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복음서의 출현
복음서와 대승기독교
역사적 상황은 다르지만 기독교 복음서의 출현은 동일한 헬레니즘 문명권내에서 대승불교가 출현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의미맥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복음서 출현이 약간 빠르다). 그러니까 복음서라는 새로운 문학양식의 출현은 기독교를 대승화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바울이 말하는 부활의 그리스도가 아닌 팔레스타인의 풍진 속에서 역사하는 나사렛 예수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미있고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기독교의 대승화작업에 최초의 전기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마가(Mark)라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대승화작업의 정점에 요한복음이 자리잡고 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기독론과 『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의 반야사상과는 물론 지향하는 바도 다르고, 문화적 감각도 다르고, 사상적 결구도 다르지만 인간의 종교체험의 본원으로 깊게 쑤시고 들어가면 결국 동일한 시대의 동일한 시대정신을 표방하고 있다고 하는 나의 주장은, 세계문명사를 총체적으로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물론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최초의 복음서 장르를 만드는 획기적 에포크(epoch, 신기원)를 마련한 마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만찬을 행한 그 집 주인의 아들이며, 또 예수 사후 오순절 전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한 곳도(행 1:13) 마가의 집이었으며 그 뒤로도 그 집은 제자들의 아지트로 활용되었다고 전한다(행 12:12), 마가는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의 동역자였으며, 또 베드로가 ‘나의 아들’(my son)이라고 부를 정도로(벧전 5:13) 베드로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Papias, Bishop of Hierapolis)의 역사적 증언(AD 130년경)에 의하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사(the interpreter of Peter)로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마가는 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에도 같이 있었다(몬 1:24, 골 4:10). 파피아스의 단편에 의하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로서 베드로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였는데, 베드로가 말년에 마가에게 명하여 자기가 전한 주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였다가 자기가 죽은 후에 기록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도 파피아스를 인용하여 마가복음의 저작장소를 로마로 비정한다. 이런 말을 종합한다면 마가는 베드로와 바울이 모두 순교당한 후에 그들의 구술전승이나 회고록단편(파피아스는 마가가 베드로의 회고록자료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 등의 자료에 기초하여 최초의 복음서를 로마에서 저술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나는 이러한 전통학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당대의 통설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여튼 그레코ㆍ로망 문명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복음서라는 장르는 당대 유행하였던 플루타크(Plutarch, AD 46~119)의 『영웅전』류의 전기문학이나, 후대 셰익스피어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AD 4~65)의 비극이나 꾸준히 공연되었던 희랍비극 작품들에 비해, 그러한 양식적 요소들을 다 흡수하면서도 훨씬 더 의미있고 생동하며 장엄하면서도 강렬한 재미를 당시의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던 공전의 히트였다. 그것은 희랍비극의 요소를 모두 갖춘 대수난극(Passion Drama)이었다. 모든 대승운동은 재미 없이는 흥기하지 않는다. 오늘날 범동아시아문명권을 휩쓸고 있는 한류도 한국 테레비드라마의 독특한 양식과 재미의 산물이다. 무엇보다도 재미있기 때문에 만사 제치고 월남사람들이, 홍콩사람들이, 대륙사람들이 열심히 보는 것이다.
로기온과 논어(論語)
복음서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단편적 이야기들이나 그의 말씀, 그러니까 로기온(logion)이라고 부르는 설법토막들이 전승되어 오고 있었다. 아마도 교회 내에서 암송이나 독송의 형태로 내려오는 구전자료들, 그리고 신도들 앞에서 크게 공적으로 낭독하는 어떤 예수어록집 같은 문서기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어록의 말씀은 역사적ㆍ상황적ㆍ감정적 맥락이 단절된 단편적인 것이었다. 그런 것은 아무리 들어도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한 인간에 대한 심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록에는 그 인간의 라이프 스토리라든가 그 말을 의미 있게 만드는 전후 내러티브(narrative, 서술적 담론)가 없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우리가 아무리 『논어』를 열심히 읽어도 공자(孔子)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정보를 얻기는 힘들다. 그의 생애에 관한 정보로부터는 우리는 차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논어』를 펼치면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saying)이 나온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 하는 자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도올논어』 1-155)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論語』 「學而」
이 ‘자왈(子曰)’로 시작된 인용구 한 단락을 하나의 로기온(logion)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 로기온이 공자의 생애에서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맥락에서, 무엇을 전달하기 위하여, 누구에게 발설한 것인가를 도무지 알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배워서 기쁘다’는 말이 뭐 그리 대단한가? 그 말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친구가 멀리서부터 찾아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정치적 음모를 꾀하기 위한 혁명동지들을 규합했다는 뜻일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혁명에 실패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래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정치혁명이 아닌 새로운 정신혁명을 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일까? ‘자왈’(子曰)로 시작되든, ‘예수께서 가라사대’(Jesus said)로 시작되는 이 한 로기온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무궁무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해석의 전후맥락을 규정하는 내러티브가 필요한 것이다. 그 내러티브에 따라 로기온을 배열한 문학양식을 우리는 지금 가스펠(gospel), 즉 복음서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기쁜 소식’을 뜻하는 희랍어 표현은 ‘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이다. 가스펠은 유앙겔리온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고대영어와 불어계열의 어원에서 왔다】.
공자의 어록이 아닌 공자의 복음서양식을 찾아보면 무엇이 있을까? 공자에 관한 복음서양식, 그의 생애에 관한 전기적 정보(biographical information)를 우리가 알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서물을 뒤적거려야 할까? 과연 그런 문헌이 있는가? 물론 있다!
사기의 공자세가
우리는 인류문명의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니 뭐니 운운하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스케일의 위대한 불가사의가 하나 있다. 『사기(史記)』라는 서물이 그것이다. 이 『사기』 속에는 ‘의(義)를 돕고 결연히 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사람’, 암혈지사(巖穴之士), 유협지사(遊俠之士), 덕행으로 명성을 날린 시정의 장사치 등등, 후세의 이름을 남긴 영웅호걸이나 위인들의 바이오그라피(傳記)가 열전(列傳)이라는 장르 속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열전을 아무리 뒤척여도 공자(孔子)의 전기는 보이지 않는다. 노자(老子)나 한비자(韓非子)의 이름은 나와도 공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공자의 전기는 세가(世家)라는 장르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세가’는 천자(天子)들의 역사를 기록한 ‘본기(本紀)에 버금가는 것으로 천자들을 보필(輔弼)한 고굉(股肱, 수족의 뜻), 즉 제후(諸侯)들의 세계(世系)에 관한 전기문학이다. 공자는 제후의 위(位)가 없으므로 세가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공자의 전기가 세가에 들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 BC 145~86?)의 시대에 이미 유교가 국교화되면서 공자의 위치가 독보적인 것으로 존숭되었다는 특수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마천이 세가에서 놀린 붓은 열전에서 자유롭게 신유(神遊)한 붓길의 발랄한 생명력을 결(缺)하고 있다.
하여튼 우리가 공자복음서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면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 밖에는 없다. 물론 「공자세가(孔子世家)」는 공자의 생애에 관한 기술로서는 최초의 문헌이며, 유일한 문헌이다. 그것은 마가의 복음서보다 약 165년을 앞선다(『사기』의 집필시기: BC 104~91년경).
공자(孔子)의 제자집단은 예수의 제자들과는 달리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이 아니라, 공자 문하(門下)에 모여서 시서예악(詩書禮樂)이나 육예(六藝)를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모두 학문이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각기 유파에 따라 공자의 말씀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최초의 파편은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애제자 안회(顔回)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자의 사후 6년 수묘(守墓)를 했던 자공(子貢)도 크게 일조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교적 어린 말년의 제자였지만, 공문(孔門)을 굳게 지켰던 증삼(會參)이라는 제자의 문인들이 공자의 사후 한 50년경 상당한 양의 어록을 정리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논어』라는 서물의 최종적 모습은 400여 년에 걸쳐 누적되어 간 것이다. 그리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시대로부터, 맹자(孟子), 순자(荀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등등의 제자백가의 시대에는 이미 공자에 관한 이야기나 고사, 그리고 그의 말씀으로 전해내려오는 파편들이 수없이 만들어지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공자가 산 시대를 알 수 있는 역사서로서는 『춘추』가 있었다. 사마천은 이러한 잡다한 정보를 종합하여 공자라는 위인의 출생으로부터 죽음까지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장대한 드라마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마가복음과 공자세가
독자들은 마가복음과 「공자세가(孔子世家)」를 병렬하여 논구하는 나 도올의 견식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깊게 양자를 모두 문헌학적 측면에서 검토해보면 그 성립과정이나 집필방식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이나 양식비평(form Criticism)의 모든 문제점이 「공자세가(孔子世家)」 속에서도 드러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정의로운 주장 때문에 요참(腰斬)의 사형언도를 받고 또 그것을 당대 사대부로서는 최대의 치욕이었던 궁형(宮刑, 거세)으로밖에는 모면할 길이 없었던, 너무나 처절하고도 끔찍했던 실존적 고뇌를 감내해야만 했던 사마천! 그 사마천은 「공자세가(孔子世家)」의 집필을 위해 섬서(陝西) 장안(長安)에서 산동(山東)의 곡부(曲阜)까지 수천리의 여행을 감행했어야 했다. 물론 이러한 사마천이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집필해야만 했던 자기나름대로의 깊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주나라 왕실이 이미 쇠퇴하자 제후들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이에 중니(공자의 이름)는 예(禮)가 폐하고 악(樂)이 무너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어, 경술(經術)을 정비하여 왕도(王道)에 이를 것을 밝히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도(正道)로 되돌리려고 하였다. 그의 글과 말에 나타나는 바대로, 그는 천하를 위해 의례와 법도를 수립하고, 육예(六藝)의 통기(統紀)를 후세에 드리웠다. 그래서 나는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짓게 된 것이다.
周室旣衰, 諸侯恣行. 仲尼悼禮廢樂崩, 追脩經術, 以達王道, 匡亂世反之於正, 見其文辭, 爲天下制儀法, 垂六闕之統紀於後世. 作孔子世家第十七. 『史記』 「太史公自序」
그러나 이러한 동기를 우리는 ‘복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과연 이 공자(孔子)의 전기가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이었을까?
마가복음의 첫머리는 이와 같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공자세가(孔子世家)」는 이와 같이 시작된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인데 공방숙이라 한다.
孔子生魯昌平鄕陬邑, 其先宋人也, 曰孔防叔.
마가복음의 저술동기는 매우 확실하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은 그리스도이며 우리의 구세주이며, 그는 신의 아들이다. 그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기쁜 소식의 시작부터 쓰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작은 예수의 동정녀마리아 탄생이나 그의 족보나 그의 유년기 시절의 설화나 청년기의 방황 같은 것을 일체 말하지 않는다. 막바로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즉 그의 공생애, 그의 미니스트리(ministry, 聖役, 事役)로부터 막바로 시작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수가 이 땅 위에 존재했다고 한다면 그 예수는 최소한 자신이 후대에 동정녀에게서 탄생된 사람으로 묘사되리라는 것은 새카맣게 몰랐을 것이다.
마가가 그리는 예수의 색신
사마천이 그린 공자(孔子)의 모습이 과연 역사적인 실상에 가까운 공자의 모습인가에 관하여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구성하는 단편자료들 사이의 중복, 모순, 불일치, 시대적 배열의 문제점들이 수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천이 그리려고 하는 공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한 인간의 충실한 전기적 구성이다. 그러나 마가는 애초부터 그런 식으로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다. 앞서 내가 복음서의 예수를 바울의 법신적 예수에 비하여 색신(色身)적 예수라고 말했지만, 이 색신이라는 것도 사마천이 공자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색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색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복음이며, 그 색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이다. 마가의 복음서는 바로 그 행위를 선포하려는 것이다. 이 선포를 바로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라고 하는 것이다. 이 케리그마는 마가가 복음서를 쓰기 이전부터 초대교회 내에 구전전통으로 내려오던 것이다.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란 케리세인(keryssein)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케리세인이라는 동사는 신약성서 중에서 61회나 사용되었다(마 9, 막 14, 눅 9, 행 8, 바울서한 17, 목회서신 2, 벧전 1, 계 1), 그것은 케릭스(keryx), 즉 전령관으로서의 임무를 행하는 것이며, 권위를 가지고 자기에게 위탁된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뜻이다. 어떤 공적인 사자(使者)가 일정한 소식을 공중 앞에서 외쳐 선포하는 것이다. 그 선포의 행위나 내용을 우리가 케리그마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복음서는 그 자체가 한 역사적 인간의 전기가 아니라 인간구원의 케리그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케리그마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해도 좋은 것일까? 즉 케리그마의 소기의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어떠한 드라마를 써도 상관 없는가? 바로 이러한 문제가 우리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이해하려고 맞부닥뜨릴 때에 가장 곤혹스럽게 느껴지는 핵심적 과제상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케리그마의 핵심은 예수의 드라마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케리그마의 어떠한 양식을 통하여, 어떠한 드라마적 배열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든지간에, 그 말씀의 진실성은 확보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최종적 소통이다. 그 말씀을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여러가지 내러티브나 드라마적 장치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게 되면 우리는 케리그마의 핵심적 본질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라는 케리그마를 갈릴리의 잔잔한 호수가에, 요단강의 격류 속에, 두로ㆍ시돈ㆍ데가볼리의 먼지 핀 마차길 여로 위에, 예루살렘의 훤화(喧譁) 속에 마치 정확한 역사적 사실의 시간적 흐름인 것처럼 지평선 위에 펼쳐놓았다.
그것은 분명 날조는 아니다.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역사적 사실의 기록은 아닌 것이다. 그는 복음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지 인간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부적인 텍스트비평에 들어가면 우리는 많은 황당함에 당혹하게 되지만, 그러한 현학적인 문헌비평이 복음서를 바로 이해하는 첩경은 아닌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부활조차도 사실로서 확인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세 여인,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무덤에 들어갔다가 충격 속에 나오는 장면으로 갑자기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며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막 16:8).
마가의 복음 핵심
그 얼마나 강렬한 드라마인가! 이렇게 위대한 드라마의 엔딩장면을 놓고 밑 안 닦은 것 같다는 식의 투정들, 예수의 부활현현의 장면이 있었을 것이라는 등, 계속된 부분이 여기서 뜯겨져서 없어졌을 것이라는 등, 복음서 저자가 잡혀가는 바람에 완성을 못했을 것이라는 등등의 하찮은 췌언(贅言)을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일삼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분명히 말하건대 마가는 16장 8절, 연약한 여인들의 떨림으로 그의 유앙겔리온의 대미를 완벽하게 장식한 것이다. 그것은 의도된 결말이었다.
마가가 전파하고자 한 유앙겔리온의 핵심은 십자가였다. 예수라는 한 인간, 우리의 구세주의 몸으로 겪은 수난이요 희생이었다. 오로지 그 십자가가 그의 관심이었다. 화려한 부활이나 눈부신 승천이 그 주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그의 복음의 마지막 장면을 좀 음산하고 어두운 느낌 속에서 연약한 여인들의 떨림으로 끝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놀람과 두려움은 마가복음서의 계속되는 주제였다(마 1:22, 27, 6:2, 9:15, 10:24, 26, 10:32 등), 그것은 밤의 어두움이 아니라 새벽의 어두움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효종(曉
鍾)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를 생각할 때, 항상 마가복음이라는 원형, 그 최초의 전기를 주의깊게 살피고 기억해야 한다.
수난복음서
마가는 수난복음서이다. 수난에 관한 이야기전승을 마가는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수난 한 주간의 역사만 해도 복음서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마가복음은 크게 3부로 대별된다.
제1부는 수난사의 서막이다(시작~1:13). 자세히 살펴보면 희랍비극의 서막과 매우 유사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출현, 예수의 세례, 광야에서의 시험이 매우 간략하게 서술되면서 예수라는 인물의 진정한 아이덴티티는 베일에 가려진 채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6장에는 살로메의 쟁반 위에 칼로 토막난 세례 요한의 머리가 올려지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생애 자체가 이미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제2부는 예루살렘 상경 직전까지의 갈릴리호수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선교활동이다(1:14~10:52),
제3부는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의 수난이야기이다(11:1~16:8).
제1부 | 수난사의 서막 | ~1:13 |
제2부 | 예루살렘 상경 직전까지의 갈릴리호수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선교활동 | 1:14~10:52 |
제3부 |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의 수난이야기 | 11:1~16:8 |
제2부에서도 수난에 대한 예고는 계속되며, 수난의 테마는 상실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가 자기의 정체성을 암시하면서도 그것을 목도한 자들에게 자기를 알리지 말고 선전하지 말라고 당부한다(Messianic Secret), 그러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막 7:36), 대중의 몰이해와 대중의 예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이중성이 팽팽한 긴장감을 지니고 유지된다. 마귀에게도 침묵하게 하며(1:34), 그의 신비로운 변형(Transformation, 9:2~13) 이후에도 제자들에게 그들이 목도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한다. 단지 거기에는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 다시 살아날 때까지’라는 단서가 붙어있다. 물론 부활 이후에는 얼마든지 얘기해도 좋다는 뜻이 내포된다. 그의 부활을 생전의 변형을 통해 이미 확실하게 암시한 것이다. 물론 예수에게는 예수의 비밀스러운 사적 공간이 남아있다.
이 모든 것이 수난과 부활을 향하여 달려가는 복음드라마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문학적 장치이다. 사실 예수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은 메시아의 비밀이 아니라 기적의 비밀이다. 기적의 행함을 경박하게 선전하는 것을 예수는 원치 않았다. 기적은 단지 징표적 수단이며 그러한 지상에서의 사건이 곧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의 본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가라는 복음서 저자의 위대성이 있다. 마가가 예수의 기적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배면의 심오한 사상은 이러하다. 그 기적이 단순히 하느님의 아들됨에 대한 과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지상에서의 아픈 인간의 치유라고 하는 매우 구체적인 삶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초시간적 사건이 아니라 시간적 삶의 사실이었다. 병든 사람들,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가 어떻게 대처했던가 하는 것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공전의 히트
바울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무시간적으로 표백시켜 그 속죄론적 의의만을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마가는 오히려 생동치는 한 역사적 인간으로서 갈릴리의 평원에서 활동한 예수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논술했다고 한다면 마가는 나사렛 예수의 삶을 기록했다. 여기에 최초의 복음서라는 문학장르의 탄생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기적과 영광과 권세의 수퍼 히어로(a super-hero), 신인(神人, a divine man)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마가는 그러한 교인들에게 완전히 다른 복음의 드라마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가의 예수는 힘이 없었고 연약했으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권면했으며, 수난 속에 죽어갔다. 이러한 십자가를 통해 그는 역설적으로 그의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수난극이었다.
역사성과 초역사성, 신화와 사실, 전승과 창작, 말씀과 서술, 추상과 구체, 삶과 죽음, 좌절과 희망, 이 모든 양면성을 구비한 복음서라고 하는 문학장르의 출현은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공전의 히트였다.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것은 유례가 없는 새로운 문학양식의 출현이었다. 이 이후의 모든 복음서 집필은 마가가 제시한 최초의 복음서양식의 기본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마가양식에 대한 가감일 뿐이다. 공관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복음서라고 하는 요한복음서조차도 마가의 복음서양식의 딥 스트럭춰(deep structure)를 전혀 일탈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가르친 기독교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새로운 운동이었다.
바울과 예수
바울은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돌연한 계시적 체험에 의하여 그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이 개종체험(conversion experience)의 드라마는 사도행전에 꽤 자세히 생생하게 3번이나 기술되어 있다.(행 9:3~19, 22:6~16, 26:12~18). 그러나 이 3번의 상황도 자세하게 뜯어 보면 설명방식이 각기 다르다. 3개의 다른 전승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욱 결정적인 사실은, 오늘날의 성서연구자들이 확정짓고 있는 일치된 결론은 사도행전의 기록이 결코 사도 바울의 직접적 증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사도 바울과 직접 안면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속의 바울과 바울서신 속의 바울은 너무도 이질적이라는 것이다. 문체나 사상과 인격적 분위기가 너무 판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성립시기도 AD 80년에서 2세기 중반을 오락가락한다. 역사적으로 사도행전은 AD 177년 이전에는 인용된 적이 없다. 그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확정지을 수 있는 아무런 문헌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2세기말의 강렬한 반영지주의 교부들, 이레나에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가 비로소 사도행전이라는 문헌을 경서로서 인정했을 뿐이다. 하여튼 사도행전은 바울의 사후 한참을 지나서야 그에 관한 전승들이 모아져서 기록된 것임은 확실하다. 물론 「사도계시행전」(The Apocryphal Acts of the Apostles), 「요한행전」(The Acts of John), 「베드로행전」(The Acts of Peter), 「바울행전」(The Acts of Paul), 「안드레행전」(The Acts of Andrew), 「도마행전」(The Acts of Thomas), 「베드로와 12사도행전 (The Acts of Peter and the Twelve Apostles) 등등의 다른 행전도 공존해 있었다.
사울의 개종체험
이렇게 본다면 바울이 다메섹(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둘러 비추어 음성이 들리면서 눈이 멀었고, 사흘 후에나 아나니아라는 제자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에피파니(epiphany, 하나님 현현)의 체험, 그리고 제자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매우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사도 바울에 관한 환상적 이야기들이 후대에 다양하게 전승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생생한 이야기의 진실, 기독교사의 최대의 역전적 계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주 확실하고도 안전한 방법이 있다.
사도 바울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서한으로서 가장 그 저작성이 확실시되는 생생한 글이 우리 손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이방교회의 율법주의자들, 그러니까 유대화파의 사람들이 율법준수를 고집하면서 바울의 개종이전의 생애를 문제삼아 그에게 사도의 권위를 박탈하고, 그의 선포의 권위를 근원적으로 붕괴시키는 음모에 대하여 매우 저돌적으로 돌진한 ‘전투서한’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바울은 아주 정직하게 자기의 생의 체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그의 ‘자서전적 서한’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자서전적 고백을 한번 들어보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殘害)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할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 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은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갈 1:11~20)
누가 언제 사도 바울에게 거짓말을 둘러댄다고 욕해댔는가? 하여튼 하나님 앞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그의 어세는 이 사건이 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말해준다. 바울은 여기서 그의 개종체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도성을 강변하는 이 결정적 순간에 왜 그는 예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그의 생생한 직접체험을 말하지 않는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행 9:4~9)
이토록 극적인 체험이 있었다면 과연 본인이 이러한 개종체험을 드라마틱하게 얘기 아니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드라마틱한 전변(轉變)을 고작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를 통해 나를 부르셨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는 밋밋한 이야기로 얼버무릴 수가 있을까? 그리고 바울은 말한다. ‘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사도행전의 기사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생의 한 시점에서의 역전의 순간에 대한 고백이 없이, 나는 엄마 태 속에서부터 선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냥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도하기 위하여 ‘내 속에 나타내셨다’라는 추상적 표현을 쓸 수는 없다. 눈까지 멀었다가 뜨게 된 지울 수 없는 몸의 체험이라든가, 예수께서 보냈다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만난 이야기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 관하여 성서주석가들은 매우 무딘 변명만을 늘어놓을 뿐이다. 성서는 반드시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읽어야 한다. 회심과 개종의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과 사건형태에 대하여 일체의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다’는 한 구절은 실제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사도 바울과 아라비아 사막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바울은 아주 명료하게 ‘유대교’(Judaism)라는 표현을 썼다. 즉 유대전통이 그의 의식 속에서 이미 하나의 개념으로서 소외되어 있고 객화되어 있는 것이다. 유대교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그토록 열심히 핍박했던 그가 그의 아들 예수를 ‘내 속에서’ 계시된 형태로 만난 사건을 계기로 어떤 심정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종체험’의 대사건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 체험의 사건에 관하여 일체 가까운 사람, 혈육 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라비아로 갔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개종체험이 있은 후 당연히 그는 그 개종에 관하여 기독교단을 리드하는 사람들로부터 인가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3년 동안 일체 아무하고도 자기의 내면적 심정의 변화에 관하여 상의하지 않았다. 길게 잡는다면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을 자기 홀로만의 명상과 사색을 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정말 미스터리에 속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의 새로운 삶의 시작은 아라비아사막의 고적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바울이 말한 ‘아라비아’가 다마스커스 남쪽에 있었던 헬레니즘문명권의 나바태아왕국(the kingdom of Nabataea)을 지칭한 것이며, 그 왕국의 왕인 아레다왕(King Aretas IV, BC 9~AD 40 재위)이 거론되고 있는 고후 11:32~33의 사건을 이 개종체험과 관련지어 주석가들이 주석을 달고 있지만 그것은 전혀 부질없는 억측일 뿐이다.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고독의 시간을 위해 아라비아의 사막이 필요했고 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자신의 삶을 지배해온 시간과 공간과의 단절이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개종체험을 한 후 며칠 있다가 즉시로 그 지역의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전파했다고 적고있는 사도행전의 기사(행 9:19~20)는 신빙성을 완전히 상실해버린다.
20세기 서양철학을 대변하는 대철인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는 이 오묘한 대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독교는 초기 히브리 예언자나 역사가들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한 서양신학의 확립에 이르는 1200년 동안, 불규칙적으로 산재해 있는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에 관한 강렬한 탐구를 그 기초로 삼고 있다. 기독교의 이야기는 예언자들이 우글거리는 팔레스타인으로부터 플라톤이 살았던 아테네에 이르는 동부지중해연안을 따라 어슬렁거린다. 그리고 그것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간 예수의 생애에서 정점을 이루고 있다. …… 사실 그 이후의 교회사를 장식한 사람들도 기독교역사에 동일한 공헌을 하였다. 그 공헌은 위대한 사람들과 위대한 계기를 작동시켰던 행동과 사유와 감정과 제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역사에 공헌한 사건들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현존하는 복음서들간의 시간배열과 사건들의 불일치, 설명 방식의 불협(不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아갈 때 발생하는 전승의 번역의 오류, 의구심을 일으키는 구절들, 그리고 직접적 역사적 증거에 위배되는 기술, 등등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사도바울이 그를 개종시킨 주님을 알고 있는 제자들을 곧바로 찾아가야 할 그 결정적인 시점에 아라비아 사막으로 은퇴했다는 대목은 정말 괴이하다. (Adventures of Ideas 164~165)
바울 비젼의 독자성
3년 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지만 그는 자신의 개종체험을 인가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정통성이나 권위를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다. 예루살렘에서 만나서 15일을 같이 유숙했다고 하는 ‘게바’(Cephas)도 주석가들의 통념처럼 꼭 베드로이어야만 하는 보장도 없다. 게바(베드로의 아람말)와 베드로는 어원의 문제를 떠나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 이외에는 다른 사도들, 즉 예수의 직전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았고 만날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그의 이방선교에 대한 사도 권능의 원천이 전혀 예수의 제자들과는 무관한 것임을 자랑스럽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다시 말해서 바울의 이방전도는 그 기획과 권능의 원천이 오직 바울이라는 역사적 실존체 내의 내재적 사건이었으며,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고전 15:8)로 인한 바울의 실존적 해후로써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라는 색신이나 그 색신을 접한 모든 1세대와의 철저한 단절 속에서 출발한 것이다. 여기에 바울의 과감성과 독자성과 보편성이 있다. 이러한 단절이 없었더라면 바울의 이방선교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나 베드로와 같은 협애한 견식의 보수세력의 지령이나 인가를 받고 움직였다면 바울은 오늘의 바울일 수가 없다. 바울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아라비아 사막의 고독 속에서 피어난 하나의 혁명이었다. 이방선교의 센터는 시리아의 안티옥이었고, 안티옥교회는 바로 바울혁명의 주축이었다. 인류사에서 ‘크리스챤’이라는 호칭이 최초로 발생한 곳도 안티옥교회였다(행 11:26), 바울의 전도활동을 통해 기독교의 중심축은 서서히 예루살렘교회에서 안티옥교회로 옮아갔던 것이다.
예루살렘교회 전통과 복음양식
바로 마가의 복음서양식의 출현은 이러한 바울의 추상적 이방선교에 대한 예루살렘교회 전통의 회복을 의미하는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와 팔레스타인 곳곳의 토착교회에는 바울의 추상적 논술과는 달리 보다 구체적인 예수의 이야기, 즉 1세대ㆍ2세대의 직전 담론들이 짤막한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의 형태로 지속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마가는 이러한 단편적 케리그마의 유형들을 하나의 일관된 수난극의 플롯 속에서 묶어내어 예수라는 사건의 전모를 드러내는 포괄적인 새로운 케리그마를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었다.
그런데 복음서의 출현은 AD 70년 예루살렘멸망을 전후로 한 정치 상황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때만 해도 기독교는 아직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으며 크리스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다. 바리새적인 유대인이든, 헬라화된 유대인이든 유대인들은 조국의 정치적 운명에 관해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마사다 요새
AD 70년 유월절 기간 동안에 티투스의 4개 군단과 강력한 지원군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처참한 파괴가 이루어진 이 사건으로 6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났다.(사망자가 100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자그마치 팔레스타인 유대주민의 4분의 1이 죽은 것이다. AD 73년, 아마도 74년초까지 사해의 서쪽해안 난공불락의 산 정상에 있는 마사다 요새에서 항쟁을 계속했던 유대의 독립투사들은, 금남로 도청에 포위되었던 광주시민처럼 상황이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결을 결정하였다. 지하의 수도관에 숨어있던 두 명의 아낙과 다섯 어린이들만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유대인 독립투사들의 비참한 항쟁의 종말을 지켜보았다. 마사다 요새를 로마군이 함락시켰을 때는 시체만 즐비하게 널려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 한가하게 복음서를 읽고 있다. 복음서는 바로 이렇게 절박한 시대상황 속에서 ‘기쁜 소식’을 유대인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해서 쓴 것이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여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끝날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 (눅 21:20~24)
후에 로마황제가 된 티투스(Titus, AD 39~81, 최초의 유대 출정대장인 베스파시안의 아들, 베스파시안도 70년에 황제 즉위, 티투스는 AD 79~81 재위)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면서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지성소(the Holy of Holies)【대제사장도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의 날(Day of Atonement, 욤 키푸르, Yom Kippur)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에 들어갔을 때,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천지가 진동하며 어둠이 깔리고 하늘에서 벼락이 때려 로마군단을 싹 쓸어버리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티투스는 끝까지 저항하는 혁명당원들을 밀어붙이며 유유히 지성소로 들어갔다. 70년 제5달 제10일 대낮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솔로몬성전이 바빌론에 의하여 파괴된 날과 같은 날이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 있었던, 야훼께서 임하시고 계시다고 믿는 그 성스러운 젯상(the table of the Presense)과 메노라(Menorah)라고 하는 일곱 금촛대를 승리의 기념물로 약탈해가버렸다(로마로 이송),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믿어왔던 야훼가 눈을 딱 감아버린 것이다. 유대인의 야훼신앙은 하나의 신화적 환상으로 증발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야훼신앙을 토대로 한 선민의 민족적 프라이드가 여지없이 짓밟히고만 것이다. 지성소파괴의 이 비극적 장면은 오늘날 로마의 로만 포럼(Roman Forum) 폐허의 입구에 자랑스럽게 서있는 티투스황제 개선문(The Arch of Titus, AD 81) 상단의 모상들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님의 성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우니이까!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여
내 영혼이 애타다가 지치옵나이다. ……
주의 궁전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 천 날보다 낫사오니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전의 문지기가 되오리이다. (시 84:1~10)
이토록 시인들에 의하여 아름다웁게 찬양되었던 궁전이 이제는 잿더미의 폐허로 변해버린 것이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 하리니…… (눅 19:43~44)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여 있을 수가 없었다. 성전과 도성이 파괴됨으로써 유대교는 그 가시적인 중심점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이다. 유대민족의 최대의 좌절이었다.
마가복음서 집필상황과 이스라엘민족의 애환
이런 상황에서 마가는 복음서를 썼다. 복음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쓴 책이 아니다. 당대의 크리스챤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전쟁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복음서의 저자들도 이 민족적 비극을 객화시켜서 담담하게 묘사할 뿐 자기내면의 상처와 아픔으로 그리고 있질 않다.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의 유대민족의 정치적 해방에 관심이 없었으며, 결국 자기민족인 유대인들의 몰이해와 박해 속에서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출현은 완전히 민족적 프라이드와 아이덴티티를 상실하고 좌절 속에 해체되어만 가고 있었던 유대인 커뮤니티 속에 새로운 민족적 구심점을 창출하려는 한 노력으로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예수를 진정한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로 그리려고 했다. 70년 대에만 해도 기독교는 유대교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유대교의 성취로서의 한 유대교적 신운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부정이 아닌 율법의 성취요 완성이었다.
예수에게는 메시아라는 자기인식이 없었다
일반 유대 민중에게 있어서 ‘메시아’의 일차적 의미는 그들에게 정치적 독립, 즉 이민족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다윗왕과 같은 역사적 인물이었다. 역사적 예수는 이러한 맥락에서의 ‘메시아’로서 자기인식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문제는 메시아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최후의 승리자이다. 그런데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메시아’ 라는 것은 일반 대중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메시아의 모습이었다. ‘죽는 메시아’(dying Messiah),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killed Messiah)는 상상키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에게는 이 ‘부활’(Resurrection)과 ‘재림’(Parousia)이라고 하는 문제가 흩어져가는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과 구원의 약속을 보장하는 새로운 가치로서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은 곧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파멸이 있기에 부활하신 예수는 이 지상에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러 오신다. 재림하실 예수를 영접할 준비를 하라! 깨어있으라! 이것은 케리그마적 선포인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 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人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 하리라… 주의하라! 깨어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막 13:24~33).
요한복음 속의 예수
나사렛의 예수는 물론 유대인이었다. 예수는 안식일을 지켰고,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잘 알았다. 그의 제자도 모두 유대인이었고, 그를 따르던 군중도 모두 유대인이었다. 그의 선교활동 전체가 팔레스타인 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예수는 유대인의 민족적 메시아는 될 수 없었다. 요한복음 속의 예수는 그를 심문하는 빌라도 총독에게 이와 같이 반문한다.
빌라도 총독: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죄인 예수: “나를 ‘왕’이라니, 그건 네 자신의 말이냐? 그렇지 않으면 딴 사람들이 들려준 말을 네 입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냐?”
빌라도 총독: “네가 날 유대인으로 알고 그따위 질문을 하는 거냐? 너를 왕이라고 고소한 놈들은 바로 네 동족들이다. 넌 도대체 그들에게 뭔 짓을 했느냐?”
죄인 예수: “네가 왕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그러한 맥락대로 내가 왕이라고 한다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도대체 싸워보지도 않고 포로가 되는 왕이 어디 있단 말이냐? 나의 왕국은 그 따위 것이 아니다. 나의 왕국은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빌라도 총독: “으흠~ 결국 넌 왕이라는 것을 암암리 과시하고 있군.”
죄인 예수: “‘왕’이라는 것은 네 말이지 내 말이 아니다! 나는 오로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진리의 편에 선 사람들은 내 소리를 알아들을 귀가 있다. 그들이야말로 나의 백성들이다.”
빌라도 총독: (비웃으며) “진리라니! 진리가 도대체 뭐냐?”(요 18:33~38; 다드의 의역 참고, C. H. Dodd, About the Gospels 33; 『요한복음강해』 436~7).
복음서 저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기독교는 매우 급속히 성장하였고, 빠른 속도로 유대교로부터 이탈하여갔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탈유대교의 트랙 위에 올려놓은 것은 사도 바울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지만,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 분리시킨 것은 예수 자신이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어디까지나 율법적 전통 속에서의 메시아였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교의 율법전통과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조금이라도 타협한다면 예수의 모든 메시지는 힘을 잃는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천국론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Stegemann, Library 231).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성장하면서 박해 속에서 성공의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그것은 역설적으로 유대교의 쇠락과 쇠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기독교가 그토록 처참하게 유대인을 박멸하던 로마제국의 국교로서 자리잡게 되면 유대교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유대교는 기독교를 저주한 종교로서 저주와 경멸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을 구약으로서 활용했지만, 유대민족의 신앙체계로서의 유대교에 관해서는 무관심했다. 아니, 이방인화 되어버린 기독교는 유대인과 유대교에 관하여 경멸감을 표시했다. 기독교는 이미 유대교의 성취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에, 성취의 전단계에 머물러 있는 유대교는 전혀 경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양반 밑에 있던 쌍놈이 더 쎈 양반이 되고 나면 원래 양반은 맥을 출 수가 없다. 그리고 로마세계에서 예수를 박해한 사람들로서, 기독교의 탄압자로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탄압의 대상이 되면 될수록 유대인의 심정 속에 기독교에 대한 원망은 깊어만 갔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속에 그려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위대한 문학가의 저속한 편견(Anti-Semitism)이라기보다는 당대 유대인에 대한 통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항(陋巷)에서 침 뱉고 따귀를 때려도 그들은 항변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반유대인 감정은 히틀러의 유대인학살에서 극치에 달했다.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반인륜적 야만행동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바르 코크바와 랍비 아키바
AD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도 로칼한 시나고그들은 유대교의 구심체로서 기능했고, 기독교 교회들도 특히 갈릴리지역에서는 번창해나갔다. 로마인들은 정치적 저항에는 가혹했지만 원칙적으로 유대인들이 유대교에 귀속되는 권리까지 침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AD 66~73년 사이의 제1차 독립전쟁시기에서 사두개인들은 많이 죽임을 당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내면적으로 결속하여 유대인 공동체의 정신적 토대를 오히려 공고히 다져나갔다. 미쉬나(Mishnah)와 탈무드(Talmud)를 중심으로 한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형성의 주축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AD 132년 하드리안 황제(Hadrian, AD 76~138, 재위 117~138)는 유대인의 할례와 일체의 거세를 금지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의 폐허 위에 쥬피터신전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그가 특별히 유대인을 자극시키려고 내린 명령은 아니었다. 그는 신체의 부위에 대한 손상이 죄악이라고 생각했고 신전건립도 도시재건의 한 프로젝트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격분했고 그 격분의 열기를 휘몰아 바르코크바(Simon Bar Kokhba, 또는 Bar Koziba)라는 지도자는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바르 코크바는 메시아로 자처했고 당대의 가장 존경받던 율법학자 랍비 아키바(Aqiba)도 그의 메시아됨을 인정했다. 민수기 24:17에 약속된 ‘별의 아들’이라고 환영했다. 기독교도들은 그가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르 코크바의 추종자들로부터 잔학한 박해를 받았다. 이 바르 코크바의 반란도 무시무시한 투쟁이었다. 결국 만 2년을 지속한 전쟁 동안 50개의 요새가 파괴되었고, 985개나 되는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50만이나 되는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바르 코크바는 전사하였고 랍비 아키바는 끔찍한 고문 속에 죽어 갔다. 그의 육신은 쇠빗으로 빗질을 당했다. 그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태연하게 신명기에 쓰인 모세의 말씀을 기도하듯 암송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나님은 야훼이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 6:4~5), 마지막 순간에 ‘오직 한 분’이라는 말을 길게 내뿜으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취했던 이러한 확고한 태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벅차게 만들었으며 율법을 중심으로 다시 모이게 만드는 내면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를 모조리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원로원 의결을 거쳐 135년부터 공식발효되었다. 예루살렘은 그 이름조차 사라지고 콜로니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Colonia Aelia Capitolina)라는 식민도시로 바뀌게 된다.
다이애스포라 신세
유대인은 또다시 자기 고향을 잃고 이역의 다이애스포라(Diaspora)에 살아야만 되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이 ‘떠돌이 신세’는 자그마치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the State of Israel)가 공표되기까지 1800여년 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김춘추가 당(唐)이라는 대국의 힘을 빌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되, 통일의 주체라는 신라까지 말아멕혔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도 예산에 가면 임존성(任存城)의 잔해가 남아있어 백제인들의 마지막 항쟁의 치열했던 함성이 메아리 친다.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을 비롯 수없는 왕족ㆍ대신ㆍ장사(將士)들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돌아갔고, 이세적(李世勣)은 보장왕을 비롯 다수의 귀족과 20여만 명의 고구려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무열왕 김춘추마저 같은 신세가 되었더라면? 우리 한민족은 일본으로 만주로, 대륙 각지로 흩어져 다이애스포라의 생활을 계속 했을 것이지만 과연 1,300년 후에 이 조선반도에 다시 한민족의 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만주의 여진이나 북방의 흉노만큼도 역사의 풍진에 이름 올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예수가 독사의 자식들이라 혹평한(마 3:7, 12:34, 23:33)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성전 중심의 유대교를 커뮤니티 센터인 시나고그 중심의 유대교로 민주화시키고, 율법의 보편주의와 신축성 있는 해석을 용인하고, 천국의 도래에 대한 확고한 종말론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성문법적 율법이 아닌 구전의 토라 전통을 인정하여, 구전에 기초한 새로운 미쉬나를 성립시키고 그 해석으로서의 탈무드를 형성시켰다. 이 미쉬나와 탈무드 전통이 랍비유대교와 모든 정통유대교(Orthodox Judaism)운동의 기초가 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에도 유대민족이 시나고그와 랍비체제 중심으로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유지해갈 수 있는 경건하고도 강력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미국이라는 뉴 월드(New World)의 출현이야말로 유대인들이 다이애스포라를 벗어나서 일반시민으로서 동화되어 모든 의무와 권익을 누릴 수 있는 최초의 장이었다.
미국과 유대인
현금의 세계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미국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더 막강하다. 이 지구의 역사에서 한 나라가 그토록 강성한 유례는 없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기에도 중국에는 한제국, 인도에는 쿠샨왕조가 있었고, 그리고 로마의 동점을 막고 있었던 파르티아제국(Parthian Empire)도 있었다.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미국이라고 한다면,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다. 이 세계는 실제로 유대인들에 의하여 지배 당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미국의 금융, 언론, 학술, 엔터테인먼트산업에 있어서 거의 독점적인 위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칼 맑스,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노암 촘스키, 스필버그, 소로스 …… 이 몇 이름만 들어도 우리는 최근세 유대인들의 성세를 짐작할 수 있다. 1800여 년의 다이애스포라의 통고(痛苦)가 역설적으로 오늘 그들의 천재성과 위세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야훼의 선민으로서 그들의 민족적 독선과 율법주의적 배타성이 오늘날 중동의 위기를 조장하고 끊임없이 인류에게 불안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면, 그리고 그들의 세계전략이 우파적 보수성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면, 참으로 유대인의 역사를 어떻게 관망해야 할지 난감한 일이다. 나 도올은 여기 힐구(詰究)치 아니 하겠으나 독자들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기나긴 역사를 같이 생각해보면서 그 배우고 버릴 점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 나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작품들에 대하여 특별한 매혹을 느낀다. 슈베르트의 B마이너 미완성교향곡이 그 나름대로 완성적 아름다움을 지닌 것처럼 미켈란젤로 미완성작품 또한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느낌을 던져준다. 통돌을 외면에서 내면으로 파들어가는 그의 놀라운 공간감각도 충격적이지만 그 모습이 던져주는 심리적 표현은 그것이 차가운 돌이 아니라 마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피에타’(Pieta)는 원래 연민(pity)을 뜻하는 이태리말이다. 피에타상은 십자가에서 끌어내린 아들 예수의 시체를 끌어안고 연민과 애통의 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엄마 마리아의 모습이다. 현재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보라! 예수의 시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내려다보고 있는 마리아는 청순하기 그지없는 너울에 가린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의 주름진 치마 위로 덧 놓인 예수의 시체를 풀어헤친 수의의 주름, 그 위로 못 구멍난 손발과 머리를 축늘어뜨리고 있는 청년 예수의 모습의 처절함은 보는 이에게 숙연한 감동을 아니 던질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24세의 작품(1499)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 천재성에 우리의 충격은 더 깊어진다. 그만큼 작가의 정신세계가 순결했던 것이다.
여기 이 미완성작품은 베드로성당의 작품과는 달리 십자가에서 끌어내린 시체를 세운 채 끌어안고 연민하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다. 예수의 성기까지 노출된 이 작품의 리얼리티는 사각으로 머리를 늘어뜨린 마리아의 고요한 슬픔의 표정에서 극치에 달하고 있다.
그런데 피에타상은 성서의 근거가 전혀 없다. 그것은 로마 농경사회의 토속신앙인 여신숭배와 결탁된 마리아컬트를 배경으로 프랑크왕국에서 발전되어 14세기 독일에서 최초로 등장한 예술창작양식이다. 그러나 그 피에타 이미지는 인간의 고뇌와 장엄미, 운명적 체념미를 드라마틱하게 전하면서 기독교적인 테마를 우리 삶의 리얼한 느낌으로 전위시키는 데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사실의 체계만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의 느낌의 축적태로서 오늘까지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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