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절요서(三國史節要序)
서거정(徐居正)
춘추필법을 따른 역사서와 그렇지 않은 역사서
自古有天下國家者皆有史, 唐虞有唐虞之史, 三代有三代之史. 至於列國, 晉之『乘』, 楚之『擣杌』, 魯之『春秋』, 皆其國史也. 吾夫子因唐虞三代舊史, 删定爲書, 又因魯史, 作『春秋』, 此史家編年之權輿也.
司馬遷始變古作『史記』, 立紀傳表志, 『春秋』之法始壞. 班ㆍ范因之作『漢』ㆍ『書』, 歷代撰史者, 謂遷有良史之才, 踵而不廢, 『春秋』之法再壞矣.
司馬公, 推本筍悅『漢紀』, 作『資治通鑑』, 始復『春秋』之舊, 朱子作『綱目』, 深得聖人筆削之微旨.
自此以後, 李燾之『長編』, 溫公之『資治』也, 陳桱之『續編』, 朱子之『綱目』也, 脫脫之全史, 班固之『漢書』也.
전사(全史)는 의미가 있다
嗚呼! 以『春秋』之法論之, 馬氏變古之體, 不得辭其責, 以後世論之, 全史之作, 小大不損, 本末該備, 誠史家之要領也. 然則有全書, 而無『長編』ㆍ『綱目』, 不可也, 有『長編』ㆍ『綱目』, 而無全史, 亦不可也, 要皆三者並行而不悖矣.
찬란한 삼국시대와 미비한 역사서
吾東方檀君立國, 鴻荒莫追, 箕子受周封, 八條之敎, 有存神之妙. 當時必有掌故之官, 記動記言矣, 而今無所存, 良可嘆已. 衛滿盜竊, 箕準奔竄, 漢置四郡ㆍ二府, 國勢中絶矣. 三韓間起, 然無君臣上下之分, 安有載籍之可傳者乎.
新羅始祖赫居世始興, 越二十年, 而高句麗始祖朱蒙立, 又二十年, 而百濟始祖溫祚立, 各有民社, 鼎足之勢成矣. 雖其昧於善隣之道, 干戈日尋, 生靈塗炭, 然新羅三姓相傳, 仁厚爲政, 歷年幾一千. 高句麗雄據遼東, 國富兵強, 敵慕容, 拒齊ㆍ梁, 抗隋ㆍ唐百萬之師, 天下稱其雄強, 歷年又踰六百. 百濟專尙詐力, 好兵樂禍, 雖傳世不及二國, 而尙餘五百年. 非南北朝ㆍ五季僭君僞主旋得旋失之比也.
獨惜乎當時無良史, 後世不善守, 史籍之存, 僅百中之一二, 雖使遷ㆍ固復生, 亦難於著述矣, 况其下者乎?
삼국사기와 동국사략 비평
金富軾法陳壽『三國志』, 撰『三國史』. 患其文籍殘缺, 本末無稽, 則採摭中國諸書, 或補或證之, 已非實錄矣. 至聘問ㆍ侵伐ㆍ災異等事, 以一事而疊書於彼此, 頗傷重複, 况取舍是非, 筆削凡例, 亦未盡合宜, 識者病之. 權近法『綱目』作『史略』, 患其三國並峙, 莫適爲主, 則以新羅先起後滅而爲主.
臣竊攷魏ㆍ吳ㆍ蜀三國之例, 溫公之以魏爲主, 重承授也, 朱子之以蜀爲主, 尊正統也. 今以先起後滅爲主, 考之前史而無據, 揆之事理而不順. 且『史略』, 編年之書也, 乃以一人之終始, 而幷書於書卒之下, 一事之顚末, 而幷錄於類附之間, 年月無繫, 頗失記事之體. 然富軾作全史於掇拾斷爛之中, 權近作史略於繁冗瑣屑之餘, 功亦不細矣.
임금의 명으로 역사서를 짓게 하다
恭惟, 世祖惠莊大王, 躬睿智之聖, 敷文明之治, 留神經史, 恢弘大猷. 慨念三國之史未盡得體, 開史局, 集文士撰之, 編摩未訖, 遽違羣臣. 今我殿下光紹丕基, 欽承先志, 命領敦寧府事臣盧思愼ㆍ吏曹參判臣李坡曁臣居正, 趣令撰畢. 臣等本乏三長之才, 何能仰稱睿旨?
체제와 특징
第取舊史及『史略』, 兼採『遺事』ㆍ『殊異傳』作長編, 凡例一依『資治通鑑』. 但『資治』起周迄五季, 轇輵數十代行事之跡, 故謂之通鑑, 今是編, 止於三國, 故名曰: “三國史節要.”
且『資治』卷首, 必稱某紀, 今『節要』, 不稱紀者. 三國勢均力敵, 不可主一而名之, 立國有先後, 亡國有遲速, 又不可以一國二國三國, 而屢更其名, 是以法朱子『綱目』之例, 而不稱紀也.
新羅獨存, 則用其年紀事, 三國並峙, 則分註以列書, 明其爲敵國也. 先新羅, 次麗次濟, 從立國先後也, 每年, 必先書中國, 尊天子也. 新羅自用年號, 抑而不書, 黜其僭也, 三國稱君, 或名或號或諡, 存其實也. 王妃, 或稱夫人, 或稱王后; 世予, 或稱太子, 或稱元子. 其官職, 或冒擬中國; 其名號, 或因循舊俗. 皆據事直書, 而美惡自見, 至如荒怪之事, 方言俚語, 去其太甚, 存其太略者, 不可輕改舊史, 而且以著風俗世道之淳厖爾.
盖是編, 起自赫居世元年, 終於敬順王九年, 凡九百九十二年, 勤成一十四卷. 雖其本史踈漏, 撰述未盡詳悉, 然於其間, 君主之昏明, 國勢之強弱, 運祚之長短, 亦可槩見矣.
참람되게 지었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입니다
臣又嘗聞: ‘班固欺司馬, 范曄欺班固.’ 此實史家之通患. 以臣等蕪拙, 非不知貽笑於後史也, 適承隆委, 不可闇無著述. 僅用管見, 妄加删定, 極知狂僭無所逃罪. 然其文則溫公之遺法, 其意則『春秋』ㆍ『綱目』之遺旨, 其於上裨乙夜之覽觀, 下淑來學之講明, 亦未必無少補云, 蒼龍丙申. 『四佳文集』 卷之四
해석
춘추필법을 따른 역사서와 그렇지 않은 역사서
自古有天下國家者皆有史, 唐虞有唐虞之史, 三代有三代之史.
예로부터 천하국가에는 모두 역사서가 있었으니 요순에겐 요순의 역사서가 있었고 하은주 삼대엔 삼대의 역사서가 있었습니다.
至於列國, 晉之『乘』, 楚之『擣杌』, 魯之『春秋』, 皆其國史也.
열국(列國)에 이르면 진(晉) 나라의 『승(乘)』과 초(楚) 나라의 『도올(擣杌)』과 노(魯) 나라의 『춘추(春秋)』가 모두 그 나라의 역사서입니다.
吾夫子因唐虞三代舊史, 删定爲書, 又因魯史, 作『春秋』, 此史家編年之權輿也.
우리 부자께서 요순과 삼대의 옛 역사서를 따라 깎아내고 정리하여 책을 지었고 또 노나라 역사서를 따라 『춘추(春秋)』를 지었으니 이것이 역사가의 편년체의 시작입니다.
사마천이 처음으로 옛 편년체를 바꾸어 『사기』를 지어 기(紀), 전(傳), 표(表), 지(志)를 세우니, 『춘추』의 편년체가 비로소 무너졌습니다.
班ㆍ范因之作『漢』ㆍ『書』, 歷代撰史者, 謂遷有良史之才, 踵而不廢, 『春秋』之法再壞矣.
반고(班固)와 범엽(范曄)이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를 지었고, 역대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사람들이 사마천이 좋은 역사가의 자질이 있다고 여기며 따라서 없애지 않으니 『춘추』의 편년체가 다시 무너졌습니다.
司馬公, 推本筍悅『漢紀』, 作『資治通鑑』, 始復『春秋』之舊, 朱子作『綱目』, 深得聖人筆削之微旨.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순열(荀悅)의 『한기(漢紀)』【후한 말에 순열(荀悅)이 『한서』의 내용을 『춘추』의 편년체 형식으로 재편하여 만든 역사서이다.】를 저본으로 미루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으니 비로소 『춘추』의 옛 필법이 회복되었고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지으니 깊이 성인의 가필하고 산삭한 미세한 뜻을 터득한 것입니다.
自此以後, 李燾之『長編』, 溫公之『資治』也, 陳桱之『續編』, 朱子之『綱目』也, 脫脫之全史, 班固之『漢書』也.
이로부터 이후로 이도(李燾)의 『자치통감장편(資治通鑑長編)』은 사마온공의 『자치통감』을 본받은 것이었고 진경(陳桱)의 『통감속편(通鑑續編)』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본받은 것이었고 탈탈(脫脫)의 전사(全史)【원(元)나라 우승상 탈탈(脫脫) 등이 편찬한 『송사(宋史)』 등을 가리킨다.】는 반고의 『한서』를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전사(全史)는 의미가 있다
嗚呼! 以『春秋』之法論之, 馬氏變古之體, 不得辭其責, 以後世論之, 全史之作, 小大不損, 本末該備, 誠史家之要領也.
아! 『춘추』의 필법으로 논하자면 사마천이 옛 편년체를 바꿨으니 그 책임을 사양할 수 없고 후대의 기준으로 논하자면 전사(全史)의 작품은 작든 크든 덜지 않고 본질적이든 지엽적이든 두루 갖추었으니 진실로 역사가의 요긴한 것입니다.
然則有全書, 而無『長編』ㆍ『綱目』, 不可也, 有『長編』ㆍ『綱目』, 而無全史, 亦不可也, 要皆三者並行而不悖矣.
그러하더라도 전서(全書)만 있고 『속자치통감장편』과 『자치통감강목』이 없는 것도 안 되고 『속자치통감장편』과 『자치통감강목』만 있고 전사(全史)가 없는 것도 또한 안 되니 요컨대 세 가지가 아울러 유행하며 없어져선 안 되는 것입니다.
찬란한 삼국시대와 미비한 역사서
吾東方檀君立國, 鴻荒莫追, 箕子受周封, 八條之敎, 有存神之妙.
우리나라는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운 일은 아득하여 추억해볼 수 없고, 기자(箕子)가 주나라의 책봉을 받은 일과 팔조법금(八條法禁)의 교화한 일은 존신(存神)【과화존신(過化存神): 과화란 성인은 덕이 성대하여 지나가는 곳은 사람들이 모두 그에 감화된다는 뜻이고, 존신이란 성인이 마음에 보존하고 있는 것은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의 오묘함이 있었습니다.
當時必有掌故之官, 記動記言矣, 而今無所存, 良可嘆已.
당시엔 반드시 옛 것을 담당한 관리가 있어 움직임과 말을 기록했겠지만 지금 보존된 것이 없으니 진실로 한탄할 만할 뿐입니다.
위만(衛滿)이 훔치자 기준(箕準)이 달려 망명했고, 한(漢)나라가 사군(四郡)과 이부(二府)를 설치하니【『삼국유사』에 의하면, 한사군(漢四郡)이 없어진 뒤에 그 자리에 설치한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와 동도도위부(東部都慰府)를 말한다.】 나라의 권세가 도중에 끊겼습니다.
三韓間起, 然無君臣上下之分, 安有載籍之可傳者乎.
삼한(三韓)이 중간에 일어났지만 임금과 신하의 상하 분별이 없었으니 어찌 문서에 실어 전할 만한 게 있었겠습니까?
新羅始祖赫居世始興, 越二十年, 而高句麗始祖朱蒙立, 又二十年, 而百濟始祖溫祚立, 各有民社, 鼎足之勢成矣.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막 일어났고 20년이 흘러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세웠고 또 20년이 흘러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세워 각각 백성과 사직을 두니, 솥발의 형세가 완성되었습니다.
雖其昧於善隣之道, 干戈日尋, 生靈塗炭, 然新羅三姓相傳, 仁厚爲政, 歷年幾一千.
비록 이웃나라와 잘 지내는 도리에 어두워 전쟁이 날로 이어져 백성이 도탄에 빠졌지만 신라의 세 성씨가 서로 전하며 인후(仁厚)함으로 정치를 하여 세월을 지낸 것이 거의 일 천년이었습니다.
高句麗雄據遼東, 國富兵強, 敵慕容, 拒齊ㆍ梁, 抗隋ㆍ唐百萬之師, 天下稱其雄強, 歷年又踰六百.
고구려는 요동(遼東)에 웅거하니 나라는 부유하고 군대는 강성해서 모용(慕容)에 대적하고 제(齊)나라와 양(梁)나라를 막았으며 수(隨)나라와 당(唐)나라의 백만 군사에 대항하여 천하가 그 강성함을 일컬었고 세월을 거친 것이 또한 600년을 넘었습니다.
百濟專尙詐力, 好兵樂禍, 雖傳世不及二國, 而尙餘五百年.
백제는 오로지 거짓과 힘을 숭상해 전쟁을 좋아하고 재앙을 즐겼으니 비록 대대로 전해준 것이 두 나라엔 미치진 못하더라도 오히려 500여년이나 되었습니다.
非南北朝ㆍ五季僭君僞主旋得旋失之比也.
그러니 남북조(南北朝)【동진(東晉)이 망한 뒤 대략 420년에서 589년 사이에 중국 남부 지방에 세워졌던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 등을 남조라 하고, 비슷한 시기에 중국 북부 지방에 세워졌던 북위(北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을 북조라 하는데, 이들을 합쳐서 남북조라 한다. 이들은 나중에 수(隋)나라로 통일되었다.】 시대나 오계(五季)【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일어나기 전인 907년부터 959년까지 후양(後粱),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가 이어서 명멸하였는데, 이 오대(五代)를 오계라 한다.】 때의 참람된 임금이나 거짓된 임금이 잽싸게 얻었다가 잽싸게 잃는 것에 비교할 건 아닙니다.
獨惜乎當時無良史, 後世不善守, 史籍之存, 僅百中之一二, 雖使遷ㆍ固復生, 亦難於著述矣, 况其下者乎?
다만 애석한 것은 당시에 좋은 역사가 없었고 후대엔 잘 지켜진 게 없으며 역사서의 남은 것은 겨우 100 중에 1~2개 정도이니 비록 사마천이나 반고에게 다시 태어나게 하더라도 또한 저술하게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이들이라면 오죽하겠습니까?
삼국사기와 동국사략 비평
김부식(金富軾)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본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했습니다.
患其文籍殘缺, 本末無稽, 則採摭中國諸書, 或補或證之, 已非實錄矣.
문서가 빠져 본말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을 걱정하여 중국의 여러 책을 채집하여 혹 보충하기도 혹 증명하기도 했지만 이미 실록이 아닌 것입니다.
至聘問ㆍ侵伐ㆍ災異等事, 以一事而疊書於彼此, 頗傷重複, 况取舍是非, 筆削凡例, 亦未盡合宜, 識者病之.
빙문(聘問)과 침벌(侵伐)과 재이(災異) 등의 일에 이르면 하나의 일을 저기나 여기에 중첩되어 적어 매우 중복됨에 문제가 있으며 더구나 옳고 그름을 취사함에 범례를 가필하고 산삭한 것이 또한 모두 합당치 않으니 아는 이들은 그걸 병폐로 여겼습니다.
權近法『綱目』作『史略』, 患其三國並峙, 莫適爲主, 則以新羅先起後滅而爲主.
권근(權近)이 『자치통감강목』을 본받아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었는데, 삼국이 아울러 섰는데 주인공으로 삼기에 맞지 않아 신라가 먼저 일어났고 늦게 멸망했기 때문에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臣竊攷魏ㆍ吳ㆍ蜀三國之例, 溫公之以魏爲主, 重承授也, 朱子之以蜀爲主, 尊正統也.
신이 삼가 위(魏)나라와 오(吳)나라와 촉(蜀)나라 삼국의 예를 고찰하면 사마온공이 위나라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승수(承授)를 중시한 것이고, 주자가 촉나라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정통(正統)을 중시한 것입니다.
今以先起後滅爲主, 考之前史而無據, 揆之事理而不順.
지금 먼저 일어나고 늦게 멸망한 것으로 주인공을 삼은 것은 전의 역사서를 고찰해도 근거가 없고 일의 이치를 헤아려도 순전치 못합니다.
且『史略』, 編年之書也, 乃以一人之終始, 而幷書於書卒之下, 一事之顚末, 而幷錄於類附之間, 年月無繫, 頗失記事之體.
그리고 『동국사략』은 편년체 역사서인데, 한 사람의 처음과 끝을 책의 끝에 병기했고 한 가지 일의 전말은 부류대로 기록한 사이에 병기하니 기간이 연계되질 않아 매우 기사(記事)의 체제를 잃었습니다.
然富軾作全史於掇拾斷爛之中, 權近作史略於繁冗瑣屑之餘, 功亦不細矣.
그러나 김부식은 사라진 가운데서 긁어 모아 『삼국사기』를 지었고 권근은 번잡하고 쓸데없고 잗다란 역사의 나머지에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었으니 공이 또한 작진 않습니다.
임금의 명으로 역사서를 짓게 하다
恭惟, 世祖惠莊大王, 躬睿智之聖, 敷文明之治, 留神經史, 恢弘大猷.
공손히 생각하기로 세조혜장대왕(世祖惠莊大王)께선 슬기로운 지혜의 성스러움을 몸소 행하고 문명의 다스림을 펴시며 경전과 역사서에 정신을 머물며 큰 계책을 넓히고 넓히셨습니다.
慨念三國之史未盡得體, 開史局, 集文士撰之, 編摩未訖, 遽違羣臣.
삼국의 역사서가 다 체제를 얻지 못함을 개탄하시며 사국(史局)을 열어 문사를 모아 편찬케 하셨지만 편찬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여러 신하를 저버리셨습니다.
今我殿下光紹丕基, 欽承先志, 命領敦寧府事臣盧思愼ㆍ吏曹參判臣李坡曁臣居正, 趣令撰畢.
지금 우리 전하께서 큰 기초를 밝게 잇고 선왕의 뜻을 공경히 이어서, 영돈녕부사 신 노사신(盧思愼)과 이조 참판 신 이파(李坡) 및 거정에게 재촉하여 편찬을 다하게 명하셨습니다.
臣等本乏三長之才, 何能仰稱睿旨?
신하 등은 본래 삼장(三長)【역사를 기술하는 자가 겸비해야 할 세 가지 특장인 재주[才], 학문[學], 식견[識]을 말한다.】의 재주에 부족하니 어찌 임금의 뜻에 앙모하며 알맞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체제와 특징
第取舊史及『史略』, 兼採『遺事』ㆍ『殊異傳』作長編, 凡例一依『資治通鑑』.
다만 옛 역사서 및 『동국사략』을 취하고 아울러 『삼국유사』와 『수이전(殊異傳)』에서 채집하여 장편(長編)을 짓고, 범례는 한결같이 『자치통감』에 의거했습니다.
但『資治』起周迄五季, 轇輵數十代行事之跡, 故謂之通鑑, 今是編, 止於三國, 故名曰: “三國史節要.”
『자치통감』은 주나라에서 오계에 이르는 수십 대의 행사한 자취가 뒤섞였기[轇輵] 때문에 ‘통감(通鑑)’이라 했지만 지금 이 편서는 삼국에 그쳤기 때문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라 이름했다.
且『資治』卷首, 必稱某紀, 今『節要』, 不稱紀者.
그리고 『자치통감』은 권수(卷首)에 반드시 모기(某紀)【『자치통감』에서는 권수(卷首)마다 왕조명을 기록하였는데, 이를테면 주기(周紀), 진기(秦紀), 한기(漢紀), 당기(唐紀) 같은 표기를 말한다.】를 일컬었지만 지금 『삼국사절요』는 모기를 일컫지 않았습니다.
三國勢均力敵, 不可主一而名之, 立國有先後, 亡國有遲速, 又不可以一國二國三國, 而屢更其名, 是以法朱子『綱目』之例, 而不稱紀也.
삼국의 형세는 고르고 힘은 대등해서 주인공을 하나로 하여 명명하기 불가했고 나라를 세움에 선후가 있고 나라 망함에 느리고 빠름이 있으며 또한 일국이라 이국이라 삼국이라 자주 이름을 바꾸는 건 불가했기 때문에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예를 본받고, 모기(某紀)를 일컫지 않았습니다.
新羅獨存, 則用其年紀事, 三國並峙, 則分註以列書, 明其爲敵國也.
신라만 홀로 있을 적엔 신라의 년기(年紀)의 일을 썼고 삼국의 정립할 적엔 주(註)로 나누어 나열해 적어 대등한 나라가 됨을 밝혔습니다.
先新羅, 次麗次濟, 從立國先後也, 每年, 必先書中國, 尊天子也.
신라를 앞세웠고 고구려를 다음에 신라를 다음에 둔 것은 나라를 세운 선후에 따른 것이고 매해 반드시 중국을 먼저 서술한 것은 천자를 존중한 것입니다.
新羅自用年號, 抑而不書, 黜其僭也, 三國稱君, 或名或號或諡, 存其實也.
신라가 스스로 연호를 쓰긴 했지만 억눌러 쓰지 않은 것은 참람됨을 물리치려 해서이고 삼국이 임금을 호칭함에 혹은 이름으로, 혹은 호로, 혹은 시호로 했던 것은 실질을 보존하려 해서입니다.
王妃, 或稱夫人, 或稱王后; 世予, 或稱太子, 或稱元子. 其官職, 或冒擬中國; 其名號, 或因循舊俗.
왕비를 혹은 부인이라 말하고 혹은 왕후라 하며, 세자를 혹은 태자라 말하고 혹은 원자라 말한다. 관직은 혹 중국의 것을 모방하였고 이름과 호는 혹 옛 풍속에 따라 했습니다.
皆據事直書, 而美惡自見, 至如荒怪之事, 方言俚語, 去其太甚, 存其太略者, 不可輕改舊史, 而且以著風俗世道之淳厖爾.
다 사실에 근거하여 곧바로 써서 아름다움과 추함이 스스로 드러나게 했지만 황당하고 허탄한 일과 사투리나 속된 말 같은 경우는 너무 심한 건 제거했고 너무 대략적인 것은 보존되었으니 가벼이 옛 역사서를 고칠 수 없어서이고 또한 풍속과 세도의 순박하고 두터움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盖是編, 起自赫居世元年, 終於敬順王九年, 凡九百九十二年, 勤成一十四卷.
대체로 이 편서는 혁거세 1년(기원전 57)으로부터 시작하여 경순왕 9년(935, 고려 태조18)에서 마쳤으니 모두 992년간이며 총 14권입니다.
雖其本史踈漏, 撰述未盡詳悉, 然於其間, 君主之昏明, 國勢之強弱, 運祚之長短, 亦可槩見矣.
본사(本史)가 소략하여 찬술함이 다 상세하진 못하지만 그 사이에 군주의 어리석음과 현명함이나 나라 형세의 강함과 약함이나 국운의 장단이 또한 대략 볼 만합니다.
참람되게 지었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입니다
臣又嘗聞: ‘班固欺司馬, 范曄欺班固.’ 此實史家之通患.
신은 또한 일찍이 듣기로 ‘반고는 사마천을 숙였고 범엽은 반고를 속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론 역사가의 통하는 우환입니다.
以臣等蕪拙, 非不知貽笑於後史也, 適承隆委, 不可闇無著述.
신하 등은 거칠고 졸렬함에도 후대 역사에 비웃음 당할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마침 융성한 위촉을 이어 숨어서 저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僅用管見, 妄加删定, 極知狂僭無所逃罪.
겨우 좁은 식견[管見]을 사용해 망령되이 산정함을 더했으니 매우 미친 참람됨으로 죄를 도망칠 게 없음을 압니다.
然其文則溫公之遺法, 其意則『春秋』ㆍ『綱目』之遺旨, 其於上裨乙夜之覽觀, 下淑來學之講明, 亦未必無少補云, 蒼龍丙申. 『四佳文集』 卷之四
그러나 문장은 사마온공의 남은 법이고 뜻은 『춘추』와 『자치통감강목』의 남은 뜻이니 주상에겐 저녁 9~11시에 보실 때 보탬이 있을 것이고 아래로는 올 학자들이 강학의 분명함에 도움이 됨에 또한 반드시 조금의 보탬이 없진 않을 것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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