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③
또 한 번은 가도(賈島)가 이응(李凝)의 유거(幽居)를 찾아가다가 다음의 시구를 얻었다.
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 | 새는 연못 가 나무에서 잠들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미누나. |
그리고는 ‘퇴(推)’로 할까 ‘고(敲)’로 할까 결정치 못하고, 손짓발짓하며 가다가 그만 경조윤(京兆尹) 한유(韓愈)의 수레를 가로 막고 말았다. 좌우의 하인들이 가도(賈島)를 한유(韓愈) 앞에 무릎 꿇게 하고 힐문하니, 가도(賈島)가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수레를 멈추고 한참을 서 있던 한유(韓愈)는 “고자(敲字)가 낫겠네[作敲字佳矣]”하고는, 함께 돌아가 시도(詩道)를 논하며 포의(布衣)의 사귐을 맺었다. 그리고는 아예 중노릇을 그만 두고 과거에 응시케 하였다.
두 글자가 다 좋지만, ‘퇴(推)’라 하면 문을 그저 삐꺽 하고 밀며 들어가는 것이니 이응(李凝)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음이요, ‘고(敲)’라 하면 똑똑 노크하는 것이니 서로 약속이 없는 불시의 방문이 된다. 못 가에 새도 잠든 밤의 적막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과연 삐꺽하고 문을 미는 소리보다는,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똑똑 소리가 더 어울림직하다. 「상소잡기(湘素雜記)」에 전한다.
그런데 청 왕부지는 『강재시화(薑齋詩話)』에서 이 일을 두고 이렇게 톡 쏘았다.
달빛 아래 스님이 문을 두드린다는 가도의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은 단지 망상으로 억탁한 것일 뿐이니, 마치 다른 사람의 꿈을 말하는 격이다. 설령 형용이 거의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마음을 끌어낼 수 있겠는가? 왜 그런고 하니, 그 ‘퇴(推)’와 ‘고(敲)’ 두 글자를 깊이 읊조리는 것은 바로 그가 생각으로 짓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경과 만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면 ‘퇴(推)’든지 ‘고(敲)’든지 반드시 어느 하나일 뿐일 것이다. 경을 인하고 정에 따른다면 자연스레 영묘하게 되니 어찌 수고로이 따져 의논하겠는가? “장하(長河)로 떨어지는 해가 둥글다[長河落日圓]”는 애초 정해진 경이 없었고, “물 건너 나무꾼에게 물어본다네[隔水問樵夫]”는 처음부터 생각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곧 선가(禪家)에서 이른바 ‘현량(現量)’이라는 것이다.
僧敲月下門, 祗是妄想揣摩, 如說他人夢. 縱令形容酷似, 何嘗毫髮關心? 知然者, 以其沈吟推敲二字, 就他作想也. 若卽景會心, 則或推或敲, 必居其一. 因景因情, 自然靈妙, 何勞擬議哉? 長河落日圓, 初無定景; 隔水問樵夫, 初非想得. 則禪家所謂現量也.
가도가 이 글을 읽었더라면 가슴이 뜨끔했을 것이다. 요컨대 그는 결코 달빛 아래서 문을 밀지도, 두드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 놓고 생각만으로 이게 더 좋을까 저게 더 좋을까 따지며 걷다가 한유(韓愈)의 수레와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왕부지는 단언한다. 만약 그가 실제로 그런 경우를 당했더라면, 그의 선택은 ‘퇴(推)’가 되든 ‘고(敲)’가 되든 따지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으리라고.
어쨌든 가도의 이 유난스런 시벽을 두고 한유(韓愈)는 「증가도(贈賈島)」라는 시를 지어 주기까지 하였다.
孟郊死葬北邙山 | 맹교(孟郊)가 죽어 북망산에 묻힌 뒤 |
日月風雲頓覺閑 | 해와 달 바람 구름, 문득 한가해졌네. |
天恐文章渾斷絶 | 문장이 끊어질까 하늘이 염려하여 |
再生賈島在人間 | 가도(賈島)를 다시 내어 인간에 있게 했네. |
가도(賈島)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위에 모아 놓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어 빌기를, “이것이 내 한 해 동안의 고심(苦心)함이다.”라 하며, 취토록 술 마시며 노래 불렀다고 한다.
▲ 김홍도, 「월하고문(月下敲門)」, 18세기, 27.4X23cm, 간송미술관.
“연못가 나무에서 새는 잠들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 두드리네.” 달빛 아래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린다. 아래쪽 나뭇가지에 자다 깬 새 서너 마리가 보이는가. 아스라하다.
인용
11. 개미와 이①
12. 개미와 이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