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국 친구인 엄성에게 출처관에 대해 얘기한 이유
앞서 이 글의 1편과 2, 3, 4편이 대비적인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 단락은 2편의 내용을 잇는 반면, 3편과 4편과 대립한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홍대용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중국 강남의 선비들은 홍대용에게 심복心服(마음으로 감복함)하여 그를 대유大儒(큰 선비)로 떠받들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군자는 때를 살펴 벼슬을 하기도 하고 벼슬을 않고 처사處士로 살아가기도 하는 법(君子顯晦隨時)”이라는 말은 공자의 말에서 유래한다. 이후 유자儒者들은, 세상이 어지러워 도를 실현하기 어렵겠다고 판단되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만일 도를 실현할 만하다 싶으면 벼슬길에 나서는 것, 이것이 군자의 도리요 올바른 처세의 태도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왜 홍대용은 엄성에게 이를 환기시킨 걸까? 그리고 엄성이 홍대용의 이 말에서 깨달음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연암은 왜 굳이 이 이야기를 한 걸까?
홍대용은 비록 청나라와 중화 문명, 청나라와 한족의 인민, 청나라와 한족의 선비를 구분해 파악하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북학이라는 사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 자체에 대해서는 반감이 없지 않았다. 청나라는 한때 조선을 침략하여 큰 수모를 안겨 준 나라이고, 부녀를 비롯한 많은 조선 인민들을 강제로 붙잡아갔을 뿐더러 왕족과 사대부들을 인질로 끌고 가 억류하거나 처형한 바 있다. 비록 그 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런 역사적 기억은 사대부의 일원인 홍대용에게 있어, 그리고 연암에게 있어, 아직 망각되지 않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두 사람은 노론의 자제子弟였다. 물론 홍대용과 연암은 청나라에 대한 반감 때문에 무조건 중국과의 교류를 배격하거나 중국의 존재를 무시하는 보수 일변도의 경직된 입장에는 분명히 반대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에서 두 사람의 현실주의적 관점이 잘 확인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홍대용과 연암이 청나라에 대해 반감이 없었던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이 미묘한 지점을 우리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연암이 『열하일기』의 「허생전」이나 「호질 후기」나 「심세편審勢篇」 같은 글에서 표명해놓고 있는 청나라에 대한 반감과 당대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연암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녕 연암 심중의 말을 토로한 것이라 봐야 옳다. 그러므로 홍대용이 고금 인물들의 출처관出處觀을 환기시키며 엄성에게 벼슬길에 나아가지 말도록 권한 것, 그리고 스스로도 과거를 포기한 것 등은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당대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연유하는 행위들이라고 할 만하다. 홍대용이 엄성과 특히 가까웠던 것은 나이가 비슷해서 만이 아니라 이런 깊은 속내에서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 전문
인용
9. 홍대용의 신원(身元)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구
13. 총평
- 육비: 자가 기잠起潛이고 호는 소음篠飮이며 1719년생이다. [본문으로]
- 엄성: 자가 역암力闇이고 호는 철교鐵橋임 1732년생이다. [본문으로]
- 반정균: 자가 난공蘭公이고 호는 추루秋𢈢이며 1742년생이다. [본문으로]
- 유리창: 현재 중국 북경시北京市에 있는 문화의 거리다. 화평문 남쪽과 호방교虎坊橋 북쪽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 선무구宣武區에 속한다. 원元ㆍ명明 때 이곳에 유리가마 공장이 있었기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북경 외성外城의 상업이 날로 번창하여 한족 관리들이 선무문宣武門 밖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로써 외지고 쓸쓸했던 유리 공장 일대가 점차 번성하여 고서적ㆍ골동품ㆍ그림ㆍ탁본ㆍ문방사구 등을 판매하는 상점 거리가 형성되었으며, 상인ㆍ관리ㆍ학자ㆍ서생 등이 끊이지 않는 문화의 거리가 되었다. [본문으로]
- 만났다: 홍대용은 첫날은 엄성과 반정균을 만났으며, 나중에 엄성과 반정균의 소개로 육비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북경에서 6천 리 떨어진 항주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왔던 한족漢族 선비들인데, 홍대용은 이들과 약 한 달에 걸쳐 일곱 번을 만났다. [본문으로]
- 전당錢塘: 지금의 절강성 항주시杭州市의 옛 이름이다. ‘민閩’은 지금의 복건성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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