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록서(文衡錄序)
이종휘(李種徽, 1731~1797)
古者, 無文衡之職. 盖兼於禮官而唐虞之秩宗, 周之春官大司成等, 是也. 漢之世, 大史公主『史記』, 而博士等官, 實掌文事. 隋唐迄宋, 禮部與知制誥分其任, 而知制誥爲宋之重職. 至明而太學士入閣省事, 其任遂與三公並矣.
高麗自雙冀東來, 而始開闈策士, 冀主其事. 入我朝而置大提學, 兼弘文ㆍ藝文二館之事, 而自事大交隣與國家敎令小大文字, 無不裁管. 而亦主試士之任, 每館僚遴選, 副提學先錄諸人, 而一聽其黜陟於大提學, 大提學與政府諸宰, 會都堂而議之. 文臣經館職而後, 始許要顯. 而世宗時, 又命年少文臣, 以暇日讀書湖上之亭, 名其選曰湖堂, 而大提學又掌之, 故大提學之權, 常侔於三公焉. 當皇朝盛時, 使价之來, 大提學輒儐之, 而江上諸亭, 爲詩酒之遊, 賓倡主酬, 華牋輝煌. 如祈順ㆍ唐臯之來, 徐居正ㆍ李荇等, 以鳴文章之盛. 而明ㆍ宣之際, 盖益彬彬然矣.
昔歐陽脩主文盛宋, 而文風丕變, 韓愈文起八代之衰, 以决古文之藩, 柳宗元ㆍ蘇氏父子兄弟ㆍ王曾之徒, 沿其波, 疏其源, 雖未及三代灝灝噩噩之盛, 亦文苑之昌期也. 故祖宗世文衡之選, 至嚴且愼. 苟非一代之所宗, 莫能居之 然官制多拘. 有其文矣, 而無其地則不居; 有其地矣, 而不由科則不居; 旣由科矣, 而無其年位則亦不居. 是以, 崔岦之巨手而局於下僚; 張顯光ㆍ許穆之瓌偉, 掣於白衣; 朴誾ㆍ李敏求ㆍ尹潔ㆍ金得臣之雄爽巨麗, 折閼而不達. 而亦或有因時乘勢, 無其實而濫竽者, 此又近世之患也.
若其文有所自立, 爲世輕重者, 四百年之間, 不多見焉, 然略可得以言矣. 權踶仲安當世宗世, 倣商周魯頌之詩, 而成「龍飛御天歌」, 睿宗時, 徐居正剛中, 以爾雅之文, 爲『四佳集』, 李滉景浩事明, 宣之世, 治洙泗洛閩之文, 爲『退溪集』, 盧守愼寡悔, 當乙巳之禍, 處海島十九年, 而大肆力於文章, 詩文尙古雅, 爲『蘇齋集』, 李珥叔獻, 明性理之學, 爲『栗谷集』. 柳成龍而見, 頗著壬辰時事, 以爲『懲毖錄』, 而兼善疏章雜述 爲『西崖集』, 李恒福子常, 好俊偉之辭, 爲『白沙集』, 申欽敬叔, 究理數之學, 爲『象村集』, 張維持國, 頗著古文辭紆餘婉暢, 爲『谿谷集』, 及如李植澤堂ㆍ尹根壽月汀ㆍ柳根西埛之徒, 各往往綴華東之文以著書, 不可勝記, 而當肅宗世, 金昌協仲和, 力學中華之文, 其爲辭出入於濂洛歐蘇之際, 而一務於淘洗東人之習, 爲『農巖集』.
大抵儒學者, 尙理而欠於辭; 治古文者, 尙辭而欠於理; 應卒者, 鄙俚而不該於體裁, 要之根華兩茂, 辭理俱達者, 盖絶希焉. 雖此十數公者間, 亦有合有不合焉, 豈不難哉? 雖然, 材不借於異代, 苟在上者, 勿拘於官制. 惟才是用焉, 則庶乎其可也. 『修山集』 卷之一
해석
古者, 無文衡之職.
옛날엔 문형(文衡)【홍문관 대제학의 별칭으로 홍문관 또는 예문관 대제학으로 성균관 대사성이나 지성균관사를 겸임한 사람을 말한다.】이란 직책이 없었다.
盖兼於禮官而唐虞之秩宗, 周之春官大司成等, 是也.
대체로 예관(禮官)에서 겸직했다가 하(夏)나라엔 질종(秩宗)과 주나라엔 춘관대사성(春官大司成) 등이 이것이다.
한나라 시대엔 태사공이 『사기』를 주필(朱筆)했고 박사 등의 관리들이 실제로 문사(文事)를 담당했다.
隋唐迄宋, 禮部與知制誥分其任, 而知制誥爲宋之重職.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예부와 지제고(知制誥)가 그 임무를 분담했고 지제고(知制誥)는 송나라의 중요한 직책이 되었다.
至明而太學士入閣省事, 其任遂與三公並矣.
명나라에 이르러 태학사(太學士)가 내각에 들어가 일을 덜어냄으로 그 임무는 삼공(三公)과 함께 했다.
高麗自雙冀東來, 而始開闈策士, 冀主其事.
고려시대에 쌍기가 동쪽으로 옴으로부터 처음으로 책사(策士)를 선발했으니 쌍기가 그 일을 주관했다.
入我朝而置大提學, 兼弘文ㆍ藝文二館之事,
우리 조정(조선)에 들어와 대제학을 설치하고 홍문관과 예문관 두 가지 일을 겸해
而自事大交隣與國家敎令小大文字, 無不裁管.
스스로 사대교린(事大交隣)과 임금 명령의 대소문자를 관여하지 않음이 없었다.
而亦主試士之任, 每館僚遴選,
그리고 또한 선비를 시험하는 임무를 주관해 매번 관료가 선발될 때에
副提學先錄諸人, 而一聽其黜陟於大提學,
부제학(副提學)이 먼저 여러 사람을 기록하고 한 번 대제학(大提學)에 좌천이나 영전을 알리면
大提學與政府諸宰, 會都堂而議之.
대제학과 정부 관료들이 도당에 모여 의논한다.
文臣經館職而後, 始許要顯.
문신이 관직을 거쳐야 비로서 要顯職을 허락했다.
而世宗時, 又命年少文臣,
세종 때엔 또 연소한 문신에게 명령해
以暇日讀書湖上之亭, 名其選曰湖堂,
호수 가 정자에서 여유롭게 독서하도록 하고 선집을 『호당집(湖堂集)』이라 이름 지었고
而大提學又掌之, 故大提學之權, 常侔於三公焉.
대제학이 또한 그걸 맡았기 때문에 대제학의 권세는 항상 삼공에 견줄 정도였다.
當皇朝盛時, 使价之來, 大提學輒儐之,
당시엔 황제의 세력이 왕성할 때라 사신이 오면 대제학이 문득 그를 맞이하고
而江上諸亭, 爲詩酒之遊,
강가 여러 정자에서 시와 술로 교유하였으며
賓倡主酬, 華牋輝煌.
주인과 손님이 수창하여 종이가 번쩍번쩍했다.
如祈順ㆍ唐臯之來,
예를 들면 명나라 사신인 기순(祈順)과 당고(唐臯)가 왔을 때
서거정과 이행 등이 문장의 성대함으로 울린 경우다.
명종과 선조의 때에 대체로 더욱 조화로웠던 것이다.
昔歐陽脩主文盛宋, 而文風丕變,
옛적에 구양수가 문장을 주관하여 송나라를 융성하게 했으며 문풍이 크게 변했고
한유의 문장은 팔대의 쇠함에서 일어나 고문(古文)의 울타리를 텄으며
유종원과 소씨 부자형제와 왕증의 무리는 그 물결을 연이어 근원을 소통시켰으니
雖未及三代灝灝噩噩之盛, 亦文苑之昌期也.
비록 하은주 삼대의 넓고도 융성한 성대함【호호악악(灝灝噩噩): 『법언(法言)』에 “상서는 호호하며 주서는 악악하니라[商書灝灝甬 周書噩噩甬].” 하였다. 호호(灝灝)는 넓고 휑한 모양, 악악(噩噩)은 엄숙한 모양을 말한다.】엔 미치지 못하더라도 또한 문단의 드날림은 기대할 만하다.
故祖宗世文衡之選, 至嚴且愼.
그러므로 조상대로 내려온 문형의 선발이 지극히 엄해졌고 또 삼가게 되었다.
苟非一代之所宗, 莫能居之 然官制多拘.
진실로 한 세대의 종주가 아니면 거처하지 않는다.
有其文矣, 而無其地則不居;
문재가 있지만 처지가 없으면 차지하지 않고
有其地矣, 而不由科則不居;
처지가 있지만 과거를 통과하지 않으면 차지하지 않으며
旣由科矣, 而無其年位則亦不居.
이미 과거를 통과했지만 나이나 지위가 없으면 차지하지 않는다.
是以, 崔岦之巨手而局於下僚;
이런 이유로 최립의 좋은 솜씨로도 하급관료에 국한됐고
張顯光ㆍ許穆之瓌偉, 掣於白衣;
장현광과 허목의 위대함에도 백의(白衣)에 억눌렸고
박은과 이민구와 윤결과 김득신의 웅장하며 상쾌하며 크고 아름다움으로도
折閼而不達.
꺾여 가로막혀 통달하지 못했다.
而亦或有因時乘勢, 無其實而濫竽者,
그러나 혹 때를 따라 기세를 타 실제는 없음에도 난간에서 피리를 부는 자들은
此又近世之患也.
이것이 또한 근세의 병통이다.
若其文有所自立, 爲世輕重者, 四百年之間, 不多見焉, 然略可得以言矣.
문장으로 자립하고 세상에 경시되거나 중시된 이는 400년 간에 많이 보이지 않지만 대략은 말할 수 있다.
권근의 아들인 자가 중안(仲安)인 권제가 세종대에 시경의 시를 본떠서 「용비어천가」를 지었고
예종 때에 강중 서거정은 이아(爾雅)의 문장으로 『사가집』을 지었으며
경호 이황은 명나라를 섬겨 선조의 때에 원시유학【수사(洙泗):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 이름으로, 이곳이 공자의 고향에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유가(儒家)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과 성리학【낙민(洛閩): ‘정주학’을 달리 이르는 말. 그 중심인물인 정호(程顥)ㆍ정이(程頥)는 낙양(洛陽) 사람이고 주자(朱子)는 민중(閩中) 사람인 데서 유래한】의 문장을 수련하여 『퇴계집』을 지었고
과회 노수신은 을사사화를 당해 해도에 19년 동안 유배되면서
而大肆力於文章, 詩文尙古雅, 爲『蘇齋集』,
문장에 크게 멋대로 힘을 써 시문은 예스럽고 우아함을 숭상하여 『소재집』을 지었으며,
李珥叔獻, 明性理之學, 爲『栗谷集』.
숙헌 이이는 성리학에 밝아 『율곡집』을 지었고
이현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의 일을 많이 저술하여 『징비록』을 지었으며
而兼善疏章雜述 爲『西崖集』,
겸하여 임금께 올리는 글[疏章]과 여러 저술을 잘 지어 『서애집』을 지었고,
李恒福子常, 好俊偉之辭, 爲『白沙集』,
자상 이항복은 반듯하고 위대한 문장을 잘지어 『백사집』을 지었으며
申欽敬叔, 究理數之學, 爲『象村集』,
경숙 신흠은 이치의 학문을 궁구하여 『상촌집』을 지었고
張維持國, 頗著古文辭紆餘婉暢, 爲『谿谷集』,
지국 장유는 옛 문장의 여유롭고 고우며 트인 것을 저술하여 『계곡집』을 지었으며,
及如李植澤堂ㆍ尹根壽月汀ㆍ柳根西埛之徒, 各往往綴華東之文以著書, 不可勝記,
택당 이식이나 월정 윤근수나 서경 유근과 같은 무리에 이르면 각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장을 모아 책을 저술했으니 이루다 기록할 수 없고
而當肅宗世, 金昌協仲和, 力學中華之文, 其爲辭出入於濂洛歐蘇之際, 而一務於淘洗東人之習, 爲『農巖集』.
숙종의 때에 중화 김창협은 중국의 문장을 힘껏 배워 글을 지은 것이 신유학과 구양수와 소식의 경지를 들락날락하여 일시에 우리나라 문인의 습속을 말끔히 씻어내는 데 힘써 『농암집』을 지었다.
大抵儒學者, 尙理而欠於辭; 治古文者, 尙辭而欠於理; 應卒者, 鄙俚而不該於體裁,
일반적으로 유학자들은 이치를 숭상하느라 문장엔 부족하고 고문을 짓는 이들은 문장을 숭상하여 이치엔 부족하며 임기응변하는【응졸(應卒): 갑작스럽게 닥치는 위급한 상황에 잘 대처하는 것이다. 『묵자(墨子)』 「칠환(七患)」에 “마음에 준비하는 생각이 없으면 응졸할 수 없다.[心無備慮 無以應卒]” 하였다.】 이는 얍삽하고 속되어 체재에 해박하지 못하니,
要之根華兩茂, 辭理俱達者, 盖絶希焉.
요컨대 뿌리와 꽃이 둘다 무성하여 문장과 이치가 모두 뛰어난 이는 대체로 매우 드물다.
雖此十數公者間, 亦有合有不合焉, 豈不難哉?
비록 이 열 몇 명의 작가들은 또한 합치되기도 불합치되기도 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雖然, 材不借於異代, 苟在上者, 勿拘於官制.
비록 그렇다해도 재주를 다른 시대에 빌리지 않고 진실로 상급재주를 지닌 이는 관직에 따른 제재에 구애되지 않으리니
惟才是用焉, 則庶乎其可也. 『修山集』 卷之一
재능에 따라 등용한다면 옳음에 가까우리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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