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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국시화(韓國詩話)에 나타난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평론연구(評論硏究)- 李白, 杜甫, 蘇軾, 黃庭堅 評論을 中心으로 - 박 순 철 ―――――――― 「 목차(目次) 」 ――――――――1. 시화라는 명칭의 등장과 흐름 2. 한국시화(韓國詩話)의 당송시(唐宋詩)에 대한 총론(總論)1) 홍경우~홍만종까지의 흐름2) 김창협, 천기와 성정이란 잣대로 시를 비평하다3) 당시를 극찬한 이수광4) 송시를 만당풍보다 높게 친 이의현 3. 존당파(尊唐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2)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이식의 평론(評論)3) 이수광, 두보 시를 낮추어 평가하다4) 이수광, 두보시를 강서시와..
5. 결론 한국시화에 기록된 중국문인과 시에 관련된 내용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대단한 수준이다. 한국시화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시와 관련된 총론, 시론, 풍격, 시의, 자구의 오류 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시화에는 거의 동시대의 중국의 유명 시화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고 혹은 중국문인의 시나 시구를 들어 비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시의 주석에 대하여 그 정오(正誤)를 논할 만큼 시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정확하고 치밀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시화의 내용 중에서 당시와 송시에 대한 평론을 중심으로 존당과 존송의 내용과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백, 두보와 소식, 황정견에 대한 평..
4. 이의현, 존송파(尊宋派)임에도 두보를 시의 정맥으로 보다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두보는 시의 표현이 절묘하고【위의 책, 제1권의 「櫟翁稗說」, 144쪽, “杜少陵有‘地偏江動蜀, 天遠樹浮秦’……方知此句少陵爲, 秦ㆍ蜀傳神, 而妙處正在阿堵中也.”】 동파의 시는 호탕하다【위의 책, 제1권의 「櫟翁稗說」, 158쪽 “東坡云: 火色上騰雖有數, 急流勇退豈無人? 又豪宕可人.”】고 하였는데 이는 소식 시에 나타나고 있는 호탕한 풍격을 평한 말이다. 두보를 정점으로 삼은 이의현 한편 이의현(李宜顯)은 『도곡잡저(陶谷雜著)』 4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는 성정을 말하는 것으로 시경삼백 편에 비록 정(正)과 변(變)이 있을지라도 대략 온유돈후라는 네 글자를..
3. 최자, 『보한집』에서 존송(尊宋)의 가치를 드러내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 이외에도 존송파로서 송시의 뛰어남을 평론한 문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후기의 학자 최자(崔滋, 1188~1260)는 존송파로서 『보한집(補閒集)』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식 시의 “짙푸른 못은 마치 내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 같고, 흰 탑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네.”라는 시구를 들어 이 시구가 참신한 뜻(新意)이 있다【이는 소동파 시구의 신의(新意)에 대하여 최자가 유숭단의 말을 인용하여 비평한 것이다.】. 予嘗謁文安公, 有一僧持『東坡集』,質疑於公, 讀至“碧潭如見試, 白塔若相招”一聯, 公吟味再三, 曰:“古今詩集中, 罕見有如此新意. 뜻이 가는대로 즉석에서 지은 시로는 이백의 “버들눈은 황금색으로 부드럽고, 이화..
2. 김창협, 존송파(尊宋派)의 기본 위에 성당풍(盛唐風)을 갖추라 말하다 김창협(金昌協)은 『농암잡지(農巖雜誌)』 외편 16에서 황정견과 진사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송(宋)나라 시에서 황정견(黃庭堅)이나 진사도(陳師道)의 시는 한때 최고의 으뜸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황정견(黃庭堅)의 시는 마음대로 비틀어대어 자연스럽지 못하고 진사도의 시는 앙상하며 매우 엄혹하니 이미 온화하고 두터운 뜻을 잃어버렸으며, 또한 초탈하고 구속을 받지 않는 운치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진실로 당나라 시로부터도 멀고 두보로부터도 잘 배우지 못했으니, 색과 향기가 흐리지 않는다고 이몽양이 비판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주장이다. 진여의(陳與義)는 비록 기가 조금 막힌 바가 있지만 두보의 음절을 얻었고, 육유(陸游)는 비록..
4. 존송파(尊宋派)의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曹伸, 1450~1521?)이 쓴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李定이)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서 술에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과 왕안석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정이 ‘왕안석이 더 낫습니다.’라고 했다[一日侍內宴, 醉甚, 近就御前平坐, 請曰: ‘蘇與王孰優?’ 上不答, 但曰: ‘未可知.’ 永川曰: ‘荊公優矣.’].”【위의 책, 제1권의 「謏聞瑣錄」, 237쪽】는 기록이 있다. 『소문쇄록(謏聞瑣錄)』은 중종(中宗) 20년 1521년에 만들어진 책으로 조선전기의 대표적 시화..
6. 이수광의 송풍(宋風)의 모방과 산문화를 비판하다 송풍의 모방을 비판하다 이수광은 또한 소식과 황정견의 시에 대해서도 시의 자구선택, 시구의 정확성, 구법과 대구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하여 평하고 있다. 우선 소식의 시의 자구 선택문제에 대한 평을 보도록 하자. 당나라 유가(劉駕)의 「조행(早行)」시에 이르기를 “말 위에서 남은 꿈을 계속 꾸다가, 말이 울 때마다 다시 놀란다.”라고 하였다. 소식이 이것을 모방하여 말하기를 “말 위에 서 우뚝 남은 꿈을 꾸다, 아침 해가 올라온 것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 자세히 음미하여 보면 잘됨과 졸렬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리고 동파의 “올잔몽(兀殘夢)”이라고 한 “올(兀)”자를 후인이 나무라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唐劉駕「早行」詩云: ‘馬上續殘..
5. 이수광, 이백와 황정견의 시를 비교하다 이수광은 이백 시에 대하여서도 많은 평을 하였는데 주로 표현의 자연스러움, 시법, 시구의 원류【위의 책, 2권의 「芝峯類說」, 191쪽, “喬知之詩曰: ‘草綠鴛鴦殿, 花紅翡翠樓.’ 按李白詩‘水綠南薰殿, 花紅北闕樓.’; 又‘玉樓巢翡翠, 金殿鎖鴛鴦.’ 蓋出於喬矣.”】, 시구의 주석, 인품과 시품의 관계, 습작문제, 정확성 문제 등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백의 악부에 말하기를 “홀로 물속의 진흙을 거르려하나 물은 깊은데 달을 볼 수 없네. 보지 않아도 달은 그냥 있겠지만, 물이 깊어서 행인이 빠지겠네.”라고 하였다. 이 사의 구법은 희롱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있어서 기뻐할 만하다. 산곡 황정견이 이것을 본받아짓기를 “돌은 내가 너무 좋..
4. 이수광, 두보시를 강서시와 비교하다 강서시보단 두보시 다음은 강서시파의 한 사람인 진여의(陳與義)의 시와 두보 시를 비교하여 그 우열을 논한 부분으로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에 나온다. 진여의(陳與義)의 시에 “만 리를 와서 노닐면서 도리어 먼 곳을 바라보려고, 삼년 동안 어려움도 많았거니, 다시 위태한 곳에 기대어 섰네.”라고 한 것이 있다. 나는 이 시구를 매우 좋아한다. 두시에 말하기를 “만 리에 가을이 슬프다. 이 몸은 항상 나그네 되어, 백년에 병 많은 몸 홀로 누대에 오른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여의의 이 글귀가 오로지 두보 시에서 나온 것을 알겠다. 그러나 두보시가 더 좋다.簡齋詩‘萬里來游還望遠, 三年多難更憑危.’ 余常喜之. 杜詩云: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
3. 이수광, 두보 시를 낮추어 평가하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당시(唐詩), 오대시(五代詩), 원시(元詩), 명시(明時) 등 각 조대의 시인의 시에 대하여 비평을 하였다. 그가 평한 당대와 송대의 시인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당(唐) 시인 중에서는 우세남(虞世南)ㆍ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ㆍ송지문(宋之問)ㆍ이백(李白)ㆍ교지지(喬知之)ㆍ이교(李嶠)ㆍ진자앙(陳子昻)ㆍ맹호연(孟浩然)ㆍ왕유(王維)ㆍ두보(杜甫)ㆍ김운경(金雲卿)ㆍ위응물(韋應物)ㆍ한유(韓愈)ㆍ유가(劉駕)ㆍ원진(元稹)ㆍ이하(李賀)ㆍ왕건(王建)ㆍ두목(杜牧)ㆍ두공(竇鞏)ㆍ이상은(李商隱)ㆍ허혼(許渾)ㆍ육구몽(陸龜蒙)ㆍ두상(杜常) 등을 거론하여 그들의 시와 자구에 대하여 비평하였고, 宋 시인 중에서는 구준(寇準)ㆍ안수(晏殊)ㆍ양휘지(..
2.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이식의 평론(評論) 왕세정의 견해를 이어받아 두보를 더 높게 평가한 이식 조선 중기의 학자 이식(李植, 1584~1647)은 「학시준적(學詩準的)」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백(李白)의 고시(古詩)는 표일(飄逸)해서 모방하기가 어렵다. 두보 시의 변체는 성정(性情)과 사의(詞意)에 있어 고금을 통틀어 최고이다. 그의 기행이나 「삼리(三離)」, 「삼별(三別)」 등 작품은 아낄만한 점이 분명히 있으니 숙독하고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를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팔애(八哀)」와 같은 장편은 학식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으며 또 시의 정통도 아니니 우선은 그냥 놔두어도 된다.李白古詩飄逸難學. 杜詩變體, ..
3. 존당파(尊唐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여 각 파의 당ㆍ송시에 대한 평론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尊唐派尊宋派 이백, 두보소식, 황정견 다시 말하면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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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한국시화에 기록된 중국문인과 시에 관련된 내용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대단한 수준이다. 한국시화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시와 관련된 총론, 시론, 풍격, 시의, 자구의 오류 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시화에는 거의 동시대의 중국의 유명 시화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고 혹은 중국문인의 시나 시구를 들어 비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시의 주석에 대하여 그 정오(正誤)를 논할 만큼 시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정확하고 치밀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시화의 내용 중에서 당시와 송시에 대한 평론을 중심으로 존당과 존송의 내용과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백, 두보와 소식, 황정견에 대한 평..
2. 존송파(尊宋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曹伸, 1450~1521?)이 쓴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李定이)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서 술에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과 왕안석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정이 ‘왕안석이 더 낫습니다.’라고 했다[一日侍內宴, 醉甚, 近就御前平坐, 請曰: ‘蘇與王孰優?’ 上不答, 但曰: ‘未可知.’ 永川曰: ‘荊公優矣.’].”【위의 책, 제1권의 「謏聞瑣錄」, 237쪽】는 기록이 있다. 『소문쇄록(謏聞瑣錄)』은 중종(中宗) 20년 1521년에 만들어진 책..
3. 존당파(尊唐派)와 존송파(尊宋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尊唐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
3. 존당파(尊唐派)와 존송파(尊宋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尊唐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여 ..
한국시화(韓國詩話)에 나타난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평론연구(評論硏究)-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을 중심(中心)으로 - 박 순 철 1. 시화라는 명칭의 등장과 흐름 한ㆍ중 양국은 동양 한자문화권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교류를 진행하였다. 문학 방면에서도 많은 교류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분야 중의 하나는 시 분야이다. 시는 한ㆍ중 양국에서 모두 극성하였고 이로 인하여 시에 대한 창작과 감상, 비평에 대한 책들이 저술되어 시화(詩話)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최초 시화(詩話)라는 명칭의 등장과 성격 시화(詩話)라는 명칭은 송대(宋代)의 구양수(歐陽脩)가 자신이 쓴 시화를 『육일시화(..
78. 金主亮詠竹詩曰 我心正與君相似 只待雲梢拂碧空 又閱柳耆卿詞三秋桂子十里荷花之語 遂萌飮江之志 題詩曰提兵百萬西湖上 立馬吳山第一峰 其桀驁之氣可想
77. 金主璟遊仰山詩云金色界中兜率景 碧蓮花裡梵王宮 鶴驚淸露三更月 虎嘯疎林萬壑風 又甞得句云二人土上坐 其妃李氏對曰一月日邊明 時稱警妙
76. 稗史 載鄧中甫贈文山詩 尾句云餘生諒須臾 孤憤橫九縣 庶幾太尉事 萬一中丞傳 文山在燕獄 寄中甫云久要何落落 末路重依依 死矣煩公傳 北方人是非 余謂此言果是 則文山亦有意於名者也 無乃好事者爲之歟
75. 宋詩曰 勸君休鑷鬢毛斑 鬢到斑時亦自難 多少朱門少年子 業風吹上北邙山 語亦達矣 盧蘇齋晩年鑷白不休 客問之 公曰殺人者死 白髮能殺人故去之 客大笑
74. 宋詩有云荷因有熱先擎蓋 柳爲無寒漸脫綿 小說中稱爲佳句 然似巧而拙 不足傳也
73. 楊誠齋絶句云梅子流酸濺齒牙 芭蕉分綠上牕紗 日長睡起無情緖 閑看兒童捉柳花 張紫巖見之曰 廷秀胸襟透脫矣 余謂紫岩評品似過 且捉字不雅 改以趁字如何
72. 楊誠齋詩老讀文書興易闌 從知養病不如閑 竹床瓦枕西堂上 臥見江南雨後山 其風流意趣可玩 不宜以晩宋少之 按癸辛雜識 以此爲呂滎陽作 未知孰是
71. 放翁詩云靑羅包髻白行纏 不是凡人不是仙 家在洛陽城裡住 臥吹銅笛過伊川 可見其豪放矣 但臥吹之臥字 未知如何 堯山堂紀 以此爲朱希眞詩也
70. 陸放翁詩澆書滿挹浮蛆甕 攤飯橫眠夢蝶床 按宋人謂晨飮爲澆書 午睡爲攤飯 蓋俗語也 蓋古人晨起必讀書 故曰澆書
69. 韓子蒼詩曰 推愁不去還相覓 與老無期稍見侵 按王荊公詩 閉戶欲推愁 愁終不肯去 劉賓客詩與老無期約 到來如等閑 蓋用此也
68. 堯山堂外紀 晦翁甞訪婿蔡沈不遇 蔡妻葱湯麥飯 辭以簡褻 晦翁留詩曰葱湯麥飯兩相宜 葱養丹田麥療飢 莫謂此中滋味薄 前村猶有未炊時 余謂當食而先念未炊之人 可見仁人君子之用心也
67. 朱文公詩孤燈耿寒焰 照此一窓幽 臥聽簷前雨 浪浪殊未休 張南軒詩坡頭望西山 秋意已如許 雲影渡江來 霏霏半空雨 又散策下舸亭 水淸魚可數 却上采菱舟 乘風過南浦 楊愼以此爲有唐調云
66. 胡澹庵謫中聞秦檜死 有詩云夢入瓊崖身益壯 烟銷金塢臭空傳 後孟珙滅金回 屯軍於檜墓所 令軍士糞溺墓上 人謂穢塚 澹庵之言蓋驗矣 烟銷金塢 本以郿塢比檜 而亦爲金亡之讖焉
65. 宋詩蒲牢百八吼禪林 又曰聲殘一百八 按蒲牢獸名 畏鯨魚輒鳴吼 故凡鐘作蒲牢形 以所擊者爲鯨魚 黃山谷云催粥華鯨吼 夜闌又風冽 僧魚響謂之蒲牢吼則可矣 今曰華鯨吼 恐誤用事 如東坡云木魚曉動隨僧粥爲是
64. 郭浩詩曰 隴口山深草木荒 行人到此斷肝腸 耳中不忍聽鸚鵡 猶在枝頭說上皇 按小說 隴州歲貢鸚鵡 徽宗敎以詩文後發還本土 後郭浩按邊至隴口 見紅白二鸚鵡於枝間 問上皇安否 浩曰上皇崩矣 鸚鵡悲鳴不已云
63. 謝逸字無逸 有咏蝶詩三百首 如云身似何郞全傅粉 心如韓壽愛偸香 飛隨柳絮有時見 舞入梨花無處尋 時稱謝蝴蝶 然其所膾炙止此 則他可知矣
62. 晁載之有昭靈夫人祠詩曰 安得生兒作劉季 暮年無骨葬昭靈 按漢高祖起兵野戰 喪妣於黃鄕 天下平定 使以梓宮招魂于野 有丹蛇出水躍入于梓宮 諡爲昭靈夫人 事見漢書註
61. 世傳岳武穆手書送張紫岩北伐詩曰 號令雷霆迅 天聲動北陬 長驅渡河洛 直擣向燕幽 馬蹀閼支血 旗梟克汗頭 歸來報明主 恢復舊神州 按稗史言此詩雄渾悲壯 卽唐名家 不是過也 今見筆勢尤雄健 人謂辟邪 而稗史平並擧 蓋其書流傳於我國 而中朝人未之見也 按紫巖張浚號也
60. 莊孔易詩曰 詩卷袖寒携海岳 夜舡江隱坐星河 按東坡云我携此石歸 袖中有東海 又沈佺期云舡如天上坐 蓋用此也 隱疑作穩
59. 后山詩曰 秋盤堆鴨脚 春味薦猫頭 猫頭笋也 山谷詩曰 霜林收鴨脚 春網薦琴高 語意相似 而琴高古仙人乘鯉者 今曰薦琴高則未穩
58. 宋人詩曰 柳外雕鞍公子醉 花邊團扇麗人行 時謂絶唱 見此則古者婦人用扇自蔽者可知矣 今我國士大夫雖冬月 亦以扇掩面 中朝人大笑之 豈以爲近婦人故歟
57. 李師中贈官妓賈愛卿詩云願得豼貅千萬兵 犬羊巢穴一時平 歸來不用封侯印 只向君王覔愛卿
56. 柳如京塞上詩曰 鳴骹直上一千丈 天靜無風聲正乾 碧眼胡兒三百騎 盡提金勒向雲看 一時盛稱其詩 好事者多圖於屛障 卒有金元之禍
55. 張乖厓致仕詩曰 兒童不慣錦衣榮 見我歸來夾道迎 不免隔溪高士笑 天機喪盡得虛名 人謂此詩爲後世公卿致仕者供狀云 余謂致仕者猶不免人笑 則漏盡而不知休者 又當何如也
54. 山谷詩喜用白鷗字 有曰江南野水碧於天 中有白鷗閑似我 又曰夢作白鷗去 江湖水貼天 世謂黃山谷夢作白鷗者以此
53. 宋蔡承禧製皇后挽詞曰 天上玉欄花已折 人間方士術何施 按宋姜識有神術 使死者復生 皇后之薨 試其術不驗 乃曰后與仁宗臨白玉欄干賞牡丹 無復來人間 詩語以此
52. 宋人有長城詩曰 祖舜宗堯自太平 秦皇何事苦蒼生 不知禍起蕭墻內 虛築防胡萬里城 有東人和之曰 粉堞縱橫萬里平 黎民賴此得安生 當時若數秦皇罪 只在坑儒不在城 其意好
51. 漢書不載虞美人事結末 宋人詩曰 香魂夜逐劍光飛 靑血化爲原上草 註云項王亡滅 虞姬自刎 按賈氏談錄曰 褒斜山谷 有虞美人草 狀如鷄冠 行路見者唱虞美人則葉搖動 如人撫掌之狀 或唱他詞 寂然不動云
50. 馬子才詩曰李白騎鯨飛上天 按韓退之甞言太白得仙去 元和初 有人自北海來 見太白與一道士跨赤虬而去 此云騎鯨 恐別有出處 或誤用事耳
49. 郭功父老人詩云不記近事記遠事 不能近視能遠視 哭無淚笑有淚 夜不睡晝多睡 兒子不惜惜孫子 大事不問問碎細 又曰夜雨稀聞聞耳雨 春花微見見空花 盖老人耳中常作風雨聲 而不得聞實雨故云
48. 黃山谷詩曰美酒玉東西 又曾茶山詩曰酒酣金盞照東西 玉東西酒器也 今漢語謂家中器物爲東西 猶俗言家事也 按呂東萊性麁暴 嫌飮食不如意 便打破家事
47. 黃山谷讀謝安傳詩曰 傾敗秦師琰與玄 矯情不顧驛書傳 持危又幸桓溫死 太傅功名亦偶然 此詩工拙不可知 而議論則好矣
46. 東坡詩曰 贏得兒童語音好 一年强半在城中 蓋言靑苗之法 使民不得休息 故村童久在城中 學得官話而語音好耳
45. 東坡贈人詩云聖善方當而立歲 頑尊已及古稀年 以其父年七十 而其母方三十歲故戲之 盧守愼詩云寄也歸而免 居然到古稀 亦此也
44. 東坡送黃師憲詩曰 白首沈下吏 綠衣有公言 按東坡云吾家朝雲 每見師憲 怪其官職不遷 綠衣指朝雲 乃坡侍妾名
43. 東坡詩曰 無事此靜坐 一日是兩日 若活七十年 便是百四十 此與日長如少年同意
42. 東坡詩云宿麥連雲有幾家 麥隔歲而熟 故曰宿 按淮南子曰虛中則種宿麥是也
41. 蘇詩云詞頭夜下攬衣忙 按凡有辭命 書其題目 下于詞臣 使製進曰詞頭 又唐明皇喜唱水調歌頭 按歌頭猶言首章也
40. 東坡詩山憶喜歡勞遠夢 地名惶恐泣孤臣 按宋邢凱曰 蜀大散關 有喜歡鋪 萬安縣有皇公灘 而改爲惶恐以作對 又廬陵有二十四灘 而坡詩乃云十八灘頭一葉身非也 按仇池有九十九泉 而杜詩長思十九泉 亦省文耳
39. 東坡牧丹詩曰一朶妖紅翠欲流 按蜀語 鮮翠猶言鮮明也 蜀人又謂糊窓爲泥窓 故花蘂夫人宮詞曰紅錦泥窓遶四廊
38. 蘇子瞻以世間惟有蟄龍知爲罪案 而王介甫殿前栢詩云根通御水龍應蟄 子瞻若引此爲證 則王珪輩宜有遁辭 余直欲追訟而不得也
37. 東坡詩曰夏旱麥人臞 按麥之心曰人 本草云蕎麥取人 食之下氣 坡詩又曰曉來梅子已生人
36. 東坡詞曰 眞態生香誰盡得 玉奴纖手嗅梅花 墨莊謾錄曰 甞見東坡手書本 作玉如纖才楊用脩 亦以爲是 然東坡詩玉奴終不負東昏 指潘淑妃也 又曰玉奴絃索花奴手 玉奴謂楊妃 花奴謂汝陽王璡 此玉奴蓋亦一意耳 謾錄之言恐誤
35. 舒亶詩曰 香泛釣筒萍雨夜 綠搖花塢柳風春 又空外水光風動月 暗中花氣雪藏梅 又萬壑水澄知月白 千林霜重見松高 舒在宋無詩名 而其工如此
34. 邵康節詩曰 平生不作皺眉事 擧世應無切齒人 又風花雪月千金子 水竹雲山萬戶侯 又唐虞揖遜三杯酒 湯武交爭一局碁 想其胸懷樂易跌蕩 千載之下 誦其詩 如見其人
33. 邵康節詩曰 何處是仙鄕 仙鄕不離房 眼前無俗事 心下自淸凉 李宗易詩曰 大都心足身還足 秪恐身閑心未閑 但得心閑隨處樂 不須朝市與雲山
32. 王安石詩臥占寬閑五百弓 按西域度地 以肘四爲一弓 以唐尺計之 五百弓爲二里許也
31. 王介甫江行詩曰 眠分黃犢草 坐占白鷗沙 占去聲 蓋謂眠則分得黃犢所眠之草 坐則占取白鷗所坐之沙 以江行爲題 故詩語如此 有與物忘機之意 或者以分與占爲分辨識認之義 則占當作平聲 誤矣
30. 王半山擬樂天詩曰 何處難忘酒 英雄失志秋 廟堂生莽卓 巖谷死伊周 賦斂中原困 干戈四海愁 此時無一盞 難遣壯圖休 余謂半山力行新法 流毒四海 此詩眞自道也 又樂天詩曰 周公恐懼流言日 王莽謙恭下士時 若使當年身便死 一生眞僞有誰知 半山常喜誦之云 蓋亦有所感會而然歟
29. 王半山詩曰 細書妨老讀 長簟愜昏眠 取簟且一息 拋書還少年 陸放翁詩曰 相對蒲團睡味長 主人與客兩相忘 須臾客去主人覺 一半西窓無夕陽 兩詩相似 而陸尤豪矣
28. 侯鯖錄曰 王介甫小時作石榴花詩曰 濃綠萬枝紅一點 動人春色不須多 按葉夢得曰 此乃唐人詩 非荊公所作 惜不見其全篇耳 余謂此句法 似是荊公手段 堯山堂外紀 亦以爲荊公所作 而夢得以爲唐詩 未知何所據耶
27. 荊公退去鍾山 有詩云穰侯老擅關中事 長恐諸侯客子來 我亦暮年專一壑 每逢車馬便驚猜 其專擅忌克之意可見 夫患得患失於山水 與患得患失於軒裳圭組者 何以異哉
26. 半山詩曰 志士無時亦小成 中才隨世就功名 蓋自古有志而不偶於時者眾矣 唐詩所謂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由 亦此意也
25. 半山詩云朶頤羊鼎方垂涎 按羊鼎牛鼎皆鼎名 取其象而名之 陳震曰 禹鼎三代相傳 號稱神器 迨七雄僭王 私計得鼎者可以有天下 若後世傳國璽云 班彪王命論曰神器有命 文中子曰神器有歸 所謂神器 皆指九鼎也
24. 王半山初夏詩曰 晴日暖風生麥氣 綠陰幽草勝花時 我朝富林君湜詩 乃曰綠陰芳草勝花時 此句全用半山 而但改作芳草似勝
23. 王半山題畫詩云方諸承水調幻藥 洒落生綃變寒暑 按方諸鑑也 周禮司烜氏以鑑取明水於月 楞嚴經 諸大幻師求大陰精 用和幻藥云 幻師蓋謂畫師 幻藥蓋謂采色 大陰精蓋謂水也
22. 東坡詩曰快瀉錢塘藥玉船 按玉堂詩選註 藥玉船 以藥合成酒杯 飮之以求長生 卽今紫霞盃也 韻府曰 以藥煑石似玉 可作酒盃
21. 半山詩紫磨月輪升靄靄 帝靑雲幕卷寥寥 按金之優者名紫磨 帝靑珠名 見華嚴經 又事始曰 歸藏易云女媧張雲幕而占神明 卽幕之始也
20. 王安石詩曰 今人未可非商鞅 商鞅能令令必行 觀此則知安石口談先王而祖述商鞅 其得免小人誅難矣
19. 東坡詩云人皆養子望聰明 我被聰明誤一生 但願生兒愚且魯 無災無難到公卿 又瞿宗吉詩曰 自古文章厄命窮 聰明未必勝愚蒙 此蓋用坡語也
18. 宋王珪觀燈應制詩尾句曰 一曲昇平人共樂 君王又進紫霞杯 按小說 高麗賀正朝禮物中 有紫霞杯, 五色琉璃盞 是夕用以進酒故云 堯山堂外紀曰 高麗紫霞杯 五色玻瓈也 昇平曲名
17. 梅聖兪四禽言詩 謂泥滑滑, 婆餠焦, 提壺盧, 歸去樂也 東坡五禽言 謂蘄州, 鬼脫, 布袴, 鷓鴣, 姑惡, 黃鸝也 我國高敬命禽言詩曰 欲死緣何事 知渠悔有生 又無名氏詩曰 人間苟活知無數 胡乃曾輕一片身 此指俗所謂呼死鳥也 此鳥每於春時鳴 聲甚哀楚 蓋怨禽也
16. 歐陽公詩曰禦寒低便面 便去聲 以此觀之 古人寒節 亦以扇障耳 按韻府群玉 便面以障面者 不欲見人則得其便 今沙門所持竹扇是也
15. 歐陽公詩曰三月春陰正養花 又曰鎖日春陰養花魄 東坡詩曰養花須晏陰 又無名氏詩曰淡雲微雨養花天 蓋以天陰小雨 爲養花也 詩學大成 有詩曰天養梅花日日晴 此則未知誰作 而恐誤用養字爾
14. 歐陽公詩銀蒜鉤簾宛地垂 又小詞云早是東風作惡 旋安排一雙銀蒜 鎭羅幕 按銀蒜 鑄銀爲蒜形以押簾也
13. 歐陽詩話曰 西南夷人所賣蠻布弓衣 織成梅聖兪春雪詩 詩曰朔風三日暗吹沙 蛟龍卷起皆成花 花飛萬里奪皓月 白石爛旺愁女媧 大明廣庭踏朝賀 雉尾不掃粘宮靴 宮中才人承聖顔 捧觴獻壽呼南山 三公免責百姓喜 斗酒十千誰復慳 此詩在聖兪集中 未爲絶唱 蓋其名重天下 一篇一詠 傳落夷狄而貴重如此云 余謂此詩語意乃賀雪 不似春雪詩矣 蓋夷人之所重 以其名也 非眞知其可好者也 故能知而好之者 天下鮮矣
12. 包拯詩曰 直幹終爲棟 眞剛不作鉤 可見其氣象矣
11. 石曼卿籌筆驛詩云意中流水遠 愁外舊山靑 又樂意相關禽對語 生香不斷樹交花 朱子以爲極佳
10. 陳亞有藥名詩百餘首 如風月前湖近 軒窓半夏凉 碁怕臘寒呵子下 衣嫌春暖縮紗裁 巧矣
9. 宋楊徽之 太宗時人 以能詩聞 其警聯曰犬吠竹籬沽酒客 鶴隨苔岸洗衣僧 浮花水入瞿塘峽 帶雨雲歸越嶲州 戍樓煙自直 戰地雨長腥 新霜染楓葉 皓月借蘆花
8. 晏元獻詩 有曰梨花院落溶溶月 柳絮池塘淡淡風 又樓臺冷落收燈夜 門巷蕭條掃雪天 又已定復搖春水色 似紅如白野棠花 此等句語 不似崑體 可誦
7. 寇萊公詩云野水無人渡 孤舟盡日橫 全襲韋蘇州野渡無人舟自橫之句 而後人獨稱萊公爲有相業何歟
6. 楊大年詠芙蓉詩曰 昨夜三更裡 姮娥墮玉簪 馮夷不敢受 捧出碧波心 高麗崔瀣詠兩荷詩曰 貯椒八百斛 千載笑其愚 何如綠玉斗 竟日量明珠 兩作相等矣
5. 宋眞宗賞花釣魚宴詩 唯丁謂鶯驚鳳輦穿花去 魚畏龍顔上釣遲一聯最佳 但上句不及下句
4. 王曾布衣時有早梅詩云雪中未說調羹事 且向百花頭上開 呂蒙正曰 此生作狀元宰相矣 後與李迪連榜取魁 又相繼秉鈞 以詩寄之曰 錦標得雋曾相繼 金鼎調元亦薦更
3. 王禹稱詠鶴詩曰 埋瘞肯同鸚鵡冢 飛鳴不到鳳凰池 張虞登第詩曰 一擧首登龍虎榜 十年身到鳳凰池 後皆卒於小官 竟不到其地云 今觀王語餒張語夸 俱非遠大氣象耳
2. 王欽若未第時有詩曰 龍帶晩煙歸洞府 鴈拖秋色入衡陽 眞宗大加賞愛 其後致位上相 實由於此云 然以今觀之 別非奇語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