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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 - 화홍겸선제천정차송중추처관운(和洪兼善濟川亭次宋中樞處寬韻) 본문

한시놀이터/조선

김종직 - 화홍겸선제천정차송중추처관운(和洪兼善濟川亭次宋中樞處寬韻)

건방진방랑자 2019. 2. 2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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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겸선이 제천정에서 지중추원사 송처관의 시에 차운한 시에 화답하다

화홍겸선제천정차송중추처관운(和洪兼善濟川亭次宋中樞處寬韻)

 

김종직(金宗直)

 

 

吹花擘柳半江風 檣影搖搖背暮鴻

一片鄕心空倚柱 白雲飛度酒船中 佔畢齋集卷之一

 

 

 

 

 

 

해석

吹花擘柳半江風

취화벽류반강풍

강바람이 꽃에 불고 버들개지 쪼개었고,

檣影搖搖背暮鴻

장영요요배모홍

돛대 그림자는 흔들흔들 저물녘 기러기를 등져 있네.

一片鄕心空倚柱

일편향심공의주

한 조각 고향생각에 부질없이 기둥에 기대니,

白雲飛度酒船中

백운비도주선중

흰 구름은 술 싣고 가는 배를 지나 날아가네. 佔畢齋集卷之一

 

 

해설

이 시는 제천정에서 중추부사 송처관의 운()에 차운(次韻)한 홍겸선의 시에 화답한 것이다.

 

강바람이 거세어 꽃이 날리고 버들을 가르고 있는데, 저 멀리 흔들거리는 돛대를 가진 호화유람선이 떠 있다. 빨리 고향으로 가고픈 생각에 기둥에 기대고 있으니, 기생과 술을 실은 배 위로 흰 구름이 지나가고 있다(흰 구름은 靑雲에 대비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隱者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

 

김종직(金宗直)은 그의 제자들 가운데 도학(道學)에 치중하는 제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퇴계전서답이강이별지(答李剛而別紙), “다만 지금 점필재 전집에서 그것을 보니, 오직 시문을 제일의로 삼아 일찍이 이 학문과 이 도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훤당 金宏弼이 책임을 돌렸다[但今以佔畢公全集觀之, 惟以詩文爲第一義, 未嘗留意於此學此道. 而寒暄以是歸責.].”라고 기록되어 있다.

 

허균(許筠)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답이생서(答李生書)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언급하면서 김종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진덕여왕(眞德女王)의 시()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ㆍ정곡(鄭谷)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 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 가운데 농려(穠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澕)ㆍ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이제현(李齊賢)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이곡(李穀)이색(李穡)이 계승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ㆍ김구용(金九容)이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이색(李穡)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종직(金宗直)이 포은(圃隱)ㆍ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이행(李荇)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정사룡(鄭士龍)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해(康海)이몽양(李夢陽, 前七子詩文에 능함) 두 사람보다 못하다 하리오?

당세의 글하는 이는 문()최립(崔岦)을 추대하고 시()이달(李達)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권필(權韠)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이안눌(李安訥)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吾東僻在海隅, 唐以上文獻邈如. 雖乙支, 眞德之詩, 彙在史家,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 及羅季, 孤雲學士始大厥譽. 以今觀之, 文菲以萎; 詩粗以弱. 使在許鄭間, 亦形其醜, 乃欲使盛唐爭其工耶? 麗代知常, 足窺一斑, 亦晩李中穠麗者. 仁老奎報, 或淸或奇, 陳澕洪侃, 亦腴艶, 而俱不出長公度內耳. 及至益齋倡始, 牧繼躅, , 爲季葉名家. 逮國初, 三峯陽村, 獨擅其名, 文章至是, 始可稱達. 追琢炳烺, 足曰丕變, 而中興之功, 文靖爲鉅焉. 中間金文簡得圃陽之緖, 人謂大家. 只恨文竅之透不高. 其後容齋相詩入神, 鄭亦瞠乎其後. 蘇相又力振之, 玆數公, 使生中國, 則詎盡下於康李二公乎? 當今之業,, 文推崔東皐, 詩推李益之, 俱是千年以來絶調. 而儕類中汝章甚婉亮; 子敏甚淵伉; 此外則不能知也].”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 85~87

 

 

인용

작가의 이력 및 작품

우리 한시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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