봐준다면 직전제자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사람의 말까지는 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울의 당대에도 바울이 예수의 직전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진짜 사도로 간주될 수 없다는 비방이 많았다. 바울에게 사도의 권위를 부여할 수 없다고 그를 까댔던 것이다. 그러한 비방은 인간적으로 바울을 몹시 괴롭혔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란 말입니까? 내가 사도가 아니란 말입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했단 말입니까? (고전 9:1)
나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고후 11:5)
나는 기적을 행하여 내가 진정 사도라는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고후 12: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갈 1:12)
그러나 2세기 초에 이르면 사도성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죽었으며 교회내의 구술 전통(oral tradition)도 심각하게 변형ㆍ왜곡ㆍ타락되기 시작한다. 원래 구술전통이라는 것은 인도의 바라문이나 유대의 제사장과 같이 암송을 전담하는 전문적 권위계급이 특수하게 존속될 때만이 가능한 것인데 초대교회는 그 개방적 성격상 그러한 특수계층이 존재할 수 없는 도떼기시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성경(카논, kanōn)이라는 권위있는 기준이 없었고, 또 그러한 기준을 강요할 수 있는 권위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도성을 가장하여 경전을 저작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경전저작을 격려하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의 문학적 형식과 홀로서기의 어려움
현존하는 성경의 문학적 형식을 보아도 크게 두세 가지 밖에는 없다. 하나는 드라마형식의 전기문학이고, 하나는 여러 목적을 위하여 쓰여진 편지들, 또 하나가 있다면 생각을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논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생활하는 과정에서 누구든지 쓸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깊이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은거하면서 수도생활을 하는 승려들은, 저작이 생활화되어 있고 구라가 쎄기로 정평 나 있는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는 누구나 집필을 시도했다. ‘로마인은 말보다는 실행, 헬라인은 실행보다는 말’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희랍어를 쓰는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칠 줄 모르고 논쟁과 글쓰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기독교문화권의 사방에서 경전에 해당되는 문헌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판에, 구약을 폐기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구약은 이미 알렉산드리아에서 권위 있는 셉츄아진트번역을 통하여 정경화(正經化)되어 있었고 기독교 교회 내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도전받기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가 확보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을 둘러싼 유대인들의 경전해석학적 스칼라십의 수준은 당대 지식세계의 최고급 문화였다. 더구나 구약내에는 율법(토라)외로도 예언서(네비임)와 성문서(케투빔)가 들어있다. 예언서에는 예언자들의 외침뿐 아니라 이스라엘역사의 재미난 영웅이야기들이 많고, 성문서 속에는 시편이나 지혜문학, 묵시문학, 그리고 로맨틱한 스토리들이 들어있다. 이 경서 속에는 메시아의 대망,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언의 성취가 들어 있었고, 그리고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설교와 전례(liturgy) 자료로 쓸 수 있는 훌륭한 건덕지가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신약 즉 복음이야말로 구약의 성취라는 맥락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고, 율법적 구속력이 없어진 판에 구약이라는 문헌은 기독교의 권위를 입증하는 배경문학으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신생기독교는 홀로서기에는 힘이 부쳤다. 구약이라는 장쾌한 역사드라마를 배경으로 깔고 성장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초기교부들은 생각했던 것이다【물론 이때 구약이란 바리새인 전통에서 고수된 히브리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편집된 기독교화된 구약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마르시온(Marcion, ?~160)의 정당한 생각은 이단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바울도 이와 같이 말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사실 이 말은 바울이 율법을 강하게 부정한 후에 유대화파 교인들의 반발을 의식하여 어조를 좀 부드럽게 만들기 위하여 고안한 정치적 발언일 수도 있다. 마태복음의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라는 유명한 예수의 말도, 마태복음의 성립이 명백하게 바울의 서한보다 더 뒤늦게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할 때, 유대화파나 초기기독교 유대인 주류세력의 강렬한 반발을 의식하면서 가미된 발언일 수도 있다. 뒤에서 상세히 부연하겠지만 예수의 근본사상은 율법의 성취가 아니라 율법의 부정이다. 율법의 부정 그 자체가 율법의 성취라고 근사한 논리를 구사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역시 근사(近似)한 논리로 그치고 만다.
영지주의라는 빨갱이 논리
하여튼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시온(Marcion, ?~160)의 정당한 신약의 논리는 안타깝게도 이단으로 몰림으로써 그 새 약속의 철저한 성격이 좌절되고 만다. 구약을 인정한다는 것은 신약을 구약의 재래적 권위주의적 틀 속에서 어느 정도 타협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이라는 새로움의 후레쉬한 성격이 좀 맹숭맹숭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마르시온을 이단으로 몰아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까지도 우리사회의 주류적 흐름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의 구미에 반하는 사상은 무조건 ‘빨갱이사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누가 진짜 주류인지 알 수도 없고 ‘주류’라는 것 자체가 역사 속에서 항상 전변(轉變)케 마련이지만, 하여튼 한 시대 속에서 자기들이 주류라고 인식하고 있는 보수세력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빨갱이사상’이 정말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때로 맑시즘이나 콤뮤니즘이라는 어떤 치열한 사상체계나 정밀한 논리와는 전혀 무관할 때도 많다. 초기기독교사에 있어서 소위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것은 이 빨갱이사상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교회사에서 마르시온은 영지주의 이단의 대표적인 사상가처럼 기술되고 있지만 마르시온이 정말 영지주의자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르시온은 『반론들(Antitheses)』이라는 책을 썼지만 현재 단편만 남아있고 그를 저주하는 모든 초기교부들의 저작 속에서만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실체를 알 길이 없다. 영지주의의 핵심에는 비전적인 영지, 그노시스(gnōsis)가 있어야 되는데 마르시온은 비전적 영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주장은 공개적이며 예수가 전파한 복음 속의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Goodness)에 관한 것이다. 마르시온이 로마에 와서 그노시스 사상가였던 케르도(Cerdo)라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하여지는데 그를 이단자로 휘모는 사람들은 케르도의 사상을 마르시온에게 덮어씌워 논박했을지도 모른다. 마르시온은 그노시스를 구원의 핵심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써만 온다. 그가 그의 신념을 표현한 말로서 가장 즐겨 인용한 것은 갈라디아서에 있는 바울의 말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구약과의 단절성
변덕스럽고 폭군적이고 보복적인 구약의 하나님은 바울의 말대로 ‘율법의 저주’일 뿐이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이런 저주로부터 우리가 속량되는 것이다. 그의 해답은 매우 명료하다. 율법의 하나님이 아닌 복음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이 아닌 신약의 하나님은 무한히 은혜로우며 자비로우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구약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전혀 몰랐던 하나님이다. 이 신약의 하나님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처음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에게는 악의 요소가 없으며 오로지 무한한 선의 가능성만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무한한 선의지에 의하여 우리는 속량될 뿐이다. 바로 여기에 마르시온을 영지주의자로 휘몰 수 있는 선신과 악신의 이원론적 분열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만, 내가 생각키에는 마르시온의 주장의 핵심은 그러한 이원론적 분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단절성(discontinuity)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유대인 선지자들이 말하는 예언의 성취로서 볼 수 없으며, 예수는 그러한 낡아빠진 세계관과는 무관한 완전히 새로운, 전적으로 유니크한 가치며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폴리캅을 비롯하여 리옹의 이레나에우스(Irenaeus, 120/140~ 200/203)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5/160~220),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igen, 185~254), 예루살렘의 시릴(Cyril, 315~386), 키프러스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315~403), 등등의 초기 교부 거장들이 그를 한결같이 영지주의로 모는 논점의 핵심은 마르시온 신학이 깔고 있는 우주론의 이원성이다. 그들이 말하는 마르시온 신학에는 두개의 우주적 하나님이 존재한다. 허황되고 화 잘 내는 저질적인 구약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the Creator God)이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물리적 시공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피조물인 인간은 전적으로 이 세계의 일부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체와 영혼, 그 모든 것은 창조의 하나님께 속해있다. 이러한 마르시온의 생각은 이미 영지주의 틀에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영지주의적 세계관에는 영ㆍ육의 분열이 있다. 즉 육(肉)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계(Cosmos)에 속하며, 어둠(Darkness)이다. 그런데 그 육에 갇혀있는 영은 빛(Light)이며, 어둠에 가려있지만, 본래의 고향인 빛의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갈구한다. 인간의 영혼은 악마적 육체의 감옥 속에 갇혀있는 빛의 파편이다. 그 파편은 본시 하나님께 속해있던 것인데, 악마들이 하나님의 빛의 세계를 질투하여 이 세계를 어둠의 혼돈으로부터 창조할 때 훔쳐다가 그 원동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감옥에 갇힌 빛의 파편들을 가련히 여겨서 그의 아들 로고스(Logos), 말씀이며 빛인 자기 아들을 암흑 속으로 파견한다. 그러나 악마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아들을 지상의 육체에 감추어진 모습으로 파견한다. 빛의 원조인 이 아들은 사탄이 고향을 잊어버리도록 항상 취하거나 잠자는 상태로 있게 만들어놓은 빛의 파편들을 흔들어 깨우고 하늘의 고향을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그들이 악마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떠나 고향에로의 귀로에 오르게 만든다. 그때 악마들이 지배하고 있는 겹겹이 쌓여있는 구중천의 관문들을 통과할 때 반드시 필요한 암호들이 있다. 그 암호들이 그노시스다. 구속자인 아들은 빛의 파편들에게 그 그노시스를 가르쳐준다. 불길들이 타올라 하나로 뭉치는 것처럼 이 빛의 파편들이 다 하늘에 모여 다시 하나로 재조립될 때, 이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원래의 암흑의 혼돈으로 가라앉는다. 그것이 마지막 심판이다. 구속자인 아들은 곧 그 빛의 파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그 암호의 진리며,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예수는 말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요한복음강해』 385).
도세티즘
마르시온(Marcion, ?~160)의 세계관에 있어서는 인간은 영ㆍ육이 모두 전적으로 창조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영혼 만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빛의 세계로 귀향하는 드라마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고차원 하나님(the high God)이 있다. 이 고차원의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가 격절되는, 전혀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물론 창조된 이 세계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이 고차원의 하나님은 완벽한 선의에 의하여 자기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계로 파견하여 인간을 전적으로 구원하여 새로운 고향으로 데리고 간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인간의 원죄에 대한 대속의 희생이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클레임의 권리를 무효화시키는 법적 선포이다. 인간은 비밀스러운 그노시스에 의하여 이 세계를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에 대한 믿음으로써 이 세계를 탈출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써 창조의 하나님인 구약의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는 원래 이 세계의 창조와 관련없는 무규정적인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에 의하여 이 세계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이 세계에 속한 육신의 옷을 입을 수가 없다. 그가 육신의 옷을 입게되면 인간과 똑같은 피조물이 되며 따라서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다. 그는 그냥 갈릴리에 현현하였을 뿐이며 역사 속에서의 그의 행적은 사람의 몸의 행적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이론적 결구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예수의 존재는 도세티즘(Docetism), 즉 가현론(假現論)의 소산이 되어버리고 만다. 바로 이 점이 마르시온(Marcion, ?~160)이 영지주의로 몰리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과연 가현론과 영지주의는 등식이 성립하는 사유체계들일까? 마르시온은 과연 가현론을 부르짖었을까?
철학사에서는 어떤 사상가가 이단으로 몰렸다고 해서 그 사상마저 폄하되거나 왜곡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지만 그의 사상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통하여 만고에 빛난다. 스피노자는 유대교에 의하여 저주스러운 파문의 고통을 당했지만 그의 저작들은 근세철학의 위대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해서 그의 사문(斯文)에 대한 혁혁한 공로가 감소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종교사에서는 한번 이단으로 찍히면 영원히 이단이다. 한번 사문난적이 되면 그의 모든 것이 말살되고 복원의 길은 요원해진다. 선죽교에 피를 흘린 역적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다시 충신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그런 일은 없다.
인간에게 구원과 자유와 사랑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신약이었지만, 그 신약의 하나님의 역사 또한 이단자들에 대해 너무 가혹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공인 이전부터 이미 정통과 이단의 싸움은 극렬했다. 그러나 마르시온 시대만 해도 아직 가톨릭 교회와 정치권력의 밀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2~4세기에 걸친 정통ㆍ이단의 싸움은 혼란스러웠고 창조적이었다. 그러나 가톨릭 정통파들은 착실하게 그 세력기반을 구축해가고 있었다.
144년 로마교회가 마르시온을 파문했을 때 로마교회당국은 마르시온이 기부한 20만 세스터스를 돌려주었다. 요즈음 같으면 파문을 해도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돈은 돌려줄 것 같지 않은데 그래도 그 시절은 순수의 시대였던 것 같다. 돈을 돌려받고 파문당한 마르시온은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파문의 결과
물론 당시의 파문이라는 것이 후대의 교황의 파문과도 같은 그러한 권위나 권세를 갖지 못했다. 황제의 정치권력의 백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시온(Marcion, ?~160) 자신도 파문에 승복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르시온의 교설이 조금도 기독교의 정통교설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시온을 파문한 것은 교부들이었지 신도들이 아니었다. 로마교회내에서 그의 인기는 열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요즈음의 분파주의자나, 사교(邪敎) 교단을 만들어 자기가 재림 예수라는 둥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둥 그따위 허탄(虛誕)한 말을 둘러대는 사기꾼과는 질이 달랐다. 마르시온은 자신을 ‘교양있는 평신도’로서만 생각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와 바울의 참된 가르침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드는 ‘교사’(a teacher)로서만 자신을 규정했다. 자신은 ‘예언자’(a prophet)도 아니며 ‘성자’(聖者, a holy man)도 아니라고 말했으며, 자신을 숭배하려는 모든 경향을 철저히 차단시켰다. 그리고 그는 교회내의 조직에 있어서 신분의 격차나 남녀의 불평등을 철저히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르시온은 돈이 있었다.
자연히 마르시온(Marcion, ?~160)을 따르는 사람들(Marcionites)은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조직했다. 마르시온은 교회본부를 로마에 두었으며 ‘누구나 와도 좋다’는 매우 개방적인 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여성을 남성과 똑같이 대접하여 주교나 목사로 임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여성이 주교는커녕 일반사제로도 서품될 자격이 없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의 단절을 선포했기 때문에 자연히 구약의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과의 단절을 요구하게 된다. 이 물질세계에서는 구원의 희망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사랑과 광명의 하나님세상에서만 구원은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이 물질세계로부터 철저한 금욕을 요구했다. 마르시온교도들은 매우 경건한 금욕생활을 했으며 예수에게 육신이 부재하다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육식을 하지 않았다. 물질세계에 있어서의 탐욕의 극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단백질 부족 때문인지, 예수께서 군중들을 먹이셨기 때문인지 생선은 허락하였다. 사실 마르시온교회는 당시 외부인들에게는 전혀 이단교회로 간주될 수 없었다. 외견상 가톨릭교회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선했고 개방적이었고 평등주의적이었다. 그것은 당대교회가 점차 세속화되어가는 것에 대한 강력한 제동이었다. 따라서 마르시온의 새물결은 로마에서 로마제국 전역으로 급속히 번져 나갔다. 그의 교회는 소아시아반도 전역, 크레테, 동ㆍ서방 시리아, 팔레스타인,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에 수백 개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세력은 가톨릭교회와 병립되는 또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시리아의 마르시온교회
2세기 중엽부터 5세기 중엽까지 마르시온 교회는 300년간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시리아에서는 마르시온파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끝까지 버티었다. 바울은 시리아의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는 도중에 홀연히 하늘에서 빛이 둘러 비추어 개종케 되었다(행 9:3). 기독교 교회건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명문이 새겨져 있는 건물은 다마스커스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있는 한 교회다.
그 교회에 희랍어로 명백히 새겨져 있는 명문은 다음과 같다: ‘레바논의 마을에서 마르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처. 장로 바울의 리더십 아래 있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이 명문은 318~319년의 것으로 비정된다. ‘마르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당당히 내건 것은, 당대 마르시온파가 이단으로서 저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마르시온파들이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마르시온에게 얼마나 애틋한 존경의 념을 표했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리고 4세기초까지만 해도 마르시온교회가 가톨릭교회와 당당히 병립할 수 있었던 여백이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 명문은 물론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의 상황이다. 그토록 여러 지역의 교부들이 몇 세기에 걸쳐 마르시온을 맹렬히 공격하는 것만 보아도 그것은 사실 마르시온이 영지주의자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맹공의 이면에 조직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고 보아야 정당하다. 그때는 이단과 정통의 구분 그 자체가 모호했다. 누가 이단인지 누가 정통인지를 가릴 수 있는 권위가 부재했던 것이다.
4세기에 발표된 시리아지역의 라오디케아 신경(Laodicea Creed)이 ‘하나의 하나님, 이 세계의 지배자, 율법과 복음의 하나님’(One God, ruler, God of the law and the gospel)을 선포하고 있는 것도 정확히 마르시온교회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런데 마르시오니즘(Marcionism)이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교회조직의 성쇠판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마르시온의 주장의 핵심은 신약과 구약과의 단절이다. 구약과 단절되지 않으면 신약은 복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하시면서 구약의 율법을 강요하거나 구약을 신앙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신약의 배경으로서만 구약을 인용할 뿐이다. 이것이 알고 보면 다 마르시온의 영향이다. 마르시온의 교파가 기독교의 형성기에 300년 동안이나 강력한 교세와 조직을 유지했다는 이 사실 자체가, 아무리 그것이 이단으로 몰려 역사의 배면으로 종내 자취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해도, 그 자취는 분명히 기독교 자체 내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강력히 입증하는 것이다. 구약에 대한 마르시온의 강력한 제동은 초기 교부들의 구약에 대한 생각을 오히려 자유롭게 만들어준 측면이 있다는 사실도 우리가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가볍게 장식하는 듯 애써 축소되어 기술되고 있는 이단자들의 실체와 실상을 우리가 명료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긍정적인 실체와 실상 그 자체도 유실되어 버리고 만다.
아포스톨리콘과 누가복음의 선택
마르시온(Marcion, ?~160)의 ‘구약과의 단절’이라는 테제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을 결정케 만든 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구약에 대립되는 신약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마르시온은 자기의 주장을 확고히 신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성경에 비견할 수 있는 크리스찬들의 성경을 문헌적으로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문헌들을 제한하여 교회 성경(ecclesiastical scriptures)으로 그 권위를 확립해야만 그의 신약사상을 확고히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우선 바울의 서한이었다. 그가 바울에게 경도된 것은 바울의 반율법사상(antinomianism)이었다. 그는 사도 바울이야말로 기독교를 유대교전통에서 분리해낸 인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바울의 편지는 10개였다. 이것을 아포스톨리콘(the Apostolikon)이라고 부른다.
1) 갈라디아서 2) 고린도전서 3) 고린도후서 4) 로마서 5) 데살로니카전서 6) 데살로니카후서 7) 라오디케아서(=에베소서) 8) 골로새서 9) 빌립보서 10) 빌레몬서
재미있게도 아포스톨리콘 속에는 3개의 목회서신, 즉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는 들어가 있지 않다. 그의 시대에 이 목회서신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에게 인식되지 않았거나, 있었는데 일부러 빼버렸거나, 이 셋 중에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마도 의식적으로 제거시켰을 것이다. 이 목회서신은 그의 비판자였던 폴리캅(Polycarp)이 마르시온을 의식하여 작성한 문헌이라는 설도 있다. 하여튼 마르시온에게 바울 본인저작성이 확실한 문헌으로 이 10개의 편지가 선택되었던 것이다. 바울의 편지가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게 된 데는 마르시온의 공로가 크다. 마르시온은 문헌학적으로도 견식이 탁월한 학자였다.
그리고 그는 아포스톨리콘 앞에 복음서로서 누가복음 하나를 붙였다. 타복음서가 그의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누가복음이 선택된 것은 그의 바울선호사상과 관련이 있다. 바울의 서신 속에서 바울이 ‘복음’이라는 말을 쓸 때 대체적으로 구원의 복된 소식에 관한 구두적 선포(oral proclamation)를 의미했다. 바울의 시대에는 문헌화된 복음서가 없었다. 그런데 마르시온(Marcion, ?~160)은 바울이 어떤 복음서를 암암리 지칭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으로 누가는 바울의 전도여행을 동반한 의사였고 그에게 끝까지 인간적으로 충실했던 신앙의 동역자였으며 누가복음의 집필자로 지목되어왔다. 따라서 마르시온은 바울이 지칭하는 복음이 누가복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바울 시대에 누가복음이 존재했다는 마르시온의 생각은 성립하기 어렵다. 누가복음의 저자가 바울을 동반한 의사 누가였다는 설은 그동안 신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설의 타당성을 다시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세계적인 성격, 이방인을 위한 성격이 강하다는 측면도 마르시온에게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마르시온 정경: 정경화작업의 최초 계기
누가복음과 아포스톨리콘(the Apostolikon, 바울의 10개 서한)! 이것이 마르시온 교회의 최초의 정경이자 기독교역사에서 출현한 최초의 신약성경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마르시온은 이 정경작업에 오늘날 문헌비평(벨하우젠, 홀츠만)이나 양식사학(궁켈, 디벨리우스로부터 불트만까지)의 선구적 작업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상기의 문헌에서 전반적으로 구약과 관계되는 부분을 삭제시켰다. 하나님을 심판자로 묘사하거나, 유대교의 예언의 성취에 관한 부분, 또는 하나님의 징벌에 관한 문구들을 삭제시켰다. 그리고 예수가 구약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구절이나 예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약의 인용은 모두 빼버렸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의 유아시절에 관한 잡다한 내러티브들, 그리고 예수의 족보, 그리고 어색하게 삽입된 세례 받는 장면, 그리고 광야에서의 유혹을 아예 빼버렸다. 그리고 바울의 열 개의 서한의 앞머리마다 자신의 서문을 다 첨가하였다. 마르시온의 맹렬한 비판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5/160~220)는 마르시온의 정경화 프로젝트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시온은 도살장의 칼잡이 같은 놈이다. 지 마음대로 편의에 따라 성서를 칼질해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최초의 마르시온(Marcion, ?~160) 정경화작업을 통해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깨달을 수 있다. 우선, 당시 성서라는 문헌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문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편집이 가능했고 자신의 편찬목적에 따라 첨삭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그냥 문학으로 인식되었으며 경(經, kanōn)이라는 권위가 부여되기 이전의 돌아다니는 참고문서들이었다. 그리고 2세기 초엽부터 교회내에서 사도 바울의 위치가 매우 공고해져간 역사적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즉 많은 예수의 직전 사도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구전전통이 쇠퇴해버리고 모든 것이 문헌화되어가는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바울의 서한만큼 확실한 권위를 갖는 문헌전통이 없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유대인을 떠나 헬라화되어갈수록 유대인이면서 가장 헬라적이었던 바울의 역량에 필적할 자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편지를 위조해도 딴 사도보다는 바울의 이름을 이용했다. 그러한 일반적인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 마르시온의 정경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도 대부분을 바울의 편지가 차지하고 있으며 사도행전조차도 그의 전기문학이라고 할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현상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무라토리 정경
초대교회에는 성경이 없었다. 18세기의 발굴자이며 출판인이었던 무라토리(Lodovica Antonio Muratori, 1672~1750)가 AD 170~180년경에 로마에서 희랍어로 작성되었다고 하는 성경목록을 번역한 7ㆍ8세기 라틴어 단편원고를 발견했다(1740). 이것을 우리가 무라토리 단편이라고 부르고 이 무라토리 단편에 쓰여진 성경목록을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이라고 부른다.
이 무라토리 정경이야말로 정통파 신약의 최초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해왔다.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목록에는 ‘4복음서’가 들어가 있는데 누가복음이 ‘복음서의 세 번째’로 지목되고 있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순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 그리고 7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들이 있다. 7교회는 차례로 고린도(2개),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갈라디아, 데살로니카(2개), 로마로 되어있다. 다음에 빌레몬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요한1서, 요한2서, 솔로몬의 지혜(the Wisdom of Solomon), 요한계시록, 베드로묵시록(the Apocalypse of Peter)이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ㆍ후서, 요한3서는 빠져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성과는 무라토리 단편의 목록이 2세기 서방교회의 텍스트 목록이 아니라, 4세기 동방교회의 텍스트 목록임이 밝혀져, 무라토리 정경이 가톨릭교회의 최초의 성경의 모습이라는 말은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여튼 무라토리 정경도 마르시온(Marcion, ?~160)의 정경화 작업에 대한 하나의 반동으로 형성된 동방교회의 정경화작업의 한 형태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사실은 가톨릭 교회내의 정경화(canonization) 작업이 이단적 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가톨릭교회 정경화작업의 시작
마르시온(Marcion, ?~160)이 정경화작업을 이미 AD 150년경에는 완성하였고, 그를 이단으로 몰아친 바에야, 그리고 그의 교세가 날로 융성하여 마르시온 정경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판에 그것을 비판하고 가톨릭교회 자체 내에서 정경을 따로 정립하려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사도저작성(Apostolicity)을 기준으로 성경문헌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는 책들은 모두 AD 50년~150년 사이의 1세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 1세기 동안 쓰여진 책만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어중이떠중이가 쓴 책이 너무도 많다. 27서 정도의 범위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AD 150년 이후에는 계속해서 어중이떠중이가 쓴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져나왔다. 그것은 정경의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는 모두가 정경의 자격을 지니게 되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저작을 시도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정경화작업(canonization process)이라는 것은 이 많은 책들 중에서 어떤 것을 진정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가 선택할 것이냐? 즉 경전을 제한시키고(to limit scriptures) 국한시키는 문제였다. 많은 것들 중에서 몇 개를 선택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의 기준에 관한 문제였다.
한번 편안하게 생각해보자! 제일 좋은 기준이 무엇일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의 기록이 정경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제일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말씀을 기록으로 써서 남겼고 그 수고(手稿)가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제일 좋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은 기록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는 말씀만 당대 사람들의 마음에 남겨놓으셨고, 그의 삶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셨을 뿐이다. 예수는 저술가가 아니요 행위자였다. 예수가 무엇을 썼다는 기록은 요한복음에 딱 한 번 나온다. 그것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예루살렘 성전 앞으로 데려와 돌맹이로 쳐죽이려는 그 유명한 장면에서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요8:4~9, 『요한복음강해』 288~9).
예수는 이때 무엇을 썼을까? 예수께서 성경을 쓰셨을까? 당신의 말씀을 쓰셨을까? 아무도 모른다. 어떤 문자로 쓰셨을까? 예수는 희랍어를 몰랐다. 헬레니즘과는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매우 토속적인 갈릴리 사람이었다. 갈릴리에도 도처에 알렉산더 정벌 이후에 세워진 희랍형 도시들이 있었고 헬레니즘 문화가 침투해있었다. 극장도 있었고 목욕탕도 있었고 운동경기장도 있었다. 예수에게는 일체 이러한 헬라문화와 관련된 냄새조차도 없다.
예수의 말
예수는 당대 아람어(Aramaic)라는 히브리어와 비슷하면서 다른, 속화된 토속말(vernacular)을 사용한 사람이었다. 이 아람어는 히브리어와는 달리 페니키아 알파벳(the Phoenician alphabet)으로 표기되었다. 요번에 발견된 쿰란문서에도 아람어 텍스트가 많이 나왔다.
아람어는 원래 히브리어와 계보를 달리하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언어였는데(아브라함도 아람어를 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 26:5), 기원전 6세기경부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속어로서 자리잡았다. 그것은 특히 갈릴리지방의 흔한 일상구어였다. 그러나 유대지방에서는 일상구어로서 히브리말이 통용되었다. 예수는 히브리말을 몰랐을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일반군중들은 물론(막 10:51) 베드로(막 9:5, 11:21)나 유다(막 14:45) 같은 제자까지도 그를 ‘랍비’(rabbi)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 서기관계급(the class of scribes)에 맞먹는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이며 랍비문학의 소양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그가 구약성서를 자유롭게 인용하는 것을 보아도 그는 당대의 유대인으로서는 고등한 학문을 소유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가 율법에 관하여 그토록 강력한 발언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율법에 정통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예수는 히브리말을 할 줄 알았을 것이고, 히브리말로 된 유대교성경에도 정통했을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시편 22:1을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인용하며 운명하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그에게는 역시 갈릴리 토속어인 아람어가 가장 몸에 배어있는 자기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예수님 말씀에 대한 기록은 모두 희랍어로 쓰여진 것이다. 이것은 곧 ‘번역’이라는 문제와 ‘시차’라는 문제가 당초부터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상기의 요한복음 장면에서 예수가 무엇인가 땅에 썼다면 그것은 주변에 모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에게 이 간음한 여자를(아마도 결혼한 여자였을 것이다) 쳐죽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토라의 구절(레 20:10, 신 22:21)이나 혹은 그들의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히브리성경의 명구를 썼을지도 모른다. 나이 많이 먹은 원로들부터 하나씩 자리를 떴다는 것은 예수라는 사람의 말씀이나 판단이 자기들의 섣부른 율법적용의 상식적 범주를 뛰어넘는 어떤 권위를 그들에게 느끼게 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 이야기는 원래 요한복음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 코우덱스 바티카누스(Codex Vaticanus)와 같은 권위있는 희랍어 고판본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번역 고판본에는 이 부분(요 7:53~8:11)이 없다. 그냥 요한복음과는 독립된 전승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불타와 예수
불타는 깨달음(大覺) 자체가 매우 지적인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설법은 매우 지적이었다. 그리고 아난(阿難陀, Ānanda)과 같은 다문(多聞)의 지적인 제자가 있어 그의 설법의 기록을 전담했다. 물론 아난의 기록은 암송의 형태였다. 그리고 불타가 입적한 직후에 이미 500명의 장로ㆍ비구가 왕사성(王舍城, Rājagṛha)에 모여 불타의 말씀을 결집하여 아함과 율장의 일정한 형태로 만들었다(물론 이것도 구송의 결집이었는데 제3차 결집 때에 문서화시켰다.) 그러니까 불교는 출발부터 경전불교였던 셈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예수는 유대교전통 전체를 뒤엎을 만큼 대단한 지력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강론의 내용은 전혀 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불타의 깨달음 속에는 요즈음 말로 심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학적인 내용이 있지만, 예수의 말씀에는 그러한 학적이고 이성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 없다. 전혀 헬레니즘의 지적 분위기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선포며 믿음의 대상일 뿐이며 구원의 외침이다. 어느 여인이 나에게 큰마음을 먹고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깝게 ‘사랑해요’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메시지를 발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플라톤의 에로스론을 분석하는 강론을 펼친다면 나는 미친놈이다. 그 여인을 웅켜 안고 키스를 해주든가 그렇지 많으면 애석하지만 등 돌리고 뒤돌아서야 한다. 그것은 실존의 결단을 요구하는 문제다. 하물며 예수의 천국의 선포이랴!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지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소수 엘리트가 아니었다. 헐벗고 굶주리고 애통하고 억압받는, 심령이 가난한 대중들이었다. 물론 그의 직전제자라 하는 사람들도 전혀 지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12제자가 모두 지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아마도 가롯 유다가 가장 지적인 인간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갈릴리 북단의 작은 마을의 한 어부였을 뿐이다. 어부가 무슨 논문을 쓸 리는 없다. 물론 예수는 갈릴리 어부에게 지적 작업을 요구할 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는 경전종교가 아니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행 4:13)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학문없는’이라고 번역한 원문은 ‘아그람마토이’(agrammatoi)인데 그것은 ‘글 쓸 줄 모르는’(illiterate)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베드로와 요한은 외견상 무식한 촌무지랭이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문맹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거개 글 쓸 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가 말한 것을 전하고 가르치고(to teach, 마 28:20) 설파하라(to preach, 막 3:14)고 명령했지, 그의 말씀을 써놓으라고 권고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출발부터 말씀(구두)의 종교요 행위의 종교다. 경전의 종교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예수가 가르친 최초의 선포가 이 한마디였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라! 기쁜 소식을 믿으라!”(막 1:15)
예수의 복음(기쁜 소식)은 묵시적이었고 종말론적이었다. 그것은 천국의 도래였고 이 세계의 종말이었다. 이 세계가 종말로 다가가고 있는 판에 이 세계에 좋은 글을 써서 쌓아놓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좋다고 해서 그것을 글로 남겨 후세사람들이 읽도록 만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관심은 이 인간세 문명의 고상한 축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이 고통스러운 인간세의 종말이었다. 예수는 죽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재림을 약속하셨다. 예수의 재림도 물론 종말론적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다. 예수가 죽은 후에 초대교회의 모든 사람들은 긴박한 재림(Parousia)을 꿈꾸고 그 기대로 가득차 있었다. 바울도 재림이 곧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다.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들로 서로를 위로하십시오. (살전 4:16~18)
이런 사람들이 성경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을 까닭이 없다. 기독교의 원래 모습은 성경의 종교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상에서의 문학적ㆍ문헌적 성취는 하찮은 일이었고 불필요한 일이었다.
바울의 예수관
예수의 사도로서 글을 쓸 줄 아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반열에 낄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마도 바울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민족의 말인 히브리말에도 정통했으며 당대 세계공용어(lingua franca)인 희랍어(당대의 영어)에 통달했으며 로마시민권 소유자였으며 그레코ㆍ로망 수사학과 문학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이 예수의 사도임을 자처하면서도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하여 관심을 표명한 적이 없다. 예수의 생전의 행적이나 말씀에 관하여 일체의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직전제자들을 만나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전기자료를 수집할 꿈도 꾸지 않았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역사적 색신(色身)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다.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일 뿐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의 계시를 통해 직접 해후했을 뿐이다(고전 15:8). 그의 관심은 지상에 살았던 예수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준 은혜(grace)와 믿음(faith)과 사랑(love)과 정의(justification)의 예수였다. 따라서 그의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추상적인 예수였다.
물론 바울은 예수의 지상선교의 핵심적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바울의 관심은 예수의 가르침의 이방전파였다. 그 역시 행위자였지 논술자가 아니었다. 바울은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거나 교리를 문헌화하거나 경전을 논술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개종이후 죽을 때까지 줄곧 전도만 했을 뿐이다. 따라서 바울시대에도 교회에 고정된 경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바울이 남긴 것은 경전이 아니라 전도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쓸 수 밖에 없었던 아주 구체적이고도 일상적인 편지였다. 그의 편지는 주로 그가 설립한 교회들에서 분파적 내분이 생기거나 교리상의 혼란이 생기거나 기금을 모집해야 할 필요가 생기거나 인적사항이나 기타사항에 관해 부탁할 일이 있거나 조직운영에 문제가 있거나 할 때 틈틈이 쓴 것이다. 바울의 편지는 예수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말씀의 이론적 해설이요, 그 말씀의 전파과정에서 파생된 역사적 상황에 대한 포폄적 해명이었다. 사실 그러한 개인편지들이 성경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바울의 전도과정을 소상히 기록한 사도행전 속에서도 바울이 편지를 썼다는 것을 밝히는 대목이 없다. 그만큼 그의 편지쓰는 행위가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편지를 쓴 사실은 오직 그의 편지 속에서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고전 5:9~10, 고후 2:4, 7:8~12 등).
마르시온의 11서 체제
마르시온(Marcion, ?~160)이 바울의 편지 10개와 누가복음 1서, 즉 11서의 체제로써 최초의 크리스챤운동의 정경을 창출한 행위는 매우 과감하고 혁신적이며 효율적인 발상의 소치였다. 결국 그후의 모든 정경화작업이 이 체제의 심층구조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시온의 일차적 해후는 바울의 편지였다. 바울의 편지는 그에게 있어서는 유대율법과의 단절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한 위대한 논술이었다. 그러나 이 논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도들이 예수를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논술이 아닌, 역사 속에서 살아움직인 구체적인 예수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바울의 추상적인 예수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수가 곧 복음서 속에 그려지고 있는 예수였던 것이다.
불교에 비유하자면 바울의 편지들은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즉 논서(論書)에 해당된다. 물론 복음서는 경(經, sūtra)에 해당된다.
누가복음 | 경(經, sūtra) | 경장(經藏) |
바울의 7교회서한 (+ 빌레몬 개인서한) |
아비달마 (阿毘達磨, abhidharma) |
논장(論藏) |
그런데 당연히 역사적으로 경장이 논장의 성립보다 앞서야 한다. 부처님 말씀의 기록이 있어야 그 수트라에 관한 논술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씀의 기록인 수트라는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으로 시작하여 환희봉행(歡喜奉行,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기쁨에 충만하여 받들어 행하였다)으로 끝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역사에서는 논장의 성립이 경장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초대교회는 경장의 기록에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바울의 서한이 예수에 관한 기록으로서도 가장 빠른 기록이다(대강 48년부터 67년 사이), 당대의 사가인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c.100)의 기록보다도, 바울의 예수에 관한 기록이야말로 훨씬 더 정확하고 신빙성 있는 기록이다. 예수는 할례를 받은(눅 2:21) 유대인이었으며(갈 3:16),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민족을 위하여 선교를 하였으며(롬 15:8), 최후의 만찬을 베풀던 그날 밤 배반당하고 체포되었으며(고전 11:23~26),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갈 2:20)는 등의 아주 간략한 역사적 사실을 바울서한은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 태어난 지 8일째 되던 날 할례를 받는 예수, 예수라는 이름도 그때 받았다(눅 2:21). 렘브란트 1654, 143 × 96mm
신약성경의 저작연대 도표화
그냥 인상적으로, 상투적으로 현재의 27서 신약성경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편제(編制)에 의거하여 그것의 저작연대도 그냥 그 순서대로인 것처럼 생각하기가 일쑤다. 그런 문제에 별로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 있는 4복음서의 성립연대가 뒤에 있는 바울의 서한보다 뒤늦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쯤은 항상 머리에 넣고 있어야 한다.
쓰여진 저작연대로만 말하면 27서 중에서 갈라디아서나 데살로니카전서가 제일 첫머리에 나와야 할 문헌이다【많은 학자들이 데살로니카전서야말로 신약성서 중에서 최고의 문헌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AD 50년 겨울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물론 AD 50년의 상한선을 소급할 수는 없다. 그리고 바울의 저작성에 관해서도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경우는 바울의 저작성에 관하여 일체의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다. 갈라디아를 어디로 보냐에 따라서 그 제작연대가 달라지곤 하는데 소아시아 남부로 보면 저작연대가 AD 48년까지 소급될 수 있다. 갈라디아서야말로 바울의 생생한 자서전적 고백과 함께 불을 토하는 듯한 열정으로 율법주의를 거부하면서 은혜와 정의와 자유와 신앙의 복음을 설파하고 있는 바울 최초의 서한으로 보아야 한다. 초대교회의 문제의식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전투적 서한’으로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신약의 첫 번째 문헌이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기독교의 첫 세기와 우리의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대를 대강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 Stage Ⅰ |
예수의 탄생 - 죽음(30년 전후) | 예수시대 |
제2단계 Stage Ⅱ |
40년대 - 예루살렘 멸망(70) | 사도시대 |
제3단계 Stage Ⅲ |
70년 전후 - 100년 전후 | 복음서시대 |
제4단계 Stage Ⅳ |
100년 전후 - 150년 | 이방교회확립시기 교부위작시기 |
마르시온 정경 성립(Marcion Canon) |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 ↔ 마르시온 교회(Marcionite Church) | 정경화작업 시작(Canonization starts) |
사실 우리들의 궁극적 관심은 항상 제1단계이지만, 불행하게도 제 1단계는 제2단계와 제3단계의 장벽에 의하여 굳게 닫혀있다. 더구나 제1단계를 알 수 있는 일차적 정보자료는 제3단계의 정보밖에는 없다. 그밖의 자료는 거의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런데 제3단계는 제2 단계의 장벽을 또 건너 서있다.
사도시대의 저작은 바울이 전도여행과정에서 쓴 편지들이다. 바울 같이 정력적이고 저돌적이고 또 말이 많은 사람은 무수한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 많고 선박회사를 운영했던 마르시온(Marcion, ?~160)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얻어낸 바울의 서한문은 10개였다. 그밖의 것은 그의 신학적 관심의 밖에 있는 문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대에 이미 위작이 너무 많았다. 하여튼 바울의 편지는 누구에게든지 인기가 높았다. 그가 바울의 7교회편지를 수집한 것은 요한계시록이 7교회를 말하고 있듯이, 어떤 상징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2 단계를 거의 전적으로 지배하는 바울의 편지는 너무 추상적이었다.
제1단계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는 신도들은 제3단계의 시대에 오면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으로 살아움직이는 예수를 원했다. 바울의 예수가 법신(法身, dharma-kāya)적 예수였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색신(色身, rūpa-kāya)적 예수였던 것이다.
바울서한 속의 예수 | 복음서 속의 예수 |
법신(法身, dharma-kāya) | 색신(色身, rūpa-kāya) |
예수의 법신과 색신
초기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입적한 싯달타(Siddhartha)에 관하여 일체의 형상을 구체화할 수 없었다. 싯달타(예수에 비교) 즉 붓다(그리스도에 비교)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완벽하게 열반(涅槃, nirvāṇa)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다시 말해서 일체의 색신의 가능성이 없어져버린 해탈자(물질적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자)였기 때문에 그를 다시 육신의 모습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금기였고 불경(不敬)이었다. 불타의 생애를 말해주는 초기불전도(初期佛傳圖)에도 발자국 같은 것만 표현되어 있을 뿐 일체의 형상이 없다.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바로 알렉산더가 뿌린 헬레니즘문화와 관련이 있다. 알렉산더는 인도북부지역 중앙아시아까지 정복의 발길을 뻗치면서 그곳에 박트리아왕조(Bactria, 중국역사에서는 대하大夏국)를 세웠고, 박트리아는 쿠샨왕조(Kushān Dynasty)에 의하여 대치되었는데, 이 쿠샨왕조의 사람들은 헬레니즘문명의 영향권 속에 있었기 때문에 신상조각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따라서 불타신앙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를 자연스럽게 희랍신화 중의 한 인물처럼 생각하였고 그를 제우스나 아폴로 같이 생긴 한 미남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집안 정원의 조각 장식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대승불교 시작의 계기
현 파키스탄내의 페샤와르(Peshāwar)지역에서 이러한 불상이 대거 출토되는데 이 지역의 미술을 통칭하여 간다라미술(Gandhara Ar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간다라 미술과 더불어 인도의 웃따르쁘라데쉬(Uttar Pradesh)지방의 마투라(Mathura) 불상들이 흥기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전의 초기불교의 금기를 깨고 인도전역으로 ‘불상 조각붐’이 열병처럼 번져나갔다. 한편 전륜성왕 아쇼카왕 이후 인도에는 스투파신앙이 보편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붓다의 돌무덤인 스투파(stūpa: 원래 분묘였는데 점점 우리가 알고있는 탑양식으로 발전해갔다) 주변을 빙빙 돌면서 붓다를 흠모하는 ‘탑돌이’ 문화가 생겨났다. 이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은 몇날 몇 달을 죽치고 계속하는 습속이 있었는데 자연히 이들을 대상으로 생전의 싯달타(Siddhartha)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주는 이야기꾼들이 생겨났다. 이 이야기꾼들이 말해주는 싯달타이야기를 ‘본생담’(本生譚)이라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꾼들이야말로 최초의 대승보살(Bodhisattva)들이었던 것이다. 이 보살들을 중심으로 스투파 주변으로 자연히 승가(saṃgha, 불교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스투파신앙과 때마침 발전한 ‘불상조각붐’이 결합되자, 신도들은 적멸해버린 고요하고 추상적이며 일상생활로부터 멀리 격절되어 있던 싯달타로부터 갑자기 재미있고 다이내믹하고 구체적이며 일상적 느낌으로 스며들어오는 풍부한 새로운 싯달타의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이 불상운동과 더불어 시작한 새로운 불교의 물결을 이전의 부파불교와 구분하여 우리가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라고 부르는 것이다.
▲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324년 자기의 라이벌 리키니우스(Licinius)를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크리소폴리스(위스퀴다르)에서 무릎꿇게 한 후, 단독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자기이름을 따서 비잔티움에 건설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새로마(New Rome)였다. 그때 그는 소피아성당(Aya Sofya)을 지었다. 그러나 그 성당은 532년 3만 명의 사상자를 낸 폭동에 의해 재가되었다. 비잔틴제국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는 소피아 대성당을 새로 지었다. 높이 56미터의 성당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솔로몬왕이여, 나는 당신을 이겼소이다.”라고 탄성을 질렀다. 이 예수 모자이크는 2층 갤러리에 만들어진 것이다. 예수의 얼굴에는 자비의 슬픔이 배어있고 오른손은 들어 중생을 축복하고 있고, 왼손은 성경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성당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함락되면서 이슬람의 모스크로 바뀌었다. 위대한 정복자 이슬람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소피아 성당으로 맨 먼저 달려갔는데 그 웅장한 아름다움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그 성당 벽을 헐어내지 않고 회칠을 하여 덮고, 이슬람 글씨장식으로 분위기만 바꾸었다. 1935년 근대 터키국가의 아버지 아타튀르크가 이것을 박물관으로 만들면서 비로소 회칠을 벗겨내어 예수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회칠의 역사야말로 서양 기독교역사의 다양한 굴곡을 말해주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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