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 택지를 그리워하며
우중유회택지(雨中有懷擇之)
박은(朴誾)
寒雨不宜菊 小尊知近人
한우불의국 소존지근인
閉門紅葉落 得句白頭新
폐문홍엽락 득구백두신
歡憶情親友 愁添寂寞晨
환억정친우 수첨적막신
何當靑眼對 一笑見陽春
하당청안대 일소견양춘 『挹翠軒遺稿』 卷三
해석
寒雨不宜菊 小尊知近人 | 차가운 비는 국화에 어울리지 않으나 작은 술잔은 사람을 가까이 할 줄을 아네. |
閉門紅葉落 得句白頭新 | 문을 닫으니 붉은 낙엽 떨어지고 글귀 얻으니 백발 새로이 난다. |
歡憶情親友 愁添寂寞晨 | 기쁘게 정든 친구 생각하나 근심은 적막한 새벽에 더하다네. |
何當靑眼對 一笑見陽春 | 어찌 마땅히 푸른 눈으로 마주하며 한 번 웃으며 봄볕을 볼까나【일소견양춘(一笑見陽春): 이백(李白)의 양보음(梁甫吟)에 “길게 양보음을 부르나니, 어느 때나 양춘을 볼거나.[長嘯梁甫吟 何時見陽春]” 하여 곤궁한 처지에 놓인 지사(志士)의 울울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양춘(陽春)은 초사(楚辭) 구변(九辯)에 “겨울을 날 갖옷이 없으니, 갑자기 죽어 양춘을 보지 못할까 두렵네.[無衣裘以御冬兮 恐溘死而不得見乎陽春]”에서 온 것으로, 임금의 은혜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문맥으로 볼 때 서로 만나 화기(和氣)가 가득함을 뜻하는 듯하다.】? 『挹翠軒遺稿』 卷三 |
해설
이 시는 비 오는 가을날에 택지 이행(李荇)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가을 국화가 피었는데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어 술동이 안고 술을 마시고 있다. 비가 와서 문을 닫으니 곱게 물들었던 단풍이 비에 떨어지고 시를 짓느라 너무 고심을 했는지 20대 젊은이의 머리에 벌써 흰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정다운 벗을 생각하며 보내 준 시를 읽을 때는 기쁘지만 시를 다 읽고 나면 적막한 새벽이 되니 시름이 더해진다. 언제나 반가운 눈길로 마주 보며 크게 한 바탕 웃으며 화창한 봄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맹주인 박은(朴誾)은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 등 중국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선 문단에서 황정견, 진사도 시에 대한 관심은 15세기 후반에 이미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반 성현(成俔)은 조선의 시단을 진단한 「문변(文變)」이라는 글에서, 당시 사람들이 이백(李白)의 시는 지나치게 호탕하고, 두보(杜甫)의 시는 지나치게 깊고, 소식(蘇軾)의 시는 지나치게 웅장하고, 육유(陸游)의 시는 지나치게 호방하므로 오직 본받을 것은 황정견과 진사도(陳師道)라고 여겼다고 적고 있다.
최항(崔恒)은 「산곡정수서(山谷精粹序)」에서, “내가 이 말(황산곡을 소동파가 칭찬하는 말)을 외운 지 오래되었지만, 황산곡의 전집을 볼 수 없어 한스럽게 여겼다. 지금 그의 시선(詩選)을 보고서 또한 나머지를 짐작할 수 있으니, 과연 청신기괴(淸新奇怪)하여 일가의 법도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읊조리는 사이에 거의 잠자고 먹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었으니, 이른바 구슬과 옥이 곁에 있으면 내 몸의 더러움을 깨닫는다는 말이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겠다. 황산곡의 시가 몇 세대 동안 세상에 횡행하다 마침 오늘에 이르러서야 드러났으니, 그 인정받게 된 일이 어찌 스스로 기약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愚之誦此言久矣, 恨未得目其全集. 今觀是選, 亦足反隅, 果淸新奇怪, 成一家格轍. 吟渢之餘, 殆忘寢食, 始知所謂珠玉在傍, 覺我形穢者, 不吾欺矣. 於虖! 黃詩之行幾世, 乃竢今日而表章, 其知遇豈非自有期乎]?”라고 하여, 당시 황산곡의 시가 유행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박은과 절친했던 이행(李荇)이나 정희량, 16세기 시단을 풍미했던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최립(崔岦) 등도 황정견과 진사도의 강서시파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강서시파를 배운 조선 전기의 시인들은 창작방법의 연구를 통해 낡고 익숙한 것을 거부하고, 다소간 난삽하지만 새로운 시어와 의경을 획득하고자 노력했다. 주제의 측면에서는 인생의 비애와 우울한 서정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이종묵, 『우리 한시를 읽다』와 『해동강서시파 연구』 참조).
박은(朴誾)은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본조의 시체는 네다섯 번 변했을 뿐만 아니다. 국초에는 고려의 남은 기풍을 이어 오로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성종, 중종 조에 이르렀으니, 오직 이행(李荇)이 대성하였다. 중간에 황산곡(黃山谷)의 시를 참작하여 시를 지었으니, 박은(朴誾)의 재능은 실로 삼백 년 시사(詩史)에서 최고이다. 또 변하여 황산곡과 진사도(陳師道)를 오로지 배웠는데,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이 솥발처럼 우뚝 일어났다. 또 변하여 당풍(唐風)의 바름으로 돌아갔으니,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이 순정한 이들이다. 대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잘못되면 왕왕 군더더기가 있는데다 진부하여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운 데서 잘못되면 더욱 비틀고 천착하게 되어 염증을 낼 만 하다[本朝詩體, 不啻四五變. 國初承勝國之緖, 純學東坡, 以迄於宣靖, 惟容齋稱大成焉. 中間參以豫章, 則翠軒之才, 實三百年之一人. 又變而專攻黃ㆍ陳, 則湖ㆍ蘇ㆍ芝, 鼎足雄峙. 又變而反正於唐, 則崔ㆍ白ㆍ李, 其粹然者也. 夫學眉山而失之, 往往冗陳, 不滿人意, 江西之弊, 尤拗拙可厭].”라고 언급한 것처럼, 박은의 시(詩)는 시사(詩史)의 으뜸이었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박은(朴誾)의 시(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대대로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읍취헌 박은(朴誾)의 천성(天成)과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침울(沈鬱)함은 모두 성세(盛世)의 국풍(國風), 대아(大雅), 소아(小雅)의 유풍(遺風)을 지니고 있으니, 후대에 사원(詞垣)에서 이름을 떨치는 자들에 비교할 바 아니다.’ 하고, 두 사람의 문집을 간행하여 올리도록 명하였다[‘我東詩學, 世不乏人. 而挹翠軒朴誾之天成, 訥齋朴祥之沈鬱, 皆盛世風雅之遺, 非後來擅名詞垣者之比也.’ 兩集. 遂命刊印以進].”
“읍취헌(挹翠軒)의 시는 무엇보다도 바른 소리를 얻었는데, 책을 펼칠 때마다 그 사람됨을 상상해 보게 된다[挹翠之詩, 最得正聲, 每一開卷, 想見其爲人].”
“읍취헌(挹翠軒)의 시는 천기(天機)가 호방하여 성정(性情)을 볼만한 곳이 있고, 눌재(訥齋)의 시는 결구(結構)가 치밀하여 얼핏 보아서는 어려워 이해하기 어렵지만 오랫동안 보면 점차 그 뛰어남을 알게 된다[翠軒詩, 天機宕逸, 性情有可見處; 訥齋詩, 結構緻密, 乍看艱晦難知, 而久看其味漸雋].”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185~187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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