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장구(萬章章句) 상(上)
1. 아버지를 원망하고 사모한 순임금
5a-1. 맹자의 수제자 만장【3b-5에 기출, 만장은 맹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지긋한 역사에 정통했다. 맹자가 만장과 역사ㆍ설화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은 곧 만장이 그 방면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이 맹자에게 물었다. “옛날에 순(舜)이 역산(歷山)에서 농사짓고 있을 때 밭에 나가면 만인을 연민하시는 저 푸른 가을 하늘님을 향해 호읍(號泣)하시었습니다【예로부터 말없이 우는 것을 곡(哭), 읍(泣)이라 하고, 말을 하면서 울부짖는 것을 호()號라고 했다. 호읍(號泣)이란 울면서 호소하는 것이다. ‘우(于)’를 ‘부른다[呼]’로 새기어, 호흡하여 하늘님을 부른다고 해석하는 설도 있는데 그것도 좋은 해석이다. 이상의 두 구절은 『서경』 「대우모」에도 보인다】. 그런데 순은 왜 호읍하시었습니까?” 萬章問曰: “舜往于田, 號泣于旻天, 何爲其號泣也?” 맹자께서 간결하게 대답하시었다: “원모(怨慕)하신 것이다【‘원모(怨慕)’를 조기와 주자는 ‘원(怨)’과 ‘모(慕)’의 두 가지 사태로 나누어 해석한다. ‘원’은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원망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모든 해석이 매우 도덕주의적이며 도식적이며 부자연스럽다. 원망은 당연히 자기를 증오하는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망하기 때문에, 또 원망의 대상이 부모이기 때문에 사모하는 것이다. ‘원모(怨慕)’는 분리된 두 사태가 아니라 하나의 복합된 감정을 표현한 말이며 미묘한 아이러니가 숨어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원모(怨慕)’는 반드시 하나의 연속된 개념으로서 해석해야 한다. 고주와 신주가 모두 너무 도식적이다. ‘원모(怨慕)’는 원망하면서 사모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모(慕)’라는 것은 어린이가 부모를 졸랑졸랑 따라다니면서 울고 보채기도 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 쓰였던 글자였다】.” 孟子曰: “怨慕也.” 만장이 말하였다: “증자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부 모님께서 날 사랑하여 주시면 기뻐하여 오래토록 잊지 말아야 하고, 부모님께서 날 미워하시더라도 미치지 못함을 근심할 뿐 원망하지는 않는다.’【원문에 증자의 말이라는 소리는 없다. ‘노이불원(勞而不怨)’은 『논어(論語)』 4-18 비슷한 맥락으로 나오고, 『예기』 「제의」 편에는 증자의 말로서 나오고 있다: ‘父母愛之, 喜而弗忘; 父母惡之, 懼而無怨.’ 그리고 같은 말이 또 『대대례기(大戴禮記)』 「증자대효(曾子大孝)」편에 실려있다. 물론 이 4구는 당시에 유행하던 고어(古語)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 장이 증자의 말로써 인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맹자가 이어서 증자의 제자인 공명고(公明高)의 견해로써 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순은 원망한 것이 아닐까요?” 萬章曰: “父母愛之, 喜而不忘; 父母惡之, 勞而不怨. 然則舜怨乎?”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옛날에 장식(長息)【공명고의 제자】이라는 자가 그의 선생 공명고(公明高)에게 물었다: ‘순이 들에 나가 밭을 갈면서 부모님을 봉양하는 수고를 했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만, 저 하늘님을 향해 부모님을 부르면서 울부짖으며 구슬피 흐느꼈다는 것에 관해서는 제가 뭔 까닭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曰: “長息, 問於公明高曰: ‘舜往于田, 則吾旣得聞命矣; 號泣于旻天, 于父母, 則吾不知也.’ 이에 대하여 공명고는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네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공명고의 이와 같은 대답은 대저 효자의 마음이란 근원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냉정하게 계산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公明高曰: ‘是非爾所知也.’ 夫公明高以孝子之心, 爲不若是恝,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모님을 봉양키 위해 밭을 갈았다. 그리고 공경되이 아들된 도리를 다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모님께서 날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으리오라고 냉정하게 무관심을 표명할 수 있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항상 효자의 마음에는 서린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我竭力耕田, 共爲子職而已矣, 父母之不我愛, 於我何哉? 제요(帝堯)는 아홉 아들과 두 딸로 하여금【아름다운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舜)에게 부인으로 동시에 주었다. 『상서(尙書)』 「요전(堯典)」과 『열녀전』에 나온다. 아홉 아들로 하여금 순을 섬기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상서』에 없으나 조기는 일실(逸失)된 『상서』 「순전(舜典)」의 서 부분에 실려있었다고 말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 「거사(去私)」편에는 요에게 10인의 아들이 있었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요(堯)’에게는 10인의 아들이 있었으나 제위를 그 아들에게 주지 않고 순에게 주었다[堯有子十人, 不與其子而授舜]】, 많은 가옥【‘백관(百官)’의 원래 의미는 관리가 아니라 궁실이다】과 많은 소와 양, 그리고 식량을 구비하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에서 순을 섬기게 하였다(순이 농사짓는 것을 돕게 하였다). 제요가 그렇게 하니까 천하의 많은 선비들이 순을 따르려고 하였다. 그러자 제요는 아예 천하를 통째로 순에게 선양하려 하였다【서(胥)=진(盡). 주희는 ‘서천하(胥天下)’를 ‘천하의 민심을 살핀다’로 해석했는데 나는 취하지 않는다】. 帝使其子九男二女, 百官牛羊倉廩備, 以事舜於畎畝之中. 天下之士多就之者, 帝將胥天下而遷之焉. 너무도 기뻐해야 할 순(舜)은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있질 못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곤궁한 사람이 갈길을 몰라 망연자실하듯 하였다. 천하의 선비들이 기쁜 마음으로 귀복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바라는 바이나, 그러한 것도 순의 근심을 걷지 못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처로 거느리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바라는 바이나, 임금의 아름다운 두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어도 그것이 순의 근심을 걷지는 못했다. 부(富)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바라는 바이나, 순은 천하라는 거대한 부를 보유하게 되었어도 그것이 결코 순의 근심을 걷지는 못했다. 귀(貴, 높은 지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바라는 바이나 순은 천자라는 가장 높은 지위를 얻었어도 그것이 결코 순의 근심을 걷지는 못했다. 爲不順於父母, 如窮人無所歸. 天下之士悅之, 人之所欲也, 而不足以解憂; 好色, 人之所欲, 妻帝之二女, 而不足以解憂; 富, 人之所欲, 富有天下, 而不足以解憂; 貴, 人之所欲, 貴爲天子, 而不足以解憂. 천하 선비들의 심복(心服), 호색(好色, 아름다운 여인), 부귀가 모두 순의 근심을 풀지 못하였으니, 오직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순의 근심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사람이 어려서는 부모를 따르고, 사춘기가 되면 아리따운 새악씨를 사모하며, 처자가 있게 되면 처자를 사랑하며, 벼슬자리에 나아가면 주군을 따르게 된다. 주군에게 잘못 보이게 되면 불안 초조해져서 몸속에서 열이 달아오른다. 人悅之, 好色, 富貴, 無足以解憂者, 惟順於父母, 可以解憂. 人少, 則慕父母; 知好色, 則慕少艾; 有妻子, 則慕妻子; 仕則慕君, 不得於君則熱中. 그러나 대표의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신토록 오직 부모만을 흠모하는 것이다. 오십 세가 되었어도 부모를 변함없이 흠모하는 사례는 나는 오직 위대한 순에게서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 |
공명고(公明高)는 증자의 제자라고 간주되고 있다. 『춘추』 경학사상 공양학의 개조로 알려진 공양고(公羊高)와 공명고(公明高)는 동일인이라고 많은 주석가들이 말하고 있고, 또 『설원(說苑)』 「수문(修文)」 29편에 나오는 ‘공맹자고(公孟子高)’도 같은 사람일 것이라는 견해를 제출한다. 타케우찌 요시오(武內義雄)는 『논어(論語)』에는 공명가(公明賈)라는 사람이 나오고 『맹자』에는 공명의(公明儀)ㆍ공명고(公明高)가 나오는데, 공명고(公明高)는 공명가(公明賈)의 후손이며, 공명의(公明儀)의 곤제(昆弟)일 것이라고 말한다. 공명고와 공명의가 모두 증자의 문인으로서 맹자가 존경한 인물일 것이라고 말한다. 공양학의 비조인 공양고(公羊高)는 본시 제나라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자하의 제자였다. 공양고는 그의 아들 평(平)에게, 평은 그의 아들 지(地)에게 지는 그의 아들 감(敢)에게 감은 그의 아들 수(壽)에게 『공양전』을 전했으며, 한 경제(景帝) 때 공양수(公羊壽)는 그의 제자이며 제나라 사람인 호무자(胡毋子)와 더불어 암송해왔던 『공양전』을 비로소 죽백(竹帛)에 옮겨 썼다고 한 다. 그러나 『공양전』이 반드시 제나라의 공양 패밀리에게만 전수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본시 『춘추』과 『춘추전』은 별도의 전승이었으며, 오늘날과 같이 하나의 책으로서 융합되어 있지 않았다. 노나라의 은공(隱公)으로부터 애공(哀公)까지 24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경문은 본래 있었던 것이고, 그 경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전승이 여러 갈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 남상(濫觴)은 역시 공자의 『춘추』에 대한 강론이었다. 그것이 자하를 통하여 제나라 공양가(公羊家)로 내려간 것도 있고, 증자를 통하여 노나라 공명가(公明家)로 내려간 것도 있었을 것이다. 맹자는 이 모든 흐름을 다양하게 섭렵했다고 보는 것이 나 도올의 입장이다.
순의 대효(大孝)를 이토록 감동적인 언설로서 어필시킨 문장은 선진경전(先進經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중용(中庸)』의 기술보다도 훨씬 더 철저하게 효가 강조되어 있다. 자사는 순의 대효(『중용』 17장)와 더불어 순의 지혜(『중용(中庸)』 6장)를 강조한다. 따라서 대효가 가장 중심된 테마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순의 효에 관하여 맹자처럼 구체적인 사례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논어(論語)』의 499장 중에서도 순이 언급된 것은 7장뿐이다. 그런데 『맹자』의 경우는, 260장 중에서 40장이 순에 관한 것이다. 요ㆍ순을 병칭하기는 하지만 요(堯)에 대해서는 특별한 변호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에 대해서는 극도의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만장」은 역사적 설화를 통하여 맹자가 추구하는 세계관을 재구성하려는 치밀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여기 순의 대효를 이와 같이 치열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그가 구성하려는 순이라는 역사적 가치체계의 관건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여기 「만장」편을 읽어나갈 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태는 맹자의 순에 대한 설화의 구성이 반드시 맹자가 살았던 당대의 통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가 여기 초장부터 이토록 대효를 강조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요가 순에게 제위를 선양했다는 역사적 행위를 정 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 정당화의 조건이 곧 대효였다. 맹자가 바라보는 유교의 핵심, 양(楊)ㆍ묵(墨)의 이단에 흔들릴 수 없는 유교의 핵심은 바로 친족주의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효의 사상이다. 이 효의 가장 지극한 형태인 대효를 구현하는 순이야말로 천하를 물려받을 수 있는 자격을 구비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효라는 덕성이 천하라는 외면적 사회를 차지할 수도 있는 내면적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극단적 표현이다. 내면적 가치를 사회적 가치와 일치시키고자 하는 맹자의 프로그램의 역사적 표현이 바로 순의 설화였다.
그런데 이 요ㆍ순의 설화는 기본적으로 공문과 맹자의 프로그램에 국 되는 장난일 수도 있다. 전국시대의 어느 학파도 이러한 요순설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도 공ㆍ맹설화에 사로잡혀 공ㆍ맹이 만들어낸 설화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형량할 수 있는 시각을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조금만 시각을 넓혀 전국시대의 문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순자는 말한다:
세속의 말 지어내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요ㆍ순이 모두 선양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대저 요ㆍ순이 선양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쌩거짓말이다. 그것은 천박한 사람들이 퍼뜨리는 말이며 고루한 사람들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世俗之爲說者曰: ‘堯舜擅讓.’ 是不然 ㆍ夫曰堯舜檀讓,是虛言也.是 淺者之傳, 陋者之說也. 「正論」편.
순자는 요순선양에 관한 구체적 반론의 사례를 들지는 않았다. 단지 제위를 선양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실제적 정황으로 볼 때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허황된 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문헌에 인용된 『죽서기년(竹書紀年)』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언급이 있다.
순은 요를 평양(平陽)에 가두어 버렸고 제위를 탈취해버렸다.
舜囚堯于平陽, 取之帝位.
『맹자』라는 문헌보다도 더 후대에 성립한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구인(求人)」 2편에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전제하는 것과는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편적 언급이 있다.
요임금이 순에게 천하를 전할 때에, 순에게 모두 무릎 꿇을 것을 제후들에게 명하였고, 두 딸을 부인으로 바치고 열 아들을 모두 신하로 삼게 하였고, 자기 자신은 순에게 북면하여 알현하였으니, 이것은 극도로 자신을 낮춘 것이다.
堯傳天下於舜, 禮之諸侯, 妻以二女, 臣以十子, 身請北面而朝之, 至卑也.
이것을 단순히 선양으로 보기보다는 순이 요를 강압적으로 제위를 물리게 하는 어떤 위무(威武)를 사용하였다는 배경적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죽서기년』에는 순이 요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요의 아들 단주(丹朱)까지 유폐시켜 부자의 정을 끊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쓰여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많은 전국시대의 문헌을 인용할 수 있으나 그러한 번잡스러운 논의는 생략키로 하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국시대의 일반통념은 순임금이 결코 평화적으로 제위를 선양받은 것이 아니며, 무력으로 탈취하였다는 충격적인 전승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칙령(AD 313)을 반포하여 기독교 를 공인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주님의 제13 사도로 칭송하면 서 그에게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를 선사하지만, 그는 로마역사상 가장 음흉하고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6명의 황제가 난립한 시기에 그 다신론적 사태를 1인의 황제체제 즉 유일신론적 사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당시의 황제는 신이었다) 기독교라는 유일신종교를 활용했을 뿐이다. 콘스탄티누스는 310년 자기 아내 파우스타의 아버지였던 선제(先帝)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를 죽였다. 2년 뒤인 312년에는 아내의 오빠인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밀비우스 다리에서 무찔러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다리 밑 테베레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한 시체를 다시 참수하여 그 대가리를 창끝에 꽂고 로마에 입성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몽의 계시가 가져온 승리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리고 325년에는 자기 이복누이의 남편인 정제(正帝) 리키니우스(Licinius)를 무찔렀다. 리키니우스는 일개 야인으로 은퇴하여 누이동생과 여생을 보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처음에는 리키니우스에게 데살로니카에서 은퇴생활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1년도 못 되어 반란음모를 구실 삼아 재판 없이 매제인 그를 사형 시켜 버렸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자기를 황제로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탁월한 장수였던 친아들, 부제(副帝) 크리스푸스(Crispus)를 갑자기 체포하여 이스트라반도 끝에 있는 풀라의 감옥으로 극비리에 호송해 버렸다. 아버지에게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는 그를, 로마제국의 제2인자, 황제(Crispus Caesar)였던 그를 가혹한 고문 끝에 처참한 모습으로 매장시켜 버렸다. 29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바로 자기 둘째 부인 파우스타(Fausta)와의 불륜이 그 이유였다. 첫째 부인의 소생인 크리스푸스는 파우스타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을 품었을 수는 있으나 꼭 불륜의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자기의 충직하기 그지없는 아들조차 황위의 라이벌로서만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파우스타가 황궁 안의 가족 전용의 김이 자욱한 욕실에 들어갔을 때 문이 철커덩 닫혔다. 끓는 물은 계속 퍼부어졌다. 황후 파우스타는 목욕하다가 사망했다고 공표되었다.
순이라는 인물도 이러한 교활한 인물이었다면 어떡할 것인가? 자기에게 많은 기회를 허락했던 제요(帝堯)에게, 그리고 두 부인의 아버지인 제요에게 등뒤에서 칼을 꽂은 비정의 권력쟁탈의 주인공이 순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중국역사의 향배를 어떻게 가늠질할 수 있을 것인가? 순에 관한 역사적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단지 「만장」편이 제시하고 있는 맹자의 순설화는 맹자에 의하여 강력하게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만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 논점의 강렬함의 배면에는 전국시대의 적나라한 현실이 깔려있다. 그 적나라한 현실 속에서 순설화의 진실도 전혀 도덕적인 윤색이 없는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백화노방하는 전국시대의 위대함이다. 그 다양한 사유의 갈래를 묵살하면서 맹자는 요순선양의 강력한 도덕적 설화를 각인시키면서 자신의 인의(仁義) 학설의 최종적 근거를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작렬하는 태양빛보다 더 강렬한 맹자의 아폴로지가 모든 다양한 역사적 해석을 잠재우고 결국 수천 년의 중국역사에 확고한 도덕적 흐름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 흐름의 설화적 시원이 바로 「만장」편이라고 이해하면 『맹자』라는 텍스트에 대한 정당한 이해방식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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