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딜레마
규장각(奎章閣)을 정치 개혁의 실무자로 삼고, 실학자들에게는 전반적인 사회 개혁에 필요한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만들게 한다.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보수파의 반동에 대해서는 장용영(壯勇營)을 물리력으로 구축하고, 화성을 미연의 사태에 대비하는 대피처로 삼는다. 정조(正祖)의 이런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좋다고 해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대박이 터지려면 좋은 시나리오에 감독의 능력과 의지가 보태져야만 한다. 개혁 드라마의 모든 일을 도맡은 정조는 기획, 제작, 시나리오 작업까지 완벽하게 진행했으나 마지막 감독의 단계에서 무너진다. 조선의 마지막 실험이 실패의 조짐을 보이는 것은 이때부터다. 공교롭게도 그 단초는 그리스도교가 제공했다.
이수광(李睟光)과 소현세자가 서양의 이 새로운 종교를 조선에 처음 소개한 이래 그리스도교는 학문적으로만 연구되었을 뿐 신앙으로서 믿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조(英祖) 시대와는 달리 북학이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장려되는 정조의 치세에서는 점차 그리스도교를 종교로서 대하는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드디어 한반도 최초의 정식 그리스도교도가 탄생하는데, 그가 바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다.
그는 1783년에 서장관으로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가서 프랑스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성서와 십자가, 묵주 등을 가지고 귀국한다. 강력한 포교 종교를 믿게 되었으니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단연 포교다. 그에게서 감화를 입고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이벽(李檗, 1754~86), 그리고 정씨 삼형제 -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이 속속 그리스도교도로 개종한다. 물론 조선 정부에서는 아무리 북학을 배우는 것을 장려한다 해도 그리스도교마저 허용할 의지는 전혀 없다. 따라서 교도가 늘어날수록 충돌은 불가피해진다.
마침내 충돌의 계기가 생겨났다.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 사는 윤지충(尹持忠)이라는 선비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그리스도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게 그것이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대신들은 공서파(功西派)와 신서파(信西派)로 나뉘어 격론을 벌이게 된다. ‘공서’란 서학을 공격하자는 것이니 당연히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세력이고, 신서파는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묵인하자는 세력이다. 누가 이길까? 아무리 북학의 바람이 거세다지만 천 년이 넘도록 한반도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그리스도교가 인정될 수는 없다. 따라서 당연히 공서파의 승리여야겠지만 결과는 무승부다. 다시 당쟁이 재연될 것을 우려한 정조(正祖)가 상대적으로 열세인 신서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무승부를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 안에서의 승부는 그랬어도 밖에서는 그럴 수 없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독한 윤지충은 처형을 당함으로써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이승훈은 관직이 박탈된 뒤 신앙을 버리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물론 이승훈이 진정으로 배교(背敎)한 것은 아니다. 그의 세례명은 베드로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했던 실제의 베드로처럼 세 번이나 신앙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첫 번째는 1785년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다가 관헌에 적발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1790년에 베이징 주교가 조상 제사를 하지 말라고 명했을 때 그에 대한 반발로 배교했으며, 세 번째가 이번 진산 사건 때다. 이후 그는 다시 종교 활동을 하다가 결국 1801년에 순교한다】.
이것이 조선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박해 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인데, 진산에서 비롯되었기에 진산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대형사고를 면하고 사태는 그럭저럭 마무리되었으나 이 사건을 대하는 정조(正祖)의 심정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개혁은 지속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그리스도교마저 용인할 수는 없다(사실 그리스도교야말로 서학 중의 서학이었으니, 그런 점에서 보면 북학에 상당 부분 의지하는 그의 개혁론은 처음부터 모순이었던 셈이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학 이념에 기초한 왕국이지 당시 유럽에 즐비한 ‘서학 왕국’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개혁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그리스도교처럼 이질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방법은 없을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고심하던 그에게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개혁의 대세였던 북학을 위축시키고 육경학을 권장하는 방법이다.
성리학은 왕권보다 신권을 강조하고, 서학은 국가의 정체를 바꿀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개혁의 목표인 올바른 유교왕국을 건설하려면 성리학과 서학을 모두 배척할 수밖에 없다. 마침 성리학은 야당으로 물러앉았으니 이제 서학만 다스리면 된다. 1794년에 정조(正祖)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얄궂은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그런 의도에서다. 문체반정이라면 문체를 바로잡자는 뜻일 텐데, 갑자기 무슨 학술 운동이라도 벌이려는 걸까? 물론 그건 아니다. 북학의 분위기에서 당시 베스트셀러로서 널리 읽혔던 책 중에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있었다. 이 책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박지원(朴趾源)이 베이징에서 보고 접한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기행문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생동감 있는 이야기체로 되어 있어 재미있을 뿐 아니라 내용으로도 북학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 문체반정의 주요 타깃이 된 것은 바로 이 책이다. 단지 북학을 소개한다는 내용을 문제삼을 수는 없으므로 정조는 『열하일기』의 문체가 저속하다는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압력을 못 견딘 박지원은 반성문을 제출해야 했고, 규장각(奎章閣)의 실세이자 개혁의 주체였던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朴齊家)도 문체의 문제점이 적발되어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사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조는 저속한 문체를 쓰는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조정 대신들 중에도 그런 자가 있으면 승진을 시키지 않겠노라고 을러댔다. 나아가 그는 당시 청에서 유행하는 패관(稗官)류의 잡서들에 대해 수입 금지령을 내렸다【말뜻 그대로 보면 패관이란 정식 관리(학자)가 아닌 자를 뜻하는데, 이 말은 중국 고대 한나라의 역사가인 반고(班固, 32~92)가 처음 쓴 용어다. 그는 정식 학자가 아닌 사람이 멋대로 글을 짓거나 역사를 기록하는 행위를 경멸했다. 그는 “소설류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패관이 지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런 전통 때문에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는 20세기 전반기까지도 시만이 문학으로 인정되고 소설은 언제나 잡글로 취급되었다. 패관문학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30년대 국문학자 김태준이 쓴 『조선문학사』에서다. 그는 특히 고려시대의 문집들, 이를테면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이나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등을 패관문학으로 꼽았다. 그렇게 보수적인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김태준이 공산주의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점은 의외다】. 물론 진짜 의도는 더 이상 청나라의 북학 관련 문헌들을 수입하지 않겠다는 데 있다.
사실 그동안 북학이 용인되어 왔던 이유는 학문적으로 정조(正祖)의 성향이 노론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서 먼 탓도 있었다. 하긴, 왕권을 강화해서 새 왕국을 건설하려는 왕이 중국의 천자 아래 모든 사대부(士大夫)들이 같은 지위라고 주장하는 성리학을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성리학을 멀리 한다고 해서 유학 자체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정조가 좋아할 만한 유학의 갈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성리학 이전의 유학, 즉 육경학인데, 이것은 왕권을 신권보다 우위에 두는 사상일 뿐 아니라 당파적으로는 남인의 이데올로기다. 결국 정조가 문체반정을 통해 꾀한 것은 육경학의 학풍으로 되돌아가고 남인을 끌어들여 노론을 견제하려는 것이었다(이는 노론의 준동을 예방한다는 장용영(壯勇營)의 취지와도 부합된다).
과연 북학파의 저속한 문체를 바로잡게 한 뒤 정조(正祖)는 순정고문(醇正古文), 즉 옛날의 순수한 한문체를 널리 확산시키라는 명을 규장각(奎章閣)에 내린다. 물론 단순한 문체의 보수화가 아니다. 학문적으로는 실학을 포기하는 순간이며, 정치적으로는 개혁의 총기획자가 복고로 선회하는 순간이다.
▲ 최초의 성서 1900년에 간행된 한반도 최초의 『신약성서』다. 그리스도교는 정조(正祖)의 시대에 처음 들어왔고 정약종 등에 의해 성서의 일부가 번역되었으나 당시까지는 4대 복음서밖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천주실의』와 복음서만으로 새 종교가 뿌리를 내린 셈이니, 이미 조선에 기복신앙이 만연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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