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급선무(急先務)
7a-46.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지자(知者)는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박학(博學)해야 하겠지마는 당연히 힘써야 할 것을 급선무(急先務)로 해야 되기 때문에 모르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인자(仁者)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인자해야 하겠지마는 현자를 친애(親愛)하는 것을 급선무로 해야 되기 때문에 소홀히 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 7a-46. 孟子曰: “知者無不知也, 當務之爲急; 仁者無不愛也, 急親賢之爲務. 그래서 요ㆍ순과 같은 위대한 지자(知者)라도 모든 사물을 두루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은 선무를 급히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요, 堯ㆍ舜之知而不徧物, 急先務也; 또 요ㆍ순과 같은 위대한 인자(仁者)라도 모든 사람을 두루 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은 현자(賢者)를 친애(親愛)하는 것을 급선무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堯ㆍ舜之仁不徧愛人, 急親賢也. 대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가장 소중한 3년상을 실행하지도 못하면서, 시마(緦麻) 3개월 복상이나 소공(小功) 5개월 복상 문제에 관하여 꼬치꼬치 따지고 있다든가, 큰 입으로 밥을 마구 처먹고 국을 훌훌 마시면서 줄줄 흘려대면서 어른 앞에서 마른 고기를 질겅질겅 씹어댄다고 꼬치꼬치 따지는 것은【『예기』 「곡례(曲禮)」 상에 보면 젖은 고기는 이빨로 씹어 자르지만, 마른 육포고기는 이빨로 씹어 자르지 않고 손으로 찢어 먹어야 예법에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른 앞에서 마른 고기를 질겅질겅 씹어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본무(本務)를 알지 못한다고 일컫는 것이니 본말선후(本末先後)를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不能三年之喪, 而緦小功之察; 放飯流歠, 而問無齒決, 是之謂不知務.” |
중국 고대의 상복(喪服) 제도로서 오복(五服)이 있다. 죽은 자의 친소관계에 따라서 거상 기간에 차이를 두는 것으로 참최(斬衰ㆍ재최(齊衰)ㆍ대공(大功)ㆍ소공(小功)ㆍ시마(緦麻)의 오복(五服)이 있다. 참최는 3년, 재최는 3년 혹은 1년, 대공은 9개월 또는 7개월, 소공은 5개월, 시마는 3개월의 기간이 된다. 시마는 아주 고운 마사(麻絲)로 짠 천이며 평복 같이 가볍다. 그러나 참최로 갈수록 점점 거칠어진다. ‘공(功)’은 사람 손의 수공(手功)이 들어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의 상복일수록 거칠고 무겁고 입기가 괴롭다. 그만큼 슬픈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꼭 해야 할 일을 먼저 실천하는 것이다. 말초적인 것에 신경을 쓰면서 꼭 해야 할 중요한 삶의 기본을 망각하고 사는 자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지식의 추구도 마찬가지요, 도덕적 실천의 행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말과 경중(輕重)을 가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대인(大人)이란 결국 이러한 경중을 가릴 줄 아는 시중(時中)의 대가들이다.
『대학』 제2장에도 이런 말이 있다: ‘물(物)에는 뿌리와 가지가 있고, 사(事)에는 끝과 처음이 있다. 그 선ㆍ후를 가릴 줄 알아야만 근원적인 도를 깨닫는 데로 가깝게 다가갈 수가 있는 것이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나의 『대학ㆍ학기한글역주』, PP,272~3), 그리고 『논어(論語)』에 자하의 말로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이 있다(19-11): ‘큰 도덕의 울타리를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작은 도덕의 소절은 출입이 있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大德不踰閑, 小德出入可也].’
인생이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지식도 인문과학의 근원을 확립하지 못하면 평생을 말초적 유혹에 시달리며 방황하며 항담췌언(巷談贅言)만을 뇌까리 다 죽어간다. 도덕의 위대함도 본말에 대한 결단(Entscheidung)에서 우러나 오는 것이다. 맹자의 언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로서 끊임없이 다가온다.
▲ 사의재(四宜齋), 강진읍성 동문밖 주막집. 다산은 유배시기 초기 (1801~1805)를 여기서 보냈다. ‘생각은 담박하게 하고[思宜澹], 외모는 장중하게 하고[貌宜莊], 말은 절제하고[言宜訒], 신중하게 해야한다[動宜重]’는 자잠(自箴)의 뜻으로 자기 거처를 이름지었다. 다산의 유배는 정조가 승하한 후 벽파(僻派)가 다시 득세하면서 닥친 비극이었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지성사의 큰 축복이었다. 외면적으로 천주학에 대한 탄압이 그 명분이었는데, 사실 정약용은 그의 형제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기는 하였지만 천주학을 자기 신앙으로 수용하기에는 유학에 대한 신념이 너무 강했다. 그러나 그만큼 더 처절하게 유학의 본질에 파고들기 시작한다. 조선왕조에서 유례를 보기 힘든 학문의 기나긴 여정이 바로 이 주막집에서 시작된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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