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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미완성 교향곡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미완성 교향곡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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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완성 교향곡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개혁 의지에 충만했던 정조(正祖)는 조선 역사상 보기 드문 출중한 군주였다. 비록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그에게 내내 심적ㆍ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한 탓에 다소 불안정한 행마를 보이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그가 설정한 왕국 건설의 목표는 옳았고, 그것을 위해 그가 추진한 여러 개혁도 대체로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꿈이 실현되려는 순간에 느닷없이 수구적인 자세로 돌아 버렸다는 점에서 그는 할아버지인 영조(英祖)와 닮은꼴이다. 조선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던 북학을 갑자기 거부하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기묘한 조치를 들고 나와 복고주의로 역행한 이유는 뭘까? 영조처럼 과속을 겁낸 탓일까? 개혁피로감일까?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퍼지는게 그토록 두려웠을까?

 

그런 이유들도 나름대로 일부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겠지만, 그보다는 바깥에서 원인을 찾아야할 듯싶다. 순전히 내부 요인만으로 정조(正祖)가 입장을 선회했다면 그 시점이 하필 1790년대 초반이라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전까지 한창 앞으로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뒤로 돌아선 데는 아마도 바깥, 즉 동북아의 정세 변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청나라는 건륭제(乾隆帝) 치세에서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강희제 시대부터 이어져온 동북아 르네상스가 정점에 달한 것도 그 시대였으며, 서쪽의 신장(新疆)과 시짱(西藏)까지 정복해서 오늘날 중국 영토가 조성된 것도 그 시대였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는 법, 오랜 세월 번영을 구가하던 청나라는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건륭제 치세의 후반기(즉 정조正祖의 치세). 우선 인구가 지나치게 늘었고(1700년에 2천만이던 인구가 100년 뒤에는 무려 3억으로 늘었는데, 이는 강희제의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조치와 대외 정복의 성과 덕분이다), 개국 초기 소수 만주족이 다수 한족을 지배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각종 제도가 무력해졌다(그 예가 만주족 고유의 군제인 팔기제의 붕괴다). 그에 따라 탐관오리가 늘어나고 온갖 부패가 사회를 얼룩지게 만들면서 청나라는 서서히 썩어갔다이런 공직자 부패 현상은 동양식 왕조의 생리이기도 한데,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제도가 청나라의 옹정제 때 시행된 양렴은제(養廉銀制). 지방관리들이 조세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농민들로부터 삥땅을 치는 행위가 만연하자 옹정제는 아예 미리 삥땅분을 관리들에게 수당으로 지급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그 수당이 바로 양렴은이다. ‘청렴을 배양하는 돈이라는 뜻이므로 얼핏 보면 좋은 취지인 듯 하지만 실은 관리들의 불법ㆍ탈법적인 수탈 행위를 도저히 근절할 수 없었던 탓에 인정한 제도였으니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다. 그래서 건륭제의 치세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반란이 다반사로 일어나게 된다.

 

 

그렇다 해도 외부적인 요인이 없었다면 청나라는 그런 대로 존속했을 것이다. 만약 더 이상 제국이 견디지 못할 정도에 이른다면 필경 다른 제국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그게 중국식 제국의 일반적인 진화 과정이다. 그런데 당시는 유럽 열강이 일제히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특히 인도를 정복한 영국은 모직물 수출이 여의치 않자 인도산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해서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청나라는 내외의 우환에 시달리면서 늙은 공룡이 되어간다. 이것이 바로 18세기 말 건륭제(乾隆帝) 치세 말기 중국의 사정이다.

 

정조(正祖)가 본받을 모델로 삼았던 인물은 둘이다. 하나는 역사적 인물로 300년 전 조선의 왕인 세조(世祖)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의 인물인 청나라의 건륭제. 그럴 정도로 청나라를 추종하고 있었으니 청나라가 급전직하로 몰락의 기운을 보이자 정조는 내심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더욱이 청나라에 파견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서양의 침략을 안내하는 앞잡이 역할을 한다는 것(이것은 사실이었다)에 생각이 미치자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인식이 달라진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정조가 개혁을 중단한 데는 필경 그러한 동북아 정세 변화, 청나라의 약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正祖)의 실험이 실패하리라는 것은 애초부터 예고된 결과였다고 봐야 할까?

 

사실 정조는 조선의 여느 임금들과는 달리 상당히 자주적인 면모를 보인 군주다. 그는 비록 청나라를 선진국으로 여기고 그 문물을 받아 들이려 노력했지만, 그것은 이적에게서도 배울 게 있다는 논리의 연장이었지 과거처럼 중국에 사대주의로 일관한 태도는 아니었다. 진경산수화로 대표되는 국화풍(國畵風)과 동국진체(東國眞體)로 대표되는 국서풍(國書風)을 널리 확산시킨 것이나, 1782년에 새로운 역법인 천세력(千歲曆, 나중에 만세력이 된다)을 제정한 것에서 그런 자주성을 읽을 수 있다(물론 그 바탕에 소중화 이념이 있음은 앞서 말한 바 있지만). 게다가 정조(正祖)는 문화군주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직접 주도할 만큼 해박한 문장 지식도 그렇거니와 그 자신이 그림을 즐겨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수묵화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마지막 실험에 실패함으로써 조선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그의 개혁 의지가 끝까지 지속되었더라면, 그의 왕국 실험이 성공했더라면 곧이어 다가올 황폐한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18006월 그가 병에 걸려 죽으면서 조선의 실험은 완전히 끝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아마 자신의 사후에 벌어지는 사태를 그가 미리 알았더라면 마흔여덟의 한창 나이에 죽는 것을 아쉬워했을지도 모르나, 사실 1794년 복고로 도는 순간부터 그의 정치적 생명은 이미 끝난 셈이었다.

 

 

문화군주의 풍모 다방면의 개혁을 선도한 군주라면 팔방미인일 것이다. 과연 정조는 시ㆍ서ㆍ화에 두루 능한 문화군주였다. 위 그림은 정조가 직접 그린 국화(위쪽)와 파초(아래쪽). 썩 잘된 작품 같지는 않지만, 비단이 아니라 종이에 그린 것으로 미루어보면 습작이었던 듯하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

반정의 예방조치

정조의 딜레마

미완성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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