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임
임(稔)
벼가 한 번 익는 기간. 1년을 말한다.
임간완시평(林間阮始平)
진(晋) 나라 완함(阮咸). 그의 끝 벼슬이 시평태수(始平太守)로 숙부 완적(阮籍)과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다.
임간칠일(林間七逸)
진(晋) 나라 때에 일곱 사람이 특히 노장(老莊)의 사상을 숭상하면서 세속을 초월하여 흥이 나면 술이나 즐겨 마시며 서로 깊이 사귀어, 세상에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일컬어졌던 완적(阮籍)·혜강(嵇康)·산도(山濤)·상수(向秀)·유령(劉伶)·왕융(王戎)·완함(阮咸)을 말한다.
임갈굴정(臨渴掘井)
목이 말라서야 우물을 판다는 데서, 준비가 없이 갑자기 일을 당하고야 허둥지둥하는 태도를 말한다. / 유의어: 갈이천정(渴而穿井).
임강(任姜)
문왕의 모후인 태임(太任)과 무왕(武王)의 후비인 읍강(邑姜)을 합칭한 말이다.
임강왕(臨江王)
율태자(栗太子) 유영(劉榮)을 말한다. 기원전 149년 그의 모후 율비(栗妃)가 경제의 총애를 잃자 태자에서 폐위되어 임강왕이 되고 얼마 후에 태자의 자리에는 왕부인의 소생 유철(劉徹) 즉 한무제가 대신 섰다. 기원전 146년 종묘의 땅을 범한 죄명으로 하옥되어 중위로 있던 질도의 심문을 받다 자살했다.
임계병화(壬癸兵火)
임진년과 계사년의 난리로, 선조 25년(1592) 임진년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말한다.
임고(臨皐)
경상북도 영천(永川)의 고호(古號)이다.
임공(臨邛)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탁문군(卓文君)을 만나 몰래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 술집을 차려 놓고 살았던 곳이다. 『사기(史記)』 卷117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임공개(任公犗)
임공자가 큰 동아줄 낚시에 50마리의 불깐 소를 미끼로 삼아 회계산(會稽山) 위에서 동해 바다에 던져 굉장히 큰 고기를 잡아, 온 나라 사람들이 포식했다 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
임공객(臨邛客)
한(漢) 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실의에 잠겨 촉(蜀) 땅으로 돌아왔을 때 임공 영(臨邛令)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던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卷117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임공신과부(臨邛新寡婦)
임공은 지명.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임공에 가서 탁왕손(卓王孫)의 딸 문군(文君)이 새로 과부가 된 것을 알고 그날 밤 봉황가(鳳凰歌) 곡조로 거문고를 탔더니, 문군이 이 노래에 반하여 밤중에 도망쳐 상여에게 왔던 것을 말한다. 사마상여(司馬相如), 「금가(琴歌)」
임공육오(任公六鰲)
임공은 임(任) 나라 공자(公子)를 이름.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의하면, 임나라 공자가 매우 큰 낚시와 굵은 낚싯줄을 만들어 50마리의 소를 미끼로 꿰어, 회계산(會稽山)에 걸터앉아 동해(東海)에 낚싯대를 드리운 지 1년이 넘은 뒤에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큰 고기가 물었는데, 임나라 공자는 이 고기를 쪼개 말려서 포(脯)를 만들었던 바, 절강(浙江) 동쪽으로부터 창오산(蒼梧山)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고기를 실컷 먹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여섯 자라를 말한 것은, 동해의 오산(五山)을 등에 지고 있는 자라라는 뜻에서 그 고기의 큼을 비유한 것이다.
임공자(任公子)
전설 속에 나오는 물고기를 잘 잡는 사람으로, 일반적으로 세상을 초월한 고사(高士)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임공자가 큰 낚시와 굵은 줄을 준비한 다음 오십 마리의 황소를 미끼로 하여 회계산(會稽山)에 걸터앉아 동해에다 낚시를 던졌다.”고 하였다.
임공조(任公釣)
기백이 장하고 뜻이 웅대한 사람들끼리 의기투합하여 함께 모인 것을 말한다. 옛날 임공자(任公子)가 어마어마한 낚싯대를 만들어 50마리의 소를 미끼로 달아 놓은 뒤, 동해에 던져 큰 고기를 잡아 백성들을 실컷 먹인 이야기가 전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
임궁(琳宮)
도교(道敎)의 도원(道院)을 말한다.
임기응변(臨機應變)
그때그때 시기에 임하여 변화에 응한다. 즉, 그때 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알맞게 변화에 따라서 일을 적당히 처리한다. / 유의어: 기변(機變). 응변(應變).
임농탈경(臨農奪耕)
땅을 다 다듬고 이제 농사를 지으려 하니까 농사지을 땅을 빼앗아 간다. 오랫동안 애써 준비한 일을 못하게 빼앗는다는 말이다.
임당(任棠)
후한(後漢) 때 은사(隱士) 방삼(龐參)이 한양 태수(漢陽太守)가 되어 가서 임당을 찾아보니, 당이 더불어 말하지 않고 다만 커다란 부채 한 본(本)과 물 한 그릇을 문간 병풍 사이에 놓아두고 자기는 손자 아이를 안고 문간 아래 엎드려 있었다. 참이 그 속뜻을 생각하다가 한참 만에 말하되 “물은 나를 맑으라 함이요, 큰 부채 줄기를 뽑은 것은 나더러 강한 토호(土豪)들을 치라 함이요, 손자를 안고 문간에 있음은 나더러 문을 열고 외로운 사람들을 구휼(救恤)하라 함이다.”라 하고, 이에 탄식하고 돌아왔다. 『후한서(後漢書)』
임당권휼고(任棠勸恤孤)
임당(任棠)은 후한(後漢) 때 상규(上邽) 사람으로 숨어살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태수 방삼(龐參)이 처음으로 부임하여 그를 찾았는데, 당이 그와 말하지 않고 큰 부추 한 포기를 뽑아오고 물 한 사발을 창문 앞에 놓았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창 아래에 와서 엎드리니 방삼이 그 뜻을 알고 “물은 나를 청렴(淸)하게 하려는 것이고, 큰 부추는 나에게 호족을 억제시키려 한 것이며, 아이들을 안고 창 앞에 엎드린 것은 내가 문호를 개방하여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아주게 하려 한 것이다.”고 감탄했다는 고사가 있다.
임도상봉여마동(臨渡常逢呂馬童)
궁지에 몰렸을 때는 친구도 적으로 변한다. 항우(項羽)가 패하여 오강(烏江)을 건너려 할 때 항우의 옛날 친구였던 여마동(呂馬童)이 왕예(王翳)에게 저 사람이 바로 항우라고 가르쳐주어 그의 목을 베도록 했었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임랑(琳琅)
미옥(美玉), 무당 허리에 찬 옥장식이다.
임령곡(霖鈴曲)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남자의 노래를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촉(蜀) 땅으로 가다가 총희(寵姬) 양 귀비(楊貴妃)를 잃고 난 뒤, 잔도(棧道)에서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말방울 소리를 듣고는 양 귀비를 생각하며 ‘우림영곡(雨霖鈴曲)’을 지었다고 한다. 『명황잡록보유(明皇雜錄補遺)』
임로(任老)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을 가리킨다.
임률공(林栗攻)
임율은 송 나라 복청(福淸) 사람으로 벼슬이 병부 시랑(兵部侍郞)에 이르렀는데, 그는 주희(朱熹)가 『주역(周易)』을 논해 놓은 것이 불합리하다고 기록하였다. 『송사(宋史)』 卷三百九十四 「임률전(林栗傳)」
임리(臨履)
임심이박(臨深履薄)의 약칭으로 깊은 못가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은 듯 모든 일에 조심함을 말한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
임리(淋漓)
① (흠뻑 젖어) 뚝뚝 떨어지다
② (말·글·원기 따위가) 힘차다
③ 줄줄 흐르다
④ 통쾌하다 / 인용: 詩辨(허균)
임림(淋淋)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다.
임방(林放)
예의 근본을 물은 사람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계씨(季氏)가 태산(泰山)에 여제(旅祭)를 지내자, 공자가 계씨의 가신(家臣)으로 있던 자신의 제자 염유(冉有)에게 그것을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염유가 바로잡지 못하겠다고 답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일찍이 태산의 신령이 예의 근본을 물은 임방만도 못하다더냐.”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팔일(八佾)」
임방(任昉)
양(梁) 나라 때 태수(太守) 임방이 문장과 재주가 뛰어나고 성품이 고매하여 당시 이름난 사우(士友)들이 즐겨 따랐으며, 왕검(王儉)·심약(沈約) 같은 이들에게도 크게 추중(推重)되었다. 『양서(梁書)』 卷十四 임방전(任昉傳)
임방애객(任昉愛客)
양(梁) 나라 임방은 시(詩)·문(文)·필(筆)이 모두 당세에 뛰어난 재사로 이름 있는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누구나 그에게 인정을 받은 사람은 다 높이 발탁되기 때문에 수많은 선비들이 다 그를 좋아하여 따랐으므로 좌석에 손님들이 항상 수십 명씩이나 있었다. 『양서(梁書)』 卷十四 임방전(任昉傳)
임비(任鄙)
① 전국시대(戰國時代) 진(秦)의 역사(力士)를 말한다.
②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88년에 죽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진나라의 무장에 대역사다. 장사인 진무왕이 힘겨루기를 좋아했음으로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여 진무왕의 총애를 받았다. 진소양왕 때 상국 양후(穰侯)가 그를 한중태수로 천거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저리질(樗里疾)과 같이 ‘힘에는 임비이고 지혜는 저리’라고 칭했다.
임사(任姒)
태임(太任)과 태사(太姒)의 병칭. 태임은 문왕(文王)의 어머니이고, 태사는 문왕의 후비(后妃)인데, 다 같이 부덕(婦德)이 뛰어났다.
임사흥주(妊姒興周)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妊)과 무왕(武王)의 어머니 태사(太姒)의 부덕(婦德)에 힘입어 문왕 무왕의 정치가 일어났다고 한다.
임서하(林西河)
서하는 고려의 문인 임춘(林椿)의 호이다. 자는 기지(耆之).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며, 당시 이인로(李仁老)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이다. 이인로가 그의 유문(遺文)을 모아 6권을 만들어,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이라고 했다.
임석천(林石川)
조선조의 문신 임억령(林億齡)의 호가 석천(石川)이며, 강원도 관찰사, 담양 부사를 지냈다.
임성유(衽成帷)
옛날에 소진(蘇秦)이 사람이 많았으므로, 과장적 표현으로 이런 말이 있었다.
임숙영(任叔英)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무숙(茂叔), 호는 소암(疏庵). 인조 때에 지평(持平)을 지냈고, 문장이 뛰어나고 경사(經史)에 밝았다.
임순(紝紃)
길쌈과 바느질.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베를 짜고 실을 꼬며 여자의 일을 배워 의복을 마련한다[織紝組紃 學女事 共衣服].”고 하였다.
임시방편(臨時方便)
때에 임하여 쓰는 방법과 수단.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수단이나 방법.
임시변통(臨時變通)
그때 그때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함.
임심리박(臨深履薄)
깊은 못가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은 듯 모든 일에 조심함을 말한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
임안(臨安)
현재의 절강성(浙江省) 항주시(杭州市)로 오계(五季) 때 오월왕(吳越王) 전류(錢鏐)가 이곳에 도읍을 세웠으며 송(宋)의 문장가 소식(蘇軾)이 이곳에 오래 있었다.
임약(荏弱)
연약하다.
임여후(臨汝侯)
관영의 손자 관현(灌賢)의 봉호다.
임엽(荏苒)
‘세월이 덧없이 지나감’ 또는 ‘시간을 자꾸 끈다’는 뜻이다. / 인용: 正氣錄序(윤근수)
임영(臨瀛)
강릉(江陵)의 고호(古號)이다. / 인용: 鏡浦新亭記(안축), 泣別慈母(신사임당)
임예(臨睨)
엿보다.
임오구(林烏句)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은 노모(老母)에 대한 효성으로 이미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있었는데, 월과(月課)로 ‘포오시(哺烏詩)’를 지어 올리면서 “선비가 어버이를 집안에 모시고도, 가난해서 맛있는 음식 마련도 못하누나. 미물인 저 새도 사람을 감동시키나니, 반포(反哺)하는 숲 까마귀 눈물을 흘리게 하는구나[士有親在堂 貧無甘旨具 微禽亦動人 淚落林烏哺].”라고 하자, 인조(仁祖)가 이 시를 보고는 “한집안의 충효 정신이 사람을 감탄하게 한다. 해조로 하여금 미곡과 포목을 넉넉히 주도록 하라[一家忠孝 令人感歎 其令該曹優給米布].”고 분부하였다는 기록이, 윤증(尹拯)이 지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임오시(林烏詩)
박장원(朴長遠)이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에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 외조부인 충렬공(忠烈公) 심현(沈誢)을 따라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외조부모의 뒤를 따라 함께 순절(殉節)하려고 하다가 모친을 봉양하라는 외조부의 말을 듣고서 모친을 모시고 나온 뒤, 극진하게 봉양을 하였는데, 인조 18년(1640)에 포오(哺烏)라는 제목의 월과시(月課詩)를 지으면서 “선비가 어버이를 집에서 모시면서, 가난하여 맛있는 반찬 드리지도 못하누나. 미물인 저 새도 사람을 감동시키나니, 반포(反哺)하는 숲 까마귀 눈물을 흘리게 만드누나[士有親在堂 貧無甘旨具 微禽亦動人 淚落林烏哺]”라고 하자, 인조가 읽어 보고는 “한집안의 충효(忠孝)가 사람을 감탄케 한다.” 하고, 미포(米布)를 넉넉히 지급하게 한 고사가 있다.
임오포(林烏哺)
어버이를 봉양하는 자식의 효성을 말한다. 까마귀가 자라서는 어미를 먹여 주며 은혜를 갚는다고 한다. 『초학기(初學記)』 卷30 註
임우(霖雨)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킬 인재를 말한다. 『서경(書經)』 「열명(說命)」 上에 “큰 가뭄이 들면 내가 그대를 단비로 삼으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하였다.
임원육실(臨沅六實)
진 안제(晉安帝) 융안(隆安) 3년에 무릉 임원(武陵臨沅)에서 석류를 들여왔는데 한 꼭지에 열매가 여섯 개씩 붙어 있었다. 『송서(宋書)』 「부서지(符書志)」
임위궐(臨魏闕)
위궐(魏闕)은 우뚝 높은 궁궐이다. 임압(臨壓)은 궁궐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임유정(林惟正)
고려의 문신으로 벼슬이 국자좨주(國子祭酒)에 이르렀고, 저서에는 『백가의집(百家衣集)』이 있음.
임자심(任子深)
자심(子深)은 임원준(任元濬)의 자(字)이다.
임자정(任子瀞)
자정(子瀞)은 임광(任絖)의 자이다.
임전무퇴(臨戰無退)
전쟁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후퇴하지 말라!
임정여(任鄭余)
임과 정과 나라는 뜻으로, 임숙영(任叔英)과 정백창(鄭百昌)과 택당(澤堂) 자신을 가리킨다. 소시(蘇詩)에서 ‘진조여(陳趙予)’라고 쓴 것이 있다.
임제(臨濟)
① 임제종(臨齊宗)은 선종(禪宗)의 일파인데, 당(唐) 나라 의현(義玄)이 황얼(黃蘖)의 법을 이어 뒤에 진정부(眞定府) 임제원(臨濟院)에 있으면서 임제종을 창설했다.
②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 구현(丘縣) 동.
임종건(林宗巾)
임종(林宗)은 곽태의 자이다. 후한 때 고사(高士)인 곽태(郭太)가 일찍이 비를 맞아 두건의 일각(一角)이 꺾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일부러 두건의 일각을 꺾어서 임종건(林宗巾)이라 하였다.
임종절각건(林宗折角巾)
임종(林宗)은 동한(東漢)의 명사 곽태(郭泰)의 자. 그가 쓴 두건이 비에 젖어 한쪽이 꺾여 접혀졌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아 일부러 두건의 한쪽을 꺾어 임종건(林宗巾)이라 불렀다. 일반적으로 문사(文士)의 관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六 「곽태전(郭泰傳)」
임중불매신(林中不賣薪)
산 속에는 땔나무가 충분히 있어서 살 사람도 없으니 땔나무를 팔지 않는다. 물건은 그 쓰임이 유용한 곳에서 써야 함을 말한다.
임중역저상(林中易著象)
사슴 사냥을 말한다. 『주역(周易)』 「둔괘(屯卦)」 육삼효(六三爻)에 “사슴을 사냥하려고 산지기도 없이 홀로 숲 속으로 들어간다[卽鹿旡虞 惟入于林中].”라고 하였다.
임중지중조불여수중지일조(林中之衆鳥不如手中之一鳥)
숲 속의 많은 새들이 손 안에 한 마리 새보다 못하다.
임지(臨池)
글씨 공부를 말한다. 동한(東漢) 사람 장지(張芝)는 초성(草聖)의 칭호를 얻었는데 일찍이 못가에서 글씨를 익혀 못물이 먹물로 모두 새까맣게 되었다 한다.
임지공(任至公)
지극히 공평하게 내맡기다.
임참여간괴(林慚與澗愧)
공치규(孔稚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있는 말인데, 산에 숨었던 사람이 벼슬하러 세상에 나오면 숲과 시내도 부끄러워한다는 뜻이다.
임처사(林處士)
송(宋) 나라 때 매화와 학을 사랑한 임포(林逋)를 이른다.
임천(林泉)
산림천석(山林泉石)의 준말이다.
임천랍극(臨川蠟屐)
임천(臨川)은 남조(南朝) 송(宋)의 산수 시인(山水詩人)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그가 임천내사(臨川內史)로 있을 때 밀납을 바른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였다. 당 나라 원진(元稹)의 장경집(長慶集) 권18 봉화엄사공(奉和嚴司空) …… 등룡산락매대가연(登龍山落梅臺佳宴)에 “사공의 가을 생각 하늘가에 미치는데, 납극으로 산에 오름 국화 감상 위해서이네[謝公秋思眇天涯 蠟屐登高爲菊花].”라고 하였다.
임천성탄(臨川聖歎)
공자가 시냇가에서 흘러가는 물을 보고는 “하늘의 운행도 이와 같다 할 것이니, 밤이고 낮이고 그치지 않는도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탄식한 말이 있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임춘(林椿)
고려 때의 문인(文人)으로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이며, 특히 당시(唐詩)에 뛰어났었다.
임춘각(臨春閣)
남조(南朝) 진 후주(陳後主)의 화사했던 누각(樓閣). 여기서 비빈(妃嬪)·궁녀(宮女)들과 함께 가무성색(歌舞聲色)에 탐닉 되었다가 나라가 망했다.
임춘각(臨春閣)
진 후주(陳後主) 지덕(至德) 2년에 광소각(光昭閣) 앞에 결기(結綺)·임춘(臨春)·망선(望仙)의 세 누각(樓閣)을 세웠는데, 모두 침단향목(沈檀香木)으로 구조(構造)하였고 금은 보옥으로 장식하였으며, 기화요초(奇花瑤草)를 심어 사치를 다하였다. 후주(後主)는 임춘각에 거처하고 장 귀비(張貴妃)는 결기각에 거처하였으며, 공(龔)·공(孔) 두 귀빈(貴嬪)은 망선각에 거처하였다. 『남사(南史)』 「장귀비전(張貴妃傳)」
임치(臨淄)
①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로 춘추전국 시대 전 기간 동안 제나라의 도성이었다. 재여가 치박시의 대부가 되었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는 뜻으로 제나라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비중있는 인물이었음을 의미한다.
②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광요현(廣饒縣) 남쪽에 있는 곳으로 제(齊) 나라의 서울이었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임타(任他)
마음대로 하게 한다는 뜻이다. / 유의어: 종타(從他)·빙타(憑他).
임포(林逋)
송(宋) 나라 때의 은사(隱士)로 화정선생(和靖先生)이라고도 한다. 임포는 자가 군복(君復)인데,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해 살면서 20년 동안 성시(城市)로 나오지 않았다. 서화를 잘 그리고 시를 잘 지었으며,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두지 않은 채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기르면서 지냈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하였다. 『송사(宋史)』 卷457 隱逸列傳上 林逋
임포서호악(林逋西湖樂)
송(宋)의 은사(隱士).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20년 은거했다. 매화와 학을 몹시 사랑하였다.
임풍(林風)
한가한 은거 생활
임하부인(林下夫人)
으름. 산지(山地)의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르는 낙엽성(落葉性) 덩굴 식물(植物). 줄기에 매달린 채 익어서 껍질이 벌어진 모습이 여자(女子)의 음부(陰部)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하인(林下人)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쉬는 사람을 말한다. 당(唐)나라 중 영철(靈澈)이 위단(韋丹)에게 지어 준 시에 “서로 만나면 다 벼슬을 쉬고 간다지만, 임하(林下)에야 어디 한 사람이나 보이더냐[相逢盡道休官去 林下何會見一人].”라고 하였다.
임하풍(林下風)
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의 질녀로서 뛰어난 여류 문인인 사도운(謝道韞)에 대하여 어떤 이가 평하기를 “신정이 소산하고 명랑하여 임하의 풍기가 있다[神情散朗 故有林下風氣].”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卷九十六
임학보객(林鶴報客)
임학(林鶴)은 곧 송(宋) 나라 때 은군자(隱君子)로 불리던 임포(林逋)의 학을 이른다. 임포가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항상 두 마리의 학을 길렀는데, 임포가 항상 작은 배를 타고 서호(西湖)에서 노닐었으므로, 혹 손이 임포를 찾아올 경우, 동자(童子)가 학의 우리를 열어 주면 학들이 나가서 날므로 임포가 그것을 보고서 손이 온 것을 알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송사(宋史)』 卷四百五十七
임학지(林壑志)
숲속 산골에 은거하고픈 마음을 말한다.
임행인(林行人)
외교(外交)를 맡은 관명(官名)이다.
임헌시(臨軒試)
왕이 나와서 직접 보이는 시험을 말한다.
임화정(林和靖)
화정(和靖)은 송(宋) 나라 임포(林逋)의 시호이다. 성품이 담박하여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처자도 없이 서호(西湖)에 은거한 지 20여 년 동안 한 번도 성시(城市)에 나오지 않았다. 서화와 시문에 능하였으며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는 것을 취미로 삼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매화는 그의 아내이고 학은 그의 아들이라 일컬었다. 그의 매화시(梅花詩)에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에 비치고, 그윽한 향기는 황혼의 달에 풍기누나[踈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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