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광
광(匡)
광은 광정(匡鼎)이니 서한 사람이다. 그는 경학에 밝고 시를 잘 설명하니 선비들이 말하되 “시 설명을 멈추어라. 광정이 온다[無說詩匡鼎來]”라고 한 말이 있다. 『한서(漢書)』 卷八十一
광(廣)
수 양제 양광(楊廣)을 말한다.
광간(狂簡)
‘뜻만 크고 실행이 부족한 사람’을 이른다. 공자(孔子)가 진(陳)에서 이르기를 “돌아가야겠다. 오당(吾黨)의 소자(小子)들이 광간하여 빛나게 문채를 이루었으되 스스로 재제할 줄을 모른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광간미성장(狂簡未成章)
뜻만 크지 문리(文理)도 제대로 성취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광간(狂簡)은 뜻만 크고 행실이 소략함을 이르는데, 공자(孔子)가 진(陳)에 있을 때에 이르기를 “돌아가야겠다. 오당(吾黨)의 소자(小子)들이 광간하여 화려하게 문채를 이루었으나 그것을 재단할 줄을 모르도다[歸與! 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 유의어: 광간부지재(狂簡不知裁)
광객(狂客)
하지장의 자호인 사명광객(四明狂客)의 준말이다.
광거(廣居)
넓은 집으로 곧 어진 마음을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下에 “천하의 가장 넓은 집에 머무른다[居天下之廣居].”에서 나온 것이다.
광거정로(廣居正道)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下에 “인(仁)은 천하의 넓은 거처요, 의(義)는 천하의 바른 길(正道)이다[居天下之廣居, 行天下之大道].”라 하였다.
광견(狂狷)
신념을 가지고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그 수준이 다소 미흡한 자를 이른다. 광(狂)은 포부는 크지만 실천력이 다소 딸리는 자를, 견(狷)은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만 그 가치 기준이 좀 편협한 자를 말한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 함께 하지 못할진댄 반드시 광자(狂者)나 견자(狷者)와 함께 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절조를 지켜 하지 않는 바가 있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있다.
광경(光景)
‘일월(日月)’을 말한다.
광고(狂顧)
좌우를 서둘러 살피는 모습이다.
광과극최(光過隙催)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 “천지간의 인생이란 마치 하얀 망아지가 담장 사이의 틈을 지나가는 것처럼 순간일 따름이다[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隙 忽然而已].”라는 말이 있다.
광광(洸洸)
굳센 모양, 물이 용솟음치는 모양, 성내는 모양.
광광(廣廣)
넓은 모양.
광광(光光)
빛나는 모양, 명성이 널리 퍼지는 모양.
광광(壙壙)
텅 빈 모양, 들이 넓고 큰 모양.
광구미봉(匡救彌縫)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원만하게 조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광달(曠達)
도량이 넓어서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자적함을 말한다.
광동차(狂童且)
국풍은 『시경(詩經)』의 「열국풍(列國風)」을 이르며, 광동(狂童)은 ‘미친 짓 하는 아이’를 이른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건상(褰裳)」에, “그대가 진정 나를 그리워할진댄, 치마를 걷어 올리고 진수(溱水)를 건너가겠지만, 그대가 나를 그리워하지 않을진댄, 어찌 다른 남자가 없을쏘냐, 미친 아이가 미쳤구나[子惠思我 褰裳涉溱 子不我思 豈無他人 狂童之狂也且].” 한 내용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 인용: 薌娘謠(이광정)
광락(廣樂)
천상(天上)의 음악으로 매우 성대한 음악을 지칭하는 말이다.
광려(匡廬)
강서(江西)의 여산(廬山)으로, 은(殷)과 주(周)의 교체기에 광속(匡俗)의 형제 7인이 이곳에 초막을 짓고 선도(仙道)를 닦았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郡國志4 盧江郡 引 廬山記略
광려게(匡廬偈)
광려산은 중국의 여산(廬山)을 이른다. 소식(蘇軾)의 제서림벽시(題西林壁詩)에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이라고 한 것을 말하는데, 산의 참모습을 쉽게 알 수 없음을 말한다.
광려산(匡廬山)
강서성(江西省)의 여산(廬山)이다. 백거이(白居易)가 태자좌찬성(太子左贊成)으로 있다가 재상의 미움을 받아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어 있던 중 46세 때인 원화(元和) 12년 3월에 여산의 향로봉(香爐峯)과 유애사(遺愛寺) 중간에 세 칸의 초당(草堂)을 지어 놓고 이듬해 11월까지 거기서 생활하였다.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卷四十三 「초당기(草堂記)」·『백향산시집(白香山詩集)』 「연보(年譜)」
광려시게(匡廬詩偈)
광려산은 중국 여산(廬山). 소식(蘇軾)의 제서림벽시(題西林壁詩)에 “여산이라 참 면목을 알다가도 모를레라. 다만 몸이 이 산속에 매여있는 때문일레[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고 한 것을 말한다. 산의 참모습을 쉽게 알 수 없음을 말한다.
광록(光祿)
한 나라 때의 관제로서 광록대부(光祿大夫)의 약칭이다. 황제의 고문(顧問)과 조명(詔命)을 담당하였다.
광록훈(光祿勛)
궁정의 숙위 및 성문의 출입 감시, 궁내의 제반사에 대한 관리 및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리들의 우두머리로 진한 때는 구경(九卿)의 일원이다. 휘하에 대부, 랑(郞), 알자(謁者), 기문(期門), 우림(羽林), 광록연(光祿掾), 광록주사, 광록주부 등의 속관이 있었다. 후에 궁궐의 대문을 지키는 위병들을 관장하는 장관의 명칭으로 사용되어 지금의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원래 진나라의 제도를 따라 낭중령이라고 부르다가 한무제에 의해 광록훈으로 바꾸었다.
광루(曠婁)
사광(師曠)과 이루(離婁)를 이른다.
광류거(廣柳車)
상여(喪輿)를 말한다. 『사기(史記)』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광릉(光陵)
세조(世祖)의 능으로 남양주군(南楊州郡) 진접면(榛接面) 부평리(富坪里)에 있다. / 조선 세조(世祖)를 가리킨다. 세조는 불교를 신봉하여 1466년 유점사(楡岾寺)에 거둥하여 중 학열(學悅)에게 명해서 개수(改修)함으로써 유점사가 거찰(巨刹)이 되었다.
광릉(廣陵)
① 한성(漢城)의 옛 이름이다.
② 지금의 양주(揚州)이다.
③ 경기도 광주(廣州)를 말한다.
광릉관도(廣陵觀濤)
『문선(文選)』 권34 「칠발(七發)」에 “팔월 보름날 여러 공후(公侯) 및 먼 지역에서 사귄 형제들과 함께 광릉의 곡강(曲江)으로 물결치는 것을 구경하러 갔다.”라 하였다.
광릉금(廣陵琴)
거문고 가락 이름이다. 광릉산(廣陵散). 진(晉)의 혜강(嵇康)이 낙서(洛西)에서 놀 때 화양정(華陽亭)에서 자면서 거문고를 퉁기다가 뜻밖에 나타난 어느 객으로부터 전수받은 곡이 바로 광릉산인데, 뒤에 혜강이 종회(鍾會)의 참소로 인하여 사마소(司馬昭)에게 끌려 동시(東市)의 형장으로 갔을 때 태학생(太學生) 3천 명이 나서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청했으나 사마소는 그를 불허했다. 이에 혜강은 형장(刑場)에서 그 곡을 마지막으로 타면서 “광릉산이 이제 세상에 없게 되었구나[廣陵散 於今絶矣].”라 하였다 한다. 『진서(晉書)』 「혜강전(嵇康傳)」
광릉산(廣陵散)
거문고 곡조의 이름이다. 삼국시대 위(魏) 나라 혜강(嵇康)이 즐겨 연주하던 금곡(琴曲) 이름으로, 참소를 받고 사형을 당할 때, 형장(刑場)에서 마지막으로 그 곡을 탄주하고 곡이 끝난 뒤에 탄식하기를 “원효니(袁孝尼)가 일찍이 나에게 광릉산을 배우겠다 하였으나 나는 그때마다 거절하였는데, 광릉산이 이제 맥이 끊기는구나[廣陵散 於今絶矣]”라고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卷二十一 「왕찬전(王粲傳)」 註
광막풍(廣漠風)
북풍.
광명보(光明寶)
빛나는 보배.
광명정대(光明正大)
언행(言行)이 떳떳하고 정당하다.
광무(廣武)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동묵에 있는 광무산(廣武山)을 말한다. 동서의 두 봉에 각각 성을 쌓아 한나라가 황하로 통하는 길을 차단했다. 봉우리 사이의 계곡에는 광무간이라는 하천이 북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 기원전 203년 초한 쟁패시 항우(項羽)와 유방이 광무성의 동서 양쪽에 주둔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설전을 벌린 곳이다.
광무(光武)
후한(後漢)의 광무황제(光武皇帝)는 반역자를 쳐서 멸한 중흥(中興)의 군주(君主)이다.
광무산(廣武山)
산 이름으로 초(楚) 나라 항우(項羽)와 한(漢) 나라 유방(劉邦)이 각각 이곳에서 몇 달 동안 대치했었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광문(廣文)
두보(杜甫)의 친구였던 광문 선생(廣文先生) 정건(鄭虔)으로, 시(詩)·서(書)·화(畫)의 3예(藝)에 능하여 정건삼절(鄭虔三絶)로 일컬어져 온다. 당 현종(唐玄宗)이 그의 재질을 아낀 나머지 그를 위해 광문관(廣文館)을 설치하고 박사(博士)로 임명하였는데, 두보의 「취시가(醉時歌)」 중에 “광문 선생은 끼니도 제대로 못 먹어[廣文先生飯不足].”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
광문관(廣文官)
광문 벼슬은 당 나라 때 국자감(國子監)에 딸린 광문관(廣文館)의 박사(博士)와 조교(助敎) 등을 말한다.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권3 취시가증광문관학사정건(醉時歌贈廣文館學士鄭虔)의 “제공들은 끊임없이 요직으로 오르는데 광문 선생 벼슬만은 쓸쓸하기 그지없네[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冷]”에서 나온 것이다.
광문관랭(廣文官冷)
광문 선생(廣文先生)의 준말이다. 두보(杜甫)가 정건(鄭虔)을 광문 선생이라고 일컬으며 「취시가(醉時歌)」에서 “광문 선생 관직은 유독이나 쌀쌀하다[廣文先生官獨冷]”라 하였다.
광문노냉관(廣文老冷官)
광문(廣文)은 당대(唐代) 칠학(七學)의 하나인 광문관(廣文館)이다. “諸公袞袞登臺省, 一一先生官獨冷”이란 구절이 있다. 『두보시(杜甫詩)』
광문도처한무전(廣文到處寒無氈)
당 나라 정건(鄭虔)은 시(詩)·서(書)·화(畵)에 삼절(三絶)이라는 명사였으므로, 국가에서 광문관(廣文館)이라는 관청을 신설하고 정건을 광문학사에 임명하였으나, 봉급이 얼마 되지 않아서 생활이 매우 곤궁하였다. 그래서 두자미(杜子美)의 시에 “광문학사는 추워도 담요 하나도 없다[廣文學士寒無氈]”라는 구절이 있다.
광문삼절(廣文三絶)
당(唐)의 정건(鄭虔)이 일찍이 광문관(廣文館)의 박사(博士)가 되었기에 그를 일러 광문(廣文)이라고 하는데, 이는 당 명황(唐明皇)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일부러 광문관을 설치하고 그를 박사로 삼았던 것이다. 『신당서(新唐書)』 문예전(文藝傳) 중(中) 정건에 “정건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바치자 황제가 찬탄하며 그림 끝에 크게 쓰기를 ‘정건삼절(鄭虔三絶)’이라 하였다.”라 하였는데, 바로 시(詩), 서(書), 화(畫)에 정통한 것을 말한다.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
광문선생(廣文先生)
당 현종(唐玄宗) 때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를 지낸 정건(鄭虔)을 가리킨다. 광문(廣文)은 두보(杜甫)가 지어 준 정건(鄭虔)의 별호이다. 친구인 두보(杜甫)가 그를 위해 지은 시 「취시가(醉時歌)」 첫머리에 “제공들 뻔질나게 요직(要職)에 오르는데, 광문 선생 벼슬만은 왜 이리도 썰렁한고(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冷)”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3
광문한(廣文寒)
광문의 빈한(貧寒). 당(唐) 나라 때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 정건(鄭虔)은 시서화(詩書畫) 삼절(三絶)로 일컬어질 만큼 재명(才名)이 뛰어났으나 매양 빈궁에 쪼들렸고, 어려서는 종이가 없어서 감나무 잎(柿葉)에다 글씨를 익혔다. 당 현종(唐玄宗) 때 정건(鄭虔)이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로 취직했는데, 그 명목만 그럴듯할 뿐 대우는 아주 냉락한 자리였으므로 두보(杜甫)가 다른 공경(公卿)들은 다 높은 벼슬과 좋은 집에 고량진미를 먹고 있는데 광문 선생만은 끼니도 어렵다는 내용의 시를 읊기도 했다. 『신당서(新唐書)』 卷二百二 「정건열전(鄭虔列傳)」
광미반액(廣眉半額)
자신의 주견 없음. 『후한서(後漢書)』 「마료전(馬廖傳)」에 “성(城) 안에서 높은 머리(高髻)를 좋아하니 사방(四方)이 덩달아 한 자(一尺)나 높아지고, 성안에서 넓은 눈썹(廣眉)을 좋아하니 사방이 덩달아 반 이마(半額)나 차지한다.”라 하였다.
광박첨망(廣博瞻望)
장건(張騫)이 대장군 위청(衛靑)의 흉노 정벌에 따라가, 수초(水草)가 있는 곳을 잘 알았던 공로로 광박첨망(廣博瞻望)의 뜻을 취해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던 것과 그 뒤 장군이 되어 우북평(右北平)에 나갔다가 실기(失期)하여 참형(斬刑)을 간신히 면하고 서인(庶人)이 되었던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卷111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광복산(光福山)
일명 등위산(鄧尉山)이라 하는데 강소(江蘇) 오현(吳縣)의 서남 칠십 리 지점에 있다. 앞으로는 태호(太湖)가 보여 풍경이 극히 아름다우며 산에는 매화가 많아 꽃이 피면 온통 눈세계가 된다.
광사(曠士)
가슴속이 활달하게 툭 터져 명랑 쾌활한 인사를 말한다.
광사(狂士)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중도(中道)의 사람을 얻어서 도를 전하지 못할진댄 반드시 광견(狂狷)이라도 얻어서 가르치리라[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광(狂)이란 곧 뜻만 대단히 고상하여 행실이 뜻에 걸맞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광사곡궁도(狂士哭窮途)
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수레를 타고 가다 길이 막히면 문득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뜻이 높고 진취적인 인사(狂士)들이 곤경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광산(匡山)
① 중국 사천(四川) 강유현(江油縣)서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대광산(大匡山) 또는 대강산(大康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② 이백(李白)이 글을 읽으며 공부했다는 촉(蜀) 땅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 남쪽의 대광산(大匡山)의 약칭이다. 이백이 야랑(夜郞)으로 귀양 간 뒤에 소식을 알지 못해 애태우면서 두보(杜甫)가 지은 ‘불견(不見)’이라는 오언 율시(五言律詩)의 결구(結句)에 “광산이라 옛날에 글 읽던 그곳으로, 흰머리 날리면서 빨리 돌아와 줬으면[匡山讀書處 頭白好歸來].”이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10
관석화균(關石和鈞)
‘법도(法度)를 잘 지키도록 한다’는 말이다. 석(石)은 120근(斤), 균(鈞)은 30근으로 무게의 단위이고, 관(關)은 유통시킨다〔通〕는 뜻이며, 화(和)는 고르게 한다〔平〕는 뜻으로서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의 네 번째 노래에, “밝고 밝은 우리 선조 온 나라의 임금이시라 법과 규칙 높이 세워 자손에게 남기셨네. 석과 균을 통용시켜 왕의 창고 풍족하더니 그 전통 실추시켜 종족 망치고 제사 끊겼도다[明明我祖 萬邦之君 有典有則 貽厥子孫 關石和鈞 王府則有 荒墜厥緖 覆宗絶祀].”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노래는 하(夏) 나라의 무능한 임금인 태강(太康)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노는 데에만 빠져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의 다섯 동생이 각각 1수씩 지어 태강의 부덕(不德)함과 나라 잃은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 유의어: 관화(關和) / 인용: 與人(박지원), 有客行(성해응)
광성(廣成)
황제(皇帝) 때의 신선인 광성자(廣成子)를 말한다. 『장자(莊子)』 「재유(在宥)」 / 유의어: 광성옹(廣成翁), 광성자(廣成子)
광성유유회(廣成有遺誨)
광성자(廣成子)가 황제(黃帝)에게 일러 준 지도(至道)와 양생(養生)에 관한 설을 말한다. 『장자(莊子)』 「재유(在宥)」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광악(廣樂)
아주 미묘한 천상의 음악이란 뜻으로, 궁중의 음악을 말한다.
광악(光嶽)
‘삼광오악(三光五岳)’을 가리킨다.
광악(光岳)
해, 달, 별의 삼광(三光)과 태산(泰山), 숭산(嵩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의 오악(五岳)으로, 「천지(天地)」를 가리킨다.
광악양부자(光岳兩夫子)
광악은 해, 달, 별의 빛인 삼광(三光)과 태산(泰山), 숭산(嵩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의 오악(五岳)으로, 「천지(天地)」를 가리키며, 양부자는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를 가리킨다.
광약(狂藥)
‘미치는 약’이란 말로, 곧 술[酒]을 가리킨다. 『진서(晉書)』 「배해전(裵楷傳)」에 “족하께서 광약을 마시고 남의 정체(正體)를 책망하니 또한 잘못이 아닙니까.”라 하였고, 송문감(宋文鑑) 「범질시(范質詩)」에 “너에게 음주를 경계하노니 술은 미치는 약이요 아름다운 맛이 아니다.”라 하였다.
광양(俇攘)
허둥거리며 어쩔 줄 모름. 슬프고 두려운 모양이다.
광양당(廣壤堂)
제주도 남쪽 호국신사(護國神祠)의 당명(堂名)이다. 전설에 이르기를 “한라산신(漢拏山神)의 아우가 나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이 되었다. 고려(高麗) 때에 송(宋) 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이 땅을 압양(壓禳)하고 배를 타고 돌아가는데, 그 신이 매로 변화하여 돛대 머리에 날아오르더니, 이윽고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단의 배를 쳐부숨으로써 호종단은 끝내 비양도(飛揚島) 바위 사이에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그 신의 신령함을 포창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광양왕(廣壤王)을 봉하고 나서 해마다 향(香)과 폐백을 내려 제사하였고, 본조(本朝)에서는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했다.”고 하였다.
광염(光焰)
한유(韓愈)의 시(詩)에 “이두 문장이 남아 있으나, 광염이 만발(丈)이나 길다[李杜文章在, 光焰萬丈長]”라 하였다. 이두(李杜)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다.
광염만장장(光焰萬丈長)
『한창려시집(韓昌黎詩集)』 권5 「조장적(調張籍)」의 “이태백과 두자미 문장을 지녀 솟는 불꽃 일만 길 드높고말고[李杜文章在, 光焰萬丈長].”에서 나온 것으로, 뛰어난 문장 솜씨를 찬미하는 말이다.
광음(光陰)
광(光)은 일(日), 음(陰)은 월(月)을 가리켜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지니 시간이 흘러 세월이라는 뜻이 된다.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무릇 천지라는 것은 만물의 여관이고 광음 같은 세월은 백세의 지나가는 나그네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는 말이 있다.
광인나득상사문(匡人那得喪斯文)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양호(陽虎)가 일찍이 광 땅의 사람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는데, 공자(孔子)의 모습이 양호처럼 생겼기 때문에 광 땅의 사람들이 공자를 포위하고 해치려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 유도(儒道)를 해치려고 하지 않을 경우 광 땅의 사람들이 나에게 어찌하겠는가[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 하였는데 그 주에 ‘이는 반드시 광 땅의 사람들이 천리를 어기고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라 하였다.
광일미구(曠日彌久)
오랫동안 쓸데없이 세월만 보낸다는 뜻이다.
광일지구(曠日持久)
세월을 헛되이 오랫동안 보낸다. 긴 세월을 보내고 나니 헛되이 세월만 지났다는 말로 쓰인다. 그냥, 긴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광자(狂者)
뒷감당 못할 정도로 큰소리치며 원대한 포부를 말하면서도 정작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 함께하지 못할진댄 반드시 광자(狂者)나 견자(狷者)와 함께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절조를 지켜 하지 않는 바가 있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있다.
광장설(廣長舌)
『법화경(法華經)』에 세존(世尊)이 대신력(大神力)을 보인 것은 광장설과 청정법신(淸淨法身)에서 나왔다 했다. 그래서 소식(蘇軾)의 「증동림장로시(贈東林長老詩)」에 “溪聲便是廣長舌 山色寧非淸淨身”이라 하였다.
광풍제월(光風霽月)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의 인품을 평한 말로, 천성(天性)이 고명하고 흉중(胸中)이 맑아서 비가 갠 뒤의 풍월(風月)처럼 맑고 시원함을 이른다. 『송사(宋史)』 「주돈이전(周敦頤傳)」 / 인용: 霽月堂記(김창협)
광피(光被)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光被四表 格于上下”의 대문이 있다.
광하만간(廣廈萬間)
두보(杜甫)의 모옥위추풍소파시(茅屋爲秋風所破詩)에 “어찌하면 넓은 집 천만 칸을 얻어서, 천하의 추운 사람들을 크게 감싸주어 모두들 다 기쁜 얼굴을 하게 하리[安得廣廈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라 하였다.
광하백천간(廣廈百千間)
광대한 집이 수많은 사람을 덮어 가려 주듯이, 기한(飢寒)에 허덕이는 수많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광한계(廣寒桂)
광한전(廣寒殿)은 월궁(月宮)이니, 과거에 오르는 것을 달 가운데 계수(桂)꽃을 꺾는 것에 비유하였다.
광한궁(廣寒宮)
달 가운데 있다는 궁전(宮殿). 월궁전(月宮殿). 언제나 시원하여 ‘광한궁’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후예가 서왕모(西王母)에게 불사약을 구했는데, 후예의 아내인 항아(姮娥)가 훔쳐 가지고 월궁(月宮)으로 달아났다.”라 하였다. / 「용성록(龍城錄)」에 “당 명황(唐明皇)이 신천사(申天師) 홍도객(鴻都客)과 함께 8월 보름날 밤에 달 속에서 노니는데, 방(榜)을 보니 ‘광한청허지부(廣寒淸虛之府)’라고 쓰여 있었다.”라 하였다.
광한전(廣寒殿)
달 속에 있다는 궁전(月宮殿). 항아(姮娥)가 사는 전각(殿閣)을 이른다.
광한향(廣寒香)
과거에 급제함을 이른다. 광한은 월궁전(月宮殿)을 이른 말인데, 월궁에는 계수나무가 있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화(御賜花)를 꽂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광해주치(光海州治)
춘천(春川)의 신라 때 이름이다.
광형(匡衡)
한 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치규(稚圭)이다. 경의(經義)에 밝았으며 시(詩)를 더욱 잘하였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촛불이 없어 글을 읽을 수 없자 이웃집 벽을 뚫어 새어나오는 불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었다.”라고 하였다.
광형착벽(匡衡鑿壁)
가난을 극복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하였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광형이 공부할 적에 자기 집은 가난하여 촛불이 없고 이웃집에는 촛불이 있지만, 그 불빛이 자기 집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자 광형은 마침내 이웃집 벽을 뚫고서 나오는 불빛으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
광형천벽(匡衡穿壁)
『서경잡기(西京雜記)』에 “광형은 부지런히 배우려 했지만 불빛이 없었고 이웃집에 불빛이 있었지만 미치질 않았다. 그러자 광형은 벽에 구멍을 뚫고 새어나오는 불빛을 끌어다가 책을 읽었다[衡勤學無燭, 鄰舍有燭而不逮, 衡乃與穿壁, 引其光而讀之]”라고 보인다. 『몽구(蒙求)』 상편에도 인용되었다.
광화(狂華)
안화(眼花)와 같은 뜻으로, 눈앞에 불똥 같은 것이 어른어른하는 것을 이르는데, 눈이 흐림을 말한다.
광희(廣熙)
연산군 때 악공(樂工)을 고쳐 부른 이름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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